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잠 / 임보
우리 내외의 잠버릇은 서로 다르다
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데
아내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나는 팔다리를 펴고 반듯하게 누워 자는데
아내는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옆으로 잔다
내 코고는 소리는 요란하다는데
아내의 코는 피리를 연주하는 수준이다
나는 포근한 요를 좋아하고
아내는 따끈한 방바닥을 즐긴다
새벽쯤 깨어보면
나는 요 위에 누워 있는데
아내는 요 밑에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요는 S자로 구부러져
나와 아내를 갈라놓은 울타리가 된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니라
별상이몽(別床異夢)인 셈이다
그래도 반 백 년 동안 여태
한 방에서 버티고들 있다
아내의 고백 / 임보
어느 날 저녁 식탁에 앉아
막걸리 한잔씩 기울이던 중에
아내가 고백하는 말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얼굴 크게 내민
잘 나간 여성들을 보게 되면
‘저 여성들은 밥을 짓지 않겠구나!’
하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 했다
(내가 한평생 저 여인을
밥 짓는 하녀로 부렸구나!)
요즘 부인들이 퇴직한 남정네들 일컫기를
1식이, 2식이, 3식이 한다는데
나는 하루 세 끼 거르지 않은 충실한 3식이
젊은 남편들은 음식도 잘 만들고
설거지도 다반사로 한다는데
부엌을 모르고 지내는 내가 얼마나 야속했을까?
그렇게 미안한 생각이 들면서도
문득, 한 작은 여인이 떠올랐다
이 좋은 세상 구경도 못 하고 일찍 떠나간―
달빛에 겉보리를 찧어 껍질을 벗겨내고
새벽에 우물에 나가 물동이에 물을 길어다
푸나무에 불을 붙여 무쇠 솥에 밥 짓던 여인
공부 핑계 천리 타국으로 떠나간 남편 대신
한평생 재봉틀 돌려서 시부모 공양했던
효부로 소문난 문화 류(柳) 씨 내 어머니!
그분이 만일 천상에서 내려다보신다면
며느리의 고백을 듣고
무슨 말씀을 하실지……
아내의 해탈 / 임보
아내가 소녀 시절엔 얼마나 결벽했던지
남의 집에 가서도 자신의 숟가락이 아니면
통 밥을 먹지 않았다고 하니
여타는 말을 안 해도 짐작이 간다
성미가 까다로워 아무나 사귀지 않았고
구미가 까다로워 아무거나 먹지 못했다
그래서 처녀 시절 아내의 별명은
'쌩콩'이었다고 한다
아내가 젊었던 시절
우리 집 걸레는 늘 백옥처럼 희었다
사흘이 멀다고 삶아 대니
제가 어찌 검을 새가 있었겠는가?
그러던 아내에게 언제부턴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머리털이 세고
치아가 부실해지던 무렵부터였으리라
화장실 문을 개방한 채
일을 보시는가 하면*
식탁, 안방 가리지 않고
틀니를 함부로 빼 놓으신다**
이젠,
성스러움도
수줍음도 다 털어 버린
해탈 여장부가 되셨다
그런데 한 가지 곤혹스런 일은
가끔
주어主語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물론 당신께서야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 딸애가 지나다 기겁을 하고 문을 닿으면 갑갑한데
왜 닿느냐고 야단이다.
* 네 살짜리 손주 애가 이를 보고 마귀 이빨이라고 놀려 댄다.
* '아무개가 어떠어떠하다.'고 얘기할 때, '아무개'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고 '어떠하다'고만 말하는 생략 어법.
- 임보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 2012
아내의 계명 / 임보
늘 하는 훈계지만
전기밥솥에서
밥을 뜰 때는
숟가락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도 혼자
매실주 한잔 마시다가
(아내는 부재중)
밥솥에서 몇 숟갈 밥을 뜬다
밥주걱 찾기가 귀찮아
아내의 계명을 어기고
그냥 숟가락으로 밥을 푼다
아차,
숟가락 끝이 밥통 바닥을 닿는다
(도금에 상처 나면 큰일이다)
그렇지만
혹 아내가 발견해도
나는 주걱으로 폈다고
발뼘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내 속이
이리 언짢은 걸 보면
계명은 역시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인가 보다
- 임보 시집 <아내의 전성시대> 2012
완전한 부부 / 임보
남편은 장님이고
아내는 앉은뱅이
그들은 따로 따로 살 수 없지만
부부가 되어 잘 살아간다
남편은 아내의 발이고
아내는 남편의 눈이다
남편의 등에 업힌 아내가 앞을 보고
아내를 업은 남편이 길을 간다
아내를 밭에 갖다놓으면 김을 매고
아내를 시장에 데려가면 장을 본다
두 불구가 만나 하나로 완성된
동심일체 완전 부부
온전한 사람들은
다 결손 부부들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 / 임보
똑똑한 여편네 모시고 하는 남정네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교수 마님
판사 마님
사장 마님 모시고 사는 사내들 생각해 보라
말 잘하고 돈 잘 버는 그 어부인 등쌀에 눌려
어이 기죽어 살리
똑똑한 남정네 받들고 사는 부인들은
얼마나 고될까
검사 나리
재벌 나리
정승 나리 모시고 사는 여인들 생각해 보라
머리 좋고 뚝심 좋은 그 대감들 등쌀에 눌려
어이 허리 펴고 살리
세상의 뭇 남편네들이여
그대 아내가 미련타고 탓하지 말라
그녀가 똑똑치 않은 것이 그대의 큰 복이려니
세상의 뭇 여편네들이여
그대 남편이 똑똑치 못하다고 탓하지 말라
그대의 천생연분 안성맞춤이 이 아닌가?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왜 법대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던가 몰라요
고시공부 하는 놈들이 공부는 않고 쫓아다니기만 했으니
아내의 회고담이 또 시작된다,
한두 놈이 아니었다고 은근히 으스대는 투다
'법대생'이라는 말도 내 비위에 거슬린다
지금쯤 잘된 놈은 변호사가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지 않겠는가
(하기사 못 된 놈은 복덕방에서 어정거리고 있겠지만)
키는 180도 넘은 멀대같은 놈들이 늘 따라다녔단 말이요
키가 180이라는 말에 또 야코가 죽는다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아무 대꾸도 않고 숟가락질만 해댄다
수십 번을 들은 얘기이므로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미련이 있는지
오늘도 점심을 먹다말고 어떤 친구 얘기 끝에
그녀는 자신의 황금시절을 회고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대문 밖에까지 따라와서 어정거리니 어쩌겄오?
다음엔 삼촌이 나와서 쫓아보냈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그 다음엔 장인이 법대학장에게 전화를 해서
그놈을 혼내 주었다는 스토리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클라이맥스는 맨 끝에 있다
아니, 그 멀대같은 놈이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충장로를 헤매고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었다쟎아요
말하자면 그 법대생이 상사병이 들어 실성했다는 얘기다
자신은 한 사내를 미치게 할 만큼 매력덩이였다는 메시지다
그 얘기를 한평생 반복해서 중얼거린 까닭은 무엇인가?
고희에 올라선 저 노파 맺힌 한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만약 세월을 다시 거슬러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마도 아내는 180의 법대를 선택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물이나 좀 가져 와!
아내의 얘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수저를 놓는다.
**************************************************
쇠냇골 통신 334 - 아내의 전성시대* / 최병무
미래학자는 新여족장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예고를 하고, 시인은 이모를 경배하라*는
다짐의 시를 썼다
영화인들은 70년대를 지날 때 (난 본 적이
없지만) 벌써 여성상위 시대를 개봉했다
한국은행도 조폐공사도 줄을 섰다
500년 후 사임당께서는 세종대왕보다
서열이 높으시다 시류를 통찰하시고
존경하는 시인께서도 아내의 전성시대*를
펴내시었다
女便들도 시대를 잘 타고 나야 한다
산업혁명이 遠因이지만
뭐니뭐니 해도 남편들의 몰락은
그 누런 월급봉투가 사라진 후의 일이다
쓸쓸하지는 않지만 우리집도
그런 경향이 있다
(2013. 2. 5)
* 이모를 경배하라 ; 이영혜 시인의 시
아내의 전성시대 ; 임보 시인 시집
첫댓글 한참 웃었어요 선생님 제 이야기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