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과 이상ㅡ
1937년 김유정과 이상은 이땅에서 나란히 사라졌다.
김유정은 3월 29일 스물아홉 나이에 이상은 20일 뒤인 4월 17일 스물일곱에 죽었다.
둘다 폐결핵이 원인 이였고 요절이었다.
두사람은 서로의 예술 혼을 이해했던 절친한 문우였다
순수 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에서 단짝으로 지냈던 이들이 죽자 문단에서는 그해 5월 15일 부민관에서 합동 추모식을 올렸고, 평론가 백철은 "파시즘의 도래를 앞둔 문학의 죽음" 이라고 애도하기도 했다
김유정과 이상은 여러가지 점에서 닮았다.
1)둘다 집안 환경이 불우했다
이상은 2살 때 백부집에 양자로 들어갔다.친부는 이발업 등을 했던 막노동꾼 이었고,백부는 총독부 기술직에 있던 중인 이였다.
김유정은 천석군의 아들로 서울에도 백여칸의 집이 있을 정도 였으나,아버지 사망후 형의 방탕한 생활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나중에는 밥 장사를 했던 누이에게 얹혀 지내는 처지였다
2)또한 지독한 실연의 아픔이 있었다,
이상에게는 정상적인 사랑인지 도피인지 아리송하지만 금홍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소설「날개」에 나오는 인물이다.
김유정은 휘문보고 졸업직후 나중에 명창이 된 박녹주 에게 구애를 했다.
열렬한 사랑이 거절당하자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자학적으로 떠돌이 들과 어울렸다
3)둘은 폐결핵에 꽁꽁 묶여 있었다.
이상은 20세 무렵부터 각혈을 했고,김유정은 25세 때 발병했다.이상의 폐병은 그래도 느릿느릿 하게 진행되었지만
늑막염과 치질 까지 앓고 있었던 김유정 은 속도가 빨랐다.
식민지 라는 시대적 좌절 아래 죽음의 늪으로 차츰 빠져들어가는 그들의 광기와 열정으로 생명의 불꽃을 태워 만든 것이 바로 소설 이였다
김유정과 이상은 "구인회" 후기 동기인 이었다
구인회는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이 1933년 창설한 문학회
나이와 처지가 비슷한 둘 사이에는 각별한 정이 흘렀고 이상은 그것을 「신성 불가침한 찬란한 정사」라고 규정했다
이상이 서울을 떠나 현해탄을 건널때 가장 아쉬워한 문우가 김유정 이었다.
절망의 늪으로 보나,각혈로 보다 김유정이 한단계 위였지만 엄살이 심한 쪽은 언제나 이상이였다
두사람이 언제 부터 알게되었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실연에 빠진 김유정이 고행 춘천으로 내려 갔다가 문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33년 무렵으로 추측될 뿐이다.
사랑과 실패 집안의 몰락 문학을 향한 갈구,그리고 폐병에 이르기 까지 둘은 닮은 꼴 이였다,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두사람의 관계를 이상의 단편소설 「김유정」에서 발견 할수 있다.
『창문사에 내가 집무랍시고 하는 중에 (유정이)떠억 찾아온다.와서는 내 책상 앞에 마주 앉는다.
앉아서는 바윗덩이 처럼 말이없다.
낸들 또 무슨 신통한 이야기가 있으리요,그저 서로 냉냉히 앉아있는 동안에 나는 나대로 교정속에 일을 한다』
둘은 취해 길거리에서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이다 경찰에게 혼나기도 하고, 술집에서 강원도 정선 아리랑을 부르기도 한다,무엇보다 둘을 결합시킨 것은 폐병에 대한 조소와 그것을 초극하려는 의지였다.
이상은 소설 「실화」에서 도일 직전 김유정을 방문 했을 당시를 처연하게 묘사하고 있다.
『생사의 기로 (유정은)이 칼날 같은 지점에 서지도 앉지도 못하면서 오직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울고 있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이어 이상이
「신념을 빼앗긴 것은 건강이 없어진 것처럼 죽음의 꼬임을 받기 쉬운 것이 더군요.」
라고 말하자 김유정은「이상 형!형은 오늘에야 건강을 빼앗기셨습니까? 인제..겨우..오늘이야..인제...」라며 단말마의 외침으로 받는다.
이상은 「유정!유정만 싫다지 않다면 나는 오늘 밤으로 치러버릴 작정이였다. 일개 요물에 부상당해 죽는것이 아니라
27세를 일기로 불우한 천재가 되기위해 죽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함께 죽자는 얘기였다.
「초롱보다 앙상한 김유정의 가슴이 부풀었다 구겨졌다」
하는 것을 보며 이상은 말한다.
「김형!저는 내일 아침 차로 동경 가겠습니다.」
김유정의 묵묵부답.
「또 뵙기 어려울 걸요」
이때가 36년 10월. 이상은 그날 유정을 찾은 것을 몇번이고 후회하면서 이별한다.
그리고 1년도 채 못되어 김유정은 경기도 광주군 누이네 집에서, 이상은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삶의 날개를 접는다.헤어질때의 말처럼 결국 다시 만나지 못한채 말이다.
김유정의 재는 한강의 뿌려졌고,이상은 미아리 공동묘지에 누웠다.
같은 장소에서 죽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표현대로 「찬란한 정사」였다.
드디어 글 올렸다. 쑥쓰럽다..헤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