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1:8~9)
강원도 동해시 삼화(三和)지역에 하루 동안 716mm 이상의 엄청난 비가 쏟아진 날은, 지금부터 19년 전, 태풍(颱風) 루사(Rusa)가 영동지방을 강타한 2002년 8월 31일 토요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1년 강수량이 1,300mm 정도임을 감안할 때, 하루 동안 716mm 이상의 비는 물동이로 물을 하늘에서 쏟아붓는 것 같았습니다. 전기는 아침부터 벌써 정전이 되었고, 유일한 지방도로 유실로 시내버스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강풍과 국지적인 폭우로 몰아닥친 루사 태풍은 참으로 무서웠습니다.
삼화동 일대와 교우들의 집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비가 계속 쏟아지자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높은 지대에 있는 예배당 안까지 목양실과 부엌으로 마구 넘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토요일 청소 담당 구역 식구들과 함께 계속 물을 퍼내는데 청소 담당 구역 식구들의 집에도 물이 차올라 온다는 연락을 받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점심때가 되자, 라면 하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이제 우리 가족 네 식구가 교회당, 목양실, 부엌으로 쏟아지는 물을 퍼내는데, 물을 퍼내고 퍼내도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토요일 저녁 7시가 되자, 삼화동사무소에서 확성기를 통해 삼화동민은 집중 호우로 위험하니 쌍용양회 동해공장 복지회관으로 빨리 대피하라는 안내 방송을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내일이 9월 첫 주일인데 하던 일을 포기하고 피난 갈 수 없어, 정전이 된 방에서 촛불을 켜놓고, 미완성인 주보를 이제라도 완성하려고 노트북 앞에 앉는 순간, 갑자기 “우지직 우지직, 꽈 꽝!” 하더니 목사관 큰 방 벽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였습니다. 그러자 방안으로 산 중턱의 황토물, 바윗덩어리, 산 흙, 나무토막이 마구 쏟아져 들어 왔고, 목사관 지붕이 왕창 무너져 내렸습니다.
산사태로 목사관이 무너지면서 제 아내, 아들, 딸, 네 식구가 일순간에 매몰(埋沒)됐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저를 들어 방 한쪽 귀퉁이로 옮겨 놓은 것 같았습니다. 위에서 천장이 무너져 짓누르고 무너진 벽이 옆에서 내 몸을 조여 압박해 왔습니다. 저는 살아야겠노라고 두 손을 펴 공간이 넓혀지도록 발버둥을 치며 결사적으로 밀쳐냈으나 무너진 벽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힘으로는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저를, 양쪽 벽이 이제는 갈비뼈까지 조여 오자 숨을 쉴 수 조차 없었습니다. 이렇게 죽는가보다 싶었습니다.
그때 부엌에 있던 아내가 싱크대 앞에 있었더라면, 큰 방이 무너질 때 떠밀려 와 내리친 12자짜리 장롱에 맞아 즉사했을 텐데, 냉장고 옆에 있다가 냉장고에 깔리고 무너진 벽에 얻어맞아 양쪽 폐가 터져 파열됐습니다. 아내는 “아이고! 아이고!” 하더니 숨을 몰아쉬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먼저 딸을 찾았습니다. “진아, 괜찮니? 어디 있느냐? 살아있느냐?” 그런데 그 순간에 딸의 대답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다섯 살 된, 다 키워놓은 딸을 잃은 줄 알았습니다.
두 번째로 아들을 찾았습니다. 그때 목사관 건넛방에 있던 포항 한동대학교 졸업반 아들 열이가 “저는 괜찮습니다. 어디 계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갑니다.”하고 내가 묻혀 있는 장소를 확인하고 벽 유리를 깨고 30년 동안 굳어진 벽돌을 부숴가면서 아버지를 구출하겠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구출을 시도한 아들 손발이 피범벅이었습니다.
아내는 세 번째로 나를 찾았습니다. 아내 사랑에 부동의 1위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제가 3순위로 밀려났더라고요. “여보! 당신은 어디 있어? 살아있어?”하고 물었습니다. “응, 나 살아있는데 정신을 놓치지 않아야겠어. 힘을 아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더는 묻지 마.”라고 해놓고, 만일 2차로 산사태가 덮치면 그대로 다 죽을 것 같아 “산사람은 속히 밖으로 나가라”고 외쳤습니다. 아들 열이는, 벽이 무너지면서 TV에 맞고 무너진 천장에 깔려 숨을 못 쉬고 있던 누나를 구출하고, 파출소에 신고하게 했습니다. 딸 진이는 그 몸으로 물살이 너무 거세서 걸어가지 못하고 기어가서 삼화파출소에 신고했습니다.
당시 삼화파출소에서는 동해경찰서 전통문에 따라 근무일지와 총기만 들고 대피하려고 하는 순간에 딸의 신고를 받았습니다. 매몰(埋沒)된 지 한 시간 만에 딸의 신고를 받고 삼화파출소 직원 10여 명이 올라왔습니다. 삼화파출소 직원들의 도움으로 긴박한 순간에 우리는 극적으로 구출됐습니다. 저는 들것에 실려 쌍용양회 복지회관으로 옮겨져 먼저 피난 온 동민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다친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뜬눈으로 밤을 고통스럽게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9월 첫 주일인데, 안타깝게도 교회에서 공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119구조대원들의 도움으로 구급차에 실려 동해 금강병원에 네 식구가 입원하여 두 남매는 두 주간 동안 치료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벽이 무너질 때 부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몸부림을 치다가 무너지는 벽과 냉장고에 치여 양쪽 폐(肺)가 터져 폐가 파열(破裂)됐습니다. 척추(脊椎) 타박(打撲)을 입은 저와 함께 네 식구가 금강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4주 동안 치료받고 퇴원했습니다.
우리 네 식구는 한자리에 있었더라면 네 식구 다 몰사(沒死)했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벽이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앉아 산사태(山沙汰)로 매몰된 상황에서, 더군다나 동네 사람들은 다 피난 가고 없는 밤에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죽을 자리에서 우리 네 식구를 살려주셨습니다. 죽을 자리에서 전적으로 살려주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당시 이 말씀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동해 금강병원에 입원해서 4주 동안 치료받고 있을 때입니다. 하루는 한국기독공보 기자가 찾아와 루사 태풍에 무너진 목사관 현장 기사를 취재하고, 부자간에 한 병실에 입원해 있는 사진과 무너진 목사관 사진을 게재하자, 이 기사를 읽고 전국 각지에서 친히 찾아와 기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복구 작업에 동참한 내 동생 김병학 장로 내외, 교우, 교회, 기관, 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총회부흥전도단 23대 대표단장, 장로회신학대학원 72기 동기인 창원 양곡교회 지용수 목사님의 위로도 잊을 수 없습니다. 찾아와서 격려해주시고 위로해 주신 힘은 위대했습니다. 그때 입원해 있던 금강병원과 무너진 목사관 현장을 친히 찾아오시고 복구 작업에 땀 흘려 주신 한분 한분에게 다시 한번 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 하루는 추석날이라고 금강병원에서 점심때 접시에 담아 준 송편 3개는 두고두고 눈물겨운 추석 송편이었습니다.
태풍 백서 통계에 의하면, 당시 태풍 루사로 이재민이 6만 3천여 명이었고, 213명이 사망(死亡)하였으며, 33명이 실종(失踪)됐습니다. 274개의 다리가 붕괴하고, 30만 마리의 가축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19년 전 가격으로 환산하면 총 5조 2천여억 원의 재산(財産) 피해를 냈습니다. 우리나라 태풍 기록 사상 최대의 재산 피해액입니다. 1904년 기상 관측 이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악이라 할 만한 피해를 낸 루사 태풍이었습니다.
목사관이 무너져 없어져 버리자, 교회에서 동해시 천곡동에 33평 쌍용아파트 102동 1802호를 매입하여 목사관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4주 만에 토요일 날 병원에서 퇴원하고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나니, 서울. 노원구 상계동 평강교회 박홍석 목사님과 약속한 부흥회가 돌아왔습니다. 몸이 온전치 못해 다음으로 연기하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더니,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준비 기도회를 열었으며 교회 주변에 전단지 수천 장을 뿌렸다고 하기에, 퇴원한 지 3일 만에 월요일부터 절뚝거리는 몸을 이끌고 3일 동안 인도한 부흥회는 참으로 은혜가 충만하고 기억에 남은 집회였습니다.
루사 태풍 이후에 삼화동민들, 교우들이 삼화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변화였습니다. 그러자 기도 끝에 교우들에게 제안했습니다. 새로운 대지를 매입하여 새 예배당을 건축하자고 하고, 그 방법으로 아침 한 끼니를 전 교우들이 릴레이로 참여하여 금식(禁食)하면서 3년, 1,000일 동안 아침 금식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대지 매입과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한 아침 릴레이 금식기도회는, 그리하여 2003년 7월 1일부터 시작하여 2005년 12월 23일까지 1,000일 동안 계속했습니다.
당시 딸 진이는 광주 전남대학교 음대를 졸업하고 교회를 섬기면서 예은 피아노학원 강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예은 피아노학원 원장 홍순녀 집사님이 “진아! 네 아버지가 우리 교회 예배당 헌당식 때 설교하셨는데 너무 은혜스러워 네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가 가깝다면 나는 네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를 나가고 싶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딸 진이가 “지금 우리 교회에서 대지를 매입하여 새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1,000일 아침 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대지를 한번 알아볼까?”하고 소개한 땅이 동해시 쇄운동 72번지였습니다.
10만 동해시에서 유일하게 5천 세대 아파트가 있는 종교부지(宗敎敷地) 같은 아파트 단지 옆이었습니다. 아침 금식기도를 시작한 지 정확하게 100일째 되던 날 2003년 10월 8일에 매입한, 새 예배당을 건축할 대지는 확실히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아침 금식 기도 중이던 온 교우들이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금식 릴레이 기도를 계속하면서, 예배당을 건축할 쇄운동을 찾아와 대동아파트 2,096세대, 부영아파트 2,200세대, 협성아파트 220세대에 축호 전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설계 초기부터 긴밀하게 의논한 동해교회 이종순 장로님에게 건축을 맡기고, 설계 허가가 나오자 전 교인이 총동원하여 3일 금식기도를 드린 후, 2004년 9월 9일, 예배당 건축 기공 예배를 드리고 첫 삽을 떴습니다.
2005년 4월 12일, 교회 명칭을 104회 강원동노회 허락으로, 공모해서 결정한 동해청운교회(東海靑雲敎會)로 바꿨습니다. 2005년 8월 20일, 지난 38년 동안 사용하던 정든 삼화교회 예배당과, 주일 낮, 밤,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시간마다 치던 주물 종을 끝으로, 다시는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삼화동민들 감사합니다. 삼화교회는 동해청운교회로 시작합니다.”라는 현수막(placard)을 내걸고 동해청운교회로 이사했습니다. 구 삼화교회당과 대지 230평은 삼일교회에 기증(寄贈)했습니다.
2005년 8월 21일, 동해청운교회 새 예배당 입당(入堂)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8월 29일부터 매일 밤 8시부터 9시까지 1차 40일 작정 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새벽 5시부터 5시 40분까지, 제목을 붙여서 40일 작정 기도회를 17차, 680일 동안 계속 꾸준히 진행했습니다. 추위와 더위를 개의치 않고 40일 작정 기도회만 개최하면 한결같이 모여서 기도했던 그 열정, 그 당시 교우들의 동참이 고맙고 그립습니다.
2005년 9월 8일, 동해청운교회 새 예배당 헌당(獻堂) 예배를 드렸습니다. 건축위원회를 조직한 지 10년, 기공 예배를 드린 지 365일 만에, 700여 명이 모여 드린 감격에 벅찬 헌당 예배였습니다.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친 새 예배당 건축이었습니다. 새 예배당 건축 기간 내내 건축업자와 교우 간에, 교우와 교우, 목회자 간에 큰 소리 한번 나지 않고, 불상사 없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공사를 마치고 헌당하게 된 것이 감사하고 더욱 영광스러웠습니다.
설계(設計)는 동해 정우 건축이 맡았고, 시공(施工)은 동해 예림종합건설(주, 대표 이종순 장로)이, 음향, 영상, 장의자는 보아스/보아 전자(대표 김봉하 장로)에서 맡았습니다. 16년 전, 4층 높이에, 바닥 평수 160평, 연건평 600여 평, 총공사비는 30억 원이었습니다. 동트는 동해시에 우뚝 솟은 작품이요, 명품이었습니다. 동해청운교회 헌당 예배의 감격은 꿈꾸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헌금(建築獻金)을 작정할 때입니다. 딸 진이는 예은 피아노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당시 60만 원 월급을 받을 때 6만 원 십일조하고, 남은 돈 54만 원씩 2년 동안 예금하여 건축헌금으로 1,000만 원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서울 상명대학교대학원에 입학하여 서울에 머물 집이 없었을 때,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산정현교회 송석산 목사님이 졸업할 때까지 딸처럼 먹여주시고 재워주시며 보살펴 주신 은혜는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결혼해서 집사 내외로 서울에서 시어머니 모시고 잘 믿고 잘살고 있습니다.
아들 열이는 포항 한동대학교를 졸업하고, 280명 모집에 1,800명이 지원한 공군 학사 장교에 합격했습니다. 진주 공군사령부에서 훈련받고 소위(少尉)로 임관하는 날, 공군 학사 장교 112기 280명 가운데 1등으로 국방부 장관상을 받았습니다. 공군사령부 연락을 받고 교우들과 함께 참석했는데 국방부 장관 수상은 참으로 영광스러웠고 아들 낳은 보람을 느낀 임관 식장이었습니다.
중위(中尉)로 3년 동안 제대할 때까지 성남, 서울공항에서 근무하면서 당시 110만 원 월급 받을 때 건축헌금으로 3천만 원을 드렸습니다. 제대 후 장로회신학대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아들은 목사 안수를 받고 지금 인천동노회 동춘교회(윤석호 목사 시무)에서 행정목사로, 며느리 최지혜 목사는 인천노회 효성영광교회(박종인 목사 시무)에서 부목사로 충성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건축헌금으로 당시 3년 치 생활비 1억 원을 작정해서 드렸습니다. 아내도 선뜻 동의하여 기쁨으로 드렸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6년 동안 매달 생활비와 각종 집회 사례비를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생활비 9년 치를 건축헌금으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건축비가 부족하여 나중에는 각종 보험을 전부 해약한 해약금과 집에 있는 모든 금붙이 50돈을 팔아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우리 가족이 바친 건축헌금은 모두 3억 3천만 원이었습니다. 제 시간, 제 재능, 제 물질, 제 젊음을 몽땅 동해청운교회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이 일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榮光),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동해청운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아멘!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성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백성이 여호와께서 다윗과 솔로몬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역대하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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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님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김병훈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