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오피니언
[선데이 칼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으로 시험대 오른 자유주의 진영
중앙선데이
입력 2023.10.14 00:08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
미국 등 서방 진영 전열 흐트러지면
중·러·이란 권위주의 진영 득세 예상
더욱 쉽게, 자주 전쟁 일어날 수도
북한 권력자 오판 가능성도 커질 것
1948년 미국 국제정치학의 대가인 한스 모겐소는 국제정치를 권력 추구를 위한 국가들 간의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미·중 경쟁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나 엊그제 터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의 본질도 권력 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권력은 공백을 철저히 싫어한다. 국제무대에서 어떤 특정 대국의 힘이 약화돼 권력 공백이 생기면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다. 그게 국제정치의 역사였다.
선데이 칼럼
예를 들어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동구권에 힘의 공백이 생겨났다. 그러한 공백 상태를 재빨리 감지하고 활용해서 능란한 외교로 평화적인 통일을 이뤄낸 것이 서독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적인 경우보다 비극적 상황이 더 자주 벌어졌다. 냉전이 끝나자 동구권에 대한 과거 소련의 영향력과 지원도 사라졌다. 그러자 그동안 잠자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내부의 민족 분규가 분출됐다. 결국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에서 처참한 내전이 벌어지고 유고연방은 해체됐다.
이라크전쟁은 미국이 권력의 최정점에서 상대적 하강을 시작하게 만든 분기점이었다. 군사작전은 단기에 끝났지만 10여 년에 걸친 내전에 휘말린 미국의 국력과 대외적 위상은 추락했다.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는 위축되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군사전략과 외교력의 초점을 중동지역에서 아시아로 옮기겠다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발표했다. 그리고 때로는 개입이 꼭 필요한 시점에서도 행동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2012년 8월 알아사드 시리아 독재정권에 대해 반군들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면 응징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1년 후 시리아 정부가 실제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게 드러났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눈으로 볼 때 이는 미국의 약화로 힘의 공백이 생겨났음을 의미했다. 그 직후 러시아는 시리아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며 중동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2021년 혼란스럽게 전개된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세계 전역에 약화된 미국의 이미지를 투영했다. 6개월 후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공격한 것은 수많은 오판의 결과였지만, 그중 적지 않은 부분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였을 것이다.
미국 권력의 상대적 약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고립주의 외교를 펼치며 반중국, 반이민, 반세계화로 나갔다. 그리고 동맹 외교도 소홀히 했다. 그러나 바이든 대통령은 수십 개 국가들과의 동맹이 미국의 최대강점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그리고 이들과 연합하여 공동전선을 펼치면서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지도력과 영향력을 유지해 나가려 하고 있다. 쿼드, 오커스, 한·미·일 협력, 나토-인도-태평양 연계 등의 다양한 네트워크 강화를 서둘렀다. 그 결과 미국의 지도력도 점차 회복됐다.
그러한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뜻하지 않던 복병을 만났다. 엊그제 터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그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그동안 중동에서 약화돼 가던 미국의 영향력을 만회할 중요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주도하에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관계를 정상화해서 상승 중인 중국의 영향력을 제어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쟁 발발로 이 프로젝트가 난관에 봉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 트럼프 지지도가 바이든보다 9% 앞선다는 미국 언론보도가 나온 상황에서 이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엄청난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전쟁이 중동의 지역전쟁으로 확산되고 미국이 참전까지 하게 되면 바이든 대통령에게는 큰 악재가 될 것이다. 확전되는 경우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유권자의 지지 하락을 낳을 수 있다. 이미 공화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정부를 외교적으로 무능하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진보성향의 의원들은 강경 우익의 네타냐후 정부가 팔레스타인을 지나치게 혹독하게 다루고 있다면서 이스라엘에 비판적이다.
게다가 미국 공화당은 최근 바이든 행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시켰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에 동시 지원하겠다는 계획이지만, 전문가들은 미국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부족분을 유럽이 대신 채워 넣을 수 있는 역량과 준비가 안 돼 있다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배는 앞으로의 국제정치를 자유주의 진영이 주도할 것인가 아니면 권위주의 진영이 주도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다. 만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으로 서방 진영의 전열이 흐트러지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국제무대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세력은 약화되고, 중국, 러시아, 이란 중심의 권위주의 진영이 득세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힘이 정의가 되는 세상, 더욱 쉽게 그리고 자주 전쟁이 터지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난세 속에서 최근 권위주의 진영의 한 축으로 등장한 북한 권력자의 오판 가능성도 커질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과 모든 국민이 예리한 촉각을 곤두세우고 국제 정세를 직시하며 만반의 대비를 해야 할 때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