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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한담(茶中閑談)2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2023년 10월 15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팍스(pax)라는 말
오늘부터 본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 주제는 ‘우리는 어디에 있지?’ 그러면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답이 안 나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것 없이 즉,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보지 않고서 바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또는 그곳에 있는 내가 누군지를 답할 수 없습니다. 사실상 돌보다도 화강암보다도 더 단단한, 두께조차 매우 두꺼운 돌 껍질을 깨고 노른자가 튀어나온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기 위해,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 단어 하나를 살펴봐야 될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다 좋아하는 단어죠. 평화!
평화라는 단어는 영어로 피스(peace)입니다. 하지만 이를 한자로 번역하면 평화(平和)가 아니에요. 피스는 팍스(pax)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죠. 우리가 팍스 로마(Pax Romana)나 팍스 아메리카(Pax Americana)라고 할 때, 그
팍스의 변형된 단어가 원래 피스입니다. 피스는 정확하게 한자로 번역하면 평정(平定)입니다.
지금 현재 피스라는 말을 평정의 개념이 아닌 평화의 개념으로 쓰면서, 평화 운동을 하겠다는 분들의 사고에도 알게 모르게 팍스가 들어가 있어요. 평정이 들어가 있는 거죠. 이러한 사고로 세상이 다 덮였으면, 사람을 아끼는 사고로 세상이 다 덮였으면, 이 자연과 환경이라고 불리는 대생명을 잘 바꾸는 것으로 생각이 다 돌아갔으면, 그 소망 자체가 다 팍스의 뿌리인 거죠.
그러니까 지금 현재 미국에 의해서, 팍스 아메리카에 의해 움직이고 있죠. 움직이고 있으니까 사실은 미국에 의해서 평정돼 있는 상태인 거죠. 평정돼 있다 보니까 누구도 함부로 못 설치는 거죠. 그러니까 전쟁도 크게 없이 큰 문제가 없는 준고요한 상태로 흘러가는 거죠. 팍스의 힘의 근거인 미국이 만약에 그 평정을 잃어버린다면, 그때부터는 서로 부딪히겠죠. 미국의 약화라는 게 굉장히 다양한 의미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얘기를 드렸지만 이런 팍스가 우리가 정치적으로, 역사적으로, 문명사적으로는 몇 개 밖에 고찰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차이니즈 월드 오더(Chinese world order)도 다 그런 개념일 텐데요. 실제로는 우리 삶에서 수많은 팍스가 지나갔다는 거죠. 어떤 것은 강한 흔적을 남긴 채 내 안에 잠복돼 있고, 어떤 것은 좀 희미하게 잠복되어 있고, 어떤 것은 그 팍스는 지나갔지만 여전히 작용하고 있고... 팍스 덩어리들이 마치 얼음 조각들처럼 서로 부딪히면서 내 삶 안에서 공존하고 있다는 거죠.
그 이유가 뭘까? 왜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어쨌든 제가 지난번에 믿으면 믿고 말면 말고의 식으로 ‘우리 문명은 리셋(reset)이 한 두 번 된 것 같다. 리셋 되는 과정에서 앞에 있던 어떤 질서를 그리워하는 유전인자가 남아 있는 것 같다. 그게 인간에게는 이상향이라는 것에 대한 꿈으로 계속 표출이 되는 거다.’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니까 엄밀하게 보면 그 이상형도 따지고 보면 그 이전 팍스에 대한 하나의 그리움일 수 있어요.
그게 최선이었다는 거겠죠. 그렇게 바라보면 현재 우리에게 어떤 팍스가 위주를 이루고 내 삶을 움직여 가고 있는지를 떠나서, 저는 지금 현재 상태가 거의 그런 팍스의 실종 상태 내지 그냥 내 내부에서 춘추 전국 시대, 다양한 팍스들이 움직이고 있는 상태로 보여집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일정 팍스가 전제될 때만 쓸 수 있었던 용어들을 쓰고 있다는 거죠.
일정한 팍스에서 나오는 용어들
‘착하다’. ‘뭐가 착해?’ 어느 팍스라는 것이 전제가 안 되면 착하다는 게 성립이 안 되죠. ‘어질다’, ‘옳다’, ’맞다’ 내용이 하나도 없어요. 어느 팍스가 전제가 안 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들인데 다 쓰고 있죠. 뭔 얘기를 하면 ‘옳소’ 하는 것은 그 옳다는 것을 이렇게 유지해 줄 수 있는 기준 표준이 있어야만 가능한 거지요. 그러면 과연 현재 그런 게 있을까요?
너무 많아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면 ‘착하다’고 하면 ‘뭐가 착한 거죠?’. 아주 극단적인 비유를 들면 그래요. 지금 내일 모레면 가자지구로 막 탱크 몰고 들어간다고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은 외국에서 자진 귀국한 30만 넘는 예비군들이 착한 거죠.
근데 가자지구에서 지금 어찌 될지 모르고 발발 떨고 있는 팔레스타인들 입장에서 보면 전혀 착하지 않죠. 그러니까 우리가 착하다는 말을 그런 거대한 것 없는 일상생활에서는 막 써요. 사실 그런 일상생활에서도 자기만이 착하다고 하는 팍스가 있다는 거예요. 뭔가 평정된, 자기를 평정하고 있는 질서가 있다는 거죠. 가치 기준이 있고 표준이 있다는 거죠. 이 표준이 안 잡히면 진보도 보수도 불가능해요.
어떤 분은 그러죠. “아, 공자라는 사람 그 사람도 한 명의 지식인인데 왜 세계의 4대 성인이라 불리지? 배운 걸로 치면 내가 공자보다 더 배운 것 같은데.” 여기 있는 분들 거의 다 공자보다는 더 배웠다고 봐야죠. 공자가 와서 ISO 검증을 하겠어요? 뭘 하겠어요? 소크라테스도 왜 4대 성인이라고 불리지? 아무리 봐도 플라톤보다 잘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그런 분들에 대해서 4대 성인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은 커녕 심지어 자기를 평정한 팍스를 가지고 그분들을 평가를 해요. 공자는 보수주의자이자 복고주의자라고 말입니다. 공자가 복고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공자라는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가 하면 어질다, 바르다, 착하다, 옳다 이런 것에 대한 기준을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시대에서 사람이 살 때 그런 스탠다드(standard)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부르짖는 사람이에요. 그 스탠다드를 구하려고 한 것이 과거의 역사에서 구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에서 구하려고 했다고 해서 그가 결코 보수주의자는 아니에요. 복고주의자도 아니고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예요. 심지어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같은 제자를 통해서 남긴 것에서 끊임없이 아틀란티스 같은 대륙을 그리워해요. 사라진 대륙을 왜? 거기에서의 질서, 거기에서의 무언가 기준을 끌고 와서 의미 없이 쓰이고 있는 옳다, 맞다, 착하다, 어질다 등 그곳에 구체성을 주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야만 뭔가 얘기가 진행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이 진행이 안 되면 10년을 얘기했는데 서로 딴 소리하고 있는 거예요. 지난번에 우리 홍선생님이 물어봤잖아요. 진짜 밥 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영혼에다 밥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영혼에 밥을 주려면 밥이 뭔지를 떠나서, 영혼과 돼지는 동급이라고 보고요.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큰 차이가 없으니까 동급이라고 보고.
돼지에게 밥을 주려고 여물을 들고 갔는데 우리를 안 열면 밥을 줄 수가 없잖아요. 나 혼자 밥 준다고 설치고 있는 거예요. 맨날 끓여 갖고 맨날 들고 가고 그리고 돼지 보고 잘 있냐고 맨날 물어보고, 돼지는 들리지도 않아요. 문을 안 열었으니까. 내 영혼을 향해서 문은 안 열고 끊임없이 내 영혼을 향해서 문후를 해요. 그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살아요.
아무튼 그런 팍스에 의해 수 없는 교육을 받아요.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은 다양한 시대에 그냥 이렇게 절충시켜 놓은, 크게 부딪히는 것 없이 끌어 모아 놓은 편집된 모자이크 된 팍스를 습득하는 과정이 교육이었어요. 무슨 교육을 받든 실제로 팍스를 교육받는 거였어요. 언제부터? 태어나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리고 나보다 먼저 태어난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그들에게 위엄도 받고 아낌도 받지만 그들로부터 팍스를 주입 당해왔던 거죠.
그래서 제가 그 주입 안 됐을 때의 상태로 돌아가서 이야기 마당이 안 열리면 풀 수가 없다! 기억 없을 때 5살 이전에 내 상태로 돌아가서 얘기해 보자. 이게 이야기 마당에서 만났는지! 아니면 이게 지금 꿈에서 만났는지! 진짜 우리가 만난 건지 헷갈릴 만큼... 꿈속에서 소변이 엄청 마려워 가지고 화장실 찾아가 화장실에서 쉬하면 큰일 나죠. 그런 정도의 모호한 감각으로 이야기 마당에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겁니다.
내 안의 그릇이 있으니 팍스를 담는 것
왜 그럴까? 우리는 평정될 수 있는 팍스를 왜 그렇게 갖고 있을까요? 우리 안에 그걸 담아놓을 수 있는 기관이 있기 때문이 그런 것이죠. 이제 우리 사람에 이제 들어가는 거죠. 내 안에 그렇게 세상과 사람과 삶을 평정해 왔던 그것들이 담길 수 있는 그릇이 있었으니까, 그 그릇에 담겨서 작용하는 거죠. 그릇이 없었다면 스쳐 지나갔겠죠. 마치 채근담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바람이 거친 대나무 숲에 불어오나 바람이 지나간 뒤에 대숲이 그 소리를 보관하고 있지 않듯이 머물러 두진 않듯이, 한겨울에 기러기 참 못을 지나거나 못을 지나간 다음에 그 못이 기러기의 그림자를 머물러 두지 않듯이.” 그렇게 못 산다는 말이에요. 왜? 무언가 들어오면 우리한테 담기는 그릇이 있어요.
대나무 숲은 그 소리를 담아놓는 그릇이 없으니까 못 담아놓는 거예요. 대나무 숲에도 그걸 담아놓는 그릇이 있었으면 대나무들이
온갖 소리를 다 할 거예요. 천 년 전에 했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소리도 하고 있을지 모르죠. 차가운 연못에도 그 그릇이 있었다면 얼음이 녹을 때마다 또는 얼음이 얼 때마다 그 어부들이 내질렀던 ‘고기가 어디 있나’ 하는 소리가 들려 나올지 모르죠. 지난 해에 지나갔던 달 그림자가 희미하게 비칠지 모르죠. 그러나 거기에는 담는 그릇이 없었죠.
우리에게는 그와 같이 내 삶을 평정했고 그 이전에 부모의 삶과 벗들의 삶과 조상들의 삶을 평정해 왔던 것들이 크게, 작게, 많게, 적게 담길 수 있는 그릇이 있었다는 소리죠. 그렇다면 그 그릇이 뭘까?
그 그릇 때문에 많은 분들이 얘기를 해왔죠. 그것은 간단해요. 욕망이에요. 욕망이라는 그릇이 있으니까 담아왔던 거예요. 근데 이 욕망이라는 게 욕망으로 표현되면 좋은데 이미 팍스가 담긴 욕망은 욕망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으로 나와요.
우리가 순수하게 슬퍼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화내고 애달파하는 이 감정들이 순수한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 갖고 있는 그릇에 담긴 이야기들이라는 거예요. 즉 그 그릇의 이야기이지, 감정이라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무언가를 담고 있는 그릇의 이름이지, 그 감정 자체의 순수한 내용이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담긴 것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같은 문제에 대해서 전혀 슬픔을 못 느끼고 어떤 사람은 엄청난 슬픔을 느낍니다. 그 담겨 있는 것의 내용이 달라지면 젊었을 때 내가 못 느꼈던 일체화와 슬픔이, 나이가 들자 느껴서 드라마를 보고 울고 있기도 하고. 어릴 적 드라마를 보고 노인들이 막 감정 이입이 돼서 헉헉거리는 걸 보면서 드라마를 보고 왜 저러시나 했더니 자신이 그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걸 확인할 수도 있죠. 왜? 그 안에 담긴 팍스들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거예요.
어떤 것은 내 욕망이라는 그릇 하에서 이미 소용 한도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그런 것들은 떠나가거나 폐기 처분되거나 희미해지거나 거의 작용하지 않게끔 깊은 곳에 가라앉겠죠. 근데 가라앉지 않는 것들은 얘기를 하죠. 어떤 때는 가라앉아 있던 것이 뜨고 어떤 때는 뜬 것이 가라앉죠. 때로는 물기운이 떠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불기운이 가라앉기도 하죠.
이렇게 다양하게 되는 이유는 그때그때 욕망에 의해서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거죠. 욕망이라는 건 삶의 본질이니까요.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욕망이니 까요. 형태로서 어떤 얘기도 할 수 없었던 그것이, 넓은 의미의 욕망 없이는 조금의 흙도 나에게 가져오지 못해서 내 몸을 붙이지 못했을 거니까요. 1g도 안 될지도 모르는 영혼이 있다고 치면 ‘뭐 영혼이 어디 있었냐’고 물어보면 그때부터 얘기 끝난다고 말씀 드렸지만.
이렇게 (몸은) 덩어리 큰 0.1톤에 가까운 덩어리를 가지고 있어요. 이게 다 흙이잖아요. 직접적으로 섭취한 흙은 드물지만 간접적으로 섭취한 흙이잖아요. 근데 그렇게 뭉치는 것, 그렇게 내게 끌어와서 내게 머물러 두게 하는 것 자체가 생존의 본 모습이자 욕망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욕망이라는 것은 없앨 수가 없는 거죠. 욕망이 멈추는 순간 죽는 거죠. 옛날 분들이 욕망을 내려 놓으라고 한 것이 욕망을 없애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 욕망이 나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게 만들어라 하는 거죠.
제가 예전에 어딘가 옛날 분들이 쓰고 요즘은 그런 말 쓰는 분들이 증산교, 원불교 외에는 아무도 안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개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개벽이라는 말이 저는 그렇게 정의한 바 있습니다. “과거로 하여금 현재가 지배 받지 못하게 만든다.” 같은 말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나에게 담겨 있는 그 평정, 팍스, 그것의 틀, 그런 것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못하게 하려면 그 자체를 일단 알아야 돼요. 뭐가 담겨 있는지를! 그런데 그 담겨 있는 것을 순수한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정으로만 생각해서 이게 뭐냐고 접근하면 어떤 것도 같은 메아리처럼 계속 질문이 돌아와요. 나에게 내가 질문한 만큼 질문이 돌아와요. 내가 아프게 질문한 만큼 아프게 돌아오고 슬프게 질문한 만큼 슬프게 돌아오고 강하게 질문한 만큼 강하게 돌아와요. 그래서 돌아오는 그런 질문이 아니라 하나라도 드러내보고 정체를 보는 것!
그러면 감정은 어디에 있느냐? 그 그릇은 어디에 있느냐? 1g도 안 되는 영혼 속에? 아니죠. 예를 들어서 영혼이 1g짜리가 있다고 쳐요. 지가 무슨 능력으로 이런 걸 붙여요. 지가 무슨 수로 0.1톤을 만들어요.
영혼은 어떻게 존재할까
아무튼 그걸 붙이기 위해서는 영혼이라는 게 하나의 행성이라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항성이라고 생각해보죠. 태양 같은 항성으로 생각해 보죠. 항성이 항성으로서 작용을 하자면 항성이 또는 항성인 이유는 행성이 있기 때문이에요. 항성이 행성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은하든, 우주의 어떤 부분에 포함되도록, 물리는 하나의 톱니바퀴를 가져야 하죠. 태양 하나만으로 하나의 태양계가 돼가지고 어디에 끼어들지 않아요. 그렇게 작용할 수가 없어요. 적어도 어느 영역에서는 그래요.
우리가 그래서 더욱더 영혼에 못 다가갈지도 몰라요. 태양을 직접 갈 수 없어요. 태양계로 가는 게 태양을 직접 향해 가는 게 아니잖아요. 지구에 와도 태양계잖아. 지구는 행성이라 불리지만 달이 있기 때문에 행성이라 불리는 것이지, 엄밀하게 보면 크게 보면 위성이죠. 해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것들이죠. 크게 보면은 본체가 있고 그 본체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본체를 벗어나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기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는 행성들이 존재하듯이… 그런 스텝 별들, 스텝 기관들이 있어야만 영혼이 영혼이 되죠.
그래서 영혼은 솔로로 존재하지 않아요. 영혼은 존재하는 순간부터 행성들을 달고 시작해요. 그게 제가 느끼는 모습이에요. 네가 뭘 봤냐고 물으면.. 머 할 말 없죠. 하지만 그럼 행성들을 보면 돼요. 그 행성들을 쭉 보면은.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원자를 보더라도 분자를 보더라도 그것이 또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원소도 쪼개면 또 이루어져 있고 근데 다 거기에 보면 연결되기 위한 행성체들이 있어요. 전자도 크게 보면 행성체인 거예요.
그런 행성체가 없이 물질은 다른 물질과 결합해서 받아들이지 못해요. 본체가 직접 결합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늘 행성체가 있는 거죠. 그 행성체가 행성체의 작용을 옛날 사람들이 기(氣)라고 불렀는지도 몰라요. 또는 행성체 자체를, 그와 관련된 시스템 전체를 기라고 불렀는지 몰라요. 그리고 행성체가 아닌 그 항성 본체를 기라고 불렀는지도 몰라요. 옛날 사람들이 뭔가 느낌이 있었다면 깨달아서 그렇게 했던, 이론적으로 가서 그렇게 했던 아마 그렇게 접근했을 거예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옛날 그러면 성리학자들이 주기론이나 뭘 얘기하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렇게 존재는 한다는 거예요. 존재를 설명하다 보니까 이 모든 존재가 생명화되고 실체화되고 사물화되는 과정 속에서는 행성체가 더 중요하구나! 행성체가 움직여야 항성체가 비로소 이야기하는구나! 아니 항성체가 뭔가에 에너지를 뿜는 순간 행성체는 작용하겠구나! 이런 것에 대한 얘기를 지금 하자는 건 아니에요. 그것도 의미가 없어요. 실체 자체로 안 들어가면.
욕망의 약화와 진정한 노화
근데 아무튼 이렇게 해서 하나씩 하나씩 흙을 빨아들이고 공기도 빨아들이고.. 물론 공기가 아니죠, 빌 공(空) 자가 아니니까. (아무튼) 무언가를 받아들여서 몸을 만들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돌아가요. 근데 이 행성체의 역할과 힘이 약화되면 욕망은 약화돼요.
그래서 늙은 사람들이 노욕을 가진다고 그러지만 그것은 늙은 사람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에요. 늙은 사람은 확실히 욕망이 적어야 돼요. 늙은 사람의 욕망이 젊은 사람에 비해 못지 않다는 것은 지배당하고 있는 거예요. 팍스의 노예가 되어 있는 거예요. 돈이란 팍스의 노예가 되어 있든, 권력이란 팍스의 노예가 되어 있든, 정의라는 이름의 노예가 되어 있든, 노예가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지, 그가 늙어서 드러낼 수 있는 본 모습은 아니에요.
늙어서 (드러낼 수 있는) 줄어드는 욕심을 가지고 차츰차츰 그렇게 그 행성체가 멈추는 순간을 향해서 가고 있는 사람들을 우린 늙은이라 불러요. 그리고 그런 행성체를 스스로 드러내고 다듬으면서 항성체 자체의 운행을 조리 있게 해나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어른이라고 불러요.
근데 거꾸로 그 나이가 돼서도 팍스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사람들을 우리가 삭다리라 불러요. 원래 늙은이를 표현하는 말에 세 가지가 있어요. 팍 삭은 거죠. 그러니까 껍데기는 다 삭았고 몸체는 다 삭았는데, 하는 짓은 욕망 덩어리이면 그게 이제 삭다리가 되죠. ’많이 늙으셨네요’는 괜찮아요. ‘많이 삭았네요’는 이건 욕 되는 거죠.
어른이라는 말은 백제에서나 또는 일부 중앙아시아의 기마 종족들에서 그 비슷한 언어들이 남아 있는데 어루화의 표현이에요. 그렇게 해서 욕망의 팍스를 상당수 내려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인간과 인간, 어떤 팍스를 매개로 하지 않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도력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을 어루화라고 그랬어요. 이게 어른이에요.
원래 기마 민족에게서 초기에 그리움의 대상으로서 먼 시절의 팍스가 작용할 적에, 그때 어루화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래서 왕이었어요. 세속 권력의 고대 국가의 왕이 아니에요. 왕의 또 다른 말이 이른바 일본식 표현인데 오야지잖아요. ‘오야지’는 욕망의 끝장판이죠. 아무튼 말도 바뀝니다만. 그러니까 제가 지금 드리는 이야기는 일단은 임시 방편이에요. 다음 다음 번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것에 접근하기 위한 적어도 얘기를 잠깐 돌아가서요.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필요한 용어 정리
우리가 차를 하잖아요. 그러면 결국은 나중에 하다 보면 뭘 만들게 되느냐면 차 용어 사전 만들 수밖에 없어요. 아니면 나중에 어느 순간 얘기가 안 통해요. 같은 얘기하는데 다르게 하고 다른 얘기하는데 같은 얘기하고 있어요. 결국은 용어 사전 또는 용해 사전 이런 걸 만들 수밖에 없어요.
어떤 학문이나 공부를 배우더라도 거기에 해당되는 기초 약속어 사전은 또는 그와 같은 체계는 없을 수가 없어요. 의학도 의학 용어 사전, 자동차를 만드는 분은 자동차 용어사전 등을 안 만들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의류도 의류 용어 사전을 만들어요. 우리도 심지어 맛이라는 용어 테스트 이름까지 쓰고 별 거 다 써요. 다 만들어요. 정치도 정치 용어 사전을. 왜? 이미 그런 것을 통틀어서 쓸 수 있는 공통된, 혼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언어는 없다는 거예요.
언제부터? 적어도 석가모니 시대부터도 없었어요. 싯다르타 시대부터 없었으니까 언어로 놔둘 수 없다 그랬겠죠. 그래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언어로 나타낼 수 없으면 그 팔만 대장경은 어떡하라고요? 왜 가는 곳마다 금강경을 설하고 법화경을 설하고... 다 말인데! 말로 통할 수 없는 저 하늘과 소통한다고 하시는데 광야에 가서 하는 기도는 뭐고, 12사도와 나누는 대화는 뭐냐고요. 방편으로서의 약간의 약속은 필요해요.
제가 그랬잖아요. 믿든 말든 뭐 그냥 들어보고..! 꿈 속에서는 날기도 하는데, 꿈속에서는 몇 백 광년을 그냥 1초 만에 가는데. 그 자유를 가진 위대한 꿈을 꾸는 인간이, 잠만 자면 꿀 수 있는 꿈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위대한 인간이… 사실은 2차원의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3차원 아니잖아요. 유사 3차원(이죠).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밑에서 꼼짝거리는데요. 우리가 볼 때는 3차원인데 이불 위에서 보면 2차원이에요. 2차원끼리 2차원이라 그러면 그래도 뭔가 올리고 싶은 마음, 자신들을 3차원으로 보려고 하는 이 마음은 인간(에게) 어떤 팍스를 떠나가지고 공통된 욕망이었던 것 같아요. 그것은 아틀란티스 때도 그랬던 것 같고, 무우 시대에도 그랬던 것 같고, 패낭 시절에도 그랬던 것 같아요. 패낭이란 말은 전쟁이란 말이죠. 제가 느끼고 아주 오래된 7천 년 정도 된 언어를 통해서 조금 맛을 본 바로 패낭이란 말이 전쟁이란 말인데요. 왜냐하면은 그냥 순수한 제 얘기 하면 안 되는 게 서글프지만 현실이에요.
오늘 저랑 늘 같이 다니는 분이 코로나가 심하게 걸렸어요. 엊그저께 전주 갔다가 걸렸다고 본인은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2m가 안 되는 공간 내에 저랑 늘 같이 있어요. 금요일 밤에 전화가 왔어요. “선생님 괜찮으세요?” “괜찮은데요” “저는 코로나 걸려가지고 지금 병원에 입원해가지고 수액 맞고 있는데 상태가 안 좋습니다” “그래요?” 그랬습니다.
고언어(古言語)를 사용하는 이유
저는 제가 안 걸렸다는 느낌만 갖고 그냥 나오면 되는데 그럴 수가 없더라고요. 10시 반에 편의점 가서 검사키트를
사가지고 검사를 했습니다. 그것도 코에서 입으로 면봉이 나올 정도로 깊이 찔려가지고 했는데, 왜냐면 확실히 해야 하니까요. 결과가 음성이 나오니까 여기에 온 거예요. 음성이라고 제 자신은 100%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나 신뢰라는 장치가 있잖아요. 저도 그런 팍스를 안 쓸 수가 없어요.
그런 팍스가 존재하잖아요. 아무튼 그런 팍스가 저에게는 고(古)언어예요. 쓸 수 있는, 제출할 수 있는 팍스를 넘어서고자 하면서 팍스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어요. 팍스가 만들어 놓은 수많은 개념들과 용어들에서 벗어날 수도 없어요. 그래서 저도 ‘그러나’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요.
제가 쓴 책은 다른 어떤 분들이 쓴 책들 보다 ‘그러나’가 10분의 1 이하로 적어요. 그렇지만 ‘그러나’가 있어요. 안 되는 줄 알지만 써요. 자연계에 ‘그러나’가 어디 있어요? 자연계 아니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는 ‘그러나’가 없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은 굳이 붙이자면 ‘그리고’예요. 그래서인지는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서’는 팍스니까요. ‘그러므로’ 이건 이미 결론이 도출되고 있는 방식이니까 수학적인 연산에도 해당되는 그런 방식이니까, 이것들은 팍스일 수 있으나 ‘그리고’와 AND는 팍스가 ‘아니고’도 다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나’는 팍스예요. ‘그러나’는 없어요. 막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고 시커먼데 비가 안 왔다. ‘그러나’를 붙이죠. 천둥번개가 침에도 불구하고 비는 내리지 않았다. 천둥번개가 치지 않고 그냥 비가 안 내린 거예요. 그렇잖아요. 자연계에서는...
그러니까 역접이라는 것도 없어요. 있을 수가 없죠. ‘아니다’라는 것도 사실 없어요.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오줌 누러 갔어요?’ ‘똥 누러 갔다 왔는데요’ 말이 돼요. 둘 다 그림이 그려지잖아요. ‘오줌 누러 갔다 왔어요?’ ‘아니요. 아닌데요’. 뭐예요? 그림이 안 그려지는 거예요. 그림을 잔뜩 그려놓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니까 와장창 깨지는 거예요. 거울 깨지듯이.
그러니까 오줌 누러 안 간 걸 어떻게 그리겠어요. 그릴 방법이 없잖아요. 실체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BUT만 없는 것이 아니라 NOT도 원래 없는 거죠. NOT도 팍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죠. 그 어떤 수학적 연산에 의한 팍스이든, 논리적 연산에 의한 팍스이든 다 그게 만들어진 거죠. 그러니까 그런 팍스를 이용 안 할 수도 없어요. 근데 그런 팍스로서 저는 고언어학을 쓴다는 거죠. 패낭 얘기를 했잖아요.
사례 1 - 패낭((狽狼)
패낭은 무굴족이 남긴 언어예요. 무굴족은 몽골족의 원형입니다. 지금의 필리핀 앞바다 내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인근에 있었던 삶터였던가 봐요. 삶터였는데, 그 삶터에 있었던 조직이 패(狽)와 낭(狼)이라는 두 가지에 의해서 운영이 되고 있었던가 봐요.
낭이라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정신적 조직, 고구려로 치면 조의선인 (早衣仙人)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조의선인이나 화랑도 그 전의 어떤 팍스를 복원하려는 거였죠. 초기에 자기들이 원형으로 삼고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상향의 무언가의 모습이 되고 있는 그것을 복원하려고 하는 하나의 교육 체계인 거죠.
그런 낭이 있었고, 현실적으로 세금도 거두고 뭐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저는 세금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다 이름만 세금이지 다 도둑질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세금은 미개한 시대에만 존재하는 거죠. 원래는 세금이 없어야죠. 세금이 없으면 어떻게 사느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터가 우리에게는 적어도 전부 자산이에요. 도로도 자산, 공기도 자산, 물도 자산, 교통안전도 자산 다 자산이에요. 이 자산을 공유하고 있잖아요. 이 자산 자체로서 자본주의라면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가 있잖아요. 가격이 있어야 되는 거죠. 그 가격을 선불하고 생산을 하고 나면은 그 선불로 받은 자산 이용 판매처를 갖고 국가는 운영될 수 있어요. 그게 천부자산권일 수 있고 그게 있어야만 진짜 민주주의일 수 있죠.
아무튼 지금은 기업 활동해서 또는 개인이 소득 활동을 해서 잘 벌면 거기에서 몇 %(가 세금으로 계산하는데) 그건 인두세죠. 사실상 인두세죠. 처음부터 비용으로 받아야 되는 거죠. 도로를 횡단하다가 걸렸다면 이건 기본질서 위반으로 해가지고 범칙금 물리면 되는 게 아니에요. 사회의 간접 자산인 기본권에, 기본 질서도 간접 자산이니까요. 그 자산에 대한 파괴 행위에 해당되는 보상금을 받아야 하는 거예요. 보상금을 물려야 하는 거예요. 기본 질서 자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해서 받아야 하는 거예요.
어쨌든 벌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 안 돼요. 그 사람이 한 건 죄 지은 게 아니에요. 교통질서 어긴 게 무슨 죄예요. 무슨 벌받을 짓이에요. 단, 사회 간접 자산에 대한, 국민 재산권의 일부분에 대한 손상 행위죠. 그렇게 받아야죠. 그러면 그건 국가가 마음 놓고 쓰는 것이 아니라 그 재산권자들에게 기본적으로 동의 받고 써야 되거나 돌려줘야 되는 부분이죠. 그걸 개인들에게 돌려주면, 그걸 팔아서라도 기본 생활은 다 하게끔 돼 있는 정도에 와 있어요. 지금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버려도 될 정도에 와 있어요.
자본주의를 버릴 단계에 오면 자본주의는 영원히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인식이 돼요. 팍스의 힘이죠. 힘이 없을 때는 팍스도 약하지만 힘이 강하면 팍스도 강해지는데, 저는 느낌 속으로 팍스의 강도가 서수 급수로 늘어나면 팍스의 강도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는 것 같아요. 강화되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고 거기에서 대안을 찾자는 사람들이 19세기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자본주의가 더 발전하고 나니까 감히 누구도 자본주의에 도전을 못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거예요. 사실 자본주의는 그렇게 국민 재산권 한 걸음에 의해서 다 파괴되는 거예요. 흔적도 없이 파괴되는 거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움직이는 낭이 있고 패가 있었어요. 그 낭과 패가 각각 자기 힘을 갖고 있어야죠. 그런데 얘들이 붙어버렸어요. 얘들이 붙으면 이건 멸망이죠. 얘들이 붙으면 심각한 멸망인 거죠. 그렇게 해서 붙어버려서 그 사회가 멸망했어요. 그 전쟁을 패망이라고 불러요.
그 설화는 중국 남쪽 베트남 이 일대에 사는 지금도 옛 설화를 유지하고 있는, 전해오고 있는 작은 수의 민족들에게 그대로 남아 있어요. 근데 그 패와 낭이라는 말조차도, 어느 날 그 사천 쪽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고 그쪽으로 이주 왔던 북방계 기마민족에게도 전해졌겠죠. 그들도 그 단어를 써요. 그 단어를 쓰는데 이렇죠.
여러분 소금 뭔지 아시죠? 소금의 ‘ㅡ’는 우리 말에 ‘ㅡ’가 없어요. 현대어로서 ‘ㅡ’ 는 ‘우’ 아니면 ‘어’예요. ‘우’는 가끔 이렇게 ‘오’로 바뀔 수도 있지만 소곰이죠. ‘아롬답다’지 ‘아름답다’는 없어요. 고대어를 찾아 보세요. ‘ㅡ’가 어디 있나?
고대어 아니 우리 조선시대에 표기된 말만 하더라도 발음이 굉장히 정확한 말이거든요. 지금은 우리가 쌀이라 그러면은 그냥 쌀이라고 있죠. 원래 ‘ㅄ’의 쌀이잖아요. 완전히 다른 단어잖아요. ㅅ을 발음할 때 혀가 어디에 있죠? 밑에 깔아 앉아 있죠. ㅂ은 어떻게 되죠? 중간에 떠 있죠? 이것은 혀를 ㅂ의 자리에 두고 ㅅ을 격음으로 하라는 거죠. 그러니까 ‘쌀’이 아니라, 혀를 띄우고 ‘’쌀인 거죠. 그런데 지금은 구분이 안 되니까 그냥 사라진 거죠.
우리는 소금을 곰소라고도 불렀어요. 일본 사람들이 옛날에 가야를 야마라고도 부르고 마야라고도 불러요. 그러니까 같은 단어가 결합될 때 하나의 어원이 두 개가 될 때는 앞뒤가 바뀔 수도 있어요. 지금도 그런 습성이 베트남어에 남아 있잖아요. 베트남어는 명사를 구성할 때 우리가 뒤에 보내는 것이 앞으로 가 있죠.
예를 들어 베트남이 옛날에 독립운동 할 때 땀땀사라는 게 있었어요. 마음 심(心)자 심심사인데, ‘땀땀사는 이건 사땀땀이 아니네. 이건 중국 애들이 돈 내서 보태서 했겠구나’ 하고 딱 짐작이 오는 거죠. 베트남시였다면 사담담이겠죠. 아무튼 당공산이 아니고 공산당이 됐으면 중국계가 힘을 보탠 거겠죠. 아무튼 그렇게 바뀌어요.
마찬가지로 패와 낭도 바뀔 수 있어요. 폐는 여전히 그런 거고 패와 낭이 같이 가야만 세상은 돌아가요. 근데 패와 낭이 같이 안 가면 낭패예요. 그런데 설화를 통해 오니까 낭도 짐승으로 만들고 패도 짐승으로 만들어요. 앞다리만 있는 짐승, 뒷다리만 있는 짐승이 어디 있어요?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조직 이외에 앞다리만 있고 뒷다리만 있는 건 세상에 없죠. 그러니까 마치 앞다리만 있는 동물, 뒷다리만 있는 동물은 늘 붙어 다녀야 되는데 이것들이 따로 다니면 낭패라는 거죠.
그게 바로 패낭의 전쟁 설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한자로 발음이 옮겨온 경우예요. 그래서 그 패낭 같은 한자는 쓰기도 복잡하죠. 후기에 그런 설화들이 중원으로 들어오면서 소위 중국이라는 곳으로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단어들이에요. 그런 단어들이 중국의 용의 아홉 아들들, 용생구자(龍生九子)도 전부 그런 단어들이에요. 난방 지역에. 패낭이 있었던 그 지역의 언어들이 한자권으로 들어오면서 후기에 생긴 거죠.
만약에 중국의 설화에 있었다면 그렇게 복잡하게 이상한 개구 자나 개사슴록(犭)자 불을 붙이지 않고 만드는 글자가 있었을 거예요. 이미 이렇게 이 개사슴록(犭)을 붙이고 뭔가 글자를 만들잖아요. 그건 이미 후기에 들어온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문화에 있는 설화적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글자죠. 상형 회의를 아무리 해도 초기 한자가 만들어질 때 글자는 절대 그렇게 복잡하지 않죠.
아무튼 그런 글자들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생길 때가 언제냐? 호남 지역으로 무슨 족이 이동할 때 그리고 또 어느 족이 어디로 이동할 때 이럴 때 같이 갖고 들어오죠. 마치 이 자사호를 만드는 곳이 이싱인데, 이싱은 중국의 화중 지역에 있죠. 양자강(장강)이 흐르는 데 있죠.
우리가 음식을 보면은 운남 지역부터 이렇게 동북진을 해가면서 덜 매워지죠. 기름지고 매운 것이 조금 덜 맵고 기름지고, 덜 맵고 기름지고, 안 맵고 기름지고 이렇게 되죠. 저 동북 지역은 기름지지 않고 달고 맵고, 달고 덜 맵고, 북경지역은 달고 거의 안 맵고, 달기만 하고 전혀 안 맵고, 달기도 하고 기름진 게 딱 만나면
상하이음식이죠. 이런 스펙트럼이 있거든요.
차도 색깔이 운남 쪽에서부터 올라가면서부터 점점점점 색이 맑아지거든요. 음식과 비례하니까요. 새카만 차가 약간 붉으무리해지고 노르무리해지고 거의 색이 약해져 가지고 강소성(江蘇省)에서 만나죠. 그런데 가끔 예외가 나와요. 이싱은 그러면 양자강(장강) 바로 남쪽이니까 차의 색깔이 노래야죠. 노리끼리 하거나 거의 없어야죠. 근데 빨간 차 홍차가 유명해요. 왜? 어느 시기에 절강성(浙江省) 원주민 사람들이 대량 이주해 가지고 살면서 자기들 식의 차를 만들어 먹기 시작한 거죠. 그러니까 문화라는 것은 어디나 다 이동하면서 스펙트럼이 생겨요.
문화 전파의 스펙트럼 속에 다시 그리움을 찾아가려던 사람들
경주까지 온 신라의 원주민들, 그것도 보면 지명 보면 대충 나오거든요. 지리학적으로도 그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 자국들은 전부 ‘달내’라는 게 있거든요. 달강 즉 달내가 있는 데를 쭉 보면 이동로가 보여요. 어디서부터 왔는지까지 보여요. 국내에서 확인할 수 있는 달내는 충주까지밖에 확인 못하죠. 충주 달내, 상주 달내, 경주 달내까지밖에 확인 안 되죠. 앞으로 뭐 이렇게 나라가 좀 쉽게 오갈 수 있으면 북쪽으로 가고 그리고 만주까지 가서 보면, 만주에도 지나간 흔적들이 다 있어요.
아무튼 스펙트럼을 벗어나서 갑작스럽게 돌연스럽게 나타난 것은 그 이유가 있는 거죠. 중국 한자에서 그런 돌연스러운 글자들이 종종 나와요. 아무튼 그렇게 패낭을 해버렸어요. 이제 낭패를 겪고 일패도지(一敗塗地)했겠죠. 일패도지한 그 유민들에게는 그것이 꿈이었겠죠. 그것을 다시 복원하는 것,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 다시 고향스러운 곳으로 가는 것, 다시 에덴 동산으로 가는 것, 다시 이상향으로 가는 것, 다시 까마귀가 날던 오유지향 (烏有之鄕)으로 가는 것, 다시 파라다이스로 가는 것, 네모난 성터가 있던 곳으로 가는 것, 그런 것을 끊임없이 그리워했겠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그 이후에 재차 혼혈돼서 나타난 후손들에게도 계속 전하려고 했겠죠. 그것을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은 선이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신선 선(仙)자, 신선 선자의 선은 원래 사람인 (人) 변에 옮겨갈 천(遷)자를 쓰는 거죠. 사람이 어디론가 옮겨가는 걸 뜻하죠. 지금은 약자로 뫼산(山)자를 쓰지만. 뫼산자 이전에 천(遷)자를 써요. 서(西) 밑에 큰 대 (大)자하고 큰 대자 밑에 미 위(爲)자 쓰는 거죠. 그걸 사람인 (人) 변에 쓰면 원래 그 신선이라는 말의 원어죠.
아무튼 그 선으로 돌아가는 꿈, 선으로 돌아가야만 하고 돌아갈 만큼의 이상향에 대한 어떤 그리움, 그런 조직을 만들고 그런 교육 체계를 만들다 보니까 조의선인과 화랑 같은 게 나왔던 거죠. 그러니까 조의선인이 그냥 고구려라는 국력을 위해서 나온 게 아닌 거죠.
저는 그런 것을 보면서 한때 고구려 연대기를 제가 쓴 적이 있었어요. 출판을 결국 못 했습니다. 지금도 ‘푸른 역사’에 대단히 미안한데 계약금만 50만 원을 받고 아직까지 못 썼습니다. 계약금을 500만 원을 줬으면 제가 분명 돌려주고 끝을 냈을 텐데 50만 원을 주니까 돌려주지도 못하고, 그때그때 선물해 주고, 그 선물 값이 훨씬 더 한 것 같아요.
그때 고구려 연대기는 이런 식으로 쓰려 했던 거에요. “고구려는 완성된 국가가 아니었다. 옛 조선 재건국 준비위원회에 가까웠다. 전략적으로 움직였다. 그 전략 집단으로서의 그 어떤 시기에 나름대로 그리움의 대상으로서의 무언가를 위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이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 때 오면 멈췄다. 이제는 완성된 국가로서 자기들의 국가를 평가하고 삶을 영위하기 시작했다.”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있죠. 아무튼 그러한 그리움들이
있고 그러한 그리움들조차도 나를 지배하는 팍스가 된다는 것!
그럼 그걸 당기는 게 감정이라고 그러는데 도대체 감정은 어떻게 내 속에서 기관을 형성하고 있을까? 묘한 점이 있는 거죠. 거기에 대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수없이 많습니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 선생님께서 “누가 그 도교 기본 전서를 다 읽어 봤겠느냐?” 하셨죠. 이건 제 자랑입니다. 늙으면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전서를 다 읽어봤어요. 저는 20대 때 다 읽어봤어요. 근데 읽어보고 실망뿐이었어요. <노자>의 5천자보다도 못하다는 거였어요.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렇게 못하던 그 이야기를, 평소에 제가 <나를 다시 하는 동양학>에서도 그런 얘기 안 하다가 말이죠. 사실 거기도 제가 할 얘기 다 못하죠. 해가지고 두드려 맞을 이유 뭐 있습니까? 제가 그리고 그 옷을 벗으려고, 표국상인의 옷을 입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그래야 보이차 장사도 하고, 그래서 이런 공간들에서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했던 건데요.
꿈을 꾸듯 나눠보고 싶은 그리움
아무튼 이제는 그냥 <나를 다시 하는 동양학>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냥 털어놓는, 그냥 편안한 자리, 말도 안 되는 이야기하는 자리, 들어보고 언젠가 말 된다고 느끼는 순간 오면 그만인 거고, 없으면 또 뭐 그만인 거고요. 꿈꾼 거 후회하지 않잖아요. 어차피 자잖아요. 그냥 일요일 날 낮잠 2시간 더 잤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렇죠? 그러면 편해요. 이렇게 일요일 날 낮잠 모여서 그냥 떼로 2시간 더 잤다고.
제가 아는 분 중에 참 의미 깊은 일을 많이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근데 어떨 때는 참 사실 안타까워요. 왜 본인도 안 되는 걸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실 거거든요.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의미 있는 일들이 다 안 되는 일들이거든요. 80억이 사는 한 절대 안 되는 일이거든요. 지난번에 말씀 드렸죠. 절대 안 되는 일들이거든. 정확한 답은 현재 인구를 7억 내지 4억으로 줄이는 거예요. 환경 문제든 뭐든 그게 답이에요. 인간관계든 뭐든 답 없어요. 4억으로 줄여놔 봐요. 전쟁 흔적도 없이 사라져요. 4억이 태어날 때 생후 3개월부터 면허를 줘서 자동차를 끌고 다녀도요, 오염이 될 일이 없어요. 그것도 막 매연을 펑펑 뿜는 것만 끌고 다녀도요. 화석을 그렇게 연료를 캐라 그래도 캘 일도 없어요. 오일 파동도 날 일도 없어요. 근데 문제는 80억이 사니까 문제인 거예요.
6‧25 전쟁 때 중국에서 참전을 하면서 모택동이 축사를 했죠. 4억 8천만 인민을 대표해서 항미 전쟁을 나가는 용사들에게 축복이 있으라고 했죠. 4억 8천 만이 70년 사이에 지금은 15억이 됐어요. 인구 줄이는 거 이외에는 답이 하나도 없어요.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팍스는 더욱더 극성을 떨면서 활동을 하니까요. 왜? 욕망이 실현 안 될수록 팍스는 더 강하게 자기를 무장시켜 오니까요.
욕망이 실현 되고 편안하고 어느 정도 욕망을 그렇게 자극하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팍스의 작용은 점점 약해져요. 현대 80억이 살면서 그걸 낮출 수 있다고요? 더군다나 혈기 왕성한 분들이! 그렇다고 대놓고 ‘우리 인구 줄입시다’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 순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 아니라 지구상 난적이 돼서 발 붙일 데가 없어지는 거죠.
근데 해요. 왜?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내 몸 속에 남아 있는 그 그리움, 그 이상향을 실현해야겠다는, 이상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나도 모르는 그 어떤 문화 유전자가 작용하는 거예요. 안 될 줄 알고, 안 될 것 같아도 안 하면 못 배기겠다는 거예요. 이런 흐름을 그냥 안 하고 살아도 병원에서 편안하게 ‘몇 월 며칠 몇 시에 모 선생님 영면하셨습니다’라는 소리 듣고 가면 그만인데.
어차피 죽은 다음에 내가 있든 없든 그냥 눈 감아버리면 그만인데 어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것에 대해서 눈이 안 감겨지는 거예요. 안 감겨지는 사람들이 그 안 감겨지는 내용에 대한 꿈을 꿔요. 자동차에 미치면 자동차의 꿈을 꾸고 화투에 미치면 화투에 안 미쳐봐서 모르겠는데, 제가 바둑에 미쳐본 적은 있습니다. 천장에서 화투가 왔다 갔다 한다면서요. 꿈에서 자동차가 왔다 갔다 하지 않겠어요?
저는 다양한 꿈을 꿔요. 제가 안방에서 잠을 자면 제 자기장하고 잘 안 맞는지 귀가 잘 접혀서 자요. 귀가 접혀서 자면 다음 날 전체 몸이 아침에 편치 않아요.. 그래서 거실에서 자니까 귀가 안 접혀요. 그래서 저는 거실에서 자요. 근데 거실에는 tv가 있어요. 잊어버리거나 그냥 tv 또는 유튜브를 틀다가 잠이 듭니다. 저는 소음이 있을수록 잘 자요. 소음이 있을수록 잘 자고 진동이 있을수록 잘 자요. 지진이 오면 제일 잘 잘지도 몰라요.
아무튼 소음이 있는데, 소음은 다 내용이 있는 소리들이잖아요. 꿈에 그 소리가 들려요. 깊이 못 들어간 거죠. 마찬가지로 어디엔가 사람의 마음이 꽂히면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꿈들이 꿔지죠. 실제로 제가 많이 느꼈어요. 어릴 적에 공부할 때 정말 공부하고 싶었어요. 정말 공부하고 싶었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 저는 엄청 가난한 집안이라 학교에서 돈 안 내주면 학교 못 다니는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장학금을 막 받았어요. 겹치기로 받으면 안 되는데 장학금으로 부자였어요. 학교 들어갈 때 학교에서 매달 한 달에 15만 원 주는 게 있었고, 그 당시는 엄청난 겁니다. 그 두 달치만 모으면 등록금 내니까요. 그 다음에 정주영 회장님 아산재단에서 장학금 주고, 교우회에서 장학금 주고, 다 이게 컴퓨터가 안 돼가지고 골고루 받아야 되는데 제가 다 받았어요. 선경 고등교육재단에서도 강의를 해서 장학금 겸 강의료를 받아 가지고
한 달에 버는 돈이 교수님하고 비슷했어요. 근데 책 사느라고 돈이 늘 쪼들렸어요.
조선왕조실록 같은 것도 한꺼번에 그냥 현금으로 확 사버리는 거예요. 예전에는 학교로 영인본 팔러 다니는 책 장사하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옛날에 그분들한테 대학원생보다 제일 큰 손인 거예요. 교수보다 제가 더 큰 손인 거예요. 아무튼 정말 공부하고 싶었어요. 근데 못 사보고 못 구해보는 책들이 많잖아요. 꿈에서 그 책을 봐요. 어쩌다 나중에 다시 진짜 그 책을 구해보면 꿈에 봤던 내용 그대로예요. 꿈은 꾸기에 따라서는 살아있을 때 자기의 삶의 작용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일 수도 있어요. 감히 잠을 낭비하는 시간으로 말하는 사람은 조의선인의 인자가 일찌감치 문드러진 분인 거예요.
아무튼 그렇게 자기가 그리워하는 것을 꿈꾸고 우주를 여행하고 싶은 사람은 꿈에서 우주를 여행하겠죠. 안세영 선수는 꿈에서도 배드민턴을 칠 거예요. 어떤 때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칠 거예요. 저는 그 친구 보고서 사실은 놀랐는데, 그 친구에게는 어떤 그리움이 그렇게 처박혀 있길래 그럴 수 있을까 한번 인터뷰하고 싶었어요. 그의 그리움이 뭔지…
제가 볼 적에는 그리움 없이 지독한 목표의식 갖고 갈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어요.. 박세리의 경지가 아니었어요. 98년 박세리의 경지가 아니라 또 다른 경지였어요. 박세리는 목표를 향해서 지독하게 훈련해서 간 경지라면, 이건 그리움이 아니면 그렇게 못 가는 (그런 것). 그러나 현실의 모습은 비슷해요. 지독하게 훈련하겠죠. 그러나 그리움이 아니면 못 가는 경지가 있어요. 바둑판이 천정에서 안 보이면은, 꿈에서든 비몽사몽이든 간에 안 보이면 프로는 될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영혼에 대한 이야기도 그래요. 그리움이 사무치지 않잖아요. 안 꾸겠죠. 안 꾸는 사람이 뭐 그게 하면, 버리는 꿈이죠. 낭비하는 시간이죠. 근데 어떤 사람들은 그게 사무쳐요. 거기서 사무쳐 보지 않고서는 프로가 될 수 없다고 했듯이 사무쳐 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론적 공부로도 안 돼요. 사무칠 게 필요해요. 그리움이 필요해요. 그리움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뭐 알아야 목표 의식이 조금은 있어야 그리워하죠. 목표의식과 그리움은 다른 말이면서 가끔은 겹치는 말이에요.
그리움과 함께 필요한 그리움에 대한 용어
우리 대한민국이 훌륭하신 정치 지도자를 지금까지 잘못 모셔온 이유는 그리움이 사무친 분을 잘못 만나서 그래요. 목표 의식만 가득 찬 분들을 만나서 그래요. 오히려 예전에 양김 씨는 그래도 그리움이 조금 있었던 분들 같아요. 그분들 이후로는 갈수록 허물어지는 것 같아요. 노선을 떠나가지고. 아무튼 그 얘기하자는 건 아니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틀리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의학 용어처럼, 패션 용어처럼, 음식 용어처럼, 각 기술 용어처럼 이 그리움에도 필요한 용어들이 있어요. 유감스럽지만 필요한 용어들로 꾸지 않는 꿈은 무효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는 그 용어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이러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가 되는데 해보죠.
아까 말씀 드렸던 얘기를 오늘 끝내지 않고 매듭짓는 것은 감정이라는 기관도 그 용어의 동원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워요. 그냥 피상적으로 그냥 느낄 수밖에 없어요. 꿈에서도 그리워서 울어요. 어떤 때는 그렇게 꿈에서도 그리워서 울던 사람은 죽을 때 끌려가 개 끌리듯이 끌려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그건 확신합니다. 나머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뭔가 옮겨가려고 하는 그리움이 있는 사람들, 선의 그리움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옛날에는 그런 인자가 강한 사람들을 또는 그런 인자가 강해지는 사람들을 이렇게
불렀겠죠. 선골이라고 불렀겠죠. 그런 그리움이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그리움이 사무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유가 있겠죠. 그렇게 되면 규칙이 있겠죠. 예를 들어 사람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한다면은 그것도 규칙이 있겠죠. 그 규칙은 사실 매우 쉬워요. 매우 간단해요.
그럼 저보고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보다 하는데, 죽는 건 안 무서워요. 아쉽죠. 아쉽죠. 그러니까 못되게 얘기하면 여러분도 아쉬워하시라고 이런 얘기하는 거예요. 같이 아쉬워하자는 얘기도 있습니다. 오늘은 얘기 이렇게 하고 또 지난번처럼 이런저런 이야기 주시면 지난번에 하셨는데 또 질문하실래요? 그냥. 뭔 소리야 생각해 보고 가셔도 돼요.
몸도 몸이 거기서부터 건강한 게 있어요. 몸이라는 게 정말 어느 시점에서 묘한 접점이 있어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고요. 배드민턴을 보고 있었는데 선이 있잖아요. 약간 굵직한 선이 있잖아요. 거기에 떨어졌나 안 떨어졌나 하는데 왜 선 밟으면 인(in)이고 선 안을 밟아야 아웃(out)이냐고, 선 밟는 것부터 아웃이면 안 되냐고. 그러면 답은 보통 그렇게 규칙이 그러니까 그러죠. 그러면 우리 몸에 눈이 꿈벅꿈벅 하는거죠. 그런 것이 자기도 모르게 규칙화된 거죠. 만약에 우리 몸인데 핵심을 안 뚫고 지나가면, 닿지도 않고 지나가는 걸로 간주된다면 선도 그렇게 그어가지고 안에 선만 밟아도 아웃으로 처리됐겠죠. 근데 그게 옮겨오면서 의식까지 작용하고 사회적으로까지 그렇게 시스템화되는 거겠죠.
사람 몸의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그 기준이 다르고, 속과 겉을 나누는 것도 기준이 다르겠죠. 지금 제가 드린 얘기는 속과 겉의 얘기죠. 겉과 속일 때 제가 이런 얘기를 드려요. “겉의 모습은 대칭인데 속의 모습은 비대칭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죠. 속이 어디까지냐? 겉이 어디까지냐? 이에요.
예를 들어서 저는 어릴 때 왼쪽을 다 부러져가지고 그렇게 썩 대칭은 아닙니다만 우리 여기 계시는 경화 선생님보다도 제가 팔이 짧아요. 옷 사면 다 접어야 돼요. 국산을 사도 저는 다 접어야 돼요. 저보다 팔 짧은 북인도 사람들 옷 입고 와 있는데 지금 다 접어서 있잖아요.
어디까지가 겉이냐는 거예요. 그 일정한 겉에서 조금 들어가 보면 속인데요. 표면의 것만이 대칭은
아니잖아요. 그게 대칭이 되기 위한 속까지 이어지는 일정한 구조가 있을 거 아니에요. 살이라든가 근육이라든가, 거기까지는 대칭이잖아요. 거기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 묘하게 아니죠. 그래서 비대칭이죠. 거대한 지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고 지렁이에서도 튀어나온 스텝 기관들이 막 이렇게 자리 잡고 있죠. 다 꺼내면 거대한 지렁이인데 지렁이가 주머니를 주렁주렁 달고 나오겠죠. 필요한 부분에다가 심장 만들고 자기 마음대로 스텝 조직들을 만들어 가지고 그러고 나서는 자기 마음대로 비대칭으로 앉아 있죠.
비대칭하고 외부적인 비대칭하고의 묘한 어딘가에 접점이 있는 거죠. 그 접점이 배처럼 복막으로 딱 있으면 다행인데 안 그런 데도 많거든요. 그러면 그 어딘가에서 접점을 느껴보는 거예요. 그 접점을 느끼는 사람은 자기 몸을 느껴요. 그 접점을 잘 이해하거나 느끼거나, 나중에 같이 만나요. 자기 접점을 이해하는 것과 느끼는 게 만나요. 근데 장이 어디 있고 위가 어디 있고 술 먹으면서 그런 얘기들 하시죠. 뭐 90도짜리 술을 먹으면서 막 위장, 소장이 다 느껴진다고 하거든요. 느껴질지 모르지만은 그냥 속이 뜨거운 게 깊이 길게 느껴진다는 게 사실은 이상한 건 아니죠. 나머지는 뻥이죠.
이야기마당 질문과 응답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은 어떤 것인지요? 요즘 유행하는 맨발로 황토걷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선생님: 네!.
질문: 질문이 두 가지인데요.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 뭔지 궁금하고요.
선생님: 저요?
질문: 두 번째는 요즘 황토 걷기 이런 게 유행인데 그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 예.
저는 좋아하는 음식 따로 없고요. 저는 신맛, 짠맛, 매운맛, 단맛 등에서 스펙트럼을 크게 용납해요. 그래서 웬만한 데 가서 맛없다는 소리를 잘 안 해요. 제가 음식을 숟가락질 하다가 놓아버리는 경우는 재료가 신선하지 못할 때 그리고 만드는 방법이 잘못됐을 때 그리고 그 재료와 이 재료는 혼합되면 안 되는데 혼합했을 때, 이때는 그 음식을 거부하지만 나머지 어떤 음식도 다 먹어요.
그리고 누가 어떤 분은 소금을 요만큼 넣었는데도 저는 싱겁다 안 하고 이만큼 넣는데도 짜다 소리 안 해요. 그 정도는 그냥 편하게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다만 돼지고기를 끓이면서 후식으로 고구마를 깎아 내놨다든가 이러면 안 먹어요. 먹으면 제가 다음 날 죽는데요.
그 다음에 음식에서 너무 짝을 안 맞게 구성한 것, 그 다음에 너무 이상한 방법으로 열을 가한 것도 그래요. 이것은 천천히 열을 가해야 하는 재료인데 빠른 열이나 강한 열을 가했다든가, 아니면 애초에 상했다든가 상하지는 않았는데 이 음식이 돌연변이성에 의해서 재료가 뭔가 변형이 됐다든가 그런 건 안 먹어요.
그리고 날 음식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저는 초식(草食)주의자도 아니에요. 초식이면 제가 소처럼 8시간 동안 하루 종일 먹고 있어야 되는데요. 그래야만 영양분이 공급이 되는데요. 8시간 내내 먹기 싫어요. 8시간 내내 안 먹고는 절대 공급 안 됩니다. 초식이 아니라 초식을 빙자해서 다양한 것을 섞어서 먹으니까 그렇죠. 초식 동물하고 비건 하고 달라요.
황토길 걷는 거, 뭐 이런 거 좋죠. 근데 뭐든지 다 유효 지점이라는 게 있지요. 유효 시간이라는 것도 있고 유효 지점이라는 것도 있는데요. 황토집을 말해볼게요. 황토집의 황토 마당에 뜨뜻하게 누우면 독이 쫙 빠진다고 하죠.
독이 뭔지 일단 그 정체를, 그 독에 관련된 팍스도 너무 다양할 테니까. 어쨌든 그냥 통칭적으로 대충 알아들을 만한 의미로 독기가 쫙 빠지고 편안해지죠. 곧 생기도 쫙 빠지죠. 일정 지점까지죠. 황토길을 열심히 걷죠. 피곤했던 물질들이 참 이렇게 땅과 접촉이 되면서 쫙 빠지죠. 어느 순간 가게 되면 걷기도 힘들 만큼 맥이 쫙 빠지죠. 그러니까 과한 것보다 약간 모자란 게 나요. 못 느꼈을 때가 나아요.
얼마 전에 아프시다가 회복이 된 분이 계시는데 이렇게 집 밖에서 걸으시다가 한 20~30m 걸으니까 충분히 소화가 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옛날처럼 해도 될까 해가지고 좀 높은 데 한번 걸어보고 돌아가서 알아 누우신 거죠. 왜? 그분은 그렇게 하면 이로울 줄 안 거죠. 약간 모자라는 게 제일 좋아요. 운동을 하더라도 지나치게 열심히 하면 안 되고요. 누워가지고 놀더라도 돼지처럼 있으면 안 되고요. 그 적정선 안에 있으면 저는 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서 황초집이라는 게 있었어요. 여기 연세 드신 분들은 아실 거예요. 담배 말리던 집이에요. 옛날에 시골에 가면 시골에 웬 2층 집이 있냐 그랬는데 황토로 만든 2층 집이 있죠. 그 밑에는 이제 불 때기도 하고 위에 담배 조리하잖아요. 담배 조리하는 집이 뭐로 돼 있냐 하면 황토로 돼 있죠. 처음에는 담배 독기를 빼죠. 한참 가다 담배 생기도 빼죠. 그러다 놀놀해지면 담배가 되죠. 그러니까 우리는 담배풀이라고 그러죠. 원래는 어느 풀이 먼저 있고 담배가 있어야 되죠. 뭐뭐 풀로 만든 상품의 이름이 더 길어야죠. 근데 담배 같은 경우는 후기에 수입돼 들어왔죠. 담배라는 이름이 먼저고 담배풀의 이름이 더 길죠.
차도 그래요. 차가 먼저 있고 차나무가 있었던 거죠. 현실의 자연 생태계에서는 차나무가 먼저 있었겠지만 사람에게서는 차라는 게 먼저 있었던 거죠. 그래서 차를 만드는 나무였던 거죠. 차라는 게 나무 이름이 아니고 차로 만든 찻물이 나중이 아닌 거죠. 차라는 게 먼저 있고 이름 보면 그래요. 늘 순서가 단순한 게 먼저였어요. 그렇게 해서 사람이 담배 될 일은 없잖아요. 그래서 나중에 되면은 그렇게 담배가 돼버려요. 그래서 과하지 않는 게 좋다!
그리고 황토는 뭘 황토라고 하는가 성분을 갖고 황토라고 하는가, 빛깔을 갖고 황토라고 하는가, 강도를 갖고 황토라고 하는가? 황토인데 사실상 황색 고령토도 있을 수 있거든요. 그거 밟아가지고 잘못하면 풍화 진화가 덜 됐기 때문에 파상풍 걸리기 딱이거든요. 상처는 안 났는데 미세하게 파상풍 걸릴 수 있거든요. 자기가 못 느낄 정도지 상처 난 거죠. 고운 모래 같은 것도 황토가 있을 수 있죠. 진흙 같은 황토도 있을 수 있죠.
그래서 이런 얘기 ‘어디 뭐 하면 좋다더라’라는 얘기는요. 여러분 다 버리세요. 뭘 하면 안 된다는 얘기만 들으세요. 뭘 하면 좋다는 얘기는 전부 자본주의 하에서 장사를 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100의 99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크릴 새우가 좋다고 하면서 크릴 광고하더니 나중에 남극 크릴이 다 없어가지고 남극 얼음이 빨리 녹는다잖아요. 그러니까 환경에서 얼음덩어리 녹는 거하고 우리 몸에 조금 좋은 것 하고 맞바꾼 거죠. 이젠 되돌릴 수도 없죠. 그래서 뭐 좋다라는 것은 장사꾼들이 하는 얘기다. 100% 그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심지어 황토 장사하고 상관 있을까 하지만 상관이 있습니다. 다음에 니장수 나옵니다. 황토에서 물 이렇게 걸려 먹는 것도 나옵니다. 그 다음에 황토 발 받침대 나옵니다. 황토 족욕 나옵니다.
아까 돼지고기와 생고구마 이야기처럼 ‘이런 거 하지 마라’ 하는 것만 안 하시면 돼요. 그 안 된다 하는 금기들이 많이 존재하면서 금기들을 하나하나 깨나가시면 돼요. 에디슨은 그렇게 과학자가 됐죠. 모든 물건을 독약이라 쓰고 독약의 정체를 확인하면서 이름을 붙여가면서 마침내 그는 발명가가 되어가죠. 그러니까 애초에 존재하는
것들은 두려운 것이고 누가 좋다고 하는 것을 쉽게 믿지 말라는 거예요. 누군가가 나에게 주는 자본주의적 팍스의 선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옛날에 이상구 박사님이 아침에 시원한 물 마시기, 뉴 스타트(New Start)! 그랬는데 그거 해롭다고 딱 밝혀진 다음에 그분 책임도 안 지고 싹 그냥 강원도로 가서 사시잖아요. 책임질래야 질 수도 없어요. 당신도 잘못하려고 한 게 아니죠. 해보니까 그렇다는 걸 알게 됐는데 반성해본들 반성의 의미도 없었겠죠. 그분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닌데요. 그래서 뭐가 좋다는 것은 저는 누구에게도 못 권해요.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뭐가 좋다는 얘기는 해본 적이 없어요. 뭐가 해롭다는 얘기만 해왔습니다. 뭐가 해롭다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밖에 없어요. 아, 두 가지! 그것 갖고 책 쓰거나 그거 갖고 강의하거나. 그것 갖고 뭐가 해롭다는 건 쓰지 말라는 얘기인데 장사를 할 수가 없잖아요. 뭘 좋다고 한 건.. 아, 있구나! 차가 좋다고 그랬네요. 차는 좋아요. 그렇게 답을 드릴게요.
(오신 분들의 안부를 묻다가)
꿈은 소중한 것, 꿈 속에 그리움과 하모니가 깃들기를
선생님은 요즘 어떤 꿈을 꿔요? (안 꾼다는 말에) 거의 모르죠. 꿨을 거예요. 기억을 못하는 거지 꿈은 안 꿀 리가 없어요. 바깥에 몸의 움직임이 과하면은 잠을 자는 시간이 확보되더라도 잠이 무용지물이 돼서 정말 잃어버리는 시간이 되죠.
인간에게 있어서 꿈 없는 잠은 너무 초라해요. 꿈은 화려하고 내 살아있을 때 삶보다 더욱더 천연색이고 더욱더 아름답고 더욱더 활기 넘치고 날아다니고, 여기서 저기 안드로메다까지 어딘지도 모르지만 뭐 알지도 못하고 순식간에 가고, 내가 만나지 못했던 멀리 있는 분도 만나고, 내가 원수 져 가지고 찝찝했던 분들과 해원도 하고...
그런데 물론 꿈도 이제 비행기를 탔는데 맨날 뒤에 이코노미 타고 힘들다가 꿈에 꿨더니 1등석 타고 이런 꿈 말고요. 그런 꿈은 안 꿔도 돼요.
질문: 근데 꿈을 항상 기억해야 되나요? 아니면 기억 안 하고도
선생님: 안 해도 알아요. 꿈이 화사하고 밝고 아름답고 활기찼던 사람은 다음 날 얼굴이 달라요. 사람들이 그러죠. 젊은 여성들, 한 30대 초반쯤 돼가지고 저 사람 노처녀로 가나 의심받는데 어느 날 얼굴이 화사해지는 거 보고 나서 연애하나 보다 그러죠. 연애해서 그러기도 하지만요. 연애하는 것이 꿈에서 계속 꾸여져서 그런 거예요. 연애는 하는데 꿈을, 잠을 못 자게 하잖아요. 좋아질 리가 없어요.
깊이 연애할 정도면 어떤 사람은 연애하는데 얼굴이 화사하지 않다면, 꿈꿀 만큼 좋아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타산해가지고 사귀는 게 좋겠다 그런 것이 꿈에 들어올 리 없죠. 사무치지 않죠. 일정하게 감정이라는 기관을 경유하지 않았죠. 감정이라는 공간을 이렇게 스치고 가는 유성이 아니라 정면으로 관통하고 가야만 꿈에 보이는 거죠. 꿈에 보인다는 것이 무의미한 건 없어요. 근데 개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피곤해서 잤을 때만 몸이 풀기 위해서 있는 거죠. 저는 현대인들의 꿈이 너무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1시간을 자도 꿈이 깊으면 다음 날 깨끗하게 일어나요.
어떤 분은 가끔 그래요. 저보고 잠 그렇게 자고 어떻게 사냐고. 저는 2시간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꿈을 꿔요. 꿈에 외국인하고 외교도 하고 별거 다 해요. 꿈에 우주인하고 대화하지 않아요. 꿈에 지구랑 대화하고, 달이랑 대화하지. 그게 다 존재하는 것일 뿐인데 우리가 3차원이라고 착각하고 그들은 2차원의 것 내지 무생명을 보는 거예요. 우리에게 주어진 3차원이라는 잘못된 이불을 덮고 있는 2차원 주제에 자기를 3차원으로 생각한 그 관념이
더 큰 생명체를 생명으로 인지 못하고 죽어 있는 환경으로 인지하게 만드는 거죠. 환경이 어디 있어요. 우리가 3차원이라는 잘못된 팍스만 버리면 이 삼라만상 중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살아있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3차원이라 여기며 살죠. 이불 덮어놓으면 전부 똑같은데. 그러니까 이불 덮어놓고 보면 다 밑에서 꼬물거리고 있는 건데 멀리서 보면 꼬무락거리는 거 보이지도 않아요. 흔히 그러잖아요. 유튜브 같은데서 어떤 사람들이 바지를 사면서 막 고민을 해요..유니클로를 살까 한국에서 만드는 최고의 청바지라는 데미를 살까. 근데 뭐 입었는지 자기만 알아요.
심지어 청바지 길들인다고 청바지 사자마자 입고 찬물 목욕조에 받아놓고 그 안에서 뭐 줄여가지고 형태 만들어 가지고 입는다고 그러는데 그렇게 입고 나와도 자기만 알아요. 아무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데 남에 대해서 관심 가진다면 그 사람은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물건을 욕망하고 있는 것뿐이에요. 욕망 가진 사람으로부터 관심 가질 뿐이에요. 옷에 대한 욕망 가진 사람으로부터. 자기만 알아요. 한참 입고 다니면 자기도 뭐 입고 다니는지 잊어버려요. 그걸 알고 다니는 순간 걸음걸이가 불편해요.
아무튼 좀 그리워지면 그리워질수록 꿈이 아름다워져요. 꿈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평정이 아닌 팍스가 아닌, 뭔지 하모닉(harmonic)한 상태를... 그러니까 우리의 평화라는 건 하모니(harmony)죠. 평화라는 건 평정이 아니라 하모니죠 또는 하모닉에 가까운 상태죠. 우리 평정에 살다가 하모니를 꿈꾸는 거죠. 하모니가 꿈에서 느껴지는 순간 저절로 답을 알아요. 상당 부분에 대한 거기까지 가는 데 필요한 언어적인 이야기들을 제가 다음 후반부터 아마 하게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이렇게 줄이겠습니다. 애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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