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493~554년 사이의 사실 답②
(가)는 신라(소지왕)와 백제(동성왕)의 결혼 동맹(493), (나)는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왕(성왕)의 전사(554) 사실이 나타나 있네요.
따라서 493~554년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됩니다.
이 시기 백제에서는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이 차례대로 재위한 시기였고, 신라에서는 소지왕(479~500), 지증왕(500~514), 법흥왕(514~540), 진흥왕(540~576)이 재위하였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답지에서 ① 지증왕, ③ 무령왕, ④ 법흥왕(건원 연호 사용), ⑤ 성왕은 당연히 이 시기 안에 재위하였으므로 답이 될 수 없으니, 정답은 ②번이네요.
즉,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는 답지 자체가 틀린 내용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이 문제는 왕의 재위 시기만 알면 찾을 수 있는 문제네요.
① 지증왕(500~514)은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순장을 금지하였고, 농업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우경을 장려하였어요.
나라 이름을 ‘신라’로 정하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왕’으로 바꾸었습니다. 지방 행정 구역을
주·군으로 나누어 관리를 파견하였으며,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을 정복하였어요.
② 진흥왕(540~576)이 황초령비를 세운 시기는 568년으로 이 시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는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한 후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어요.
이어 대가야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영토 팽창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 북한산 순수비, 황초령 순수비, 마운령
순수비 등의 비석을 세웠습니다.
또한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하였고, '개국'이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품주를 설치하였어요. 불교를
장려하여 황룡사를 건립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으며(국통, 주통, 승통), 팔관회와 백좌 강회 등을 열었어요.
③ 무령왕(501~523)은 지방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어요.
대외적으로는 중국 남조의 양과 교류하여 문물을 수용하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④ 법흥왕(514~540)은 왕권 강화와 자주성의 표현으로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어요.
율령을 반포하고, 골품제를 정비하였으며, 관리들을 17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복색을 달리하였습니다.
또한, 병부를 설치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상대등을 설치하였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금관가야를 병합하였어요.
⑤ 성왕(523~554)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어 중흥을 꾀하였어요.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하고, 수도를 5부, 지방을 5방으로 정비하였어요. 왜에 불교를 전하고(노리사치계)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겼어요. 이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백제의 발전 과정
건국~ 3세기 | ○ 건국 : 온조왕(B.C. 18) : 북방의 유이민+한강의 토착민 ○ 3세기 고이왕 - 한강 유역 장악 →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해 정치 체제 정비 대방군을 공격 관등제 정비(6좌평), 관복제 도입 -------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 형성 법령(율령) 반포 -------------------↗ |
4세기 | 근초고왕 - 정복 사업 - 남 : 마한 완전 정복 → 호남의 곡창 지대 확보 북 : 황해에서 고구려와 대결 → 고구려의 고국원왕(사유) 전사시킴 동 : 가야에 대한 지배권 행사 해외 :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 진출, 일본의 큐슈 진출(칠지도) - 왕위의 세습화(부자 상속제) - 박사 고흥을 통한 역사서 <서기> 편찬 ➡ 중국, 백제, 왜를 잇는 국제 교역의 중심 국가로의 성장 침류왕 - 동진으로부터 불교 수용, 고구려의 공격으로 세력 약화 |
5세기 | 비유왕 - 나․ 제 동맹 체결(433) 개로왕 -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북위에 국서 보냄, 고구려 침략으로 전사 문주왕 -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 왕권 약화로 귀족들이 국정 주도 동성왕 - 국력 회복, 신라와 혼인 동맹 결성(493) |
6세기 | 무령왕 - 지방에 22담로 설치 → 왕족 파견, 백제 중흥의 발란 마련 중국 남조의 양과의 교류 강화(양직공도, 벽돌무덤으로 건축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의 영향) 성왕 - 수도 천도 : 웅진 → 사비(대외 진출 용이) 국호 개칭 : 남부여 제도 정비 : 중앙-22부로 확대, 수도는 5부, 지방은 5방제로 정비 불교 진흥 외교 : 중국 남조와 교류, 일본에 불교 전파 신라와 연합해 한강 유역 회복 → 신라에게 빼앗김 →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 |
7세기 | 무왕 - 중흥 정책(익산으로 천도) 의자왕 -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 당항성 회복 → 나․ 당 연합군의 공격+내부 분열로 멸망(660) |
신라의 발전 과정
내물왕 (356~402) | • 진한 지역 차지, 김씨 왕위 세습 → 마립간(대수장) 칭호 사용 • 고구려 도움으로 왜의 침략 격퇴(호우명 그릇) |
눌지왕 (417~458) | • 백제와 동맹(나·제 동맹, 433) • 왕위 부자 상속제 확립 |
소지왕 (479~500) | •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 경주에 시장 설치 • 백제 동성왕과 결혼 동맹(493) |
지증왕 (500~514) | • 국호 '신라', '왕' 칭호 사용, 지방 제도 정비(군주 파견) • 우경 장려, 동시전 설치(509), 순장 금지, 우산국 복속(512) |
법흥왕 (514~540) | • 병부 설치, 상대등 설치, 율령 반포, 공복 제정, 골품 제도 정비, 연호(건원) 사용 • 불교 공인(527) • 금관가야 정복(532) |
진흥왕 (540~576) | • 영토 확장 : 한강 유역 장악, 함경도 유역까지 진출, 대가야 정복(562) → 순수비 건립(단양 적성비, 북한산비·황초령비·마운령비·창녕비) •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 사상 통합 : 불교 교단 정비, 황룡사 건축 • 거칠부가 국사 편찬(545) |
진평왕 (579~632) | • 위화부, 조부, 예부 설치 • 원광에게 명해 걸사표 작성(수에게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 |
선덕여왕 (632~647) | • 고구려와 연합 시도 실패 후 당과 연합(김춘추의 외교 활동) •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건립(자장의 건의) |
진덕여왕 (647~654) | • 집사부, 창부, 좌이방부 설치 • 성골계 왕위 계승 단절 |
무열왕 (654~661) | • 진골 출신으로 처음 왕위 등극, 무열왕계 시작 • 당과 연합해 백제 멸망(660) |
문무왕 (661~681) | • 고구려 멸망(668), 나·당 전쟁 승리(매소성 전투, 기벌포 전투) • 민족 융합 노력(삼한 일통 의식) |
6세기 백제와 신라에 해당하는 문제를 제시합니다.
유사 기출문제
백제
무령왕(501~523)
14회 고급 5번 문제
5. 백제의 양직공도와 무령왕릉 답②, ⑤
무령왕릉이나 무령왕에 대한 내용은 자주 출제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니, 꼼꼼하게 풀어보면서 마스터해 두세요.
이 문제는 복수 정답이 인정되었던 문제입니다.
(가), (나) 문화재에 대해 묻는 문제인데, 두 문화재가 무엇인지는 제시해 주고 있네요.
(가)는 양직공도입니다.
이 그림은 6세기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에 남조인 양(梁)나라에서 제작된 사신도(使臣圖)입니다.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국 사신들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제시된 그림은 ‘백제국사(百濟國使)’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입니다.
이 그림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면, 백제에 대해 “마한(馬韓)에서 시작된 나라이며,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을 차지해 다스렸다. 고구려와 말씨 및 옷차림이 비슷하며, 백제 무령왕(武寧王)은 고구려를 크게 격파했다는 사실을 알려온 적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백제가 다스리는 탁국(卓國)·다라(多羅)·전라(前羅) 등에 대해서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국사 초상은 현존하는 회화 자료 중 백제인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며, 여기에 대한 서술은 6세기 초 웅진 시대의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나)는 공주에 있는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입니다.
무령왕릉은 백제 웅진(공주) 시기의 고분으로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이라는 특징을 가집니다.
이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무령왕릉은 1971년에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어요.
그래서 이 무덤은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죠.
무덤을 살펴 보면,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습니다.
특히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 주는 지석이 발견되어 무덤의 축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주었죠. 앞에 말했듯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등 30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백제 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① 칠지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칠지도는 4세기 후반에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철로 만들고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겨 넣어 백제 제철 기술의 우수함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② 양직공도의 내용을 보면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을 차지해 다스렸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중국 사서인 송사, 통전 등에 백제가 요서, 진평 2군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무령왕릉은 도굴이 되지 않은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습니다.
④ 무령왕릉 시기 백제의 수도는 웅진(공주)였습니다.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것은 성왕 때입니다.
⑤ 양직공도는 남조의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도, 무령왕릉은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으로 축조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 ⑤번입니다.
10회 고급 11번 문제
11. 사마왕(무령왕) 시기의 사실 답①
이 문제는 무령왕의 업적을 묻는 문제입니다.
사마왕은 무령왕의 이름입니다.
제시된 유물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으로 여기에는 제시된 두번째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매지권(토지를 매수한 문서) 내용이 나타나 있는 게 특징입니다.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② 백제는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관등제와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
의 토대를 마련하였어요.
③ 근초고왕 때의 사실입니다.
④ 침류왕 때인 384년에 불교를 공인하였습니다.
⑤ 동성왕 때인 494년에 신라 소지왕과 결혼 동맹을 맺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7회 고급 4번 문제
4. 무령왕의 업적 답⑤
이 문제는 몇몇 답지가 조금 어렵습니다.
그래서 3점 배점이 된 문제입니다.
역시 무령왕릉 지석과 그 내용이 제시되었죠?
무령왕은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으로, 웅진으로 천도 후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무령왕은 구 귀족 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고,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즉위 첫해인 501년에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폈죠.
그리고 512년 중국 양(梁)나라에 조공(朝貢)하였으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두 성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521년 중국 남조의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기도 했답니다.
① 왕흥사 건설은 백제 위덕왕 때,
② 사비 천도는 백제 성왕의 업적,
③ 북위에 걸사표를 보낸 것은 백제 개로왕입니다.
④ 신라(소지왕)와 혼인 동맹을 맺은 것은 동성왕입니다.
⑤ 백제 무령왕은 양과 교류하였는데, 이때 파견된 백제 사신을 그린 양직공도가 남아 있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4회 고급 3번 문제
3. 양직공도가 그려진 시기 백제의 상황 답⑤
문제에 제시된 양직공도는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6세기 양(梁)나라(남조)에서 제작된 사신도(使臣圖)입니다.
전체 원본에는 25개국 정도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이중 12국 사신들 모습만 남아 있습니다.
특히 ‘백제국사(百濟國使)’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과 여기에 대한 서술은 6세기 초 웅진 시기의 백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기록을 보면, 백제에 대해 “마한(馬韓)에서 시작된 나라이며, 중국의 요서(遼西) 지방을 차지해 다스렸다. 고구려와 말씨 및 옷차림이 비슷하며, 백제 무령왕(武寧王)은 고구려를 크게 격파했다는 사실을 알려온 적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한편 백제국사 초상은 현존하는 회화 자료 중 백제인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서는 유일한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① 양직공도는 무령왕 때인 6세기 초에 그려진 것으로, 당 건국(618) 이전의 상황입니다.
② 백제의 전성기인 4세기 근초고왕 때의 일입니다.
③ 5세기 중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에 위협을 느끼던 개로왕 때의 사실입니다.
④ 고구려 장수왕이 펼친 외교 정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성왕(523~554)
24회 고급 4번 문제
4. 백제의 천도와 발전 답④
백제의 수도는 한성 → 웅진(공주) → 사비(부여)로 변화되었습니다.
한성(서울)은 백제가 건국(기원전 18)하여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기기 전(475)까지 도읍하였던 곳입니다.
(가)는 웅진(공주)으로, 이곳은 한성을 빼앗기고 천도(475)한 후 성왕이 사비로 천도(538)할 때까지 수도였습니다.
(나)는 사비(부여)로, 이곳은 성왕이 천도(538)한 후 백제 멸망(660) 때까지의 수도였습니다.
ㄱ - 고구려 평양성 공격은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때로, 이 당시 수도는 한성이었습니다.
이때 백제와의 평양성 전투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어요.
ㄴ - 22담로 설치는 웅진 도읍 시기인 무령왕 때의 일입니다.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어요.
ㄷ - 고흥이 "서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것은 근초고왕 때입니다.
ㄹ - 백제가 한강 유역을 빼앗긴 후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회복한 것은 사비 시기인 성왕 때입니다.
사비 천도 후 백제 중흥을 위해 노력한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이용해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어요. 그러나 곧 신라에게 이를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매복에 걸려 전사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2회 고급 7번 문제
7. 백제 성왕(523~554) 시기의 역사적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사료 (가)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해왔을 때 백제의 요청으로 신라군이 구원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한 내용이 나타나 있네요. 이를 통해 당시 백제와 신라는 동맹 관계였음을 파악할 수 있어요.
(나)는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가던 도중 백제왕이 신라 복병에게 살해되었다고 나와 있으니, 이는 당시 두 나라의 동맹 관계가 끝났음을 보여주네요.
(가)의 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나)는 신라를 공격하러가다 관산성에서 전사한 성왕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럼 성왕이 관산성에서 전사한 것이 554년이니, (가)는 548년(554-6=548)이라는 계산이 나오네요.
따라서 이 문제는 548~554년에 있었던 사실을 찾으면 됩니다.
성왕은 백제 부흥을 내세우며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중앙 관청 22부로 정비하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습니다.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이를 통해 신라는 한강 상류,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하였어요. 그런데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 지역을 공격하여 빼앗는 일이 벌어집니다(553). 이 사건으로 120여 년 간 유지되었던 나·제 동맹(433~553)도 깨지죠. 이에 분노한 성왕은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하였어요(554).
이 당시 신라의 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540~576)이었습니다.
① 금관가야 멸망은 532년의 일입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고 진흥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562)하였습니다.
②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7세기 중엽의 일입니다.
③ 백제의 웅진 천도(475)는 문주왕(475~477) 때입니다.
④ 신라는 진흥왕 때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551), 이후 백제를 공격해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았습니다(553).
⑤ 신라는 내물왕(356~402) 때인 400년경 신라에 침입한 왜의 세력을 물리치는 데 고구려(광개토 대왕) 군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1회 고급 4번 문제
4. 사비 도읍 시기의 역사적 사실 답①
백제와 관련하여 자주 출제되는 주제는 근초고왕, 무령왕, 성왕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들 왕은 백제의 각 도읍 시기를 대표하는데, 한성 시기에는 근초고왕, 웅진(공주) 시기에는 무령왕, 사비(부여) 시기에는 성왕이죠.
따라서 각 도읍 시기를 이들 왕과 연결시켜 공부해 두어야 합니다.
백제는 두 번의 천도를 단행하였습니다.
백제의 첫번째 수도는 한성(서울)으로, 이곳은 백제가 건국(기원전 18)하여 고구려 장수왕에게 빼앗기기 전(475)까지 도읍하였던 곳입니다.
이 시기 고이왕(234~286) 때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으며,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마한 세력 정복,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고구려 고국원왕 전사), 가야에 지배권 행사,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였으며,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어요. 침류왕(384~385)) 때에는 불교를 공인합니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맞서 비유왕(427~455)은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었으나,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개로왕(455~475) 때 수도 한성이 함락(475, 개로왕 전사)됩니다.
두 번째 수도는 웅진(공주)으로, 한성을 빼앗기고 천도(475)한 후 성왕이 사비로 천도(538)할 때까지 수도였습니다.
이 시기 전사한 개로왕에 이어 즉위한 문주왕(475~477)은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으나(475), 왕권이 약화되어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동성왕(479~501)) 때부터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 신라와 동맹을 강화(결혼 동맹, 494)하였으며, 무령왕(501~523)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며 백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죠.
세 번째 수도는 사비(부여)로, 이곳은 성왕이 천도(538)한 후 백제 멸망(660) 때까지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에서 성왕(523~554)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였어요. 그리고 불교를 진흥하고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습니다.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무왕(600~641)은 익산으로 천도해 백제 중흥을 이끌려 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천도는 무산되었죠. 의자왕(641~660)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함께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당항성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660).
① 한성 시기인 침류왕(384~385) 때의 일입니다.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 공인(384)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어요.
②, ③, ④ 사비로 천도하였던 성왕 때의 일입니다.
⑤ 사비에서 익산으로 천도를 추진하였던 무왕 때의 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9회 고급 4번 문제
4. 백제 각 수도의 시기별 역사적 사실 답⑤
백제에 대한 내용은 크게 근초고왕, 무령왕, 성왕에 대한 내용이 출제됩니다.
이를 도읍과 연결시켜 보면 한성 시기에는 근초고왕, 웅진(공주) 시기에는 무령왕, 사비(부여) 시기에는 성왕에 대한 내용이 출제됩니다.
따라서 이 세 시기를 왕과 연결시켜 공부해 두시면 됩니다.
(가)는 한성(서울)으로, 이곳은 백제가 건국(기원전 18)하여 고구려에게 빼앗기기 전(475)까지 도읍하였던 곳입니다.
(나)는 웅진(공주)으로, 이곳은 한성을 빼앗기고 천도(475)한 후 성왕이 사비로 천도(538)할 때까지 수도였습니다.
(다)는 사비(부여)로, 이곳은 성왕이 천도(538)한 후 백제 멸망(660) 때까지의 수도였습니다.
(내용 설명이 필요 없는 분은 바로 답지로 가셔도 됩니다.)
(가) 시기(기원전 18~475)의 주요 사실
고이왕(234~286)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죠.
근초고왕(346~375) 때에는 마한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였고 낙동강 유역의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복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로써 백제의 왕권은 점차 전제화되고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었습니다.
침류왕(384~385)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습니다.
그러나 4세기 말 이후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장수왕 시기에 백제는 고구려와의 대립에서 고전합니다. 고구려는 장수왕 때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펴자 비유왕(427~455)은 신라와 나·제 동맹을 맺어 이에 공동으로 대응하고자 하였죠. 그러나 장수왕은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 개로왕 전사)시킨 후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혀 백제는 위축됩니다.
(나) 시기(475~538)의 주요 사실
고구려의 남하 정책에 밀려 한성과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문주왕(475~477) 때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어요(475).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었고, 왕권이 약화되어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습니다.
이후 동성왕(479~501) 때부터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 신라와 동맹을 강화(결혼 동맹, 494)하여 고구려에 대항합니다.
무령왕(501~523)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해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 백제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죠.
(다) 시기(538~660)의 주요 사실
성왕(523~554)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어요.
그리고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무왕(600~641)은 익산으로 천도해 백제 중흥을 이끌려 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대로 천도는 무산되었죠.
의자왕(641~660)은 신라를 공격해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신라에서 당으로 가는 교통로를 끊기 위해 고구려와 함께 당항성을 공격하였습니다.
① (다) 시기 성왕 때의 일입니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죠.
이에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였습니다(554).
② (가) 시기인 침류왕 때의 사실입니다.
백제는 침류왕 때 동진으로부터 승려 마라난타를 통하여 불교를 수용하였습니다(384).
③ (가) 시기인 근초고왕 때의 일입니다.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이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였습니다(375).
④ (가) 시기인 고이왕 때의 모습입니다.
고이왕 때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면서 좌평과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였어요.
⑤ (다) 시기인 성왕 때의 사실입니다.
성왕은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5회 고급 3번 문제
3. 백제 성왕의 업적 답①
문제에 제시된 왕의 행적 중 551년의 '한강 하류 지역 회복', 554년의 '신라 정벌에 나섰다가 관산성에서 전사'의 내용을 통해 백제 성왕에 대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빈칸에 들어갈 내용은 답지에서 백제 성왕의 행적을 찾으면 됩니다.
성왕은 백제 부흥을 내세우며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중앙 관청을 22부로 정비하고 지방 제도도 정비하였습니다. 또한,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고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자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 관산성에서 전사하였어요.
① 백제 부흥을 내걸고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로 고쳤습니다.
② 어려운 답지네요.
대사진(帶沙津)은 오늘날 하동 지역으로, 대가야가 왜와의 교역 창구로 활용하였던 곳입니다.
백제는 6세기 초 무령왕 때 이문(남원)과 대사진(하동) 일대를 장악하였습니다.
③ 요서, 산둥 지역에 진출은 근초고왕 시기입니다.
④ 불교 수용은 침류왕 때(384)입니다.
⑤ 태자 전지를 일본 외교 사절로 보낸 것은 아신왕 때(397)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5회 고급 12번 문제
12. 6세기 전반 고구려의 내분과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 답③
이 문제는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문제이나,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 상황을 이용해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니 한번 같이 풀어보자구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서 고구려 안원왕(531~545)이 나타나 있네요.
그리고 고구려가 이 당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고 있다는 내용도 나와 있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 고구려가 내정 불안을 겪고 있던 이 시기 국가를 새롭게 중흥시킨 백제 성왕(523~554)과 신라 진흥왕(540~576)은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신라는 한강 상류를, 그리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차지하게 되죠.
그런데 연합을 맺었던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이를 빼앗는 일이 벌어집니다.
화가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554).
이 사건으로 120여 년 간 유지되었던 나·제 동맹(433~554)도 깨지게 됩니다.
①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에 서북쪽의 전연의 침입, 그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의 공격을 받습니다.
결국 백제(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371)하는 등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② 고구려는 고국천왕(179~197)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습니다(194).
④ 고구려 보장왕(642~668) 때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트집잡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당군을
물리쳤습니다(645).
⑤ 고구려는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합니다.
이때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신라
지증왕(500~514)~법흥왕(514~540)
23회 고급 5번 문제
5. 이차돈 답⑤
유물 사진만 보고도 이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분도 많죠?
제시된 인물 설명에 '순교',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목에서 흰 피가 솟는 모습'이라는 내용을 통해 이차돈 순교와 관련한 것임을 파악할 수 있어요.
이차돈은 법흥왕의 측근으로,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를 자처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당시 신라에서는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았어요.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인 372년, 백제는 침류왕 때인 384년에 국가에서 불교를 공인한 것과 달리 신라는 이때까지도 불교를 허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법흥왕은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 불력에 의하여 국운의 번영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토착 신앙을 신봉하는 귀족들의 반대가 심해 불교를 공인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은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를 자청하고 나섰어요.
결국 법흥왕은 이차돈의 의견을 수용해 참형을 내리자 이차돈은 “부처님이 신령하다면 내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멀리 날아 금강산(경주의 북쪽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라고 전해집니다. 이에 왕과 군신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공인하였다고 합니다(527). 이 사건으로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가 완공되었어요.
헌덕왕 때인 818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순교비를 건립하였어요. 비는 조각과 비문(碑文)이 결합된 형태로, 6면으로 된 비석 제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을 부조로 표현하였으며, 제2~6면에는 가로 세로 선을 긋고 순교와 관련한 내용을 새겨 넣었어요. 이 비문은 경주 백률사에 있다가 1914년 현재의 국립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졌어요.
① 혜초(704~787)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혜초는 통일 신라의 승려로 당에 가 인도에 순례를 다녀온 후 인도와 중앙 아시아 여러 나라의 풍물을 생생하게 기록한
"왕오천축국전"을 남겼어요. 현재 이책은 프랑스에 있습니다.
② 백제 성왕 때의 노리사치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원효(617~686)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효는 불교 서적을 폭넓게 이해하고, 모든 것이 한마음에서 나온다는 일심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종파들과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고 분파 의식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극락에 가고자 하는 아미타 신앙을 자신이 직접 전도하며 불교 대중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④ 의상(625~702에 대한 설명입니다.
의상은 모든 존재가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화엄 사상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화엄 사상을 바탕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을 건립하였죠.
그리고 아미타 신앙과 함께 현세에서 고난을 구제받고자 하는 관음 신앙을 이끌며 불교 대중화에도 노력했어요.
⑤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가 계기가 되어 불교가 공인되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17회 고급 2번 문제
2. 법흥왕(514~540)이 실시한 정책 답③
문제에 주어진 자료에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의 수용에 대한 내용이 나오니 밑줄 친 왕은 법흥왕이네요.
제시된 자료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법흥왕 때의 기사입니다.
법흥왕이 불교를 수용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발이 심하자 이차돈의 순교를 통한 불교 공인(527)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나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에 이르러 나라의 법령인 율령을 반포(520)하고. 17관등과 모든 관리들이 입는 공복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치 질서 확립을 통해 다양한 세력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통합시켰습니다.
또. 병부를 설치하여 군사 지휘권을 장악하였으며 골품제를 정비하고 진골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을 두어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536)하여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나타냈습니다.
귀족 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불교를 공인(527)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였으며.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여 낙동강 유역의 가야 땅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법흥왕 때의 내정 정비를 바탕으로 진흥왕(540~576)은 대외 정복 활동을 활발히 펴 전성기를 누립니다.
① 진흥왕 때의 사실입니다.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
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거칠부를 시켜 국가의 역사를 정리하도록 하여 ‘국사’를 편찬하였습니다.
② 진흥왕 때의 사실입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③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일률적인 통치 규범을 마련하였습니다.
④ 내물왕(356~402) 때의 사실입니다.
신라는 내물왕 때부터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왕의 칭호도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 대신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으로 바뀌었습니다.
⑤ 외사정 설치는 문무왕(661~681) 때입니다.
문무왕은 외사정을 설치(673)하여 지방관을 감찰하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5회 고급 3번 문제
3. 신라 지증왕(500~514) 시기의 사실 답③
문제에 제시된 내용 중의 핵심 키워드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512)'입니다.
이사부가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한 시기의 왕은 지증왕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는 지증왕의 업적을 찾으면 되겠네요.
신라는 지증왕 때 들어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었어요.
국호를 사로국에서 '왕의 덕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는 의미의 이름인 '신라'로 정하고, 왕호도 마립간에서 중국식 칭호인 '왕'으로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는데, 지방은 주·군 제도를 정하고 각주에는 군주(軍主)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습니다. 이를 통해 중앙 집권을 보다 강화하고 지방 제도를 군사 제도와 병행시키죠.
이러한 일련의 제도 정비는 신라가 선진 중국 문화와 정치 제도를 받아들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신라 사회의 한층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밖에 시장의 상행위를 감독하는 기관으로 동시전을 설치(509)하였으며, 농경에 소를 이용하는 우경을 적극 권장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였어요.
그리고 노동력 확보를 위하여 순장을 금지하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이사부를 시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였습니다(512).
① ‘마립간’이라는 칭호는 내물왕 때부터 사용되었으며, 지증왕 때부터는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② 이차돈의 순교를 통한 불교 공인(527)은 법흥왕 때의 일입니다.
③ 신라는 지증왕 때에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답니다.
④ 김해 금관가야 정복(532)은 법흥왕, 고령 대가야 정복(562)은 진흥왕 때입니다.
⑤ 백제와의 나·제 동맹 체결(433)은 5세기 초인 눌지왕 때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진흥왕(540~576)
24회 고급 7번 문제
7. 신라의 화랑도 답④
세속 5계는 신라 화랑들이 행동 규범으로 삼았던 것이죠.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습니다. 이 조직은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어요.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습니다.
화랑도는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어요.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어요.
① 박사와 조교는 교육과 관련된 것으로, 이는 교육 기관인 국학 등에 해당합니다.
② 만장일치제 운영은 신라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와 관련 있죠.
귀족들은 화백 회의를 통해 국왕을 폐위시킨 적도 있고, 새 국왕을 추대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왕권을 견제하
기도 하였습니다. 화백 회의의 수장은 상대등이었어요.
③ 경당은 고구려가 지방에 설치한 교육 기관이었어요.
고구려는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가르치고,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습니다.
④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정비하고 이를 국가 발전에 이용하였습니다.
⑤ 화백 회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화랑도는 귀족 자제에서 평민까지 여러 계층이 참여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22회 고급 3번 문제
3. 진흥왕(540~576)의 업적 답⑤
문제에 제시된 첫번째 자료에 '북한산을 순행하고 국경선을 정하였다.', '북한산주 설치', 그리고 두번째 자료에 '관경을 순수하면서'라는 내용을 통해 한강 유역 확보와 북한산 순수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자료와 관련있는 왕은 신라 진흥왕입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율령 정비, 관등제 정비와 공복 제정, 골품제 정비, 불교 수용, 금관가야 정복 등을 통해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하였어요. 이를 바탕으로 진흥왕(540~576)은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어요.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기원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정복 전쟁을 통해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를 빼앗아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어요.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 강화와 전략 거점 확보, 황해를 통한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어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①, ④ 동시전 설치, 왕이라는 칭호 사용은 지증왕(500~514) 때의 일입니다.
지증왕 때에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
그리고 동시전(509)을 설치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복속시켰어요(512).
② 첨성대는 선덕여왕(632~647) 때 세웠어요.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세우고 호국의 의지를 담은 황룡사 9층탑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야성을 백제에게 빼았기고(642),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③ 법흥왕(514~540) 때의 일입니다.
법흥왕은 병부의 설치, 율령의 반포, 공복의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어요.
또, 골품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고자 하였습니다.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였어요.
⑤ 진흥왕 때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던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정복(562)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20회 고급 5번 문제
5. 장수왕과 진흥왕의 업적 답③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장수왕, 신라는 법흥왕~진흥왕에 대한 문제가 자주 출제됩니다.
(가)는 '영락'이라는 연호와 신라에 군사를 보내 왜를 격퇴해 준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광개토 대왕(릉)비입니다.
이 비를 세운 이는 광개토 대왕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장수왕(412~491)입니다.
(나)는 '태창(진흥왕이 568년부터 사용한 연호) 원년 왕이 순수하고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진흥왕(540~576)이 세운 순수비 중 황초령비입니다.
(가)
광개토 대왕(391~412)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412~491)은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외교 관계를 맺어 둘 사이를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통해 국경을 안정시켰습니다.
414년에는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 대왕비를 건립하였어요.
427년에는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여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죠.
그리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475)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충주) 고구려비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공동으로 대항하기 위해 나·제 동맹을 체결했습니다(433.)
(나)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540~576)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죠(554) 이어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562)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태창'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① 당과의 안시성 전투(645)는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642~668) 때의 일입니다.
② 미천왕(300~331) 때인 4세기 초반의 일입니다.
고구려는 4세기에 이르러 5호 16국 시대의 혼란을 틈타 활발하게 대외 팽창을 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천왕 때 낙랑군(313)을 완전히 몰아 낸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남쪽으로 대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③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던 대가야를 정복(562)한 것은 진흥왕(540~576) 때입니다.
신라는 법흥왕 때 김해의 금관가야를 정복(532)하고 진흥왕 때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였습니다.
④ 이사부를 시켜 우산국(울릉도)을 복속(512)한 것은 지증왕(500~514) 때의 일입니다.
지증왕은 정치 제도를 더욱 정비하고 국호를 '신라',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습니다(503).
⑤ 장수왕(412~491)과 진흥왕(540~576)은 시기적으로 겹치지 않았어요.
장수왕 재위 당시 한강 유역은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진흥왕이 백제 성왕과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할 때
고구려 왕은 양원왕(545~559)이었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15회 고급 2번 문제
2. 신라의 화랑도 답①
'외모가 고운 남자를 뽑아 곱게 단정하게 하게 하고.....'라는 내용으로 보아 (가)에 들어갈 내용은 '화랑(花郞)'입니다.
따라서 (가)가 중심이 단체는 바로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정비된 화랑도입니다.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귀족 자제 중에서 선발된 화랑을 지도자로 삼고, 귀족은 물론 평민까지 망라한 많은 낭도가 그를 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화랑도는 여러 계층이 같은 조직 속에서 일체감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구실도 하였답니다.
신라 청소년은 화랑도 활동을 통하여 전통적 사회 규범을 배웠습니다.
이들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제천 의식을 행하고, 무술과 도의를 닦으며 사냥과 전쟁에 관하여 교육을 받음으로써 협동과 단결 정신을 기르고 심신을 연마하였습니다.
이러한 화랑도는 진흥왕 때 국가 차원에서 그 활동을 장려하여 국가적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원광은 청소년에게 세속 5계를 가르쳐 마음가짐과 행동의 규범을 제시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신라의 발전과 삼국 통일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① 진흥왕은 유능한 청소년을 양성하는 단체인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화랑도는 세속 5계를 지키며, 산천을 널리 돌아다니면서 무술과 도의를 닦고, 전쟁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워 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② 백제의 귀족 회의인 정사암 회의에 대한 설명이다.
③ 고려 시대의 농민 조직인 향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신라의 귀족 회의인 화백 회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조선 시대 유향소(향청)와 향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라의 화랑도
기원 |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됨 |
개편 | 진흥왕 때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 확대 |
구성 | 화랑(진골 귀족) + 낭도( 일반 귀족이나 평민) |
활동 | 제천 의식 거행, 무예, 사냥과 전쟁 학습 |
규율 | 세속 5계(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전수) ⇨ 유+불+선의 가치관 |
특징 | • 계층 간의 대립과 갈등 조절․완화 기능, 인재 선발 기능, • 국가 발전과 삼국 통일에 기여 |
14회 고급 4번 문제
4. 신라 진흥왕(540~576) 시기의 모습 답①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밑줄 친 왕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죠?
첫번째 자료를 보면 '백제 왕이 관산성을 공격하니 군주 김무력이 교전하였고, 고간 도도가 백제왕을 죽였다'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관산성을 공격하다 죽은 백제의 왕은 바로 성왕(523~554)입니다.
백제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연합해 고구려가 공격해 한강 유역을 일시 회복합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를 차지하였는데, 기습적으로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까지 공격하여 빼았습니다.
이에 백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죠(554).
그리고 김무력은 김유신의 할아버지이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셋째아들입니다.
금관가야는 법흥왕 때 신라에게 멸망(532)하였다는 거 아시죠?
두번째 자료를 보면 가야를 공격하여 정벌할 때 사다함이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 나오네요.
이는 대가야를 정벌(562)한 것을 뜻합니다.
위의 두 자료에 나타난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 전사(554), 대가야 정복(562)은 진흥왕 때의 사실이니 진흥왕(540~576) 시기의 사실을 고르면 됩니다.
진흥왕 시기의 주요 사실은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불교 교단 정비, 황룡사 건축, 한강 유역 차지,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 고령의 대가야 정복,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 건립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② 신라의 불교 공인은 법흥왕 때(527)입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372), 백제는 침류왕 때(384) 불교를 공인하였는데 비해, 신라는 귀족들의 반발 때문에 법흥왕
때 들어서야 공인을 하여 삼국 중 가장 늦었어요.
③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지증왕 때(512)의 일입니다.
④ 관료전 지급은 신문왕 때(687)입니다.
신문왕은 귀족들에게 지급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답니다.
⑤ 국학 설립은 신문왕 때(682)의 사실입니다.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가르치고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11회 고급 5번 문제
5. 삼국의 여러 유물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 파악 답②
이 문제는 카페 <시험전 꼭보기방>에 올려놓은 삼국시대 비문 총정리 글을 읽은 분들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네요.
그 글을 안 읽었더라도 1점짜리 문제 수준이기에 대부분 맞았을 문제입니다.
유물 이름+설명까지 다 제시하고 있는데 고급 2점짜리 문제라면 유물 이름까지 제시하지 않았어야 하는 문제지요.
그럼 답지를 하나씩 알아볼까요?
① 칠지도는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보낸 것으로, 강철로 만든 칼에 금으로 글씨를 상감해 새긴 것입니다.
이는 백제와 왜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죠.
② 중원(충주)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 죽령~남양만까지 영토를 확장했음을 알려주는 비석입니다.
③ 임신서기석 은 신라의 두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학습하기로 한 맹세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도교 사상이 반영된 유물로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져 있는 사신도, 백제의 금동 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사택지적비를 들 수 있어요.
④ 북한산 순수비는 신라가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광개토 대왕의 왜구 격퇴 내용은 광개토 대왕릉비에 나타나 있죠.
⑤ 호우명 그릇은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것입니다.
이 그릇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 국강상 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유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8회 고급 8번 문제
8. 진흥왕(540~576)의 업적 답②
문제에 제시된 자료는 진흥왕 순수비 중 ‘북한산비’의 비문 내용입니다.
교과서 사진 자료를 꼼꼼히 살펴 알아둔 분들은 북한산비임을 쉽게 파악하였을 겁니다.
(북한산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용산)에 보관중입니다. 조선 후기의 금석학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이 비를 판독하였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그리고 자신을 황제에 비겨 '태왕' 또는 '짐'이라 하였으며, '개국' 등의 연호를 사용하여 자주 의식을 나타내었습니다.
특히, 이 시기 한강 유역의 장악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섭할 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① 신라가 율령을 반포한 것은 법흥왕(514~540) 때입니다.
③ 신라가 우산국(울릉도, 독도)을 정벌한 것은 지증왕(500~514)때입니다.
④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활동을 통한 영토 확장은 고구려 광개토 대왕(391~412)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장인인 김흠돌 모역 사건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귀족을 숙청하고 전제 왕권을 강화한 이는 신문왕(681~692)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5회 고급 7번 문제
7. 진흥왕(540~576) 시기의 사실 답④
문제에 제시된 비석의 내용 중 서두에 나와 있는 '짐은 하늘의 은혜를 입고......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라는 내용을 보고 광개토 대왕릉비로 착각하는 분도 있었을 것 같네요.
그렇게 헛갈린 분은 ①번을 답으로 체크하는 우를 범하였겠네요.
그러나 비석의 내용 끝에 나와 있는 '관경(管境)을 순수(巡狩)'라는 내용를 통해 이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라는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신라는 법흥왕(514~540) 때 국력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후 진흥왕 때에 이르러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였습니다.
그리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하였으며, 황룡사를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어요.
이를 토대로 영토 확장에 나서 영토를 크게 넓혔습니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의 땅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의 땅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차지하였고, 동해안을 따라 함흥 평야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진흥왕은 새로 차지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우죠.
① 광개토 대왕(391~412) 때의 고구려의 영통 확장 내용입니다.
② 장수왕(412~491) 때의 남한 강 유역 점령 내용입니다.
③ 지증왕(500~514) 때의 우경과 순장 금지 내용입니다.
⑤ 문무왕(661~681) 때의 민족 융합 정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5회 고급 12번 문제
12. 6세기 전반 고구려의 내분과 신라의 한강 유역 차지 답③
이 문제는 고구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문제이나,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혼란 상황을 이용해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니 한번 같이 풀어보자구요.
문제에 제시된 자료에서 고구려 안원왕(531~545)이 나타나 있네요. 그리고 고구려가 이 당시 왕위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고 있다는 내용도 나와 있죠?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 고구려가 내정 불안을 겪고 있던 이 시기 국가를 새롭게 중흥시킨 백제 성왕(523~554)과 신라 진흥왕(540~576)은 연합해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을 공격합니다. 신라는 한강 상류를, 그리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차지하죠. 그런데 연합을 맺었던 신라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공격하여 이를 빼앗는 일이 벌어집니다. 화가난 성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맙니다(554). 이 사건으로 120여 년 간 유지되었던 나·제 동맹(433~554)도 깨지게 됩니다.
①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에 서북쪽의 전연의 침입, 그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의 공격을 받습니다.
결국 백제(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고국원왕이 전사(371)하는 등 국가적 위기 상황을 맞게 됩니다.
② 고구려는 고국천왕(179~197) 때 먹을거리가 모자란 봄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가을에 추수한 것으로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였습니다(194).
④ 고구려 보장왕(642~668) 때 당 태종이 연개소문의 정변을 트집잡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합니다.
고구려는 국경의 여러 성이 함락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안시성을 중심으로 민·군이 협력하여 당군을
물리쳤습니다(645).
⑤ 고구려는 고국천왕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합니다.
왕위 계승도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으며, 족장들이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화가 더욱 진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4회 고급 4번 문제
4. 삼국 시대 세워진 신라의 비석 답①
(가) 영일 냉수리비(경북 포항)입니다.
이 비의 건립 연대는 신라 지증왕 4년(503)으로 추정되는(눌지왕 27년인 443년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비에는 이 지역에서 발생한 재산권 분쟁을 각부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중신 회의에서 합의하여 처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등 신라의 옛 지명과 아간지(阿干支), 나마(奈麻) 등의 관등명이 나타나 있어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 울진 봉평비(경북 울진)입니다.
신라가 동북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비문에는 당시 신라가 영토 확장으로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할 때 주민들의 항쟁 사태가 일어나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6부 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관련자를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 비가 건립되기 이전인 6세기 초 이전에 이미 신라에 6부가 성립되었다는 것, 법흥왕 때의 율령 반포 등을 파악할 수 있답니다.
(다) 단양 적성비(충북 단양)입니다.
이 비는 진흥왕 때인 551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지역 점령에 대한 포상과 이 지역 주민에 대한 회유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진흥왕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한강 상류까지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답니다.
(라) 북한산비(서울)입니다.
이 비는 진흥왕 때인 568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아두세요.
(마) 마운령비입니다.
마운령비(568)는 황초령비(568)와 함께 진흥왕 때 신라가 함경남도 지역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① 울진 봉평 신라비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3회 1급 9번 문제
9. 삼국의 한강 유역 쟁탈 과정에서의 기념비 답①
문제에 제시된 비석을 세운 공통적인 배경을 묻는 문제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제시된 비석이 어느 나라에서 언제 만든 것인지 파악해야 합니다.
충주(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 장수왕 때, 단양 적성비와 북한산비는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충주(중원) 고구려비는 장수왕 때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를 기념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비의 건립 연도는 여러 설이 있으나 481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비의 내용과 존재를 통해 장수왕 때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단양 적성비는 진흥왕 때인 551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 지역 점령에 대한 포상과 이 지역 주민에 대한 회유의 목적으로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를 통해 신라가 진흥왕 당시 고구려가 차지하였던 한강 상류까지 장악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어요.
그리고 북한산비는 진흥왕 때인 568년 경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가 한강 하류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비는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의 고증에 의해 진흥왕 순수비임이 밝혀졌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결국 이를 종합해 볼 때 세 개의 비석들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세운 기념비임을 알 수 있지요?
당시 삼국 간의 항쟁에서 한강 유역을 장악한다는 것은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한강을 차지한 국가가 국가적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겠지요?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을 당시 전성기를 보였고, 고구려는 장수왕 때, 신라는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차지하면서 가장 전성기를 보였습니다.
② 신라와 고구려와의 동맹 관계는 중원고구려비에만 해당됩니다.
이 밖에 호우명 그릇과 광개토 대왕릉비를 통해서도 파악해 볼 수 있습니다.
③ 제시된 비석의 내용에 불교적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④ 도교와 관련된 삼국의 문화유산으로는 고구려의 사신도와 백제의 금동대향로, 산수무늬 벽돌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문으로는 백제의 사택지적비가 있어요.
⑤ 삼국 시대에 유학을 공부하였던 내용을 알려주는 금석문으로는 임신서기석을 들 수 있습니다.
임신서기석을 통해 신라에서도 청소년이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①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26회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이번 시험을 보고온 분들을 포함해
이 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미리 적어보자구요.
소지왕에서부터 진흥왕 사이에 있었던 사건들의 흐름을 알고 있으면 풀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아요 근데 그 사이에 있던 일들을 정확히 알아야 할 듯...!! 저는 틀렸지만요.. 그런데 통일 이전의 신라+백제의 흐름에 대해 생각 할 수 있었던 좋은 문제인 것 같아요!!
솔직히 왕들의 순서를 외우고 있진 않아서....지증왕은 먼지 모르고 있다가 (가)의 마립간 보고 알았는데 법흥왕이 독자적인 연호 쓴지는 몰랐네요...ㅠㅠ
소지왕 - 진흥왕 사이면 나제동맹하고 신라가 한강유역 차지하고 이런 것까진 느낌이 왔는데 정확히 순서를 잘 몰라서 틀렸어요.
근데 생각해보니 마운령비면 저 위쪽인데 한강보다 더 올라가야 하니 더 늦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물론 전 마운령이 어딘지 몰라서 못 풀었을 거에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정말 정말 감사해용~
북한산비가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 진흥왕 순수비였다는 점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저번에 몰라서 틀렸는데 여기서 다시 복습해서 좋네요
신라 왕들은 순서 정도만 적당히 외우고 있었는데 저렇게 자세하게 알아야 하는줄 여기서 알게 되네요~
기출문제 해설을 보면서 주먹구구식의 암기가 아니라 전체적인 흐름 파악 속에서 문제의 핵심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네요 감사합니다
문제에 대한 해설이 전체적인 흐름을 다루고 있어서 이해가 잘 됩니다.
감사합니다. 기출문제 해설이 너무 상세해서 좋네요!
ㅅ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꼼꼼한 해설이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지없이 ....또 감사합니다.....만 ㅜㅜ
위에 댓글에도 그렇게 부탁을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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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관산성 전투... 해설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7번같은 문제가 제가 느끼기에는 제일 까다로운것 같아요. 삼국의 각각 흐름은 알겠는데 국가가 섞어서 나오면 한참을 생각해야 풀수있다고나할까요..ㅋㅋㅋ
자세한 설명 좋아요!!
해설감사합니다.
확실히 고급문제를 보니 공부를 더 까다롭게 접근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왕들의 업적또한 흐름도 중요하지만 더 세세하게 공부하고 다시 이 문제들에 도전을 해봐야겠습니다.감사합니다
댓글은
감사합니다....라는 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문제에 대한 난이도, 자료 등에 대한 느낌이나
개인적인 문제풀이 접근법 등을 달아주세요.
부탁드립니다......^^
9번 문제에서 답지는 평이해서 답은 맞추었지만 단양 적성비는 사실 다른 비석들에비해서 잘 눈여겨 보지않았는데, 이 문제를 통해서 좀 더 꼼꼼하게 접근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니 너무 어렵네요 ㅠㅠㅠ
7번문제처럼 어떠한 시기에 어떤 왕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 순서를 맞추기가 아직도 저는 어렵네요 ㅠㅠ 저렇게 꼼꼼히 해설을 준비해 주시다니.. 한번 더 필기정리하면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ㅠㅠ
몇년도인지를 외워야풀수있는문제네요ㅠㅠㅠ
한국사는 흐름이 중요하다는걸 다시 한번 깨달은 문제였습니다. 문제 밑에 깔끔하게 정리를 해줘서 한번 더 보고 갈 수 있어서 좋은것 같아요!
관산성전투랑 성왕이 연결이 잘안되었지만 보기보고 맞출수있네요!
ㅠㅠ 왕의 재위 몆년을 알아야하는 문제라서 까다롭네요 ㅠㅠ역시 26회가 어려워요
26회풀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고있어요 ㅠㅠ
26회.. 멘붕오네요... 지증왕하면 우산국정벌(이사부),마립간에서 왕, 우경장려 정도만 알고있었는데 순장금지라니요...
다시한번 백제왕, 신라왕 업적에 대해 알고 갑니다
시기별 전후관계를 다 알아야 풀수 있는 고난이도 문제네요 ~ㅎ
진흥왕 업적 순서도 알아야하는군요~~~~
신중하게 생각해야할 문제이네요
성왕에 대해서도 문제가 자주 나오네요! 필히 복습해야겠어요! 풀이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풀이와 설명을 해 주셔서 몰랐던 것은 메모해 복습을 하니까 완전한 내 것이 되는 것 같아요.
삼국 시대는 한 장 메모에 고구려, 백제, 신라 왕들을 같은 시기별로 적어놓고 공부를 하니까 이해가 빠르고 문제 풀기가 훨씬 쉬워져요. 조금씩 자신감을 주신 사랑방 최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