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동지>(2회)
청년은 ‘동지’란 이름 외에 두 개의 별칭을 더 가졌다. 하나는 ‘아름다운 남자’이고, 다른 하나는 ‘Go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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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2008년 5월 08일(금) 오후 1시경 서울행 고속버스 하나가 음성 톨게이트를 통과하여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좌석의 반가량이 빈 버스에는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오른쪽 뒤에서 두 번째 의자에 혼자 앉아있다. 좌석 번호와 상관없이 외진 자리를 찾아 앉은 모습이다. 청년은 창밖 풍경에 시선을 던져두고 있다. 여느 때라면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호흡을 다스리며 명상에 들었을 테지만 오늘은 끊임없이 부유하는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하다. 생각을 일으키는 원인 인자는 '04:54'란 숫자였다. 며칠 전부터 이 돋움체의 암녹색 숫자와 기호의 조합이 머릿속 어느 부위에 들어와 박힌 뒤로 사라지지 않고 요지부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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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지워내기 위해 눈을 부릅뜨기도 하고 머리를 강하게 흔들어도 봤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물에 뜬 기름방울처럼 들러붙은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했다.
(그날 새벽, 충북 음성 조락헌) 며칠 전, 동지는 새벽에 눈을 뜨며 오랜 습관대로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쳐다봤다. ‘04:54’분으로 정각 다섯 시에서 6분이 모자랐다. 아침 5시 정각에 눈을 뜨는 것은 그의 체화된 수면 습관이었다. 어쩌다 오차가 생기더라도 30초 이쪽저쪽이었지 분 단위를 넘기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그런데 지난 주말에 서울을 다녀온 뒤로 닷새 사이에 무려 세 번이나 오륙 분씩 어긋났다. 그는 아침 5시에 눈을 뜨면 두 시간 동안 천단호흡과 ‘무극권’을 수련한다. 수련을 처음 시작한 시기는 먼 유년으로 거슬러 가야 하지만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지금의 수면 패턴이 체화된 시기 역시 특정하기가 어렵지만, 수련의 깊이가 쌓여가는 동안 어느 때부터 그렇게 굳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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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 동지는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익숙한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고 개찰구를 통과하여 6번출구 표지를 따라간다. 유리문에 ‘50% 세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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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써 붙인 여성복 가게를 지나면 바로 넓고 아름다운 벽과 마주한다. 벽 왼쪽 모서리에 6번 출구로 나가는 긴 계단이 있다. 동지는 계단을 오르기 전에 그 벽 앞에 멈춰 선다. 그 벽에는 쥐색 벽면에 직사각형의 커다란 액자 모양을 구획 짓고, 그 안에 특별한 타일을 붙여 작품 한 점을 완성해 놓았다. 타일은 가로세로 35센티의 정사각형으로, 가로 스물여덟 개, 세로 여섯 개를 붙여 모두 일백예순여덟 개에 이른다. 개개의 타일에는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넣어 하나하나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조화를 이룬 하나의 큰 그림은 개별 타일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매우 색다른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동지는 이곳을 지나다니며 이 아름다운 그림 앞에서 자주 발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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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번 출구를 나와 대략 일백 미터쯤 앞에 인사동길의 북쪽 입구인 ‘북인사마당’이 보인다. 북인사마당에서 왼쪽으로 꺾어 인사동길에 들어서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이색적인 도회지의 골목 풍경을 만나게 된다. 골목길의 양쪽은 작은 건물들이 어깨를 붙여 늘어섰고, 건물 벽에 촘촘하게 붙은 간판은 온통 화랑, 갤러리, 공예관, 서예방, 골동품점, 전통찻집들 일색이다. 웬만해서는 보기 드문 수제 도장집이나 전통 공방이나 작명 철학관, 사주 타로방도 눈에 띄고, 한국문화예술문인회 사무실과 예술교육원 등의 간판도 걸려있다. 좁은 골목길의 하늘은 작품전시회나 예인들의 행사를 홍보하는 현수막들로 가려져 반은 보이지 않는다. 마천석으로 포석을 깐 골목길의 가장자리마저도 액세서리나 싸구려 옷가지나 군것질거리들을 파는 노점상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리고 골목 구석구석에서 전통차 향기가 풍겨 나온다. 동지가 이 길을 매주 금요일 오후에 들어와 일요일 오후에 되돌아 나온 지는 넉 달쯤 되었다. 그가 인사동길을 들어서면 길가의 노점 상인 중 몇몇은 ‘오, 저 청년이 들어오는군.’ 하는 눈으로 그를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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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가 봐도 입는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다. 주야장천 회색이나 미색의 헐렁한 면바지에 상의는 단추 달린 검정 셔츠를 입었고, 오래돼 보이는 백팩을 어깨에 걸치고 다닌다. 걸을 때는 고개를 조금 숙여 대략 서른 보 앞쯤에 시선을 두는데, 걸음을 옮기는 움직임이 워낙 간결해서 눈이나 진흙 위를 걸어도 발자국을 깊이 남기지 않을 것 같다. 마치 그의 발아래에서 정체 모를 부상력이 작용하여 몸무게의 반쯤을 떠받쳐주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동지는 우정국로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배기를 향해 걸으며 사흘 동안 이곳에서 할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그가 이곳에서 당면할 일들은 일의 성격이 매우 단순하기도 하였지만 이미 수개월 동안 반복한 일이어서 이것저것 따져서 순서를 정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이번에는 고교 동창생 한 사람을 만나는 특별한 약속이 잡혀있다. 그 일만은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생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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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암님은 기성작가 소설가보다도
더 소설가 같으세요.
동지 묘사가 섬세해 모습이 그려집니다.
동지에게 관심을 갖고
다음편을 기다리겠습니다
아직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파악하기 어려운데 면밀하게 주의깊게 차근차근 매회 연재를 두번 세번 읽어보렵니다.
04:54
무엇인가 미스테리한 이야기가 펼쳐질 것만 같네요. 다음 편을 기대합니다~
서막이 아직도 어둠에 가려져 있군요. 소풍 가서 보물 찾기 하듯....아! 목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