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리는 음식이 많다. 성격이 까칠해서 그렇다는 얘기도 적잖게 듣는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리지 말고 아무거나 먹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구가 된다면 세상은 요지경속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아닌 담에야 어찌 쉽게 벗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누구의 친구도 아니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드문 예외(例外)가 있다면 연예인이나 정치가 ((政治家) 정도 아닐까.
꽤 오래 전 죽도시장에 들른 적 있었다. 연배 (年輩) 지긋한 분들과 동행(同行)이었는데, 고래 고기 파는 가게로 들어가셨다. “김 선생, 조금 낯설겠지만 나쁘지 않으니 들어보셔.” 그날 처음으로 고래를 먹어보았다. 쇠고기 같기도 하고, 비계 많은 부위는 삼겹살 같기도 하고, 팍팍한 부위는 동물의 간 (肝) 같기도 하고. 하여튼 복잡다단(複雜多端)한 맛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 죽도시장 고래 고기를 한 번 더 먹은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고래에 대한 기록물을 보게 되었다. 고래 어미가 새끼를 낳아서 기르는 과정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인간과 동일한 포유류(哺乳類)로 바다에서 살아온 고래의 내력(來歷)은 흥미로운 것이었다. 육상 포유류 코끼리와 마찬가지로 무리지어 살면서 대물림하는 교육도 인상적이었다. 그들 나름의 언어와 통신수단으로 교통(交通)하고 대화하는 품새는 우리 인간과 견주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방송을 보고 난 다음 고래 고기를 입에 댈 수 없었다. “어쩐지 사람 같아서 먹기가 저어됩니다!” 그것이 나의 변명(辨明)이었다. 고래를 주식(主食)으로 하는 특수한 지역의 사람들, 예컨대 이누이트 족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하지만 우리가 고래 고기를 먹는 것은 취향이거나 선택의 문제다. 우리나라도 오래 전부터 상업적인 목적의 고래사냥을 금지해오고 있지 아니한가?! 이런 면에서 이번에 일본정부의 연구용 포경 (捕鯨) 선언은 뜬금없는 얘기다.
에이에프피 통신에 따르면, 일본은 고래조사를 명목으로 남극해에 연구선을 파견할 방침이라고 한다. 일본 수산당국은 11월 30일자 홈페이지에서 “12월 1일 남극해에 고래조사를 목적으로 연구선을 파견한다"고 전했다. 연구선 3대와 160명의 승무원이 참여하는 고래연구 활동은 오는 12월부터 내년 3월까지 진행되리라 한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고래 고기를 주식으로 삼아왔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전근대(前近代)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고래가 대양(大洋)에서 공중으로 솟구치는 모습은 장관(壯觀)이다. 많은 생명이 바다에서 육지로 이동한 것과 반대로 육지에서 바다로 옮아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고래. 고래가 없는 대양을 상상하면, 사자나 기린이 없는 세렝게티와 킬리만자로와 대면하는 형국이다. <모비딕>에서 허만 멜빌이 묘사한 백경(白鯨)은 거친 야생을 상징한다. 신성(神性)까지 내포한 백경의 신비로움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 고래가 사라진 바다는 죽은 바다다.
해마다 혼획(混獲)을 빙자하여 우리나라에서 포획되는 고래가 적잖다는 얘기는 비밀이 아니다. 고래 혼획 건수(件數)는 2012년 968건에서 지난해 1,470건으로 2년 사이에 52% 급증했다. 올해는 9월까지만 벌써 1,238건에 달했다. 고래 혼획은 특정 바다에 국한(局限)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역의 바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바다의 로토라 불리는 고래 혼획을 기획하고 유통하는 검은 조직이 암약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전과 비교할 때 현대인의 단백질 공급원은 다채롭기 그지없다. 우리 식탁(食卓)은 고기를 즐겨 드셨다는 세종임금 수라상보다 화려하고 은성(殷盛)하다. 사정이 이럴진대 몇몇 호사가(好事家)들의 입맛을 돋우자고 바다의 소중한 포유류를 도륙(屠戮)하는 행위는 정당하지 않다. 1970년대 송창식의 <고래사냥>은 호기로움의 발현으로 족하다. 사방이 철벽(鐵壁)으로 둘러싸인 캄캄절벽을 탈출하는 출구로 불렸던 노래가 <고래사냥>이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돌고래들이 기선과 나란히 유영(遊泳)하는 장면은 얼마나 상쾌하고 아름다운가. 자연 생태계를 교란(攪亂)하지 않고, 자연의 허다한 생명들과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21세기 문화인으로 거듭나면 좋겠다. 지금도 인간으로 인해 멸종되는 생명들이 적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악순환이 이제는 종식되었으면 한다. 조만간 시간 내서 울주군 암각화를 보러 길 떠나야겠다. 고래 없는 바다는 쓸쓸하다. 관우 없는 중원(中原)처럼!
<경북매일신문>, 2015년 12월 4일자 칼럼 ‘파안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