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라늄 (외 2편)
박진성
꽃잎에 수천 톤 욕망이 앉아 있다
육중한 신체가 타오르고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 여린 불기둥
아서라, 꽃잎에는 아무것도 없다
쪼그리고 앉아 한 잎 먹으면
피가 잘 돌겠다
가까스로 사랑의 입구에 서 있다
물의 나라
네가, 너 몰래 열어놓은 문틈으로
네가, 네 몸을 씻는 지금,
벗은 눈이 벗은 문틈을 열고
알몸의 물이 알몸의 소리와 섞이는 지금,
모르는 슬픔이 나 몰래 옷을 벗는다
물의 손이 뚝, 잘려
저 공중은 물의 피를 네 몸에 퍼붓는 것일 텐데
늪지대를 보고,
늪지대에 저 혼자 서 있는 키 큰 식물을 보고,
물의 정부(情婦)가 키우는 몰랫자식이라고 쓴 적이 있었는데
다 벗은 너는 지금, 다 벗은 늪의 식물 같다
다음 생이 있어 물에게도 다음 생이 있어
나는 네 몸에 닿는 지금의 물이 될 텐데
어린 물이 네 하초에 매달려 걸어오는 지금,
나 몰래 열어놓은 슬픔으로
눈동자에 맺힌 어린 물을 닦는 지금으로
아무도 모르는 늪지대에서 처음 만나는 식물들처럼
지금,
어떤 붉은 이야기
벽이 자랐다. 바람이 다친 여자를 도울 수 있겠는가. 다친 새를 구할 수 있겠는가. 벽은 누워서 자랐다. 붉은, 붉은, 끝까지 붉어서 자랐다.
나의 뼛속까지 자라나는 저 벽이 가난한 시간을 구원하겠는가. 다친 여자를 데리고 강 아래로 갈 수 있겠는가. 강 아래 얼음에 누워 바람에 올리는 식물을 꺾겠는가.
새에게는 자기만의 공기가 있다.
다친 여자의 다친 부위로 들어가리라.
죽은 물은 없다. 죽은 소리는 없다. 죽은 벽은 없다. 미쳐서 다친, 다쳐서 미친 이 여자가 나의 벽이었다. 여자가 주운 붉은 돌이 심장에 박히는 소리를 들었다. 느낄 수 있을 뿐 만져볼 수 없는 약속이었다.
슬픔의 방향을 몰라 벽은 계속 자랐다. 여자의 상처는 붉은 벽의 말을 불태웠다.
어두운 물소리와 긴 긴 구멍, 거기서 나는 불타는 말과 놀았다. 모든 말이 재가 될 때까지 놀았다.
—시집『식물의 밤』(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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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2001년《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목숨』『아라리』『식물의 밤』, 산문집『청춘착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