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중천
- 냉하상 著
제1권
序章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주(周)나라가 서주(西周)에서 동주(東周)로
이어지고, 동주는 다시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로
이어진다.
―천하구종(天下九宗)!
전설의 시작은 이때부터 야기된다.
진(秦)의 시황(始皇)이 대륙을 통일하기 전, 우주간(宇宙間)의
궁극(窮極)이라는 아홉의 기운(氣雲)이 다시 아홉 개의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니…….
천황종(天皇宗).
지패종(地覇宗).
마군종(魔君宗).
사혈종(邪血宗).
연화종(蓮華宗).
현무종(玄武宗).
창왕종(蒼王宗).
인제종(人帝宗).
요미종(妖美宗).
이들 아홉인 것이다.
전설은 다시 이들 아홉을 천하구종(天下九宗)이라 칭하도다.
이들은 만상(萬象)의 뿌리이며 또한 그 시작이고 궁극이었던 바,
대륙이 그 형상을 찾아가듯 천하만상 또한 천하구종에 바탕을 두고
각기 수백 수천 가닥으로 퍼져 가도다.
천하구종!
인간의 몸으로 그곳에 들 수는 없으되 인간 중에 그곳에 드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닌, 곧 하늘[天]이라 일컬음을 받아야
마땅하리라.
지패종(地覇宗)은 대륙을 지배함을 뜻하며,
마군종(魔君宗)은 천하마(天下魔)의 조종(祖宗)이며,
사혈종(邪血宗)은 이 땅에 악(惡)과 피의 역사를 이루며,
연화종(蓮華宗)은 만상(萬象)의 어버이이며,
현무종(玄武宗)은 만사(萬事)를 주관하며,
창왕종(蒼王宗)은 만물(萬物)의 주(主)가 되며,
인제종(人帝宗)은 인간을 어버이로 둔 자들의 가장 위에 설 것이며,
요미종(妖美宗)은 모든 아름다운 것들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
천황종(天皇宗), 그것의 정한 바는 기록에 적혀 있지 않으매
하늘[天]이 안배함이로다.
천하구종사(天下九宗史)!
그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인세(人世)에 나타난다면 역사의 흐름이
바뀌어질 것이니…….
―들어라! 역사는 천하구종을 위한 시작이었으니 이후 그들이
도래하는 날 그들은 뿌린 씨앗을 거두리라. 천하만사(天下萬事)가
맥맥이 이어온 역사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음이노라.
이 천하구종사는 대륙의 근본이 되는 전설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천하구종사 가운데 단 하나만이라도 인세에 나타난다면 어쩌면
그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종말을 뜻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천하구종사.
살아 있는 대륙의 신화적(神話的)인 전설이다.
* * *
대륙풍(大陸風).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대륙이 생겨났을 때부터 불어온 대륙풍처럼 중원에 맥맥이 이어져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전설.
하늘[天]이 만들었기에 세세토록 천하인들은 그것을 잊지 못했다.
그것은 천하구종(天下九宗)의 주인이 될 인간들의
전설이었으므로…….
―천궁구종지맥(天穹九宗之脈)!
천하구종사가 대륙에 존재하는 한 천궁구종지맥의 전설 역시 존재할
것이다. 천하구종의 문(門)은 그들 천궁구종지맥에 의해서만 열릴
것이므로…….
그들이 인세에 나타나지 않는 한 천하구종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약속된 안배였으므로…….
천궁천황지맥(天穹天皇之脈).
천궁지패지맥(天穹地覇之脈).
천궁마군지맥(天穹魔君之脈).
천궁사혈지맥(天穹邪血之脈).
천궁연화지맥(天穹蓮華之脈).
천궁현무지맥(天穹玄武之脈).
천궁창왕지맥(天穹蒼王之脈).
천궁인제지맥(天穹人帝之脈).
천궁요미지맥(天穹妖美之脈).
있으매 없는 듯하며, 없으매 있는 듯한 전설.
천하구종과 천궁구종지맥은 끊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상대적(相對的)이다.
그 오묘불가사의한 함수관계가 풀리는 날 역사와 우주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그 운행(運行)을 중지할 것이다.
아홉 사람의 이야기.
사람이 아닌 신(神)의 이야기.
인간이 아닌 신(神)이기에 겪어야 하는 슬픔.
인간은 잊을 수 있지만 신(神)이기에 잊을 수 없는 아픔.
인간들은 웃을 수 있는 일에 그들은 신(神)이기에 번뇌해야 한다.
지금부터 전개되는 이야기는 운명적으로 천궁구종지맥을 타고난
아홉
기재들의 뼈에 맺히는 아픔과 우정(友情)의 이야기이다.
아픔과 우정의 이야기…….
1. 천휘태자(天煇太子)의 탄생
"와아아……."
"와아아…… 대명(大明)의 토벌군(討伐軍)은 무적(無敵)이다."
"우와아…… 패황(覇皇) 건무제(建武帝)의 황군(皇軍) 앞에서는
오랑캐들도 오합지졸이다."
굉렬한 함성.
그것은 중원에서 수만 리나 떨어진 이국(異國)에서 터지고 있었다.
오오…… 보라! 드넓은 대지를 뒤덮은 수십만 명의 군사를…….
그들은 오직 한 사람 천자(天子)를 위해서만 생명을 초개처럼
버리는
대명의 군사들이다.
이곳은 옥문관(玉門關)에서도 팔만 리 이상이나 멀리 떨어진
부단국(不丹國).
지난 오 년간 변황(變荒)의 대소국가(大小國家) 이십여 국을 정벌한
대명의 황제 건무제.
그는 남달리 야망이 컸으며 또한 패기가 하늘을 능가하는 대명
제일의 패황이었다.
그런 건무제가 직접 지휘하는 삼십만 명의 대명군사들은 지금
파죽지세로 부단국(不丹國)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한 사람.
하늘[天]의 아들[子]이라 불리는 사람.
천자 건무제.
그는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 속에 우뚝 서 있었다.
금관(金冠)과 금갑(金甲)을 입고, 우수에는 태조(太祖)
홍무제(洪武帝)가 석년에 대륙을 평정한 대황신검(大皇神劍)을 굳게
쥐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사십오륙 세 가량이었으며 용모는 극히 위맹하며
근엄했다.
그의 패기를 대변하듯 검은 수염이 가슴으로 길게 드리워져 바람에
나부꼈다.
송충이처럼 굵고 검은 눈썹과 불타는 두 눈은 대지를 삼킬 듯한
야망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바로 당금 대명황제인 건무제인 것이다.
부단국을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이미 그가 정벌한 대소국가들은 무려
이십이 개 국.
하나 그의 야망은 끝이 없었다.
건무제의 좌우에는 각각 두 사람의 장군(將軍)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구 척의 키에 사자처럼 용맹하게 생긴 팔십여 세의 백전노장.
그는 금기대장군(金旗大將軍) 사마표(司馬飄)였다.
다른 한 명은 매우 청수한 인상으로 강직한 성품을 지닌 듯했다.
그 역시 팔십여 세의 노장군인 행군사마대군수(行軍司馬大軍首)
위지승(尉遲昇)이었다.
그들 두 장군은 건무제의 그림자와 같은 인물들로서 선대(先代)
때부터 황실의 충신이었다.
그들을 꾸짖을 수 있는 사람은 건무제밖에 없을 정도로 그들의
위세는 엄청났다.
"폐하, 부단은 반 시진 안에 무너집니다. 다음은 어디이옵니까?"
순간 건무제의 두 눈빛이 가볍게 일렁였다.
행군사마대군수는 황제의 그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황제의 독특한 눈빛이었다.
또한 새로운 정벌욕을 나타내는 눈빛이기도 했다.
"다음 목표는 파사국(巴沙國)이다."
굵고 낮은 음성이 두 장군을 대경하게 만들었다.
"파사국이라 말씀하셨습니까?"
파사국!
대명에 버금가는 서역의 대국(大國).
선대(先代)로부터 파사국과는 친분을 쌓아오던 대명이었다.
그것은 불가침(不可侵)의 교류였다.
하나 건무제는 지금 그것을 깨려 하는 것이다.
행군사마대군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것은……."
그는 황제의 말에 이의를 제기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파사국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순간 건무제의 눈썹이 꿈틀 역팔자로 꺾였다.
"……."
위지승은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그때 한 명의 전령군사(傳令軍士)가 황급히 달려왔다.
"폐…… 폐하……."
건무제는 대명의 황군에게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피흘리며
죽어가는 부단국 군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령군사는 건무제의 면전에 몸을 던지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한
장의 황지(皇紙)를 공손히 올렸다.
건무제는 묵묵히 황지를 펴 읽어가다가 표정이 돌변했다.
순간 건무제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만면에 더할 수 없는 기쁨을
떠올렸다.
"으하하핫! 황후(皇后)가 태자(太子)를 생산하다니…… 핫핫핫……."
건무제의 황후인 명정황후(明靜皇后)가 태자를 생산한 것이다.
금기대장군 사마표와 행군사마대군수 위지승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동시에 건무제의 면전에 오체투지했다.
"폐하, 앙축하나이다."
건무제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핫! 고맙도다. 지난 이십 년간 황통(皇統)이 끊김을
걱정하였는데 황후가 태자를 낳아 주다니……."
건무제는 자신이 변황 이십여 나라를 속국으로 만든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만끽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우렁차게 외쳤다.
"천명(天名)하노니 이후 짐의 아들은 천휘태자(天煇太子)
주운악(周雲岳)이라 불릴 것이로되 이는 곧 대명을 이을 이름이로다."
천휘태자(天煇太子) 주운악(周雲岳)!
그때 하늘을 허물듯한 삼십만 군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와아아…… 부단의 왕(王)이 항복했다. 와아아!"
"와아아! 황제 천천세(天天世)!"
"황제 만만세(萬萬歲)! 와하하……."
그때 팔기대장군(八騎大將軍) 서문익(西門翼)이 한 명의 노인을
데리고 바람처럼 나타나 건무제 면전에 부복하였다.
"폐하, 이 사람은 부단국왕(不丹國王) 율하수(律河首)로서
항복하였기에 데려왔습니다."
건무제는 웃는 얼굴로 부단국왕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십이 개 국을 정벌하는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본 적이 없었다.
부단국왕은 풍채가 매우 좋고 강직해 보였으나 건무제를 바라보지는
못했다.
건무제는 나직한 일성을 내뱉었다.
"부단은 속국임을 인정하는가?"
부단국왕은 더욱 깊숙이 부복하였다.
"패한 이상 대명황제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바이오."
그도 남아다운 기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건무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짐에게 충성할 필요는 없다. 하하핫…… 짐은 부단을 천휘태자에게
선물로 주려 한다. 이는 천휘태자의 탄생을 기뻐하는 짐의
진심이로다."
부단국을 천휘태자에게…….
"태자라 하심은……?"
대명에 황손(皇孫)이 없음을 아는 부단국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부단은 천휘태자의 이름 앞에서만 굴복하여야 한다."
그때서야 삼십만 군사들은 태자의 탄생을 알게 되었다.
"와아아아…… 천휘태자 만세!"
"와아아! 황제폐하 만만세……."
건무제는 흡족한 표정으로 그들을 쓸어보았다.
'허허…… 명(明)을 떠나온 후 일 년에 한 번씩 다녀왔을 뿐인데
태자를 보게 되다니…….'
그렇다. 그는 지난 오 년간 황실에 불과 네 번 다녀왔을 뿐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자신이 생명처럼 아끼는 명정황후를 안았고 그것이
그에게 이처럼 큰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돌연 건무제는 삼십만 군사를 내려다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힘을 낼지어다. 대명의 황군이여! 이후 파사국을 정벌한 다음
우리는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와아아…… 황제폐하 만만세!"
"와아아! 천휘태자 천천세……."
건무제는 내심 흐뭇하게 중얼거렸다.
'허허…… 파사국을 정벌하여 천하를 평정한 이 아비의 모습을
태자에게 보여 주리라.'
그는 아직도 부복해 있는 행군사마대군수 위지승을 바라보았다.
"위지대군수."
"천명을 받드옵니다."
건무제는 다소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는 곧 본국으로 돌아가 태자에게 황통 계승의 표시인
금룡적황대각인(金龍嫡皇大刻印)을 새겨 주게."
금룡적황대각인!
그것은 오직 황통을 이어갈 태자에게만 시전되는 황실의
비전대법이었다.
만약 어떠한 급변이 발생한다 해도 금룡적황대각인이 새겨진
사람만이 다음대 황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금룡적황대각인은 모두 다섯 명의 충신들에 의해 시술된다.
각기 한 방면에만 달통한 그들 다섯 명이 모여야만이
금룡적황대각인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행군사마대군수는 그 다섯 명 중에 한 사람이었다.
"천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위지승이 복명하자 건무제의 입가에는 흡족한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또한 대보국충장군(大補國忠將軍)의 한 살 난 여식을 태자의
정혼녀로 삼을 것이다. 위지대군수는 그것을 어찌 생각하는가?"
위지승은 황송한 듯 더욱 깊이 부복했다.
"대보국충장군의 딸은 이미 한 살의 경륜에 천자문(千字文)을 뗀
당대의 재녀(才女)로 가히 태자마마와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닐 수
없으며
대보국충장군에겐 무상의 은혜가 아니겠사옵니까?"
건무제는 본국을 떠나온 뒤 가장 큰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핫! 맞다. 짐은 오래 전부터 그 여아를 탐내고 있었노라."
그의 웃음소리가 이역(異域)의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금기대장군 사마표는 묵묵히 건무제의 옆에 시립해 있었다.
하나 행군사마대군수 위지승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어쨌든 부단은 대명의 속국이 되었고, 건무제는 꿈에도 그리던
태자를 보았는데…….
* * *
광대무변한 대륙.
하루에도 수백 수천 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곳.
한데 괴변이 아닐 수 없었다.
천휘태자 주운악, 그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태어난 아이는 불과 네
명.
그 광활한 대륙에서 같은 때에 태어난 아이가 불과 다섯 명인
것이다.
운명(運命).
다섯 아이는 운명의 안배였는데…….
그들 이전에 태어난 또 다른 네 명이 있었다.
전대의 네 명과 지금의 다섯 아이.
그것은 아홉[九]의 의미가 지니고 있는 전설과 운명의 시작이었다.
전설과 운명의…….
"숨이 끊어졌느냐?"
나직한 음성.
그 음성 속에는 물씬한 살기와 음악(陰惡)함이 배어 있었다.
"벌써 열 번도 더 확인했습니다. 틀림없이 죽었습니다. 난 지 일
년밖에 안 되는 아이라 부시절명지독(腐屍絶命之毒)에 뼈와 내장이
완전히 녹아버렸습니다."
대답하는 음성 역시 사이하기 짝이 없었다.
"좋아…… 떨어뜨려라."
두 인물.
그들은 사위를 죽음같이 침식시킨 흑야(黑夜)처럼 검은 흑의 입고
있었다.
그 중 한 인물의 품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안겨 있었다.
벌거벗은 어린아이.
아이는 태어난 지 대략 일 년 정도 되어 보였다.
그리고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금빛 비단강보에 싸여 있었다.
돌연 아이를 안고 있던 인물이 아이를 멀리 집어던졌다.
휘익!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까마득한 벼랑이었다.
쏴아아―
철썩!
발 아래에는 으르렁거리며 흐르는 거센 강물이 있었다.
순간 비단강보에 싸인 아이는 끝도 보이지 않는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죽은 지 삼 일이나 지난 아이였다.
거센 파도가 아이를 삼켰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두 사람 중 깡마르고 입술이 푸르스름한 중년인이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됐다. 이로써 막주(幕主)님의 계획은 완벽해졌다. 대명의
천휘태자는 죽었지만 죽은 것이 아니다. 대공자(大公子), 그분께서
이제
대명의 태자가 되는 것이다. 죽은 태자와 대공자가 우연히 생년월일이
똑같으니……."
한순간 강바람이 부는가?
스스스―
두 사람은 미세한 미풍만을 남겨두고 유령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숱한 의문만을 남긴 채…….
태자의 죽음.
그리고 태자와 생년월일이 똑같은 대공자의 변신.
이렇게 은밀하고 암울한 가운데 그 피비린내나는 서막(序幕)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운명은 오래 전부터 피의 서막을 올려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제물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아아…… 안지 않겠다. 그 아이는 안지 않겠다."
여인.
슬프도록 고결한 여인.
화려한 비단 화의(華衣)를 입었으며 머리를 궁장으로 틀어올린
삼십오륙 세 가량의 절세미녀.
그린 듯이 섬연한 아미, 천공을 가를 듯한 오똑한 콧날, 웬일인지
파랗게 질려 있는 한 떨기 꽃잎 같은 입술, 그리고 두 눈.
한데 그녀의 눈빛은 사람의 이지를 마비시킬 듯 깊고도 그윽한 것이
아닌가?
무한한 혜지를 담고 있는, 약간은 겁에 질린 듯한 두 눈빛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여인은 침상에 넋을 잃고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한데 돌연 여인이 침상에 얼굴을 묻으며 오열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흐흑…… 나는 안다. 태자의 몸에 새겨진 금룡적황대각인이
아니더라도…… 지금의 태자가 진짜 태자가 아님을……."
태자?
그렇다면 이 여인이 당금 대명황제인 건무제의 황후 명정황후라는
말인가?
그렇다. 이 절세미인이야말로 건무제가 생명처럼 아끼는
명정황후이며 천휘태자의 생모가 되는 여인인 것이다.
한데 그런 그녀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슬피 오열하는 것이란
말인가?
"흐흐흑……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어찌 모르겠는가? 한 번만
안아보면 아는 것을…… 그 아이는 절대 태자가 아니야……."
명정황후는 침상보를 움켜쥐며 흐느끼다가 돌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쩌면 주상께서도 속고 계신지 모른다. 어서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녀는 황급히 문쪽으로 다가갔다.
순간 명정황후는 휘청하더니 축 늘어졌다.
"아……."
다음 순간 실내에 한 명의 인물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스슷―
입구는 분명히 막혀 있는데 도대체 어디로 들어온 것인가?
문득 신비인은 나직한 음소를 흘렸다.
"흐흐…… 결국 알고 말았군. 하나 그것이 황후 당신의 명을
재촉하는 지름길이었다."
신비인,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흑포를 뒤집어쓴 위인이었다.
일견하기에도 범상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순간 흑의인이 슬쩍 소매를 뒤집자 명정황후는 이끌리듯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기가 막힌 허공섭물(虛空攝物)의 상승무공이었다.
흑의인은 명정황후를 옆구리에 끼었다.
"흐흐…… 그대는 대공자를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 노부
칠흑환객(七黑幻客)에 의해서……."
스스스―
찰나 그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꺼지고 말았다. 원래
나타나지도 않았던 것처럼…….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극히 완벽한 음모가…….
건무제.
그는 파사국(巴沙國)을 손쉽게 정복하고 한 달 전 변황에서
돌아왔다.
한데 그의 심기는 편치 못했다.
건무제는 지금 용상(龍床)에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천휘태자, 으음…… 그 아이가 가짜라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오오! 건무제의 친자(親子)인 천휘태자가 가짜라니…….
건무제의 두 눈은 암울했다.
'금룡적황대각인…… 지금 천휘태자라고 내세워진 아이에게는
금룡적황대각인이 분명히 있기는 있다.'
건무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나 그 아이의 금룡적황대각인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오분지
삼은
완벽하나 오분지 이는 틀렸다. 으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건무제는 심기가 어지러웠다.
'그렇다고 그들 다섯 명이 실수를 할 리도 없지 않은가? 태자의
불완전한 금룡적황대각인…… 그것은 천휘태자가 가짜임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금룡적황대각인은 태조 이래로 내려오는 극비이다.
조금만
틀려도 진짜 태자조차 황통을 계승할 수 없는 터, 으으…… 가짜……
천휘태자가 가짜라니…….'
금룡적황대각인을 새기는 다섯 충신.
그들이 실수를 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보국충장군(大補國忠將軍) 담중학(潭中鶴).
행군사마대군수(行軍司馬大軍首) 위지승(尉遲昇).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익(慕容翼).
구문제독(九門提督) 와룡관(臥龍觀).
어사태부(馭事太父) 황교청(黃交淸).
대명의 주춧돌인 그들 오인(五人).
건무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만약 천휘태자가 가짜가 확실하다면 그들 다섯 명 중에
금룡적황대각인을 완벽하게 새겨넣은 세 사람이 배신했다는 말이
아닌가?'
엄청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건무제는 분노로 부르르 전신을 떨었다.
'대체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이 역모(逆謀)를 꾸미고 있다는
말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결코 그들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번쩍!
건무제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음모다! 그것도 가공한…… 으음…….'
느낄 수 있었다.
무어라고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파사국이 제대로 반항조차 하지
않고
무력하게 대명의 속국이 되던 순간부터 건무제는 뭔가 기이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짐이 황궁을 비운 지난 오 년 동안에 황궁은 뭔가 변했다. 이런
분위기는 짐이 오 년 전에 느끼던 그런 편안한 것이 아니다. 이
변모는
분명 짐이 가짜라고 여기는 태자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황제(皇帝)!
외로운 용상에 앉아 있는 고독한 황제만이 감지할 수 있는 미묘한
느낌.
'짐이 느끼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면 태자는 가짜일 것이며, 다섯
명의
충신들 중에 세 명은 짐을 배반한 것이다.'
명철한 추리와 판단.
과연 대명의 황제다운 날카로움이었다.
'한데 누가 배신했는지, 누가 아직 짐을 버리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아낸다는 말인가?'
그렇다. 대놓고 묻는다면 자신이 태자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음모의 배후 조종자에게 선공(先攻)을
뺏기는 결과인 터…….
그자가 만약 황제를 시해하고 한 살 짜리 가짜태자를 황제 자리에
앉히게 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가짜태자를 만들어 가짜황제까지 만들려는 인물이라면 능히
가짜태자의 배후에서 섭정(攝政)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
건무제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고립(孤立)인가? 변황 이십삼 개 국을 정복한 대가가 고작
음모였다는 말인가? 허허…….'
그는 자꾸 웃었다.
그 웃음은 건무제가 황도(皇道)를 익힐 때부터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어야 했던 고독한 황제의
웃음이었다.
창밖의 푸른 창공을 올려다보는 건무제의 얼굴빛은 어둠처럼
암울했다.
"주상……."
주상(主上).
황궁 내에서 건무제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순간 건무제는 흠칫했다.
'황후…….'
가슴이 저며들었다.
천휘태자가 가짜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할 황후가 가엾기
짝이
없었다.
'당분간 황후에겐 이 사실을 비밀로 덮어두자. 가짜를 진짜로 알고
품에 안아야 하는 모순(矛盾)은 곧 없어지리라. 짐에 의해서…….'
건무제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면전에 다소곳이 서 있는 명정황후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건무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 오시었소?"
명정황후는 날아갈 듯이 절을 올렸다.
"주상과 같이 태자를 보러 갈까 해서요."
"태자를……?"
순간 건무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호호…… 오늘은 한 번도 태자를 보러 가시지 않으셨잖아요? 해서
주상과 함께 태자를 보러 갈까 해서 왔습니다."
건무제의 송충이 눈썹이 꿈틀 꺾였다.
'좋아! 일단은 그들의 뜻대로 움직여 주겠다. 하나…….'
그는 곧 표정을 부드럽게 고치며 용상에서 일어났다.
"허허…… 그러고 보니 짐도 태자가 보고 싶구려."
그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대전의 입구로 먼저 걸어갔다.
'황후를…… 그리고 대명을 위해 속아 주리라.'
그는 이를 지그시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명정황후는 그의 뒷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두 눈에서 섬뜩하도록 차가운 안광이 흘러나왔다가
찰나간에 사라졌다.
그것은 명정황후의 눈빛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는 그런
눈빛이었다.
하나 건무제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전혀…….
* * *
강(江).
강의 이름은 장강(長江).
드넓다.
아니, 그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강폭이 넓었다.
이곳은 황제가 계시는 금릉(金陵)에서 백여 리나 멀리 떨어진
곳이다.
강물은 더없이 잔잔했다.
따가운 햇살이 수면에 비치어 마치 영롱한 옥구슬을 깔아놓은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눈부셨다.
강변의 한적한 갈대숲.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한 명의 죽립인이 앉아 있었다.
일신에는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쳐 몹시 문약해 보이는 서생
차림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특징이 없었으며 단지 죽립을 썼다는 것이 특이할
뿐이었다.
그는 석상처럼 앉은 자세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돌이
되어버린 듯…….
죽립인의 시선은 강에 고정되어 있었고,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하나의 낚싯대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각이 지났지만 죽립인은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변화가 있다면 단지 불어오는 강바람에 가느다란 낚싯대 끝이
간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뿐.
한데 돌연 분명 낚싯대가 부러질 듯이 휘청했다.
스으윽
찰나 죽립인은 낮게 부르짖었다.
"왔다!"
무엇이 왔다는 말인가?
월척이라도 걸렸다는 말인가?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그가 한순간 믿을 수 없이 빠른
동작으로 낚싯대를 잡아챘다.
파아앗―
순간 낚싯대는 그의 수중으로 딸려왔다.
위이―
오오…… 한데 낚싯줄을 보라!
낚시바늘에 하나의 물체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물에 퉁퉁 불어터진 사람의 시신이었다.
그것도 한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였다.
아이의 전신은 검게 변색되어 있었다.
아이를 감싸고 있는 비단강보도 마치 걸레처럼 너덜너덜했다.
오오…… 이처럼 처참하게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죽립인은 망설임없이 죽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순간 그는 전신을 한차례 격하게 떨었다.
부르르―
"으으…… 이럴 수가! 이처럼 처참하다니……."
죽립을 뚫고 이글거리는 안광이 폭사되었다.
돌연 그는 아이의 시신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뒤로 물러섰다.
이어 아이의 시신을 향해 구배(九拜)를 올렸다.
"크흑……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뵈어야 하다니……
크으……."
악문 그의 입술 사이로 선혈한 피가 스며나왔다.
대체 그와 아이와는 어떤 관계란 말인가?
죽립인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
스스스―
사사삭!
갈대가 바람의 희롱에 흥겨워 낮은 비명을 질렀다.
죽립인은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드러난 그의 얼굴.
누렇게 뜬 병약한 얼굴이었지만 갸름하며 준수한 모습이었다.
악다문 입술과 타는 듯이 이글거리는 두 눈.
그의 표정은 그의 문약해 보이는 외모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문득 그의 입술 사이로 처절하리만큼 싸늘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일 년…… 지난 일 년간 나는 이곳에서 단 한 걸음도 벗어나 지
않았다. 그것은 오직 오늘이 있기를 갈망해 왔기 때문이다."
오늘이 있기를…….
"이제 기다리던 분을 만났다. 이분께선 죽은 것이 아니다."
이미 죽었어도 백 번은 완전히 죽은 아이를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니, 무슨 말인가?
죽립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천하에서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아버님과 나
와룡빈(臥龍彬)뿐…… 이분께선 한 번 죽어야 다시 완전한 생(生)을
찾을 수 있다."
오오…… 그랬던가?
한 번 죽어야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죽립인의 이름이 와룡빈인가?
와룡빈은 걸음을 옮겼다.
"나 와룡빈은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학문을 완전히
달통했다."
아아……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니, 이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하나 그의 말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진실이었다.
"일찍이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관직(官職)에 뜻을 두었으나 이분에
의해서 나의 인생은 돌변했다."
그는 품속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한데 아이의 가슴에 언뜻 비치는 것은 한 마리 용(龍)의 꼬리부분이
아닌가?
청(靑), 황(黃), 흑(黑), 홍(紅), 남(藍)의 다섯 가지의 색이 어우러져
기가 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단지 꼬리부분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보는 이로 하여금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아이는 죽어 그 시신이 검게 썩어가고 있었으나 오색의 문신만은
선명하기 짝이 없었다.
와룡빈은 느릿한 걸음으로 갈대숲을 헤쳐나갔다.
"나의 일생은 이분의 것! 아버님의 기대에 추호의 어긋남도 없이
나의 모든 것을 이분께 드리리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휘이잉―
한줄기 바람이 스쳐갔다.
"하나 십년지약(十年之約)이 있으니…… 기한은 십 년뿐……."
와룡빈의 뒷말만이 희미하게 갈대숲에 남았다.
그는 사라진 것이다. 숱한 의문만을 한적한 갈대숲에 흩뿌려 놓은
채…….
천하여! 아는가?
와룡빈, 그는 드러나지 않은 잠룡(潛龍)임을…….
그가 만약 천하에 알려졌다면 천하는 한차례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그의 하늘을 능가하는 가공할 지식에…….
바람[風].
바람이 분다.
갈대숲에 무심한 바람만 분다.
* * *
"제발……."
간절한, 그래서 그 말은 애원에 가깝게 들렸다.
쏴아아―
폭포가 있는지 거센 물소리에 그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한 사람.
대략 오십여 세 가량의 나이에 반백의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은
일견하기에도 풍채가 좋아 보였으며 몹시 자상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지금 한 소년에게 간절히 애원하고 있었다.
소년은 우측에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높지 않은 폭포는 이곳 장강(長江)의 지류를 이루고 있는
청하수(靑河水)의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
소년은 단 한순간도 폭포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데 소년의 해처럼 눈부신 용모를 보라!
옥(玉)을 깎아 다듬은 듯한 옆얼굴과 먹물을 찍어 일획을 그은 듯한
검고 짙은 검미, 그리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헤아리기 힘든 혜지를
담고
있는 맑고 영롱한 눈망울은 천하에 그 어떤 아름다운 여인의
눈망울보다 더욱 아름다워 마치 보는 이의 심혼을 빨아들일 듯했다.
그리고 천공을 가를 듯이 힘차게 솟은 콧날, 그 아래 한 떨기
장미꽃잎을 문 듯한 촉촉하게 붉은 입술, 동그랗고 갸름한 얼굴 윤곽.
일견하기에도 사람의 마음을 밝게 해주는 신비한 매력을 풍기는
소년이었다.
소년의 나이는 불과 십일이 세 남짓.
그때 노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았다.
"화야(花爺)…… 제발 부탁이네."
노인, 그는 대체 소년에게 무엇을 애원하고 있는 것인가?
일개 십일이 세 소년에게…….
하나 소년은 여전히 폭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노인의 표정은 거의 울상이었다.
"화야……."
화야(花爺)!
그것이 소년을 지칭하는 말인가?
가히 소년에게 어울리는 호칭이었다.
문득 화야는 폭포에서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보았다.
화야의 눈빛.
아아…… 대저 천하에 그 무엇으로 그의 신비하도록 아름다운
눈빛을
흉내낼 수 있겠는가?
노인은 일순간 자신이 화야의 눈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넋을 잃었다.
'아아! 화야를 볼 때마다 매번 그의 눈빛에 매료되다니…… 천하에
이처럼 아름다운 눈을 지닌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문득 화야는 싱긋 웃었다.
"하하…… 황노야(黃老爺)! 나는 폭포를 보며 황노야께서 부탁하신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어찌하여 황노야께선 그리도
급하십니까?"
듣는 사람의 심혼을 맑게 씻어줄 듯한 낭랑한 음성, 그리고
햇살처럼
눈부신 웃음.
'아아…….'
황노야는 잠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왔는지도 잊고 화야의 웃음에
정신을 잃었다.
"한데 새로 생긴 금릉제일루(金陵第一樓)가 황노야의
천화매란루(千花梅蘭樓)를 흡수하려 한다고요?"
그제서야 황노야는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황노야, 그는 이곳에서 이십여 리 가량 떨어진 금릉에 위치한
천화매란루라는 기루의 주인이었다.
천화매란루는 금릉의 명물이 되다시피 한 오래된 기루였으며,
황노야의 사람됨이 착하고 자상하여 금릉의 사람이라면 누구든
천화매란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번창했다.
한데 이 년 전 금릉에 또 하나의 명소가 새로 생겨났다.
업종은 천화매란루와 같은 기루.
규모는 천화매란루의 두 배에 달했으며, 기녀들 또한 두 배나
많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황노야는 원래 사람됨이 결백하여 극히
저렴한 은자로 손님들을 모셨는데 반해 새로 생긴 금릉제일루는
천화매란루보다 더 싼 값으로 아예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장사를 하는
것이었다.
또한 금릉제일루의 주인이 미쳤는지 술과 음식을 먹는 사람에게도
기녀를 붙여주니 은자 몇 푼을 가지고서도 기녀를 품을 수 있는데
누가
굳이 천화매란루를 찾겠는가?
해서 천화매란루는 지난 이 년 동안 파리만 날렸으며 이제는 몰락
직전에 놓이게 된 것이다.
한데 바로 어제 금릉제일루의 주인이라는 사람이 황노야에게 한가지
제의를 해왔다.
값은 후하게 쳐줄 테니 천화매란루를 팔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장사가 안 되는 천화매란루였으나 그곳에는 황노야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의 젊음과 정열과 혼이…….
그런 것을 어찌 금릉제일루에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팔지 않을 수도 없었다.
천화매란루의 기녀들의 수효는 백여 명.
그녀들은 이 년 동안 변변히 은자구경도 하지 못했다.
황노야로선 할말이 없었다.
기녀들은 모두 황노야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어서 쉽사리
천화매란루를 떠나지 못했지만 금릉제일루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어려웠다.
금릉제일루에서 기녀들에게까지 손을 뻗쳐온 것이다.
화야는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건드리면 쨍 소리를 내며 깨질 듯이 맑았다.
황노야는 기대어린 표정으로 화야를 주시했다.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거대한 기루의 주인이 그처럼 큰일을 한낱 소년에게 하소연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 금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금릉을 알고 있다면 화야라는 명물 또한 알고 있을
것이므로…….
화야!
말하자면 그는 일종의 해결사(解決士)였다.
어떤 일이든 그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이 없었다.
심지어는 금릉성주(金陵城主)조차도 골치아픈 일은 화야에게 의뢰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화야가 보수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무보수로 성민들의 골칫거리를 풀어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화야는 금릉성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해결사 화야!
그를 모르는 사람은 몰매를 맞고 쫓겨나도 마땅하다는 여론에
반대할
사람은 금릉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화야, 그는 그런 소년이었다.
문득 화야는 허공에 시선을 둔 채 담담히 입을 열었다.
"황노야, 기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상식적인 질문이었다.
"그야…… 역시 기녀(妓女)들이 아니겠는가?"
화야가 비록 십일이 세 소년이지만 황노야는 그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화야를 쳐다보았다.
"그렇지요. 기루의 장사는 기녀들이 시켜줍니다. 한데 금릉제일루의
기녀들이 천화매란루의 기녀들보다 뛰어난 점이 무엇인가요?"
황노야는 일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땀을 흘렸다.
"그…… 그녀들은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네."
"모든 면에서라면 대체 어떤 것이죠?"
"그것은…… 금(琴), 기(技), 서(書), 예(藝)를 말하는 것이네.
그녀들은
어디서 배웠는지 그것들에 대해 상당한 조예를 지니고 있다네."
황노야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화야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릉제일루가 흥하는 이유는 그들이 손해를 볼 만큼 저렴하게
장사를 해서가 아니에요. 문제는 바로 금릉제일루에 있는 기녀들의
자질이지요."
"그렇다네. 하나 우리 아이들은 변변히 배운 바가 없어서……."
"그렇다면 배우게 하면 될 것이 아닌가요?"
"……?"
"금릉에는 풍류남아(風流男兒)와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많아요.
금릉제일루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들을 유치한다면
천화매란루에서는 뛰어난 기녀들을 이용하여 손님을 맞이하면 되지요.
아무리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을 유치하려 해도 진정한 풍류남아들은
기녀들의 자질을 보고 몰려드는 것이니까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었다.
"누가 그것을 모르는가? 그게 잘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잘 안 되다니요? 기녀들에게 기예를 가르칠 선생을 초빙해 오면
되지 않겠어요?"
황노야는 땀을 더 많이 흘렸다.
그는 평소에 땀을 흘리지 않는다.
하나 지금은 땀을 안 흘릴 수가 없었다.
"누구를 초빙한다는 말인가? 금(琴)의 대가인 황보선생(皇甫先生)을
초빙하려면 최소한 금자 천 냥은 있어야 하고…… 뿐인가? 기, 서,
예에
달통한 선생들을 초빙하려고 해도 최소한 그 아래는 아닐 것이네.
도합
금자 사천 냥인데…… 아아…… 그런 금액이 이 노부에게 있겠는가?"
"그렇겠군요."
황노야는 조심스럽게 화야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저를 찾아오셨죠?"
"그것은……."
"그것은……?"
황노야는 다시 땀을 흘렸다.
"노부는 화야의 금기서예(琴技書藝)가 당대 제일임을 알고
있기에……."
화야는 미소지었다.
"그럼 나보고 와달라는 말인가요? 기녀들의 선생으로……?"
"그렇다네."
"하하…… 황노야께선 나를 너무 과대평가하셨군요? 내가 어찌
뭇선생들과 비교가 되겠어요."
황노야는 고개를 결사적으로 저었다. 고개를 더 격하게 저을수록
자신의 진실 또한 진정한 것으로 나타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아닐세. 최소한 금릉성 내에서 화야의 금기서예가 제일임을 뉘라서
부인한다는 말인가? 금릉의 제일이라면 그것은 또한 당대 제일이
아니겠는가?"
그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금릉에 나타난 화야는 천하인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기재였다.
그는 금릉에서 난다 긴다는 모든 석학들이 꼬리를 말고 사라지게
만들었고, 금(琴)에 있어서 금릉제일이라는 난화장(蘭花莊)의
부용(芙蓉)소저가 눈물을 펑펑 쏟게 만들 정도로 금의
달인(達人)이었다.
"하나……."
화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은 나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군요."
"하면……?"
"후후…… 나를 이날까지 키워준 분, 내게 천하의 모든 학문을
가르쳐 준 분께 의논해야겠지요."
화야에게 천하학문을 가르쳐 준 사람.
황노야는 화들짝 놀랐다.
"아니…… 화야를 가르친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여태껏 비밀에 싸여 있던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화야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몰랐다. 또한 그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고 누구와 함께 사는지조차도…….
단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천하에 화야를 능가할 학문을 지닌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한데 지금 화야의 입에서 자신을 가르쳐 준 사람이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는가?
그때 화야가 일어섰다.
"이제 돌아가야겠어요. 그분께서 기다리시겠어요."
화야의 사부되는 사람.
신비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황노야는 손을 모았다.
"화야…… 어떻게 해서라도 제발……."
화야는 씨익 웃었다.
"노력은 해보겠지만…… 기대는 하지 마세요. 하하……."
그는 빠른 걸음으로 폭포를 끼고 사라졌다.
청류폭(淸流爆).
이 이름은 화야가 폭포에 붙인 이름이었다.
금릉성민들은 알고 있었다. 화야가 살고 있는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 오면 언제나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황노야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휴우…… 화야가 선생으로 와 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텐데……."
화야.
금릉성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화야는 신비하고도
신비한 소년이었다.
* * *
초옥.
방이라곤 달랑 두 칸뿐인 작은 초옥.
그나마 그 중에 한 칸은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서책들이 산처럼
쌓여
발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 방에는 서귀(書鬼)가 살고 있었다.
또 다른 방.
지금 그곳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대나무의자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그는 매우 문약해 보이는 삼십오륙 세 가량의 서생이었다.
그 옆의 탁자에는 낯익은 죽립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죽립.
그렇다!
중년서생, 그는 바로 장강에서 의문의 낚시질을 하던
와룡빈(臥龍彬)이 아닌가!
그는 지금 몹시 고뇌하고 있었다.
누런 얼굴은 더욱 창백했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의 면전에는 한 명의 노인이 공손한 자세로 시립해 있었다.
백의를 입었으며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닌 팔순 가량의 노인.
표현할 수 없는 혜지가 담긴 두 눈은 이 순간 어떤 기대에 차
있었다.
문득 노인은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말문을 열었다.
"주군(主君), 속하들은 이미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더 이상
기다린다는 것은 바로 대사(大事)를…… 아니 천기(天機)를 어기는
일입니다."
"……."
와룡빈은 말이 없었다.
"주군, 속하들은 대를 이어오며 천 년을 기다려 왔고…… 그리고
주군을 만났습니다. 주군께선 속하들을 버리실 수 없습니다. 십 년 전
주군께선 십 년의 여유를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리고 이제 그 약속하신 십 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주군께서
속하들을 거두실 때입니다."
노인의 말은 공손하면서도 강경했다.
천 년에 다시 십 년을 기다려 왔다는 노인.
그는 또한 와룡빈을 주군이라고 칭하고 있지 않은가?
와룡빈은 내심 침음했다.
'으음! 마침내 나는 그분과 헤어져야 할 때가 왔다. 하나 떠나고
싶지
않은 이 마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십 년 전에 그분을 물에서
건져
다시 살렸으며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가르쳤다. 이제 그분은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은가?'
와룡빈은 깨달았다.
정(情).
그렇다. 그는 자신이 살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가르친 어떤
아이에게
끊을 수 없는 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그분과의 정이 깊었다는 말인가?'
문득 그는 자신의 심혼을 모조리 빨아들일 듯하던 소년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순간 와룡빈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영웅(英雄)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천세(千世)에 으뜸갈
영웅에게 작은 힘을 주었을 뿐이다."
"주군……."
"핫핫하! 아마 그분은 나와 있을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와룡빈의 얼굴에는 고통과 희열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영웅지로(英雄之路)! 그분은 영웅의 길을 가실 것이다."
그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궁노(穹老)……."
"네, 주군!"
"정말 오랫동안 잘 기다려 주었소."
"주군……."
노인, 궁노의 만면에 감격이 역력히 떠올랐다.
와룡빈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갑시다. 그분을 뵈면 무엇하리요? 그분 앞에 서면 할말은 지금보다
더 없을 것이오."
그는 이미 초옥의 문을 밀고 있었다.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려다가 멈추었다.
'보지 말자! 이것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라 웅비(雄飛)를 위한
방편이다.'
그는 초옥 밖으로 나섰다.
몸으로, 뺨으로 다가오는 바람조차 낯설지 않은 이곳.
십 년을 사랑하는 한 소년과 고락하던 곳.
발길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움직였다.
'운명…… 이것이 정해진 운명이라면…….'
그는 이제 길도 없는 숲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궁노는 잠시 초옥을
돌아보았다.
"아아…… 아십니까? 주군이 사랑하시는 그분이 언젠간 주군의 적이
되리라는 사실을……."
적(敵)이라고 했는가?
어째서…….
궁노는 어깨를 약간 흔들었다.
스스슷―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새털처럼 떠올라 와룡빈이 사라진 방향으로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초옥에는 십 년 만에 처음으로 낯선 정적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온 산중을 떨게 하는 한 소년의 부르짖음이 있었다.
"숙부!"
아는가?
신이 지니고 있는 운명의 예언서를…….
오늘은 사랑하던 것을 내일은 미워하게 될 것이니…….
또한 오늘 미워하던 것을 내일은 사랑하게 된다고 하여 사람들은
운명이라 하고 팔자라고 한다.
느끼는가?
지금 그대 뺨을 간지럽히듯이 다가온 운명의 그림자를…….
그대 앞에 선 그녀가, 그대 뒤쪽에서 다가오는 아이가 그대의
운명이란 사실을…….
운명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
다만 느껴지는 것은 운명이 아니며, 스쳐 지나가는 것이 운명일
뿐…….
알려 하는가?
그대가 왜 죽어야 하는지를…….
사랑하던 여인의 죽음을…….
앞에서, 뒤에서, 아니 동서남북(東西南北)에서 어둠처럼 다가오는
운명을…….
부질없는 일.
허허…….
하나의 운명에도 힘겨워 울며 죽는데 어찌 그대에게 닥치는 모든
운명을 알려 하느냐?
맞이하라!
그리하여 바보처럼 운명에 순종하라.
그대와 우리 모두는 인간(人間), 길들여진 인간이 아니더냐?
첫댓글 기대됩니다.
기대합니다.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