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난계에서옮김
정유년이 무르익는 10月에
~~~청도지역의 "임진난사학술대회"가 열리다~~~
언 제 ; 2017년 10월 19일
어디서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청려로1846
(청도국민체육센터 실내강당)
가을이 무르익는 10月에 각 지역에서 행사하는 임진난사학술대회가
청도에서 개최함에 호수할아버지 후손 모임인 소영회원 동주,연호,연군,순식,
태기,동길,용식,정용. 8명이 참석하여 대회식과 교수들의 연구발표를 경청하고, 우리지역
조상님들의 의병활동을 다시금 상기하며 우리에게도 긍지와 자부심을 일으키며 대회참석의
보람됨을 느끼며 귀가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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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국민체육센터 건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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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프랑카~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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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회원 시도(접수)하는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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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프랑카~드와 태국기도~~
===임진왜란은===
1597년 제2차 침략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초[ 文祿慶長]의 역( 役), 중국에서는 만력( 萬曆)의
역( 役)이라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남해안 지방에 왜구들이 자주 침략하자
군국기무( 軍國機務)를 장악하는 비변사( 備邊司)라는 합좌기관( 合坐機關)을 설치하여
이에 대비하였으나, 선조 때에 지배계급은 당파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서로 반목질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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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화환들이~~
이와 같은 파쟁으로 중앙에서는 국방정책조차도 마련하지 않고
변해가는 동양의 국제정세를 명( 明)나라와의 친선관계만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또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만 만족해하던 지배층은 인접국가인 일본이나 대륙의
여진족의 정치적 변동이나 사항을 구체적으로 탐지하려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16세기 말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 通信使)도 당파적인 엇갈림에 치우쳐 상반된 내용을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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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쪽에도~~
한편 이이( 李珥)는 10만 양병설( 養兵說)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조선사회는 이미
오랜 평화 속에서 지배계층인 사대부의 편당( 偏黨)정치, 기강의 해이, 전세제( 田稅制)의
문란 등 여러 폐단으로 인심이 동요되었다. 조정에서는 각 도에 왜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을 수축하고 군비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려도 몇 곳을 제외하고는 민폐를 야기시킨다는
원성만 높았으며 이에 동조한 일부 수령들도 전비( 戰備)를 중지하라는 장계( 狀啓)를
올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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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한편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
[ 九州]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對馬島主) 소 요시시게[ 宗義調]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쓰시마도주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임을 알고 조선이
통신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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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따라서 쓰시마도주는 가신인 다치바나 야스히로[ 橘康廣]를 일본국왕사
( 日本國王使)로 하여 1587년 조선으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 書契)의 서사( 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논의가 있었다. 특히 공주교수( 公州敎授) 조헌( 趙憲)은 만언소( 萬言疏)를
올려 시폐( 時弊)와 국방을 논하는 등 일본 정벌의 강경론을 주장하자 결국 조정에서는
수로미매( 水路迷昧)를 이유로 통신사의 파견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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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많이도~~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다시 쓰시마도주의 알선으로
1588년 10월과 89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조공과 함께 통신사의 파견을 간청하고
앞서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노략질한 조선인을 잡아 보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1590년 3월 황윤길( 黃允吉)을 정사( 正使), 김성일( 金誠一)을 부사( 副使), 허성( 許筬)을
종사관( 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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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정리를~~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 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동인세력은 서인들이
전쟁을 빌미로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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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 감사 정만용의 사회로~~
이어 제3차 일본 사신 일행이 조선 통신사보다 한달 늦게 입경하여
일본이 가도입명( 假道入明)하리라는 통고에 조정은 놀라 그 해 5월에 일본의
서계 내용과 함께 왜정( 倭情)을 명에 알리는 한편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김수( 金?) ·
이광( 李洸) · 윤선각( 尹先覺) 등으로하여금 경상 ·전라 연안의 여러 성을 수축하게 하고
각 진영의 무기를 정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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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를~~
신립( 申砬) ·이일( 李鎰)에게는 변비( 邊備)를 순시하게 하는 등 요충지인
영남지방의 방비에 힘을 기울였으나 이미 시기가 늦었다. 이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더욱 성숙하여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 築城術)·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 鳥銃)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
( 鷹峰烽燧臺)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 兵船)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 전라도의 각 감영( 監營)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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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도~~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 釜山城)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 釜山鎭僉使) 정발( 鄭撥)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 東萊)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 東萊府使) 송상현( 宋象賢)
이하 군민( 軍民)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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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난 의병과 조상에 대한 묵념을~~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
[ 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 多大浦)를 거쳐 김해( 金海)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九鬼嘉隆] · 도도 다카토라[ 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水軍)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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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쪽에도~~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20만이었는데 이 중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제1군은 중로( 中路)로 동래-
양산( 梁山)-청도( 淸道)-대구( 大邱)-인동( 仁同)-선산( 善山)-상주( 尙州)-조령( 鳥嶺)
-충주( 忠州)-여주( 驪州)-양근( 楊根)-용진( 龍津)나루-경성동로( 京城東路), 제2군 좌로
( 左路)는 동래-언양( 彦陽)-경주( 慶州)-영천( 永川)-신녕( 新寧)-군위( 軍威)-용궁( 龍宮)-
조령-충주-죽산( 竹山)-용인( 龍仁)-한강, 제3군 우로( 右路)는 김해( 金海)-성주( 星州)-
무계( 茂溪)-지례( 知禮)-등산( 登山)- 추풍령( 秋風嶺)-영동( 永同)-청주( 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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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율 청도군수의 환영사를~~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 朴泓)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 都巡邊使),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 金汝?)을 종사관
( 從事官)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
( 慶尙右道招諭使), 김근( 金?)을 좌도안집사( 左道安集使)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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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류한성의 개회사를~~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 中路)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 劉克良)과 변기( 邊器)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 都體察使) 유성룡( 柳成龍)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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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쪽을~~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 彈琴臺)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 李陽元)을 수성대장( 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 北兵使)였던 김명원( 金命元)을 도원수( 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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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개성을 향하여
피란길에 올랐다.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는 다시 평양으로 달아났다. 파천에 대한
민심이 거제지자 파천을 주동한 사람은 영의정 이산해로 내몰고, 유성룡은 파천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는 거짓 죄목으로 귀양을 보냈다. 그리고 임해군( 臨海君)은
함경도로, 순화군( 順和君)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 勤王兵)을 모집하였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두 왕자를 붙잡아 왜군에게 인도하였다.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이 달아나자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 下三道)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란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
( 掌隷院)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 창덕궁 등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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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국회의원 축사도~~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왜군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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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논설위원 최영훈축사도~~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는 왜병을 막아내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 水營)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 倭船團)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대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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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원의 모습도~~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출동하여, 옥포( 玉浦)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 唐浦)·당항포( 唐項浦)·한산도( 閑山島)·부산 등지에서 계속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진주성( 晉州城)싸움· 행주산성(幸州山城)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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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자료도~~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전라도 해안으로 진출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
( 守城戰)과 김해성( 金海城)의 저항, 경상우방어사( 慶尙右防禦使) 조경( 趙儆)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 鄭起龍)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 鵲院)에서의 밀양부사 박진( 朴晉)의
선전, 유도대장( 留都大將) 이양원( 李陽元)의 해유령( 蟹踰嶺)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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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사회를 재정운영위원 김양조가~~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 勤王)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 郭再祐)·김면( 金沔)· 정인홍( 鄭仁弘)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 高敬命)· 김천일( 金千鎰), 호서에서는 조헌( 趙憲)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 鄭文孚)가 거병하였다. 또한 조선 사대부들에게 천대만 받았던 승려들이 봉기하여
가세하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 沃川)에서 일어나 청주의 왜병을 축출하고 금산( 錦山)의 왜병을 공격하다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 宜寧)에서 거병하여 의령·창령 등지에서 적을 물리치고
진주에서 김시민( 金時敏)과 함께 적병을 격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 長興)에서
거병하여 금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김천일은 수원에서 거병하여 제2차 진주싸움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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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주제;임진란기 청도지역의 유학과 학맥를
국사편찬위원 상임위원 박홍갑 박사가 발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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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석에~~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 鏡城)·길주( 吉州) 등을 회복하고
관동지방의 적을 축출하였다. 이 외에도 대소의 허다한 의병이 봉기했으며
휴정( 休靜)·유정( 惟政) 같은 승려들이 승병을 거느리고 싸움에 참가하기도 하여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왜군의 군사행동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 駱尙志)와
사대수( 査大受)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 宋應昌)· 이여송( 李如松)이
4만 5000의 동정군( 東征軍)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金應瑞)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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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주제;임진란기 청도지역의 전투에 김경태 고려대 교수가 발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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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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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식후 휴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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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원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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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제14義士 문중에서 떡과 차를 대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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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자 어머니들의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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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촬영에도 응해 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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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주제; 중앙대교수 이선희박사의 발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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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도 들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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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주제;한국해양대 교수 김강식박사의 발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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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주제; 국방대학 교수 노영구박사의 발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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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은 굳굳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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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현인들도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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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진도 담아 보고~~
첫댓글 삼강할배께서 행사 전체를 잘 담으셨고 임진왜란에대한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수공 후손들에게
좋은 자료를 발취하여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ㅈ
칭찬해 주심을 고맙고
임난이 우리에게 주어진 조상님들의
활동을 보면 산남의진의 계기가 여기서 왔고
본인 또한 예천, 안동,죽장, 보현 그리고 대구의 경대,영대,계대
중앙, 남부,중앙,수성,두류 등 여러 도서관을 다나며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촬영하여 보훈청에 신청해 보았으나 노력 부족인지 독립유공의사자의
자격을 얻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이고 보상은 아니더라도 포상만이라도 받아 조상에
대한 본인의 의무를 하고싶은 심정이라오
우리집에서 태기가 행사에 참여하여 다행이다.
우리문중은 영천의병장이신 호수공을 위치하여 4부자님이 창의하셨기에 이행사에 참여는 뜻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