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꾼 외출
해방 된 다음 해 1946년 8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님은 하루 종일 들에 나가 일을 마치시고 돌아와 저녁밥을 지으시고 계셨는데
동네 사는 숙희라는 누나가 와서
"아주머니 장영이(이 이름은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부르던 이름이다) 학교에 넣으셔야 해요" 하고
학교에 보낼 것을 알리러 왔다.
그러자 어머님은 깜짝 놀라시며
"아니 저 어린 것이 어떻게 학교에 가?" 하시며 주저하셨다.
그 때 내 나이 9살이었는데도 어머님에게는 어린애로 보이셨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님은 6 남매를 낳으셨는데
이미 4 남매는 두 살도 안 되어 저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에
내가 아기로만 보였고 행여 잘못되면 하고 하루하루 조바심으로 사셨다.
그러자 숙희 누나는
"제가 업고 다닐 테니 걱정하시지 마세요"
누나가 나를 업고 다니기야 하겠냐마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허락을 받으려는 말이었다.
그렇게 해서 어머니의 승락을 받아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때는 9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어 나의 공부 길이 열리었다.
학교는 집에서 15 리가 되었고 가는 길에 높은 산(출성 산)이 있어 다니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그때는 해방 되기 전까지 학교에 다니지 않던 아이들이 한 번에 다 들어가는 바람에
다섯 여섯 살 차이도 같이 다녔고 한 반에 육 칠십 명이 함께 공부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작았다. 그러나 공부는 잘 했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나를 예뻐도 하셨다.
그럭저럭 6년을 마치고 중학교에 가야 하는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갈 꿈을 접어야 했다.
그래서 1년을 쉬는 사이 사촌 형님이 보충대 주보(PX)에 계셨는데
배고픔이라도 해결하라고 나를 고향 군산에 주둔해 있던 군부대에 있게 하셨고
나는 김 달수 중대장님의 전령으로 살면서 얼마를 보내게 되었다.
1952년 한참 전쟁 중이었기에 군에 입영하는 장병들이 보충대에서 임시 있다가 일선으로 배치하던 부대였다.
그러나 그마저 운명이라고 얼마 후 부대가 옮기는 바람에 전령을 그만 두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중학교에 갈 준비로 어머님과 함께 솔방울을 따다가
20 리 밖에 있는 지경(대야)이라는 시골장에 가서 팔아 중학 들어갈 돈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산에서 땔감을 해결하던 시절이다. 솔잎이 말라 시들어 떨어진 솔가루, 솔방울 등이 그러했다.
나무를 베어내고 땅에 있던 등걸은 장작으로 만들어 팔면 아주 값 나가는 땔감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40 리 밖에 있는 군산중학교에 들어 갔고
하루 80 리 길을 도로에서 5시간을 보내며 졸업 후
고등학교에 진학 해 1959년 3월 졸업했다.
그러나 또 다시 가정 형편에 굴복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다음 이야기는 그런 사유로 대학을 포기했던 내가
"운명을 바꾼 외출" 로 대학을 마치고
오늘의 제가 있게 된 이야기를 쓴 이야기입니다.
운명을 바꾼 외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바랐던 대학을 가정 형편이라는 굴레애 묶여 포기했던 나는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오며 삶의 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정사정으로
중학교도 포기했던 나는 또 다시 대학마저 포기해야 했으니 너무 큰 마음의 상처에 묻혔습니다.
차라리 공부나 못했으면 모르지만 공부는 뒤쳐지지 않고 하던 나였으니 말입니다.
결국 나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었고 운명인지 재생하였습니다.
얼마간의 병원 신세에서 돌아 온 나는 집이 싫었고 부모님에 대한 죄 의식으로 집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가방 하나 달랑 메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나의 부모님은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직 기력도 회복하지 않은 나였기 때문입니다.
"아니 여보, 제가 집을 나선다니 어쩌면 좋아요? 아직 힘도 없을 터인데..
병원에서 나온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그러게 말이요, 그렇다고 제가 우리가 말린다고 듣겠소?
기분도 바꿀 겸 다녀오도록 내버려 둡시다"
나의 부모님은 이렇게 걱정을 앞세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사히 다녀오기 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대학에 가지 못해 입은 마음의 상처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극단적 선택을 하고
병원에 입원 치료 받고 겨우 퇴원한지 며칠 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쨌던 나는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 하고 그렇게 집을 나섰는데,
막상 갈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무작정이었습니다.
막상 집을 그렇게 나섰지만 어디로 가야 하나 막연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생각난 것이 남원에서 열리는 '춘향 제'였습니다.
'그래 우선 거기라도 가 보자.'
이렇게 마음먹고 차에 올라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춘향 제를 하는 남원 거리는 참으로 깨끗했습니다.
오작교도 거닐어 보았고 그러면서 춘향이와 이 도령의 사랑 모습도 그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나의 마음을 달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여기는 왜 왔단 말인가?'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이렇게 없단 말인가?'
나는 남원에 온 것이 갑자기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남원에서 하룻 밤을 보내고 무작정 어디론가 또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무작정 가출이 나의 운명을 바꿀 줄이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버스에 오른 나는 고향 선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니, 너 아프다고 들었는데 언제 퇴원 했어?
그리고 지금 어디 가는 중이고?"
"예, 며칠 되었어요. 답답도 해서 그냥 나왔어요."
"아, 그래. 그럼 뚜렷이 갈 곳도 없이 나왔어?"
그 선배는 내가 아직도 마음을 잡지 못 하고 방황하는 것을 직감하고,
"그럼 잘 되었다. 나 서울 가는 중인데 너 같이 가겠니?"
"그래요, 그럼 잘 됐네요. 저도 형님 따라 서울이나 갈래요."
"그래, 같이 가자."
이래서 나는 선배를 따라 무작정 서울 가는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 속에서 선배와 나는 이런저런 얘기하며 서울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나는 여기에서 헤어져야겠다. 너 언제까지 서울에 있다 갈 거야?
딴 생각하지 말고 부모님 걱정하시니 곧 내려가도록 해. 알았지?"
"예, 다녀오세요. 제 걱정 마시고.."
막상 선배와 그렇게 헤어진 나는 이제 정말 어디로 가야 하나 막연했습니다.
그래 할 수 없지. 친구들이나 찾아 가야지.
그래서 나는 차 속에서 내내 생각해 둔 북아현동에 사는 친구를 찾아 가기로
했습니다.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임 의상이라는 친구였습니다.
그는 ㅎㅅ동에 있는 어느 대학에 다니는 친구였고, 고등학교 다닐 때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만남이 나의 운명을 바꾸는 길이 될 줄이야.
그렇게 해서 물어물어 나는 친구가 있는 집에 갔습니다.
"아니 너 언제 왔어? 너 아프다고 들었는데 아픈 것은 괜찮고?"
친구는 깜짝 놀라며 반가이 맞으며 나의 걱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응 괜찮아. 오늘 선배 님이 서울 오신다고 해서 너희들도 볼 겸 해서 왔어."
"그래 잘 왔다. 오늘은 나랑 자고 내일 학교에 가서 친구들이나 만나 보자."
다음 날 나는 친구를 따라서 학교에 갔고, 거기에서 다른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내가 왔다고 친구들에게 소문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아니 너 언제 왔어? 마침 잘 왔다."
"왜?'"
고등학교 다닐 때 김제 부자였던 ㅎ이라는 친구가 반가와 하더니,
"응 지금 우리 학교 중간 고사 시험 중이야. 너 내 대신 시험 좀 봐 다오."
"무슨 소리야. 학교 문턱도 안 밟은 나더러 시험이라니."
"아니야, 1학년 때는 교양 과목이니 네 실력이면 충분히 시험 볼 수 있어."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해서 나는 ㅎ이라는 친구의 시험을 봐 주게 되었고,
시험이 끝나자 친구들은 방학을 해서 고향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고향으로 가면서 "친구 야, 방학 끝나고 나 돌아올 때까지 너 여기 있어.
내가 너 먹고 살 만큼 여기 두고 갈 테니" 하면서..
나는 친구들이 남겨 두고 간 쌀과 찬으로 친구들이 자취하던 방에서 묶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금시 번졌습니다. ㅎㅅ동 그곳은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기에
이웃이 모두 한 가족처럼 지내던 곳이었기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내려 간 친구들이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을 듣고 이웃에 사시는 신태양사에 다니는 어른이 어느 날 나를 불렀습니다.
"학생, 소문 들었어요. 우리 아이들 좀 가르쳐 줘요.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하고 옷도 다 빨아 줄 테니. 어때요? 부탁할게요."
식사만 해결 하기로 하고 시작된 가정교사라는 일이 얼마 지나자
가르치던 학생과 같은 학년의 다른 학부모 님이 나를 만나자고 하시더니
"선생님, 제가 학생 다섯 명을 모아줄 터이니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같이 지내요.
그렇게 해서 내년 대학 갈 등록금도 마련해야지요." 하시는 것이었다.
먹는 것만 해결하기로 하고 시작된 가정교사가 등록금까지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다니
세상에 이런 행운이 내게 오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때부터 그 곳에서 가정교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듬 해 SKY대학 중 하나에 무시험으로 입학할 수 있었으며,
그 길이 곧 내가 그처럼이나 기리던 대학을 마칠 수 있는 길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 운명이여!
무작정 집을 나선 것이, 그렇게 해서 선배를 만난 것이
나의 운명을 바꿔 놓다니 지금 되돌아보면 꿈만 같답니다.
나는 즉시 부모님께 편지를 써서 올렸다.
"어머님, 아버지 이 불효자 가정교사 자리 얻어 내년이면 대학에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불효자를 용서하옵소서." 라고.
자식이 무작정 집을 떠나 또 어떤 일이 있지 않나 하루하루 조바심 속에 사셨을 부모님이
그 소리를 듣고 아바지 어머님이 기쁨에 겨워 어떠하셨을 가는 차마 생각하기도 죄스럽습니다.
< 추신>
나를 서울까지 동행했던 선배 조 준구 선배는 나의 수양 누나 남편으로 살아 계시며
적십자 병원 앞에서 나를 안내해 북아현동 까지 데리고 가서
내 친구 임 의상 집까지 안내해 주었던 학생(북아현동에 있는 한영고등학교
2학년 학생)에게 고마운 마음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 살아 계시다면 75.6세 되셨을 그 학생 정말 보고 싶습니다.
한평생 당신의 그날 친절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디 계시는지요?
참으로 보고 싶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