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3월 17일(병오)
봉조하 남구만의 졸기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이 졸(卒)하니, 나이가 83세였다.
남구만은 국초(國初)의 상신(相臣) 남재(南在)의 후손(後孫)인데 중간에 형세가 기울어 세력을 떨치지 못하여 호서(湖西)의 결성(結城)에 우거(寓居)하였다.
남구만은 젊어서부터 문재(文才)가 있었고, 필법(筆法)도 또한 공교하고 아름다웠다.
서울에 유학(遊學)하여 김익희(金益熙)에게 의탁하니, 김익희는 곧 그의 내외종(內外從)과의 근친(近親)이었다.
김익희가 그를 사랑하여 그의 자질(子姪)과 같이 공부하도록 하였고, 이어서 이민적(李敏迪)의 형제(兄弟)와 서로 사이좋게 사귀며 즐기었다.
김(金)·이(李) 두 집안이 서로 칭찬하여 추천하고 좋은 평탄을 널리 퍼뜨리니 저절로 유림(儒林)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어 명성(名聲)이 이미 알려졌다.
과거에 급제하기에 이르러서는 청반(淸班)의 길에 조금도 거리끼고 막힘이 없었으며, 또 송준길(宋浚吉)의 문하(門下)에 학업을 청하여 문인(門人)·사우(士友)와 더불어 종유(從游)하니 당시의 명망이 더욱 높아갔다.
성품이 편협(褊狹)하고 강퍅하며 각박한데, 강직하여 패려궂고 뽐내는 행동을 좋아하므로 세상이 입을 모아 강개(剛介)의 선비라고 일컬었다.
갑인년(1674 현종 15년)에 간흉(奸兇)이 정권을 잡으니 향곡(鄕曲)으로 물러가 있다가, 기미년에 좌윤(左尹)으로 서울에 들어왔다.
이때 역적(逆賊) 허견(許堅)이 이정(李楨) · 이남(李柟)과 결탁하여 모반(謀反)할 마음을 품어 중외(中外)가 어수선하고 두려워하면서도 감히 그 기미(機微)의 싹을 꺾는 자가 있지 않았는데, 김석주(金錫胄)가 남구만에게 그 간사하고 기만된 일을 발설하도록 권하였더니 남구만이 두려워서 따르지 않자, 김석주가 이에 귀뜸하기를, ‘이것은 내지(內旨)이니 다른 우려는 없도록 보장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이를 믿고 마침내 임금에게 상소(上疏)하였다가 귀양가게 되었으니, 이 때문에 명성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으나, 그 일을 아는 자는 이미 그가 군자(君子)가 아니라고 의심하였다.
갑술년(1694 숙종 20년)에 조정(朝廷)에 나아가게 되어서는 제일 먼저 장희재(張希載)를 옹호하였으며, 그 뒤 업동(業同)의 옥사(獄事)에 더욱 낭패(狼狽)하고 실수(失守)해서 명분(名分)과 의리(義理)와는 적수(敵讐)가 되었고, 마침내 흉악한 계략이 더욱 성하기에 이르러 화(禍)가 궁위(宮闈)에 미치게 되었다.
젊어서는 자못 청렴 간결하여 사심(私心)이 없는 것으로써 자허(自許)하더니 관작이 높아지면서부터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었다.
훈국(訓局)을 관장하면서는 촉탁(囑托)이 분연(紛然)하여 사사로운 뜻이 낭자(狼藉)하였고, 더욱이 대장(大將) 신여철(申汝哲)과 서로 거슬려 그 사사로운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노엽게 여겨 탑전(榻前)에서 청죄(請罪)하고, 그 장임(將任)을 파면케 하니, 조야(朝野)가 몹시 놀랐다.
만년(晩年)에 서자(庶子)를 위하여 산업(産業)을 경영했는데, 비루(鄙陋)하고 외잡(猥雜)한 일이 많아서 천종(賤宗)의 모욕(侮辱)까지 받게 되기에 이르니,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남구만은 그가 이미 사류(士類)에서 용납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고는 정론(正論)을 배척하고 억제하는데 더욱 꺼리는 바가 없었다.
만년에 문자(文字)를 저술(著述)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부자(父子)를 침해하고 비방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해괴하고 패악하여 그 평생(平生)의 심술(心術)을 여지없이 드러냈다고들 한다.
뒤에 그의 무리가 국권(國權)을 잡아 시호(諡號)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 봉조하 : 조선시대 전직 관원을 예우하여 퇴직한 뒤에 특별히 내린 벼슬.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에만 참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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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보 50권, 37년(1711 신묘 / 청 강희(康熙) 50년) 3월 17일(병오)
봉조하 남구만의 졸기
봉조하(奉朝賀) 남구만(南九萬)이 졸(卒)하였다.
처음에 남구만의 병이 위독(危篤)함을 듣고 임금이 특별히 두 어의(御醫)를 보내어 간병(看病)하게 하고, 자주 내국(內局)의 약(藥)을 내려 주었다.
이에 이르러 임금이 예조(禮曹)의 계청에 답하기를,
“이제 원로(元老)를 잃었으니, 진도(震悼)함을 어디에 비유하겠는가? 동원비기(東園秘器 궁궐에서 쓰는 관곽(棺槨)를 골라서 보내고, 3년간의 녹봉(祿俸)을 주도록 하라.”하였다.
남구만(南九萬)은 고상(故相) 남재(南在)·남지(南智)의 후손이다.
성품이 강개(剛介)하고 독실(篤實)하여 백련금(百鍊金)과 같았으며, 체구는 침소(寢小)하였으나 정기(精氣)는 철석(鐵石)을 꿰뚫을 만하였다.
삼조(三朝)를 내리 섬기면서 큰 절의가 탁연(卓然)하였고, 대성(臺省)에 있으면서부터 직언(直言)으로 명성이 높았다.
처지(處地)가 매우 고단(孤單)하고 가난하였으나 사환(仕宦)과 논의(論議)는 항상 남들의 뜻밖에 뛰어났으며, 남에게 의지하거나 아부하지 않았다.
갑인년에 임금이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를 이어받으매 소인(小人)들의 무리가 궁안의 후원을 끼고 주장(譸張)하는 것을 남구만이 상소하여 환수(宦竪)들이 정사에 간여하는 형상을 발설(發說)하였는데, 그 말이 절직(切直)함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의 과감한 말을 칭찬하였다.
기미년에 경조(京兆 한성부(漢城府)의 1소(疏)로 또 역적(逆賊) 윤휴(尹鑴)·허견(許堅)의 흉악한 모략을 내리 꺾다가 자신이 비록 찬척(竄斥)되었으나 종사(宗社)가 힘입음이 있었다.
경신년에 개기(改紀)한 뒤에는, 남구만이 청의(淸議)를 도와 훈척(勳戚)을 내쫓으니, 더욱 사류(士流)들의 우러르는 바가 되었다.
무진년에 유현(儒賢)이 궁금(宮禁)을 논하여 종사(宗事)를 가까이 하다가 엄지(嚴旨)를 입으니, 남구만이 청대(請對)를 구하여 읍간(泣諫)하고 통렬하게 말하여 은휘(隱諱)하지 않다가, 임금의 위엄[雷威]을 거슬려 북방 변경(邊境)에 천극(栫棘)되었고, 기사년에 왕후[長秋]가 손위(遜位)하게 되매 많은 흉역(凶逆)의 무리가 권병(權柄)을 절취(竊取)하니 남구만은 또 동해(東海)로 찬배(竄配)되었으며, 갑술년에 경화(更化)하여서는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제배(除拜)되어 제일 먼저 곤궁(坤宮)을 복위(復位)할 때에 회의(會議)한 의논을 물리쳤다.
당시에 한둘의 흉악한 소인[凶竪]들이 은화(銀貨)를 모아서 은밀히 결탁(結托)하고 툭하면 요화(瑤華)의 회복을 구실로 하였으나 실지는 그 사사로운 일을 구제하였는데, 기사년 사람들이 그 상황을 정탐해 내고는 옥사(獄事)를 이루어 크게 벌이려 하였으나 끝을 맺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남구만이 끝내 그들을 다스려서 방무(邦誣)를 씻고 국체(國體)를 높이어 우리 조정(朝廷)을 일월(日月)처럼 광명 정대하게 하기를 청하니, 그 무리들이 터무니없는 말로 위협 공동(恐動)하였으나, 걱정하지 않았다.
기사년에 화(禍)를 입은 사람은 권력이 있는 대가(大家)가 많았는지라, 그의 자제(子弟)로서 조론(朝論)을 주장하는 자들이 시기를 타서 시원스럽게 형벌을 남용(濫用)하려고 하였는데, 남구만이 그들의 뜻을 억제하고 되도록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힘쓰니, 이로 인하여 거듭 당인(黨人)들의 미움을 샀다.
역적 장희재(張希載)는 곧 동궁(東宮)의 사친(私親)의 동기(同氣)로서 국모(國母)를 위해(危害)할 모의를 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주륙(誅戮)의 죄를 당하게 되었는데, 남구만이 경법(經法)과 권도(權道)를 참작하여 부생(傅生 그 죄를 경감시켜 목숨을 살려 줌)의 의논을 하였다.
그때를 당하여 동궁(東宮)이 바야흐로 옷이 약간척[衣若干尺 나이가 어림]이어서 처지(處地)가 지극히 외롭고 위태하였는데, 넓은 초원(草原)에 복융(伏戎)한 것 같아서 일로 보아 물리치고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었으므로, 남구만은 의연히 자신이 역적(逆賊)을 두호한다는 비방을 당하면서도 삼척(三尺 법(法)을 이르는 말)을 굽히고 사은(私恩)을 펴서 동궁을 위하여 죽기를 원하는 뜻을 보이어, 임금의 마음을 굳히고 역절(逆節)을 막음으로써 난국(亂局)을 미연(未然)에 없애려고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약연(躍然)히 다투어 일어났으나 언제나 명의(名義)로써 이를 지키니, 비록 사류(士流) 중에서 그의 고심(苦心)을 살피는 자까지도 간혹 그가 토죄(討罪)를 완만하게 하고 경법(經法)을 지키는 것에서 피하는 것으로 의심하였으나, 남구만은 끝내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세도(世道)가 흔들리고 이단(異端)의 말이 준답(噂沓)한 것이 거의 30여 년이나 계속되었다.
신축년(1721 경종 원년) ·임인년 이후에 흉역(凶逆)이 낭자(狼藉)하고 당화(黨禍)가 한층 더 격화되자, 세상이 비로소 남구만의 선견(先見)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남구만이 갑술년에 승출(陞黜)을 죄준 논의와 병자년(1696 숙종 22년)에 업동(業同)을 구원한 논의는 너무 간섭해 말하는 병통과 너무 깊이 생각하는 미혹(迷惑)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또 혹은 단점으로 여기었다.
대개 남구만의 학술(學術)은 비록 순정(純正)하지는 못하였더라도 지조와 행동은 정확(貞確)하였으며, 기량(器量)은 비록 크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견식(見識)과 사려(思慮)는 정심(精深)하였다.
시행하고 조처한 것이 혹은 뇌락(磊落)하지 못하고, 심중(心中)이 혹은 활달하지 못하였으나, 그 강직하고 방정한 기절(氣節)과 결백한 조행(操行)은 비록 취향을 달리하는 자라 할지라도 의당 다른 말을 두지 않을 것이다.
흡연(翕然)히 태산 북두(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아 온 것이 거의 반평생[半世]이나 되었다.
그러나 갑술년에 이르러서는 음사(陰邪)를 물리치고, 평반(平反 억울한 죄를 다시 조사하여 무죄로 하거나 감형하는 것)을 주장하여 당인(黨人)들의 마음을 크게 거슬리어, 골수(骨髓)에 맺힌 원수처럼 보았다.
벼슬을 하던 날에 이미 여러 번 독해(毒害)를 당했었는데, 처음 초사(初史)를 편수한 사람이 심지어 평일의 한 마디의 말로 공경하고 복종하였다고 하였는데, 기미년의 당언(讜言 바른 말) 같은 것을 차마 척신(戚臣)이 종용(慫慂)하였던 바라고 이르니, 특히 이 밖의 을묘년(1675 숙종 원년)의 소어(疏語)와 무진년의 연주(筵奏)와 같은 그 늠름(凛凛)한 직언(直言)은 또 장차 어떤 풍지(風旨)로 될지 알지 못하나, 전연 형영(形影)조차 없는 말을 창출(刱出)하여 멋대로 죽고 없는 그를 더럽히고 아울러 그 청렴하고 간결(簡潔)한 절개까지도 일체 마구 욕을 하여 백세(百世)토록 현란(眩亂)시키려는 계책으로 삼으려고 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마음 아파하였다.
남구만은 처음에 한미(寒微)하고 소원(疎遠)한 집에서 출세하여 재학(才學)과 풍절(風節)로써 임금의 특별한 지우(知愚)를 입어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고, 숭질(崇秩)과 현작(顯爵)을 취하였는데, 내외를 통해 모두 능력있는 명성이 나타나서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재로 추중(推重)되었으며, 삼사(三事)943) 의 지위에 거의 40년이나 있었다.
만년(晩年)에는 제우(際遇)944) 가 더욱 높았고 울연(蔚然)히 중흥(中興)의 현명한 보좌가 되어 임금의 서찰(書札)과 시장(詩章)에 기여한 뜻이 정중하므로 물고기와 물[魚水]의 만남처럼 서로 친밀한 계합(契合)이었음을 담자(談者)는 지금까지도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서 남구만을 논하는 자가 본조(本朝)의 선배(先輩)에 비유하기를,
“곧고 굳은 절조(節操)와 미륜(彌綸)945) 하는 재능은, 이 완평(李完平)946) ·최 완성(崔完城)947) 과 백중(伯仲)이 될 만하다.”
고 하였다.
남구만의 호(號)는 약천(藥泉)이요, 뒤에 문충(文忠)으로 사시(賜諡)하였으며, 태묘(太廟)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구만은 사람됨이 단아하고 정연하여 언소(言笑)가 망령되지 않았고, 일어나고 앉는 몸가짐에도 절도(節度)가 있었다.
문사(文辭)가 법도 있고 아름다웠으며, 필획(筆畫) 또한 옛스럽고도 힘찼다. 집에 있거나 조정에 나가거나 모두 굳게 절개를 지켜 변하지 않았고, 평생토록 남에게 주는 서독(書牘 편지)에 일찍이 구걸(求乞)하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청주(淸州)의 수령(守令)으로 나갔을 때나 북방(北方)에 안절(按節)하여서도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세상이 바야흐로 붕비(朋比 붕당을 지어 자기 편을 두둔함)하여 서로가 모함과 알력을 일삼았는데도 남구만은 마음가짐과 주장하는 의논이 항상 공평하고 윤당(允當)하였기 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하는 말이 일어나지 않았다.
‘만일 남구만으로 하여금 그의 죽음[卒]이 갑술년 이전에 있게 하였다면, 그의 청명(淸名)과 망중(望重)은 옛사람에게서 구해야 할 것이니, 누가 감히 흠잡아 논의할 사람이 있겠는가?’고 하였다.
이것은 곧 남구만과는 취향이 다른 자의 말이었는데, 그 칭찬하는 정도가 이와 같았다면 남구만을 가히 알아볼 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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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의령(宜寧). 자 운로(雲路). 호 약천(藥泉) ·미재(美齋). 시호 문충(文忠).
1651년(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正言)을 지냈다.
1660년(현종 1) 이조정랑 ·집의(執義) ·응교(應敎)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1668년 안변부사(安邊府使) ·전라도관찰사가 되고, 1674년 함경도관찰사가 되어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방수비를 다졌다.
숙종 초에 대사성 ·형조판서를 거쳐, 1679년(숙종 5)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 ·부제학 ·대제학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83년 병조판서가 되어 폐사군(廢四郡)의 복치를 주장하여 무창(茂昌) ·자성(慈城) 등 2군을 설치하였다.
이무렵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84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江陵)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禧嬪)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학,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이다. 문집에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출처] 남구만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