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축구연맹(이하 UEFA)의 공식 사이트인 Uefa.com은 UEFA 창립 50주년(Golden Jubilee 50 Years)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여러가지 행사를 펼쳐왔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서 전세계 네티즌의 투표를 통해 1954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0년 단위로 총 250명의 유럽 역대 스타들 가운데 시기별 베스트 10을 선정하고 또한 UEFA 50년 동안의 유럽 축구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역대 선수 인기 베스트 50인을 뽑는 온라인 투표를 실시, 최근 그 집계를 완료하였다. UEFA의 발표에 따르면 이 투표에는 총 134,796명이 참가하여 총 6,739,800여 표를 행사하였고, 상위 4위를 기록한 역대 선수는 모두 100,000표 이상을 획득한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Uefa.com은 일단 시작하는 의미에서 베스트 50인의 명단에서 아쉽게 탈락한 100 - 51위의 선수를 간략한 소개를 실어 발표하고 있는 상황으로서, 추가적인 명단이 발표되는 대로 계속 연재할 예정이다. 투표 결과를 접함에 있어 국가별 인터넷 보급도와 팬들의 참여도에 따른 편향, 현재의 팬들에게 알려져 있는 정도 등이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음을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본 기사는 Uefa.com의 내용 번역이 주를 이루며, 필자에게 친숙한 일부 선수들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부연 설명이 겯들여졌음을 미리 밝힌다.]
100위 루이지 리바 (Luigi Riva, 이탈리아 / 23,649표)
1970년 월드컵에서 크게 활약한 이탈리아의 공격수로서 통산 A-매치 42회 출전 / 32골을 기록하였다.
99위 피리 (Pirri, 스페인 / 23,968표)
루이지 리바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스페인의 미드필더 겸 수비수. 선수생활의 대부분을 레알 마드리드에서 보냈으며, 수비수 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66년부터 78년까지 활약한 대표팀에서는 41경기에 출전 16골을 기록하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98위 요제프 보지크 (József Bozsik, 헝가리 / 24,086표)
페렌치 푸스카스, 산도르 콕시스와 함께 1950년대 '마법의 마자르 군단' 헝가리 대표팀을 이끌었던 미드필더.
97위 리나트 다사예프 (Rinat Dasaev, 러시아 / 24,197 표)
1984-1993년 세대의 후보에 올랐던 FC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골키퍼로서 1988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신들린 선방을 펼쳤으나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에게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96위 로베르토 베테가 (Roberto Bettega, 이탈리아 / 24,400표)
1970년대에 걸쳐 유벤투스 FC에 충성을 다한 선수. 이탈리아 세리에 A 통산 426경기 출전 / 193골을 기록, 역대 리그 통산 5위의 득점 기록을 가지고 있다.
95위 알랭 지레스 (Alain Giresse, 프랑스 / )
미셀 플라티니, 장 티가나와 함께 1980년대 프랑스 대표팀의 막강 미드필드진을 형성했던 선수. 그는 프랑스의 1984년 유럽선수권대회 제패의 주역이다.
94위 호세 알타파니 (José Juan Altafini, 브라질 & 이탈리아 / 24,673표)
국적을 달리하여 월드컵에 출전한 4명의 선수 가운데 한 명. [이들 중 하나가 그 유명한 헝가리의 피렌체 푸스카스로서 그는 헝가리 대표 선수에 이어 스페인 대표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브라질 출신으로 후에는 이탈리아 리그의 인테르나치오날레, 나폴리, 유벤투스에 활약하며 이탈리아 국적을 취득하였다. 전형적인 센터포워드로서 1963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2골을 기록하였다.
93위 브랑코 체베치 (Branko Zebec, 유고슬라비아 / 24,747표)
1950년대에 활약한 유고슬라비아의 레프트윙어로서 후에는 중앙 수비수로 전향하였다.
92위 츠보니미어 보반 (Zvonimir Boban, 크로아티아 / 25,078)
1990년대 AC밀란과 크로아티아 대표팀에서 맹활약한 미드필더. 다보르 수케르, 프로시네츠키, 츠보니미어 솔도와 함께 1998 월드컵에서 크로아티아의 돌풍을 이끌었다.
91위 후아니토 (Juanito, 스페인 / )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면서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공격형 미드필더. 대표팀에서는 34경기에 출전해 8골을 기록했다.
90위 산도르 콕시스 (Sándor Kocsis, 헝가리 / 25,125표)
앞서 언급한대로 1950년대 헝가리 무적시대의 공격수. 통산 A 매치 68경기 출전 / 75골을 기록하였으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11골을 기록하였다.
89위 오마르 시보리 (Omar Sivori, 아르헨티나&이탈리아 / 25,277표)
아르헨티나 태생의 이탈리아 공격수. 1961년 올해의 유럽선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유벤투스 FC의 리그 3회 우승에 공헌하였다.
88위 크리스티안 비에리 (Christian Vieri, 이탈리아 / 25,388표)
현재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
87위 한지 뮐러 (Hansi Müller, 독일 / 26,224표)
분데스리가를 시청한 30대 이상의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친숙한 1980년대 독일의 미남 스타 공격수. 당시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활동하면서 1978년, 82년 월드컵에 출전하였고 1980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칼 하인츠 루메니게, 베른트 슈스터와 함께 우승을 일구었다. 아직까지도 유럽에서는 '그레이트(Great)'라는 존칭을 그의 이름 앞에 붙일 정도로 그가 남긴 인상은 강렬하다. 현재는 UEFA의 축구 대사로 활동하고 있다.
86위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Giancarlo Antognoni, 이탈리아 / 26,268표)
피오렌티나의 전설적인 미드필더로서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우승 멤버이다.
85위 미셀 프뢰돔 (Michel Preud'Homme, 벨기에 / 26,621표)
90년대 '붉은 악마' 벨기에의 골문을 지켰던 명수문장.
84위 산드로 마졸라 (Sandro Mazzola, 이탈리아 / 26,679표)
1930-40년대 토리노의 축구 스타였던 발렌티노의 아들로서 부자가 이탈리아 축구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인테르나치오날레 소속의 공격수로 활동하며 2회의 유럽컵 우승을 달성하였고,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로는 70차례 이상의 A-매치에 나섰으며 자국의 1968년 유럽선수권 우승에 공헌하였다.
83위 루이 코스타 (Rui Costa, 포르투갈 / 26,679표)
AC 밀란의 플레이 메이커이자 루이스 피구(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미드필더.
82위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Juan Alberto Schiaffino, 우루과이&이탈리아 / )
우루과이 출신으로서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침몰시키는 역사적인 골을 성공시킨 주인공. 이후 이탈리아로 국적을 바꾸었다.
81위 에릭 게레츠 (Erik Gerets, 벨기에 / )
벨기에의 1980년 유럽선수권 결승(대 독일전 1-2패) 진출을 견인한 벨기에 출신의 강인한 수비수. 1982년부터 90년까지 3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후에는 PSV 아인트호벤을 거쳐 현재는 독일의 카이저스라우턴의 감독을 맡고 있다.
80위 올레흐 블로킨 (Oleh Blokhin, 우크라이나 / 27,359표)
1970년대 구 소비에트 연방의 대표적인 공격수로서 소비에트 연방의 대표 선수로서 A-매치 101경기 출전 / 35골을 기록했으며, 자국 리그에서는 432경기 출전 / 211골이라는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겼다. 소속 클럽 디나모 키에프의 리그 7회 우승, 소비에트 컵 5회 우승, 그리고 유럽컵 대항전인 컵위너스컵 2회 우승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현재는 우크라이나 공산당 소속의 의원으로서 정치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79위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Emilio Butragueño, 스페인 / 27,411표)
1980년에 걸쳐 레알 마드리드에서 걸출한 활약을 펼쳤던 공격수. 그는 1986년부터 90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의 프리메라리가 5연패에 공헌하였으며, 2회의 UEFA컵 우승을 달성하였다. 현재는 레알 마드리드 수뇌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86년 월드컵에서는 5골을 기록하며 스페인을 8강으로 이끌기도 했다.
78위 데니스 베르캄프 (Dennis Bergkamp, 네덜란드 / 27,745표)
아약스를 거쳐 현재는 아스날 런던에서 활약 중인 천재성과 냉철함을 겸비한 공격수. 네덜란드의 대표 선수로서 36골을 기록하였고, 아약스 시절에는 컵위너스컵과 UEFA컵 우승을 맛보았다. 절묘한 볼 터치, 득점을 창조해내는 시야에 있어 발군의 기량을 과시한다.
77위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Hristo Stoitchkov, 불가리아 / 28,006표)
불가리아와 FC 바르셀로나의 전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조국 불가리아를 4강까지 견인하였다. 8강전의 상대였던 독일은 그의 프리킥에 무너지며 불가리아 돌풍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FC 바르셀로나의 간판 공격수로서 1992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UEFA컵 1회 우승, 그리고 프리메라리가 5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76위 장 피에르 파팽 (Jean-Pierre Papin, 프랑스 / 28,044표)
90년대 초반에 크게 활약했던 프랑스 출신의 공격수. 프랑스 대표 선수로서 54경기 출전 / 30골을 기록하였고, 독일의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UEFA컵 우승을 맛보았다.
75위 페르난도 이에로 (Fernando Hierro, 스페인 / 28,612표)
레알 마드리드의 '영원한 주장'으로 불려지는 수비수. 수비수임에도 스페인 대표 선수로서 A-매치 89경기 출전 / 29골이라는 놀라운 공격력을 발휘하였고, 레알 마드리드의 상징으로 자리하며 챔피언스리그 3회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하였다. 현재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카타르 리그에서 뛰면서 은퇴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74위 파울 브라이트너 (Paul Breitner, 독일 / 29,050표)
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세계 최정상급의 기량을 자랑했던 위대한 수비수. 베켄바우어, 귄터 네처, 게르트 뮐러와 함께 70년대 서독의 최전성시대를 구축, 1972년 유럽선수권대회 우승, 1974년 서독 월드컵 우승을 일구었다. 소속 클럽 FC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1974년-76년까지 챔피언스리그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구렛나루와 헝클어진 머리, 그리고 헐렁하게 입은 양말의 모습으로 '헐랭이'라는 별명이 80년대의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서 붙여질 정도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인물이다. 그가 은퇴한 이후에는 그를 능가할 수비수는 더이상 독일에서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수비력과 볼 키핑에서 천부적인 재질을 발휘하였다. 현재는 독일의 스포츠 전문 채널 DSF의 축구 해설자로 활동하며 귄터 네처와 함께 현 독일 대표팀의 모습에 독설을 가하고 있다.
73위 에드가 다비즈 (Edgar Davids, 네덜란드 / 29,086표)
최근 유벤투스 FC에서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선수 (임대후 완전 이적의 조건). 아약스 시절 1995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였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맹활약하였다. 고글과 치렁치렁한 머리로 '싸움닭'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72위 폴 개스코인 (Paul Gascoigne, 잉글랜드 / 29,747표)
잉글랜드가 낳은 천재 축구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았던 비운의 미드필더. 토튼햄 핫스퍼와 글래스고우 레인저스에서 각각 리그 우승을 달성하였고, 이탈리아 S.S 라치오에서도 활약하였다. 9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로 재기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음주벽과 기행으로도 많은 화제를 달고 다녔다.
71위 이고르 네토 (Igor Netto, 러시아 / 29,750표)
구 소비에트 연방의 대표 선수로서 1950년대와 60년에 크게 활약한 미드필더. 소비에트 연방의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을 견인하였다
70위 루디 푈러 (Rudi Völler, 독일 / 29,092표)
1980년대 중반과 90년대에 걸쳐 위르겐 클린스만과 더불어 독일 대표팀의 공격을 이끌었던 인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의 우승 주역이며, 은퇴 이후에는 바이어 레버쿠젠의 기술 코치에 이어 독일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 2002년 한일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다.
69위 닐스 리드홀름 (Nils Liedholm, 스웨덴 / 29,925표)
1950년대 이탈리아의 AC 밀란에서 군나르 그렌, 군나르 노르날과 함께 크게 활약했던 스웨덴 트리오 중의 한 명. 미드필더로서 밀란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68위 프리츠 발터 (Fritz Walter, 독일 / 29,973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베른의 기적'을 창출한 독일의 영원한 주장이자 스승. 그에 대한 국민적인 존경심은 프란츠 베켄바우어를 휠씬 능가한다. 최근 독일에서는 54년 월드컵에서의 극적인 우승을 소재로 한 '베른의 기적 (Das Wunder Von Bern)'이라는 영화가 장년층의 아련한 향수와 더불어 젊은층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67위 라디슬라오 쿠발라 (Ladislao Kubala, 헝가리 & 체코슬로바키아 & 스페인 / 30,516표)
두 번이나 국적을 변경하며 세 국가의 대표 선수로 활약했던 세계 유일의 선수. 그가 망명길에 오르며 국적을 변경한 배경에는 냉전시대 동서 진영간의 갈등이라는 비극이 깔려 있다. 스페인에 정착한 이후 50-60년대에 걸쳐 바르셀로나의 공격수로 맹활약, 전설로 자리잡았다. 영국 영왕의 주최로 마련된 잉글랜드 - FIFA 베스트 11의 친선전에서 FIFA 베스트 11의 공격수로 활약, 2골을 기록하였다.
바르셀로나 시절에는 상대 수비수들의 거친 저항에 부딪혀 7번이나 무릎 수술을 받을만큼 고난함이 함께 했지만, 부상도 그의 불굴의 정신력과 탁월한 재능을 꺽지는 못하였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쿠발라를 가르켜 '쿠발라는 당대 최고의 선수이다. 그의 축구는 순수하면서도 찬란하고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또한 그라운드 안에서는 누구에게나 절친하고 사려깊은 친구였다.'라 평하였다.
또한 쿠발라는 1953년부터 61년까지 9년간의 스페인 대표팀 생활동안에는 19경기에 출전 11골을 기록해 높은 골결정력을 보여주었고, 57년 11월 6일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터키와의 경기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66위 브루노 콘티 (Bruno Conti, 이탈리아 / 30,092표)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 클라우디오 젠틸레, 파울로 로시 등과 함께 자국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끌었던 공격형 미드필더.
65위 안도니 수비사레타 (Andoni Zubizarreta, 스페인 / 31,035표)
1986년부터 1998년 월드컵까지 무려 4회의 월드컵에 나섰던 스페인의 전설적인 골키퍼. 애슬레틱 빌바오, 알라베스, 바르셀로나 그리고 발렌시아까지 많은 명문구단에서 선수생활을 보낸 그는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129경기 출장으로 역대 스페인 선수 가장 많은 경기에 출장하는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메이저 무대였던 98년 월드컵 나이지리아전에서는 통한의 실수를 남기며 팀에게 예선 탈락의 '불씨'를 안겨주기도 했었지만, 수비사레타의 20년 선수 생활동안 펼쳐보인 수 많은 활약은 그가 스페인 축구 역사상에서 가장 빛나는 골키퍼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64위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독일 / 31,277표)
90년대를 대표하는 독일의 특급 공격수. 우리에게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의 환상적인 터닝슛으로 강한 인상을 남겨 친숙한 선수이다. 대표 선수로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클럽 선수로는 여러 국가를 여행하며 그의 위명을 드날렸다. 특히 마지막 기착지였던 잉글랜드의 토튼햄 핫스퍼에서 팬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아직까지 토튼햄의 후임 감독을 논할 때마다 그를 그리워하는 팬들은 클린스만을 추천하곤 한다. 축구를 벗어난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검소함과 적극적인 봉사활동으로 인해 '미스터 클린'이란 별칭을 얻었으며, 전세계에 두루 걸쳐 '클린스마니아(Klinsmania)'라는 팬들을 얻었다.
63위 루이스 수아레스 (Luis Suárez, 스페인 / 32,325표)
1960년 올해의 유럽 선수상을 수상한 미드필더 겸 공격수로서 탁월한 지휘력이 돋보였다. 현재까지도 이탈리아 세리에A에 진출한 대부분의 스페인 출신들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않고 있지만, 루이스 수아레스만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아레스는 자국명문 바르셀로나를 거쳐 인테르 밀란, 삼프도리아에서 활약하며 이탈리아 무대에서도 빼어난 활약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15년간 몸 담은 대표팀에서도 14골(32경기)를 뽑아내며 현재까지도 왕년을 빛낸 유럽의 스타 플레이어 중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62위 클라우디오 젠틸레 (Claudio Gentile, 이탈리아 / 32,533표)
1982년 월드컵을 통해 전세계에 '카테나치오'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철벽 수비력을 명수문장 디노 조프와 더불어 여실히 보여준 전설적인 수비수. 그의 대인수비 능력은 당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는 이탈리아 U-21 대표팀의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61위 던컨 에드워즈 (Duncan Edwards, 잉글랜드 / 32,678표)
1958년 독일 뮌헨에서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21세의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천후 미드필더. 마이클 오웬(리버풀)이 경신하기 이전에는 가장 어린 나이 (18세년 183일)에 잉글랜드 대표팀에 선발되었던 기록 보유자로서, 대표팀과 소속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맹활약을 펼쳐 잉글랜드 축구의 전설로 남아 있다.
60위 티에리 앙리 (Thierry Henry, 프랑스 / 32,700표)
아스날 FC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프랑스 대표팀의 공격수. 1998년 프랑스 월드컵과 2000년 유럽선수권대회의 우승을 거머쥐었고, 자국 리그인 르 상피오나와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에서 소속팀을 정상으로 이끌었다. 또한 프랑스 전통의 축구 잡지 옹즈 몽디알(Onze Mondial)이 선정하는 2003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자신의 주가를 인정받고 있다.
59위 코스타 페레이라 (Costa Pereira, 포르투갈 / 32,781표)
포르투갈의 명문 SL 벤피카의 1960년대 전성시대를 주도했던 명수문장. 1961년, 62년 챔피언스리그 2연패에 공헌하였다.
58위 루드 크롤 (Ruud Krol, 네덜란드 / 32,799표)
70년대 네덜란드와 AFC 아약스의 전성시대를 주도했던 위대한 수비수. 1974년, 78년 월드컵에 참가하여 2연속 준우승을 이끌었고, 소속 클럽 아약스가 1971-73년에 걸쳐 챔피언스리그 3연패를 달성하는데 공헌하였다. 중앙 수비수는 물론 레프트 윙(백)까지 겸임하면서 빔 스르비어와 함께 아약스를 수비진을 이끌며 빠른 발과 거친 수비력을 자랑하였다.
57위 프란시스코 헨토 (Francisco Gento, 스페인 / 33,871표)
1950-60년대 라싱 산탄데르와 레알 마드리드의 레프트 윙어를 담당하면서 빠른 발을 이용한 적극적인 돌파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인물. 레알 마드리드에서 통산 800경기 이상을 출전하면서 챔피언스리그 6회 우승, 2회 준우승에 공헌하였다. 스페인 대표 선수로는 43회의 A-매치 출전 경력(5골)이 있으며 1962년, 66년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본명인 프란시스코 헨토보다는 '파코 헨토'라는 약칭으로 더 유명하다.
56위 즈비니에브 보니에크 (Zbigniew Boniek, 폴란드 / 34,046표)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부터 86년 멕시코 월드컵까지 3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참가하며 폴란드의 공격을 이끌었던 스트라이커. 3회의 월드컵 통산 6골을 기록하였고, 특히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폴란드가 3위의 성적을 거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소속 클럽 유벤투스 FC에서는 1984년 UEFA컵 우승, 다음 해 85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현재는 폴란드 축구협회의 부회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55위 고든 뱅크스 (Gordon Banks, 잉글랜드 / 34,651표)
역대 가장 위대한 골키퍼들 가운데 한 명. 1966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으로서 통산 73회의 A-매치에 출전하여 57골 허용, 무실점 35회를 기록하였다. 또한 레스터 시티, 스토크 시티에서 활약하면서 2회의 리그컵 우승을 달성하였다. 후에는 미국 프로축구리그의 모태라 할 수 있는 NASL에 참여하였다.
54위 빌리 라이트 (Billy Wright, 잉글랜드 /)
19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크게 활약했던 잉글랜드와 클럽 울버햄튼 원더러스의 전천후 수비수. 세계 축구 역사상 첫 번째로 A-매치 100회 이상 출전(통산 104회)을 기록한 선수로, 지금까지 단 4명의 잉글랜드 선수가 100회 이상의 출전을 출전하였다. 또한 90경기 이상을 잉글랜드의 주장으로 나서, 보비 무어와 함께 최다 주장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고, 1950년부터 58년까지 3회 연속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소속 클럽 울브스에서는 리그 우승 3회를 기록하였다.
53위 게르마누 (Germano, 포르투갈 / 35,024표)
앞서 언급한 코스타 페레이라와 함께 60년대 SL 벤피카의 절정기를 구가했던 수비수.
52위 안드레이 셰브첸코 (Andriy Shevchenko, 우크라이나 / 36,207표)
우크라이나 대표팀의 중심으로서 이탈리아 AC 밀란에서 맹활약중인 파괴력 넘치는 스트라이커. 그의 클럽 밀란은 지난 시즌에 유벤투스 FC와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2003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올시즌(2003-04) 현재까지 세리에 A의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다.
51위 케니 달글리쉬 (Kenny Dalgleish, 스코틀랜드 / 36,630표)
1960년대의 데니스 로와 더불어 스코틀랜드 축구의 대표적 인물들 가운데 하나. 100회 이상의 A-매치 출전 / 30골을 기록한 스코틀랜드 유일의 센추리 클럽 멤버이다. 1977년 글래스고우 셀틱에서 리버풀로 이적한 이후에 맹활약을 펼쳐 리버풀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다. 리버풀의 영웅이었던 케빈 키건이 함부르크 SV로 이적하면서, 리버풀은 그의 후임으로 달글리쉬를 영입한 것이다.
리버풀에 입성한 이후 클럽에게 1977,78,81,84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안겨주었고, 8년여간의 리버풀 선수 생활 이후 1985년 리버풀 역사상 처음으로 선수겸 감독으로 임명되는 영예와 책임을 안았다. 1986년 리그와 FA컵 2관왕을 달성하면서 지도자의 경력 또한 선수 시절만큼이나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이후 리버풀을 떠나 블랙번 로버스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역임하였다. 현재는 영국의 스포츠 전문 채널 스카이 스포츠의 축구 해설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50위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Alessandro Costacurta, 이탈리아 / 42,511표)
생년월일 : 1966년 4월 24일
클럽 : 몬짜 칼치오, AC 밀란
프랑코 바레시의 뒤를 이어 1990년대 이탈리아 대표팀 수비 라인의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후반 AC 밀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 가운데 한 명이며 소속팀 AC 밀란에서만 한 세대에 걸쳐 충성을 다하고 있다. 이탈리아 대표 선수로는 아리고 사키 감독 시절이었던 1991년에 데뷔전을 가졌고, 이후 1998년에 은퇴할 때까지 총 59회의 A-매치에 출전하였다.
49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Alessandro Del Piero, 이탈리아 / 43,227표)
생년월일 : 1974년 11월 9일
클럽 : 파도바 칼치오, 유벤투스 FC
1993년 유벤투스에 입단한 이후 유벤투스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타로서 자리매김한 테크니션 공격수. '판타지스타'라는 애칭만으로도 그의 기술과 인기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로베르토 바지오, 파브리지오 라바넬리, 지안루카 비알리가 포진했던 유벤투스의 공격 라인에 가세, 더욱 막강한 힘을 실어주었다. 1996년 유벤투스가 아약스를 누르고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쥐는데 일조하였다.
대표 선수로는 1995년 에스토니아와의 유로 96 예선전에서 데뷔전을 가진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유로 2000 당시 프랑스와의 결승전에서의 뼈아픈 실책으로 인해 이탈리아 축구팬의 비난에 직면하는 시련을 겪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는 프란체스코 토티에 가려 그다지 중용되지 못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하였다.
48위 호세 에밀리오 산타마리아 (José Emilio Santamaría, 우루과이 & 스페인 / 43,690표)
생년월일 : 1929년 7월 31일
클럽 : 나시오날 몬테비데오(우루과이), 레알 마드리드 CF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수비수로서, 1957년 우루과이의 클럽 나시오날에서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6회의 리그 타이틀과 2회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우루과이 대표 선수로는 20경기, 스페인 대표 선수로는 16 경기의 A-매치에 출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선수 생활 이후에는 RCD 에스파뇰과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을 역임하였고, 자국에서 개최된 1982년 월드컵에서는 대표팀 감독을 담당하였다.
47위 알레산드로 네스타 (Alessandro Nesta, 이탈리아 / 44,657표)
생년월일 : 1976년 3월 19일
클럽 : S.S 라치오, AC 밀란
현재 파올로 말디니(AC 밀란), 파비오 칸나바로(인터 밀란)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수비수. 라치오에서 볼보이로 활동하며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운 끝에 1993년 마침내 라치오의 수비수로 데뷔하였다. 라치오 소속으로 1999년 컵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하였고, 2000년에는 세리에 A 우승을 거머쥐었다. 2002년 라치오를 떠나 AC 밀란으로 이적, 2003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탈리아 대표 선수로는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치로 페라라(유벤투스)의 부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대체 수비수로서 발탁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46위 게리 리네커 (Gary Winston Lineker, 잉글랜드 / 44,787표)
생년월일 : 1960년 11월 30일
클럽 : 레스터 시티, 에버튼 FC, FC 바르셀로나, 토튼햄 핫스퍼, 나고야 그램퍼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잉글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1986년과 1990년 월드컵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특히 1986년 월드컵에서는 6골을 기록, 득점왕에 등극하였다. 리네커는 발군의 골결정력 뿐만 아니라 그라운드에서의 모범적인 스포츠맨쉽으로 '영국 신사'라는 별칭을 얻었을만큼 세계 축구팬들을 사랑을 받았다. 그의 이러한 모범적인 행동은 결국 1990년 FIFA 페어플레이어상으로써 보답받았다.
레스터 시티, 에버튼, 바르셀로나, 토튼햄 핫스퍼, 그리고 종착지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에서 활동하면서 클럽 경력 통산 560경기 출전 / 283골을 기록하였다. 특히 FC 바르셀로나의 선수로는 138경기 / 54골을 기록하면서 소속 클럽의 1988년 프리메라리가 우승, 1989년 컵위너스컵 우승에 공헌하였다. 또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총 12년간 잉글랜드 대표팀의 간판 공격수로 활약하며 80경기 출전 / 48골을 기록하였다. 그의 A-매치 48골은 역대 잉글랜드 대표 선수 득점 순위에서 보비 찰튼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후에는 크리켓과 골프, 스누커 선수로도 활동했을만큼 여러 스포츠에서 다재다능함을 과시하였다. 또한 영국의 공영방송 BBC 소속의 방송인으로 데뷔, 퀴즈쇼의 진행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축구 평론가로서 BBC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45위 발렌틴 이바노프 (Valentin Ivanov, 러시아 / 46,022표)
생년월일 : 1934년 11월 19일
클럽 : FC 토르페도 모스크바
1950~60년대 구 소비에트 연방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공격형 미드필더 겸 윙포워드. 선수 커리어 동안 오직 토르페도 모스크바의 선수로만 활약하며 클럽 경력 통산 287경기 출전 / 127골을 기록, 소속 클럽의 리그 2회 우승에 공헌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대표 선수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의 우승 메달을 목에 걸었고, 1958년과 1962년 월드컵에 출전하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달성한 가장 큰 업적은 1960년 자국 소비에트 연방에게 더없이 값진 최초의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컵을 안겨준 것이다. 1966년 그의 은퇴 경기에 무려 10만 관중이 운집했을 정도로 그는 러시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44위 루드 반 니스텔로이 (Ruud van Nistelrooij, 네덜란드 / 47,398표)
생년월일 : 1976년 7월 1일
클럽 : FC 덴 보쉬, PSV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네덜란드 명문 PSV 아인트호벤에서 2회의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이후 2001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 이후 티에리 앙리(아스날), 앨런 시어러(뉴카슬) 등과 함께 프리미어리그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로 자리잡았다. 아인트호벤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골 기록을 합쳐 네덜란드 출신 선수로는 1970년대의 롭 렌젠브링크와 더불어 유럽컵 무대 최다 득점 기록을 공동 보유하고 있는 중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클럽 내에서도 60년대의 전설 데니스 로와 역시 유럽컵 최다골 공동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연장 계약(5년)을 맺었다.
43위 스탠리 매튜스 (Stanley Mattews, 잉글랜드 / 47,915표)
생년월일 : 1915년 2월 1일
클럽 : 스토크 시티, 블랙풀 FC
1930~50년대에 걸쳐 '종가'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했던 전설. 스토크 시티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 무려 30여년 간 그라운드를 누비며 50세의 나이에 은퇴하기까지 한 시대를 풍미하였고, 또한 최고 권위의 '유럽 골든볼' 초대 수상자(1956년)로서도 영원히 기억될 인물이다. 드리블과 테크닉에 능했던 매튜스는 탁월한 기량 뿐 아니라 '그라운드의 신사'로서도 찬사를 받았다. 33년의 선수 생활 동안 단 한 번의 경고 카드나 퇴장 명령을 받은 적이 없었다. 후에 영국 왕실은 모범적인 스포츠맨쉽의 본보기로서 그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였다.
42위 에릭 칸토나 (Eric Cantona, 프랑스 / 48,436표)
생년월일 : 1966년 5월 24일
주요클럽 : AJ 오세흐, 올림피크 마르세이유, 보르도,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990년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크게 활약했던 세계적인 스트라이커. AJ 오세흐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후 올림피크 마르세이유 시절 '레 블뢰(프랑스 대표팀)'에 합류하였고 1988년 서독을 상대로 한 A-매치 데뷔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유럽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명한 성격'으로 말미암아 이내 당시 대표팀 앙리 미셸 감독과 갈등을 빚었고, 또 프랑스 내에서 1년간 대표 경기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당하며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 난관에 봉착한 그는 잉글랜드행을 결심, 리즈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면서 프리미어리그를 대표하는 스타로 거듭난다. 1992년 리즈 유나이티드의 리그 우승에 공헌한 후 이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찰떡 궁합을 이루면서 수많은 성공을 일구어 냈으며 결과적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명문으로 올라서는 일에도 일조하였다. 그의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자부심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많은 화제를 일으켰다.
41위 레이몽 코파 (Raymond Copa, 프랑스 / 49,504표)
생년월일 : 1931년 10월 31일
클럽 : 앙주 SCO, 스타 드 랭스, 레알 마드리드
1950년대 프랑스의 명문 클럽 스타 드 랭스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서 크게 활약했던 공격형 미드필더. 프랑스 리그에서는 랭스 소속으로 4회의 리그 우승, '당대 무적의 팀'으로 군림했던 스타 군단 레알 마드리드에서는 2회의 리그 우승과 1956년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하였다. 클럽 뿐만 아니라 대표 선수로도 그의 활약은 빼어났는데, 특히 코파는 1958년 월드컵에서 쥐스트 퐁탠느와 함께 프랑스 대표팀을 이끌며 맹활약을 펼쳤다. 퐁탠느의 월드컵 역사상 한 대회 최다골(13골)의 숨은 주역이 바로 코파로서 그는 퐁탠느가 기록한 골의 대부분을 어시스트하였다.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에 힘입어 1958년 유럽 골든볼을 수상하였다
40위 베른트 슈스터 (Bernd Schuster, 독일 / 50,247표)
생년월일 : 1959년 12월 22일
클럽 : FC 쾰른,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바이어 레버쿠젠
1980년대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주름잡았던 천재 미드필더. 프리메라리가의 3대 명문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며 성공 시대를 구가하였다. 그의 자유분방함과 넘치는 창의성은 조직의 규율과 단결을 정통으로 하는 독일 무대보다는 정열적인 스페인 무대가 더 어울렸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독일의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을 견인하고 1981년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이후 13년간 스페인 리그에서 활동하며 리그 우승 3회, 코파 델 레이 6회, 컵위너스컵 우승 1회를 달성하였고 스페인 리그 최우수 선수로도 선정되었다.
화려한 클럽 경력에 비하여 대표 선수 경력은 특유의 자유분방한 성격에 따른 대표팀 멤버들과의 충돌로 인해 이른 시기에 마무리되어 아쉬움을 산다. 1979년,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1980년 유럽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베르티 포그츠, 파울 브라이트너, 라이너 본 호프 등 노장들이 주축을 이룬 대표팀에 새로운 피를 수혈하기 위해 고심했던 유프 데어발 감독의 눈에 띄어 대표팀에 합류하였다. 대회 본선에서 슈스터는 탁월한 기술과 창조적인 플레이로써 단번에 세계 축구팬의 주목을 받았다. 서독은 앙숙 네덜란드를 상대로 3-2의 쾌승을 거두었고, 결국 결승전에서 벨기에를 2-1로 누르고 우승컵을 차지하였다. 네덜란드전에서 기록한 3골은 모두 슈스터의 어시스트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칼 하인츠 루메니게는 서독을 대표하는 세계적 스타였고 '헤딩 괴물' 호어스트 흐루베쉬는 득점 기계로 이름을 날렸지만, 약관 20살의 슈스터가 선보인 천재적 기량은 세계를 놀라게하였다.
그러나 그는 루메니게와 브라이트너라는 당시 서독 대표팀의 구심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자신이 소속한 바르셀로나의 철천지 라이벌 클럽 레알 마드리드에서 간판 수비수로 활약했던 울리 슈틸리케와도 매우 심각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 슈스터는 이들이 대표팀에서 독재자인양 선수단을 일방적으로 통솔한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슈스터는 1982년 월드컵을 통해 '깡패 골키퍼'라는 악명을 떨쳤던 토니 슈마커와 역시 자신과 같은 창의적인 플레이를 펼쳤던 한지 뮐러와는 팀 동료로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점이 사뭇 대조적이다. 결국 일은 더욱 커져 단결과 규율을 강조하는 서독 대표팀의 감독 유프 데어발과도 갈등을 빚어 1982년 스페인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을 떠났다.
슈스터가 떠난 이후 서독 대표팀은 1982년, 1986년 월드컵에서 연이어 준우승에 그치는 좌절을 맞보았다. 새롭게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프란츠 베켄바우어 또한 슈스터가 스페인 리그를 평정하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음에도 그의 반항아적인 기질을 이유로 그의 복귀를 종용하지 않았다. 1990년 월드컵 우승은 슈스터와는 전혀 다른 차디찬 '독일 병정' 스타일의 로타 마테우스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독일인들의 뇌리에서 이제 '반항아' 슈스터의 정열과 창조성은 사라진 것이다.
'나는 모두가 추앙하는 영웅이 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축구 선수로서 기억되기를 바란다.'
이 말에서 불운한 천재의 자존심과 오만함이 엿보인다. 그가 달고 있는 '금발 천사' 혹은 '게으른 천재'라는 별명은 그가 얼마나 튀는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드러낸다. 그는 팬들과 언론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신만의 축구를 고집하였다. 이는 근래 슈테판 에펜베르크라는 독일 선수에게서 다시 발견할 수 있었던 성격이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후에는 포르투나 쾰른, FC 쾰른, 헤레스 CD(스페인 세군다리가)의 감독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샤크타르 도네츠크의 지휘를 맡고 있다. 또한 독일 축구 전문지 <키커>의 객원 칼럼리스트로 활약중이다.
39위 피터 쉴튼 (Peter Leslie Shilton, 잉글랜드 / 50,841표)
생년월일 : 1949년 9월 18일
클럽 : 레스터 시티, 스토크 시티, 노팅엄 포리스트, 사우스햄튼, 더비 카운티, 플리머스, 레이튼 오리엔트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A-매치 최다 출전 기록(125경기)을 보유하고 있는 전설적인 골키퍼. 통산 월드컵 출전 경기 수도 17경기에 이르며 1990년 월드컵 3,4위전을 마지막으로 파란만장한 잉글랜드 대표 생활을 마감하였다. 21세의 젊은 나이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수문장으로 데뷔한 이후 명성을 쌓아나갔다. 125차례의 A-매치 동안 경기당 0.66골 실점, 65회의 무실점 경기 기록이 그의 놀라운 방어력을 증명한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5경기에서는 단 1골만을 실점했다.
그의 클럽 경력 또한 대표 경력 못지 않은데, 1966년 5월 레스터 시티에서 데뷔전을 치렀던 쉴튼은 1996년 12월 레이튼 오리엔트에서의 경기까지 무려 '1000회'의 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화려한 클럽 수상 경력은 특히 노팅엄 포리스트의 전성기와 함께 했다. 레스터 시티를 떠나 노팅엄 포리스트에 입성한 쉴튼은 클럽의 챔피언스리그 2연패(78/79 시즌, 79/80 시즌) 달성에 크게 공헌하였는데, 특히 79/80 시즌 잉글랜드 대표팀 동료 케빈 키건의 함부르크와의 결승전에서의 맹활약은 그의 커리어의 백미 중 하나였다.
38위 쥐스트 퐁탠느 (Just Fontaine, 프랑스 / 53,612표)
생년월일 : 1933년 8월 18일
클럽 : AC 마라케시, USM 카사블랑카, OGC 니스, 스타 드 랭스
월드컵 역사상 한 대회 최다골의 주인공. 1958년 월드컵에서 퐁탠느가 기록한 13골은 앞으로의 월드컵사에서 좀처럼 새로 쓰여지기 어렵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퐁탠느는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 출신으로서 OGC 니스 소속으로 프랑스 리그에 데뷔한 이후 1950년대 프랑스 최고의 명문이었던 스타 드 랭스로 이적하였다. 랭스는 퐁탠느가 레이몽 코파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 공백을 메워주기를 기대하였고, 그는 이에 부응하였다. 랭스는 퐁탠느와 더불어 프랑스 리그 4회 우승의 성공을 맛보았다.
1958년 월드컵 직전까지 단 2회의 A-매치 출전을 기록, 프랑스 대표팀의 후보 선수에 머물러 있었던 퐁탠느는 같은 랭스 소속의 르네 블리야르가 부상을 당하며 전력에서 제외되자 마침내 선발 출전의 기회를 얻었다. 결국 그는 이 대회에서 13골을 몰아치며 레이몽 코파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자리잡았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다리 부상으로 인해 1961년,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대표팀에서 은퇴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대표 경력 통산 21경기 출전 / 30골을 기록하였다.
37위 마르코 타르델리 (Marco Tardelli, 이탈리아 / 53,732표)
생년월일 : 1954년 9월 24일
클럽 : 피사 칼치오, 코모 칼치오, 유벤투스, 인테르나치오날레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모두 겸할 수 있었던 다재다능함을 자랑했던 이탈리아 축구의 전설. 홀딩 미드필더로서 특히 빼어났다. 무엇보다도 타르델리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디노 조프, 파올로 로시, 클라우디오 젠틸레 등과 함께 조국 이탈리아에게 통산 3번째 월드컵 우승을 안겨준 일이다.
특히 그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 서독과의 경기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골을 터뜨리며 이탈리아의 3-1 승리를 이끌어 결승전 최우수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월드컵 통산 13경기 출전 / 2골을 포함, 대표 선수 경력 통산 81경기 출전 / 6골을 기록하였다.
타르델리의 클럽 경력은 더욱 화려하다. 클럽 선수로서 달성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우승컵을 들어올렸을 만큼 그는 유벤투스의 전성기와 함께 하며 수많은 성공을 일구어냈다. 1984년 컵위너스컵 쟁취를 시작으로 1984년 유러피언 수퍼컵, 1985년 챔피언스리그, 1990년 UEFA컵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으며 이탈리아 리그에서는 리그 우승 5회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를 달성하였다. 은퇴 후에는 1998년 월드컵에서 체사레 말디니를 보조하는 코치를 담당했으며 이탈리아 올림픽팀 감독, 그리고 인터 밀란의 감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36위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José Antonio Camacho Alfaro, 스페인 / 53,873표)
생년월일 : 1955년 6월 8일
클럽 : 알바세테, 카스티야, 레알 마드리드
페르난도 이에로와 함께 수비 부문에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를 대표해온 정열적인 윙백. 알바세테와 카스티야를 거쳐 19세의 어린 나이에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 카마초는 1989년 은퇴할 때까지의 15년 동안 7번의 리그 우승, 3번의 코파 델 레이, 2번의 UEFA컵 우승을 일구어내며 팀에게 수많은 트로피를 안겨준 '일등 공신'의 역할을 했다.
주로 클럽과 대표팀에서 오른쪽 윙백을 담당한 카마초는 저돌적인 수비와 과감한 공격력등 수비수가 갖추어야 할 능력을 두루 갖추며 일찌기 유럽 무대에서 정상급의 수비수로 자리 매김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개막직전에 가진 연습에서 치명적인 무릎 부상을 입은 카마초는 이후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는 선수생활 최대의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이후 재활에 성공하며 1982년 자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에서는 스페인의 12강(2라운드)진출을 이끌은 불굴의 '정신력'을 소유한 선수이기도 하다.
안도니 수비사레타(129회), 페르난도 이에로(89회)에 이어 81회로 역대 3번째의 스페인 대표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카마초는 선수 생활을 마감한 직후 라요 바예카노, 에스파뇰, 세비야, 레알 마드리드에서 두루 감독직을 역임했고 1998년부터 2002년까지는 스페인 국가대표 감독을 맡아 2000년 유럽선수권대회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자국 팀을 8강으로 끌어올렸다. 현재에는 이웃나라 포르투갈로 거취를 옮겨 수페르리가의 명문 벤피카의 사령탑으로 있다.
35위 지아니 리베라(Gianni Rivera, 이탈리아, 53874표)
생년월일: 1943년 8월 18일.
클럽: US 알렉산드리아 칼치오, AC 밀란.
1960년대 AC 밀란의 전성 시대를 이끈 다재다능한 포워드. 1961년 17살의 어린 나이에 명문 AC 밀란에 입단한 이후부터 16년 동안 수많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공격수로서의 골 결정력은 물론이고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는 패스에도 능했다. 나이답지 않은 뛰어난 기량으로 밀란 입성 1년만인 18살의 나이에 이탈리아 대표팀 공격수로 발탁되었다.
리베라는 밀란과 더불어 세리에 A 우승 3회, 코파 이탈리아 4회 우승의 성공을 일구었다. 유럽컵 성적 또한 화려하다. 챔피언스리그 2회(1963, 1969년), 컵위너스컵(1968년) 우승을 달성하여 1969년 올해의 유럽선수상(골든볼)을 수상하였다. 밀란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한 그는 후에 밀란의 경영 활동에 참가, 회장의 지위까지 올랐다. 밀란 회장을 역임한 이후에는 정치에 입문했다.
무엇보다 리베라가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는 바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문이다. '아시아의 진주' 박두익과 한봉진이 이끌었던 북한은 리베라를 앞세웠던 이탈리아를 격파하면서 세계축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이탈리아는 조별 예선 최종전에서 북한에게 0-1로 패하며 조기 탈락의 수모를 맛보았다. 이어 이탈리아 축구팬들로부터 토마토 세례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 비난의 정점에는 리베라가 있었다. 반대로 북한 선수단 전원은 국가적 영웅 칭호를 부여받음과 동시에 세계 축구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지난 2001년 영국의 다큐멘터리 전문업체 '베리머치소우(VeryMuchSo)'는 1966년 월드컵 파란의 주역들이었던 북한 선수들의 당시 활약상과 이후의 소박한 생활상, 그리고 그들을 아직도 영웅으로 기억하는 영국 미들스브러 시민들의 회고담 등을 아름다운 영상으로 재현한 '더 게임 오브 데어 라이브스(The Game Of Their Lives)'를 제작하였다. 이 작품은 이후 해외 각종 영화제는 물론 TV 영상물 경연 대회에서 대상을 휩쓸며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시간은 역사적인 사건과 결부된 개인의 깊은 상처까지 치유할 수 있는 듯 하다. 리베라는 이 다큐멘터리의 힘을 빌어 한 때 자신에게 크나큰 시련과 수모를 안겨주었던 옛 상대들에게 애정이 담긴 편지를 전하였다.
북한의 친구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 북한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북한 모든 시민들과 스포츠인에게 행복한 미래가 있기를 염원하며 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각자가 나름대로 설정한 인생의 목표가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월드컵에서 다시 이탈리아와 북한 선수들이 서로의 기량을 겨룰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북한이 이탈리아보다 더 뛰어난지, 이탈리아가 그 격차를 얼마나 좁혔는지를 보고 싶습니다.'
- 지아니 리베라, 2001년 9월 24일
34위 요한 네스켄스(Johan Neeskens, 네덜란드, 54796표)
생년월일: 1951년 9월 15일.
클럽: 할렘 FC, 아약스, 바르셀로나, 뉴욕 코스모스.
'요한 더 세컨드'라는 별명이 대변하듯 동시대의 다른 거목 요한 크라이프와 컴비네이션을 이루었던 전설적 미드필더. 오른쪽 내지 중앙에서 주로 활약했다. 1970년대 라누스 미켈스 감독이 이끌었던 AFC 아약스와 네덜란드의 '토탈 풋볼'을 논할 때마다 빠짐없이 거명되는 이름이다. 크라이프, 루드 크롤, 빔 스르비어, 카이처, 반 하네헴(현 네덜란드 대표 코치) 등과 함께 아약스의 유러피언 챔피언스컵 3연패(1971-1973년) 위업을 달성, 아약스를 세계적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1970년 약관의 나이에 네덜란드 대표 선수로 발탁, 통산 A-매치 49경기, 17골을 기록했다. 1974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과의 2라운드에서 감각적인 칩샷을 성공시키는 등, 총 5골을 기록하며 최전방 스트라이커를 방불케하는 득점력을 과시했다. 그가 서독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팀에 선취골을 안겨주었던 페널티킥은 월드컵 결승전 역사상 첫 페널티킥 득점으로 기록된다. 독일제 '폭격기' 게르트 뮐러에게 통한의 역전골을 허용하며 준우승에 그쳤던 네덜란드는 4년 뒤 아르헨티나에서 개최된 1978 월드컵에 크라이프 없이 출전, 네스켄스는 공수의 조율에 있어 크라이프의 몫까지 담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조국 네덜란드는 다시 한번 분루를 삼켰다.
네스켄스의 커리어의 행보는 크라이프를 매우 닮았다. 네스켄스는 1974년 월드컵 직후 아약스를 떠나 스페인의 명문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는데 그 곳에는 이미 크라이프가 도착해 있었다. 바르셀로나와 더불어 1978년 코파 델 레이, 1979년 컵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한 네스켄스는 이번에도 크라이프와 마찬가지로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클래식 버전인 NASL(북미 축구 리그)에 참여한다. 크라이프가 1979년 LA 아즈텍스, 80년 워싱턴 디플로매츠에 진출했던 반면, 네스켄스는 1979년부터 84년까지 6시즌을 줄곧 뉴욕 코스모스에서 활약했다. 당시의 북미 축구 리그는 크라이프와 네스켄스 이외에도 펠레(브라질),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 프란츠 베켄바우어(서독), 테오도어 '녜녜' 쿠비야스(페루), 조르지오 키냘리아(이탈리아) 등이 스타로서 군림하고 있던 리그였다. 보비 무어(잉글랜드)와 게르트 뮐러(서독) 또한 이곳을 거쳐갔다.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네스켄스는 90년대 후반 네덜란드 대표팀의 코치를 역임했으며 00/01 시즌부터 NEC 나이메겐의 감독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33위 베르티 포그츠(Berti Vogts, 독일, 55398표)
생년월일: 1946년 12월 30일.
클럽: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1970년대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서독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수비수. 프란츠 베켄바우어, 파울 브라이트너와 이루는 강력한 수비 라인은 서독 성공 시대의 밑거름이었다. 동네 클럽 VfR 뷔트겐에서 축구를 시작한 포그츠는 이내 발군의 수비력을 인정받아 1965년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로 이적, 이후 14년동안 글라드바흐의 간판 수비수로 활동하였다. 포그츠는 '데어 테리어(Der Terrier: 사냥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경기마다 자신의 마지막 경기인양 악착같은 수비와 강인한 승부근성을 보여주어 글라드바흐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당시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는 포그츠 뿐만 아니라 유프 하인케스, 알란 시몬센, 귄터 네처, 라이너 본호프, 빈프리트 쉐퍼 등과 같은 걸출한 선수들을 거느리며 분데스리가의 절대지존 바이에른 뮌헨과 당당하게 자웅을 겨루었다. 포그츠는 이들과 함께 분데스리가 5회, DFB-포칼(독일 FA컵) 1회, UEFA컵 2회 우승을 거머쥐었고 1977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잉글랜드 전통의 명문 리버풀에게 밀려 아깝게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인해 포그츠는 수비수라는 다소 불리한 조건에도 올해의 독일 선수상을 2회나 수상할 수 있었다.
글라드바흐에 입단한지 1년만에 대표팀의 수비수로 발탁된 그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 참가하여 서독이 3위의 성적을 거두는데 일조하였다. 4년후 자국에서 열린 1974년 월드컵에서 포그츠는 대표팀의 주전 수비수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이 대회의 결승전이었던 서독과 네덜란드의 경기는 월드컵 역사상 손꼽히는 명승부이다. 네덜란드의 크라이프, 렌젠브링크, 네스켄스, 렙, 크롤, 아리 한, 빔 스르비어, 서독의 게르트 뮐러, 그라보스키, 횔첸바인, 오버라트, 회네스, 본호프, 브라이트너, 베켄바우어, 슈바르첸벡, 포그츠 등 당대의 거목들이 정면으로 충돌하여 뜨거운 승부를 펼쳤다.
포그츠는 결승전에서 네덜란드의 천재 요한 크라이프를 봉쇄하는 중책을 담당하였다. 비록 경기 시작과 더불어 크라이프에게 페널티킥을 헌납하지만 이후부터는 자신의 주어진 임무를 철저히 수행, 결국 2-1의 승리와 함께 서독에 2번째 월드컵 우승트로피를 안겨주었다.
32위 라울 곤살레스 (Raul Gonzalez, 스페인, 56880표)
생년월일: 1977년 6월 27일.
클럽: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레알 마드리드.
스페인 현대 축구의 '총아'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간판. A-매치 통산 63경기 출장에 37골을 기록 중인 그의 '스페인 최다골' 행진은 종전 기록이었던 페르난도 이에로의 29골을 이미 훌쩍 넘어섰다. 이 뿐만이 아니다. 그의 챔피언스리그 44골은 '유러피언컵 역대 최다골 랭킹 3위'에 올라있어 역사적인 대기록 달성의 순간에 매우 가까이 다가선 상태(역대 1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49골. 2위 에우제비우, 46골. 3위 라울, 44골. 4위 루드 반 니스텔로이 37골. 5위 페렌치 푸스카스, 36골).
또한 그가 지금까지 라 리가에서 터뜨리고 있는 165골은 '라 리가 역대 1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이 부문 역대 3위인 레알 선배 디 스테파노(228골)의 기록에는 60여골 차로 접근했다. 아직도 앞 날이 많은 그의 창창한 연령을 감안할 때, 라울이 이제껏 이룩했던 이 모든 업적들은 실로 '경이로움' 그 자체라 할만하다.
물론 라울의 그라운드에서의 가치는 그의 골 기록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의 더욱 진정한 가치는 디 스테파노를 닮은 성실한 올라운드 플레이어이자 동료들을 빛내줄 수 있는 지능적인 팀 플레이어라는 사실에 놓여질 것이다.
31위 루이스 피구 (Luis Figo, 포르투갈, 58078표)
생년월일: 1972년 11월 4일.
클럽: 스포르팅 리스본,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1990년대 세계 축구의 대표적인 라이트 윙, 윙포워드. 물론 처진 스트라이커나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서의 재능 또한 겸비했다. 1989년 UEFA 16세 이하 유럽선수권을 제패했고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대회를 거머쥐며 세계적인 주목을 끌기 시작한 피구는 스포르팅에서의 성공적인 시절을 뒤로 하고 드디어 1995년 요한 크라이프 감독의 스페인 명문 바르셀로나로 이적, 본격적인 황금기를 열게 된다. 스타군단 바르셀로나에서도 가장 기복없이 탁월한 활약을 펼치는 팀의 기둥으로 누 캄프 팬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피구는 1997년 컵위너스컵을 들어올렸고 1998년과 99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실로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2000년 유럽선수권에서는 그를 정점으로 하는 '황금 세대'로 무장한 조국 포르투갈과 더불어 준결승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그 해 여름, 바르셀로나의 철천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의 새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누 캄프에서 명성에 걸맞는 연봉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었던 피구를 당시의 세계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격 영입, 세계 축구계에 커다란 화제를 몰고 왔다. 그러나 바르셀로나 팬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 사나이는 새로운 소속팀 레알 마드리드에서도 변함없는 기량을 과시, 챔피언스리그를 제패했으며 2001년 'FIFA 올해의 선수'에 오르는 커다란 영예를 안기도 한다.
피구는 포르투갈 대표로서 현재 99회의 A-매치에 출장, 페르난도 코우투(102회)에 이어 포르투갈 역대 2위를 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지금까지 그가 터뜨린 30골은 60년대의 수퍼스타 에우제비우의 41골 다음가는 기록이다.
30위 올리버 칸 (Oliver Kahn, 독일, 58151표)
생년월일 : 1969년 6월 15일
클럽 : 칼스루에 SC, 바이에른 뮌헨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팀의 수문장이자 주장으로서 팀을 결승전까지 견인, 호나우두(브라질)를 제치고 대회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대표팀 뿐만 아니라 소속 클럽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뒤를 이어 주장직을 담당하고 있다.
1975년 칼스루에 SC의 유소년팀에 입단하면서 골키퍼로서의 축구 인생을 시작한 올리버 칸은 1987년 칼스루에 성인팀의 수문장으로 분데스리가에 데뷔, 이후 분데스리가의 대표적인 골키퍼로서 입지를 다져 나갔다. 이에 골키퍼 라이몬트 아우만의 후계자를 물색하던 독일의 최고 명문 바이에른 뮌헨은 칸을 주목하고 칼스루에에게 300만 유로의 이적료를 지급하고 그를 영입한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그는 세계적인 골키퍼로 거듭난다. 분데스리가 5회, DFB-포칼 3회 우승은 물론 챔피언스리그(00/01 시즌)와 UEFA컵(95/96 시즌), 월드클럽컵을 제패라는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아 1999년과 2001년에 세계 최우수 골키퍼에 선정되었다. 특히 00/01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대 발렌시아) 승부차기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바이에른의 우승을 이끌었다.
칸의 대표팀 경력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대기만성형이라 할 수 있다. 바이에른 뮌헨 입단한 직후 1994년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지만 보도 일그너와 안드레아스 쾨프케에 가려 출장 기회를 전혀 가질 수가 없었다. 1995년 스위스와의 A-매치에서 대표팀 데뷔전을 가지지만 1996년 유럽선수권대회와 1998년 월드컵에서도 쾨프케에게 밀려 2인자에 만족해야만 했다. 1998년 월드컵 직후 쾨프케가 대표팀 생활을 마감하고 나서야 칸은 독일 대표팀의 간판 수문장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유로 2000에서 대표팀의 주전 골리로 나섰으나 독일은 1무 2패라는 사상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조별 라운드에서 일찌감치 탈락하고 만다. 이어 2002년 한일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 자국 뮌헨에서 열린 홈경기임에도 잉글랜드에게 1-5의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는 '뮌헨 참사'를 경험한다.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한 플레이오프를 거치며 천신만고 끝에 월드컵 티켓을 거머쥔 독일은 본 대회에서 브라질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다. 이러한 성공의 바탕에는 무엇보다도 칸의 놀라운 선방이 자리했다. 비록 결승전에서 히바우두의 강력한 슛팅을 미숙하게 처리하는 바람에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지만 손가락 부상의 와중에서도 대회 기간 내내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는 점에서 골든볼 수상의 영예를 안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이는 결승전 이전까지 독일이 치른 6경기에서 단 1골만을 허용했다는 기록이 뒤받침해준다.
'고릴라'라는 별칭에 걸맞게 칸은 바이에른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로타 마테우스, 에펜베르크와 같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산하며 팀을 이끄는 다혈질의 지휘형 골키퍼로 평가받는다. 팀 동료가 수비 실책을 범했을시에는 마치 적을 대하는냥 달려들어 힐난하는 모습에서 그의 강인한 승부욕을 엿볼 수 있다. 반대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직후 통한의 패배에 통곡하는 발렌시아의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를 위로하는 모습에서 야성의 심연에 깔려있는 인간적인 따뜻함 또한 느낄 수 있다.
칸의 승리에 대한 집착과 불같은 성미는 간혹 예상 밖의 돌출행동으로 나타나 구설수에 오르기도 한다. 99/00시즌 한자 로스톡과의 경기 인저리 타임에서 공격에 가담하여 골키퍼의 특권인 펀칭으로 공을 상대 골문에 밀어 넣어 즉시 퇴장 명령을 받았다. 1990년대에 이르러 라이벌전의 성격을 지니게 된 도르트문트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인 하이코 헤어리히의 귀를 물어뜯으려 하였고 사퓌자를 향해서는 이소룡식의 날라차기를 구사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지난 시즌 바이어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는 토마스 부르다리치의 목을 움켜잡아 또다시 논란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쨌든 윤리적인 관점에서의 시시비비가 있겠지만 칸이 한 세대를 대표할만한 뛰어난 골키퍼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29위 제프 마이어 (Sepp Maier, 독일, 62375표)
생년월일 : 1944년 2월 28일
클럽 : TSV 하르, 바이에른 뮌헨
1970년대 서독 축구의 최전성기와 함께 했던 전설적인 골키퍼. 축구 전문가들은 대개 레프 야신(구 소련), 고든 뱅크스(잉글랜드), 디노 조프(이탈리아)와 함께 제프 마이어를 축구 역사상 영원히 기억될 만한 위대한 골키퍼라 평한다. 마이어는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분데스리가 473경기에 출전, 바이에른 클럽 역사상 최다 출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2위는 마어이의 팀동료였던 '폭격기' 게르트 뮐러(427경기). 마이어는 또한 1966년부터 1977년까지 11년 동안 단 한 경기의 결장도 없이 분데스리가 422경기 연속 출전을 달성하여 이 부문의 기록 보유자로도 유명하다.
'디 카쩨(Die Katze; 고양이)'라는 별명이 대변하듯 민첩함을 바탕으로 골이다 싶은 슛들을 자주 막아내 바이에른 뮌헨 팬들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1958년 바이에른에 몸담은 이후부터 1979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35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하기까지 마이어는 클럽에서 그야말로 휘황찬란한 업적을 달성하였다. 분데스리가 우승 5회, DFB-포칼 우승 4회, 유러피언 챔피언스컵 3연패(1974-1976년), 월드클럽컵(1976년) 우승 1회 등을 일구어 골키퍼임에도 올해의 독일 선수상을 3회(1975, 1977, 1978년)나 수상하였다. 연속 출전 기록을 가능하게 한 성실함과 뛰어난 기량은 독일에서 '20세기 최고의 독일 골키퍼'라는 칭호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대표팀 경력 또한 화려하기 짝이 없다. 서독의 전설적인 공격수 우베 젤러가 이끌었던 1966년 월드컵 대표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었으나 당시에는 한스 틸코브스키에 가려 출전의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이어는 서독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으로 나서 팀을 3위까지 견인한다. 1972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클럽 동료 프란츠 베켄바우어와 라이벌 클럽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의 플레이메이커 귄터 네처와 더불어 맹활약을 펼쳐 서독의 정상 등극에 공헌하였다.
1974년 월드컵은 마이어의 생애에 있어 최절정기였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서독은 천재 요한 크라이프가 이끌었던 네덜란드를 격파하고 통산 2번째의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다. 그는 결승전에서의 맹활약은 물론 대회 기간 내내 발군의 방어력을 뽐내며 4경기를 무실점으로 마무리하였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이 기간은 클럽과 대표팀을 통틀어 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라 평가 받는다. 이 황금기에 마이어는 바이에른 뮌헨과 서독 대표팀의 간판 골키퍼를 담당했던 것이다.
1978년 월드컵에서도 마이어는 여전히 대표팀의 골문을 지켰으나 팀은 2라운드 진출을 마지막으로 짐을 싸야만 했다. 이어 1년 후인 1979년 그에게 커다란 불행이 엄습한다. 교통 사고로 인한 중상으로 선수 생활을 정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골키퍼로서는 한창이라 할 수 있는 35살의 나이, 그리고 센추리 클럽(A-매치 100경 이상 출전)을 불과 5경기 앞둔 시점에서 정들었던 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복을 벗어아만 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의 골키퍼 코치로서 활동하며 후배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전수하고 있다.
그는 현역 시절 직업 축구 선수로서의 모범적인 행동으로 은퇴 후에도 여전히 독일 국민들의 따뜻한 사랑을 받고 있다. 올리버 칸이라는 명골키퍼가 활동하고 있는 현시점에도 독일 국민들은 아직까지 제프 마이어를 단연 최고의 골키퍼라 여기고 있다. 경기장에 굴러 들어온 대형 풍선이 골문으로 다가오자 사력을 다해 몸을 던져 풍선을 막아내는 그의 모습은 골키퍼로서의 철저한 직업 의식과 함께 팬들을 즐겁게 하는 그의 풍부한 유머 감각을 동시에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이는 분데스리가 40년사를 대표하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8위 게오르게 하지 (Gheorghe Hagi, 루마니아, 62383표)
생년월일 : 1965년 2월 5일
클럽 : 파룰 콘스탄차, 슈포르툴 부카레스트, 슈테아우아 부카레스트, 레알 마드리드, 브레시아 칼치오, 바르셀로나, 갈라타사라이 이스탄불
1990년대를 주름잡았던 루마니아의 전설적인 미드필더. '발칸의 마라도나'라 불렸을만큼 루마니아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이자 주장으로서 천재적인 기량을 과시하였다. 창조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테크니션으로서 왼발을 이용한 프리킥에 아주 능했고 상대의 예측을 불허하는 플레이를 구사하였다.
루마니아 클럽 파룰 콘스탄차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내 기량을 인정받아 17살의 나이에 1987년 루마니아의 명문 클럽 슈테아우아 부카레스트로 이적, 3년 연속 리그와 컵 대회 우승을 모두 거머쥐었다. 그가 슈테아우아 부카레스트를 이적하게된 배경에는 당시 사회주의 체체 루마니아의 독재자였던 쳬아우셰스쿠의 압력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슈테아우아는 루마니아 정부가 관리하던 클럽이었다.
하지는 국내 리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부푼 꿈을 안고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여 선전을 펼쳤으나 루마니아는 16강전의 상대 아일랜드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하고 말았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하지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음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그는 이 대회에서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치며 호마리우(브라질), 로베르토 바지오(이탈리아)와 더불어 전 세계 축구팬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하면서 루마니아의 공격을 주도하였다. 특히 콜롬비아전에서 터뜨린 그림같은 35미터 장거리슛은 축구팬들의 탄성을 절로 자아내게 할 만큼 환상적이었다. 하지를 앞세운 루마니아는 16강전에서 남미의 강호 아르헨티나를 격파하고 8강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8강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며 분루를 삼켜야만 했다.
다시 4년 후 1998년 월드컵을 맞이한 하지는 이 대회를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힐 정도로 비장한 자세로 임했다. 그는 루마니아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하나 팀은 16강전에서 크로아티아 돌풍에 휘말려 탈락하고 만다. 대회 직후 대표팀을 떠난 하지를 다시 불러들인 것은 유로 2000이었다. 유로 2000을 앞둔 루마니아는 하지를 대신할 만한 선수를 찾을 길이 없었기에 그에게 복귀를 청원하였다. 하지는 다시 루마니아를 이끌며 도전에 나서 조별 라운드에서 전통의 강호 독일과 잉글랜드를 제치고 8강 진출을 이루는 파란을 다시 한 번 연출한다. 그러나 8강전에서 만난 이탈리아에게 패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한 대표 선수 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통산 125회의 A-매치에 출전하면서 조국 루마니아를 동구권의 무시할 수 없는 강호로 자리잡게 하였다. 그는 이러한 공적에 힘입어 '20세기의 루마니아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클럽에서의 경력은 대표팀에서의 활약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크게 화려하진 않았다. 그는 종종 경기 중 문제를 야기하여 출장 정지와 같은 징계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90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스페인 최고 명문 레알 마드리드의 주목을 받아 대회 직후 스페인 리그에 입성한다. 이어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겨 브레시아 칼치오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스페인 리그 명문 바르셀로나로 이적한다. 마지막 기착지였던 터키 명문 갈라타사라이 이스탄불에서 아스날을 물리치고 갈라타사라이에겐 매우 값진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것이 선수 생활의 '유종의 미'. 선수 생활을 정리한 이후엔 지도자로 변신, 루마니아 대표팀의 감독을 역임하였다.
27위 페터 슈마이켈 (Peter Schmeichel, 덴마크, 66463표)
생년월일 : 1963년 11월 18일
클럽 : 브뢴드비 IF,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포르팅 리스본, 아스톤 빌라, 맨체스터 시티
잉글랜드의 명문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유나이티드)의 '영광의 1990년대'를 주도했던 덴마크 출신의 세계적인 골키퍼. 슈마이켈은 덴마크의 최고 명문 브뢴드비와 유나이티드 양클럽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골키퍼라 추앙받고 있다. 특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통해 전세계적인 명성을 드날린 그는 위기 상황에서의 발군의 방어력과 강인한 승부근성을 발휘하며 수많은 성공을 이끌었다.
5년동안 브뢴드비에서 활동하며 덴마크 리그 4회 우승이라는 출중한 성적을 거둔 그는 마땅한 골리가 없어 골머리를 앓던 유나이티드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의 주목을 받아 50만 파운드의 적은 이적료를 기록하며 1991년 올드트래포드에 입성한다. 하지만 헐값의 이적료와는 다르게 그의 활약은 매우 놀라웠다. 유나이티드의 '기둥 골리'로 활동하는 동안 슈마이켈은 프리미어쉽 타이틀 5회, FA컵 우승 3회의 성공을 이룩하였고 더 나아가 1998/99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쥐면서 유나이티드의 트레블(3관왕; 프리미어쉽, FA컵, 챔피언스리그) 달성이라는 거대한 위업을 달성하였다. 슈마이켈의 놀라운 선방 행진 덕분에 유나이티드는 한 시즌 평균 12점의 추가 승점을 얻고 있다는 세간의 평이 있었을 정도로 그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루 말할수 없이 컸다.
수많은 성공 신화를 창출한 그은 결국 37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따른 체력 부담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하는 유나이티드를 떠나기로 결심, 무대를 옮겨 2000년 포르투갈 명문 스포르팅 리스본에 입단한다. 리스본에 입성하자마자 그는 스포르팅에게 17년만의 리그 첫 우승을 선사하며 출중한 능력을 다시 한 번 과시한다. 2001년 아스톤 빌라를 택하며 다시 프리미어쉽으로 복귀한 그는 이어 디비전 1에서 승격한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했고 이후 2003년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맨체스터 지역에서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덴마크 대표팀의 간판 스타로서의 슈마이켈은 통산 129회의 A-매치에 출전하며 오랫동안 팀의 수문장 역할을 했다. 그에게 있어 1992년 유럽선수권대회는 대표 선수 경력을 통틀어 가장 찬란한 시기라 할 수 있는데, 네덜란드와 독일이 우승컵을 두고 경쟁할 것이라는 대부분의 예상을 뒤엎고 슈마이켈의 덴마크가 대회를 제패하는 파란을 연출한 것이다. 이 대회 4강전에서 덴마크는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와 연장까지 가는 혈투(2-2)를 벌이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해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슈마이켈은 승부차기에서 네덜란드의 당대 수퍼스타 마르코 반 바스텐의 킥을 선방하며 팀의 결승 진출(승부차기 5-4승)을 이끌었다. 결승전에서는 독일의 공세에 맞서 위르겐 클린스만의 골을 절묘하게 막아내는 등 눈부신 선방을 펼친 슈마이켈은 덴마크의 2-0 승리를 이끌어내며 덴마크 역사상 최초의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에 공헌하였다.
26위 로날드 쾨만 (Ronald Koeman, 네덜란드, 66661표)
생년월일 : 1963년 3월 21일
클럽 : FC 그로닝엔, AFC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바르셀로나, 페예노르트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스위퍼. 놀라울 정도의 지능적인 두뇌 플레이와 정확한 슈팅, 그리고 칼날같은 패스를 구사하며 팀을 지휘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아약스에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한 쾨만은 1988년 PSV 아인트호벤 소속으로 벤피카를 승부차기 끝에 물리치고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뒤이어 열린 유럽선수권대회에서는 반 바스텐, 루드 굴리트, 프랑크 라이카르트와 더불어 맹활약을 펼쳐 네덜란드에게 사상 최초의 우승을 선사하였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과 1994 미국 월드컵에 출전하며 네덜란드의 수비진을 이끌었던 쾨만은 은퇴 직후 지도자로 변신, 비테세 아른햄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하였고 현재는 '네덜란드의 자존심' AFC 아약스의 사령탑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거스 히딩크 감독 아래에서 수석코치를 담당하였다.
25위 미카엘 라우드럽 (Michael Laudrup, 덴마크, 67484표)
생년월일 : 1964년 6월 15일
클럽 : 브뢴드비 IF, S.S 라치오, 유벤투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비셀 고베, AFC 아약스
1970년대 덴마크 대표팀의 선수로서 명성을 날렸던 핀 라우드럽의 아들이자 바이에른 뮌헨, 글래스고우 레인저스, 첼시 등에서 활동하며 그와 동시대에 이름을 드날렸던 브라이언 라우드럽의 형. 앞으로도 덴마크의 레전드로 남게 될 미카엘 라우드럽은 현역 시절인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동생 브라이언과 함께 공격수 겸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며 덴마크 축구의 전성시대를 주도하였다.
유소년 시절부터 그 기량을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명문 AFC 아약스의 구애 공세를 받기도 했던 라우드럽은 1982년 18살의 젊은 나이에 덴마크의 최고 구단 브뢴드비 IF의 주전 공격수로 자리 잡아 15골을 기록하며 천재성을 증명하였다. 이후 미카엘은 국내리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1983년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라치오에 입단하며 본격적으로 유럽 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탈리아에서 보낸 기간 동안 라치오와 유벤투스에서 활동한 그는 1985년 월드클럽컵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기도 했다.
6시즌 동안의 이탈리아 생활을 뒤로 하고 1989년 스페인의 명문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라우드럽은 바르셀로나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며 프리메라리가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하였고 로날드 쾨만과 함께 바르셀로나에게 1992년 유러피언 챔피언스컵 첫 우승이라는 쾌거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1994년 수많은 논란 속에서 바르셀로나의 철천지 라이벌 클럽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에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달성하였는데 이는 라우드럽 개인으로서는 바르셀로나 시절을 포함해 리그 5연패라는 보기드문 기록을 소유한 '영광'으로 남게 되었다.
선수 말년에 이르러서는 휴식의 차원에서 갓 출범한 J-리그의 비셀 고베에서 2시즌을 보낸 라우드럽은 마지막으로는 유소년 시절 그를 탐냈던 네덜란드의 명문 AFC 아약스에 입단, 1997/98 시즌 에레디비지 우승와 더치컵을 모두 휩쓰는 2관왕을 달성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하지만 화려한 클럽 경력에 비해 라우드럽의 대표 선수 경력은 아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는 18살의 나이에 브뢴드비를 통한 국내 리그 데뷔와 동시에 덴마크 대표 선수로 발탁되어 노르웨이를 상대로 한 노르딕컵에서 자신의 첫 A-매치를 가졌다. 이 경기에서 덴마크는 노르웨이에게 1-2로 패하였지만 라우드럽은 골을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덴마크는 라우드럽을 앞세워 그룹 라운드에서 서독을 2-0으로 격파하는 파란을 연출하였으나 16강전에서 스페인에게 5-1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팀의 아쉬움과는 별도로 이 대회를 통해 라우드럽은 대표팀에서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라우드럽은 1992년 유럽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당시 대표팀의 감독이었던 묄러-닐센과 갈등을 빚어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불운을 맞이하였다. 감독은 공격수겸 플레이메이커를 담당하는 라우드럽에게 적극적인 수비 가담을 요구한 반면 라우드럽은 더욱 공격적인 플레이를 원했기 때문이다. 덴마크가 자국 축구 역사상 최초의 유럽선수권대회 우승을 달성한 대회였기에 그에게는 너무나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은 그에게는 마지막 도전이었다. 나이에 따른 부담으로 미드필더로 완전히 보직을 변경한 라우드럽은 덴마크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팀을 이끌었다. 그룹 라운드를 프랑스와 함께 통과한 덴마크는 16강전에서 나이지리아 돌풍을 잠재우며 선전을 펼쳤으나 8강전에서 전대회 우승국 브라질을 만나 접전 끝에 2-3으로 패하고 만다. 자신의 104번째 A-매치였던 이 경기를 끝으로 라우드럽은 '아쉬움'의 선수 생활을 정리하였다.
선수 생활 내내 라우드럽은 상대방의 집중적인 파울 공세를 받았지만 감정을 절제하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플레이를 펼쳐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은퇴와 함께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자신의 친정이라 할 수 있는 브뢴드비의 감독으로 부임, 현재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출처:사커라인/이범석
첫댓글 캬 스크롤의 심한 압박..글구 다비즈의 애칭은 pitbull.. 싸움닭(x) 싸움소(o) ^^
뷁! 전 그냥 퍼온것에 불과해요~ㅋㅋ
홍명보는 언제나오지? 도대체 몇위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