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폭력성과 모럴리스
*
"여주야, 넌 아직도 나를 잘 몰라."
"내가?"
"넌 내가 언제까지고 너한테만은 친절할 거라고 생각하지."
"...아니."
예상이 빗나간 대답에 백현은 순간 눈썹을 치켜떴다. 그럼에도 금세 표정을 정돈하곤 태연한 척 물었다.
"그럼?"
"네가 나한테 친절을 베풀었다는 거야 뭐야."
"..."
"너 사실은 그냥 나한테 진 거잖아. 내 말이라면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잖아."
백현이 푸흐흐 바람 빠진 웃음 소리를 내었다. 실소였다. 눈빛은 꼭 여주를 당장이라도 목 졸라 죽일 것처럼 일렁이는데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 깔며 여주의 머리카락을 거슬린다는 듯 한 손에 움켜쥐어 목 뒤로 넘겼다. 허연 여주의 목을 관음하는 시선이 당장이라도 송곳니를 쑤셔넣고 피를 빨아댈 것만 같은 기세였다. 백현이 살짝 고개를 들어 여주의 귀에 바짝대고 속삭였다.
"어떻게 알았지."
"읏."
그의 숨결에 움찔하는 여주의 뒤통수를 눌러잡은 백현은 아예 제 입술을 귀에 붙이고 지껄였다. 백현이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귀에 입술이 스치자, 여주는 이를 악물고 몸이 비틀리는 것을 참아야 했다.
"네 말 한 마디면 미친 새끼처럼 불구덩이에도 뛰어들 텐데."
"야..."
"넌 나한테 꼭 실없는 것만 바라지."
여주가 못 참겠다는 듯 백현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딱히 버티고 있을 생각은 아닌 듯 순순히 물러나는 백현의 표정은 어딘가 처연했다. 여주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대화를 곱씹었다. 뭐야, 어느 포인트에서 또 저래? 당최 알 수 없는 그의 심리에 더 이상 궁리하기도 귀찮은 듯 여주가 이내 심드렁한 표정을 했다. 여주의 스쳐지나가는 말 한마디에도 유난떠는 백현과 제 앞에서 낑낑대는 얼굴을 보고도 별 감흥이 없는 여주의 마음이 참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난 진짜 네가 필요할 때만...! 내가 필요한 걸 부탁한거야."
여주가 팔짱을 끼면서 말하자 백현은 꼭 다 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나한텐 하등 쓸모없는 것들. 아무 의미 없는 것들."
이제 여주는 답답함을 더 견디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다. 아니, 어쩌라는 거야. 여주의 머리속이 훤히 다 읽히는 백현이 쓴 웃음을 지으며 여주의 양 뺨을 감싸고 여전히 찌푸린 미간에 입을 맞췄다.
"잘 생각해봐. 그런 시시한 것들 말고도 내가 널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많아."
"..."
"모르겠어? 널 위해서 죽으라면 죽겠다고."
* (서브 세훈 보고 질투)
끝끝내 여주의 심사가 뒤틀릴 대로 뒤틀렸다. 어디 해보자 이거지? 잔뜩 꼬인 속내가 차마 입술을 뚫지 못 한 채 입꼬리만 비스듬히 올라갔다.
여주도 이제는 무슨 수를 쓸 참이었다. 그도 그럴게 벌써 며칠 째 ~ (여주를 빡치게 하는 사유 중 1 - 섹스리스, 피해다녀서 못 봄, 다른 여자랑 뒹굶 등) ~ 였다.
오늘 (연회)가 끝나면 끝장을 봐야겠다고 결심하는 여주 앞에 큰 인영이 지며 샴페인이 내밀어졌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세훈이었다.
"한 잔?"
세훈이 싱긋 웃으며 내미는 샴페인 잔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 술 마시면 또 지랄할 텐데. 손을 뻗어 거절하려던 찰나 여주의 못된 오기가 다시 머리를 스쳤다. 까짓꺼 나한텐 관심도 없는 사람인데 샴페인 한 잔 한다고 알기나 하겠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절하려고 내밀었던 손이 그대로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손잡이가 짧고 얇은 잔 탓에 서로의 손이 스쳤다.
"짠-"
"아..."
가볍게 여주의 잔에 제 잔을 부딪힌 세훈이 먼저 샴페인을 원샷했다. 그 모습을 떡하니 바라보던 여주도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한 잔을 그대로 다 입에 털어넣었다. 어쩐지 후련한 마음에 제 머리 위에 빈잔을 털어보이기까지 한 여주가 세훈에게 물었다.
"여기 좀 더 쎈 건 없나요?"
"쎈 술...?"
"네네. 오늘은 왠지 술이 땡기네요."
술 한 잔에 입이 트였는지, 급기야 능청스럽게 더 도수 높은 술을 찾는 여주에 세훈은 옆 스탠드 테이블에 팔을 올려 몸을 기대며 흐음- 하며 미소를 띄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여왕님이 꽤나 술이 고픈 모양이었다. 세훈의 눈이 일순간 가시적으로 일렁였다. 하다못해 그게 먼 발치에 떨어져 여기저기 인사 하기 바쁜 백현의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백현은 그들이 손을 스치며 술잔을 주고 받을 때부터 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여주는 그저 순진하게 세훈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세훈은 어렴풋이 그 시선을 느끼고 있었으나 그게 여주에게 내뱉을 제안에 크게 관여하진 못 했다.
"비싼 술이라면 내 방에 얼마든지 있는데."
"비싼 술이요...?"
"네. 비싼 술은 맛있고 기분 좋게 취하는 거 알아요?"
"헉."
입밖으로 순진한 감탄사를 내뱉은 여주가 일순간 놀라며 제 입을 가렸다. 아, 방금 너무 품위 없었다. 그건 둘째치더라도 아무리 순진한 여주라도 그의 말 뜻을 모르지는 않았다. 잠시 고민하는 여주의 속내를 모르지 않는 새훈이 여유롭게 한 마디를 보탰다.
"왜요. 저희 둘 다 얼굴 팔린 사람들인데 뭔 일이라도 있을까봐요?"
"하긴..."
그건 그래. 속으로 생각한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훈은 곧바로 여주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려세워 여주를 이끌었다. 계속해서 오고가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곁눈질로 계속 여주를 좇던 백현이 그 모습에 주먹을 말아쥐며 걸음을 떼려고 할 때였다.
"어머, 백현 오빠-"
가증스러운 콧소리와 함께 등장한 ㅇㅇ기업 회장의 딸이 백현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등장했다. 바로 뒤따라 회장이 같이 오는 걸 본 백현은 우선 둘과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그 사이에 금세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여주에 답지않게 당황한 백현이 획 고개를 돌려가며 연회장 내부를 스캔했다.
"아잉- 오빠, 누구 찾아? 나 여깄는데?"
팔짱을 껴오며 들러붙는 여자에 백현의 미간이 심히 일그러졌다. 지금 누구 때문에...! 울컥 화가 치밀었으나 제가 함부로 어찌할 수 있는 장소와 대상이 아니었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쉰 백현이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한 발 물러섰다.
"정말 죄송한데 급히 비서에게 전달 받을 사항이 있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들이 보든말든 제 할말을 마치고 꾸벅 목례를 한 백현이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뭐야- 하며 투덜거렸으나 ㅇㅇ기업 회장은 제 딸이 토라지거나 말거나 그저 허허 웃었다.
"별일이네. 변대표가 저리 급해보일 때도 다 있고 말이야."
그 사이 백현은 긴 다리로 휘적휘적 제 비서를 찾아갔다. 저를 먼저 찾아온 백현에 놀란 비서가 조금 남은 거리에서 황급히 백현에게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장 찾아."
"누구를..."
"여주. 저번부터 거슬리던 새끼랑 같이 사라졌어. 당장 찾아서 둘 다 내 앞에 대령해."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백현이 거슬리던 새끼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비서였으나 살기 어린 백현의 표정과 말투에 얼어붙어 재차 질문하지 못한채 그저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그 모습에 백현은 여전히 마주치는 누구든 죽도록 패줄 것만 같은 눈을 하고 여전히 저를 제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ㅇㅇ기업 회장에게로 걸음했다. 이딴 연회에 두 번 다시 여주를 데려오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
-
한편 세훈이 잡아끄는 대로 따르던 여주는 호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서야 세훈의 손이 내내 제 어깨를 감싸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곤 곧바로 약하게 몸을 비틀어 빠져나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세훈은 이미 백현이 보이지 않는 곳이니 별로 개의치 않고 카드키를 인식한 뒤 제 방의 층수를 눌렀다. 여주는 고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사간이 꽤나 길고 무안하게 느껴졌다. 자신은 그저 세훈의 방에 좋은 술이 있다길래 궁금해서 따라나선 것 뿐인데 이렇게 단 둘이 엘리베이터에 있으니 꼭 나쁜 짓을 하려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정작 나쁜 건 변백현인데... 라는 생각도 뒤따랐다.
"괜찮아요?"
그런 여주의 복잡한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세훈이 걱정스런 얼굴로 여주에게 물었다.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여주는 주먹을 쥐어보이며 먼저 내렸다.
"그럼요! 어느 쪽이에요?"
"오른쪽."
"얼른 가요!"
마치 당당한 척이라도 하는 양 과장되게 팔을 앞뒤로 흔들며 씩씩하게 걷는 여주였다. 그 뒤를 따르며 세훈이 귀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와- 넓다..."
제 생각보다 더 넓은 방에 여주가 감탄했다. 솔직히 여주가 알고 가 본 호텔이래봤자 모텔과 별 다를 바 없는 곳들이 대부분이었다. 화장실과 침대 좁은 협탁이나 테이블 정도가 있는. 그러나 세훈의 방은 아예 투룸처럼 다른 방에 소파와 넓은 테이블이 있는 구조였다. 어쩐지 그 풍경에 죄책감이 덜어진 여주가 얼른 소파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마시면 되겠어요!"
"네. 편하게 있어요."
표정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여주 때문에 세훈은 아까부터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아무 계략없이 여주를 제 방까지 데려온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보다 너무 투명한 여주 때문에 제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자꾸 귀여워 보여서 큰일이네..."
"네?"
"아, 룸서비스도 시킬까요?"
작게 읊조린 말에 여주가 되묻자 짐짓 당황하며 룸서비스 얘기를 꺼냈다. 겉으론 의연한 척 했지만 속은 시꺼멓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룸서비스는 개뿔. 안주도 없이 먹여 빨리 취하게 만들 작정이었는데 어째 벌써부터 글러먹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금발이다 못해 노란끼마저 돌지 않아 거의 하얀머리같은 백금발의 여주가 노크도 없이 들어섰다. 허, 그 모습을 마주한 백현은 기가찼다. 일전에 여주가 손목에 조그마한 타투를 하나 새기고 나타났을 때에도 백현은 갖은 지랄을 떨어댔다. 아마 여주의 부모가 살아있었어도 그보다 뭐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꼴을 봤다면 정작 부모가 백현을 말렸을지도. 그도 그럴게 백현은 며칠 간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고 오라며 협박에 가까운 짓들을 했다. 그러나 상대는 김여주였다. 협박 당하는 며칠 내내 단식 투쟁을 벌였고 영양실조로 실려가기 직전 결국 백현이 백기를 들었다.
그렇듯 백현은 유독 여주를 있는 그대로 지키고 싶어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여주가 바뀌는 게 싫었다. 다치고 아픈 건 더 싫었다. 밤마다 제 밑에 깔려 앙앙 간드러지는 신음을 내뱉을 때만 제외하고 말이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 여주는 여지껏 그 흔한 피어싱 하나, 네일아트 조차 하지 못 했다. 오죽하면 백현은 여주가 화장하는 것조차 반기지 않았다. 사실 그건 맨 얼굴이 더 좋다는 뜻이기도 했으나 여주는 그딴 건 알 바 없고 그저 저를 통제하고 구속하는 백현에게 신물이 났다. 그래서 제 힘으로 끝까지 지켜낸 손목의 타투가 여간 마음에 드는 것었다. 때때론 그걸 어루만지며 바라보다 히죽히죽 웃을 정도였다.
"머리가 그게 뭐야."
"이쁘지?"
그런데 그런 백현의 앞에 여주가 백금발을 하고 나타난 것은 소위 도발이고 엄청난 반항이었다. 게다가 길었던 머리카락은 댕강 잘려나가 턱 부근에서 찰랑일 뿐이었다. 짧아진 머리 한 가닥을 손가락으로 베베 꼬며 이쁘냐고 웃어보이는 여주의 모습에 백현은 헛웃음을 쳤다.
"머리는 어따 팔아먹고 좋다고 웃어."
순간 눈썹이 일그러지는 듯 했으나 정작 또 여주를 하나하나 뜯어보자 그리 싫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백현이 성큼 다가서 여주의 턱을 쥐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진주알같은 머리, 그에 못지 않게 뽀얀 피부, 화장은 하지 않은 맨 얼굴에 적당히 불그스름해 촉촉한 입술. 백현의 시선이 진득하게 여주를 훑었다. 흰 원피스까지 입어 오늘따라 유독 말갛게만 보이는 얼굴이 생각보다 썩 마음에 들었다. 아니, 예뻤다.
"그래. 예쁘네."
'...예뻐?"
"응."
백현은 당장라도 뒤통수를 쥐어잡고 온 얼굴을 핥고 싶은 걸 꾹 참고 여주에게 솔직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어오는 여주에게도 친절하게 한 번 더 대답해주었다. 그가 이렇게 사근하게 구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으나 여주는 그 대답이 언짢은지 여전히 제 얼굴을 쥔 백현의 손을 탁 쳐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게, 그동은 여주가 봐 온 백현이라면 돌이킬 방법조차 없는 제 머리칼을 보고 이를 빠득빠득 갈며 또 보기 드문 지랄쇼를 펼칠 것이라 예상하여 벌인 일이었다. 백현이 빡치는 것도 보고 싶었고, 저를 볼 때마다 어떤 절망감과 배신감 같은 것들을 느꼈으면 했다. 그게 나름 여주가 떠올린 복수 방법인 것이었다.
그러나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른, 아무렇지 않은 척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다 못 해 제 머리가 꽤 마음에 드는 듯한 백현이었다. 내쳐진 손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올려 머리칼을 매만지는 백현의 행동에 여주만 점점 더 기분이 일그러져갔다.
"비켜. 나 갈래."
이내 홱 토라진 여주가 다시 한 번 신경질적으로 백현의 손을 쳐내고 발걸음을 뗐다. 백현은 빠르게 여주를 돌려세워 품에 가뒀다. 허리를 매만지며 상체를 딱 붙여온 백현이 다른 손으론 여주의 귓볼을 잘근잘근 만져대며 입꼬리를 당겼다.
"왜. 나 보여주려고 온 거 아냐?"
"됐어. 다 봤잖아."
"흐음- 더 보고 싶은데."
퍽 다정한 말투에 여주는 더 약이 올랐다. 제 의도를 뻔히 다 알면서 저러는 것이다. 게다가 일부러 저를 열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따라 유독 저를 사랑스럽게 보는 눈빛과 손길이 그가 정말 진심임을 보여주고 있어 여주는 그게 더 열이 뻗쳤다. 아니! 대체 왜!
"놔."
마지막, 여주의 엄포에도 백현은 아랑곳 않고 여기저기를 쓰다듬어댔다. 머리, 얼굴, 목, 어깨, 허리. 타고 내려와 골반께를 지분거리던 백현이 여주의 드러난 쇄골에 입술을 붙였다. 힘껏 힘주어 빨다가 또 이로 잘근잘근 깨물어대더니 쪽 입을 맞추곤 여주를 놔주었다. 진하게 새겨진 새빨간 키스마크가 온통 새하얀 여주에게서 유독 튀어보였다. 그게 만족스러운 듯 엄지로 쓸며 한참 바라보던 백현이 책상으로 가 서류를 챙겼다.
"뭐야. 어디 가?"
다시 나갈 채비를 하는 백현의 모습에 여주가 의아하게 묻자 백현은 말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
"금방 올게. 기다리고 있어."
고개를 돌려 여주에게 싱긋 웃어보인 백현이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사실 빠르게 짐만 챙겨 다시 나가려고 들렀는데 여주에게 속절없이 시간을 뺏겨버렸다. 당장 여주를 껴안고 뒹굴고 싶었으나 남은 일정을 취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에 백현은 여주를 물고 빠는 일정은 밤으로 미뤄두고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그런 속내를 알리 없는 여주는 짐짓 토라져 쿵쿵 거리며 방을 나서며 소리쳤다.
"김비서! 나 아이스크림!"
조금 전까지는 나간대도 못 나가게 붙잡더니 지가 가버리는 건 뭐야? 여주가 툴툴대며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껴안고 푹푹 퍼먹어댔다. 티비에는 웃긴 예능이 틀어져있었지만 여주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저 보는 둥 마는 둥 묵묵히 아이스크림을 퍼 입에 밀어넣을 뿐이었다.
-
늦게까지 일정을 소화하고 집에 들어온 백현이 옷가지를 벗어 던지고 뜨끈한 물이 채워진 욕조에 몸을 뉘였다. 피로를 다 녹이는 듯한 물온도와 심신의 안정을 찾아준다는 입욕제 향을 느끼던 백현이 별안간 여주를 떠올렸다.
아. 맞다. 욕조에서 나와 빠르게 샤워를 마친 백현이 여주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두 어번의 노크 소리에도 여주는 응답이 없었다.
아직 삐졌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백현이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끼익. 조심스레 열린 문틈으로 침대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여주가 보였다. 백현이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방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덜컥. 문 닫히는 소리에 여주의 눈꺼풀이 느리게 떠졌다. 그리고는 꿈뻑꿈뻑 제 앞에 놓인 인영을 바라봤다. 어두운 방안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단박에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온 거야? 멏 시야?"
"깼어? 다시 자."
여주의 비몽사몽한 물음에도 백현은 여주를 토닥이며 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럼에도 여주는 무슨 할말이 있는지 웅얼웅얼 입을 움직였다. 점점 어둠에 적응한 백현의 시야에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하는 여주의 입술만 들어찼다. 고민할 새도 없이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입술을 맞붙였다. 입술을 빨아대다 불쑥 혀를 넣어 여주의 입안을 유영했다. 직전까지도 아이스크림을 퍼먹다 지쳐 그대로 잠든 여주의 입안에서 단맛이 났다. 백현은 그걸 다 빨아먹을 기세로 여주의 입안 구석구석을 핥았다. 여주는 계속 잠결에 웅얼거렸으나 맞붙은 입안으로 다 먹혀들어갔다.
"여주야, 자."
잠시 입을 뗀 백현이 말은 퍽 다정하게 자라면서도 정작 다시 맞붙은 키스는 점점 더 거세졌다. 여주를 토닥이던 손길은 어느새 이불을 들춰 여주의 허리춤을 쓸어댔다. 여전히 잠에서 깨지 못한채 백현의 입술을 받아내던 여주는 이게 자라는 건지 자자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켠에선 괘씸한 마음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제 도발은 먹히지 않았고, 저를 내버려두고 나가더니 기다리라고 할 땐 언제고 이렇게 늦게 들어와서 제 멋대로 키스를 퍼붓냔 말이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하루종일 지친 몸과 마음이 그대로 잠을 청하기를 선택한 듯 눈꺼풀이 무거웠다.
백현은 애당초 정말 여주를 재울 생각이었는지 어느새 부푼 제 앞섬을 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러다 이내 못 참겠다는 듯 여주의 치마속으로 손을 넣어 팬티를 벗겨냈다.
"우웅."
여주가 당황이 섞인 소리를 내자 백현은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는 침대에 올라타 여주의 다리를 모아잡고 허벅지 사이에 발기된 제 자지를 끼워넣었다. 마치 삽입을 한 듯 앞뒤로 왔다갔다하며 눈은 묘하게 일그러진 여주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하아."
제게 애무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새 실눈을 뜬 여주도 예민한 부위에 백현의 자지가 계속해서 자극을 주자 달뜬 숨을 뱉어냈다. 그 모습에 눈썹을 치켜 뜬 백현이었으나 자는 사람을 깨워 제 멋대로 섹스를 하는 취미는 없었다. 백현은 애당초 지금 여주와 무얼 할 생각이 아니었다. 다만 하루종일 여주를 떠올리며 참아온 욕정은 견디지 못했고, 여주와의 키스는 달았고, 멋대로 흥붕한 제 것을 혼자 풀어내려는 심산일 뿐이었다.
"그냥, 넣어..."
점점 흥분상태가 되어버린 여주가 작게 속삭이자 백현은 귀두 끝으로 여주의 갈라진 틈을 따라 마구 비벼댔다.
"하응."
직접적으로 가해진 자극에 여주가 몸을 비틀었다. 그럼에도 백현은 결코 삽입 할 생각은 없는 듯 점점 더 거세게 흔들어대다가 아예 기둥 전체를 갈라진 틈을 따라 뿌리부분 부터 귀두 끝까지 쓸어대며 여주의 엉덩이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댈 뿐이었다. 점점 더 움직임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백현은 제 손으로 쓸어대며 여주의 허벅지에 사정했다.
휴지를 뽑아와 정액을 닦은 백현이 여주의 속옷을 다시 입혀주고는 저도 옷을 다시 추슬러입었다.
"여주야."
"응."
"같이 자자."
그리고는 여주의 옆에 누워 여주를 돌려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연신 여주의 허리와 머리, 여기저기를 쓰다듬고 토닥이며. 언제 흥분으로 치닫았냐는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 손길에 여주도 금세 다시 안정을 되찾으며 잠에 들었다. 그러나 백현은 그순간까지도 여전히 죽지 않은 제 페니스 쓰다듬으며 날이 밝으면 여주를 봐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첫댓글 분위기
초안 쓰면서 딱 생각한 머리
"머리는 왜 또 그 모양이야."
계속 백금발을 유지하는 여주
여주는 제 하얀 머리가 맘에 들었는지 머리카락이 꽤나 더 길어나올 때까지도 백금발을 고수했다.
처연하게 백현을 기다리던 뒷모습마저 꼭 그 눈에는 천사 같았다.
오랜만에 ㅇ회장을 만나기로 한 날, 간만에 화장을 하고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 리본까지 단 여주가 퍽 거슬렸다. 정정하자면, 이쁘긴 뒤지게 이쁜데 그게 거슬렸다.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백현은 입술을 짓이기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