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선 성종 시기 남원군 양성지는 명국이 압록강 건너편에 개주위를 설치한다는 계획에 대하여 우려를 표출하면서 국경 지역의 역사와 지리를 상세히 고증하는 중에 한도漢都를 언급하였다. 아래는 상언문 일부다.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려(高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
신이 다시 생각건대, 국가는 한 시대에 고식(姑息)되지 말고 만세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무사한 것을 요행으로 삼지 말고 만전의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천하에 금 그릇에 비길 만한 것은 잘 보전하여 깨트리지 말며, 산하(山河)가 금에 비길 만한 것은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장안(長安)·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거나 건강(建康)·임안(臨安)에 도읍하고 혹은 북쪽으로 업(業) 땅에 도읍하거나 동쪽으로 변량(汴梁)에 도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북쪽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연도(燕都)가 남북의 요관(要關)이 되어, 북으로는 거용관(居庸關)에 의거하여 호원(胡元)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는 중원(中原)에 임하고, 남으로는 사해(四海)를 제압하니,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정한 후 실로 만세의 제왕이 옮기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지금 개주에 성을 쌓으면 개주로써 그치지 않고 반드시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될 것이며,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되면 당(唐)참(站)에 그치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곡(糧穀)의 운반을 요청하게 되면 양곡 운반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소와 운반구(運搬具)를 요청할 것이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청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이며 농(隴) 땅을 얻으면 촉(蜀) 땅을 바라게 되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
출처: 조선왕조실록 성종 12 년(1481) 10 월 17 일
그러면 양성지가 언급한 연경에서 동북쪽으로 겨우 30 일정이라는 한도 위치는 어디일까? 또한 그 한도는 어떤 곳일까? 인평대군은 10 월 29 일 연경을 떠나 30 일 째인 11 월 28 일 봉황성에 도착했었다. 즉 연경인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봉황성과 한도까지의 거리가 거의 같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평대군은 요양을 떠나 봉황성까지의 로정에서 한도를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한도는 인평대군의 로정 밖에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한편 거란.요국 정사인 <요사/지리지> 동경도 기록에는 한도漢都와 관계 있을 것으로 보이는 한성漢城, 한양漢陽, 진한辰韓, 신라新羅, 옛평양성故平壤城 등이 언급되어 있다.
<요사/지리지> 동경도
...<大東丹國新建南京碑銘> 在宮門之南 外城謂之漢城
辰州 ...高麗蓋牟城 唐太宗會李世적勣攻破蓋牟城 卽此 渤海改爲蓋州 又改辰州 以辰韓得名 井邑騈列 最爲沖會 ... 統縣一 建 安縣盧州 ...本渤海杉盧郡 故縣五 ... 漢陽 ... 統縣一熊嶽縣耀州 ... 本渤海椒州 故縣五 椒山 ... 巖淵 皆廢 ... 統縣一巖淵縣 東界新羅 故平壤城材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裏海州 ... 本沃沮國地 高麗爲沙卑城 李世적勣嘗攻焉 渤海南京南海府 ... 都督沃晴椒三州 ... 太平中大延琳叛 南海城堅守 經歲 不下...
즉 거란.요국이 진국발해를 꺽고 요동지역 요양에 남경을 설치하고 궁宮을 축성했는데 궁 밖의 외성을 한성이라 했다는 얘기다. 또한 동경요양부에 속한 진주는 고구려 개모성이였고 당태종이 이세적과 함께 공파한 곳이며 발해는 개주.진주로 개칭하였었고 진한과 연관되어 얻은 지명이고 번화한 지역이며 건안현을 통령하였다고 한다.
또한 로주는 본래 발해 삼로군이였고 한양을 포함한 5 개 현이 있었는데 웅악현 하나를 통령한다고 하며 요주는 본래 발해 초주였고 초산,암연 등 5 개 현을 통령하였는데 모두 폐하고 현재는 암연현 하나를 통령하는데 그 동쪽은 신라와 경계하고 옛평양성이 암연현 서남쪽에 있으며 동북쪽으로 해주까지는 120 리라는 설명이다. 요동 남쪽에 있는 이 옛평양성은 고구려 도읍 평양성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파하고 차지한 한성, 곧 남평양성일 것이다.
또 해주는 본래 옥저국 땅인데 고구려가 사비성으로 삼았고 이세적이 공격하였었다고 하며 발해가 남경남해부를 설치했고 옥.청.해 3 주를 통령했으며 태평 년간엔 대연림이 반란을 일으켜 남해성을 견고하게 지켜 해를 넘기고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결국 거란.요국의 웅악현이 동경 남쪽 외성이였다는 한성으로, 진국 발해의 한양현으로, 옛평양성으로도 불린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위 추정도에 추기한 웅악 곧 청 시기의 복주 북쪽 지점이 양성지가 언급한 한도였을 것이며 청 시기의 해성을 기준하면 복주 북쪽 웅악까지와 봉황성까지 거리는 대략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리는 당연히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조> 기록과도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즉 일설에 비류.온조 형제가 패.대수를 남쪽으로 건너 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고 이어 한수 남쪽으로 천도하여 쌓은 성이 한성漢城이라 했고 나라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했다.
결국 한성 북쪽으로는 한수.대수.패수가 차례대로 흘렀고 그 지역에 백제의 첫도읍인 위례성과 두번째 한성이 있었다. 이 지역은 당연히 중국 후한 말에는 공손연이 설치한 대방군지역이고 또한 당연히 패수의 서쪽은 한 요동군, 동쪽은 낙랑군 영역이다.
또한 이 패수는 <요사/지리지> 동경도 요양부 서문의 패수.니하일 것이며 <청사고/지리지>에 기록된 봉천부 개평현 북쪽에 흐른다는 어니하일 수 밖에 없다.
1910 년 전후하여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문화사>에서 해성 곧 요동지역의 헌우락이라 비정한 그 패수이며 계연수가 <환단고기/북부여기> 본문에 `패수는 지금의 란하`라는 자신의 지리 인식을 드러내었는데 비록 본류와 지류를 구별하지는 못했지만 그 위치만큼은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당 시기 패수.패강 등으로 불린 물길이 요동에 있었는지 아니면 평양성 부근에 있었는지에 관하여 명확하게 판가름해주는 글이 있다. 당 현종 시기 재상을 역임한 장구령(673~740)의 문집에 실렸다는 `여신라김흥광칙`의 번역문이다.
경이 패강에 군영을 설치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곳은 발해의 요충지와 마주 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안록산과도 마주 바라보고 있어 여전히 원대한 계책이요 원래부터 좋은 계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이 저 조그만 발해가 오래전에 벌써 주벌을 모면한 점을 경이 매양 미워하고 있는데 이 점은 매우 가상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만주원류고/부족4/신라> 장진근역 177 쪽
위 내용과 대응하는 기록이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34 년(736) 2 월 기록이다. 즉 `의충이 돌아오는 편에 칙지로써 패강 이남의 땅을 주었다`는 내용인데 당 현종이 패강을 지금의 란하 하류 초입으로 흘러드는 동쪽 지류가 아니라면 저리 말할 리가 없는 것이다. 평양성 부근의 패강은 평주 노룡 지역을 통령한 평로절도사 안록산은 커녕 발해 요충지와도 마주 대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고? 요동의 남쪽 지역인 요주 암연현의 동쪽이 신라 국계였기 때문이다.
또 성덕왕에게 영해군사寧海軍使라는 봉작도 더했는데 위 고지도에 복주 동쪽에 표시된 영해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경도 즉 이조선 도읍 한양을 설명하는 글 중에 뜬금없이 `오른쪽은 발해渤海가 둘러있다`는 기록이 있다.
京都上
古朝鮮馬韓之域 北鎭華山有龍盤虎踞之勢 南以漢江爲襟帶 左控闢?嶺 右環渤海 其形勝甲於東方 誠山河百二之地也 百濟中葉自漢山而徙居未幾播遷南土 高麗肅宗置南京 有時來巡...
<승람>의 경도라면 당연히 이조선 도읍 한양의 지형을 설명한 것이여야 하는데 어떻게 바다 명칭인 발해가 등장할까?
또 경도가 고려 숙종이 설치했다는 그 남경일까?
사실 이조선 도읍 경도 곧 한양인 지금의 서울은 발해 즉 서국 산동반도 북쪽의 바다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즉 <승람> 내용과 같이 고조선.마한 지역도 아니고 백제 중엽 한산에서 남쪽에 한강이 있다는 곳도 아니며 고려 숙종이 설치한 남경도 아니다.
그 이유는 한 시기부터 청국 멸망한 1911 년까지의 대요수.요하가 지금의 란하였기 때문에 한 무제 유철이 설치한 낙랑군 위치도 당연히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지역이였고 백제 건국지와 중흥지도 그 낙랑군의 서쪽인 지금의 란하 하류 동쪽 강안 지역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한성 오른쪽엔 발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삼국사기/백제본기> 온조왕조 기록과 같이 동쪽에 낙랑군이 있었다는 백제 위치는 위 <건륭도>의 웅악 위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지리 측면에서는 위 <승람>의 설명은 착오이고 실수다. 그런데 나는 착오.실수가 아니고 의도적인 편집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아래는 <승람>의 서문 일부다.
` 그후 연산군이 이것을 다시 편수하라하여 약간의 증손이 있었으나 그 말년에 사장을 금하기 때문에 민간에는 보관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중종이 다시 이행(용재)등에게 증수를 명하시어 재열세再閱歲의 공으로 25년 경인에 완성을 보았으니 즉금에 영인되는 저본이 곧 그때의 것이다. 그러나 항상 소수로 인반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희귀하였는데 융희년간에 일본인某가 형편없이 좀먹은 것을 얻어서 3 책으로 인행한 것이 활자본의 비롯이었고 그 뒤를 이어 조선고서간행회의 5 책본과 조선사학회의 4 책본이 인차간행되므로 어시호 학자의 수본에 여지승람을 갖게 되었다. `
위와 같이 융희 연간(1907~1910)에 수많은 조선인이 사는 땅에서 형편없이 좀먹은 것을 일본인 모가 얻어 인행한 것이 지금 전해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필자가 경도상의 본문에 뜬금없는 단어 `발해`와 현존 간행본이 일본인 모씨로부터였다는 모호한 출처 등을 거론하여 <승람> 문헌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 경솔한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고려까지의 백제 한성과 고려 남경에 관한 지리 기록이 이조선의 도읍 한양과 이조선에서 편찬한 <승람>의 경도 기록에 얹혀 덧붙쳐졌다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의 명백한 편집 조작이다. 즉 지금의 서국 하북성 동쪽 끝 지점을 흘러내리는 지금의 란하를 경계로 4000 여 년간 대적해 왔던 고조선.왕검조선.단군부여.마한.삼국.진국.고려.이조선까지의 역사지리를 지금의 압록강 이남의 대한반도로 끌고 들어오려는 일본의 의도를 산산조각내 깨는 단어 하나가 바로 그들이 조작편집한 <승람>의 `발해` 단어 하나다.
발해는 지금의 중국 산동.요동반도를 잇는 북쪽 바다 전체를 일컫는 명칭이지만 고대 한 무제 시기로부터 청국이 멸망한 1911 년까지에는 산동반도의 북쪽 바다만을 일컫는 것이였다. 지금의 발해의 동쪽 반半은 서기 3 세기 조조가 갈석에 올라 지었다는 `관창해` 시제와 같이 창해로, 당 현종이 신라 성덕왕에게 추가한 봉작과 같이 영해로도 불렸으며 435 년 북위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내렸다는 도독요해제군사의 요해로, 또 <청사고/지리지> 봉천성 봉천부 금주구에는 여순을 기점으로 서쪽을 발해안, 동쪽을 황해안이라 기록되어 있어 결국 지금의 란하 최하류의 서쪽 반半은 발해, 동쪽 반半을 황해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첫댓글 1 양성지가 말한 漢都→한성(漢城)을 말함
2-1.渤海라 부른 바다 →당나라 이전은 산동반도 등주에서 난하하구 사이., 그 후는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 여순 사이 바다 지칭
2-2. 요동군 위치 → AB.C 281~B.C 75년까지는 난하 서쪽, B.C 75년 이후는 요동반도 천산산맥 서쪽(낙랑군,현도군과 나누어 가짐)
2-3. 낙랑군 위치 → B.C 108년~B.C 87년까지는 난하 동쪽, B.C 87년 이후는 요동반도 천산산맥 서쪽((요동군,현도군과 나누어 가짐)
3. 백제건국지 → 비류백제는 浿(태자하)와 帶(혼하)가 인접한 혼하.태자하 하류지역이었다.
온조백제는 한강 이북, 그 뒤 한강 이남으로 남하하였다가 그 후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도읍을 북한성
(北漢城) 으로 옮겼다가 A.D 475년에 웅진(熊津)으로 옮겼고, 그 뒤 사비(泗沘)로 옮겼다.
구태백제는 처음 대방고지에서 건국되어 수도를 온조백제 남쪽인 공주(公州)에 두었다.
4. 요서백제 위치 →백제 구태백제는 a.d 204년경에 대방고지에서 건국되어 a.d 205년에 온조백제와 익산 금마 마한을 정복하고, 온조백제는 후왕을 임명하여 다스리고, 마한 지역은 구태백제왕의 자제,종진에게 마한 소국들을 분붕(分封)하여 다스렸다.
구태백제가 처음으로 요서에 진출한 시기는 모용외와 동맹하고 백제군을 당나라 때의 북평군(난하 동쪽)에서 유성군(조양방면) 사이에 주둔시켰을 때이다. 그러가 곧 모용외가 단선비와 우문선비를 제압하자 모용외는 백제를 무시하게 되었고, 이에 백제는 중국의 서남부인 지금의 광서장족자치구가 있는 울림군 방면인 진평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 동진 때 동진은 남하하는 부견을 견제하기 위하여 백제군이 강좌(江左, 양자강하류)에 주둔하도록 허용해 주어 강좌에 진출했고, 그 뒤 건국된 송나라는 복건성에 있는 진안군을 진평군으로 바꾸어 백제군의 주둔과 둔전으로 양여해 주었다.
송,백제 연합군이 북경에서 난하 사이를 점령한 사기는 a.d 468~471년경이다.. 이때 백제는 송 황제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곳에 백제의 조선태수, 대방태수를 두었다가 송나라와 적대관계가 되었고,
송나라는 여태까지 우방이던 백제를 북위,고구려, 유연등과 협력하여 포위하였다.
그러나 479년에 남제가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건국한 후 백제와 동맹세력이 되므로서 백제는 다시 복건성 방면의 진평군과 북경에서 난하 사이 요서 지역에 있는 조선,대방 2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 후 북위,고구려 연합군이 수차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번번히 백제,남제 연합군에 패하여 북위 땅을 빼앗기었고, 백제는 남제,백제 연합군이 추가로 빼앗은 강소성,.산동성 지역에 성양태수, 청하태수,광릉태수 등을 추가로 두었다.
저 위 그림에 그려져 있는 것은 모두 구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