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촌형과 신문>
함민복
1987년.
“큰일 날 뻔했다.”
사촌형이 마중 나온 나를 만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왜요?”
“결혼식장에 갔다 오느라고 양복을 입어서 그렇지.”
“예?”
“집을 못 찾으면 여관에 가 자야 되지 않냐. 여관 가면 숙박부를 써야 하고, 양복까지 입은 놈이 숙박부도 못 쓰면 누가 시골 사람으로 믿겠냐? 간첩으로 보지. 요즘 세상에.”
사촌형은 글씨를 쓸 줄 모른다. 어려서는 형이 학교 다니지 않는 게 마냥 고마울 뿐이었다. 동갑내기 사촌과 형을 따라다녔다. 형이 떡메로 도토리나무를 내리치면 후드드득- 시원스럽게 쏟아지던 도토리들, 댕댕이 덩굴로 짠 종다래끼를 들고 구람을 줍던 일이 떠오른다. 금광이 있어 금방아 찧던 물레방앗간 붓도랑 물을 세숫대야로 퍼내고 잡던 메기와 뱀장어, 그 미끄럽던 감촉, 흰 눈 위에 난 발자국을 하루 종일 뒤쫓아 산토끼를 잡아오던 날은 얼마나 신났던가. 너구리를 잡으려고 바위굴에 희아리 고추와 청솔가지를 태워 매운 연기를 피우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눈이 아리고 재채기가 날 듯하다. 학교 다니지 않는 형을 따라 산과 들과 물가를 쫓아다니던 즐거운 시절.
“네가 들어간 대학은 뭘 배우는 데냐?”
“시, 소설, 그런 거 쓰는 것 배우는 데요. 그러니까 책 쓰는 것 배우는 데요.”
청량리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형은 내게 술을 따라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얘기의 요지는 농협에 진 빚 때문에 살아가기가 팍팍하다. 그렇지만 좀 더 열심히 일하면 살 길이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나는 형이 말하는 동안 가운뎃손가락 두 마디가 잘려 나간 형의 손을 보며 옛 기억에 젖는다. 우리 담배 건조실에서 누나들과 캐 온 칡뿌리를 여물 작두로 나눠 가지려다가 잘린 손가락, 엄지와 약지를 구부려 쥐고 저 손가락을 내밀며- 찌익- 쥐 울음소리를 내면 울던 동네 아이도 무서워서 울음을 그쳤다.
다음날 아침 학교 가려고 나서자 형이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아버지 사형제. 그러니까 우리 사륙이 이십사 형제 중에 네가 전문대학이지만 처음으로 대학생이 되었으니 열심히 공부해라. 네가 배우는 게 형은 뭔지 모르지만........”
형이 준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고 스물여섯 살에 전문대생이 된 나는 아주 천천히 청량리 로터리를 향해 걷는다. 여러 생각이 오가고 농가 부채에 시달리는 형이 준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어 미주아파트 미주상가 미주서점 앞에서 책방이 열리길 기다린다. 오래 기다려 시집 한권을 사고 그날 학교에 늦는다.
1991년.
눈 내린 겨울 들판 고향 가는 버스에 나는 앉아 있다.
‘그대들 쉽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라.’
이국 시인의 시 구절을 떠올려 본다. 내게 고향은 푸근한 대상만은 아니어서, 상처가 많은 곳이라서 늘 가슴 무거운, 가기 힘든 곳 중 하나이다.
“잘 봤다.”
“예?”
“너 신문에 난 것.”
명절이라 고향 땅에 돌아온 나를 사촌형이 반갑게 맞아 준다. 사촌형은 비닐에 싼 신문지를 농짝 위에서 무슨 진품 서화라도 다루듯 꺼내 내 앞에 펼친다.
“온천도 발견되고 해서 양성면이 많이 커졌어. 양성면 복사골 고총사촌형 있지, 그 형하고 보일러 가게를 거기다 냈어. 혼자 가게를 보고 있다가 점심을 시켜 먹었거든. 이 생각 저 생각 하며 밥을 먹고 있는데 아, 글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밥 덮어 온 신문지에 실려 있는 곳 있지. 그 신문지를 책상에 깔아 놓고 밥을 먹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암만 봐도 너란 말이여. 이름도 두 자는 같고 하니까 분명 넌데 무슨 일로 신문에 난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남한테 읽어 달라고 하기도 창피하고, 네가 나쁜 일이야 저지를 애는 아니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렇다면 그것도 큰 일이고 해서 오토바이 타고 삼십 리 고갯길을 넘어 집으로 오면서 별 생각이 다 들더라. 집에 와서 막내한테 읽어보라고 하니까 네가 시인이 되었다고 하더라. 그래 신문지를 내가 잘 보관하고 있는 참이다. 잘된 거냐?”
사촌형이 내 앞에 펼쳐 놓은 신문지에는 김칫국물 자국이 묻어 있었다. 사촌형은 ‘어디서 본 듯하단 말이여’라고 하면서는 손가락 잘린 손으로 내 얼굴 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첫 시집을 내자 몇몇 신문사에서 인터뷰 기사를 실어 주었는데 그중 하나를 사촌형이 우연히 보고 흥분했던 것이다. 형은 그 김칫국물 묻은 신문지를, 나도 보관하고 있지 않은 신문지를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가족과 피붙이란 무엇인가. 서로에게 향긋한 냄새를 풍겨 주는, 것만이 아닌, 시큰한 냄새가 나는 김칫국물 자국을 서로에게 남겨 주는 존재가 아닌가. 나는 형의 가슴에, 형은 내 가슴에 엎질러진 김칫국물이 아니가. 어머니는 내게, 나는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내게, 나는 아버지에게, 누나는...... 그래 시큰한 김칫국물들이 모여들어 딴 세상으로 떠난 김칫국물들을 그리워하는 명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