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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타오르는 촛불
사람들은 구천인이 기묘한 재주를 피우는 것을 얼빠진 사람들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난다 긴다 하던 상관위보다도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이런 신출귀몰한 재주가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한편 구양봉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기껏해야 17, 8세밖에 안 된 놈이 저 정도 실력이니 몇 해만 지나면 필연코 무림의 기인이 될 것이었다. 만약 구천인과 무예를 겨룬다면 자기도 쉽게 꺼꾸러뜨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상관위는 모용쟁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모용쟁은 미소 띤 얼굴로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상관위의 입술이 가볍게 달싹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전음입밀법 (傳音入密法)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모용쟁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상관위가 마침내 좌중을 둘러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구천인을 방주로 세우는 데 다른 의견은 없소?"
좌중이 잠잠하자 수염이 허연 늙은이가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자네가 기어이 구천인한테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는데 우리가 무슨 할말이 있겠나? 자네는 방주니까 방내의 대사를 당연히 자네가 결정해야지."
철장방의 사람들은 이 늙은이를 무척 존경하고 있는 터라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들 더는 딴말이 없었다. 이에 상관위가 정중히 선포했다.
"철장방의 제12대 방주 상관위는 방주 자리를 제자 구천인에게 물려주노라. 특히 철장 신표를 구천인 방주에게 물려주니 철장방을 잘 다스려 강호의 막강한 세력이 되게 하며 천하에 명성을 떨치게 하기를 바란다!"
상관위는 말을 마치고 철장을 정중히 구천인에게 넘겨주었다. 구천인은 철장을 받아 들고 하늘을 우러러 맹세했다.
"이 구천인이 철장방 방주의 자리를 물려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이 구천인은 철장방의 대업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며 철장방을 훌륭히 꾸려 천하 무적의 대오로 만들 것입니다!"
구천인의 맹세를 듣고 좌중은 한시름을 놓았다.
'제 입으로 맹세했으니 제아무리 간교한 놈일지라도 철장방에 불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지. 만약 구천인이 철장방을 새롭게 일으켜 세운다면 오히려 큰 공을 세우게 되는 셈이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신묘한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 철장방을 흥성하게 만들지도 몰라.'
좌중은 하나같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관위는 일이 끝나자 숨을 가쁘게 쉬며 빙그레 웃었다. 그는 구천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 사람들을 모두 물러가게 해라. 더는 저 사람들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구천인은 내심 난처했지만 새 방주로서 위엄을 갖춰 철장을 쳐들고 엄한 목소리로 분부했다.
"모두들 물러가도록 하시오."
좌중이 물러가자 상관위와 모용쟁, 구천인 셋이 남았다. 상관위는 구천인을 보고 턱짓으로 절 안에 들어가자고 했다.
법당으로 들어가자 모용쟁은 상관위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혔다. 구천인은 그 옆에 지켜 섰고 모용쟁은 상관위의 옆에 꿇어앉았다.
법당 안도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상관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모용쟁을 보았다. 아마도 무슨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구천인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사부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어서 하세요."
"초, 초를……."
상관위는 발음조차 안 되는 듯 입술을 떨며 가까스로 말했다.
모용쟁은 가슴이 아팠다.
'임종이 가까워오는데 초는 찾아 뭐에 쓰려는 걸까?'
휑하니 뚫린 천장으로 별빛이 스며들어 법당 안은 촛불을 켜지 않아도 환했다.
구천인이 모용쟁을 보고 말했다.
"모용 아가씨, 저의 사부님께서는 여든한 개의 초를 갖춰 놓았어요. 어떻게 켜야 할지, 모용 아가씨가 아신다니까 저한테 가르쳐 주십시오."
사람들이 흩어진 후 구양봉은 모용쟁 등 세 사람이 절 안에 들어갈 줄 미리 짐작하고 한걸음 앞서 법당에 들어와 삼청신상(三淸神像)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속을 비우고 짚과 흙으로 빚은 삼청신상은 몸을 가리기엔 너무 작아서 그 뒷면을 뜯어내고 그 안에 들어서 있던 참이었다. 구양봉의 귀에 세 사람이 주고받는 말소리가 똑똑히 들려 왔다.
구천인이 여든한 개의 초를 꺼내 놓았다.
"모용 아가씨,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십시오. 제가 사부님을 위해 초를 꽂지요."
"좋아요."
구천인이 잽싸게 왼손으로 초를 집어 모용쟁의 손에 쥐여 주었다. 모용쟁은 초의 크기를 손으로 가늠해 보더니 지시하기 시작했다.
"왼쪽 벽에, 높이는 석 자!"
구천인의 손이 번쩍 하자 초는 화살처럼 벽에 날아가 꽂혔다. 그는 다시 초 한 개를 모용쟁에게 쥐여 주었다.
"이번에는 젯상에!"
구천인이 초를 되받아 쥐는 즉시 휙 던지자 초는 젯상 위에 날아가 세워졌다. 구천인의 손이 번개같이 움직이고 모용쟁의 말은 더욱 빨라졌다.
"오른쪽 벽에! 눈앞에! 몸 뒤에! 천장에! 석상의 정수리에! ……"
구천인의 귀신같은 손놀림과 함께 휘익휙 초들이 연달아 날려가 여기저기 꽂혔다. 모용쟁이 꽂히는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세어 보니 틀림없는 여든한 개였다. 구천인이 또 물었다.
"모용 아가씨, 이젠 뭘 할까요?"
"몽땅 불을 밝히세요."
촛불을 켜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멋들어지게 촛불을 켜려면 경공을 써야 했다. 구천인은 새처럼 가볍게 몸을 날렸다. 촛불 당기는 소리가 연달아 나더니 순식간에 법당 안이 온통 대낮처럼 밝아졌다. 여든한 개의 초는 하나같이 진붉은 색깔로, 겉에는 복(福), 녹(祿), 정(禎), 상(祥)과 같은 글자들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촛불 켜기가 끝나자 구천인은 다시 상관위 옆에 꿇어앉았다.
"사부님, 사부님, 눈을 떠 보십시오."
상관위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촛불을 보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저기 거미줄이 드리워진 법당 안은 지저분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상하좌우 가득히 꽂힌 초가 녹아 내리며 기세 좋게 타오르는 모양은 실로 장관이었다. 이러한 광경이 앞 못 보는 여인과 임종을 앞둔 늙은이 앞에서 벌어졌으니 참으로 이상한 노릇이었다.
모용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있었다.
'상관위는 왜 구천인에게 촛불을 켜게 한 걸까? 십중팔구는 나의 방에 촛불을 켰을 때처럼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자고 한 노릇일 거야. 하지만 그때는 나를 위한 것이었다면, 오늘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구양봉은 여전히 몸을 숨긴 채 동정을 엿보고 있었다. 셋이 모여 앉아 서로 위로하고 걱정하는 말들을 주고받을 줄 알았는데 촛불만 켜 놓고 가타부타 말이 없는 게 이상했다.
모용쟁이 다가가 싸늘한 상관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상관위는 모용쟁의 부드럽고 향긋한 손길을 느끼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상관위는 철장방에 들어와 잔뼈가 굵었다. 그러니 한평생 철장방에 몸을 담고 살아온 셈이다. 장가를 들고 가정을 꾸려 본 적이 없는 그는 젊은 시절보다 늘그막에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젊었을 적에는 그래도 기생집이나 술집에 드나들면서 돈
을 물쓰듯 했고, 고운 계집들을 안고 밤새껏 술을 마시고 색을 즐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늙으니 모든 것이 귀찮고 쓸쓸한 생각만 들었다.
본시 상관위는 여자에 관한 한 냉담했다. 청루에서 기생들과 놀 때는 돈도 잘 쓰고 술김에 큰소리도 잘 쳤지만, 일단 술이 깨면 모든 언약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실로 그는 한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일이 없었다. 백타산장에서 벌어졌던 일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그는 임일천의 보물이나 빼앗아 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보물함을 열어 보니 난데없이 모용쟁이 웅크리고 있지 않겠는가
. 상관위는 몹시 놀랐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아름다운 소녀의 향긋한 체취는 상관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번쩍이는 금은 보화에 에워싸인 모용쟁의 모습은 신비할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평생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고 술집이나 기생집에서도 제대로 정을 줘 본 적이 없는 상관위였으나 모용쟁의 미모에는 넋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동안 어리석은
생각에 빠졌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모용쟁을 놓아준 뒤 보물함만 메고 길을 재촉했다.
그는 집에 돌아온 후에도 도무지 모용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맑고 귀여운 자태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늙은 것이 새파란 아가씨에게 반하다니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일이 아닌가 하고 자신을 꾸짖기도 했지만 모용쟁에게 쏠리는 마음은 도무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모용쟁의 거실에 여든한 개의 촛불을 켜 놓는 일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상관위는 모용쟁을 곱게 앉혀 놓고 온 방안에 촛불을 밝히던 그 아름다운 정경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 모용쟁은 얼마나 밝게 웃었던가? 그 얼굴은 정녕 비 개인 뒤에 떠오른 태양처럼 상관위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바로 그때 상관위의 머리 속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죽을 때도 모용쟁을 옆에 앉히고 여든한 개의 촛불을 켜 놓자. 그렇게만 되면 이 한평생도 헛되지만은 않을 것이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활활 타오르는 촛불에는 바로 이런 기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었다.
삼청신상 안에 숨어 있는 구양봉의 얼굴은 삼청신의 태평스러운 얼굴과는 달리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람이란 서로 정이 통해야 이처럼 촛불을 켜 놓고 마음속의 말을 나눌 수 있는 법이다. 아무튼 이 늙어빠진 녀석은 천하에 없는 괴짜야! 외간 여자와 함께 앉아 여든한 개의 촛불을 켜 놓다니,
대체 무슨 수작이지? 모용쟁도 미친년이지. 이 구양봉 같은 호남아를 마다하고 다 죽어 가는 늙은이에게 엎어질 건 뭐란 말인가?'
상관위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었다. 불빛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용쟁이 옆에 있으니 흐뭇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뜨고 모용쟁을 보며 말했다.
"모용 낭자, 나는 또 여든한 개의 붉은 촛불을 켜 놓았소.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르겠구려."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앉은 모용쟁의 마음은 어쩐지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
"붉을 촛불을 즐기신다면 언제든지 켜 놓으면 되잖아요."
"나는 아가씨가 임신한 줄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고 그 애가 크면 데리고 다니면서 무예를 가르쳐 줄 생각까지 했었소. 구양봉은 북강 유운장의 노독물 신독행의 제자요. 구양봉은 비록 무예는 출중하지만 사람이 흉악하고 잔인하오. 당신의 아이가 구양봉을 따라 다니면 기필코 나쁜 버릇만 배우게 될 거요. 하지만 나도 세상을 떠날 사람이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구려."
그 말에 모용쟁은 가슴이 뭉클했다. 정암에서 도망쳐 나온 뒤 오늘까지 그 누가 이 불행한 여자의 아픔을 알아주고 관심을 가져 주었던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상관위는 그녀를 걱정하고 아이의 장래까지 염려해 주는 게 아닌가. 모용쟁은 고마운 생각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상관 방주님, 정말 고마워요."
구양봉은 화가 났다.
'모용쟁, 임자는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저주하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고만 있더니, 다 죽어 가는 송장 같은 늙은이 앞에선 왜 그렇게 살갑게 구는 거요? 이 구양봉에게도 그만큼만 부드럽게 대해 줬으면 우리 둘 사이가 오늘 이 지경으로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오.'
구양봉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상관위를 죽여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관위가 입을 열었다.
"모용 낭자, 나의 이 제자는 비록 젊기는 해도 사람이 총명해서 무예가 뛰어나고 담력과 식견이 있다오. 낭자도 이 젊은이를 따라 오지봉에 가서 철장방 사람들과 지내는 편이 좋을 것 같구려."
모용쟁은 잠자코 침묵을 지키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관 방주님, 병이 이렇게 중한데 제 걱정은 마세요."
"모용 낭자, 몸을 아끼시오. 그리고 꼭 오지봉에 가 주길 바라
상관위는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거듭 당부했다. 모용쟁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묵묵히 꿇어앉아 있던 구천인이 땅바닥을 세 번 두드리고는 일어서더니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 누님, 사부님의 분부대로 저를 따라 백타산장을 떠납시다."
모용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방에서 나을 때 시녀에게 남긴 말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어차피 그녀는 산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이달 보름께에 강녀묘에서 아이를 넘겨주겠노라는 말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백타산장과는 철저히 인연을 끊는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모용쟁의 가슴은 텅 빈 들판처럼 썰렁한 느낌이었다. 모용쟁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말했다.
"저도 일이 좀 있으니까 이달 보름께에 일처리를 하고 함께 갑시다."
상관위는 거의 숨이 넘어가는 듯싶었다. 구천인과 함께 오지봉에 가겠다는 모용쟁의 대답을 듣고 상관위는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흥분한 나머지 숨이 막혀 또 왈칵 피를 토했다. 옷자락은 온통 피로 얼룩졌다.
구천인은 가만히 지켜 보고만 있다가 상관위가 피를 점점 심하게 토하자 기침을 멎게 하려고 가슴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상관위는 구천인의 손을 밀어내면서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 낭자, 나는 이제 마음놓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소. 나의 두 가지 소원을 다 풀었으니……"
그는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더욱 무섭게 기침을 하더니 왈칵 피를 토했다. 피는 봉당에까지 튀었다.
구양봉은 점점 참을 수가 없어졌다.
'배가 남산만 해서 당장 몸을 풀어야 할 년이 외간 남자들과 한 패가 되어 놀아나다니 정말 정신이 빠져도 단단히 빠졌군. 무엇보다 저 상관위란 두상이 괘씸하기 짝이 없군. 모용쟁이 백타산장에서 살든 어디서 살든 네 놈이 주제넘게 무슨 상관이야? 또한 모용쟁이 철장방에 얹혀 살아야 할 이유가 뭐지? 남의 젯상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웬 돼먹지 못한 참견이냐?'
구양봉이 너무나 분하여 자기도 모르게 발을 구르는 바람에 삼청신상이 와지끈 부서져 내리고 말았다. 얼결에 구양봉은 주르르 미끄러져 모용쟁 앞에 내려섰다.
구양봉을 보자 상관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거 야단났군. 저 놈이 달려드는 날엔 철장방의 사나이 네댓쯤은 간단히 해치울 텐데. 사숙들도 다 멀리 가 버리고 여기엔 구천인밖에 없으니 큰일이구나!'
그러나 구천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구양봉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모용쟁은 무엇인가 우당탕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나자 두 눈을 껌벅거리다가 물었다.
"상관 방주님, 무슨 일인가요?"
상관위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용쟁은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으나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구양봉의 내공이나 외공이 워낙 수준급이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모용쟁은 뭔가 짚이는 듯한 얼굴로 물었다.
"방주님, 혹시 그이가……."
구천인은 하는 수 없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용 아가씨, 구양 장주가 와서 지금 바로 아가씨 옆에 서 계십니다!"
모용쟁은 흠칫 놀라는 듯싶었으나 이내 침착해졌다. 그녀는 얼굴을 상관위 쪽으로 향했다. 구양봉과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구양봉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부릅뜬 눈으로 상관위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구천인 역시 한옆에 버티고 선 채 말이 없었다. 서로 맞붙으면 구천인 쪽에서 욕을 볼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목숨을 잃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구천인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의연했다.
세 사람은 한식경이나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구양봉은 마침내 더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상관위 어른, 이젠 볼장을 다 본 양반이 마음은 죽지 않아서 남의 여편네와 무슨 더러운 수작이오? 남 보기 부끄럽지도 않소?"
상관위는 잠자코 말이 없었다.
구천인이 나섰다.
"말씀이 지나치시오!"
구양봉이 몇 걸음 다가섰다. 그러나 구천인은 움직이지 않고 버렸다.
구양봉이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의 주먹이 암만 대단하다 해도 내 보기에 자네는 하룻강아지에 지나지 않아."
그는 갑자기 왼쪽으로 몸을 돌려 오른손으로 힘있게 일 장을 내갈겼다. '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장(丈) 밖에 있는 벽에서 하얗게 먼지가 일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벽에 깊숙이 파인 손바닥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는 무쇠 향로에 손바닥 자국을 냈지? 하지만 나라면 손바닥 모양의 구멍을 냈을 거야. 믿을 수 있겠는가?"
구양봉이 으름장을 놓자 구천인은 한참 동안 멀거니 바라보다가 피씩 웃었다.
"물론 믿지요."
두 사나이는 서로 약을 올리면서 티격태격 말씨름을 했다. 구양봉은 시끄럽다는 듯이 문득 허리를 굽히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몸을 솟구치자 바람이 일고 옷자락이 날렸다. 구양봉은 들판에 낮게 뜬 수리개처럼 법당을 날아다니면서 여기저기 꽂혀 있는 초들을 거두었다. 손에는 물론이고 손가락 사이며 겨드랑이에도 초들이 잔뜩 끼여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구양봉은 '후―' 하고 법당이 들썩하게 숨을 내쉬더니 초들을 어지러이 날려 보냈다.
구천인은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땅바닥에 널린 초들을 줄기 시작했다. 그는 한번에 네댓 개씩 불을 붙여서는 사부의 앞뒤에 다시 세워 놓았다.
구양봉은 발끈 화가 나서 두 손을 뒤로 끌어 당겼다가 확 펴며 앞으로 내밀었다. 초를 줍던 구천인은 그대로 떼밀려 맞은편 벽에 쿵 하고 머리를 찧었다.
"구천인, 이 놈! 다시 초를 주우면 이번엔 죽여 버리겠다!"
구양봉이 도끼눈을 하고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구천인은 빌기는 고사하고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는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다시금 초를 줄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소리쳤다.
"내가 네 놈의 목을 비틀어 죽이면 철장방 방주 노릇도 다하는 게 아니냐? 네 놈의 재주가 뛰어나다 하지만 무림의 대가가 되려면 아직 멀고도 멀었다. 아무튼 지금 죽는다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구천인은 여전히 초만 주울 뿐 반응이 없었다.
구양봉은 징글맞게 코웃음을 치더니 엉거주춤 자세를 취했다. 그는 구천인을 겨누고 두 손을 지그시 뒤로 끌어 가면서 기를 넣어 사정없이 발산하려 했다. 이때였다. 모용쟁이 구천인의 앞을 막아서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초가 너무 많으니 내가 도와드리죠."
그녀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초를 줍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난감해졌다. 그는 이미 손바닥을 세워 기를 넣은 상태라 발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 합마공이란 것은 평생의 내력을 가다듬었다가 번개같이 내뿜어야 하는데 만약 그 힘을 발산하지 못할 경우에는 성난 두꺼비 격으로 제 몸을 상하기 십상인 것이다. 구양봉은 하는 수 없이 두 손을 옆으로 돌려 오른쪽 벽을 향해 발산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벽과 천장이 와르르 무
너져 내렸다. 모용쟁과 구천인은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썼다.
구양봉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데 구천인과 모용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초의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이른 넷에다 상관위 옆에 있는 것까지 더하면 틀림없는 여든한 개였다. 둘은 서로 마주보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모용쟁의 눈동자 없는 눈에 맑은 이슬이 반짝였다.
구양봉은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는 불현듯 성난 사자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고 불끈 쥔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구양봉은 두 손을 와락 뒤로 끌었다가 손바닥을 세우며 죽어라 내쳤다. '쿵' 소리와 함께 상관위는 옆에 있던 젯상, 석상과 함께 허공으로 날아갔다.
"사부님!"
깜짝 놀란 구천인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으나 상관위는 이미 벽돌과 기왓장에 깔린 후였다. 구천인은 두 손으로 미친 듯이 벽돌을 파헤쳤다. 먼지가 뽀얗게 일고 구천인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흘렀다.
벽돌과 기왓장을 헤치고 상관위를 들어 내 보니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온몸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사부님, 사부님……."
구천인은 상관위를 안고 목메어 불러 댔으나 상관위는 대답이 없었다. 구천인의 두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쏟아져 양볼을 적셨다.
모용쟁이 엎어질 듯 다가와 쭈그리고 앉더니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상관위를 찾았다. 구천인이 모용쟁의 떨리는 손을 잡아 상관위의 얼굴에 얹어 주었다. 그제야 모용쟁은 상관위의 피 묻은 얼굴을 매만지며 울먹거렸다.
"돌아가셨는가요? 구 방주님, 이 어른이 도대체 어떻게 되셨나요? 살아 계시나요, 아니면 돌아가셨나요?"
구천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구양봉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망연자실 서 있었다. 한 번 밀어내친 것이 벽이 무너졌고 다시 한 번 내지른 것이 상관위의 죽음을 초래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자위했다.
'어차피 서너 시간 후엔 저절로 숨통이 끊어질 판이었는걸, 뭐. 내가 일부러 죽이려던 것도 아니잖아.'
그러나 모용쟁과 구천인은 생각이 달랐다. 특히 모용쟁은 신경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구양봉은 이제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구나. 유운장 사람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잘못한 탓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철장방 방주 상관위야 무슨 원수진 일이 있는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야. 저토록 잔악한 사내를 멍청하게 사랑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럽구나…….'
구천인은 묵묵히 구양봉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무예가 구양봉보다 셌다면 당장 죽여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합마공을 당해 낼 재간이 그에게는 없었다. 어설프게 덤벼 봤자 공연한 죽음만 자초할 뿐이다.
하지만 구천인 성격에 그냥 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만약 기백이 없는 사내였더라면 상관위의 호감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구천인이 한걸음 다가섰다.
"구양봉, 내 당신의 솜씨를 한번 맛보겠소. 어디 나도 한번 죽여 보시오!"
구양봉은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자식 같으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네가 바로 그짝이구나. 왕중양, 황약사나 홍칠 같은 놈이라면 모르겠지만 네깟 놈 정도는 쥐새끼 죽이듯 할 수 있어.'
아무튼 이 젊은 놈도 재주가 보통은 아니므로 일찌감치 죽여 버리는 게 속이 편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구천인 이 놈아, 정 원한다면 내 맛을 보여 주마. 단단히 각오해라!"
구양봉이 소리치자 구천인이 경멸에 찬 어조로 대꾸했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욕하실 때 나는 반신반의했었소. 하지만 천하에 다시없이 비열한 놈이란 걸 이제야 알게 되었소! 당신 같은 악인은 백 번 죽어 마땅하오!"
"그래? 그럼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겨뤄 보자."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천인이 재빨리 일 장을 안겼다.
"간다―!"
구양봉은 진작부터 구천인의 솜씨를 만만치 않게 보아 오던 터라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구양봉이 봉황력 경공으로 슬쩍 몸을 날리자 구천인이 발산한 장은 그대로 빗나가고 말았다. 구천인이 잠깐 기가 죽어 주춤하는 틈을 타 구양봉의 손이 쑥 날아 들어오더니 구천인의 잔등을 틀어쥐었다.
구천인은 그만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태도였다.
줄곧 입을 봉하고 있던 모용쟁이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구양봉, 당신이 그 젊은이를 죽이는 날에는 나도 이 자리에서 죽는 줄 아세요!"
모용쟁의 말에 구양봉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했다. 모용쟁의 성격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구천인이 모용쟁을 향해 말했다.
"모용 아가씨, 제가 돌보아 드릴 경황이 없으니 먼저 가 보십시오. 나는 이 구양봉과 결판을 내야겠습니다!"
구양봉이 차갑게 웃었다.
'이 놈이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까 네 연놈들은 태연하게 초를 주우면서 이 구양봉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지. 이 놈아, 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악인 신독행의 제자다. 감히 뉘라고 깔보는 거냐? 모용쟁이 공연히 성깔을 부리는 건 하는 수 없지만 네 놈까지 무슨 가당찮은 수작이냐!'
구양봉은 모용쟁을 흘끔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끊어진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이 단검은 바로 모용쟁이 사막에서 구양봉을 위협하던 것으로 제갈정의 손에 칼날이 절반 부러져 나간 상태였다. 그 단검을 보자 구양봉의 뇌리엔 모용쟁과 함께 지내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구양봉은 서글픈 회한을 느끼며 마음을 고쳐 먹었다.
'좋다, 저 놈이 가고 싶은 데로 가게 내버려두자. 저 놈을 죽이고 공연히 모용쟁의 노여움을 살 필요는 없다. 그래도 저 계집은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아닌가.'
구양봉은 거칠게 구천인을 밀쳐 냈다.
"좋다. 내 형수님의 얼굴을 봐서 오늘은 봐주겠다. 하지만 다시 만났을 땐 어림도 없는 줄 알아라!"
구천인은 말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이때였다. 모용쟁이 느닷없이 땅바닥에 쓰러지며 구양봉을 불렀다.
"구양봉……."
놀란 구양봉이 모용쟁에게로 뛰어갔다. 모용쟁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급히 소리쳤다.
"구양봉, 아마도 아이를 낳으려나 봐요. 아이를……."
모용쟁의 얼굴에는 은은한 노을과 같은 홍조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되는 기쁨에 싸여 방금의 노여움은 간 곳 없이 사라진 듯했다. 그녀는 다만 무사히 해산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구천인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급히 다가왔다.
"무슨 일인가요? 혹시 다친 건 아닙니까?"
구천인의 말에 구양봉이 호통쳤다.
"닥쳐! 이 여자에게 상처를 입힌 건 내가 아니라 네 놈이야. 네 놈이 알기나 해? .난 아들을 보게 됐단 말이야, 아들을!"
구양봉은 기쁨의 빛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해서 소리쳤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내가 경황이 없을 때 썩 사라지란 말이야. 죽고 싶지 않거든, 어서!"
그러나 구천인은 계속 주춤거리며 떠나려 하지 않았다.
"난 떠날 수 없소.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모용 아가씨를 돌봐야하오. 당신이나 떠나가시오."
구양봉은 그만 기가 막혔다. 그러나 티격태격 입씨름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 버럭 역정을 냈다.
"내 아들을 보는데 네 놈이 여기서 뭘 한단 말이냐?"
"아니, 당신은 말끝마다 모용 아가씨를 형수님, 형수님 하던데 형수 되는 여자가 낳을 아이가 어떻게 당신의 아들이란 말이오? 아무튼 당신은 더없이 간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니까 내 기어이 이 자리를 지켜야겠소."
"이 미친 놈아, 내가 아무러면 내 자식을 죽이겠느냐?"
"당신의 명성이 그렇게 더러운데 내가 어찌 당신을 믿겠소? 사실 당신은 모든 친지들을 죽였지요? 세상에 식구끼리 물고 뜯고 죽이는 게 유운장 사람들인데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게 당신 아니오? 이젠 유운장 사람의 씨도 말라 버리고 당신 혼자만 남았으니 당신이 으뜸가는 악종이 아니고 뭐겠소?"
"이 놈, 죽는 게 무섭지 않느냐?"
"잘못 보셨소. 철장방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
"허, 제나 사내답군 그래. 반드시 죽여 버리지 않으면 큰일날 인물이군!"
구양봉은 냅다 그를 밀쳐 냈다. 구천인은 폭풍에 휩쓸린 통나무처럼 맥없이 나뒹굴었다. 그러나 구천인은 다시 일어나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구양봉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당장 몸을 풀 판인데 저 놈이.한정 없이 집적거리니 야단이구나, 저 놈을 죽여 버리는 도리밖엔 없겠다.'
구양봉은 달려드는 구천인의 두 어깨를 잡아 양손에 한껏 내력을 넣었다. 구천인의 오장육부를 박살내려는 심산이었다.
구천인은 악을 쓰며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깨뼈가 우드득 부서지는 것 같고 목구멍에선 비린내가 치밀어 그는 울컥 토하고 싶어졌다. 그는 낮을 찡그리고 간신히 아픔을 참으며 생각했다.
'이젠 죽었구나. 이 놈을 이길 재간이 없구나. 내가 죽으면 철장방 놈들이 좋아할 거야. 아마 내가 죽으면 사숙들이 술상을 차려 놓고 경축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나를 깔보고 미워하던 늙다리들인가? 아니, 나는 죽을 수 없다. 절대로 죽을 수가 없어.'
구양봉은 마치 구천인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빈정거렸다.
"세상에는 애당초 자기 일은 뒷전에 놓고 남의 일만 돌봐 주는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어. 인간은 두 종류가 있을 뿐이지.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악인이구, 다른 하나는 겉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악인이야. 이런 두 번째 유형의 악인은 말이야, 스스로도 자기가 악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아. 하지만 틀림없는 악인이지. 그저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은 악인일 뿐이지. 네가 바로 그런 간사한
악인이란 말야. 이 놈, 네가 바로 새로 올라앉은 철장방의 방주지. 하지만 이제 너는 죽고 그 방주 자리엔 다른 사내가 앉게 될 거다. 네 놈은 이제 볼장 다 봤어. 네 놈의 그 위대한 포부도, 뛰어난 재주와 무예도 죄다 땅속에 묻히게 됐단 말이다. 이 놈아, 그래도 죽는 게 무섭지 않단 말이냐?"
구천인은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입을 벌렸다 하면 그 즉시 피를 토할 것이고, 피를 토하면 여지없이 죽게 될 판이었다. 구천인은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서글퍼졌다. 구원을 청하듯 모용쟁을 건너다보니 그녀는 진통을 겪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단.
구양봉은 여전히 구천인의 양 어깨를 무섭게 조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어깨뼈가 부서질 판이었다. 구천인은 끝내 참아 내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이쿠! 이걸 좀 놓아주시오! 내 할말이 있소."
그는 발버둥을 쳤다. 이대로 있다가는 당장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이때 모용쟁이 구양봉을 불렀다.
"이봐요, 어서 내 손을 잡아 줘요, 내 손을요……."
그러나 구양봉은 구천인과 어우러져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구천인이 적수가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요절내 버리지 않으면 나중에 필시 귀찮은 일이 생길 것이었다. 구양봉은 손아귀에 한층 더 힘을 넣었다.
이때였다. 자지러지는 듯한 어린아이의 울음 소리가 법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두 사내의 얽혔던 손이 스르르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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