제 5 장. 빙백마혼주(氷魄魔魂珠)
단목산산은 차분한 눈길로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제가 좌공자님을 뵙고자 한건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긴히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예요."
좌혼지는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녀의 두 눈이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한 사람을 급히 찾아 주십사 하는 거예요."
좌혼지는 별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그가 누구요?"
그녀는 짤막하게 말했다.
"무림제일신투(武林第一神偸)!"
순간, 좌혼지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소저가 말하는 사람은 혹시 옥수도(玉手盜) 소조귀(蘇朝貴)가 아니오?"
그녀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에요. 그 사람 외에는 당금 무림에서 감히 제일신투(第一神偸)라고 불릴만한 자가 없지요."
옥수도 소조귀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신투였다.
그는 훔치지 않는 게 없으며, 훔칠 수 없는 게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일면 투왕지왕(偸王之王) 神偸無敵)이라 불렀다.
헌데, 그녀가 무슨 일로 그를 찾고 있는단 말인가?
갑자기, 단목산산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자세하게 설명을 드려야 할 것 같군요."
그녀는 잠시 침음하다가 나직하되 또렷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 일의 발단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달 전, 단목세가의 가주인 신주검왕 단목자우는 우연히 황상(黃山)을 지나다가 어느 이름모를 고동(古洞)에서 한 구의 백골을 발견했다.
백골의 옆에는 하나의 옥함이 놓여 있었다.
헌데, 무심코 그 옥함을 연 단목자우는 그야말로 까무러치도록 놀라고 말았다.
그 옥함 속에는 한 장의 낡디낡은 양피지조각이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백년 전의 무적고수였던 천검성자 을지민의 은거지였던 천검동(天劍洞)의 지형을 적은 장보도였던 것이다.
이 뜻밖의 기연(奇緣)에 단목자우는 경악과 흥분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즉시 그 장보도를 가지고 단목세가로 돌아와 자세히 그것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천검동은 황산 내에 있으며, 그 입구에 천검성자가 외인(外人)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많은 기관을 설치해 놓은 것을 알아냈다.
그 기관은 실로 인간의 힘으로는 돌파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우내칠검주의 일인인 단목자우로써도 혼자의 힘으로는 그 기관을 뚫고 천검동으로 들어가기에 역부족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천검동의 기관을 뚫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기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백홍검과 빙백마혼주, 그리고 금루의였다.
단목자우는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 중 백홍검을 간신히 입수할 수 있었으나 나머지 두 개의 기보는 그 행방조차 알 수가 없었다.
설사 그가 세 가지 기보를 모두 입수한다 할지라도 그 혼자의 힘으로는 천검동에 들어가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단목자우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해냈다.
무림의 초절정고수 몇 명을 포섭하여 함께 천검동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암중으로 계속 두 개의 기보의 행방을 찾음과 동시에 품검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품검대회에서 서너 명의 절정고수를 선발한 후 그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동참할 것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헌데, 어찌된 일인지 품검대회가 아직 열리기도 전에 그토록 철저히 기밀을 유지했건만 천검동에 대한 소문이 전 무림에 퍼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단목자우가 품검대회에 상품으로 내건 백홍검이 천검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가지 기보 중의 하나라는 사실까지 밝혀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강호는 온통 일진광풍(一陣狂風)에 휩싸이고 말았다.
품검대회는 단순히 절정고수 몇 명을 선발하려는 단목자우의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온 천하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일대 무림성회(武林盛會)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이 이렇게까지 확산되자 단목자우로써도 부득이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품검대회를 그대로 강행하되 당초 서너 명을 선발하려던 방법대신 확실한 우승자를 가리기로 했다. 그래서 우승자에게 백홍검을 선사함과 아울러 천검동에 동행할 특권을 주기로 한 것이다.
"헌데 일주일 전에 아버님의 수하 중 한 사람이 빙백마혼주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단목산산은 두 눈을 별빛처럼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빙백마혼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동( )의 매화도인(梅花道人)이었어요.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급히 사람을 보내 매화도인을 이곳으로 초청하셨지요. 매화도인께서는 함께 천검동으로 가자는 아버님의 제안을 쾌히 수락하시고 빙백마혼주를 가지고 이곳으로 떠나셨어요."
좌혼지와 곽지산은 그녀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매화도인은 어제 본가로 오셨어요. 헌데 그분이 빙백마혼주를 꺼내보이려는 순간 그분은 그게 없어진 것을 발견하신 거지요."
곽지산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없어지다니... 그게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답니다. 그분은 떠나실 때 분명 빙백마혼주를 소지하고 계셨고 오는 도중에도 수시로 그것을 확인해 보셨답니다. 그런데도 이곳에 도착해보니 품안에 넣고 있던 물건이 사라진 거지요."
곽지산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혹시 그가 애초에 물건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게 아닐까?"
"그건 저희들도 확인을 해보았는데 확실히 매화도인이 공동산을 떠날 때는 빙백마혼주가 그의 품속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체 조심스런 성격이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그것을 평범한 야명주(夜明珠)로 분장해 놓았습니다. 본 세가에서도 이 일을 철저한 비밀에 붙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그래서 누군가가 그것을 야명주로 착각하고 훔쳐간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거지요."
곽지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옥수도 소조귀를 의심하는군."
그녀는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매화도인 같이 조심성이 많은 사람이 모르는 사이에 품속의 물건을 훔쳐갈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게다가 매화도인께서 물건을 잃어버린 곳이 이 근처인데 마침 이곳에서 소조귀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매화도인께 물어보았더니 어제 저의 집에 오기 직전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청의노인과 몸이 부딪친 적이 있다는군요. 그런데 그 청의노인의 인상착의가 소조귀와 일치했어요."
곽지산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렇다면 십중팔구 그 늙은 도적의 짓이겠군. 그는 자기가 호랑이 수염을 건드렸다는 것도 모르고 지금쯤 희희낙락하고 있겠군."
단목산산도 입가에 고소를 머금었다.
"이 일이밖에 새어나가게 되면 그는 당장 전 무림인들의 추적을 받게 될 거에요. 그가 아무리 무림제일의 신투라 해도 그렇게 되면 무사할 리가 없지요. 다행히 이 일은 본가에서도 극소수의 인물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가뜩이나 소란스러운 이곳이 북새통처럼 변해버렸을 거예요."
그때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좌혼지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헌데 그 일을 왜 내게 부탁하는 거요? 단목세가에도 소조귀를 추적할 인물은 많을 텐데."
단목산산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헌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요. 본가의 고수들 중 태반은 이미 황산에 가서 천검동 주변의 지형을 조사하고 있어요. 게다가..."
그녀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좌혼지를 바라보았다.
"암중으로 본가를 감시하는 눈들이 많기 때문에 섣불리 본가에서 소조귀를 추적하다가는 단번에 그들의 의심을 살 거에요. 그래서 부득불 저와 안면이 있는 좌공자님께 부탁을 드리는 거지요."
좌혼지는 그녀의 말이 상관천록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다.
상관천록이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그녀로서도 함부로 행동하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허나, 소조귀가 빙백마혼주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의 행방을 찾는 일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녀는 단지 안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중대한 일을 좌혼지에게 맡기는 것일까?
혹시 이런 일을 빌미로 좌혼지를 이번 일에 좀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좌혼지는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좌혼지의 시선을 받자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엷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녀는 감히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보지도 못하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살짝 내비치는 학같이 가녀린 그녀의 목덜미가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좌혼지는 그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그녀는...?)
곽지산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 있다가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나저나 소조귀의 행방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군. 그 늙은 생쥐는 노련하고 약삭빨라서 좀처럼 자신의 꼬리를 밝히지 않는데..."
그 말에 단목산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직하게 웃었다.
"호호... 그건 별로 걱정하실 게 없어요."
곽지산은 반색을 했다.
"그러면 그를 찾을 좋을 방법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앵두같은 입술을 살짝 열었다.
"빙백마혼주는 원래 천하에서 가장 한기(寒氣)가 강한 물건이에요. 그래서 웬만한 사람은 그 근처에만 가도 빙백마혼주에서 뿜어 나오는 한기 때문에 전신이 얼어붙게 되지요. 그래서 매화도인은 그걸 가져올 때 겉 표면에 일시적으로 한기를 제어하는 약물을 발라 놓았어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그것은 밀향초(蜜香草)라고 하는데 밀향초의 냄새는 특이해서 웬만큼 떨어진 곳에서도 그 냄새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지요. 그 냄새를 따라가시면 쉽게 소조귀를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곽지산이 궁금한 듯 물었다.
"밀향초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데 금방 알아볼 수 있단 말이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짙어졌다.
"밀향초는 동물의 분비액으로 만들기 때문에 심한 악취가 납니다."
곽지산은 그녀의 말뜻을 깨닫고 참지 못하고 껄껄 웃고 말았다.
"허허허... 그렇다면 그 늙은 도적놈이 나타나기만 하면 쌀통에 들어간 생쥐처럼 금세 알 수 있겠군 그래."
단목산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때 좌혼지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겠소. 그의 행방을 알게 되면 소저에게 연락을 하겠소."
단목산산은 그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좌공자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좌혼지는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감사는 무슨... 그보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단목산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좌혼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단목가주께서는 지금 이곳에 계시오?"
그녀는 잠깐 멈칫했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실은 아버님께서는 지금 황산에 가 계십니다."
좌호지는 가만히 있는데 곽지산이 오히려 조금 의외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산? 그렇다면 단목가주는 천검동에 있다는 말이오?"
"예. 아버님께선 세가의 다른 분들과 함께 천검동의 입구에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는 품검대회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셈이오?"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습니다."
곽지산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품검대회의 우승자는 천검동에 가지 못하오?"
"아닙니다. 이번 대회의 우승자를 비롯한 몇몇 분은 아버님께서 따로 사람을 시켜 황산으로 부르실겁니다."
그렇군."
곽지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번 대회는 다분히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한 것이겠군?"
단목산산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선배님의 놀라운 혜안은 속일 수가 없겠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세간의 이목이 너무 천검동에 쏠리면 일을 하는데 지장을 초래할 것이 염려되어 품검대회를 개최한 것이지요."
곽지산은 사정을 확연히 깨닫자 내심 탄성이 흘러나왔다.
단목자우는 품검대회에 무림인들의 신경이 집중한 사이 자신은 이미 사람들을 이끌고 천검동으로 가서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가지 기보 중 두 가지는 이미 입수했습니다. 백홍검과 금루의는 모두 아버님께서 황산으로 가지고 가셨지요. 이번 빙백마혼주도 입수했다면 인편을 통해 황산으로 보냈을 겁니다."
곽지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멍청히 있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 백홍검을 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소?"
그녀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럴리야 있습니까? 우승한 사람은 황산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 백홍검을 수여받게 되지요."
곽지산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짤막하게 탄성을 발했다.
"그렇군! 우승자가 만에 하나라도 이번 일에 참가하지 않을까봐 그런 편법을 쓴 것이겠군?"
그녀는 다시 말없이 웃고 있었다.
곽지산은 감탄한 표정이 되었다.
"과연 절묘한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획이로군. 앞문으로 북을 쳐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뒷문으로 은밀히 일을 추진하다니... 결국 이곳에 모인 군웅들은 헛물만 켠 꼴이 되는군."
그의 말에는 얼마쯤 비난하는 투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홍조가 조금 짙어졌다.
처음의 홍조가 부끄러움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번의 것은 미안해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이번 일은 워낙 중대한 일인지라 아버님께서도 고심 끝에 이런 방법을 생각하신 겁니다.
비록 정당한 일은 아니더라도 무림이 이 일로 혼란에 빠지는 것을 최소화하자는 생각이시지요."
그때, 좌혼지가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듣기로는 단목가주는 성품이 고지식해서 계략에는 약하다고 알고 있소. 아무래도 이번 일은 강남(江南)의 제일재녀(第一才女)라는 소저의 머리에서 나온 것 같은데 그렇지 않소?"
그녀의 얼굴이 아예 홍시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옷자락만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곽지산은 그제야 이번 단목세가의 행동이 모두 그녀의 생각에서 나온 계획임을 깨닫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갑자기 탄식을 토했다.
"내 채릉의 똑똑함을 감탄했었는데 소저에 비하니 그 아이는 아직 멀었구려. 소저와 같이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은 생각을 하다니 실로 놀라울 뿐이오."
송구스러움에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본의 아니게 여러 선배님들을 속이게 되어 소녀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군요.
헌데 채릉이라 하심은 혹시 철봉황 곽채릉 여협(女俠)이 아닌지..."
곽지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소. 그 아이는 과년한 내 딸아이오."
"아!"
단목산산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그러셨군요. 저는 그동안 곽여협의 명성을 귀가 따갑도록 듣고 흠모해마지 않았는데... 소녀의 미천한 재주로 어찌 감히 여중제일고수(女中第一高手)이신 따님께 비하겠습니까?"
곽지산은 그녀가 자신의 딸을 칭찬하자 조금 전의 서운했던 마음이 절로 가셔졌다.
그는 껄껄 웃으며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허... 노부가 그동안 병중화 단목소저의 이름을 듣고 반신반의했었는데 이제야 왜 소저가 일대재녀로 불리우는지 알겠구려."
단목산산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말씀 낮추십시오. 천하무림의 가장 윗 어른이신 환우삼기 중의 한 분이신 노선배님께서 소녀에게 말씀을 낮추지 않는 걸 아버님께서 아신다면 소녀를 몹시 꾸짖으실 겁니다."
"허허... 노부가 누군지 알고 있나?"
그녀는 더욱 정중하게 머리를 수그렸다.
"노선배님께서 삽십년 전에 같은 환우삼기 중의 한 분이신 대치도인과 칠주야(七晝夜)를 겨룬 것은 아직도 많은 무림인들 사이에 회자(膾炙)되고 있습니다. 노선배님께서는 염왕수(閻王愁) 곽지산, 곽대협(郭大俠)이 아니십니까?"
곽지산은 고소를 머금었다.
"모두 알고 있으니 부인할 수도 없겠군. 노부가 바로 염왕수라네."
그의 음성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만약 누군가가 그의 말을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염왕수(閻王愁)!
그야말로 무림의 최고 배분인 환우삼기 중에서도 첫째 둘째를 다투는 전대(前代)의 일대기인(一大奇人)이 아닌가?
환우삼기란 그 외에 대치도인 황대치와 천기사 종리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중 천기사 종리헌은 학식과 지혜로 명성을 떨치고 있거니와 대치도인과 염왕수는 탁월한 무공으로 천하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무림인들 사이에 그들 중 가장 강한 고수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당연히 대치도인과 염왕수로 압축되었다.
그 당시만 해도 어느 정도의 호승심(好勝心)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세인(世人)들의 부추김과 천하제일고수의 야망 때문에 서로 격돌하게 되었다.
그래서 삼십년 전, 형산의 축융봉에서 경천동지의 대격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무공은 실로 놀라워 가히 하늘도 꺼지고 땅도 무너질 무시무시한 격전이 무려 칠일 밤낮을 계속되었다.
허나, 그들은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칠일만에 완전히 탈진하여 물러서고 말았다.
그 뒤로 그들은 좀처럼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었다.
지난 삼십년 동안,
천하제일의 경공대가(輕功大家)이며 곤(棍)의 명인(名人)인 대치도인과 천하무적의 장법(章法)을 지닌 염왕수의 모습은 결코 나타난 적이 없었다.
헌데, 드디어 그중 한 사람이 다시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염왕수,
한때는 무적수(無敵手)라고도 불리웠던 곽지산은 온화한 표정으로 단목산산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이번에 강호에 나오길 잘했군. 뛰어난 젊은이들을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흥겨운 일이지."
단목산산은 곱게 웃었다.
"선배님의 말씀은 좌공자님을 두고 하시는 것 같군요."
곽지산은 힐끗 좌혼지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허허... 좌공자는 꼬리를 감춘 신룡(神龍)처럼 도저히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인물인지라 노부가 뭐라고 말할 수는 없네. 하지만 오늘 단목낭자를 본 것만으로도 노부는 크게 눈을 뜬 기분일세."
단목산산은 힐끔 좌혼지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수그렸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허나 좌혼지는 입가에 기이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너무도 담담해 아무도 그의 심중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문득 좌혼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이야기가 끝이 났으면 이만 가봐야겠소이다."
단목산산은 그의 얼굴 표정을 살펴보고 있다가 그가 일어서자 속으로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얼마쯤 서운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