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칼럼(20231015)
강춘근 목사(한국교회)
“한국교회 창립 24주년과 목사 안수 20주년 회고”
1998년 4월 5일 한국교회는 ‘한국에서 이스라엘까지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라는 모토로 인천의 서구 심곡동 지하빌라에서 가정교회로 시작됐다. 때는 1997년 11월 국가부도의 IMF사태가 일어난 직후였다. 필자는 1997년 12월 12일 이스라엘과 영국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다가 잠시 국내로 귀국한 상황에 있었던 한 여성과의 만남을 가진 후 2개월만에 쫒기듯이 37살, 36살이 결혼했다. 그리고 신학대학원 졸업과 결혼 그리고 사회복지대학원 입학이라는 큰 인생 이벤트를 3주간에 한꺼번에 몰아치웠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의 제물포항에 임신 2개월된 부인과 함께한 아펜젤러 감리교 선교사 그리고 언더우드 장로교 선교사의 조선선교가 시작된 때였다. 그날 이후 113년이 지난 그때 그분들의 심정으로 1998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교회의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한국선교 113년쯤에는 개교회의 부흥만을 위한 교회가 아닌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빚진 부채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국교회를 개척하여 그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그날은 사역 동반자가 된 아내 그리고 2명의 여학생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리며 가정교회로 한국교회의 첫 여정을 시작하였다.
1년 6개월 정도 가정교회를 통해 사역의 기초를 다져가던 중 20여평의 2층 공간을 임대하여 1999년 10월 3일 개천절날에 평소 기도하며 지내왔던 분들과 함께 동역자들 30여명이 모여 하나님께 부여받은 선교비젼을 나누며 설립예배를 드렸다. 경제적으로 충분하지 않은 조건과 상황에서 맨손으로 강대상을 만들고 책꽃이를 톱질하며 도서관 책장을 만들고 교회에 필요한 용구와 용품들을 손수 만들었다.
청소년기에 받은 영적 은혜의 경험으로 청소년 사역에 초점을 맞추며 청소년과 청년.대학생 선교 중심의 목회사역의 비전을 펼쳐갔다. 지역의 중.고등학생들을 봉고차로, 자전거로, 영화로, 책으로, 라면으로 만났다. 소장하고 있던 도서 4,000여 권으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문고사역과 함께 청소년들의 교육복지문화를 위한 “청소년 꿈터” 사역도 시작하였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개척한 시간들이 흐르면서 사역이 조금씩 안정되고 부흥의 동력을 마련해가고 있던 시기에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다.
교회개척 이후 2년 정도 지난 2001년 11월 말경 아내가 3개월 시한부 ‘간담도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며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를 정도로 큰 충격에 빠졌다. 이미 수술을 할 시기도 지났고 더욱이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상황과 경제적.심리적 여유도 없이 아내는 결혼한지 4년도 되지 않은 2002년 1월 17일 이른 새벽, 그날 봄을 부르는 촉촉한 빗소리를 들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며 소리없이 주님 품에 안겼다. 생전에 그렇게 사랑스러워했던 3살된 딸과 2살된 아들을 남겨두고 친정아버지가 있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에게로 이사를 떠났다.
결혼과 개척 그리고 학업을 병행하는 동안 두 아이의 출산과 양육 그리고 교회비전을 공유하며 평생 동반자로 여겼던 아내는 이렇게 밀물같이 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약 4년간의 결혼생활과 시한부 삶의 60여일의 시간은 나의 삶을 송두리채 흔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 시기에 양육했던 청년.대학생이 사모의 병을 위한 기도회를 하다가 남녀간 스캔들 문제가 발생하여 교회 구성원 모두가 통째로 시험에 들게 되었다.
시련이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교회 주변의 개발 문제로 건물 주인이 교회를 비워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필자는 앞 뒤 상황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교회 공간을 공사하던 중 유리 액자가 떨어져 이마를 28바늘이나 꿰매는 사고를 당했다. 또 아내가 곁을 떠난지 1년도 채되지 않은 2003년 1월경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느냐?고 의사에게 묻자 의사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 있다고 엄중하게 말하였다. 또 수술을 한 후에도 목소리를 잃을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사실 목회자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목회자로서 생명력이 끝나는 일이기에 두려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수술날을 잡은 3월 2일은 41살 생일날이었다. 그리고 박사과정 입학식날이기도 했다. 입학식 행사를 마치고 병원에 몸을 맡겼다. 성공적으로 수술이 마무리되었지만 수술 후에는 환센시병 환자처럼 쉰목소리 조차 나오지 않아 도저히 예배를 인도할 수 없어 친구 목사에게 예배 인도를 부탁했다. 이후 40여일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지만 강단을 비울 수 없었다. 4월 23일 목사안수식 날에 되어서야 조금씩 편한 목소리로 의사소통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이런 고난 가운데 필자는 새롭게 미래목회에 대한 방향을 수정하고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도와 선교에 목숨을 걸고 사역을 준비하였지만 목회상황이 여의치 않아 평소 사역과 관련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기독교사회복지와 사회선교를 통해 보다 긴 호흡으로 앞으로의 사역을 준비해 나갔다. 지역의 신학교와 대학에서 생계형 강의와 연구활동을 병행하며 교회를 꾸려갔다. 10년후를 도모하며 지역의 학교와 주민센터에서 여러 자치활동 단체 활동을 하면서 지역주민들을 만나 동네 이야기를 듣게되는 여러 정보가 교회의 기도제목이 되었다.
2003년 6월경 새롭게 이전한 공간에서 청소년과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 공간을 꾸며 다음해 2004년 2월 교회 부설기관으로 ‘한국민들레도서관’을 인천서구청에 등록 인가를 받았다. 지금은 매월 독서모임 및 독서동아리 활동 등을 통해 독서문화운동과 함께 다양한 인문학적 독서 프로그램을 개발해 지역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우수한 도서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작은도서관 운영 평가에 2023년 올해까지 연속 10년 동안 우수도서관으로 선정되어 지역사회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선한 영향력을 펼쳐가고 있다.
동시에 도서관 안에 교회가 있는 열린문화공간으로 지역사회의 열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코로나가 끝나갈 2021년 12월엔 인천 서구청으로부터 문화충전소로 지정받아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펼쳐가고 있다. 2005년에는 도서관 대표로 사회선교단 활동을 시작하였고, 이후 2016년도에 성결교단의 특수전도기관으로 승인받고 왕성한 사역을 하다가 2016년 제21차 사회선교단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사별 후 5년간 홀로 사역하다가 2006년 7월 신학교에서 만난 탈북민 출신 여성을 소개 받아 새 가정을 꾸렸다. 이후 2008년에는 한국노인복지센터(재가장기요양기관)를 부설 협력기관으로 세우고, 2015년에는 세 번째 부설기관으로 ‘한국웰다잉교육문화연구원’을 설치해 한국교회가 공유할 수 있는 죽음사역의 폭을 넓혀갔다. 아내는 지금은 폐쇄하였지만 15년여간 운영해온 노인복지센터와 도서관 사역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으며 북향민 사역과 통일선교 사역을 개척 당시때부터 꿈꾸어 온 비전을 조금씩 구체적으로 펼쳐나가고 있다.
필자는 지난 25년 여간의 목회 여정을 돌아볼 때 힘들고 어려웠지만 동시에 특별한 은총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었다. 작은교회 목회자로 사역의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럽고 죄송스런 심정으로 지금도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갔기에 힘들었지만 너무도 행복한 사역의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 후반전 25년의 사역이 남아있다고 생각되기에 지금도 교회개척을 위해 신학대학원에 입학했을 때의 3오(오직개척, 오직목회, 오직선교) 정신으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섬기는 사회선교행전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