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이에 스님이 되기 위해
절로 출가한다는 뜻으로 동진출가(童眞出家)란 말이 있다.
보릿고개가 횡행하던 옛날만 해도 흉년이나 전쟁으로
기근이 심하면 자식을 절에 맡겨 동진출가를 시키곤 했다.
아무리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어린 자식과 생이별하는 부모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시대 전해져 오는 이야기다.
흉년이 들어 먹을게 없어지자
한 입이라도 덜기위해 한 아이가 동진출가를 하게 되었다.
생모는 아이를 절에 맡기고 눈물을 훔쳤다.
나중에 커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니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아 몇 번이나 뒤를 되돌아봤다.
다행이 아이는 절에 잘 적응하였고
열심히 수도한 끝에 깨우침에 들어 유명한 스님이 되었다.
그 명성이 높아져
마침내 왕까지 가르치게 되었으니,
굶어 죽을 뻔 했던 천한 신분의 아이가
임금도 존경하는 덕망 높은 왕사가 된 것이다.
궁궐의 그 누구도
왕사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기뻐한 사람은 역시 왕사의 생모였다.
그런데 왕사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왕사가 있는 절 근처의
허름한 초가에 사는 생모가 매일 절을 찾아오는데,
겨우
보리죽 한사발만 주고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안 임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출가를 했다지만 생모인데,
삼시 세끼 쌀밥 정도는 공양할 수 있는데 너무 강퍅하지 않은가."
평소엔 남들에게
그렇게 후하게 베푸는 덕망 높은 왕사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임금은 아마도 어릴 적에 매정했던
부모라 서운한 마음이 남아 있는가 보다 생각하고,
왕사 몰래 쌀 10섬, 고기, 돈,
옷감 등의 하사품을 왕사의 생모 집으로 보냈다.
임금은 자신이 왕사보다
더 마음이 후덕하다고 생각하고 내심 흡족해 했다.
그런데 그날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왕사의 생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날아든 것이다.
왕사는 땅을 치며
"복이 분에 넘쳐, 천수를 누리지 못하셨다"라며 한탄했다.
왕사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복주머니 크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넘치지 않게 보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자신의 후덕함을 뽐내려던
임금이 넘치는 복을 내려 큰 재앙으로 과보를 받고 만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얼마 전 내게도 그런 한탄스런 일이 벌어졌다.
몇 년 전
한 작은 사업가를 만났는데,
척 보니 나와 인연이 깊었다.
그와의 전생의 빚을
어떻게 청산할까 궁리하던 차에,
그에게 도매상을 하나 소개시켜 주었다.
하지만 이런 배려가 화근이 될 줄이야.
사업가는 돈이 좀 벌리자
그쯤에서 만족하지 않고,
모은 돈으로 더 큰 사업에 투자를 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가는 사색이 된 얼굴로 나를 찾았다.
동업자에게 몽땅 사기를 당해
나를 만나기 이전보다 오히려 더 어려운 처지가 되고 말았다.
딱한 사정을 접하고 보니
왕사의 생모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현인(賢人)들은 절대로 넘치는 복을 주지 않는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냉정하게 상대방의 능력과 근기에 맞게 절제했다.
나의 고질병이 아무리 '다정(多情)병' 이라지만,
이번에는 너무 오버해서 낭패를 보게 될 줄이야.
하늘의 운만 바라봐야하는
그 사업가에게 별로 해줄 말이 없기에
혼자 답답한 가슴만 쓸어내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