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국문학자/주시경
물매 정인량
한국의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언어 민족주의자. 호는 '한힌샘', '한흰메', '백천(白泉)', '일백천(一白泉)', '태백산(太白山)'. 초명은 '상호'.
황해도 봉산군 전산방 무릉골 출생으로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아버지는 주면석(周冕錫)[2], 둘째 큰아버지 주면진(周冕鎭)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주시경이 국어를 연구하게 된 계기는 어릴 때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한문 강독법에 의문을 품은데서 비롯된다. 당시한문 강독법은 한문 원문을 그대로 음독하여 달달 외우게 한 뒤 나중에 우리말 '토'를 붙여 무슨 뜻인지 풀어 주는 방식이었다. 이를테면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 →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와 같은 것. 주시경은 마지막 우리말 단계에서야 애들이 말귀를 알아듣는 것을 보고 한문과 우리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고 우리말의 중요성을 깨달아 국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4] 신학문을 접하고 이 때부터 국어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독립신문>이 출간될 때 순한글로 교정보는 일을 했으며 독립협회에도 참여했다가 서재필이 떠난 후에는 <제국신문>에글을 싣거나 이화학당의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의 한국어 강사, 상동청년학원 강사로 취직해서 살았다. 그 와중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으나 높은 학구열로 흥화학교 양지과(量地科), 정리사 수물학(數物學)을 3년 동안 공부했는데 양지과는 지리학, 수물학은 수학 분야를 의미한다. 엄청난 학구열로 여러 학교에서 강사를 맡게 되었는데 간호학교, 공옥학교, 명신학교, 숙명여학교, 서우학교의 교원이었으며 협성학교, 오성학교, 이화학당, 흥화학교, 기호학교, 융희학교, 중앙학교, 휘문의숙, 보성중학교, 사범강습소, 배재학당의 강사를 맡았다. 국어 교사만 했을 것 같지만 양지과와 수물학을 나왔기에 주산과 지리에도 능했다. 책가방을 쓰지 않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다녔는데 빡빡한 수업 일정 때문에 늘 바쁘게 뛰어다녔고 그로 인해서 보따리가 대차게 휘날리는 탓에 별명이 '주보따리'였다.
1907년 창립된 국문 연구소 등에서 활동하면서 국어 음운 연구와 국어 문법 등을 짜임새있게 정리했는데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하였다고 표현해도 된다. 호인 '한힌샘'을 비롯하여 문법 용어와 학술 용어들을 토박이말로 지으려고 처음으로 시도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문에 젖어 있던 사람들은 '두루때글'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마지막 저술서인 <말의 소리>는 1914년 발간되었으며 서구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방법론을 앞서 적용한 본격적인 문법서였는데 구조주의의 초기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국어학에서는 <말의 소리>에서 나오는 개념인 '고나'를 구조주의 언어학의 분절음 개념으로, '늣씨'를 형태소 개념과 동등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서구의 선진 이론들을 국어에 적용하려고 노력하였고 현대적 한국어 음운론 연구의 기틀을 다진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근세국어(17세기) 이후 음가를 잃은 아래아를 정서법에서 폐기하고 ㅏ 혹은 ㅗ로 환원시키자는 주장을 최초로 한 것이 바로 <말의 소리>였기에 현대 남북한의정서법에서도 의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말의 소리>의 개념 체계 중 여전히 국어음운론 체계에서 좀비처럼 남아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음소와 운소를 각각의 소(素)로 이해한 것이 <말의 소리> 당시의 최신 이론이었으나 언어학에서는 구조주의 중후반 이후 운소를 소가 아닌 자질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 국어학에서는 여전히 운소 개념을 고수하고 있어 현대의 최신 언어학과의 괴리가 심하다.# 이것은 주시경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주시경 정신을 새 시대에 맞게 발전시키지 못한 후학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말의 소리>의 논리 중 오늘날 국어학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 주시경은 <말의 소리> 이전까지 형태 음소적 표기를 지향했으나 <말의 소리>에서 이를 번복한다. 즉, 초기 주시경 이론은 오늘날 사용되는 한국어 표기법과 같이 형태를 살려 쓰고 소리에 이끌려 쓰지 않는다. 예컨대, "이름이", "끝", "까닭" 이라고 쓰는 것이 바로 주시경 이론 초기의 정서법이다. 그러나 주시경은 <말의 소리>에서 소리에 이끌린 표기를 주장한다. 예컨대, "이르미", "끗", "가닥"으로 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국어학계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이론이다.
1914년 7월 27일 급작스러운 복통을 호소하다가 사망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콘텐츠에 이정선 박사가 집필한 주시경 항목(링크)현재 삭제됨에는 사인에 대해서 정확히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대부분은 급체로 인해 사망했다고 알려져있다.향년 39세라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요절이었으며 이로 인해 한국 국어학계는 아까운 인재를 보내야 했다. 제자인 한글학자 열운 장지영은 주시경 선생 50주기 추도식에서 통곡하며 스승의 요절을 애석해 했으며 장지영이 쓴 <주시경 회고록>은 1990년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는데 여기서도 가난했던 주시경 이야기를 안타깝게 언급했다. 그의 시신은처음에는 서대문 밖 수색 고택골(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신사동)에 안장하였다가 1960년 한글학회의 주선으로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장현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로 이장[8] 하였고 1981년 12월 12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재이장하였다. 남양주에 묻혔을 때의 묘비는 서울 동대문구의 세종대왕기념관에 남아 있다.
(출처/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