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추구님의 견해가 궁금하여
선지식 몇 분의 말씀을 간추려 보았습니다.
꼼꼼하고 친절하게 답을 주시면 유익하게 삼겠습니다.
차차 계속 질문 드리고자 하오니, 청을 거절치 말아 주십시오.
거성합장. ()
만공스님 法訓》- (1) 나를 찾아야 할 필요와 나
1.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다는 뜻은 나를 찾아 얻는 데 있나니라.
2. 나라는 의의가 절대자유(絶對自由)로운 데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도 자유가 없고, 무엇 하나 임의(任意)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妄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 나가는 까닭이니라.
3. 망아는 진아의 소생(所生)인데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마음은 곧 사심(邪心)이요, 진아는 정심(正心)으로 시종(始終)도 없고, 존망(存亡)도 없고, 형상(形象)도 없지마는 오히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니라.
4. 사람이 나를 잊어버린 바에야 육축1)으로 동류(同類)되는 인간이라 아니 할 수 없나니, 짐승이 본능적으로 식색(食色)2)에만 팔려서 허둥거리는 것이나, 제 진면목(眞面目)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현실에만 끌려서 헤매는 것이나, 무엇이 다를 것인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하다는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면목(自己面目)을 모른다면 사생육취(四生六趣)3)에 윤회(輪廻)하는 한 분자(分子)에 지나지 아니하니라.
5. 동업중생(同業衆生)이 사는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는 너와 내가 다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사람 사는 것이 그저 그렇거니 하고 무심히 살며, 자기들 앞에 가로 놓인 무서운 일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럭저럭 살다가 죽음이 닥치면 전로(前路)가 망망하게 되나니라. 6. 나라고 하는 것은 “아무개야!”하고 부르면 “네!”하고 대답하는 바로 그것인데 그것은 生死(생사)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하는 것이 아니어서 일체 얽매임을 떠난 독립적인 나이다. 7. 인생은 말꼬리에 매달려 울며 딩굴려 가는 죄수처럼 업(嶪)의 사슬에 끌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의 길을 영겁(永劫)으로 순력(巡歷)하고 있는데, 그 쇠사슬은 자기의 지혜 칼이라야 능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되나니라. 8.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 받는 아무러한 사람이라도 이 일4)을 알지 못하면 기실 사람의 정신은 잃어버린 인간이니라. 9. 석가세존(釋迦世尊)이 탄생시에 산석(産席)에서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신 그 ‘아(我)’도 나를 가리킨 것이니라. 10.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은 지니었건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나니라. 11. 일체가 다 나이기 때문에 극히 작은 하나의 털끝만한 정력이라도 이 나를 찾는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소모하는 것은 나의 손실이니라. 12. 누구든지 육신(肉身)․업신(業身)․법신(法身) 세 몸을 지녔는데, 세 몸이 일체가 되어 하나로 쓰는 때라야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니라. 13. 일체 행동은 법신이 하는 것이나, 육신과 업신을 떠난 법신이 아닌 까닭에 현상 그대로가 곧 생사없는 자리이니라. 14. 생사 없는 그 자리는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이 다 지녔기 때문에 한 가닥 풀의 정(精)이라도 전우주의 무장(武裝)으로도 해체시킬 수 없나니라. 15. 세상에는 나를 알아보느니 찾아보느니 하는 말과 문구(文句)는 있으나, 업식(業識)으로 아는 나를 생각할 뿐이요, 정말 나는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나니라. 16. 나는 무한극수적(無限極數的) 수명을 가진 것으로,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금강불괴신(金剛不壞身)5)이라 이 육체의 생사는 나의 옷을 바꾸어 입는 것일 뿐, 인간이라면 자신이 소유한 생사의 옷쯤은 자유자재(自由自在)로 벗고 입을 줄 알아야 되나니라. 17. 보고 들어서 얻는 지식(知識)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라.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니니라. 18. 나는 무념처(無念處)6)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무념처에 일체유(一切有)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19.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구경(究竟)7)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나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나니라. 1. 세상에는 나를 찾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도 없고, 장소도 없고, 다만 불교 안에 있는 선방(禪房)에서만 나를 찾는 유일한 정로(正路)를 가르쳐 주나니라. 2. 수도(修道)한다는 것은 각자가 자기 정신을 수습해 가는 그 공부를 한다는 말인데, 누구에게나 다 시급한 일이 아닐 수 없나니라. 3. 세상의 학문은 당시 그 몸의 망상에서 일시의 이용으로 끝나고 말지만, 참선학(參禪學)은 세세 생생(世世生生)에 어느 때, 어느 곳, 어느 몸으로, 어느 생활을 하던지 구애됨이 없이 활용되는 학문이니라. 4. 선방만 선방이 아니라 참선하는 사람은 각각 자기 육체가 곧 선방이라, 선방에 상주(常住)하는 것이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간단(間斷)없이 정진할 수 있나니라. 5. 참선은 절대로 혼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니,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을 여의지 말아야 하나니, 선지식은 인생 문제를 비롯하여 일체 문제에 걸림이 없이 바르게 가르쳐 주나니라. 6. 선지식을 만나 법문 한 마디 얻어 듣기란 천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니, 법문 한 마디를 옳게 알아 듣는다면 참선할 것 없이 곧 나를 깨달을 수 있나니라. 7. 법문 들을 때는 엷은 얼음 밟듯 정신을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니라. 8. 선지식은 선생이니 박사니 하는 막연한 이름뿐이 아니라, 일체 이치에 요달(了達)된 사람으로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상속(相續) 받은 분이니라. 9. 이(理)와 사(事)는 같은 원(圓)이라, 어느 각도에서 출발하든지 쉬지 않고 걸어가면 그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기는 하지만,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선지식의 가르침이 없이는 될 수 없나니라. 10.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도 흘려 버리고 하여, 신행(信行)이 없으면 법문을 다시 듣지 못하는 과보(果報)를 얻나니라. 11. 선지식을 믿는 그 정도에 따라 자신의 공부가 성취되나니라. 12. 장맛이 짠 줄을 아는 사람은 다 공부할 수 있나니라. 13. 공부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전생(前生)에 놀고 지낸 탓이니, 그 빚을 어서 갚아야 수입이 있게 되나니라. 14. 남음 없는 신심(信心)만 있으면 도의 기반은 이미 튼튼해진 것이니라. 15. 신심(信心), 분심(憤心), 의심(疑心) 세 마음을 합하여야 공부를 성취할 수 있나니라. 16. 신심만 철저하면 나의 정기(正氣)에 대상을 곧 정당화시켜서 자율적 성취가 있게 되나니라. 17. 법문을 듣고도 신심이 동(動)하지 않는 인간이라면 내세(來世)에는 다시 인간의 몸을 받기가 어려우니라. 18. 공부하는 사람이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먼저 나를 가르쳐 줄 선지식을 택하여야 하고, 나를 완성한 후에 남을 지도할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19. 명안 종사(明眼宗師)의 인가(印可)도 없이 자칭 선지식으로 남을 가르치는 죄가 가장 크니라. 20. 이 법은 언어가 끊어지고 심행처(心行處)가 멸한 곳에서 발견되는 도리라, 다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답(應答)하여 상속하는 법으로, 선지식의 직접 가르침이 아니면 배울 수 없는 도리니라. 21. 공부는 발심(發心) 본위라 별로 제한 받을 것은 없으나, 학령(學齡)으로는 20세로부터 30세까지가 적령(適齡)이니라. 22. 참선법은 평범한 연구나 공부가 아니요, 대(對)가 끊어진 참구법(參究法) 곧 터럭 끝 하나 얼씬거리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나니라. 23. 백년의 연구가 일분간의 무념처(無念處)에서 얻은 한낱 이것만 같지 못하다. 24. 일체 중생은 날 때부터 이성(異性)의 감응(感應)으로 말미암아 세세 생생에 익히는 것이 음양법(陰陽法)이니, 정신 모으는 데는 이성적(異性的) 장애가 제일 힘이 센 것이니, 공부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장 멀리 해야 하나니라. 25. 일체 생각을 쉬고 일념(一念)에 들되, 일념이라는 생각조차 잊어 버린 무념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나니라. 26. 소아적(小我的) 나는 소멸되여야 하기 때문에 공부의 성취를 하기 전에는 썩은 그루터기같이 되어 추호도 돌아보지 않을 만큼 나의 존재를 없애야 하나니라. 27. 나를 완성시키는 데는 3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도량(道場), 도사(道師), 도반(道伴)이니라. 28. 도를 지키는 사람은 도절(道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니, 도는 하나이다.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도절을 지키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시간적으로 손실을 보게 되느니라. 29. 짚신 한 켤레를 삼는 데도 선생이 있고, 이름 있는 버섯 한 송이도 나는 땅이 있는데, 일체 만물을 총섭(總攝)하는 도를 알려는 사람이 도인의 가르침 없이 어찌 도인이 될 수 있으며, 천하 정기(天下正氣)를 다 모아 차지한 도인이 나는 땅이 어찌 특별히 있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도반(道伴)의 감화력은 선생의 가르침보다도 강한 것이니라. 30. 참선을 하여 인생 문제만 해결되면 억생(億生) 억겁(億劫)에 지은 갖은 악, 갖은 죄가 다 소멸되나니, 그 때는 4생 6취에 헤매는 고생을 다시는 받지 않게 되나니라. 31. 수도(修道) 중에는 사람 노릇할 것은 아주 단념해 버리고 귀먹고 눈먼 병신이 되어, 일체 다른 일에 간섭이 없게 되면 대아(大我)는 저절로 이루어지나니라. 32. 참선법은 상래(上來)로 있는 것이지만, 중간에 선지식들이 화두(話頭)드는 법으로 참선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그 후로 무수 도인(無數道人)이 출현하였나니, 화두는 1천 7백 공안(公案)이나 있는데, 내가 처음 들던 화두는 곧 '만법(萬法)이 귀일(歸一)이라 하니 一은 어디로 돌아갔는고?'를 의심하였는데,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이라 처음 배우는 사람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화두를 들게 하는 것이 가장 좋으리라. 하나는 무엇인고? 의심하여 가되 의심한다는 생각까지 끊어진 적적(寂寂) 하고 성성(惺惺)한 무념처에 들어가야 나를 볼 수 있게 되나니라. 33. 하나라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요, 이 정신 영혼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니, 하나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고? 의심을 지어 가되 고양이가 쥐를 노릴 때에 일념에 들 듯, 물이 흘러갈 때에 간단(間斷)이 없듯, 의심을 간절히 하여 가면 반드시 하나를 알게 되나니라. 34. 참선한다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다른 데 미련이 남아 있거나, 인간으로서의 자랑거리인 학문이나, 기이한 재주 등 무엇이라도 남은 미련이 있다면 참선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것이니, 아주 白紙로 돌아가야 하나니라. 35. 크게 나의 구속(拘束)에 단련을 치른다면 그 대가로 큰 나의 자유를 얻게 되나니라. 36. 예전에는 선지식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頓忘) 생사(生死)하는 이도 있고, 늦어야 3일, 7일에 견성(見性)한 이도 많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근기(根機)도 박약하지만 참선을 부업(副業)으로 해 가기 때문에 20년, 30년 공부한 사람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를 모르는 이가 거의 전부니라. 37. 밥을 자기가 먹어야 배부른 것과 같이, 참선도 제가 하지 않으면 부처님도 선지식도 제도해 주지 못하나니라. 38. 참선하려면 먼저 6국(六國) 전란(戰亂)을 평정(平定)시켜 마음이 안정되어야 비로소 공부할 준비가 된 것이니라. 39. 가장 자유롭고 제일 간편한 공부이기 때문에 이 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염라국(閻羅國) 차사(差使)의 눈도 피할 수 있나니라. 40.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일체가 생기고, 한 생각이 멸할 때 일체가 멸하나니라. 내 한 생각의 기멸(起滅)이 곧 우주의 건괴(建壞)요 인생의 생사니라. 41.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그르쳤다 함은 물질 이전의 마음을 지적한 것이니라. 42. 공부가 잘 된다고 느낄 때 공부와는 벌써 어긋난 것이니라. 43. 꿈 속에서 공부해 가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선생으로 삼을 것이니라. 44. 꿈도 없고 생시(生時)도 없이 잠이 푹 들었을 때에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어디에 두는지 알아야 하나니라. 45. 꿈이라 하는 것은 업신(業身)의 동작인데, 깨어 있을 때는 생각만으로 헤매다가 잘 때 업신이 제 몸을 나투어 가지고 육신이 하던 행동을 짓는 것이니라. 46. 꿈과 생시가 일여(一如)하게 공부를 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하나니라. 47. 산 몸이 불에 탈 때에도 정상적 정신을 가질 수 있겠나? 헤아려서 미치지 못한다면 사선(死線)을 넘을 때 자기 전로(前路)가 막막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하나니라. 48. 공부인(工夫人)이 공부를 아니하는 공부를 하여야 하는데, 공부 아니하기가 하기보다 더욱 어려우니라. 49.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문제보다도 이 공부밖에 할 일이 없다는 결정적 신심(信心)부터 세워야 하나니라. 50. 오전(悟前)이나 오후(悟後)나 한 번씩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나니라. 51. 참선(參禪)은 모든 업장(業障)과 습기(習氣)를 녹이는 도가니니라. 52.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비심(慈悲心)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공부를 위하여서는 극악극독심(極惡極毒心)이 아니면 팔만사천 煩惱魔를 쳐부수지 못하나니라. 53. 사형(死刑)이 집행될 시간 직전에도 오히려 여념(餘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진(精進) 중에는 털끝만한 어른거림이라도 섞여서는 아니 되나니라. 54. 공부하는 데는 망상보다도 수마(睡魔)가 두려운 것이니, 수마를 먼저 조복(調伏)시켜야 하나니라. 55. 인신(人身)을 얻기가 극히 어려운 일이니 사람 몸 가졌을 이때를 놓치지 말고 공부에 힘쓰라. 사람 몸 한 번 놓치게 되면 또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니라. 56. 공부에 득력(得力)을 못하였을 때 안광낙지(眼光落地)하게 되면 인업(人業)만 남아 짐승도 미남․미녀로 보여서 그 뱃속에 들기 쉬우니라. 57. 참선하는 사람의 시간은 지극히 귀중한 것이라, 촌음(寸陰)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58. 변소에 앉아있는 동안처럼 자유롭고 한가한 시간이 없나니, 그 때만이라도 일념에 든다면 견성(見性)할 수 있나니라. 59. 공부가 늦어지는 까닭은 시간 여유가 있거니 하고 항상 미루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니라. ‘자고 나면 오늘은 죽지 않고 살았으니, 살아 있는 오늘에 공부를 마쳐야 하지 내일을 어찌 믿으랴!’ 하고 매일매일 스스로 격려해 가야 하나니라. 60. 밤 자리에 누울 때 하루 동안의 공부를 점검하여 망상과 졸음으로 정진시간보다 많이 하였거든 다시 큰 용기를 내어 정진하되, 매일매일 한결같이 할 것이니라. 61. 공부하다가 졸리거나 망상이 나거든 생사(生死) 대사(大事)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전정(前程)을 다시 살펴본다면 정신이 저절로 새로워질 것이니라. 62. 사선(死線)을 넘을 때 털끝만큼이라도 사심(私心)의 여유가 있다면 참선하는 기억조차 사라져 없어지느니라. 63. 생사 윤회의 생활을 면하려고 출가한 중이니만큼 참선법을 여의고 하는 일은 모두가 생사법(生死法)을 익히는 것이니라. 64. 도라는 것이 따로 있는 줄 알고 구하는 마음으로 참선한다면 외도(外道)에 떨어지게 되나니라. 65. 설사 도인이 온갖 신통(神通)․변화(變化)를 부리고, 죽을 때에도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이적(異蹟)을 보일지라도 이는 상법(相法)이니, 이런 상법이란 하나도 가히 취할 바는 아니니라. 66. 믿음은 부처를 찾아 오르는 발판이기 때문에 몰아적(沒我的) 믿음의 발판을 딛고 부처를 넘어 각자의 자기 정체(正體)를 찾아야 하나니라. 67. 선학자(禪學者)는 선학자의 행위를 엄숙히 가져서 입을 열지 않고서라도 남을 가르치게 되어야 하나니라. 68. 공부의 과정에는 지무생사(知無生死)1)․계무생사(契無生死)2)․체무생사(體無生死)3)․용무생사(用無生死)4)의 네 가지 단계가 있는데 용무생사에 이르러야 비로소 이무애(理無碍)5)․사무애(事無碍)6)하게 되는 대자유인이 되나니라. 69. 공부할 때에 짐짓 알려는 생각을 말고, 정진력만 얻으면 공부는 저절로 성취되나니라. 70. 공부가 완성되기 전에 미리 알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진을 게을리하다가는 불법인연(佛法因緣)마저 떨어지기 쉬우니라. 71. 물체에 의존하지 아니하는 정신은 한 모양도 없는 자리에서 일체 행동으로 능히 현실화할 수 있나니라. 72. 정신은 물질의 창조자이지만, 물질이 아니면 정신의 존재와 효과가 나타나지 못하나니라. 73. 물질은 각자 그 이름에 따르는 한 가지 책임을 할 뿐인데, 정신은 이름도 형상도 없지만 만유(萬有)의 근본이라, 어디서 무슨 일에나 절대 능력자이니, 이 정신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이 정신만 도로 찾으면 만능(萬能)의 인(人)이 되나니라. 74. 정신이라는 전당(殿堂) 안에는 생사(生死)와 선악(善惡)이라는 두 배우가 순번(順番)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란 배경 앞에서 희비극(喜悲劇)을 무한한 형태로 연출하고 있나니라. 75. 아무리 문명(文明)이 발달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이 없으면 빈 나라요, 아무리 빈약(貧弱)한 나라라 하더라도 도인인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그 나라는 비지 않은 나라이니라. 76. 도인(道人)은 도인이라는 대명사(代名詞)에 지나지 않는 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상(名相)이 생기기 이전 소식을 증득(證得)하여, 도인이라는 우상(偶像)도 여의고, 계(戒)니 수행(修行)이니 하는 구속에서 벗어나 완전 독립적 인간이 되어야 육도에 순력(巡歷)하면서 고(苦)를 면하게 되나니라. 1. 인간의 일생은 짧은 한 막의 연극에 지나지 않는데, 이 연극의 한 장면이 종막(終幕)이 되면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연출하던 그 의식은 그만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고 육체는 부글부글 썩어 버리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그 동안인들 일분의 자유가 았었던가? 밥을 먹다가라도 불의(不意)의 죽음이 닥치면 씹던 밥도 못 삼키고 죽어야 하고, 집을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찬란하게 짓다가도 느닷없이 화재(火災)라도 만나면 방 안에 한 번 앉아 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되지 않는가? 직접 내 자신의 일에도 이렇게 늘 자유를 잃어 버리는데 인생의 집단인 사회와 국가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자유의 바탕을 얻어야 근본적 자유를 얻게 될 것이 아닌가. 자유가 어디에서 얻어지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쌀도 없이 밥을 지어 배부르게 먹는 이야기만으로 떠드는 셈이니라. 2. 인생은 자기 업신(業身)의 반영인 이 몽환세계(夢幻世界)를 실상으로 알고 울고 웃고 하는 것은 마치 은행나무가 물에 비치는 제 그림자를 이성(異性)으로 감응(感應)하여 열매를 맺는 것과 같으니라. 3. 인간이 산다는 것은 생(生)의 연속이 아니라 생멸(生滅)의 연속으로, 인간이 죽는 순간도 죽기 전후 생활도 다 잊어 버리고, 입태(入胎)․출태(出胎)의 고(苦)도 기억하지 못하고, 다만 현실적 육식(六識)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이 생활만 느끼고 사는데, 천당에 갔다가 지옥에 갔다가 사람이 되었다가 짐승으로 떨어졌다가 하는 그러한 생이 금세 지나가고, 또 한 생이 금세 닥쳐오는 것이 마치 활동 사진의 영상이 연속해 교환 이동되어 빠른 찰나에 다른 장면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4.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도 없는 것이다.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현재․미래의 생활을 일단화(一單化)한 생활을 할 수 있나니라. 5.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니요,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實답다 할 수 있으랴!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후신(後身)이요, 미래의 전신(前身)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6. 우리가 사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여 위로 상상할 수 없는 최고 문화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벌어져 있고, 아래로 저열극악(低劣極惡)한 그 양과 수를 헤일 수 없는 지옥의 세계가 다 함께 몽환세계(夢幻世界)인 것이니, 과연 어떤 것이 실세계(實世界)인지? 그것을 알아 얻는 것이 곧 진아세계(眞我世界)를 체달(體達)하게 되는 것이다. 7. 나의 현재 생활이 일체(一切) 세계라, 현재 생활에서 자족(自足)을 못 얻으면 다시 얻을 도리가 없나니라. 8. 인간들은 모두 자기에게는 좋은 것이 와야 할 희망을 갖고 생을 이어 가지만 좋은 것을 취하는 것이 곧 언짢은 것을 얻는 원인(原因)인 줄을 알지 못하나니라. 9. 인간 생활의 주체가 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희노애락(喜怒哀樂)까지도 다생(多生)으로 익혀온 망령된 습관의 취집(聚集)이요 결과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생사(生死)를 벗어나게 되나니라. 10. 이 우주에는 무한 극수적(無限 極數的) 이류 중생(異類 衆生)이 꽉 차서 각각 자기 습성에 맞는 생활권을 건립하고 있지만, 우리 육식(六識)은 다생(多生)의 습기(習氣)로 점점 고정화하여 우리 사바세계 인간으로는 어느 한도를 넘어서는 도저히 볼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나니, 천인(天人)이니 지옥(地獄)이니 신(神)이니 귀(鬼)니 하는 것도 결국 우리 육식(六識)으로는 판단할 수도 없는 이류 중생의 명상(名相)이니라. 11. 습관(習慣)은 천성(天性)이라 천재(天才)니 소질(素質)이니 하는 것도 다생(多生)으로 많이 익혀서 고정화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업(業)이라는 것이다. 12. 물체는 결합(結合)․해소(解消)의 이중작용(二重作用)을 하기 때문에 영겁(永劫)을 두고 우주는 건괴(建壞)되고, 인생은 생사를 반복하고 있나니라. 13. 중생(衆生)이라 하는 것은 한 개체에 국한된 소아적(小我的)인 생활을 하는 사람․짐승․벌레 등으로 일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어 다만 업풍(業風)1)에 불려서 사생육취(四生六趣)에 헤매게 되는 것이요, 佛(完人)이라 하는 것은 일체 우주를 자신화(自身化)하여 일체 중생이 다 내 한 몸이요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내 한 집이라, 어느 집이나 어느 몸이나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내 임의(任意)로 하나니라. 14. 완인(完人)은 만유(萬有)를 자체화(自體化)하였기 때문에 만유의 형상을 임의로 지으며, 만유의 도리를 자유로 쓰게 되나니라. 15. 천당(天堂)은 갈 곳이요, 지옥(地獄)은 못 갈 곳이라면 우주가 내 한 몸이요, 천당과 지옥이 내 한 집인데, 중생은 한 세계를 두 세계로 갈라놓고, 한 몸을 분신(分身)시켜 천당․지옥으로 나누어 보내는데, 이것은 중생의 업연(業緣)으로 됨이니라. 16. 인격(人格)이 환경에 휘둘리는 사람은 영원한 평안(平安)을 얻을 길이 없나니라. 17. 세상 사람들은 똥과 피의 주머니로 몸을 삼아 춥고 덥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만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길이 윤회(輪廻)의 고취(苦趣)를 면치 못하나니라. 18. 우리가 느끼는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의 육식(六識)은 장소에 따라 변하고, 때에 따라 흩어지나니,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천류(遷流)하는 육식으로 어찌 인생이 근본 정신을 파악할 수 있겠는가? 19. 세인(世人)들의 아무리 진보된 이론(理論)이나 심원(深遠)한 학설(學說)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인생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니 이는 명상(名相)에 집착되었기 때문이니라. 20. 이론(理論)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명확하게 깨우쳐 주는 이론이라면, 그 이론은 곧 도(道)의 입문으로 인도하는 대도사(大導師)가 되는 것이니라. 21. 형이상학(形而上學)이나 유심론(唯心論)을 말하는 자 스스로 물질적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모르나니라. 22. 세상에는 바른 말 하는 사람도 없는 동시에 그른 말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 것이니라. 23. 신(神)은 아무리 신통자재(神通自在)한 최고신으로 인류화복(人類禍福)을 주재(主宰)한다 하더라도 육체를 갖추지 못한 사(邪)이니라. 24.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은 무지(無知)를 면치 못하고, 신을 신앙(信仰)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은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나니라. 25. 현대 과학이 아무리 만능(萬能)을 자랑하지만 자타(自他)를 위하여 순용(順用)되지 않고, 역용(逆用)되는 이상 그것은 인류에게 실리(實利)를 주는 것보다 해독(害毒)을 더 많이 주는 것이니, 다만 세계가 자타의 아상(我相)이 없는 생활로 물질과 정신의 합치인 참된 과학 시대가 와야 전 인류는 합리적인 제도하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니, 인간의 근본을 밝히는 정신문명(精神文明)이 사람마다 마음속에 건설하여야 잘 살수 있는 진정한 평화가 되나니라. 26. 물질 과학의 힘으로서는 자연의 일부는 정복할지언정 자연의 전체를 정복할 수는 없는 것이요, 설사 다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생(多生)에 익혀 온 습성을 어느 정도까지 만족시키는 데 지나지 않을 뿐으로, 정말 습성 자체는 정복하지 못한 것이니, 그 습성 자체를 정복하고, 그 근본에 체달(體達)한 후라야 비로소 자연과 습성을 모두 자가용(自家用)으로 삼게 될 것이니라. 27. 물질과 정신이 합치된 과학자는 영원의 만능을 발휘할 수 있나니라. 28. 현대 사람은 자만심(自慢心)을 본위로 한 신경만 예민하여,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법문(法門)을 들을 때에 신중히 생각하지도 아니하고, 부인할 아무 근거도 없이 무조건 반박해 버리는 것으로 쾌사(快事)를 삼는 일이 많으니, 그것은 암흑의 길을 자취(自取)하는 것이니라. 29. 아집(我執)은 배타적 정신이라, 남이 곧 나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나를 점점 더 축소시키는 무지이니라. 30. 중생들은 잘하고 착해야 될 줄을 알면서도, 잘하고 착하게 하는 사람, 곧 나를 찾는 공부는 할 생각을 못하나니라. 31. 중생들은 인간이 만물(萬物)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사색(思索)하는 데 있다고 하면서 사색하는 그 자체를 알아 볼 생각은 하지 못하나니라. 32. 중생들은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모르면서 학자(學者)인양 종교가(宗敎家)인양 하여 제법 인생 문제를 논하는 것은 생명을 잘라 놓고 생명을 살리려는 것과 다를 바 없나니라. 33. 이론(理論)이 끊어지고, 학론(學論)이 다한 곳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나를 발견하는데, 내가 나를 찾기 전에는 인생 문제의 해결은 결코 불가능하나니라. 34. 인생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인연이나 희망이 아니요, 진아(眞我)를 체달하여 이사(理事)에 임의로 처리하게 되어야 하나니라. 35. 중생들은 알 줄만 알고, 모를 줄은 모르나니라. 36. 알지 못함을 알면 철저히 아는 것이니, 정말 아는 법은 알지 못할 줄을 능히 알 때에 비로소 진아에 체달되나니라. 37. 지구(地球)라는 한 모태(母胎)에서 같이 출생한 동포(同胞)가 서로 총칼을 겨누게 되니, 어느 형을 찌르려고 칼을 갈며, 어느 아우를 죽이려고 총을 만드는지 비참한 일이니라. 1. 佛法이라고 할 때 벌써 佛法은 아니니라. 2. 일체의 것이 그대로 佛法인지라 佛法이라고 따로 내세울 때에 벌써 잃어 버리는 말이니라. 3. 물질은 쓰는 것이요, 정신은 바탕인데, 물질과 정신의 一單化를 佛法이라 하나니라. 4. 佛法은 어느 시대 어떤 인간의 호흡에도 맞는 것이니라. 5. 佛法을 듣고 생명의 중심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간의 생명을 잃어버린 사람이니라. 6. 佛이라는 것은 마음이요, 法이라는 것은 물질인데, 佛法이라는 名相이 생기기 전에, 부처가 출현하기 전에, 나는 이미 존재한 것이니라. 질그릇 같은 나를 버리면 七寶의 그릇인 法身을 얻나니라. 7. 입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요, 손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말하고 일하는 그 정체를 알아야 참된 말과 일을 하는 정작 인간이 되나니라. 8. 佛法은 육체나 영혼의 책임자이다. 책임자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그 얼마나 불안한가. 이것을 알면, 곧 佛法에 돌아오게 될 것이니라. 9. 世間法과 佛法이 둘이 아니요, 부처와 중생이 하나니, 이 不二法을 證得해야 참 인간이 되나니라. 10. 佛法을 알면 俗人이라도 중이요, 중이라도 佛法을 모르면 이는 곧 俗人이니라. 11. 여러 가지의 자물쇠를 열려면 여러 가지의 열쇠가 필요한 것같이 百千三昧의 無量妙理를 解得하려면 백천만의 지혜의 열쇠를 얻어야 하나니라. 12. 佛法을 否認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否認하는 것이요, 佛法을 배척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배척하는 것이니, 이는 곧 자기가 부처이기 때문이니라. 13. 소리소리가 다 법문이요, 頭頭物物이 다 부처님의 眞身이건만, 佛法 만나기는 백천만겁에 어렵다고 하니, 그 무슨 不可思議 한 도리인지 좀 알아 볼 일이니라. 1. 중이라 함은 일체 名相法이 생기기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중이라 하니, 萬有의 주인이요, 天上 인간의 스승이 바로 중인 것이다. 2. 修行人인 중은 부모 처자와 일체 소유를 다 버림은 물론 자신까지도 버려야 하나니라. 3. 중은 운명의 지배도 아니 받고, 염라국(閻羅國)에도 상관이 없어야 하며, 남이 주는 幸․不幸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되나니라. 4. 修道生活을 하는 것은 성품이 白蓮같이 되어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니라. 5. 짧은 일생을 위하여 하는 세속 학문도 반평생을 허비해야 하거든, 하물며 未來世가 다함이 없는 前程을 開拓하려는 그 공부를 어찌 천년을 멀다 하며, 만년을 지루하다 할 것인가? 6. 생사윤회(生死輪廻)에 소극적인 학교 교육도 필요를 느끼거든, 하물며 생사윤회를 永斷하고 참된 인간을 완성시키는 參禪교육은 참으로 필요하다. 전인류에게 시급히 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니라. 7. 세상 사람은 有爲로 법을 삼지만 중은 無爲1)로 법을 삼나니라. 8. 세상 사람은 무엇이든 애착심을 가지고 일을 하지만, 중은 무엇이든지 애착심을 끊고 일을 하나니, 부처님이나 조사에게까지도 애착심을 가지지 말 것이니라. 9. 세상에서는 血統으로 代를 이어 가지만, 중은 자기를 깨달은 정신, 곧 道로 대를 이어 가는데, 세상에서도 조상의 香火2)를 끊게 되면, 그에서 더 큰 죄가 없다는데, 불자가 되어 중으로 부처님 법을 자기 대에 와서 끊는다면 그 죄를 어디에 비할 것인가? 10. 예전에는 항간(巷間)의 부녀자 중에도 불법을 아는 이가 있어 종종 중을 저울질하는 일이 있었건만 지금은 민중을 교화할 책임이 있는 중이 도리어 불법을 모르니, 어찌 암흑 시대라 하지 않을 것이며, 시대가 이토록 캄캄한데 민중이 어찌 도탄(塗炭)에 빠지지 않을 것인가. 11. 불교의 흥망이 곧 인류의 행․불행이니라.] 12. 언제나 불교의 幸運과 함께 세상에 平和가 同行해 오게 되나니라. 13. 공부하는 스님의 누더기는 임금의 용포(龍袍)로도 능히 미칠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니, 임금의 용포 밑에서는 갖은 業을 짓게 되지만 중의 누더기 밑에서는 업이 녹아지고 智慧가 밝아지나니라. 14. 중으로서 속인의 富貴를 부러워하거나 외로워하거나 설움과 恨이 남았다면 게서 더 부끄러운 일이 없나니라. 15. 이 우주 전체가 곧 나인 것을 깨달아 체달(體達)된 인간을 중이라 하나니라. 16. 중은 자신의 노력으로 수입되는 물질이라도 사용하지 못하나니 중의 것은 다 三寶之物3)이기 때문이니라. 17.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중의 名目으로 施物을 얻어 쓰는 것은 사기취재(詐欺取財)니라. 18. 중 노릇을 잘못하면 三家4)에 죄인을 면치 못하나니라. 19. 자성이 더럽혀지기 전인 어렸을 때에 출가하여 평생을 무애(無碍)하게 중노릇을 잘하여 마치는 이는 하늘과 땅을 덮고도 남는 福이니라. 20. 요사이는 施主의 밥만 허비하는 중이 많기 때문에 진실하게 공부하는 중의 생활을 보증해 주는 신도가 없게 되었으나, 道를 위하여 하는 노력은 곧 道가 되나니, 道를 위하여는 至惡의 경지에서도 용기 있게 노력하여 정진해야 하나니라. 21. 思想的 방향은 精進에서만 確定을 하게 되고, 사상적 방향을 정하게 되어야 인생의 正路를 걷게 되고, 인생의 정로를 걷게 되어야 인생의 永遠劫에 장래를 보증할 수 있나니라. 22. 세속 일은 잠시라도 쉼이 있지만, 중은 精進하는 일을 꿈에라도 放心할 수 없나니, 털끝만한 틈이 벌어져도 온갖 마장(魔障)이 다 생기나니라. 23. 百千萬人을 죽인 殺人囚라도 허심탄회(虛心坦懷)로 부처님께 귀의하여 정진하는 중만 되면 백천 만인의 怨結을 푸는 동시에 백천 만겁에 지은 죄업이 몽땅 소멸되나니라. 24. 중생이 보고 듣고 일하는 것이 모두 허무하게 되는 것은 妄我에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25. 중생은 時空間에 의하여서만 생존하는 것으로 집착된 까닭에 시공의 제재하(制裁下)에 六道輪廻를 면치 못하나니라. 1. 불교라고 주장할 때 벌써 불교 교리와는 어긋난 것이니, 불교 교리는 아집(我執)을 떠난 교리이기 때문이다. 2. 불교의 종지(宗旨)가 악(惡)을 징계하고 선(善)을 장려하는 종교가 아니라, 선악(善惡)이 다 불법인 까닭에 천당(天堂)․극락(極樂)의 즐거움이나, 반대로 지옥의 극고(極苦)한 세계가 다 나의 창조물인 까닭이니라. 3. 먼저 대가(代價) 없이는 얻어지지 않고, 노력 없이는 성공이 오지 않는 것이 우주의 원리이니라. 4. 일체는 그대로 불(佛)이기 때문에 일정한 규칙이나 조직을 세워서 가르치지 않고, 기류 차제(機類次第)로 가르칠 뿐이니라. 5. 불교의 유심(唯心)이란 유물(唯物)과 상대가 되는 유심이 아니요, 물심(物心)이 둘이 아닌 절대적인 유심임을 말하는 것이니라. 6. 허공[虛空: 自我․自性]은 마음을 낳고, 마음은 인격[人格: 代表的인 人格者를 佛이라 함]을 낳고, 인격은 행동[現實]을 낳나리라. 7. 세상에는 물심양면이라면 우주의 총칭(總稱)인 줄 알지만, 우주의 정체(正體)는 따로 있나니라. 8. 불교에서는 신(神)을 초월하여 법신(法身)이 있고, 영혼 위에 진인(眞人)이 있음을 알아, 그것을 증득하는 것으로 구경(究竟)을 삼는데, 육신(肉身)과 신(神)과 영혼(靈魂)의 근본이 법신이요, 그 근본을 잃어버린 육신과 신과 영혼이 서로 교환 이동하는 생활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인간이니라. 9. 불교는 전인류의 자아(自我)를 완성시키는 교육 기관이니, 다종(多宗)․각법(各法)의 종교가 다 진아(眞我) 완성의 가교(架橋)요 과정이니라. 10. 불교 교리의 오의(奧義)는 표현할 수 없는 법이지만, 각자가 다 이미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응할 수 있고, 가르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되 주고 받을 수 없는 그 법을 전불(前佛)․후불(後佛)이 상속(相續)하여 가나니라. 1. 중은 반드시 대중(大衆)에 처(處)해야 하며, 대중을 중히 생각하여야 하나니라. 2. 중은 당파(黨派)를 짓지 않아야 하나니, 우리라는 구분이 있다면 벌써 중의 정신을 잃은 소리니라. 3. 중은 물질 본위로 사는 동물적(動物的) 인간계(人間界)를 떠나야 할 것이니, 너와 내가 하나인 정신세계의 집단 생활이 중의 생활이니라. 4. 대중 시봉(大衆 侍奉)이 곧 부처님 시봉이니라. 5. 속연(俗緣)을 끊고 출가하여 동수정업(同修淨業)하는 도반(道伴)을 서로 존중히 여겨야 함을 알고, 어린이를 사랑하며, 어른에게는 공대할 줄 알아야 하느니라. 6. 이미 사좌(師佐)의 의(義)를 맺었거든, 스승은 상좌를 지도하고, 상좌는 스승을 존경해야 하나니라. 7. 중은 먼저 시비심(是非心)을 끊고 지내되, 남이 나를 시비할 때를 당하여 나의 잘못이 있다면 잘못을 반성하여 고치고, 만일 나의 허물이 없을 때는 나의 일이 아니니 상관치 말라. 이와 같이 대중에 처하면 불안한 시비가 없고, 항상 편안하리라. 8. 중은 일이나 물건을 대할 때 나의 이해를 생각하지 말고, 일의 성취와 물건의 보존이 대중에게 공익(共益)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나니라. 9. 동무의 허물을 볼 때에 나의 잘못으로 느끼면 그 허물을 다른 이에게 알릴 수 없나니라. 10. 어려운 일은 내가 하고, 좋은 음식은 남을 줄 생각을 해야 하나니라. 11. 마음은 무한대(無限大)한 것이니, 마음의 사자(使者)인 몸의 능력도 제한되지 않은 것이니라. 12. 중은 공익심(公益心)과 평등심(平等心)으로 누구나 포용(包容)할 수 있어야 하나니라. 13. 중은 곤충(昆蟲)에게도 대자대비(大慈大悲)의 용심(用心)을 가져야 하나니라. 14. 횡재(橫財)를 기뻐하지 말라. 잃어버린 임자의 슬픔이 있나니라. 15. 중은 먼저 인욕(忍辱)할 줄을 알아야 하나니라. 16. 대중의 욕됨을 내가 혼자 받을 마음을 가지며, 대중을 위하여서는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게 되어야 하나니라. 17. 대중에 처하여 각자가 자기의 임무만을 잘 충실히 지켜 가면 대중 질서에 조금도 어지러운 일이 없나니라. 18. 공적(公的) 일을 당하여 괴로움을 면할 생각을 한다든가 자기 욕심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타락(墮落)이니라. 19. 누가 내게 역량(力量)에 못 미칠 노력을 요구하더라도 원망(怨望)을 말 것이니, 못 미친다는 것은 나의 정신력이 못 미친 까닭이다. 1. 숨 한 번 마시고 내쉬지 못하면, 이 목숨은 끝나는 것이니, 이 목숨이 다하기 전에 정진력을 못 얻으면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에 내 정신이 아득하여져서 인생의 길을 잃어 버리게 되나니라. 2. 죄(罪)의 원천(源泉)은 노는 것이니라. 3. 자기면목(自己面目)을 찾는 정진(精進)은 아니하고 재색(財色)에 눈부터 뜨게 된다면, 천불(千佛)이 출세(出世)해도 제도할 수 없나니라. 4. 조그마한 나라를 회복하려 해도 수많은 희생을 요(要)하는 것이니, 전우주(全宇宙)인 나를 도로 찾으려 할 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예산을 각오해야 하나니라. 5. 누구나 물건을 잃어버린 줄은 알게 되지만, 내가 나를 잃어버린 것은 모르나니라. 6. 미물(微物)을 업신여기는 마음으로 후일(後日)에 나도 미물이 되나니라. 7. 남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정말 내게 이익이 되고, 남에게 베푸는 것이 정말 나에게 고리(高利)의 저금(貯金)이 되나니라. 8. 내 잘못을 남에게 미는 것은 가장 비열(卑劣)한 일이니라. 9.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실행함만 못하나니라. 10. 방일(放逸)은 온갖 위험을 초래하나니라. 11. 말하기 전에 실행부터 할 것이니라. 12. 총과 칼이 사람을 찌르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업이 사람을 쏘고 찌르나니라. 13. 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貪)․진(嗔)․치(痴)가 가장 무서운 것이니라. 14. 함이 없는 곳에 참 일이 이루어지고, 착함을 짓지 않는 곳에 정말 착함이 있나니라. 15. 참된 말은 입 밖에 나가지 않나니라. 16. 허공(虛空)이 가장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나니라. 17. 네가 네 생각을 내어 놓을 수 있겠느냐? 18. 허공(虛空)이 뼈가 있는 소식을 알겠느냐? 19. 귀신 방귀에 털나는 소식을 알겠느냐? 20. 등상불(等像佛)이 법문(法門)하는 소리를 듣겠느냐? 21. 생각이 곧 현실이요, 존재니라. 22. 생각이 있을 때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나타나고, 생각이 없어지면 그 바탕은 곧 무(無)로 돌아가나니라. 23. 토목와석(土木瓦石)이 곧 도(道)니라. 24. 백초(百草)1)가 곧 불모(佛母)니라. 25. 부처를 풀밭2)속에서 구할지니라. 26. 무심(無心)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스승이니라. 27. 알려는 생각이 끊어질 때에 일체를 다 알게 되는 것은 무에서 일체의 것이 다 발견되기 때문이다. 28. 허수아비가 사람에 지나는 영물(靈物)임을 알아야 하나니라. 29. 얻는 것이 없으면 잃는 것도 없나니라. 30. 유용(有用)한 인물은 한가(閑暇)한 시간을 가질 수 없나니라. 《만공선사 法訓》 (9) 最 後 說 내가 이 산중(山中)에 와서 납자(衲子)를 가르치고 있는지 사십여 년인데, 그 간에 선지식을 찾아왔다 하고 나를 찾는 이가 적지 않았지만, 찾아와서는 다만 내가 사는 집인 이 육체의 모양만 보고 갔을 뿐이요, 정말 나의 진면목(眞面目)은 보지 못하였으니, 나를 못 보았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못 보는 것이 곧 자기(自己)를 못 본 것이다. 자기를 못 보므로 자기의 부모형제처자와 일체사람을 다 보지 못하고 헛되게 돌아다니는 정신병자들일 뿐이니, 이 세계를 어찌 암흑세계라 아니할 것이냐? 道는 둘이 아니지만 도를 가르치는 방법은 각각 다르니, 내 法門을 들은 나의 門人들은 도절(道節)을 지켜 내가 가르치던 모든 방식까지 잊지 말고 지켜 갈지니, 도절을 지켜 가는 것이 법은(法恩)을 갚는 것도 되고, 정신적․시간적으로 공부의 손실(損失)이 없게 되나니라. 도량(道場)․도사(道師)․도반(道伴)의 三대 요건이 갖추어진 곳을 떠나지 말 것이니, 석가불(釋迦佛) 삼천운(三千運)에 덕숭산(德崇山)에서 삼성칠현(三聖七賢)이 나고, 그 외에 무수 도인(無數 道人)이 출현할 것이니라. 나는 육체에 의존하지 아니한 영원한 존재임을 알라. 내 법문(法門)이 들리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은 내 면목(面目)을 볼 수 있어야 하나니라. 인생(人生)의 진면목(眞面目) 불생 불멸(不生不滅)이 참 묘법(妙法)인데, 우리는 무한한 세상을 살아 오면서 얼마나 많은 형상을 바꾸었던가? 천상(天上)세계·인간(人間)세계·귀신(鬼神)세계 등의 갖가지 고락(苦樂)을 받으면서 몸을 받을 때마다 껍데기를 바꾸어 썼다. 선업(善業)을 지어서는 천상이나 인간에 났고, 악업(惡業)을 지어서는 귀신이나 축생의 몸을 받아 영겁(永劫)으로 무수한 고통을 당했다. 그러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일체 중생이 자기의 본래 면목(本來面目)을 망각(忘却)한 데 있다. 쉽게 말하면 마음이 미(迷)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본래 밝은 마음이 왜 미(迷)했는가? 번뇌와 망상, 그리고 욕심에 덮여 청정(淸淨)한 마음이 나타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비유로 말하면, 청천(靑天)의 밝은 달이 나타나지 못함과 같나니, 그 검은 구름은 번뇌 망상에 비유한 것이요, 밝은 달은 마음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잘 수양하여 저 서쪽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서 구름을 벗겨 버리는 것과 같이, 마음의 구름을 벗겨 버리고, 밝고 맑은 본래의 고향 달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눈으로 모양을 본다. 그러나 송장은 눈이 있어도 물건을 보지 못한다. 눈이 아닌 한 물건이 있어 무엇이든지 보지마는, 무엇이 보는지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한 모양도 볼 수가 없다. 아무리 볼려고 하여도 한 모양도 볼 수 없을 때에, 저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검은 구름을 벗겨 버리고 밝은 달이 나타난 것이며, 아무리 보려고 하여도 한 모양도 볼 수 없을 때에 미움과 친함이 없어진 것이며, 아무리 보려고 하여도 한 모양도 볼 수 없을 때에 생사를 면한 것이며, 아무리 보려고 하여도 한 모양도 볼 수 없을 때에 고해(苦海)를 벗어나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나고 죽을 때 항상 육체만을 보고, 나고 죽는다 하지만 나고 죽음은 본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망념(妄念)된 생각으로 난다 죽는다 하는가? 난다 죽는다, 간다 온다, 괴로움이다 즐거움이다 하는 것은 하나의 명상(名相)뿐이요, 실체(實體)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은 없는 동시에, 개인 개인의 그 신령스럽게 비치는 불성(佛性)은 시방 세계를 통하여 두루(頭頭)에 항상 밝고, 물물(物物)에 항상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때에 그렇게 나타나는가? 혹은 눈에 보이는 색도 있고 귀에 들리는 소리도 있을 때, 그 때에 바로 그것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눈에 색이 보이고 귀에 소리가 들릴 때에 밝게 나타난다고 하지마는, 눈에 보이는 색도 없고 귀에 들리는 소리도 없을 때에는 그것은 어디에 나타나는가? 그 때 그것은 잠자코 있다가 때를 당해 인연이 오면, 오늘 이와 같이 이 「법어집(法語集)」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나타나는 자체는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의 설법도 미칠 수 없고, 천하 선지식의 전법(傳法)으로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나타나는 자체에는 인연도 끊어졌고 대(對)도 또한 끊어진 것이니, 이것은 시방 세계(十方世界)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참 면목(面目)이며, 천하 선지식의 참 면목이며, 오늘 이 대중의 참 면목이다. 그 뿐 아니라 일체 중생이 고금을 통해 그것을 수용(受用)해 오지마는, 아무리 써도 다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개개인이 본래 갖추고 있는 참 면목인 것이다. 身是正法藏 몸은 바로 이 바른 법을 감추었고 心爲無碍燈 마음은 걸림 없는 등불이니 照露諸法空 모든 법의 공함을 다 비추나니 一切皆明見 일체를 모두 환히 보네. -혜암현문 선사 불교와 기독교의 동일점(同一點) 부처님께서 가비라국 정반왕(淨飯王) 왕가(王家)에 태어나실 때, 대지(大地)에 광명(光明)을 놓아 시방 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땅에서는 금련화가 솟아나 그의 두 발을 받드니, 그는 동서남북으로 각각 칠보(七步)를 걸으시고, 두 손을 나누어 하늘과 땅을 가리키시며, 사자후(獅子喉)하시기를 『상하사유(上下四維)에 무능존아자(無能尊我者)라.』하셨다. 이것은 「하늘과 땅 또 사방에 나보다 높은 자가 없다」는 뜻이다. 또 「태자 서응경(太子瑞應經)에도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 곧 이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내가 제일 높다.』하셨다. 이 말씀에 대해 사람들은 제각기 온갖 견해(見解)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석가 세존의 이 말씀의 근본 뜻은 바로 알기 어렵다. 석가 세존의 「오직 <나>만이 홀로 높다」하신 이 말씀은 석가 자신 곧 육신(肉身)이 홀로 높다는 뜻이 아니다. 일체 중생, 심지어 저 곤충까지도 천상 천하에 가장 높은 <나>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세존께서 세상에 나시면서 그 진리를 교시(敎示)하시기 위하여 세존 자신이 홀로 높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지 아니한다. 기독교 성경에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생명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곧 영생(永生)을 얻으리라.』하였다. 그런데 이 말에 <나>라고 한 말씀은 예수 자신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각자가 가진 참 <나>를 가리킨 말인 것이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께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천국(天國)에 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체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하였다. 여기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 자신을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각자의 <나>를 따르라는 말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것을 물으면 예수를 따르라는 말씀이라 하니,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본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석가 세존의 「천상 천하에 나만이 홀로 높다」는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요, 예수님의 「나를 따르면 천국이 너의 것이다」하신 말씀도 각자의 <나>를 가리킨 것이니, 여기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사상법(事相法)으로 말하더라도 밖으로 쓴 즉 나타나고, 안으로 거둔 즉 감추는지라, 밖으로 공경하는 것을 들어서 안으로는 참된 성품을 밝히고, 나의 성품과 밖의 형상이 서로 응함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불상(佛像)을 위하는 것은 이러한 이치로 위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인이 이와 같은 도리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 우상은 배척해야 된다는 말을 한다면, 그것은 상식 밖의 생각이다. 만일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십자가 앞에서 기도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십자가는 눈에 보이는 우상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성경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부처님도 예수처럼 믿을 것이요, 불교를 믿는 사람이 부처님 말씀의 근본 뜻을 알고 믿으면 예수님도 부처님처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한 가정에서도, 부모는 불교도요 자녀는 기독교도라 해서 그 의견이 서로 같지 않음을 흔히 본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로 알고 바로 믿으면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도 불교를 믿는 부모에게 효도를 달리 할 수 없을 것이요, 또 불교를 믿는 부모들도 기독교를 믿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달리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믿는 진리(기독교와 불교)가 겉으로는 다르지마는, 그것은 마치 물은 파도를 여의지 아니하고, 파도는 물을 여의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이와같이 모든 종교의 진리가 하나임을 알아야 하며, 그 진리를 바로 알지 못한 채, 남의 옳지 못한 말만 믿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지금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비유를 들어 보이리라. 가령 달 밝은 밤에 접시·사발·동이·항아리 등 무수한 그릇에 물을 떠놓고 보면, 그 그릇마다 달은 다 비추어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니, 기독교니, 천주교니 하는 것 등은 곧 접시달·사발달·항아리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즉 그 그릇은 각기 다르나 그 달은 같은 달인 것이다. 보라. 청천에 떠 있는 달은 우주에 오직 한 몸만 비추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말면 종교란 원래 하나임을 깨끗한 정신으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사회에서 철학이 어떠니, 심리학이 어떠니, 인생관이 어떠니 하고 떠들며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 남의 흉내만 내는 것이다. 참으로 위에 것을 달관(達觀)하여 인생이란 것을 철저히 타파(打破)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다 자기가 과거에 어디에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만 번 계교(計較)하고 사량(思量)하여 이르더라도, 그것은 다 뜨거운 불 위의 한 점[一點] 눈[雪]이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글이야 한 자도 모르더라도 내가 전생에 어디 있다가 이 세상에 왔는지 그 온 곳을 알아야 한다. 그 온 곳을 진실로 밝게 알면, 따라서 내생에 어디로 갈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참된 인생관이 성립되는 것이고, 완전한 인격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金仙耶蘇本面目 부처님과 예수님의 본래 면복이 人前各自强惺惺 각각 사람 앞에 스스로 똑똑하게 밝았으니 一坑未免但埋却 다만 한 구덩이에서 면하지 못하고 묻히면 不知身在眼子靑 몸 가운데에 푸른 눈알이 있음을 알지 못하리라. 혜암선사 어록중. ***전강 (田岡)선사법문*** 진로형탈사비상(塵勞逈脫事非常)이니 긴파승두주일장(緊把繩頭做一場)이어다 불시일번한철골(不是一飜寒徹骨)이면 쟁득매화박비향(爭得梅花撲鼻香)고 진로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사일이 아니니 승두를 꽉 잡고 한바탕 지을지어다. 한 차례 추위가 뼈 속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 스님이 답하시되 "무(無)" 하셨으니, 이것이 '무자(無字)' 화두의 시초인 것이다. 종문중(宗門中)에서 이 '무자'를 제일 많이 칭찬을 해놓았으니 '무자' 화두에 대해서 말씀해보면,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스님만은 왜 "무(無)" 라고 하셨겠는가? 이 '무자'에 대해서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허무(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무(無)' 라고 했는고?" 하고만 생각해라. 여기에는 공(空)도 또한 거둘 수 없으며 유상(有相)·무상(無相)을 붙일 것도 없다. 필경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이 남으니 이것만 추켜 들어라. "조주 스님은 어째서 '무' 라고 했는고?" 만약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도리를 입껍데기로만 따져서 알았다고 하면 타일(他日)에 염라대왕의 철방을 맞을 것이다. 한번 조주 스님의 "무(無)" 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삼세제불의 골수요, 역대조사의 안목이다. "무(無)" 라고 말할 때 이미 그 의지가 확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특한 사람이면 당장 언하에 대오할 것이다. 이 '무자' 화두에 대해서 별별 해석이 다 나와 있다. 혹자는 일체 명근을 끊어버리는 칼이다, 또는 일체를 열어주는 자물쇠통이다, 일체를 쓸어버리는 쇠빗자루다, 나귀를 매어두는 말뚝이다 등등의 한량없는 말들이 나와 있다. 그렇다. 나는 여기에 삼십 방을 주리라. '무자' 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 스님의 "무" 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 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기실(其實)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 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無字)'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하노라.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 설화가 있으니 ^^^^^^^^^^^^^^^^^^^^^^^^^^^^^^^^^^^^^^^^^^^^^^^ 옛날 중국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 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 견딜 지경이었다. 빈호소옥무타사(頻呼小玉無他事)라 지요단랑인득성(只要檀郞認得聲)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에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른다. 왜 양귀비는 소옥을 그렇게 부를까?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이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 본 뜻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 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 라 말씀하신 조주 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 장군죽비: 誰敢得悟 趙州無 인가? 如來開口 下殺劍 이리라 若人問我 當何事 라면 昨夜三更 月呑月 하리라. 조주의 무자를 누가 감히 깨달아 얻을 것인가? 부처라도 입만열면 살인검이 내리리라 무슨일이 있었는가 묻는이가 있다면 지난밤 삼경에 이미 달이달을 삼켰다고 하리라. 또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께 묻되,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 입니까? (如何是祖師西來意)"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다. 그러면 조주 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판치생모" 라고 말씀하신 조주 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 스님의 뜻을 참구할지어다. "어째서 '무'라 했는고?" 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 장군죽비: 그렇소이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없습니까?"에 "無" 라 하것과 "조사가 서쪽에서오신뜻?"에 "板齒生毛 즉 판대기이빨에 털이났다"는 그 도리가 같은것이올시다. 이렇게 화두를 지어감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중생살이 전체가 망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화두가 잘 된다, 잘 안된다, 망상이 생긴다, 마음이 산란하다 등의 생각이 있으면 화두의 순일지묘(純一之妙)가 없게 되는 것이니, 일어나는 망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상관도 말며 두려워도 말 것이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리고는 그저 알수 없는 의심 하나만 간절히 간절히 일으킬 것이며, 없어지거든 또 일으키고 부지런히 거각하여 끊어지지 않게만 자꾸 이어주어라. 이렇게 오래오래 물러나지만 않고 해나간다면 견성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는 것이다. 고인의 말씀에, "만약 능히 신심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견성성불을 못하리오(若能信心不退 誰不見性成佛)." 라고 하셨느니라. 또한 공부를 지어감에 속효심(速效心)을 내기가 쉬우나 이는 절대 금물(禁物)이다. 이것으로 인해 마음이 급해지고 생각이 쉬어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고 보면 화두는 점점 멀어지고 자리가 잡혀지지 않게 된다. 또 공부 지음에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망념은 할 수 없거니와 '크게 깨달아야겠다' 라는 망념을 고의로 일으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좌선함에 눈을 감고 하는 수가 많은데 눈을 감고 할진댄 혼침(昏沈)과 무기(無記)에 떨어지기가 일쑤며, 또한 흑산하귀굴(黑山下鬼窟)에 떨어진다' 고 고인이 밝게 말씀하셨으니, 두 눈을 평상으로 뜨고 허리는 쭉 펴고 맹렬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깨끗 깨끗이 자꾸 일으켜 매하지 않게 할 따름이다. 흔히들 화두를 머리에 두고 참구하기가 쉽다. 여기에 속효심이 가해지게 되면 상기(上氣)가 일어나게 된다. 모든 열기가 전부 머리로 치밀게 되어 머리 아픈 병이 생기게 된다. 이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하기가 지극히 힘이 든다.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은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진다. 내가 소시에 이 상기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받아 왔으나 결국은 자치지방(自治之方)으로 완치시켰다. 그 자치지방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호흡법이다. 이 호흡법은 참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간곡히 말을 하는 바이다. 정좌(正坐)하여 숨을 천천히 내어쉬되, 단전 부위를 허리쪽으로 살며시 당기면서 천천히 내쉰다. 그 다음 들어오는 숨은 팔부쯤 들어 마신다. 그때 자기 신체기량(身體氣量)에 따라 잠깐 멈추되 고통스럽지 않을 만큼 하면 족하다. 이때 화두는 단전(배꼽 밑 일촌 삼푼)에 두고 의심을 잘 관(觀)해야 한다. 그리고 이 호흡법은 숨을 내쉴 때 묘가 있는 것이니 코에 부드러운 털을 대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쉬되 이때도 역시 화두를 잘 관해야 한다. 들어가고 나오는 숨에는 상관말고 오직 단전에 둔 의심만을 묘하게 관해야 한다. 처음에는 잘 되질 않으나 언제든지 생각이 나거든 서너 번씩 하다가 차츰 길들여 가면 머리가 청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눈이 깨끗해짐을 느낄 것이다. 나중에 화두가 순일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이 자연히 잘 되는 것이다. 일파유조수부득(一把柳條收不得)하여 화풍탑재옥난간(和風搭在玉欄干)이노라 한 웅큼 버들가지를 거두어 잡지 못하여 바람과 함께 옥난간에 걸어 두노라. 불소(不少)한 허물을 옥난간에 걸어 두노라. 꼬리말쓰기 미소짓는이: 전강 영신(田岡 永信)스님 말씀이군요. 퍼온 곳을 알려 주시는 것 보다는 누구의 말씀인지를 알려 주시는 편이 더 좋을 듯 싶습니다. () 나무: 맨 끝의 "불소한 허물을 옥난간에 걸어둔다"는 말도 전강스님께서 하신 말인기요? 전강스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 장군죽비: 작은허물마저 옥난간에 걸어둔다는 뜻으로 허물구를 용서(?)하라는 뜻이올시다.즉 開口卽錯을 이르신 것이외다. 무주사랑: 미소님, 그렇군요,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나무님, 그곳의 내용 그대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불소한 허물을 옥난간에 걸어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아시는분??? 합장. 미소짓는이: 저도 전강스님의 '언하대오'를 읽으면서 느낀건데 마지막'옥난간에 걸어 둡니다'라는 말은 전강스님의 말씀이라 보이지 않습니다.우선 문체가 다르지요. 모든 문장이 '..이다.' 또는 '..한다'로 객관체로 끝나는데, 마지막만 겸양체로 끝납니다.아마 이글을 받아 전달한 사람의 스님에 대한 예우가 아닐까 합니다. === 장군죽비: 누가 한 말씀이건 그것이 대수리오. 법만 살피도록하오. 촌아: 출처를 밝히든 법문하신 스님을 밝히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참선공부 지어감에 도움이 많이되는군요. 무주사랑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명수니: 무주님 고만습니다 알려고 하는마은 전해주려는 마음 다고운 마음 입니다. 우리는삶을 너무높게 너무낮게 사는것 같습니다. 항상 화두를 놓지말고 사는 도반이 되여주세요. 내마음이 어디로가는지 참구하며 살아야할것 같아요 건강하십시요 선교결(禪敎訣) 유정대사에게 보임(示 惟政大師) 서산대사(西山大師)禪林寶典 요즈음 선(禪)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하고 교(敎)를 하는 사람도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한 법을 가지고 서로 같다느니 다르다느니 하여 손가락과 말로 서로 다투고 있으니[손가락과 말[指馬]... <장자>제물편에서 쓸데없는 논쟁을 비유한 말] 슬프도다, 그 누가 능히 결단하겠는가! 그러나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교는 말이 있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선은 말 없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말 없는 곳으로부터 말 없는 곳에 이르면 그것은 누구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하니, 이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 가운데도 또한 선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성문승도 아니며 연각승도 아니고 보살승도 아니며 불승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가(禪家) 입문의 첫 구절이요 선의 뜻은 아니며, 세존께서 한평생 말슴하신 가르침[敎]인 것이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인천소승교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 [연각의 중승교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대승원돈교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뢰를 내뿜는다. 몸을 뒤쳐 한 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퍼부어 뭇 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바로 조사문 중의 교외별전의 기틀임], 이는 선이 교와 다른 점이다. 이 선의 법은 우리 부처님 세존도 또한 진귀조사에게서 따로이 전해받은 것이며, 옛부처의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요즈음 선의 뜻을 그릇 이어받은 자는 더러는 돈, 점의 문으로써 정맥을 삼으며, 더러는 원돈의 교로써 종승을 삼고, 더러는 외도의 글을 인용하여 비밀한 뜻을 설하며, 더러는 업식을 희롱함으로써 본분을 삼고, 또 더러는 그림자를 인정하여 자신으로 삼는다. 심지어는 눈멀고 귀먹은 방할(棒喝)을 함부로 행하여 부끄러움도 없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들인가? 법을 비방하는 그 허물을 내가 어찌 감히 말하겠는가? 내가 말하는 교외별전이란 배워서 알며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마음 길이 다하여 끊긴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알아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이 얼굴 가득히 미소한 뒤로부터, 나아가서는 후세에 전한, 이른바 달마의 '툭 트이어 성(聖)이랄 것도 없다'한 것과 육조대사의 '선, 악을 생각하지 말라'한 것과, 회양의 '수레가 멈추니 소를 채찍질한다'고 한 것과 행사의 '여능의 쌀값'과 마조의 '서쪽 강물을 다 마심'과 석두의 '불법을 모른다'함과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 마심'과 투자의 '기름 팜'과 현사의 '흰 종이'와 설봉의 '공굴림'과 화산의 '북 두드림'과 신산의 '바라 두드림'과 도오의 '춤을 춤'에 이르기 까지, 이들은 모두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같이 교외별전의 곡조를 노래한 것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머뭇거릴 수 있겠는가? 이는 모기가 무쇠 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낮은 근기는 많으나 이들이 교외별전의 근기가 아니므로 다만 원돈문의 이치의 길, 뜻의 길, 마음의 길, 말의 길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으로 이치와 뜻과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져 자미(滋味)가 없고 만지지 못하는 곳에서 칠통을 두드려 부수는 경절문(徑截門)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 무리들을 접대할 때 칼을 쓰되 긴밀히 하여(사량복탁으로) 억지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지 말 것이요,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쳐 스스로 얻게 하여야만 할 것이니 그것이 바야흐로 종사의 사람을 위하는 됨됨이니라.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함을 보고 문득 뻘밭으로 이끌어 교리를 말하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함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종사가 이 법을 어기면, 비록 설법하매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러이 쏟아져 내릴지라도 이는 모두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 것이 될 뿐이다. 만일에 배우는 사람이 이 법을 믿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한 깨침을 얻지 못하여도 목숨을 마칠 때에 악한 업에 끌리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바른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옛날 마조가 한 번 소리치자 백장이 귀먹었고 황벽이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임제종의 연원이다. 그대는 반드시 정맥을 가려서 종안이 분명할 것이므로 이렇게 누누히 말하는 것이니, 뒷날 이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에 노승의 말을 저버리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살펴야 한다. 유석질의론초(儒釋質疑論抄) 함허 述 천단 抄譯 * 도(道)에 '까깝고 먼 것이 있다'고 하는 말은 구릉과 태산이 서로 다름과 같이 차이가 있다는 말이요, 교(敎)에 '얕고 깊음이 있다'고 하는 말은 말굽자국에 고인 물과 강이나 바다는 서로 다름이 있듯이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말굽자국에 고인 물 속에 갇힌 자와는 서로 곤붕(鯤鵬)의 조화를 말하기 어렵고, 구릉에 빠져 있는 자와는 함께 건곤(乾坤; 우주)의 장대한 경관을 말하기가 어려운 것인 바, 그 두 집착을 버린 연후에야 비로소 성스러운 도(道)를 함께 말할 수가 있다 할 것이다. 주) 곤붕(鯤鵬); 곤(鯤)이라는 큰 물고기가 변하여 그 크기가 수 천리에 달하며 한 번에 구만리를 날아가는 큰 붕새로 되는 이치. 즉 대우주의 섭리를 뜻함. * 저 대각(大覺; 법왕)이 세상에 응하심을 살펴보면 본체(本體)는 진공(眞空)이요, 작용(作用)은 건곤(乾坤)이라, 은미롭게 작용하고 변화하며 천지(天地; 우주)로 더불어 함께 흐른다. * 우주의 본체(本體)로는 하나의 도(道)라 부르고, 변화의 오묘함으로는 하나의 기(氣)라고 부르며, 만물의 이뤄짐으로는 하나의 이(理)라고 부르는데, 다만 얕고 깊음이 같지 않기 때문에 성인(聖人)의 가르침이 셋으로 나뉘었을 뿐인 것이다. 불교(佛敎)에서는 진공(眞空; 우주의 본체)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근본 성품을 들어서 말함이요, 노교(老敎; 도교)에서는 곡신(谷神; 현묘함을 낳는 신)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변화작용을 들어서 말함이며, 유교(儒敎)에서는 대본(大本; 사물의 근본)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물에 붙여서 말함인 것이다. 지극히 커서 나(我)가 없고, 지극히 깊어 어지러움이 없고, 지극히 비어 비롯됨이 없고, 지극히 신령하여 마침이 없으며, 온갖 신묘함을 머금고 있으되 고요히 흔들림이 없어 삼재(三才; 하늘.땅.사람)의 비조(鼻祖)로써 만법(萬法;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므로 진공(眞空)이라고 말하는 것이요, 원대한 하나의 기(氣)가 영묘하게 발하여 조화(造化)를 타고 만물에 있지 않음이 없으므로 곡신(谷神)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만물에는 본말(本末)이 있고 만사에는 종시(終始)가 있어 사물을 궁구하여 그 지극한 데에 이르면 현상(現象)은 천만가지로 다르되 그 근본 성품은 하나의 이(理)이므로 대본(大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교(三敎)가 비록 다르나 그 도(道)는 하나인 것이니, 비유하면 나무가 자라는 것과 같아 저 땅이 품어 기르는 것(性德)을 진공(眞空), 종자에서 움이 트는 것(作用)을 곡신(谷神), 줄기와 잎이 한 뿌리인 것(道理)을 대본(大本)이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은 진실로 건곤조화(乾坤造化)의 오묘함과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니, 부처님의 삼신(三身; 법신.보신.화신)이 저 역도(易道)와 부합된다 함이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만일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덕이 합하고 일월(日月)과 더불어 그 밝음이 합하며, 사시(四時)와 더불어 그 질서가 합하고 귀신(鬼神)과 더불어 그 길흉이 합하여 천하에 지극히 정미롭고 싱그럽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 가르침을 떠나서 그 무엇으로 이룰 수가 있겠는가? 이른바 '근원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이란 정식(情識)을 돌이켜 법성(法性)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함인데, 법성(法性)은 근본이고 정식(情識)은 지말(枝末)인 것이다. 법성(法性)이 근본이 됨은 지극히 비고 다함이 없어 그 근본 성품이 상주(常住)하고, 지극히 신령하고 줄어듦이 없어 그 신묘한 작용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근본 성품이 상주하여 진겁(塵劫)에 뻗치도록 변치 않고, 그 신묘한 작용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조화를 운행하여 다 함이 없으니, 이것이 곧 그 근본이 되는 까닭이다. 정식(情識)이 지말이 됨은 참을 등지고 제 멋대로 흘러 어지럽고 시끄러움이 쉬지 않고, 티끌을 받아들여 그 몸을 삼음으로 혼탁하여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지럽고 시끄러워 쉬지 못함으로 생멸(生滅)이 서로 이어지고, 혼탁하여 청정치 못함으로 물욕(物慾)이 수시로 바뀌어 들게 된다. 물욕에 끌리면 고뇌가 계속되고, 생멸을 느끼면 이에 생사가 따르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그 지말이 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정식(情識)으로써 가르침을 삼는 것은 윤회(輪廻)의 도(道)인 것이며, 법성(法性)으로써 가르침을 삼는 것은 출사(出死)의 도(道)인 것이다. 심(心)과 성(性)은 유교와 도교에서도 역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말한 바가 지극하지 못하며, 그 밝힘이 지극한 것은 오직 불교뿐이다. 지극하지 못하면 이미 간격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멀고 가까움이 있게 되는 바, 가까운 것은 눈이나 귀로 듣는데 한정된 도(道)이니 세상의 도일뿐이며, 먼 것은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고 시방(十方)을 다한 도(道)인 것이다. 노자(老子)가 말한 '곡신(谷神; 현묘한 도)은 죽지 않는 것이며 현빈(玄牝; 신묘한 어버이)으로써 천지의 뿌리가 된다.'한 것은 그 성(性)을 말한 것이며, 또 말하기를, '도(道)가 만물이 됨은 복잡 미묘하여 능히 헤아려 알기 어려운 것이며 그 심원하고 오묘한 가운데에 정신이 있다.'한 것은 그 심(心)을 말한 것이고, 또 말한 '하나(一)를 품어 기(氣)를 전일하게 하여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고 애쓰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것이니 성스러움도 끊고 지혜도 버리라.'한 것은 그 도(道)를 말한 것이다. 유교(儒敎)에서 말한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고 하나니, 그 형상은 만 가지로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한 것은 그 성(性)을 말한 것이고, 또 말한 '허허롭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고 뭇 이치를 갈무려 모든 일에 감응한다.'한 것은 그 심(心)을 말한 것이며, 또 말한 '사람의 마음은 다만 위태롭고 도(道)의 마음은 은미로운 것이니 오로지 그 중(中)을 잡으라.'한 것은 그 도(道)를 말한 것이다. 양쪽의 기(氣)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다만 기(氣)일 뿐인데, 그 기(氣)를 사납고 거칠게 해서야 되겠으며, 만물의 영장이 됨은 오직 마음일 따름인데, 그 마음을 어지럽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나의 기(氣)를 전일하게 해야만 온갖 삿됨이 능히 죽일 수 없을 것이며, 한 마음(心)을 닦아야만 온갖 욕망이 능히 공격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니, 저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는 몸과 마음을 엄하게 경계함으로써 천하만세의 도(道)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저들이 말한 성(性)은 '하늘이 부여한 성(性)'일 뿐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만대각성(圓滿大覺性)은 아닌 것이요, 저들이 말한 마음은 육단생멸심(肉團生滅心)일 따름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여청정심(眞如淸淨心)은 아닌 것이며, 저들이 말한 도(道)는 성(性)을 따르는 도(道)일 따름이니 부처님이 말씀하신 나고 죽는 윤회(輪廻)를 벗어나는 도(道)는 아닌 것이다. 대각(大覺)의 성(性)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와 같거니와, 이른바 진여청정심(眞如淸淨心)이란 대각성(大覺性)의 위에 신묘하게 밝은 참 지혜가 전 우주에 두루 뻗쳐 각성(覺性)과 더불어 평등하고 지극히 담담하여 항상 고요하며 그 큰 작용은 어느 한 방향에 국한됨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여(眞如)란 허망하지 않고 변치 않는다는 뜻이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청정(淸淨)이란 6진(六塵; 눈.귀.코.혀.몸.뜻의 욕망)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니, 영가(永嘉) 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의 거울은 밝아 비춤에 걸림이 없어 뚜렷하게 사계(沙界; 황하의 모래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수 많은 세계)를 두루 밝게 사무치나니, 만상삼라(萬象森羅; 온갖 만물이 어우러져 펼쳐짐)는 거울 속에 나타난 그림자요, 한 덩이 원광(圓光)은 안팎이 없도다."한 것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부처님이 시간적으로는 삼제(三際; 과거.현재.미래)에 미치고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 전 우주)에 두루하며, 그 맑음은 해와 달을 꿰뚫고 그 덕(德)은 건곤을 능가하며, 그 공능(功能)은 조화를 초월하고 그 도량(度量)은 태허(太虛)를 넘어 서나니, 삼계사생(三界四生; 삼계에서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하는 모든 생명)의 어버이가 되심은 이와 같은 까닭이 있기 때문이거니와, 이른바 저 세간의 성현이라 하는 사람 가운데서 어느 누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상서령(尙書令) 감택이 오(吳) 나라의 임금인 손권(孫權)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공자와 노자의 두 가르침은 하늘을 법 받아 만들어 쓰는 것이라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하오나, 모든 부처님이 베푼 가르침은 일체의 하늘이 받들어 행하며 감히 부처님을 어기지 못하는 것이오니, 이로 미루어 보아도 실로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옵니다."하였는데, 이는 바로 말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세상을 벗어남'이란 그 껍대기인 육신을 벗어버리고 혼망(混茫;천지 개벽초에 원기(元氣)가 아직 갈라지지 않은 상태)에 들어감을 말함이 아닌 것이니, 만일 지혜와 덕량이 탁월한 사람이 있어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면, 잠을 자다가 꿈을 깬 듯하고, 연꽃이 핀 듯하며, 구름이 흩어져 해와 달을 보는 듯 할 것이요, 새로운 것도 아니고 옛 것도 아니며, 우뚝이 드러남이 당당하여 형상과 기운과 몸과 마음에 기댐도 없고, 또한 나고 죽는 윤회도 구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그 '세간을 벗어나는 도(道)'가 되는 까닭이다. 애닯고나. 일체의 생령이 한 근원에서 같이 나와서 이와 같은 지혜와 덕성을 모두가 갖추고 있는 것이건만, 나뉘어 형질(形質)을 갖게 되어서는 서로 등져 돌아올 줄 모르고 온갖 주의.주장(主義.主張)과 번다한 알음알이에 빠짐이여! 나무가 제사 그릇으로 쓰이는 술잔으로 다듬어져 푸른 색과 누런 색으로 그 형태가 변함과 같고, 흙이 질그릇을 만드는 기계에 실려 크고 작은 모양으로 그 형체를 바꿈과 같으며, 또한 바다 물을 떠다가 갖가지 그릇에 담아 뚜껑을 닫고 뒤집어 흔들어대서 그 혼탁함이 극도에 이르러 바다의 본성을 심하게 잃음과 같구나. 그 본성을 잃고 혼탁에 빠짐을 쫓는 까닭에 업해(業海)의 파도가 솟아오르고, 삼도(三途)가 길이 끌어올라 윤회가 쉬지를 못하고 생사(生死)가 다함이 없으니, 어찌 상심치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우리 각황(覺皇;부처님)께서 차마 그러함을 앉아서 보지 못하시고 대자대비한 서원력으로 스스로 저 왕궁(王宮)의 의복을 벗어 던지고 석가의 헤어지고 더러운 옷을 입으시고 청함이 없었건만 스스로 벗이 되어 저 모든 세간에 들어가시어 선각자(先覺者)로써 널리 미혹한 무리를 인도하시되, 온갖 신통과 지혜와 위광과 방편과 언사와 법문을 열어, 인연을 설하시고 과보를 설하시고, 죄를 설하시고 복을 설하시고, 선과 악을 설하시고 보응을 설하시고, 천당을 설하시고 지옥을 설하시고, 부처님의 나라를 설하시고 세속을 설하시고, 권교(權敎)를 설하시고 실교(實敎)를 설하시고, 점교(漸敎)를 설하시고 돈교(頓敎)를 설하시어, 바로도 보이시고 교묘히도 보이시고, 간단하게도 보이시고 복합적으로도 보이셨나니, 이 모두가 중생들이 망령된 집착을 돌이켜 참된 곳으로 돌아가서 참 지혜로 신묘하게 장엄된 나라에 오르게 하시고자 바라신 때문인 것이다. 그 가르침은 모두가 심원하고 신묘함에 막힘 없이 통하여 천지를 꿰뚫어 널리 전 우주에 미치나니, 사람마다 교화됨이 마치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쓰러지는 풀잎과 같고, 온갖 마구니가 비난을 해봐도 막히거나 가리워 지지 않는 것은 그 진실함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만일에 부처님의 말씀이 진실하지 않다면 하늘도 싫어함이 오래일 것인데, 어찌 그 가르침과 도(道)로 하여금 면면이 이어 천고(千古)에 뻗치고 시방(十方)에 골고루 전파되도록 할 것이며, 천룡(天龍)과 신령과 귀신들이 공경하고 숭배하지 않음이 없고, 보살과 현성(賢聖)들이 서로 번갈아 이어서 크게 교화하도록 하겠는가? *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법 받을만하다고 말들 하지만 하나님이 오히려 부처님의 법을 받들어 행하는 제자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신령(神靈)을 섬길만하다고 말들 하지만 신령(神靈)이 도리어 부처님의 시종(侍從)이 되었다. 그러므로 부처님을 일컬어 '하늘 가운데의 하늘(天中天)'이라고 하느니, 뉘라서 그 위에 자리하여 임금이 되고 어버이가 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이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사이에 태어남을 보이심은, 이른바 미진(微塵) 속에 계시면서 대법륜(大法輪)을 굴리시어 그 진리(眞理)를 세상에 밝히고자 하심이었을 따름인 것이니, 어찌 저 인도에 태어난 몸만을 참 부처님의 법신(法身)이라고 하겠는가? 법신(法身)이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어느 하나도 그 품에 안기어 섭리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니, 맑디 맑고 구름같은 몸이 우주 전체에 두루하고 있음을 말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은 참 부처가 아니며, 또한 법을 설하는 자도 아니다."함이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응하심은 마치 봄이 온 누리에 퍼짐과 같고, 달이 천강(千江; 모든 물)에 달 그림자를 드리움과 같은데, 풀 한 포기와 물 한 방울을 가지고 '다만 여기에 봄이 있고 달이 있다'고 한다면, 그 어찌 저 봄을 알고 달을 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문) 그대가 말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본체(本體)는 태극(太極)이고, 그 작용(作用)은 건곤(乾坤)이므로 그 운동변화가 천지와 더불어 함께 흐른다는 점은 믿을 수가 있거니와, 불교의 경전에는 천지조화의 오묘한 내용이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만큼 자세함이 없는데, 부처님이 그 내용을 미처 논술치 않으신 까닭은 무엇인가? 주) 하도(河圖)와 낙서(洛書); 하도(河圖)는 옛날 중국의 복희시대에 황하에서 나온 용마(龍馬)의 등에 그려져 있었다는 그림이고, 낙서(洛書)는 중국의 하(夏)나라 시대에 우왕(禹王)이 홍수를 다스릴 때에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구(神龜)의 등에 쓰여 있던 글을 말하는데, 복희가 하도를 보고 팔괘(八卦)를 지었고, 우왕이 낙서를 보고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지었으며, 우왕으로 부터 약 천년 뒤에 문왕(文王)이 낙서를 근간으로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을 완성하여 오늘날의 주역(周易)이 이루어 졌다고 전하여 오는 도서(圖書)로써 우주의 순환원리와 인생의 길흉화복을 추론하는 근원이 된 것임. 이 도서(圖書)를 우리나라의 김일부(金一夫) 선생이 연찬하여 정역(正易)을 완성한 바 있다. 답) 부처님께서 하도와 낙서의 내용을 사람에게 보여 줌이 심히 지극하시나 사람들이 스스로 살피지 못했을 따름이다. 마치 눈먼 사람이 태양의 밝음을 알아보지 못함과 같다 할 것이다. 부처님의 시현(示現)은 반드시 3신(三身)을 갖추시는데, 그 3신(三身)은 법신(法身)과 보신(報身)과 화신(化身)을 말하거니와, 법신(法身)의 수인(手印)을 맺음은 좌.우의 손을 합하여 한 주먹으로 하였는데, 이는 그 본체(本體)를 보이심이다. 주역(周易)의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라 함이 바로 이것이다. 무극(無極)은 지극히 고요하고 허명(虛明)하여 시방(十方)의 허공 전체를 머금고 있음을 이르는 것이요, 그 무극이 통채로 영묘하게 발하려 함이 태극(太極)이거니와, 이 태극은 신묘한 덕성을 품어 갈무리고 우주에 가득히 충만함을 말한다. 보신(報身)의 수인을 맺음은 손을 벌려 좌.우로 폈는데, 이는 그 상(象)을 보이심이다. 역(易)에 말한 태초(太初)로부터 태시(太始)가 되고, 태시로부터 태소(太素)가 되어 음양(陰陽)이 이미 나뉘고 사상(四象)이 이미 분리된 상태이다. 좌측은 양(陽), 우측은 음(陰)인 것이며, 사상(四象)은 즉 팔꿈치의 두 마디로 좌.우를 합하여 넷이 됨이거니와, 세상에서 사시(四時)로 사절(四節)을 삼는 것은 진실로 그 까닭이 있다 할 것이다. 화신(化身)의 수인을 맺음은 좌측 손은 펴고 우측 손은 오무렸는데, 이는 그 용(用)을 보이심이다. 편 것은 양(陽), 오므린 것은 음(陰)이거니와, 좌측 손은 세 손가락은 펴고 두 손가락은 굽혔고 우측 손은 셋은 굽히고 둘은 폈는데, 편 것은 모두 천수(天數)이고 굽힌 것은 모두 지수(地數)인 바, 양쪽 손의 손가락을 굽히고 펴서 (만물이)서로 뒤섞여 어우러짐을 보이신 것이다. 오행(五行)의 생성(生成)으로써 배대(配對)를 한다면, 좌측 손의 새끼손가락은 천일(天一)이 되어 수(水)를 내고, 넷째 손가락은 지이(地二)가 되어 화(火)를 내고, 가운데 손가락은 천삼(天三)이 되어 목(木)을 내고, 둘째손가락은 지사(地四)가 되어 금(金)을 내고, 엄지손가락은 천오(天五)가 되어 토(土)를 내는데, 아래로부터 쌓아 위로 이르는 것이다. 우측 손의 새끼손가락은 지육(地六)이 되어 수(水)를 이루고, 넷째 손가락은 천칠(天七)이 되어 화(火)를 이루고, 가운데 손가락은 지팔(地八)이 되어 목(木)을 이루고, 둘째손가락은 천구(天九)가 되어 금(金)을 이루고, 엄지손가락은 지십(地十)이 되어 토(土)를 이루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각각 그 동기(同氣)로써 서로 구하는 오행생성(五行生成)의 근본을 보이시고자 함인 것이다. 8괘(八卦)의 성상(成象)으로써 배대를 한다면, 좌측 손의 굽힌 세 손가락을 합하여 건괘(乾卦)를 이루고, 편 두 손가락과 아래의 굽힌 것을 합하여 진괘(震卦)가 되며, 두 손가락과 중간에 굽힌 손가락이 감괘(坎卦)를 이루고, 두 손가락과 위에 굽힌 손가락이 합하여 간괘(艮卦)가 되는데, 이는 건.진.감.간(乾.震.坎.艮)의 4괘가 양(陽)이 되는 바를 왼쪽 손에 형상하신 것이다. 오른 손의 펴진 세 손가락이 합하여 곤괘(坤卦)가 되고, 굽힌 두 손가락이 아래쪽 손가락과 더불어 손괘(巽卦)가 되고, 굽힌 두 손가락과 중간에 편 손가락이 더불어 이괘(離卦)가 되고, 굽힌 두 손가락과 위에 편 손가락이 더불어 태괘(兌卦)가 되므로, 이는 부처님께서 건곤괘상(乾坤卦象)의 근본을 보이심인 것이다. 일기(一氣)의 유행(流行)으로써 배대를 한다면, 한 손의 네 손가락은 각각 3 마디가 있어 전부 합하면 12 마디가 되고, 두 손을 합하면 24기(氣)가 되는데, 이 기(氣)가 섞이고 어울려 오행(五行)의 생성이 갖추어지므로, 이것이 부처님께서 건곤조화(乾坤造化)를 보이심인 것이다. 그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것은 그 중앙을 비움이니, 4 손가락이 이미 수.목.화.금(水.木.火.金)이 되어 4 방위에 위치하면 엄지손가락은 토(土)가 되어 4 손가락에 합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토(土)가 정위(正位; 중앙)를 얻은 까닭으로써 두루 응함이 방소(方所)가 없고 중궁(中宮)에 위치하여 조화를 총괄하는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부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심이 지극히 깊고 그 도리를 밝힘이 극진하시거니와, 조화(造化)의 오묘함이 부처님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니, 이는 곧 부처님이 건곤조화(乾坤造化)의 으뜸이신 까닭이다. * 정신(精神)이 일생에 그치고 아주 없어지고 만다'고 하는 것은 단견(斷見)으로, 이는 생생(生生; 끊임없이 이어짐)의 이치에 어두워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헤매는 어리석음이며, '사람은 항상 사람만 되고, 축생은 항상 축생만 된다'고 하는 것은 상견(常見)으로, 이는 음양(陰陽)이 서로 변역(變易)되는 이치에 어두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고 헤매는 어리석음이라, 이 단.상(斷.常)의 두 견해는 부처님께서 꾸짖은 것이다. * 이른바 인과(因果)라고 하는 것은, 콩을 심으면 콩을 얻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를 얻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봄에 한 알의 씨를 심으면 가을에 만 알의 곡식을 거둔다"한 것이니, 사람이 선.악(善.惡)을 지으면 그 과보도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이르기를, "전생(前生)의 지은 바를 알고자 하면 금생(今生)에 받는 것이 곧 그것이요, 내생(來生)에 받는 바를 알고자 하면 금생(今生)에 지은 것이 곧 그것이다."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설령 백천 겁을 지나더라도 지은 바 업(業)은 없어지지 않고 인연(因緣)이 서로 돌아 닿을 때에 그 과보를 스스로 받게 된다."하였거니와, 이는 부처님께서 보이신 가르침이 인과(因果)를 우선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학덕이 높은 사람, 고귀한 사람, 영화로운 사람, 부유한 사람은 스스로 그 전생의 선업(善業)을 다행으로 여기고 더욱 공덕을 쌓기에 힘 쓸 것이며, 가난한 사람, 비천한 사람, 다병한 사람, 고독한 사람은 스스로 그 전생의 잘못을 뉘우치고 매일 착함으로 옮겨서 허물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쉬고 방종과 악한 생각을 없애야 할 것이다. * 무릇 과보(果報)가 응하여 몸에 돌아옴이 일정치 않아, 가까이는 시일(時日)의 사이에 있고, 멀리는 진겁(塵劫) 밖으로 더딘 것은 곧 업(業)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인(因)에는 느리고 빠른 차이가 있으므로 응보가 각각 그 종류를 따르기 때문인 것이다. * 문) 그대가 증거를 보여 가르침이 매우 소상하니 진실로 숭상할 만하다 하겠다. 그것을 배워 이를 수가 있겠는가? 답) 도(道)는 땅과 같아 멀리 갈수록 더욱 멀며, 도는 바다와 같아 깊이 들어 갈수록 더욱 깊은 것이다. 그러나 그 문(門)을 구하고자 한다면 계.정.혜(戒.定.慧)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무엇이 계(戒)인가 하면 도적을 잡는 것과 같다 할 것이요, 무엇이 정(定)인가 하면 도적을 포박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며, 무엇이 혜(慧)인가 하면 도적을 죽여 없애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잡기만 하고 포박하지 않으면 달아나므로 잃게 되고, 포박하기만 하고 죽이지 않으면 의심하고 미워하여 피곤하게 되므로 이 세 가지를 다한 연후에야 대장부의 일을 능히 마치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나 의.식(意.識)이 법신을 해치고 지혜의 뿌리를 죽임은 저 도적보다 심하여 진실로 다겁(多劫)의 고통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거늘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는가? 만일 이 세 가지 징계와 제어와 단절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른바 법신(法身)과 혜명(慧命)이 온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기(戒器; 계의 그릇)가 원만하게 성취되고, 정수(定水; 선정의 물)가 응결하여 맑아져야 혜월(慧月; 지혜의 달)이 두둥실 떠서 수도(修道)의 공덕이 바야흐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부처를 배우는 순서가 진실로 이와 같을 뿐이다. 계를 그릇이라고 한 것은 삼업(三業)을 말함이다. 삼업이란 몸(身)과 입(口)과 뜻(意)인데, 몸이 하나의 그릇이 되고, 입이 하나의 그릇이 되고, 뜻이 하나의 그릇이 된다. 무릇 세속에서 이 그릇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뜻에 담는 것은 탐욕과 성냄, 미움과 시기, 어리석음과 게으름 등의 번뇌업이요, 몸에 담는 것은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淫行)의 업이며, 입의 업으로 내뱉는 것은 아첨하는 말과 이간질하는 말과 헐뜯는 말이요, 삼키는 것은 냄새나는 채소와 주정을 부리는 술과 중생의 고기이다. 바로 이것이 윤회의 뿌리가 되어 온갖 괴로움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릇에 티끌과 때의 더러움이 찌들어 있는데도 만일 깨끗이 씻어 없애지 않고 음식물을 담는다면, 마치 물이 비록 얼음과 같이 아주 맑고 깨끗하다 할지라도 더러운 것과 뒤섞여 혼탁해지면 물로 씻는 공덕을 드러낼 수가 없는 것과 같고, 반찬이 비록 감미롭다 하더라도 더러운 냄새에 배이면 제사나 잔치에 올려 쓸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참회로써 제거케 하시고, 뉘우침으로 태워 없애게 하시어, 마음을 물로 씻은 듯 깨끗하게 하시고, 진실한 마음으로 덮게 하시며, 맹세로써 온전케 하시고, 원력으로써 견고케 하신 까닭인 것이니, 이를 따라 행한다면 그릇에 담긴 것은 물물(物物; 일체의 업)이 청정하고, 그 가운데 담기는 것 또한 법법(法法; 일체의 법)이 참되게 되는 것이다. 정(定)을 물이라고 한 것은 한 곳에 그침을 말함이다. 마음은 물과 같아 뛰고 춤추게 하면 풀어져서 그 작용이 곧 흩어지고, 안정시키어 그치게 하면 그 작용이 곧 온전하게 되는 것이다. 온전하여 맑고 고요하면 천심(天心)에 합치(合致)되나 요동하여 파도가 일면 영상(影像)이 혼미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일념만년(一念萬年)으로써 잡되게 쓰는 마음을 없애게 하신 까닭인 것이니, 이를 따르면 밖의 티끌이 아무리 요란해도 침범할 수가 없어 근본 자리의 풍광(風光)이 여기에서 발현(發現)하게 되는 것이다. 혜(慧)를 달이라고 한 것은 정각(正覺)을 말함인데, 달이 야반에 허공에 올라 편.정(偏.正)을 아울러 오묘하게 비침과 같은 것이다. 무릇 사람이 삼계(三界) 속에서 길이 잠들어 지혜의 눈이 없음을 일컬어 무명암흑(無明暗黑)의 큰 밤이라고 하거니와, 태어나도 오는 곳을 모르고 죽어서도 갈 곳을 모르며, 가시밭길을 가면서도 편안한 길을 모르는 것이 중생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밝게 열리면 정도(正道)가 바로 눈앞에 있게 되는 것이니, 이른바 흑암(黑暗)의 큰 밤이 도리어 바른 자리가 되어 어둠이 밝음을 여의지 않고, 밝음이 어둠을 여의지 않아 '가리고 비춤(遮照)'이 동시에 이뤄지는 바, 이것이 근본의 도(道)인 것이다. 임제가 말한 "보살의 청량월(淸凉月)이 항상 법성(法性)의 허공에서 노닌다. 중생의 마음이 물처럼 티없이 맑으면 지혜가 그 가운데 그림자처럼 나타나리라."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이상 말한 것이 삼학(三學)이 상수(相須)하여 도(道)를 배우는 사람의 종시(終始)가 되는 까닭인 것이니, 정(定)이 없는 혜(慧)는 미친 망령이며, 더욱이 혜(慧)가 없는 정(定)은 큰 어리석음인 것이다. 어리석은 정(定)은 근원이 없어 말라죽게 될 뿐이니 이른바 '그림자가 비치는 물'이 아니며, 미친 혜(慧)는 떨어지는 별통별일 따름이니 이른바 '법성(法性)의 창공에 뜬 달'이 아닌 것이니, 어리석음과 미친 망령의 병통이 이 보다 심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도인이 정(定)과 혜(慧)를 균평히 지니는 자리로 오묘함을 삼는다면 수레가 두 바퀴를 갖춤과 같고 새가 두 날개를 얻음과 같아 창공을 나르고 대지를 질주함이 자유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처를 배우는 사람의 첩경인 것이다. *문) 지금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화두(話頭)를 참구함으로서 도(道)에 들어가는 방편을 삼는데, 앞에서 정(定)과 혜(慧)를 논함과는 어떻게 다른가? 답)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 과(果)를 들어서 말하자면 정.혜(定.慧)가 되는 것이요, 그 인(因)을 들어서 말하자면 지.관(止.觀)이라 하는데, 지관이란 곧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법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법은, 하나로 제접(提接)하는 것으로 첫 걸음을 삼고, 전체로 제접하는 것으로 자량(資糧)을 삼는다. 자량은 걸음을 걷는 밑천이 되고, 걸음을 걷는 것은 자량의 효과인 것이니, 이 두 가지가 갖춰진 연후에야 그 이를 곳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로 제접한다'는 뜻은 하나로 만 가지를 제압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지(止)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전체로 제접한다'는 뜻은 의심을 일으켜 참구한다는 말이니, 이것이 관(觀)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하나로 제접함을 따라 그 지극한 데에 이르러 흔들리지 않는 것이 곧 정(定)이요, 전체로 제접함을 따라 활연히 깨달은 것이 곧 혜(慧)인 것이니, 비록 이름은 다르나 그 뜻은 곧 하나라, 도대체 무슨 다름이 있겠는가? * 선법(禪法)이라는 것은 일반 교리(敎理) 밖에 따로 전한 최상의 종지(宗旨)이다. 부처님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 계실 때에 대범천왕(大梵天王; 하나님)이 황금 빛 극락화(極樂花)를 바치고 스스로 법을 받들어 행사를 주관하는 제자가 되어 부처님께 중생을 위한 법문을 청하시매, 부처님께서 법상에 오르시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拈華示衆), 사람도 천인(天人)도 백만의 군중이 모두 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오직 가섭존자(迦葉尊者) 홀로 크게 미소를 지으므로, 세존(世尊; 부처님)께서 이르시기를, "나에게 있는 정법안장(正法眼藏)과 열반묘심(涅槃妙心)과 실상무상(實相無相)을 대가섭에게 부촉하노라."하시었다. 이로부터 서로 번갈아 전해 받아서 28대 달마대사(達磨大師)에 이르러 반야다라 조사(祖師; 27대)의 유촉(遺囑)에 따라 동쪽으로 건너와서 경전을 앞세우지 않고(不立文字) 각자의 마음에 파고들어(直指人心) 불성(佛性)을 찾아 부처를 이루게 하였다(見性成佛). * 부처님의 법이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로부터 동쪽으로 전파된 이래 제왕(帝王).공경(公卿).제후(諸侯).명유(名儒).거가(巨家)가 부처님을 받듦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거니와, 저 이백.두보.노공.이고.유자후.소동파.백락천.배휴.장천각 등도 또한 부처님을 존숭하고 그로 인하여 고매한 명예를 잃지 않았고, 세상에서 부처님을 배척한 인물로 한퇴지와 구양수만한 무리가 없었으나, 한퇴지는 조주(趙州)에 좌천을 당해서는 항상 태전선사(太顚禪師)에게 법을 묻더니 마지막에는 선사를 시종하는 자의 옆에서 도(道)에 들어가는 한 길을 얻게 되었으며, 구양수는 관직에서 퇴임하고부터는 스스로 육일거사(六一居士)라 칭했는데, 거사(居士)란 부처를 배우는 자를 이름함이니 그렇게 호칭했음은 곧 부처님이 계심을 믿음이라, 이는 낙엽이 지면 뿌리로 돌아가고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감을 말함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그러함에 이르러서는 지난날의 잘못을 어찌 후회하지 않았으리오만, 그러나 화살이 활줄을 이미 떠났다면 돌아올 힘이 없듯이 미친 말이 입 밖으로 벗어났다면 그 어디로부터 거두어들일 수가 있겠는가? '말은 분쟁을 일으킨다'는 경계를 소홀히 여겨서야 되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 "무간지옥의 업을 부르지 않으려거든 여래(如來; 부처님)의 바른 법륜(法輪)을 비방하지 말라"하셨나니, 미친 사람이 도의를 무시하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듯 한 때의 계교를 멋대로 부려 성인(聖人)을 헐뜯고 배척한다면 그 후환을 어찌 하겠는가? 애닯다. 육신의 보잘 것 없음은 단지 큰 창고 속의 작은 돌피(wild millet)에 지나지 않고, 세월의 빠름은 다만 여인숙을 스쳐 가는 나그네와 같을 따름이라, 백년을 뜬구름처럼 사는 어리석은 사람도 모두가 꿈이요 허깨비임을 아는 일이 아니던가? 가난하고 부유하고 장수하고 요절하는 것이 모두 다 과거의 업인(業因)에 매여 있고, 현명하고 우매하고 고귀하고 비천함이 모두 다 일정한 분수가 있는 것이거늘, 그것을 얻은들 무엇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은들 무엇을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황금으로 만든 탄환은 볼품없는 새를 잡고자 함이 아니며, 상투에 꽂는 옥구슬은 하찮은 공(功)으로 주는 것이 아니니, 지각이 있는 군자(君子)라면 구차스런 명예 때문에 그 본성의 선함을 허물어 뒷날의 어렵고 괴로운 신세에 떨어지는 잘못을 스스로 짓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간화선의 열가지 경책 1.생사심을 해결할 발심을 하라. 오온이 개공함을 바르게 보고,바깥세계와 나의 심신이 모두 인연으로 이룩된 거짓존재일 뿐 그것을 주재(主宰)하는 실체는 없다는 사실을(제법무아) 똑똑히 보아야 한다. [장군죽비: 다만 이러하니 외경에 집착하는 마음을 삼가 거두어 수행에만 몰입할 것이니, 空함을 指示한 구경의 말씀의 이 도리도 필시 스스로 깨쳐서 알아야 할 것이니라] 2.의정을 일으켜라. 수행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지한 추구력(正精進)이다. 이 진지한 추구력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고 문득 크게 의심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진지한 추구력(의심)이 가슴에 뭉치지 아니하고는 큰 깨달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어느 큰 스님의 옛말에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닫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달으며,의심하지 않으면 아예 깨닫지 못한다."고 했다. 진리에 대한 진지한 추구력이 없이는 수행이 무의미 하다. [장군죽비: 이 화두를 통하여 그 도리를 간절히 알려고 의심하고 의심할 뿐이니라] 3.고요한 경계를 조심하라. 수행하는 이가 고요한 경계에 빠져들면 사람이 말라죽은 듯한 적막 속에 갇힌 것과 같게 된다. 더우기 이런 경계의 권태가 오래되면 잠자기를 좋아할 것이니, 자기가 이런 병통에 빠져있는 사실조차 알기가 어려워진다. 오직 육신의 생사를 깨치는 데 힘써서 자기가 고요한 곳에 있는 줄을 몰라야만 비로소 옳다 하겠다. 생사대사에서 고요한 모습을 구하려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으면 이야말로 된 것이다. [장군죽비: 공부하는 이들이 고요함을 찾고, 자기가 없다는것을 확인하고자 국집하는 병든 공부를 경계함이니라] 4.의단(疑團)을 깨뜨려야 한다. 공부하는 이는 몸과 마음이 온통 의심덩어리(疑團) 뿐이어서 세계를 하나로 뒤섞어 놓았다 할 만 해야 한다. 산을 보아도 산으로 보이지 않고, 물을 보아도 물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의심덩어리를 깨뜨리지 않고는 맹세코 마음을 놓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공부에 있어서 긴요하다. [장군죽비: 목숨을 걸고 이것을 알려고 간절하면, 등신같고 바보같을 것이나 이렇게 간절한 의심이 의심덩이(疑團)를 깨게되어 확철大悟하게 되는 것이니라] 5.의정과 하나가 되라. 간화를 하는 요체는 의정(疑情)을 일으켜 그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데 있다. 그러면 들떠 움직이는 경계를 굳이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허망한 마음도 억지로 맑히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맑아진다. 그리하여 6근(六根)이 자연히 텅비어 자유로와 진다. [장군죽비: 오직 알려는 의심 하나로 빠져들면 일체가 자연 끊어지는 것이니 망상을 일으키지 않으려 하고, 떨어버리려는 것이 곧 망상이니라] 6.아집(我執)과 집착(執着)과 알음알이(計較)를 조심해야 한다. 아집은 병(病)이 되고 집착은 마(魔)가 되며, 알음알이는 외도(外道)로 빠지게 된다. 결단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열심히 공부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폐단이 얼음 녹듯하여 말짱해질 것이다. 이른바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들뜨게 하면 그 자리에서 법체와 어긋난다." 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장군죽비: 이 병통을 갖지않게 되면 벌써 반은 이르렀니라, 급하고 긴요함이 목전에 닿았을때 놓고자해도 놓을수 없듯이 오직 그 하나만을 타파하고자 집중하는 것만이 생사를 뛰어넘느니라]] 7.항상 또렷하게 깨어있는 채로 참구해야 한다. 화두를 들고 공부하는 납자는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분명하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 속에서 허송세월만 하게 되니 단 10분을 참구하더라도 또렷하게 깨어서 경계에 흔들리지 않고 절실하게 공부해야 한다. [장군죽비: 멍하니 생각없음에 빠져 혼침이나 무기에 빠지지 말고 의심 하나에 또렷이 빠져 들어야 하느니라] 8.옛스님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스님의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공안은 오직 그 목적이 참구에 있는 것이지 이리저리 해석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공안을 해석하고 이리저리 옮겨서 참구하는 것은 결국 자기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이 자기의 본심을 가려서 영원히 미혹함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니 마땅히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도 버려야 한다. [장군죽비: 생각으로 풀려하면 意解로써 의리선이 되느니, 아는것 일체를 놓아버리고 오직 스스로 알려고만 간절하여야 하느니라] 9.화두를 드는 장소와 시간은 일체처와 일체시이다. 어찌 한곳에 오래 눌러앉아 외연(外緣)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定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이라 하니,납자는 모름지기 외형에 집착한 선을 하면 안된다. [장군죽비: 의심이 돈독하면 놓으려해도 놓아지지 않게 되나니 이렇게 되면 언제 어느때고 의정으로 오가게 되느니라, 이것이 화두삼매요 일행삼매 일상禪定인 것이니라] 10.언어.문구를 따지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문구(文句)를 따져 연구하거나 옛사람의 말씀(言語)이나 외우고 다녀서는 안된다. 이러한 일은 무익할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알음알이로 전락해 버린다. [장군죽비: 말을 배우고 익히려 하지 말라, 이것으로써 말재주를 부려 둥근구멍을 모난막대기로써 막는 재간을 부려 법을 그르치게 되느니라. ※ 없다(無), 비어 空하다, 밝다, 보는것이 그놈이다는 등의 아는것을 전제해서 구하려 하고 보려하는 공부는 처음부터 병든 공부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모르는 것을 깨달아 알려해야 하거늘, 목표를 먼저 알아 설정해 놓고 깨달으려 하는것은 공부가 전도된 것이니, 무엇이든 전제해 놓고 그것을 다시 찾아 가는것은 잘못된 어리석은 공부라 할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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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을 좀 읽어보고 싶은데요....타인을 배려하신다면 몇줄씩 끊어서 문단별로 나눠서 수정하여 올려주실 수 없으신가요
한 번에 다 못읽었습니다만, 이렇게 큰 노고의 자비심에 감동했습니다. 공부인이 삼아야 할 경책으로 삼아 프린트 해서 잘 새기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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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게시판에서 옮겨드립니다.()
ㅎㅎ^^()
왜 이리 답이 늦으실꼬.......... 다음 물을 것이 태산인데..... ()
ㅎㅎㅎ.. 과연....
여기에 답을 할 미련한 녀석은 세상에 없을텐데..,
그대가 한 행위와 다른점이 뭐가 있나요? ()
바쁘신 모양 ....^^()
뭘 물어 본 것인지 요지가 부정확하고 큰스님께 이런 깃으로여쭤 본 것으로 보이기 위한 것같은데 저는 정리해서 여쭤 본 것인데요?
이사람은 요지가 분명하고 정리도 잘 하여 올린 것입니다. 답해주시지오. ()
님의 아버님께나 해달라하세요. 글속에 답이 다 들어있는데 뭘답해달라는건가요?
답을 안하셔도 될것 같네요....내용보다도 상대의 입을 막기위한 간계..........
그러게요. 속내를 읽었으니...,
저런... 묘수님은 이익을 주는 도반이라 할 수 없소. '저 긴문장을 담박에 알아제쳐 보시오'라고는 못 하실 망정... 간계 그만 피우셔야겠습니다. ㅎㅎㅎㅎㅎ ()
나에게나 님에게나 누구에게나 글자 하나 없지만 수많은 글자를 만들 수도 있고 지울 수도 있는 이름하여 한 물건이 있소. 그 것을 찾아보시요. 위글들이 다 용해되어 되살아날 것이요.
진리추구님 진리에는 훈수가 없어요.....이심전심에는 글자가 아무리 많아도 본래 아유일권경을 안다면 거성님의 글도 역시 상방대광명입니다...묘수님 불인지묵성 과 전개무일자를 안다면 어떤글도 간계로 봄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옳고 옳지 않는것은 그대 마음에나 있지 그 어떠한 곳에도 없소이다. 그리고 이상한 문자 가져다가 안다면 모른다면으로 나서시는데 스스로 이무기가 되려는 것이오?
뭔말이 뭔말인지를? 상대를 배려하는 최소한의 자비심이 잇다면 알아듣는 말로(평이한 말) 표현해야 하는건 예의인데.,우주말하고 있으니
나무아미타불 .().
본문의 글을 올린 목적이 회원들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함인지, 특정회원들을 모욕하기 위함인지 의심하지 않을수 없네요. 공부인들이 진정 공부의 목적이 아니라면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기왕이면 큰 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
적어도 거성님께서는 그러리라 믿습니다. ()
이런 것 보다 크기로는 천지를 덥고도 남음이 있고 작기로는 겨자씨보다 더 작은 것인데 글자 하나도 없는 것인디 또한 무수한 글자를 만들기도 한다오. 그게 뭐게?
ㅎㅎㅎ.. 아마 진리추구님이 옆에 계셨다면 몽둥이가 약일터인데..... 곁에 없으셔 알려드릴 수 없음을 한탄이나 하시지요..(친절히) 후일 알려주지 않았다고는 마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