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발표 논문
바람직한 통일의 길을 묻는다
김 윤 호 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행정학박사
1. 여는 말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우리 국민 누구나 여러 번 불러본 노래요, 경우에 따라서는 목이 메이고 눈물 글썽이며 불러본 경험도 갖고 있다. 통일을 반대하는 우리나라 국민도 없고, 2004년 평양을 다녀온 내 경험으로는 북한 인민들도 통일을 열렬히 바라고 있었다. 통일은. 특히 평화통일은 우리 겨레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 눈물 젖은 비원(悲願)이기에, 통일을 논하는 글 머리에 올려서 함께 잠시나마 상기해 보고자 했다.
1945년 해방은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분단의 철조망이 쳐지기 시작했다. 3‧1독립운동, 국내외 독립운동 등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 침략자들에게 피어린 저항과 투쟁을 하면서 세계 만방에 알리었건만, 분단은 일본군 무장해제라는 미국과 소련 강대국의 편의상 그어진 임시적인 선(line)이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 사이에서 수없는 침략과 침탈, 지배와 식민의 쓰라린 약소민족의 5천년 역사, 두 동강난 조국 산하를 보듬고 우리는 몸부림치며 신음하고 오열해야만 한다.
이상은 아름다우나 현실은 너무나 냉엄하다. 특히 국가 간의 문제나 분쟁은 자기 나라 국가 이익에 따라서 비정하기 그지없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 전쟁도 기꺼이 불사한다.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다시 하나가 되는 통일은 가능한 일인가. 현 시점에서 가장 바람직한 통일의 방법, 통일의 길, 통일에의 접근방법(approach)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너무나 큰 거대담론이고, 어렵고도 복합적인 문제임에 틀림없다. 통일을 둘러싼 국제적 및 국내적인 환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고, 통일정책결정에 미치는 변수들과 바람직한 통일운동의 길을 요약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통일환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
1) 국제적 환경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시작된 미‧소 냉전체제(cold war system)는 이데올로기의 경직성과 생산성의 취약 등의 원인으로 공산주의는 무너지고, 탈냉전(脫冷戰)과 탈이념(脫理念), 자원경쟁과 경제우선의 세계질서로 재편되었다. 자유와 창의, 정의와 다양성을 국가이념으로 하는 미국의 가치와 힘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일극체제(一極體制)는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중국, 러시아, 일본, 유럽연합(EU) 등의 다극체제(多極體制0로 이동하고 잇다.
동북아의 한반도는 미국‧일본과 중국‧러시아가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예민한 지역이다. 이들 주변 4대 강국의 이해와 동의없이 우리 한번도의 통일이 성취되기 어려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서 한국과 북한을 포함하는 6자회담이 생겨났고, 북핵 문제와 경제지원 문제 등을 다루는 거시적인 논의와 협상의 장(場)으로 그 유용성이 인정받고 있으나, 그 효용성과 생산성은 상징성에 그치고 있다. 한반도 문제를 당사자 중심(Koreanization of Korean penisula issue)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통일 문제의 민족자결주의가 여러 원인으로 아직도 현실화되어서 실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2) 국내적 환경
1980년대 말 국제적 냉전 종식을 호기로 포착한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도 냉전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4년간의 대화와 협상 끝에 1991년 마침내 탈냉전의 새로운 남북관계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세부 방책을 담은 3개의 부속합의서도 마련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북기본합의서’는 화해(reconciliation)와 협력(cooperation)의 남북관계 발전 방향을 제시한 기본 장전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과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의 6・15남북공동선언과 2007년 10・4선언으로 이어지는 우여곡절과 불연속적인 남북관계는 거시적인 안목에서 발전되어 왔고 볼 수 있다. 1998년 2월 25일부터 2003년 2월 24일까지 5년 간 재임했던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국민의 정부의 통일정책은 대북 화해협력정책,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이라고도 불리우며, 남북 대결구도 속에서 한 쪽이 이익을 보면 다른 쪽이 손해를 보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하는 고립 ‧ 봉쇄정책을 했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역대 정부와는 차별성이 있다. 햇볕정책은 북한을 승공 ‧ 멸공 ‧ 반공이나 흡수통일의 상대가 아니고, 불신과 적대와 갈등의 남북관계를 평화와 교류협력을 통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플러스섬(plus-sum) 게임으로 쉬운 것부터 하나씩 개선해 나가자는 점진주의적인 통일 접근방법을 선택했다. 2003년 2월 25일부터 2008년 2월 24일가지 집권했던 16대 노무현 대통령이 이끄는 참여정부의 통일정책인 평화번영정책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2008년 2월 25일 집권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비핵개방 3000구상’으로 대변되는 고립압박정책이다. 고립압박정책은 북한 붕괴론을 기본으로 깔고 제재를 가하면서 기다리기작전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치부하면서 대북 인도적인 지원활동을 ‘퍼주기’라고 몰아세웠던 보수진영의 주장을 수용한 이명박 정부는 대북 인도적인 지원까지 거의 끊어 버리고 2008년 7월의 박왕자 씨 피격사망, 2010년 3월의 천안함 침몰, 2010년 11월의 연평도 포격 등을 거치면서 더욱 갈등과 대립, 긴장고조 국면으로 상승되어 가기만 했다. 지금은 모든 지원과 대화마저 끊긴 불통(不通)의 대치상태, 전쟁 발발 직전과 같은 상호 협박과 무력시위를 남북이 번갈아가며 벌이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2. 통일정책의 결정 변수
1) 정치 지도자의 철학과 추진력
국가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중심제(Presidentialism)로서 대통령은 헌법상의 탄핵사유가 발생하지 않는 한, 재임기간 5년 동안, 국내 정치, 경제 분야 뿐만 아니라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 보다도 더 강력한 제왕적 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집권 여당을 통하여 국회까지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정책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어떠한 통일철학과 민족관, 전문 지식과 신념의 소유자이냐에 따라서 남북관계에 관한 통일정책은 많은 차이가 있다.
정책과정(policy process)은 일반적으로 정책의제설정(policv agenda setting)과정, 정책결정(policv formulation)과정, 정책집행(policv implementation)과정, 정책평가(policy evaluation)과정을 뜻한다. 단계별로 행정명령, 기자회견, 당정협조, 예산편성, 자문기구 활옹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통일정책의 입안과 형성, 집행과 평가에 관여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정책과정을 학자들은 여러 단계로 구분하여 다양한 분류 모형이 제시되고 있다.
2) 야당의 협력
권위주의적인 전 근대적인 일당독재국가나 군사독재 국가가 아닌 이상, 야당은 여당과 함께 국정 운영의 파트너요 정권교체하여 다음 정권을 창출해야 할 수권정당(受權政黨)이다. 야당의 존립근거와 법적 보호는 헌법상의 양당제도로서 보장하고 있다. 정당은 일반적인 단체나 결사체와는 달리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의하지 않고는 행정명령 등으로 해산당하지 않는다.
통일정책의 추진과정에서의 야당의 협조는 예산지원과 대북관련 법안 제정과 개정 등에 있어서의 협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통일역량 결집과 국민합의기반 조성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역할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야당의 동의를 얻어서 함께 통일정책을 추진했다면, 정권이 교체되어 야당이 집권하더라도 통일정책의 기본원칙과 방향은 유지 발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쌓아 올린 공든 탑을 집권한 야당이 하루 아침에 허물어 버린다면, 이유와 명분은 무어라고 갖다 붙이더라도 남북한 모두에게 손해이고 통일의 날은 더욱 멀어질 뿐이다.
3) 시민단체‧언론의 협조
현대사회는 시민단체 등 민간부문의 협조를 얻지 않고는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기 어려운 시대이다. 이른바 거버넌스(governance) 시대다. 21세기 탈냉전의 국제정세를 대변하는 키워드(Keyword) 중 하나는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라 할 수 있다.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특징으로하는 정보기술(IT)시대에서 지구촌(global village)이라 불릴 만큼 하나의 단일망이 형성되어 가면서 국민 간 상호 밀접하게 연동되어 세계적 차원의 공동 이슈로 진전되는 현상이 비일비재하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 냉전시대를 주도해 왔던 군사안보문제가 탈냉전 시대를 맞아 경제 ‧ 환경 ‧ 인권 ‧ 페미니즘 ‧ 마약 ‧ 질병 ‧ 기아 ‧ 인간 안보 ‧ 실업 ‧ 테러 문제 등 실로 다양한 차원의 세계적 의제로 전환되면서, 개별 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결하기에는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슈의 복잡성과 국제성을 띠게 되었다. 세계화의 추세에 직면하여 국가주권 침해의 속도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국가 이외의 다양한 행위자들의 영향력이 국가의 법적 ‧ 제도적 영역을 넘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정치권력이 확대되고, 정보화의 확장으로 인해 지식권력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전통적으로 국가에 집중되었던 권력이 여러 행위자들에게 분산되어 국가와 동등한 지위를 구가하는 행위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하위체계와 훨씬 더 많은 권력의 중심들이 존재하며, 이들 중 일부는 국가를 포함한 외적 세력들의 직접적 통제를 벗어난 곳에 자신들을 위치시키는 정도까지 발전되어 왔다. 사회의 복잡성(complexity)과 역동성(dynamics), 그리고 다양성(diversity)이 점증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정(steering)과 조율(coordination), 조절(regulation)을 통한 새로운 질서를 형성할 수 있는 통치 ‧ 관리기제에 대한 요구가 높이지고 있는 것이다.
정책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고,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를 형성하고 있는 주요한 변수로서 시민단체와 언론의 역할은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달성된 시대인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은 북한이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북한의 변화 촉진을 위하여 남북한 관계를 북한의 존재 인정과 함께 향후 중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라는데 초점을 두고 추진된 정책이다. 우선 햇볕 정책은 대북 봉쇄정책에서 벗어나 포용정책을 추구함으로써 남북한 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북한의 무장력이라는 외투를 벗김으로써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이러한 정책은 궁극적으로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 방향으로 북한의 체제 전환을 추구하는데 의의가 있으며 남북한 간 교류 협력을 증대시켜 상호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점진적으로 평화를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을 의미한다.
탈냉전(脫冷戰), 세계화, 정보화, 민주화 등으로 대변되는 21세기 국제정세 속에서 전통적 국가의 통치(government)가 협치(governance)의 개념으로 점차 변화되고 있다. 기존의 국가 주도에 의한 위계적 통치방식으로부터, 민간분야를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 간의 수평적 상호조정체계라 할 수 있는 거버넌스의 등장으로 인해, 국정운영 방식의 변화는 물론 국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 틀이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이는 국가의 권력이 존재하나 그 역할과 기능이 예전에 비해서 상대화된 반면, 시장이나 시민사회 섹터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권위주의 시대 국가의 독점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정책결정이 행위자 간 협의와 조정이라는 네트워크 방식으로 이행되고 있으며, 그 영역 또한 공공정책(public policy)은 물론 외교안보 분야에 이르기까지 국가정책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의 대북‧ 통일정책에 있어서도 정부 이외 정당, 시민사회단체, 기업, 언론, 국제사회 등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행위자 간 복합적이며 다층적인 이해관계가 역동적(dynamic)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대북 지원정책의 경우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제약 요인이 상존함으로 인해, 의제설정은 물론 정책집행에 이르기까지 비정부 부문의 참여를 비롯한 다양한 정책 행위자의 네트워크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활발했던 민간시민단체(NGO)에 의한 대북 인도적인 지원사업과 교류협력사업은 직접적으로는 기아(飢餓)와 질병으로부터 구호활동도 되지만, 간접적으로는 북한 주민 생활수준의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생활문화형 통일운동’의 성격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월드비젼 등이 그 대표적인 대북지원단체들이다.
3. 바람직한 통일운동의 길
1) 쉬운 것부터 시작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어렵고 경직된 정치 군사적인 문제 보다는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에게 인도적인 식량 지원부터 하면서 경제 지원과 사회문화적인 교류,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 등을 먼저 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 가자는 정책이었다. 쉬운 것부터 하자는 선이후난(先易後難)이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자는 정경분리(政經分離)정책이다. 인도적이고 동포애적인 식량 지원을 통해서 정치군사적인 활로를 찾자는 기능주의(functionalism)의 적용이다.
햇볕정책을 처음 접한 북한 당국자들은 햇볕정책을 남한으로 흡수해서 통일하자는 흡수정책으로 생각하고 강한 거부감을 갖고 의심을 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3단계 통일론 등을 정립해서 수십년 주장해 온 김대중 대통령의 통일의지와 대북 통일정책 사업을 계속하면서 진정성이 북한 당국자들에게 전달되고 신뢰가 쌓였다, 그 결과, 김대중 정부는 다른 어느 정부보다도 많은 대북정책의 성과를 올린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체육 ‧ 군사 등의 각 분야에서 교류협력 사업들이 빈번히 이루어지고, 수백만 명의 남북한 주민들이 왕래하게 되었다.
1950년 동족 끼리의 전쟁으로 상처와 불신, 적대감과 이질감이 팽배해 있고 마음들이 얼어붙은 상태에서 서로 신뢰를 쌓고 교류하려면, 경제와 문화, 체육 등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정치와 군사 등의 어려운 문제로 다가가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지원과 협력교류도 서로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실행해야 한다.
2) 정경분리(政經分離)
연방제 통일론이다, 약한 정도의 국가연합이다, 비핵 프로그램이다 하면, 통일 전문가들은 알기 쉬우나 일반 국민들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다. 정치체제와 군사적인 문제는 협상도 어렵지만 그 해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래서 정치군사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를 분리해서 통일에 접근해야 한다는 정경분리정책은 서독의 통독과정을 보지 않더라도 우리도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실행해서 정경분리정책의 타당성과 성과를 확인했다.
물론 북한을 정경분리해서 지원했으나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안했다는 ‘북한 불변론(不變論)’을 주장하면서 정경분리정책을 반대하는 보수계층의 목소리도 상당히 컸다. 국민의 정부 시절, 통일부장관을 했던 어느 장관은 그 당시 어느 모임에 와서 강연하시를, “하루에도 온탕과 냉탕을 여러 번 오간다. 진보적인 사람들의 모임에 가면 ”북한 동포들은 굶어 죽어가는 데, 인도적이고 동포애적인 지원에 왜 그렇게 인색하느냐?“고 추궁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의 모임에 가면, ‘북한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 데, 왜 끌려 다니면서 일방적으로 퍼주기만 하느냐?’고 힐난한다.”는 것이다. 양쪽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러나 나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북한은 많이 변했고, 정치와 체제, 이대올로기를 떠나서 인도적이고 동포애적으로 북한 주민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총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도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치료해주는 인도적인 적십자정신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화해협력과 교류를 통한 점진적인 평화통일을 했을 경우가 북한 붕괴나 흡수통일을 했을 경우 보다도 통일비용이 훨씬 적게 소요된다는 연구와 조사결과가 나와 있기도 하다.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어려운 분야로 옮겨 간다는 기능주의적 통일 방법론은 민간부문의 교류부터 시작해서 정부 차원의 교류협력으로 나아간다는 선관후민(先官後民)의 정책과도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서독은 통일을 위해서 할슈타인원칙(Hallstein Doctrine)을 포기하면서 포용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동방정책을 추진했는 데, 동방정책은 정경분리정책이요, 일종의 햇볕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할슈타인원칙이란 1955년 9월 서독과 소련 간 정식국교 수립 이래의 서독 외교정책의 기본원칙이다. 서독만이 자유선거에 의한 정부를 가진 유일한 독일의 합법국가이므로 서독은 동독을 승인하는 나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대독 전승국인 소련만은 이 원칙에서 예외)하겠다는 것이다
3) 화해협력과 교류의 큰 길로 나서야
남북 간의 화해협력과 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이다. 그런데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서 남북관계사와 통일의 길에서 큰 이정표가 된 이 햇볕정책은 1991년 노태우 정부때 발표된 남북기본합의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
‘남북기본합의서’는 분단 역사상 최초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공식 합의서이다. 이는 서로 상대방을 공식으로 인정한다는 성격을 띠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남과 북은 상호 관계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화해하고 교류·협력하며 서로 침략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화해를 위해 상대방의 체제(북측은 사상과 제도로 표기) 인정과 존중, 내정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 행위 금지, 국제무대에서 협력, 그리고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평화상태로 전환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정전협정을 준수하기로 했다.
교류·협력을 위해서 경제·과학·기술·문화·예술·보건·체육·보도 등 여러 분야의 교류·협력 실현, 자유왕래와 접촉, 이산가족 상봉 및 재결합, 끊어진 철도와 도로의 연결 및 해로·항로의 개설, 우편·전기통신 교류 등을 실현해가기로 했다. 특히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 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 교류와 협력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불가침을 위해서는 무력 불사용 및 불침략, 분쟁문제는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불가침의 경계선은 정전협정 규정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하며, 불가침 보장을 위해 군사적 신뢰 조성조치와 군비 감축을 실현하기로 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성격과 의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남북기본합의서’는 통일을 과정(Process)으로 인식하는 토대 위에서 남북관계의 성격을 잠정적 특수관계로 규정한 문서이다.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 냉전적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남과 북이 국제사회에서는 비록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주권국가이지만,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다. 남북관계를 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민족 내부의 특수관계로 규정함으로써, 각각 상대방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분단국을 구성하고 있는 두 정치실체 간의 관계로 규정한 것이다. 이로써 남과 북은 각기 현행 헌법을 유지하면서 남북관계를 개선,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남북 간의 교역을 민족 내부의 교역으로 인정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1990 통일백서, 49쪽)
둘째, ‘남북기본합의서’는 통일에 이르는 과정의 첫 단계로서 ‘화해·협력 단계’를 설정하고, 화해·협력 단계에서의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규범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남과 북은 우선 분단현실을 수용하는 토대 위에서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상호 불신과 반목을 해소하고 신뢰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침략하지 말고 화해·협력을 지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우리 측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완전통일 이전에 중간단계로 평화공존의 ‘남북연합 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남북연합 단계에서는 남북연합을 규율하는 ‘남북연합헌장’(가칭)이 필요할 것이고, 통일단계에서는 ‘통일헌법’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연합 이전 화해협력단계에서의 남북관계를 규율하는 기본 규범이라는 한시적 성격을 띠고 있다.(1990 통일백서, 116쪽)
셋째, ‘남북기본합의서’는 민족문제에 대한 자주적 해결 노력의 산물로서 민족자존을 드높였다. 그간 한반도 문제는 강대국에 의해 좌우되어왔으나,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면서 처음으로 남북 당국이 외세의 주선이나 중개 등의 관여 없이 자주적으로 탈냉전의 남북관계를 모색하여 최초의 합의를 이루어낸 것이다. 남북이 힘을 합치면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넷째, ‘남북기본합의서’는 곧바로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지만, 8년 후 ‘6·15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겨지면서 다시 그 생명력을 발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년이 된 지금도 화해·협력단계를 넘어서지 못한 남과 북은 ‘남북기본합의서’가 제시한 남북관계 발전 방향에 따라 화해·협력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4) 국민합의기반의 확충
국민합의기반을 확충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당장의 통일정책 집행에서 효율성과 신뢰성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정권이 교체되어서 야당이 집권하더라도 통일정책은 꾸준히 일관성 있고 지속성 있게 추진되어야 할 중대한 국가정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통일정책에 대한 국민합의기반을 확충하는 방안은 무엇인가.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야당과의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고, 시민단체와 언론과의 소통과 협의가 중요하다.
물론 중대한 통일정책은 국민들에게 찬반을 직접 물을 수도 있는 국민투표도 있지만, 그것은 예외적이고 비상한 방법이고, 일반적인 통일정책은 야당의 동의를 얻어서 국회의 의결을 거칠 수 있으며, 예산 확보와 관련 법령을 제정 또는 개정할 수도 있다. 법령의 정비를 통하여 지속적인 통일정책의 필요성은 이명박 정부의 북한 붕괴론과 선 비핵조치에 바탕을 둔 고립봉쇄정책은 격렬한 대립과 군사적인 충돌만을 불러오고 있는 반증이 말해 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은 북한의 비핵(非核) 조치의 단계적인 착수와 경제지원이 동시적으로 진행되어도 상호 신뢰가 쌓인 상태가 아니면, 정책목표를 성취하기 어렵다. 그런데 핵무기가 체제유지와 절박한 생존의 수단이 되어 있는 북한에게 비핵 조치를 먼저하라는 전제조건으로 요구한다는 것은 성공하기가 불가능한 정책이다. 그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불신과 적대감으로 극단적으로 대결상태에 있는 상대방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요구와 같다.
4. 맺는 말
1) 통일정책의 일관성 유지
다른 정책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통일정책에 있어서는 국민합의기반을 확대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헤도 지나치지 않는다., 통일정책의 일관성과 신뢰성, 효율성을 확보하여 우리 민족의 비원인 평화통일의 그 날을 하루라도 앞당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서독은 1947년 건국 이후, 기독교민주당(기민당)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으로,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다시 기민당에서 사민당으로 정권을 주고 받으면서도 일관된 통일정책9동방정책)을 실천해 왔기에 평화통일도 성취하고, 문제는 있지만 번영을 누리고 있다.
정권이 바뀐었다고 통일정책이 동쪽으로 갔다가 서쪽으로 갔다가 해서는 안된다. 정권이 바뀐었다고 심지어 역주행(逆走行)해서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통일정책은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힘들게 쌓아 올린 평화와 통일의 공든 탑을 죄다 허물어버리고 뒤로 역주행시킨 반통일(反統一)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원칙을 지킨다고 하는데, 북한을 자극해서 싸우고 대결하자는 원칙인지 알 수가 없다.
2) 남북기본합의서와 6·15남북공동선언의 계승 발전
1980년대 말 국제적 냉전 종식을 호기로 포착한 남과 북은 한반도에서도 냉전을 끝내고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길을 모색했다. 4년간의 대화와 협상 끝에 1991년 마침내 탈냉전의 새로운 남북관계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고, 이를 이행하기 위한 세부 방책을 담은 3개의 부속합의서도 마련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남북기본합의서’는 화해(reconciliation)와 협력(cooperation)의 남북관계 발전 방향을 제시한 기본 장전으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훌륭한 합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실천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데는 8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6·15남북공동선언’을 채택함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가 실천에 옮겨지기 시작하고, 반세기 동안 지속된 불신과 대결을 넘어 화해·협력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가 탈냉전의 남북관계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면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을 통해 화해·협력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의의가 있다.
현재 남북관계가 일시 경색된 상황이지만, 이제 다시 ‘남북기본합의서’가 제시하고 있는 화해·협력을 촉진해 나가야 한다. 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한편 군비통제를 추진하여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 상황을 실현해가야 한다
3) 결코 가깝지 않은 통일시기
필자가 2011년 9월에 설문조사와 면담을 통한 조사에서 통일시기는 대단히 멀게 바라보는 비관적인 전망이 많았다. 설문조사를 실시한 2011년 10월은 현 정부 들어 남북관계는 정부차원 및 민간차원애서 대북 인도적인 지원마저 거의 끊겼고, 천안함 침몰(2010.3.26.)과 연평도 포격전(2010.11.23)으로 대결과 적대감이 팽배한 상황이라서 통일의 실현 시기는 더욱 멀리 생각하게 된 것으로 판단한다. 30년 이후가 40.1%, 21-30년이 29.3%, 10-20년이 25.3%, 6-10년이 5,3%로 나타났다.
비교적 객관적 ․ 중립적이고, 그러면서도 권위있는 통일 전문가들인 통일연구원 연구위원(박사급) 11명은 필자의 별도의 설문조사 결과, 통일 시기에 대하여 5년 이내는 한 명도 없고, 6-10년이 1명, 11-20년이 3명, 21-30년이 5명, 30년 이후가 2명이었다. 전문가 그룹에서는 통일은 20년 후(7명)에나 가능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특히 햇볕정책이 매우 성공했다고 평가하고 있는 응답자도 통일은 30년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독일 통일 당시 콜 수상은 통일 전에 통일시기를 묻는 질문에 ‘포용정책 속에서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확실한데, 구체적인 통일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18년간 외무장관 겸 부총리를 지내고 통독 초대 외무장관으로 유명한 한스 디트리히 겐셔(Hans Dietrich Genscher, 1927. 3. 21 ~ ) 장관은 통독 직전에 통일 시기에 대하여 ‘지금 통일열차가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통일열차는 목적지에 가다가 도중에 전복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한 걸음씩 걸어가면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통일정책과 통일시기 문제에서도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말이다.
4) 한국인들의 통일의식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의 2011년 통일의식조사를 보면, 통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작년에 비해 증가했고, 연령별 40대는 통일 및 북한에 가장 호의적인 반면, 20대는 부정적․회의적 인식 뚜렷하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후 통일의식에 안보 위기감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으며, 대북정책 현안에 대한 양면적 태도(협력과 제재) 뚜렷해 졌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만족도, 신뢰도는 모두 낮고, 차기 정부의 대북정책 중 ‘남북한 긴장해소와 교류협력’이 최우선 과제로 보았으며, 반면 ‘통일재원 준비’는 가장 후순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2007년부터 매년 실시해오고 있는 이 통일의식조사는 한국갤럽에 의뢰해 2011년 7월 26일~8월 15일(20일간) 동안 전국 16개시도 만 19세이상 성인 남녀 1,200명을 대상으로 1:1 면접조사를 통해 실시되었으며, 표본오차는 ±2.8%, 신뢰수준은 95%이다..
5) 한국의 통일정책에의 제안
한국의 통일정책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1) 국민적 합의기반 확대, 2) 당국 간 대화의 정례화 및 이행 감시 기구 ‧ 절차 마련, 3)유연한 상호주의와 시장 논리를 조화한 민간 경협, 4) 장기적 안목에서 상생과 협력의 민족 경제공동체 추진, 5) 대북 지원체제 개선과 분배 모니터링, 6) 북한 경제개발을 위한 지속가능한 사업 지원, 7) 민족 동질성 회복을 위한 지원 패러다임 개선, 8) 한‧미 공조 강화와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협력 강화, 9) 이산가족 문제 해결방안 지속 추진, 10) 청소년 및 국민 통일교육 질적 제고 등을 제안한다.
대화와 교류라는 점(點)으로 시작한 북한의 변화가 철도와 도로 연결이라는 선(線)으로 이어졌고, 개성공단 개발의 남북 경제공동체라는 면(面)으로 확대되고 변화되었다.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든, 우리 정부 대북정책은 불가피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북한의 변화를 어떻게 남북한 화해협력과 한반도 평화증진으로 이어 나가야 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을 계승한 햇볕정책이 가져온 6‧15남북공동선언은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남과 북이 함께 화해협력하고 상생 ‧ 공영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 목적이 있다. 화해협력과 평화교류를 하다보면, 어느날 예상 하지 못한 시간에 통일은 웃으며 찾아올 것이다.
* 이 논문은 2012. 5.3(목), 14:00-17:00,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통일기부서약 범국민 캠페인 발대식 및 기념포럼에서 발표한 주제논문입니다.
첫댓글 편안한 오후 되시길요^^
생활속불교에서 염불을 배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