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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문학관 수필창작교실 14기-12차시 습작품 종합(2020년 7월 27일)
1. 죽음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이귀호
최근 사회 지도층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보면서 이런 저런 감회에 젖는다. 지난 시절 생각한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 떠 올려본다.
첫 번째 단상
미국엔 자연의 대순환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운영하는 시체공원이 있다. 공원규모는 약 5만평이고 이곳엔 생전에 기증을 약속한 시체들로 가득 차 있다. 죽은 지 10년이 된 시체부터 불과 어제 들어온 시체들까지 시체들이 공원 이곳저곳에 늘려져 있다.
과학자들은 그 시체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걸로 하루일과를 보낸다. 시체가 들어오면 옷을 모두 벗기고 땅위에 놓는다. 그러면 어디서 왔는지 자연의 시체처리반이라고 부르는 구더기들이 몰려와 시신을 해체한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부패가 일어나고 그곳은 까만 흙으로 변한다. 어디서 날아 왔는지 꽃씨가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아무 일도 아닌 양 이렇게 자연은 태어나고 죽고를 무심히 반복할 뿐이다.
두 번째 단상
죽음명상캠프에 참여하였다. 주요 프로그램은 의식을 내려놓고 무의식세계로 명상에 드는 것이다. 무의식 세계에 깊이 빠지다 보면 의식은 잠이 들고 내 깊은 곳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죽음도 저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관조의 힘이 생긴다. 그 명상 상태에서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죽음을 체험한다. 가장 먼저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린다. 그러면서 마누라, 아이들, 친구들을 각각 소환하여 작별인사를 나누도록 안내한다. ‘굿 바이~’ 작별인사가 끝나면 관의 뚜껑이 닫히고 새로운 캄캄한 세상이 다가온다. 그 어둠 속을 한참 헤매다 보면 저 멀리에 불이 반짝인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한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죽음의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말이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이 단체가 스승으로 모시는 인도의 성자 오쇼 라지니쉬의 임종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물을 보여준다. 임종이 다가왔다. 스승의 임종을 앞두고 모인 제자들이 새로운 길에 나선 스승을 축복해준다. 슬픔 따위는 없다. 있다면 깊은 명상만 있을 뿐이다.
세 번째 단상
여긴 도시의 장례식장이다. 공교롭게도 오늘 방문하기로 한 빈소는 두 곳인데 두 곳 다 한 장례식장이에 있다. 그것도 바로 옆방이다.
한 집은 93세의 할머니가 돌아가신 빈소이고 다른 곳은 한참 일할 나이인 58세 남성의 빈소이다. 나이차이만큼 죽게 된 이력도 다르다. 할머니는 10년 정도 요양병원에 계시다 돌아 가셨고 남성고인은 1년 전에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집에서 요양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5일 전에 입원하여 어제 돌아가셨다. 예상과 달리 93세 할머니의 빈소는 손님들도 많지 않은 듯 보였고 상주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도 활기차지 않다. 그러나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조심스러웠던 58세 남성고인의 빈소분위기는 그러하지 않다. 미혼의 젊은 상주는 물론 50대 중반의 미망인도 고인을 담담하고 품위가 있다.
그 사연이 궁금했다. 할머니는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5년 전부터는 치매로 사람도 전혀 몰라보았다. 첨엔 4형제가 돌아가면서 수발을 하였는데 5년이 넘으니 결국 형제들도 피로가 쌓이면서 가벼운 다툼들이 생기곤 했다 한다.
반면 50대 후반 남성고인은 1년 전 췌장암 3기 판정을 받았고 그 후 본인이 며칠 고민하더니 ‘더 이상 치료를 안 받겠다’고 거부하면서 대신 ’내 하고 싶은 걸 할 테니 도와 달라’고 부탁하더란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던 딸은 ‘얼마 남지 않는 아빠와 함께 하겠다’면서 사표를 내고 집에 내려와 아빠와 함께 생활했다. 아빠와 함께 맛있는 음식도 해 먹고 카폐로 데이트도 다니고 보고 싶은 영화도 보았다. 아들은 3개월 전에 제대하였는데 그 아들과도 드라이브를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직장 생활하는 부인하고도 퇴근 후 저녁을 물리고 앉아 연애시절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이따금 찾아오는 신랑의 고통을 옆에서 보는 괴로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마지막 1년은 그 어떤 시간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부부생활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내일, 신랑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지만 이제 당당히 신랑을 보낼 수 있다고 하면서 엷은 미소를 보낸다.
과연 나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아름다운 마무리란 과연 무엇일까? 입은 다물어지고 내 머리 속엔 유유히 강물만 바다로 말 없이 흐른다.
2. 자책의 시간 /임성희
동네 도서관 글쓰기강좌에 간 일이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환영의 눈빛으로 내 어색함을 자연스럽게 해준 사람이 기억 속에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끝날 즈음 꼭 다시 오기를 바란다는 여운으로 한동안 그와 함께 했었다. 글쓰기 실력도 작가의 반열에 있었으며, 일등보다는 이등이 좋다며 항상 안 내하고 인도하는 자리에서 삶을 살겠다고 했다. 그의 참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어느 하늘에서 온 별인가 생각했다.
오래된 모임인데 점심약속을 했다. 모인장소에서 가까운 식당에 들어갔다. 사방이 벽이고 들어오는 문이 겨우 숨구멍이었다. 먹으면서도 창밖풍경을 보며 먹으면 왠지 맛이 있는 나다. 보이는 것이라곤 매번 보아오던 얼굴, 대화의 내용도 자주듣던 아들 딸 이야기, 음식이야기가 대부분이다. 3시간을 주고받으니 더 이상은 하고 일어서고 싶었다. 주인이 1시간 더 있어도 된다는 말에 모두 환영이다. 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못마땅한 표정의 일행은 따라 일어나며 투덜거린다. 밖은 햇살과 바람이 싱그러운 6월을 얘기하고 있었다. 돌아보니 나만 계절에 취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일행은 내 얼굴이 어떤 얼굴로 보여 졌을 까. 도서관 친구의 온화한 얼굴이 생각났다.
복지관 나이가 되어 가까운 복지관을 자주 이용한다. 노인이 노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봉사 중에도 빛나는 봉사이다. 그 중에 치매진단을 받은 어른들과 시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치매예방을 위해 설문지 조사도 했다.
조사에 응해주는 사람, 그런 병에 걸리지 않는다며 아 얘 손사f래를 치며 가는 사람, 또 어떤 사람은 해 주면 뭐 주느냐고도 한다. 한번 쯤 건강에 대해 점검해 보는 시간도 나쁘지 않을 텐데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미래 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4사람이 한조가 되어 일주일에 한번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복지관에 출입하는 입구에 책상을 놓고 그 위에 설문지가 있다.
있는 듯 없어 보였던 한사람이 앉아있는 것을 본 것은 끝날 시간이 가까워서다. 남자어른 한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지금 껏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설문지를 보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종이를 내어주기만 하고 읽어보고 예, 아니오에 표시 만하면 된다는 식이다.
앞으로 석 달 동안은 같은 일을 할 사람인데 라고 생각한 나는 인사도 나눌 겸 옆으로 다가갔다. 나이가 들면 뻔뻔하기는 한가보다. 먼저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해야 하는데 잊어버리는 것이 생활화 되다보니 순서가 바뀌었다.
“선생님, 설문지를 보고 내 앞에 와서 물어오는 사람은 그래도 고맙고 감사하던데요, 그냥 설문지만 내 밀지 마시고 같이 말이라도 나누면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을까요"
말도 없고 표정도 없다. 노숙자 같았다. 순간 ‘에쿠’ 순서가 바뀌었네. 이미 업질러진 물이다.
며칠이 지났다. 복지관에서 좀 뛴다는 사람이 내게 다가 앉더니 대뜸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데면서 책하듯이 말한다. 다시 재차 이름을 데면서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하며 나를 우습다는 듯 쳐다본다. "그 사람을 가르쳤어? 그 사람이 “서울대학 나온 사람이야”
나 역시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 여자는 왜 놀라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지가 뭔데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며 흥분 하더라는 것이다.
서울대학 나온 사람을 몰라보고 함부로 얘기하고.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데 바보 같은 사람을 보면 그렇게 살지 말라고, 같은 얘기를 오래 한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고. 나는 왜 마음대로 인가. 사람이 되는 길이 이렇게도 먼 것인 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자책의 시간을 가져보았다.
3. 트로이의 수레바퀴/오시안
16년이 지난 재개봉영화를 보면서 나는 왜 3200여년 전의 이야기를 아쉬워하는가? 고대 그리스의 영웅서사시 트로이 이야기이다.그때 트로이란 나라가 실제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트로이 목마가 세워졌다는 그 지역을 찾아내어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만들었다. 이러다보니 3200여년을 거치는 동안 그리스연합군과 트로이군의 전쟁은 신화속의 이야기로 쫓거나 강하게 부인할 수 없다.역사와 신화와 영화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영화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둘러싼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이 전쟁을 치른다. 세계 영화사들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명성에 걸맞게 워너브라더스는 장엄한 장례곡위에 ‘TROY’(트로이)를 보여준다.세상의 대륙을 다 통치하고 싶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은 그리스 메세나 ,아카디아. 에페이에 이어 테살리마저 깨끗하게 이기고자 한다. 오프닝 씬은 아가멤논이 이끄는 수만 대군이 그리스 테살리 벌판에 말굽소리로 먼지를 날리며 달려 온다.살육전은 피하고 싶어 최고의 전사끼리 결투를 벌이고,아가멤논이 고개를 돌려 ‘아킬레우스!’ 를 외친다. 프티아의 왕 펠레우스의 아들이며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에 빗대어 ‘아킬레우스 건’이란 단어도 생겼다.어느 순간부터 아킬레우스의 건은 아킬레우스의 이름을 밀어내었다.하지만 ‘트로이’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킬레우스가 되살아난다.가볍고 곱고 선명한 얕은 바다에서 진주를 줍는 여신인 어머니 곁에서 신탁을 듣는 그는 신의 외모로 서있다. 잘 갖춰진 외모와 그리스식 의상과 장신구로 시 시 각각 달리하여 보여지는 아킬레우스! 9척도 넘어보이는 장수 보그리우스를 몇걸음 달려가다 비격하여 일격에 급소를 찍어 바닥에 떨어지게 한다.90kg의 방패를 들고 공중을 날으는 배우 브래트 피트는16년 전이나 다시 본 지금이나 불멸의 배우이다.아킬레우스는 전쟁으로 인한 어둠과 분노를 전리품인 트로이의 여사제 브리세이스로 부터 여과해낸다. 그는 그녀를 지켜 주며 그의 중심에는 항상 그녀가 있다.그가 전쟁에 나타나지 않으면 전세는 트로이 군에 모아지고 그가 진영을 벅차고 나가면 승리는 그리스 연합군의 것이다.그러나 그는 파리스의 화살 5발을 맞고 최후의 무릎을 꿇었다.이 순간에서도 브리세이스에게 트로이는 끝났으니 어서 피해가라고 한다. 손길과 마음은 그녀의 머리결 향기에 머물면서! 지금껏 허물지못한 트로이 성도 손 안에 넘어왔지만 전쟁포로와 전쟁영웅의 사랑은 이겨 갈 수 없는 것이었다.
헬레네가 전쟁을 일으키고 브리세이스가 쥐락펴락 했으니 트로이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남녀의 애정문제가 시발점이었다.하지만 영화를 보면 전쟁은 아킬레우스의 건으로 불리는 모두의 약점 때문이었다.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그녀의 남편 메네라우스에게 귀환해 주지 못한 것은 모두의 합심 이다.헥토르와 프리아모스는 파리스가 다시 따라가 봉변을 당할 것이 염려되었다.스파르타의 왕비를 트로이의 왕자비로 마무리지을 수 밖에 없다.여기에 동생의 아내를 찾겠다고 합류한 아가멤논은 헬레네가 아니라 에게해를 빼앗고 싶다.아킬레우스는 자신의4촌 동생 페트로클루스의 복수를 위해 전쟁에 동참했다.
볼프강 베터젠 감독은 사실적인 영화를 만들어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거 같다. 전쟁의 자료 대부분이 벽화나 도자기의 그림으로만 남아 있지만 그리스 로마 유물 전문가를 섭외해 역사 고증과 고문을 받는다.총 7만 5천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한다.팔랑크스(밀집 장창 보병대)전투를 촬영하기전 800여명의 엑스트라들에게 3개월가량 군사 훈련을 시킨다. 트로이 목마도 고증에 따라 제작된다.그 결과 ‘트로이’의 전쟁 장면은 고대 전투를 제대로 보여준다.
군사역의 모든 배우가 투구를 필수적으로 착용한 것과 기원전 12세기이후 존재하였던 고품질의 무기등은 이영화 속에서 볼 수 없다.기병 방패 창 칼 망치 화살이 전부였지만 던진 칼이 눈에 박히는 전투 장면은 역설적이다. 학도병 수준의 사촌동생이 트로이 최고의 전사 헥토르에게 목 베여 죽자 전쟁의 명분이 다시 만들어진다.아킬레우스는 두 필의 검은 말이 끄는 이륜 전차에 헥토르의 시신을 매어 끌고 온다.트로이의 장남 트로이의 후계자 헥토르는 전차바퀴의 자욱을 지우며 조용히 따라 간다. 하지만 불사신 아킬레우스도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를 화살에 맞아 죽는다. 형인 헥토르의 도움으로 메네라우스에게 목숨을 구한 파리스가 1급 궁수로 실력을 갖추고 그의 발뒤꿈치를 쏘았다.
디렉터스 컷으로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동안 감동은 계속 이어졌지만 대미(大尾)는 프리아모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오는 시간이다.아킬레우스를 찾아 와 차마 하기 힘든 일을 한다. 아들을 죽인 자의 양손에 입을 맞추며 적에게도 호의를 베풀어달라 한다.아버지의 지대한 사랑이 함께 하는 순간이다.
”내가 죽음을 겁내겠나”
“합당한 장례는 치러야 되잖겠나 돌려주게” 이렇게 시신을 찾아오며 트로이의 장례기간 12일 동안은 휴전 한다.왕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해결점을 찾는 용기를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다.물론 인륜적인 용기이다.적에게도 마음과 가슴을 열어야 호의를 받는다.10년전에 80여세의 나이로 사망한 배우 피터 오툴이 아라비아의 로렌스 장교에 이어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으로 영웅의 의미를 남긴다. 이타카 왕 오디세이가 목마를 만들고 그리스연합군이 승리 하기 까지 영화에서 촬영지 몰타섬 해변은 시신들을 태워 밝힌 불로 가슴을 아리게 한다. 파리스와 헬레네는 밀실통로와 강을 건너 아이다로 간다. 트로이의 시국검과 함께!
신의 아들이기도 한 아킬리우스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 된다.그 다음 목숨을 잃을 신탁을 어머니에게 받았다 아폴로 신전을 모독하여 벌을 받아 죽은 것은 아닌지 생각도 든다.신화에서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와 결혼하고 그역시 전쟁이 끝날 무렵에 필록테테스의 독화살을 맞고 죽는다.트로이 이륜 전차의 수레바퀴는 초대형 목마를 벗어나 운명과 숙명을 끝없이 이어간다.
트로이 전쟁안에는 쓸 수 없는 절망과 우아함이 함께 한다.마치 먼셀의 등색상면 축의 술렁이는 청색같다.어린 페트로클루스가 전사하자 헥토르는 적을 위해 시신을 수습할 공격 유보를 내렸다.아킬레우스도 적군의 왕에게 아들의 시신을 씻길 장례기일을 주었다.전쟁포로에게 자유를 준다.그리고 다시 그 사랑을 찾아 지키려 적의 성벽을 타고 오른다.지켜 주고 싶은 열망들이 더할 수 없이 큰 영화이다.어찌 그리스의 코스튬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주(駐)우간다 터키대사 야우잘프가 대사관의 터키공화국수립일 공식행사 때 입은 옷때문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는 기사를 보고 웃었다. 로마 시대 코스튬처럼 보이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다.
4. 天福 올케 / 변미순
1) 친정 오형제가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무슨 오기도 아니고 엉뚱한 제안에 난 어안이벙벙하며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약간 불안하였던 형제들은 함께하자는 회의를 자주 하였고, 결국 나만 승낙하면 대가족으로 사는 것이 통과된다며 가족회의 동참과 동의하라는 압박이 매일 계속되었다.
2) 그렇게 반 농담처럼 시작된 생활이 올해 16년차의 삶으로 현재 진행형이다. 수필 공부방에서 아무리 발가벗기를 요구하여도 다 말하지 못하는 아픔도 가득하지만 모여 사는 그날부터 1년 간은 거의 매일을 잔치하듯 보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내내 모여살기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고 속상한 일만 일어났고, 식구들 하나둘씩 힘들어 하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3) 한 달에 한번 가족회의를 하면서 서로 한 달동안 섭섭하고, 잘못한 일을 토로하여 조금씩 나아가자는 의미의 시간은 오히려 더 독이 되어갔었다. 어쩌면 조만간 뿔뿔이 헤어질지도 모르겠다. 모이지 않았을 때보다 관계는 더 악화될 듯하였다.
4) 방향을 바꾸었다. 회의 때 섭섭하고 잘못을 서로 지적하는 것보다 한 달 동안 어떤 일로 누구에게 고맙거나 서로 칭찬해주는 회의로 바꾸었다. "큰소리로 인사해주어 좋았다. 청소같이 해 주어 고마웠다. 차를 태워주시어 감사합니다." 등등 서로에게 좋았던 이야기만 하기로 했다.
5) 이것은 정말 좋은 방책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정확하였다. 우리는 서로에게 훌륭한 고래 조련사가 되어갔고, 멋지게 춤추는 고래가 되어갔다. 모든 일에 무한 긍정의 태도가 생겼고, 서로 주고받는 응원단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은 자신감이 생겼고, 대가족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큰 힘이 생겼고, 좋은 방향으로 기운이 도는 집이 되어 갔다.
6) 게으르고, 이기주의고, 비난주의적인 성향들이 차츰 부지런하고, 배려하고, 인정하며 함께 가는 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런 자세와 생활태도는 어른들이 배우고 알아가는 속도보다 아이들은 훨씬 빨랐고, 척척이었다. 심지어 어른들의 나쁜 자세를 아이들로부터 지적받기도 하였다.
7) 그러는 중에서도 가장 힘든 사람은 우리집 큰 올케이다. 박사과정할 때 나의 자식들까지 보살펴준 어린 색시가 나이가 들고, 자신의 자식까지 생겼으나 정작 시누의 갚음은커녕 오히려 시누이, 시매부까지 모시고 살아야하는 환경이 얼마나 숨막히고 힘들었을까. 큰시누, 중간시누, 막내시누까지 남편의 누나이니 올케는 큰소리 한번 내지도 못하고, 주눅이 들고, 가부장적인 나의 큰남동생의 엄명에 따른 일이라 싫다는 내색도 마음대로 못하는 지경이었다.
8) 시누이들은 돌아가며 올케의 단점만 논하는 사람이되어 관계는 더 악화일로였다. 여동생들에게 절대 올케의 단점을 논하지도, 말하지도 말라는 엄명을 내렸으나 여동생과의 마찰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내가 여동생과 단판을 지었고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맹세되었다.
9) 큰집, 이모집, 외숙모집이 집이 모두 가까이에 살았다. 초복이면 시부모님께서 하시던 수박돌리기를 올케가 혼자 이어가고 있었다. 더운날 혼자 아등바등 다니는 그 길을 그동안 우리는 의례히 하는 거라고 그냥 방관자가 되어 보고만 있었다.
10) 그러고보니 우리 큰 올케는 무한 착한 사람이었다. 어머니까지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첫해 “부모없이 형제분들 모두 고아네요.” 하면서 대표로 맏시누이인 나에게 화장품을 선물하며 “제겐 돌아가신 시부모님 대신 형님께 드립니다.” 하였다.
11) 내가 외손녀를 보면서 할머니가 되었다며 할머니 된 기념이라며 예쁜 귀걸이도 선물하였다. 옥수수 좋아하는 큰 형님이라며 옥수수도 삶아 내 방에 가만히 들여놓곤 하였다. 남동생이야 자기 핏줄 5형제가 독수리5형제이든, 병아리 5마리이든 좋고, 다정하겠지만 올케는 무슨 낙이 있어 이제껏 묵묵부답이었을까?
12) 너무 부끄러웠다. 그동안 나만 생각하였다. 훤칠한 키에 예쁘기까지 한 사람이 저렇게 착하게 우리의 대가족을 버팀하고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잘한 줄만 알았다. 팔이 안으로 굽어 내 남동생이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왔다.
13) 실은 이 집안의 안주인 큰 올케의 무한한 선함이 밑바닥에 깔려 어떤 일이 생겨도 깨어지지 않는 대리석처럼 있었기 때문이다. 올케의 아우라가 대가족의 울타리었고, 맛을 우려내는 씨간장이었다. 게다가 음식까지 못하는게 없는 실력자이니 어디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주부고 맏종부였다.
14)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대가족은 더 평화로운 집이 되어갔다. 귀한 성품을 가진 올케를 귀하게 여기니 올케는 더 잘하려 용쓰는 사람이었다. 세심하기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보다 먼저 떠난 딸아이의 제사에는 그냥 간소하게 좋아했던 전기통닭 구이랑 술한잔만 놓자해도 십년을 빠트리지 않고 갖은 나물에 탕국을 끓여 주었다. 엄마인 나보다 더 애잔하게 딸아이를 그리워해 주었다.
15) 돌아보니 나의 人福이 天福인가 싶다. 돌아가셨으나 아버지, 어머니의 좋은 성품을 받아 내 형제자매가 같이 사는 것이 허락되었고, 또한 큰 올케가 우리집으로 와서 대가족의 평화와 행복이 이루어져 왔다. 올케의 장점을 적는 것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살아가며 내내 올케와 더불어 행복할 것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5. 아버지의 소주잔은 맥주잔 / 박정애
언니는 그냥 언닌데 오빠는 꼭 큰 오빠,짝은 오빠다.
그중 큰오빠는 막내인 내 눈에 늘 너무 근사했다.
대체, 뭘 알고나 그랬을까.
어린 시절 나는 '큰오빠 같은 남자한테 시집 갈 거야'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학원시간 급해도 동생 들 위해 개나리소반에 정갈히 상 차려 보자기 덮어놓고
운동화 꿰어 차고 뛰어가던 오빠의 뒷모습은 어린 눈에도 오랫동안 바라보게 했다.
학창 시절 내내 우수한 성적으로 수많은 상장을 받아오더니, 상고 졸업반 때는
전교에서 두 명 뽑혀간 은행을 갔을 때 우리 가족은 큰오빠니까 당연 하다는 듯 덤덤히 기뻤다.
은행원 생활 꼭 10년을 채우고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우리가족 모두는
잘할 거라고 믿었고 사실 그러했다.
그런데, 우리 4남매가 어릴 때부터 잡기에 능했던 이유에서 였을까 ?
100미터를 13초에 주파하여 당시 육상 부 코치의 입단권유를 엄청 받았던 작은오빠가 달리기외엔 특별한 재주가 없다 뿐 큰오빠나 언니나 나는 오밀조밀 여러 가지 잡기에 아주 능한 편이다.
어쩌면 그것이 원인의 한 부분이었을까?
큰오빠는 처음 시작한 사업이 큰 고비 없이 잘되고 크게 신경쓸 일이 없어지고 나니
도박을 시작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나타난 사채업자 들이 집으로 찾아오고 나서야 가족들은 알게되었고,
그리고 큰오빠는 사라졌다.
법적으로 도박빚은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만 아버지는 남의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사채업자들을 차례로 불러 변제하셨다.
(고 당시에는 생각하셨다.)
그 이후 착한 사채업자인지 아버지와 얘기를 한참하고선 나타나지 않은 사람도 있고 작은 외삼촌이 해결해 준 건도 있다.
큰오빠는 형부에게서 직장인 대출을, 작은오빠 에게 선 신혼집 담보대출을, 받아서
사라진 상태였지만 우리는 누구하나 한번 도 큰오빠를 원망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엄마가 하염없이 가슴을 두드리시면 나는 또 큰오빠 친구들 에게 울먹
이며 오빠 소식을 수소문 하곤 했다.
그때 큰오빠를 찾아 헤매던 낯선 골목들의 그 깊은 초록과 어두운 보랏빛의 선 들은
내 안 깊은곳 에서 풀썩이다가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로 언젠가는
반드시 존재를 드러낼 것임을 안다.
매일아침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단숨에 드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 아버지는 단 한번도 큰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다.
큰오빠의 부재 5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큰올케의 손을 잡고 그간 마음 고생시켜 미안 하다고ᆢ 좋은 사람 이라니 잘 살아라 하시며 새살림을 내어주셨다.
그리고 큰오빠의 부재가 10년을 넘어가고 있을때 아버지가 아프셨다.
형부는 서울에..언니는 또 다른 이유로, 작은오빠와 작은올케는 큰오빠가 너무 거덜 내버려서 우리는 각자 버티고 있는데 아버지가 덜컥 아프시니 곁에서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나는 큰오빠가 빨리 돌아 왔으면, 싶은 생각 뿐이었다.
다시 오빠를 찾으러 나섰다.
오빠 사진을 들고 오빠 흔적이라도 보였다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시간이 몇시가 되었든 길을 나섰다.
길이 있을것 같지 않는 곳에 길이 또 이어지고 여인숙이라고 쓰인 간판에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던곳에 사람들은 모두 피로해 보이고 불친절하고 거칠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수 없을까봐 가방끈을 쥔 손에
손톱이 파고 드는것도 몰랐다.
'오빠야 .내 무섭다..빨리좀 와..'
무표정한 사람들을 등지며, 구절양장 같은 길들을 돌고돌며 되뇌이던 주문 덕분인지 며칠후 기적처럼 12년만에 큰오빠가 집에왔다.
아버지는 큰오빠를 기다리고 계셨던 걸까?
오빠가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3개월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젊은시절을 도박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온 큰오빠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마음잡고 열심히 살아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렇게 무책임하게 인생을 살았던사람이 일이 술술 잘풀리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ᆢ ᆢ ᆢ
공부 잘했던 큰오빠는 한번만에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을 했고 출퇴근용으로 필요해서 오토바이를 샀단다.
그 오토바이를 등록하는데 내 명의가 필요하단다.
나는 그저 신분증을 챙긴다.
큰 오빠니까.
6. 고택을 읽다 /박희주
❶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 마을에서 만난 고샅길. 좁은 골목에서 만난 토석담은 세상의 욕심을 버린 듯 정갈하다. 다시 한 번 꺾어지는 막다른 골목 끝에 다다르자 솟을 대문이 눈길을 잡는다. 이토록 깊숙한 곳에 머문 집주인은 누굴까. 고개를 들자 편액이 눈인사로 손님을 맞는다. 구름 운(雲)산등성이 강(岡), 운강고택이다.
❷안내판이 마중 나온 청지기처럼 대충의 설명을 펼치고 서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위치하였으며,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섶마리, 섶말 등으로 불린 신지리는 박하담이 무오사화를 겪은 뒤 벼슬을 사양하고 들어와 살며 밀양 박씨의 집성촌이 된 곳. 여기에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운강 박시묵이 1824년 다시 중건한 가옥이다. 운강이라는 당호처럼 산등성이의 구름으로 살고자 했던 선비는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살며시 문지방을 넘자 사랑채의 문이 열리며 금방이라도 집주인이 버선발로 반길 듯하다.
❸넓은 마당을 가운데 놓고 건축물이 빙 둘러서 있다. 왼쪽에 당당하게 자리한 사랑채는 세월을 이겨낸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며 나를 툇마루에 앉힌다. 문살에 배어있던 선생의 탄식 소리가 몸을 일으킨다. 당시 고을에는 강의가 끊어진지 오래였다. 선비가 뜻을 품어도 훌륭한 스승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늙을 때까지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누추한 오막살이에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여든여덟 칸의 집주인은 마침내 만석의 재산을 헐어 서원을 지었다. 학비지원은 물론이고 숙식까지 제공하여 학생들은 학문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 조선의 선비로서 쉽지 않았을 도전. 꽁꽁 얼어버린 강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생과 마주선다. 이백년이라는 시간의 다리를 건너온 그의 열정은 아직도 넓은 집에 가득하다.
❹고택에서 운강의 마음을 닮은 어머니를 만난다. 몰락한 양반가의 며느리로 고달프게 살았으나 자식교육을 위해 전부를 걸었던 여인. 가족의 생계를 위해 논밭을 들락거리는 어머니의 발바닥은 늘 흙투성이였다. 희멀건 죽으로 허기를 달래야 하는 가난 앞에서는 속무무책이었다. 앞날을 도모하며 단봇짐을 꾸렸다. 교육만이 딸을 수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는 믿음이 단단했으므로. 도시는 어머니에게 사하라 사막처럼 멀고도 생경한 곳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아버지를 부축하며 오아시스를 찾아 나선 낙타처럼 묵묵히 길을 걸었다.
❺딸들은 대충 고등학교만 졸업시키면 된다는 아버지의 철학은 확고했다. 어머니의 아슬아슬한 사막여행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고함은 수시로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위해 모래바람에 맞섰다. 결코 눈을 크게 뜨지 않았으며 방향성을 잃지 않기 위해 먼 곳을 응시하며 걸었다. 운강 선생이 천금을 들여 교육의 길을 열었듯 여인은 손등이 갈라지고 손톱 밑에 검은 물이 들도록 온 마음을 다해 나에게 공을 들였다.
❻억척스런 어머니의 뒷바라지 덕분에 나는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 시절 어머니는 찬거리가 담긴 광주리를 이고서 자취방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극성스럽다는 주변의 타박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던 그 모습이 마음에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나는 운강 선생과 무슨 인연으로 지금 이 고택에서 서성이며, 아직도 비 내리면 처마가 되려고 달려오시는 어머니를 왜 이생에서 만났을까.
❼내 삶의 방향성을 찾아 나서듯 발길을 옮기는데 사랑채 옆의 꽃담이 옷자락을 잡는다. 주인을 닮은 듯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막돌을 이용하여 얼마간 쌓아 올린 다음, 기와 조각을 박고 사이사이에 백회를 발라 만들었다. 꽃무늬와 함께 ‘길할 길(吉)’자가 그려진 꽃담은 안채와 사랑채의 경계에서 선 화방벽이다. 불이 났을 때 불길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한 꽃담은 고택의 은밀한 사연을 얼마나 곰삭였을까.
❽사랑채와 안채의 경계선으로 살아온 꽃담. 예의범절과 현모양처의 도리를 실천해야하는 규방의 고된 숨소리와 시부모에 대한 효성을 따라야하는 여인의 고달픈 속울음을 꽃담이 숨겨주었으리라. 삶이란 세도가는 세도가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모두들 그 나름대로 다 고단한 것이기에 얼마나 ‘길(吉)’을 바랐을 것인가. 그러나 천석군 천 가지 걱정, 만석군 만 가지 걱정이라고 하였으니 사랑채의 부대낌도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꽃담은 넘어오는 사랑채의 고민 소리를 다듬어서 안채로 전하지 않았을까.
❾어머니는 이 집의 꽃담처럼 아버지와 딸 사이에 선 화방벽이었다. 귀한 자손으로 자란 아버지는 성격이 급하고 마음에 불이 쉽사리 붙었다. 모닥불, 장작불, 산불 등 형태를 달리하는 불이므로 자칫 어줍잖게 대응하면 오히려 불길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발화점도 죽 끓듯 변덕스러웠다. 성냥골, 종이, 나무를 가열하면 성냥골이 가장 먼저 타고, 종이가 그 다음에 타며, 나무는 불이 붙지 않는다. 아버지의 발화점은 성냥골보다도 낮다가도 나무보다 높을 때도 있었다.
⑩철없던 시절, 사사건건 눈을 부라리는 젊은 아버지가 무서우면서도 밉상스러웠다. 악을 쓰며 맞서다가 내쫓기는 날엔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갈았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이며 일기장에 원망의 단어를 빼곡하게 쏟아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불끄기에 바빴고 어린 딸의 상처를 보살피느라 분주했다. 나도 자식을 길러보니 부모님의 마음이 모두 읽히는 것을. 그 때는 몰랐다. 아마도 어머니가 없었다면 아버지와 나는 서로가 뿜어대는 불길에 검은 재로 변했을 것이다.
⑪걱정거리 없는 집안이 어디 있으며 고달프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꽃담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촐한 모습이 달빛 아래 정안수처럼 단아하다. 칼칼한 사대부의 고택을 읽으며 수 백 년을 살아온 꽃담에서 살아갈 마음을 배운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음에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 이상적 선생처럼 고택에 기대어 운강의 마음을 읽는다.
⑫ 백마 타고 올 초인을 위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던 어느 시인처럼 교육의 길을 열었던 운강과 어머니. 나는 두 분이 걸었던 길 위에 서 있다. 어머니는 오늘도 딸에게 번질 불길을 막느라 허리가 굽고 손가락이 휘었다. 이제 이 분을 그늘에 앉히고 예쁜 꽃담 하나 지으려 한다. 평생을 화방벽으로 살아오신 어머니를 위해. 고택이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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