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여 만에 다시 수도권으로 산행을 나선다.
오늘 목적지는 유명산과 용문산.
선어치고개에서 시작하여 소구니산과 유명산, 그리고 용문산을 같이 오르는 산행이다.
들머리인 선어치고개.
하늘이 서너 치 정도 보인다 하여 선어치(서너 치)고개로 불린다는 이야기.
잠시 급경사 등로를 올라서니 잔설이 보인다.
농다치고개 갈림길을 지나,
소구니산에 도착.
양평군과 가평군의 경계를 이루는 소구니산은 북쪽으로 증미산, 동쪽으로는 유명산이 위치하고 있어 주변 산들과 연계하여 산행을 하는 산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소구니산에서는 가파르게 내려서고,
암봉도 우회한다.
소구니산에서 약 20분 걸려 능선 임도에 올라서는데 좌측으로 약 300m 지점에 위치한 유명산에 다녀와서 반대방향으로 진행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산 정상에서 말을 길렀다고 해서 마유산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이름은 1973년 엠포르산악회가 국토 자오선 종주를 하던 중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산을 발견하고 산악회 대원 중 진유명이라는 여성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용문산 방향으로 바라보니 미세먼지 탓에 뿌옇기만 하고...
대부산 방향으로 임도를 따라가면 활공장이 나온다.
활공장에서 돌아 본 소구니산.
전방에 대부산이 보이지만 역시 흐릿하다.
오늘은 미세먼지 탓에 조망은 영 아니다.
조금 내려와서 돌아본 유명산과, 활공장의 억새밭.
산길로 바로 직진하면 임도를 따라 우회하지 않아도 된다.
계속 임도를 따라 가는데 가끔 진흙탕이 된 곳도 나타나고,
멀리 용문산이 보이지만 뿌옇기만 하다.
그늘진 곳에는 아직도 얼어붙은 눈길이 나타나는데,
배너미고개에 도착하며 유명산 산행이 끝나고 이제 용문산으로 향한다.
유명산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렸다.
한동안 오르락 내리락하며 등로를 이어가는데 눈길과 마른길이 교대로 나타나고,
다시 눈길을 한동안 지나면,
용문산 바로 아래에 도착하는데 정상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어 우측으로 올라가 좌측으로 봉우리를 돌아 한참을 가야 한다.
경사로에는 내린 눈이 얼어 있어 조심해야 했다.
잠시 지나온 길을 뒤돌아본 후,
장군봉 갈림길에 도착한다.
우측이 장군봉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별로 볼 것이 없어 그냥 좌측 용문산 정상 방향으로 간다.
갈림길에서 용문산으로 향하는 등로는 제법 험한데다 봉우리를 1km나 빙 돌아가게 되어 있어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곳곳에 너덜길도 있어 자칫 잘못하면 발목을 삐기 쉽상이라 신경을 써야 했고,
녹지 않은 잔설이 얼어 붙은 곳도 있었다.
정상 아래 삼거리에 도착했다.
좌측 계단으로 올라 간다.
정상석이 있는 곳에 올랐다.
'용이 드나드는 산', '용이 머무는 산'이란다.
용문산의 원래 이름은 미지산(彌智山)이라고 전해온다. '미지'는 미리(彌里)의 옛 형태이고, 미리는 경상과 제주지방의 '용'의 방언이며 '용'의 옛말인 '미르'와도 음운이 비슷하여 '용'과 연관이 있다고. 즉 미지산이나 용문산이나 뜻에서 별차이가 없으며 언제부터 '미지산'에서 '용문산'으로 바뀌어 불렸는지 정확치 않으나 조선 태조 이성계가 용이 몸에 날개를 달고 드나는 산이라 하여 '용문산'이라고 칭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단다.
'석가봉', '아난봉'과 같이 용문산 불교 3봉인 가섭봉은 부처님에게 염화시중의 미소를 보낸 '마하가섭'의 '가섭존자'를 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봉인 가섭봉(1157m)에 이어 석문(1124m). 장군봉(1056m), 백운봉(940m), 함왕봉(887m), 도일봉(864m), 중미산(801m)의 순으로 준령이 펼쳐져 있다. 1831년 정조 때 초의선사가 용문산을 여행하며 남긴 일기에서 '수월암(새수골)에서 하루를 자고 가섭봉에 올라가서 운필암과 상원암을 거쳐 용문사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9세기에 용문산 정상이 가섭봉으로 통칭되었음을 알수 있다.
정상에서 한동안 쉰 후 하산한다.
용문사 쪽을 내려다보니 너무 흐릿하여 아예 보이질 않을 정도다.
삼거리로 돌아와 용문사 방향으로 내려서는데 등로가 엄청 험하다.
대부분이 암릉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사가 엄청 심하여 조심을 해야 했다. 비록 곳곳에 계단이 설치되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조망처에서 지나온 용문산을 돌아보고,
바윗길을 이어 내려간다.
마당바위갈림길에 도착.
마당바위를 보기 위해 좌측 계곡으로 내려간다.
내려서자 마자 빙판으로 변한 눈길이 기다리는데 아이젠을 찰까 말까 하다가 그냥 내려가보기로 했는데 하산길이 장난이 아니었다.
얼음뿐만 아니라 바위도 무척 미끄러웠다.
계곡에 도착하며 얼음길은 끝나지만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 역시 바위길이 대부분.
마당바위에 도착한다.
하나의 바위가 집마당처럼 넓고 평평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평균 높이 약 3m, 둘레 19m정도로 용문산 주차장에서의 거리는 약 3km정도이다. 계곡길을 이용하는 등산객들의 쉼터로 바위 위에 올라 땀을 식히는 장소로 가을에는 주변 단풍이 아름다워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기에 좋은 장소라고 하네.
이 쪽은 처음인데 계곡이 제법 깊고 웅장하여 여름 피서지로는 아주 좋은 곳이라 하겠다.
계곡은 봄소식을 전해 주지만,
아직 꽁꽁 언 얼음 옆에는 굴러 떨어져 반으로 갈라진 바위도 보이고...
곳곳에 낙석주의 표지판이 있지만 정작 돌이 떨어지면 피할 데가 있을 지...
능선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 잠시 내려가면,
어마어마한 은행나무가 반겨준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소원을 적어놓은 노란 종이가 마치 가을에 노란 물이 든 은행잎처럼 자리를 지키고...
은행나무 하단에 달린 혹.
용문사.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 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 선걸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정전, 관음전, 요사, 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를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 부도 및 비와 천연기념물 제30호 은행나무가 있다.
범종각.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하며 산행을 끝낸다.
도상거리 18km, 7시간 걸렸다.
비록 미세먼지 탓에 조망은 별로였지만 따뜻한 날씨 덕에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던 산행이었다.
용문산 정상을 앞에 두고 한참을 빙 돌아가는 바람에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듯 버티고 있는 겨울과 서둘러 오는 봄날씨를 함께 즐겼으니 이만하면 80점은 되지 않겠는가!
식당에서 하산주로 마셨던 지평막걸리는 꽤 좋았다.
첫댓글 믿고보는 삿갓거사님 산행기 덕분에 유명산 ,용문산
즐감합니다
대단 하십니다
18km!!! 저는 이제 엄두도 못낼거리 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안산 즐산 하시기 바랍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감사합니다.
차근차근 걷다 보면 금방 익숙해지겠지요.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