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삼차의 스토리와 병행해서 추진하는 것이 바로 4차계획인 문화의 복원을 통한 소득창출이다
문화가 계승발전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민의 단합된 노력과 추가로 여러가지의 역활을 하실분들이 필요로 한다
(필자는 그래도 아모레라는 마아케팅의 최고 회사에서 마아케팅에 종사한 경험은 가지고 있어)
먼저 목적부터 말하자면
1)대규모 일시적인 관광 이벤트에서 지속 가능한 관광(무공해사업으로 각국이 이에 집중하는 노력은 상상이상임)유도로 봉화지역 관광 발전에 이바지
마을 전체가 합심한 명품 체험관광 마을로 유도함
체험 일일300명 수용규모로 확대 장차 숙박500명이상 규모로 확대하여 지역의 관광과 상거래등을 활성화한다
(해저는 집집마다 땅이 넓어 그리고 마을 또한 길고 커서 적격지임)
2)이미 상당한 인프라 돌담과 이미 완성된 숙박체험을 하는 곳이 여러 곳이며 국가 또한 국민의 다양한 레저욕구를 충복하고 관광산업을 활성화 하기위한 일환으로 사실 호텔의 경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간다 유지비용도 물론 아주 많다 그리고 문화를 체험할수도 없는 곳이다
앞으로는 문화의 시대이다 그래서 우리의 게임 우리것들이 중요시되는 시대로 가고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알고 문화사업에는 관대한 것이 현실이다(일본의 료간을 벤치마켓)
세계를 감동시킨 대장금 바로 우리의 문화이며 일본에서 대장금을 보고서야 한국문화를 다시평가했단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엄청난 광고효과를 얻으면서도 로얄티까지 받고 현대 사회는 너무 기계화되어서 국가의 지디피는 커지나 역으로 일자리는
줄어드는 시대를 맞이하였다(기형적으로 발달한 제조업에서 일자리 창출이 필요한 서비스사업 확충이 필요함)
일자리 창출과 도농간의 빈부격차해소
문화전달의 매개체
그런데도 비용은 적게들면서 다양한 국민적인 레져욕구를 충족하고 유지관리비용이 적게드는 전통마을 체험임에야 정부에서도
손해날일 없는 것이 아닌가
(이미 기업들도 sk등도 마을과 힘을 합해서 이러한 일들을 벌리고 있지 않는가)
3)고택협의회에서는 일차리창출과 우리의 전통의 핵심인 고가들을 보전하기 위해서 물론 기업의 스폰서를 받아서 인력을
지원하면서 고택체험등을 통해서 소득을 창출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빈집이었던 고택에 활기를 불어 넣고 있다
4)그런데 중요한 것은 많은 각집마다 많은 문제점을 내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할 문제점(아래에서 거론할 것입니다) 거주할공간을 빼고나면 방은 2-3개 밖에 남지 않는 문제점
낸냉방 장치와 현대식 화장실과 샤워등의 문제점
그리고 고가에서 버릴수없는 예전 물품들 이것만 옳게 전시해도 좋은 콘텐츠 역활
5)지역민의 일자리 창출과 소득수준향상 도모로 전마을이 참여마당이 되어야 성공할 것이며
경유형관광에서 체류형관광으로 (어느정도 기반마련됨) 그냥 구경거리만 제공하는 것으로는 성공이라 할수없을 것입니다
6) 체류형관광과 주민들과 지역사회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관광의 조건인 볼거리 잘거리 먹을 거리와 문화체험등의 삼박자가 잘구비되어야할 것입니다 또한 일시적인 이벤트가 아닌 꾸준히 수요가 일어나게 하여 지속성을 가지게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기업과 국가 농촌이 힘을 모아서 전통가옥이란 하드웨어 인프라에 먹을 거리 볼거리(문화와 팔거리등의 관광에 필수적인 소프트웨어 편안한 숙박등 관광의 완벽한 조건을 구비함으로서 국가와 기업과 국학진흥원 농어촌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사례로 만들고자함
(글로벌시장에서 관광이란 무공해의 외화벌이에 최고로 인식되는 사업임)전통문화 계승과 농어촌의 발전과 소득의 증대와 빈부격차해소에도 도움이 되는사례로 만들고자함
또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국민들의 다양한 계층의 레저욕구에 적극적으로 정부와 발맞추어 건전환 문화 전달의 매개체 역활을 수행한다
관광의 조건(오감만족)
1)볼거리(문화와 전통생활 체험)
2)먹을 거리(전통음식의 복원)
3)숙박의 불편함해소(특히 여기에 많은 문제가 있음)
문화제는 묶어두고 오히려 문화재가 아닌 것들은 자유롭게 투자가 지속이루어진다 처마선 빡으로 경관을 훼손치 않는 부분에서
관리사옥의 건설등 고택협의회차원에서도 유관 장관에게 건의중임
4) 팔거리 지속관광지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지역민의 합의가 필요함(농산물과 특산물의 직거래외)
볼거리
1)아름다운 고택만들기(중저가를 아우르는 체험숙박시설확충
만회고택 남호고택 토향고택 개암고택 팔오헌고택 박실댁 해와고택 주소댁 참판댁외에도 춘양목으로 만들어진 만회고택 작은집과 토향고택 작은집 가능한 전주민이 참여(숙박의 수요는 다양함 고가 중저가를 아우르는 참여)
(전통 마을의 품위를 갖춘다)외에도 많은 집들이 가능함(적극적인 참여유도를 위해서는 소득창출이 가능해야하며
마을에도 역활을 할분들이 많이 필요함 현재 이미 여러분들이 귀향했으며 개암종손도 예정 해와고택도 귀향결정
일가외에도 많은 분들이 있으며(여러분들이 내려오고있으나 문제는 소득이 어느정도는 발생해야한다는 것 참판댁 건영고택 모두 이대열에 참여시킬 것임 의사는 갖추고 있으나 위에서 말한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어
외에도 단사정 학록서당 추원사 영규헌외 춘양목으로 만들어진 소규모 가옥들 이전의 모양을 간직한 집들을 숙박으로 유도함
해저의 가옥은 춘양목으로 만들어진 종이로 접은듯 편듯 날라가는 듯한 선과 6고로 지어진 명월루외의 집들 또한 전주 한옥마을에서
구경할수있는 것이 아니다 외에도 연꽃연못 연못도 많아 정자와 서당등도 많다 성황당도 흔적이 남아 당연히 복우너해서
성황당으로 가는 주면에 야생초 올레길등을 만들고 성황제행사도 복원하고 기원하는 곳으로도 활용해야한다
1)스레트제거와 지붕의 정원 갖추기 시멘트 감추기(옥상 정원 만들기 검은 시멘트로 도색외
2)가능한 도색의 변화(낡은 시멘트 기와 검은색 도색)
3)관리사옥의 건설과 단열처리등으로 겨울철에도 숙박 가능토록 유도함
4)정원 연못 가꾸기(우물샘앞으로 연곷이 핀 연못은 더욱 가꾸어서 연꽃이 필무렵에는 주변을 거닐수 있는 산책길도 마련해야한다
(현재 해저마을은 닭실과 청마마을은 전체를 손봤으나 우리는 스레트와 판넬 낡은 시멘트기와 청색 붉은 색계통의 기와등으로 마을 전체의 고택이미지가 훼손됨
일단 쉬운 쪽으로라도 기와 도색 시멘트위에 방수후 옥상 정원 만들기등만 추진해도 달라질듯
단사정 추원사 전사청 학록서당 풀이 많이 나는 문제등 깨끗하게 할필요(여기도 제기능을 살려야)
안되면 비닐을 깔고 흙을 덮자(사람이 볼까두려워 )
청풍해저 오김시 명월루중 미옥인(7월16일)회자와 우물에도 고유를 지내고 성황당에도 고유를 지낸 문안들을
여기 저기서 시를 읊은 흔적들 명월루 관련 대화들 이들을 그냥 썩힐 것이 아니라 보러오는 분들에게 제대로 보고갈수 있게 활용해야한다
***관리사옥을 마련(저가비용으로) 기존공간을 숙박용으로 유도함****가장 중요함 이부분은 가장 중요한 문제로 현재 구조상으로 방이 6개인데 이것을 다 체험고택으로 활용해야지 그렇지 않고 우리가 실면서 준다면 아얘 방3개을 주고 체험을 한다면
머리만 아프고 이것도 안되고 저것도 안된다 그럴바에야 문을 걸어 잠그고 안하는 것이 좋다
이런 문제들도 고민하는 곳이 많다(해와고택 개암고택 팔오헌고택 만회고택 외에도 마찬가지 문제를 않고 있다
문화재이니 집도 형상 변경도 어렵고 넓은 땅는 밭도 아니고 정원도 어렵고 풀을 뽑는데 년간 시간 다보낸다
이것은 그냥 고문이다
집을 짓는다해도 전통가옥으로 문화재식으로 문화재유자격자에게 맞긴다면 감당할수 없는 자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집을 비우면 일년이면 다 망가진다
이문제에 대해서 약500명수용규모로 군과 국가 마래미 마을이 한번 머리를 맞대어야하지 않을까
(주민들의 중지를 모아가고 있으며 서울등지에서도 적극 참여 의사 밝힌분들이 많아) 문화재의 이미지를 손상하지 않는 범위에서
필요함(안동의 취암고택(이동수)의 형님은 방에 물론 수세식화장실구비 냉 온풍기 까지 깔아 그리고 지하실을 파더라도 관리사옥을 마련해야한다 한다고함
4)무공해마을 이미지조성(야생초 시범마을)
5)주차장의 확충(이것은 밭에 주차장 확충 계획은 이미 가지고 있음
6)야생초와 공원의 조성(팻말붙이기와 카페 효능과 효소만들기능 체험 야초 캠프장 만들기(봉화지역 무공해 이미지 부합됨)
(심산관련 삼성전자 sk 현대차외 시제이 제당 고택미인 아모래와 설록차등의 차 예절과 시설구비)
기업과 연대하여 기업과 국가(관광공사등)등과 보조를 맞추어 국가의 호텔을 짓는데 막대한 비용을 문화체험할수잇는 기존 인프라건설에 대신하여 적은 비용으로 여가를 선호하는 국민의 다양한 여행수요에 부합하는 동시에 직거래등을 통하여 농촌의 일자리 창출과 농민의 소득수준을 향상한다
***현재 지속되는 우리것에 대한 중요성과 우리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며 이리전통문화를 예술로 승화하여 국민들의
개암고택이 있는 해저리(海底里)의 또 다른 고택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집은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이다.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대규모 수리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구입했다고 전한다. 마을 동쪽 끝의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집 앞에는 우물과 수백 년 됨직한 오래된 소나무가 세월의 역사를 안내하듯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전체적인 집의 평면 구조는 ‘ㅁ’자형의 정침인 안채와, 안채 동쪽 모서리 부분에 ‘ㄱ’자형 사랑채를 연결하고 앞으로 누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안채는 4벌대의 축대 위에 세워졌고, 아래채와 사랑채는 높이를 같이하고 있다. 사랑채는 반 칸 내밀어서 툇마루와 난간을 만들고 옆으로 안채의 중문 옆에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어 사랑채로 손님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누마루는 3면을 계자난간으로 아름답게 조각하고, 난간과 이를 받치는 튼튼한 원기둥의 누하주 기둥은 팔작지붕 박공면의 귀솟음기법과 어울려 날개깃처럼 휘어진 지붕 곡선에 이어진다. 누하주는 힘찬 기상이 느껴진다. 여름이면 누마루 3면의 판문을 천장에 걸고 밖의 시원한 남풍을 즐기면서 창 너머 화단에 넘쳐나는 꽃들의 자태를 보는 멋이 가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봉화 해저리 만회고택 전경
뒷담이 없이 산과 하나가 된 만회고택
사랑채는 네 칸을 일자로 두고 누마루 한 칸을 내어 세웠으며, 안채 방향으로는 한 칸 반 크기의 방을 연결하여 문을 안채로 두었다. 정면 네 칸의 사랑채는 가운데 1칸의 대청마루와 동쪽에 1칸의 건넌방, 그리고 안채 쪽으로 두 칸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대청은 1칸 크기로 작은 편인데 반해 나머지 여백을 누마루의 마루로 만들고, 툇마루를 반 칸 크기로 크게 만들었기에 가운데 대청마루가 적어도 답답하거나 시야가 막히는 느낌은 없다. 기둥은 둥근기둥으로, 이는 특별한 사대부 집에서나 사용할 수 있었던 부재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툇보를 이용하여 기둥 위에 결구되는데, 툇보는 무지개 모양의 보를 쓰거나 약간은 곡선의 미를 살리는 것이 일반적인 예로 볼 수 있으나 이 가옥의 사랑채 툇보는 직선 부재를 반듯하게 기둥과 연결시킴으로써 더욱 단아한 느낌을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두 칸의 사랑채 안방은 머름대와 판을 댄 창문 구조에 띠살무늬 2분합문을 두고 있다. 그리고 미서기문은 길상자인 ‘아(亞)’자를 아래위로 두 개 배치하는 방법으로 군더더기 없이 집 주인의 염원과 미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문 위에는 ‘만회고택(晩悔古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또 대청마루 위에는 ‘청풍헌’이라는 편액을 걸어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선한 기운을 느끼고자하는 염원을 느낄 수 있다.
해저리 만회고택 사랑채
널찍한 툇마루가 인상적인 사랑
사랑채 누마루와 툇마루의 고즈넉한 짜임새가 아름다운 모습
사랑채 건넌방은 한 칸을 뒷마당 후원 쪽으로 물리고 이어 만들어서 사랑 전체의 모습은 ‘T’자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평면 구조로 인하여 사랑대청으로 바람이 잘 흘러서 여름에는 대청의 바라지창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지나가 편액처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대청 뒤편의 바라지창은 문의 역할도 하여 후원으로도 가고 안채로도 연결되는 비밀스런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 통로는 안채의 건넌방 부엌 옆으로 난 문을 이용하여 연결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는 기둥머리에서 소로를 이용한 소로수장집의 형태로, 기둥에 창방을 걸고 그 위에 주두와 보아지를 꾸며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대청이나 누마루에서 멀리 보이는 몇 그루의 노송들과 사랑마당 앞에 꾸며진 아름다운 조경을 보면 집 주인의 기상과 아울러 섬세함을 느낄 수 있다. 역시 한옥은 소나무로 만들지만, 살아 있는 소나무를 가까이 함으로써 더욱 멋을 내는 특별한 묘미를 주는 것이 한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멋이 아닌가 한다.
사랑채마루를 기둥 밖에까지 넓힘으로써 시원스러운 마루를 만들고, 그때 생긴 계자난간의 개판을 두툼한 나무로 사용하여 우직한 멋을 주고, 이때 생긴 귀틀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가로로 드린 장귀틀과 통장부 구멍의 이음이 고풍스런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난간의 박쥐모양 풍협은 누마루의 풍협 없는 마루와 비교되어 사랑의 침실 공간과 자연을 보면서 호연지기 하던 누마루의 기능을 건축으로 오묘하게 승화시켜 표현하고 있다.
안채 중문에서 바라 본 사랑마당과 담장 너머 풍경
만회고택 마루 귀틀의 운치
사랑마당의 아름다운 풍경
사랑대청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여름 오후의 풍경
중문채는 사랑채 쪽으로 중문을 두고 외양간과 방을 꾸며 놓았는데, 특히 외양간과 방 사이의 문으로 2분합 띠살무늬 문을 달아 여름에는 문을 열어 아름답게 가꾸어진 사랑마루로 내려설 수 있게 만든 것이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다. 이 문을 통하여 온돌방으로 연결되고 외양간 상부로는 다락으로 연결되어 생활이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중문채와 안채 사이의 추녀 아래에는 판문을 달아 안채 후원으로도 나가고 담장 아래 있는 측간으로도 왕래할 수 있게 했다. 이 문을 나서면 뒷산과 연결되는 넓은 후원이 있어 안채에 살던 사람들은 후원과 텃밭에서 일상의 지루함을 달래었을 것으로 보인다.
중문에 들어서면 세 칸의 대청마루가 보이고 좌우로 안방과 건넌방이 연결되는 날개채가 나타난다. 그리고 마당 가운데에는 깨끗이 닦아놓은 장독들이 질서정연하게 크기에 맞추어 놓여 있어 집안의 정돈된 분위기와 어울린다. 세 개의 건물은 아래채의 용마루선이 안채 팔작지붕의 내림마루선과 일치하여 각 건물의 용마루 지붕선이 하나로 연결되는 모습이 되어 흥미로운데, 아래채는 안채보다 지붕선이 낮아 추녀선이 안채의 대청 안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지붕선이 네모난 대청 기둥선과 어울려 강직하면서도 고즈넉한 한옥의 분위기를 풍긴다. 지붕선의 이음 방법이 종이접기 하듯 안으로 접었다 폈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매력적이다.
안채는 3량 가구에 가운데 기둥 사이가 넓고, 좌우 기둥 사이는 좁아 중문에서 바라보면 중심 어칸의 폭을 이용하여 안채의 대청을 바라보는 시선을 좌우로 늘려 넓은 공간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기술적인 멋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단은 메주모양의 장방형으로 다듬은 돌을 2단 쌓고, 주춧돌은 비교적 네모난 사각 돌을 이용하여 기둥을 받치고 소로받침 없이 간결하게 대들보와 맞추고 보 아래는 보아지를 대고 있다. 보아지는 외부로 직절되고, 내부로 사절되어 있다. 네모난 나무를 모만 접는 형식으로 약간 현수형 모습의 3량 구조인 안채 대들보는 마루도리를 사다리꼴 판대공으로 꾸몄다. 따라서 천장은 연등천장에 서까래와 하얀 회벽으로만 천장가구를 꾸미고 있어 높은 기둥과 함께 시원스럽고 넓은 대청의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대청마루 뒷벽은 천정이 높기 때문에 중인방과 상인방 사이를 높게 하고 하인방 사이는 조금 낮게 하여 판벽 세 곳을 바라지창으로 꾸몄다. 후원 쪽에서 안채 뒷벽의 벽체와 바라지창을 보면, 후원의 텃밭과 어울려 날씬한 기둥처리가 아름답고 견고하게 보이는 멋이 있다.
안채에는 대청의 오른쪽인 서쪽으로 두 칸의 방과 아래채로 연결된 부엌이 자리하고 있다. 안방의 부엌과 연결된 창문 역할을 하는 날개채의 창문 배치를 보면 가로 부재인 인방의 높낮이를 변화시켜서 창문의 모양이 달라지도록 유도하고 그로 인해 벽체의 얼굴 표정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한옥은 사람의 눈과 같아서 눈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사람이 달라져 보이듯, 창문의 크기와 형태의 차이로 집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작은 차이로 집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한옥이 갖는 무한한 가변성과 창조적인 표정예술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안채 대청마루의 좌측인 동쪽으로는 건넌방을 두어 며느리와 아이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가운데에 부엌을 두어 사랑채와 공간을 구분하고 있다.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는 약간 사이를 두고 사랑채로 다니는 통로를 꾸며 놓았다. 이 통로를 이용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눈높이 위는 개방하고 아래쪽은 널판을 듬성듬성 이어 판재사이로 자연스럽게 햇빛이 비추도록 하였다. 이는 조명이 없던 시절에 사랑으로 다니는 어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만든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남·녀 간의 공간이 구별되어야 하던 당시에 체면을 지키면서 안채의 동정을 엿보던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인다. 한옥은 이와 같이 공간의 요소요소에 집 주인이 생각한 편리성과 실용적인 조화, 안목이 돋보이는 종합 예술이다.
명월루기
명월루라 현판하니 손이 묻기를 달은 하늘의 물체인데사사로이 소유하는가? 귀천에 관계없이 그빛을 더해주지도 서민에게도 덜해주지도 않는다등888888888888888888 중략
손이 맞구나
단사정기
영규헌기
한옥의 미
개암고택
문화재지정
경북기념물 제138호
주소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09-1
해저리 마을은 여(余)씨들이 살던 마을이었는데, 선조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개암공(開巖公) 김우굉 선생의 현손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선생이 들어와 살면서부터 의성김씨(義城金氏) 집성촌이 된 마을이다. 예전에 이 마을은 넓은 들판과 마을 앞으로 흐르는 강 때문에 비옥한 농경을 할 수 있었던 천혜의 장소였을 것 같다. 그러나 현재는 도로가 마을보다 높게 만들어 지면서 마을은 시야가 가려지고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만 보이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역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도로가 마을보다 높게 만들어지고 지나치게 마을 가까이 대로가 생기면서 조용하던 예전의 풍경을 빼앗겨 버린 것 같다. 또한 이 마을은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독립운동가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마을로, 근대사의 조국 수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많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처음 이 마을을 자리잡던 때의 마을의 풍수지리는 송두리째 변화되고 말았다. 최근에 도로를 곧게 만들면서 지금의 도로는 여행자들이 잠시 주차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지만, 예전의 마을 앞 풍경과는 차이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마을에는 경상북도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고택이 몇 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개암고택이다. 이 집은 의성김씨 종가댁으로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을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양반가의 가옥이다. 마을 서편 끝자락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기대선 이 가옥은 마을 뒤편 한적한 곳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은 온통 밭이다. 대문은 세 칸짜리 평대문으로 양반가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솟을대문은 아니다. 솟을대문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상징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급성장한 신흥지주들이 돈을 이용해 마구 솟을대문을 세우기에 이르자 일부 양반들이 자존심을 지키고자 솟을대문을 부수고 오히려 평대문으로 고치는 풍습이 있었다.
대문채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규모로, 가운데에는 평대문을 두고, 좌우로는 청지기들이 기거하는 방을 두었다. 대문은 앞쪽에 달고, 방에서 연결되는 외닫이 문을 꾸며 놓았다. 몇 장의 널판을 이어 붙인 대문은 둥근 광두정으로 장식하고 입춘방을 붙여 이 집안의 편안과 안위를 기원했다. 이 가옥을 둘러 쌓은 담장이 엄격히 분리 된 세 개의 담장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제1영역은 사랑마당, 제2영역은 정침인 안채 영역, 그리고 제3영역은 사당 공간으로, 담장에 의해 생활공간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해저리 개암공 종택의 평대문
장수를 의미하는 ‘수(壽)’자가 새겨진 대문채 화방벽
제1영역인 사랑마당 공간에는 사당 앞으로 넓게 마당과 텃밭을 꾸며 마당이 확장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 담장 너머로 밭들과 멀리 아랫집들이 있어 동남쪽의 시야가 시원하게 전개된다. 사랑채는 자연스럽게 막돌허튼층쌓기로 2벌대의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전면 네 칸 측면 두 칸 크기로 덤벙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팔작지붕을 얹었다. 가운데에는 한 칸의 대청을 두고, 두 칸의 안방과 전면에는 쪽마루를 대어 추녀까지 방으로 꾸몄다. 반면 건넌방은 전면 두 칸의 크기에 방 벽선을 반 칸 뒤로 미루고 툇보를 설치하여 툇마루를 두어 섬돌을 밝고 올라선 후 툇마루로 올라 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건넌방은 뒤편으로 반침을 두어 미닫이문을 달고 책이나 방에서 사용하는 책과 바둑판, 생활도구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특히 이 공간은 겨울철에 북쪽 벽으로부터 한기를 막는 완충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기에 한옥에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효 공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에 와서는 단열 재료가 발달되어 벽체에 단열 재료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이러한 재료가 없을 때는 다락이라는 공간을 두어 물건도 수납하고 겨울에는 단열효과와 여름에는 복사에너지가 직접 영향을 주지 않도록 차단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갖도록 한옥은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에서는 상청을 만들어 놓고 3년 동안 탈상을 하기 전까지 아침저녁으로 종부는 물과 밥을 봉양하는 의식이 있는데, 지금도 조선시대 유교 관습에서 나온 이 미풍양속을 사대부집들의 답사에서 간혹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과 관습, 그리고 조상에 대한 마음가짐은 지금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기와집으로 된 사랑채 한옥의 상청을 보노라면, 엄숙했던 사대부가의 가정교육 일부를 보는 기회가 되어 더욱 숙연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서 보이는 사랑채의 모습
사랑채 툇마루와 기둥에 정확히 맞추어진 덧문
제2영역인 안채는 사랑채 옆에 사주문을 세우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데, 중문에서 안채에 기거하는 여인들의 생활을 엿보지 못하도록 이 집에서는 중문의 축을 안채 동쪽 날개채 벽이 보이도록 하고, 중문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돌아들어가 안채 마당에 이르게 하는 동선 계획으로 꾸몄다. 이는 한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시선 차단을 위해서 쪽담을 만들거나 이와 같이 문의 방향을 이용하여 생활공간을 보호하려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이는 한옥의 특징이며 멋으로 예의바른 우리 조상들의 생활 표현이다. 안채는 매우 협소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작은데, 2벌대의 자연석 막쌓기를 한 기단 위에 전면에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있다. 대부분의 대청은 세 칸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가옥은 두 칸을 두고 가운데 기둥을 세워서인지 더욱 폐쇄적인 느낌이 든다. 대청의 네모기둥을 중앙에 세우고 마루 귀틀을 기둥 옆면에 대서 기둥의 직선을 살려서인지 대청마루가 매우 높아 보이는 시각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아래채의 처마선은 대청마루의 상인방 아래로 선이 이어져 안채 지붕이 아래채를 덮고 있듯이 높게 되어 폐쇄감을 완화시켜준다.
좌우의 날개채는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으며 안채는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대청으로부터 오른쪽에는 안방의 온돌방과 고방을 두고 있는데, 대부분의 가옥에서는 대청마루로 연결되는 문을 두는 반면에 이 가옥에서는 추녀 아래로 쪽마루를 두어 2분합 띠살문의 출입문을 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집 주인이 안채 부분의 협소함을 줄이기 위해 2분합문을 열어 방과 마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느껴지게 만들려 했음을 짐작케 되는 장면이다. 또 반대편의 날개채는 같은 길이로 나온 쪽마루를 달고 있는데, 안방과 같이 2분합문이면서 중인방을 두어 나지막한 분합문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문을 이용하여 공간의 실용성을 높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문의 형태를 살펴보면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의 문이 크기나 형태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오른편은 띠살무늬 덧문이고 건넌방에는 자그마한 2분합문이면서도 아래에 궁판을 달아 묵직한 느낌이 들도록 한 점을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이 한옥에서는 개성과 방의 용도에 따라 문 하나에까지 차별을 두어 편리성과 다양성을 추구한다. 이것이 우리 한옥의 멋이고 선조들의 지혜인 것이다.
건넌방 부엌 위에는 다락을 두어 수납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부엌 위에 수납공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로는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방식인 우리 전통 아궁이는 불이 위로 올라가는 형태이기 때문에 부엌 바닥은 낮게 되고 또한 천정이 높아지니 상부공간을 활용하여 건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부엌에서는 항상 불을 때기 때문에 그 위에 마루바닥을 깔고 다락을 만들면 연기에 의해서 훈증이 되어 벌레가 살지 못하고, 겨울에는 방으로 연결된 다락문을 통하여 열의 완충공간으로 웃풍을 막을 수 있으니 부엌의 다락이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우리 전통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지혜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안채에는 중문 이외에 좌우로 협문을 두었고, 그 중 하나는 사당으로 연결되는 협문이다.
개암종택의 안채
대문채에서 바라본 사랑과 안사랑채의 아름다운 어울림
사당은 동쪽 끝 산 아래에 별도로 구획된 담장 안에 있으며,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 규모의 크기다. 입구는 삼문 형식의 맞배지붕 구조로 문널에는 태극을 그려 놓았다. 이 사당은 지붕의 형태가 팔작지붕으로 사당에 팔작지붕의 예는 매우 드물다. 또한 가운데 어칸은 넓고 좌우 협칸은 좁게 한 것도 특징인데 1/3 높이까지는 궁판을 대고 상부는 띠살무늬 분합문으로 꾸며져 있다.
봉화 해저리 마을에는 개암종택 외에도 여러 채의 한옥들이 있다. 이들 한옥에 둘러쳐진 담장 아래로는 여름이면 봉숭아와 맨드라미, 백일홍과 같은 꽃들이 만발하여 담장과 어울려 운치를 더해준다. 집 안의 백일홍 나무가 붉게 피어오르면 뜨거운 여름 햇살을 머금은 꽃들이 더욱 자신의 색들을 뽐내는 시기가 된다. 가을에는 분홍색, 흰색, 빨간색의 코스모스가 마을길과 담장 아래에서 아름답게 피어오른다. 이쯤이면 해바라기도 마을을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듯 둥근 얼굴을 활짝 웃으며 반겨주는데, 그 곳에 한옥이 있어 고즈넉한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고향의 아름다운 품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한옥의 미
기획/특집
[作家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1] 김정현이 만난 선비의 술 이화주와 괴헌고택 전승음식
2012-09-03 08:01:17
사랑채 안쪽 문이 열리더니
작은 소반이 들어온다
배꽃 필 때 담근 그 맛에 녹아드네
영주 괴헌가의 전통술인 이화주는 이화곡이라는 누룩을 사용한다. 찹쌀과 멥쌀로 만든 이화곡이 분홍빛을 띠며 발효되고 있다(위). 이화주는 배꽃이 필 무렵 담가 가을쯤이면 먹을 수 있다. 항아리에 담가 놓은 누룩이 익어가고 있다(오른쪽 아래).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Story Memo 괴헌고택은 선비의 기품과 정신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영주의 대표적인 문화재다. 사당과 사랑채, 안채가 유교사상에 입각한 위계질서에 따라 고유영역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009년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 제262호로 승격 지정되기도 했다. 고택의 이름은 ‘회화나무가 가득하다’는 뜻에서 지었다. 괴헌가는 이름난 양반가이다 보니 예부터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안주인은 괴헌가만의 특별한 음식을 대접해야 했다. 이화주(梨花酒)가 바로 그것이다. 쌀로만 만드는 술로, 이름과 달리 배꽃이 실제 들어가지는 않는다. 배꽃이 필 때 담가야 맛이 더 좋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다. 발효된 누룩을 그릇에 담아 물을 타서 마시는 것도 이색적이다. 괴헌가는 이화주 외에 손님상에 올리는 음식이 따로 있다. 수란, 보푸람, 육말 등은 지금도 손님이 오면 대접하는 전승음식으로 민속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1편은 영주 괴헌가의 전통주인 이화주와 전승음식에 대한 이야기다.
누군가 대문 밖에서 기척을 낸다. 마당 어딘가에서 제 일을 하고 있던 집안사람은 단걸음에 달려가 문을 연다. 낯익은 누군가일 수도 있고 낯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개중에는 누추한 차림으로 하룻밤 유숙을 청하는 과객도 있었을 것이다. 낯익은 사람이면 얼른 집안으로 모실 테고, 뜨내기 과객일지라도 단박에 내치는 법 없이 집주인에게 고한다. 주인은 그야말로 원한 사무친 이가 아니라면 문전박대하지 않고 안으로 모시도록 이른다.
사랑채, 혹은 마루에서라도 주인과 객은 공손히 맞절을 한다.
“저는 봉화 닭실에 사는 권가(權家)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만, 진작부터 괴헌가의 높은 명성을 들었던지라 찾아뵙고자 했습니다.”
“명성이라니 과찬이십니다. 그저 작은 집에서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고 있는 것을요. 어디 먼 길을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동문수학한 벗이 경상감영에 부임했다 하여 세상 소식도 들을 겸 찾아갔다가, 오는 길에 도산서원까지 들른 길입니다.”
“세상 흘러가는 소식도 그렇지만 요즘 도산서원에서는 어떤 이들이 공부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어떠했습니까?”
“감영보다 서원 소식이 더 궁금하시군요. 과연 선비십니다, 허허.”
‘선비’. 국어사전에는 ‘학식은 있되 벼슬하지 않은 사람’ ‘학문을 닦은 사람의 예스러운 말’ 등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고 벼슬하지 않은 것이 절대 조건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합격하거나 어느 정도 벼슬에 오른 사람이어야 더욱 선비로 여기고, 칭해져왔던 게 사실이다. 조선시대 학문을 탐구하던 선비가 지향했던 바는 ‘지극한 정치’, 즉 군왕이 왕도를 실현하는 정치였다. 그러니 결국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었고, 대부분 출사를 바라기도 한 까닭이다. 다만 출사 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도를 벗어나거나 탐관이 된다면 그로써 선비라는 영예는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선비는 학문 탐구와 함께 ‘의리(義理)’를 숭앙했는데 이는 ‘천리(天理)’, 즉 바른 하늘의 도리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에 선비는 벼슬의 유무와 상관없이 나라가 외침을 당하면 분연히 일어나 목숨을 내놓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지면 가산을 내놓아 구제에 나서기도 한 것이다.
괴헌가도 그랬다. 괴헌고택의 주인은 괴헌(槐軒) 김영(金瑩, 1789∼1868)은 순조 4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병조좌랑을 거쳐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의 6대조 만취당(晩翠堂) 김개국(金蓋國, 1548∼1603)은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이듬해 임진전쟁이 발발하자 피신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의병을 조직,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전쟁이 종결된 후 선무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기도 했지만, 그는 옳고 그름을 가림에 있어 의리로 털끝만큼의 굽힘도 없어 불우한 세상을 살았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아들 김여환(金汝煥)이 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내기도 했으나 그 후로는 몇 대를 거쳐 김영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벼슬을 지낸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김영 또한 벼슬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순조 29년 사헌부장령에 승진했으나 기어이 소명(召命)을 사양하고 고향인 영주시 이산면 두월리에 지금의 집을 지어 은거했다. ‘괴헌’은 집 마당에 많이 자랐던 회화나무에서 딴 호로, 벼슬보다는 자연 속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코자 했던 그의 원망(願望)이 담겨진 것일 테니 과연 지고한 선비가의 전통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안채와 연결된 사랑채 안쪽 문이 열리더니 작은 소반이 들어온다. 끼니때가 아니어도 집안을 찾은 손님은 반드시 입을 다시게 하는 것이 안주인의 도리다. 이른바 접빈객(接賓客)의 기본 마음. 소반 위에는 간단하지만 정갈하게 차려진 안주와 함께 괴헌가만의 접빈주 ‘이화주(梨花酒)’가 올라있다. 이화주는 괴헌가에 전승되어온 접빈 및 봉제사(奉祭祀)를 위한 술로, 쌀로만 빚는다. ‘이화’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배꽃이 들어간 것은 아니다. 배꽃 필 때 담가야 그 맛을 얻을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화주는 먼저 불린 쌀을 항아리에서 발효시켜 누룩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누룩이 만들어지면 멥쌀과 찹쌀을 전래의 비율대로 섞어 쪄낸 뒤, 엿기름과 같이 반죽해 항아리에서 저절로 발효되도록 기다려야 빚어지는 술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리면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직 쌀쌀한 이른 봄부터 술이 제대로 익을 때까지, 추우면 집안으로 들이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아 내놓으며 발효에 적정한 온도를 유지해줘야 제맛을 얻을 수 있는 까다로운 술이다.
증류주가 아니니 소주는 아니고, 탁주 계열임은 분명한데 익은 다음 마실 때는 물을 타서 먹는다. 술에 약한 여자들은 설탕을 타서 먹기도 하는데,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몇 년을 두어도 상하지 않는다. 새콤달콤한 맛도 일품이지만 빚어진 자연 상태 그대로 장기보존되는 특성은 막걸리의 세계화 바람이 주춤하는 이때, 새로운 문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 테다.
또한 사람마다의 취향에 따라 선호하는 알코올 도수가 다른 데다, 일본의 경우 저들의 전통 소주는 물을 타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니 이화주는 그들의 습성에 잘 맞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대대로 영남지역은 조선 유림과 선비의 본향이었다. 특히 경북북부지역의 경우 고려 말의 회헌 안향 선생 이래로 조선조의 삼봉 정도전, 퇴계 이황으로 이어진 뚜렷한 학풍은 더욱 꼿꼿한 선비 정신을 낳았다. 영주시 이산면에 있는 이산서원이 건립되고 이듬해 지은 퇴계의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잠깐 인용해보자.
‘영천군(榮川郡:현재의 영주)은 소백산 남쪽에 자리해 신령한 기운이 넘치고 풍광이 아름다워 인재들이 많아 모이는 곳이라 일컬어졌다. 이곳의 풍속은 문예를 숭상하여 함께 모여 공부하기를 좋아하였으니, 그것을 거접(居接)이라 하였다. 이 고을 선비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으며 그들은 다른 지방에서 책 상자를 지고 배우러 오는 많은 선비들도 기껍게 반겼다.
퇴계 이황은 안동 사람으로 지금의 도산서원은 그의 사후에 세워진 것이다. 살아생전 퇴계는 지금의 영주, 특히 이산서원 설립에 깊이 관여하고 애정을 쏟았다. 그런 그의 말처럼, 영주는 대대로 선비의 고장이다. 그것도 출사하여 벼슬의 영예를 구하기보다는 초야에 은거하여 학문을 익히고 사람의 도를 닦았다. 또 벼슬을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은 반드시 추구하는 바가 이어지기 때문에 구차해지기 십상인 까닭이다. 그보다는 이웃과 사람에 정성을 다하고 조상을 공경하여 지극한 효를 실천함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효를 실천하는 길이 오직 마음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더구나 소백산 자락 영남 북부지방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물산이 풍부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하랴, 객을 맞이하고 제사를 모시는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될 일이니.
도(道)와 리(理)를 논하는 사랑채의 자리가 파할 줄 모르더니 어느새 끼니때가 돌아온다. 안채의 주인은 이미 그럴 줄 알기라도 한 듯 진작부터 준비한 괴헌가 전승음식들을 정성스레 차려 사랑채에 들였다. 부족한 물산에 마음 졸이지 않고 차려낼 수 있는 것은 제철나물이다. 제때에 뜯어 생으로 양념에 버무리거나 삶아 무쳐낸 것도 있고, 지난 계절마다 뜯어다가 삶고 말린 나물도 있다. 기본으로 올리는 몇 가지 전과 함께 산에서 따는 도토리나 밭에서 자란 메밀로 만든 ‘묵채’는 자못 화려하기까지 하다. 채 썰어 담아 놓은 묵에 멸치다시마 국물을 끼얹어 데우고, 자작자작하도록 국물을 남긴다. 그 위에 제철 야채 중 색깔 다른 몇 가지, 물기 짜낸 김치, 계란 지단, 김, 형편이 되면 잘게 썰어 볶아둔 소고기까지 각양각색의 고명을 얹으니 말이다.
육회용 소고기를 잘게 썰어 참기름, 고추장, 꿀, 잣 등과 함께 순차로 잘 볶아 수분을 없애고 몽실몽실하게 조리한 ‘육말’은 괴헌가 전승음식 중 하나로 이가 부실한 노인을 배려한 것이다. 명태, 대구포, 육포를 각각 물에 담갔다가 건져 살짝 찐 다음, 물기를 짜내고 손으로 뜯어 물에 담그면 보푸라기가 부풀어 오르는데 이것을 체에 걸러 만든 ‘보푸람’도 노인을 위한 전승음식이다. 반드시 올리는 전승음식으로 ‘수란’도 있다. 끓는 물에 계란을 깨 넣어 터지지 않도록 익힌 노른자에 흰자를 덮어 반숙으로 그릇에 담는다. 계란 삶은 물에 간장, 식초, 참기름, 설탕을 넣어 새콤달콤하게 간하여 계란 위에 붓고 석이버섯, 실고추, 잣가루를 고명으로 얹은 그것이다.
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하나같이 특별하지 않은 재료에 정성을 더한 것들이다. 아니, 사람을 향한 지극함에 자연의 재료를 더한 것이다. 접빈객과 봉제사는 다르지 않은 하나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으면 아무런 바람 없이 사랑을 다해 기른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것은 나아주고 길러주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이다. 바람 없는 사랑은 인간에 대한 경외심이 바탕이다. 그래서 자식이나 부모가 아니어도 사람은 지극함으로 대해야 하고, 그에 바치는 음식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물산이 풍부해지며 자연과 가장 가까운 우리 음식이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기쁜 일이지만 우려되는 것은 외양에 치우치고 사람보다 먼저 잇속을 찾는 이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거창한 이름의 전통음식제 운운의 행사에 사람과 정성은 보이지 않고 요란한 빛깔과 화려한 치장만 보인다면 꽃도 피우기 전에 시들게 될 터이다. 이화주와 괴헌가 전승 음식에서 먼저 배워야 할 것은 사람에 대한 지극함, 바로 선비의 마음이다. 공동기획: priede GyeongBuk
바래미[海底] 입향조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명 칭
:
의성김씨 팔오헌종택(義城金氏 八吾軒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734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읍 해저리 734)
건 축 주
:
김성구(金聲久)
건축시기
:
1700년
소 유 자
:
김흥원(관리자 :김흥원)
문 화 재
:
봉화군 문화재자료 제445호, 2003-08-14 지정, 3동
건축 구성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은 봉화 영주 사이의 36번 2차선 국도에서 20여 m 북쪽으로 들어앉아 있다. 밭 사이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바깥마당이다. 따로 대문은 없다. 눈앞을 막아서는 것은 사랑채 건물이다.
사랑채 건물은 옛 목재를 거의 대부분 사용하여 말끔하게 보수를 하였다. 군데군데 새로 덧댄 목재의 색감과 옛 목재의 색감이 무리 없이 어울리기 위해서는 조금 세월이 흐를 필요가 있으리라.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서쪽 3칸 부분에는 앞으로 반 칸 규모의 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동쪽 1칸 부분은 앞쪽까지 방이 나와 있는데, 그 앞으로 마루판이 사선을 그리며 나아가 좁은 쪽마루를 만들어내고 있다.
서쪽 2칸은 방이다. 칸마다 2쪽의 방문이 마련되어 있고, 역시 2쪽씩의 여닫이 덧문이 달려 있다. 동쪽에서 첫 번째 칸은 4쪽의 큰 방문이 벽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동쪽 두 번째 칸의 정면 벽도 역시 구조는 마찬가지이다. 앞으로 나와서 있고 조금 뒤로 들어앉아 있는 차이일 따름이다. 동쪽 첫째 칸이 앞으로 나오므로 두 번째 칸과의 사이에 생긴 반 칸 규모의 옆면에는 작은 2쪽 문이 달려 있다.
사랑채 건물의 서쪽으로는 반 칸 정도 뒤로 물러서서 정면 2칸, 측면 1칸의 문간채가 따로 붙어 있다. 사랑채 건물과 연결되어 있는 부분은 중문 영역이고, 그 서쪽은 1칸 규모의 방이다.
사랑채 건물의 동쪽 끝에 있는 방 앞으로 튀어나오게 가설된 쪽마루는 동쪽 건물채 영역으로까지 돌아나가도록 처리되어 있다. 동쪽 건물채는 5칸 규모이다. 5칸 중 남쪽 3칸까지 쪽마루는 돌아나간다. 네 번째 칸은 측문 영역이고, 다섯 번째 칸은 안채 건물의 동편 벽을 이루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도 앞으로 쪽마루가 덧붙여져 있다.
안채건물은 뒤에서 보면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로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앙의 2칸은 2쪽 나무판 문을 달고 있는 마루이고, 좌·우로 1칸씩은 방이다. 중문 안으로 들어가면 안마당은 사방이 서로 높이가 조금씩 다른 뜰로 둘려 있고, 굵은 모래를 깔아 풀이 많이 나지 않도록 처리되어 있다. 어쩌면 이곳의 토질이 모래 성분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안채 쪽에서 사랑채의 뒤편을 보면, 아랫부분이 반 칸 정도 일선으로 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굴뚝은 기와와 백회를 이용하여 50cm 정도 높이로 아랫부분을 만들고, 그 위에 나무판으로 만든 4각 연통을 올려 세운 형식이다. 사당은 안채의 동쪽 측문을 통해 나가면 바로 눈앞을 막아선다. 사각형 모양의 높은 울타리를 짓고 들어앉았다. 사당의 문간채와 본채의 목재들은 빠짐없이 칠이 되어 있다.
현판
팔오헌(八吾軒)
팔오헌명(八吾軒銘) -안분지족하는 삶의 8가지 규범 경오전(耕吾田 : 내 밭에서 난 식량을 먹는다.) 음오천(飮吾泉 : 내 샘의 물을 먹는다.) 채오전(採吾巓 : 내 산에서 난 나물을 뜯어 먹는다.) 조오천(釣吾川 : 내 시내에서 낚시를 한다.) 피오편(披吾編 : 내가 엮은 책을 보고 공부를 한다.) 무오현(撫吾絃 : 내 거문고를 탄주한다.) 수오현(守吾玄 : 내 고요한 생활을 지킨다.) 종오년(終吾年 : 내 수명을 다 산다.)
문중 이야기
- 해저의 소나무 밭, 여씨에서 김씨로
전통시대에는 오늘날의 우리와 생각하는 방식이 많이 달랐다. 오늘날은 봉화 영주 사이의 36번 도로와 태백선 철도 때문에 잘려져 나갔지만, 전에는 해저마을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에서 서쪽 방향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동쪽 방향을 향해 나가며 길게 소나무 숲이 조형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 숲은 실제의 목적이 방수림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이 지역은 내성천 물길이 휘돌아 나가는 곳으로, 홍수 때 범람의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도로 가설되었을 소나무 숲은 시대가 흘러갈수록 해저마을이 의성김씨 일문의 세거지로 확장되어 나갔던 역사와 맞물려서 재미있는 이야기 소재로 변환되기에 이른다. 원래 이곳은 의령여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기지였다. 그들이 이 지역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해저와 봉화읍 사이의 개따밭골 입구에서 호평들을 향하여 펼쳐진 산수의 모습이 한자로 여씨의 ‘여(余)’라는 글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야기는 전제한다. 그 ‘여’자의 끝에 일선으로 소나무 숲이 들어서게 됨으로써 一자의 한 획이 더해져 ‘금(金)’자의 형상을 갖추게 되었고, 그것이 지력에 영향을 끼쳐 여씨 성의 퇴조, 김씨 성의 약진이라는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전국 구석구석에서 산견되지만, 여기 해저 마을에서도 우리는 그 사례 중 하나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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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건(金汝鍵)
- 안분지족 하는 마음
의성김씨 팔오헌종택을 처음 지은 사람은 의성김씨 팔오헌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개암공파가 해저마을에 자리 잡게 한 입향조인 셈이다. 의성김문의 중시조는 첨사공(詹事公) 김용비(金龍庇)이다. 김용비는 4남을 두었는데 3남이 김영(金英)이다. 김영의 아들은 김지예(金之銳)이고, 김지예의 2남은 김용초(金用超)이다. 김용초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개국원종공신이다. 김용초의 시대에 이들, 의성김문의 한 갈래는 경기도 용인에서 낙남하여 성주로 옮겨 앉았다. 김용초는 의성김씨 세계상 13대에 속한다. 이 계열은 19대 김희삼이 4남을 둠으로써, 본격적인 번성의 길로 들어선다. 해저의 개암공파의 파조가 되는 것은 2남 김우굉이다. 개암공 김우굉은 성주를 떠나 상주 개구암(開口巖)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호 개암은 이것으로부터 기인된다. 개암공 김우굉이 상주로 이거하는 것은 배위인 남양홍씨의 친정 부근을 찾아든 탓이라 할 수 있다. 김우굉의 아들은 김득가(金得可)이고, 김득가의 아들은 김율(金瑮)이다. 김율은 임진왜란 때 모친을 등에 업고 피난을 다니다가 봉화의 호평(범들이)[→석평리(石坪里) 용담(龍潭)] 마을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호평은 지금 해저마을 앞을 흐르는 물길 너머에 있는 너른 들이다. 김율의 2남은 김추길(金秋吉)이다. 김추길은 우복 정경세의 문인이다. 김추길의 2남이 의성김씨 팔오헌종택 김성구이다. 김성구는 자가 덕휴(德休), 호가 팔오헌이다. 팔오헌이란 앞의 기명에서 알 수 있듯이, “내 밭을 일구어 먹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산에서 나물을 뜯고, 내 시내에서 고기를 낚고, 내 책을 펼쳐 보며 공부를 하고, 내 거문고를 뜯으며 즐기고, 내 그윽한 마음의 평정을 지키고, 내 수명을 다하리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안분지족하는 마음의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명문이라 하겠다. 그는 문과 출신으로 벼슬이 대사성에까지 이른다. 문집이 있다. 배위는 정부인 권씨로,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자손들이 오래 머물러 살만한 땅을 구하였는데, 그의 눈에 든 곳이 바로 해저마을이다. 김성구는 의성김씨 세계상 24대에 속한다. 김성구의 아들은 김여건(金汝鍵, 1660-1697)으로, 그의 자는 천개(天開)였다. 문과 출신으로 수찬에 이르렀다. 조덕린이 지은 행장이 있고, 이광정이 쓴 묘갈명이 있다. 그로부터 10대를 내려오면 현 종손인 김호충(金鎬忠)이 있다. 김호충의 자는 서백(恕伯), 1927년생이다. 부인은 진성이씨인데, 선산부사 이정의 주손인 이용순(李容純)의 딸이다. 차종손은 김흥원(金興源)으로, 1949년생이다. [註 : 2012년 현재 종손은 김흥원임]
무안 현감(務安縣監), 여주 목사(驪州牧使), 정의 현감(旌義縣監),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평정을 잃지 않는 성품
김성구는 어려서부터 차분하고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대여섯 살 때 또래 아이들과 집 근처 바위 밑에서 놀고 있었는데, 마침 벼락이 바위에 떨어졌다. 집안 식구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 보니 다른 아이들은 혼이 반쯤 나갔는데, 김성구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또 정의 현감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배가 거의 뒤집힐 뻔하였다. 같은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사색이 되었는데, 그만 단정하게 앉은 채로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같이 있던 임홍망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살고 죽는 것은 명에 달린 것이지, 내가 놀라서 허둥댄다고 해서 무슨 득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승지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하루는 숙직을 설 때 술이 과하여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임금이 급하게 찾았다. 옆에 있던 이들이 부축하고 조복(朝服)을 입혀주자 그가 문부를 지니고 들어갔다. 임금을 대할 때 매우 삼가는 태도로 대했으며, 글을 옮겨 쓰는데 글자가 매우 반듯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바로 취하여 쓰러졌다. 이처럼 그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도 당황하거나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취해 있었어도 똑바른 자세가 필요로 할 때면 고도의 정신력을 발휘하여 평정을 유지하였다.
강직한 성품,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다
김성구는 관직에 나아가서는 공평무사하고 청렴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때문에 이항(李沆)은 “관직자들은 누군가의 후원을 받아 관직에 오른 자가 많지만, 김성구만은 누구의 후원 없이 청현(淸顯)에 이르렀으니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하였다. 또 강원도 관찰사를 제수받았으나 가사를 이유로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호를 팔오헌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팔오라는 것은, “내 밭을 갈고, 내 샘물을 마시고, 내 채마밭에서 나물을 먹고, 내 강에서 낚시질 하며, 내 거문고와 책을 뜯고 읽으면서, 분수에 맞춰 생을 마친다.[耕吾田 飮吾泉 採吾巓 釣吾川 撫吾絃 披吾編 守吾玄 終吾年]”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처럼 그는 철저히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삼찬오보(三竄五補)의 불운을 당하다
그는 언관으로 근무할 때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수찬 재직 시에는 국가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 언의 소를 올렸고, 정언 재직 시에는 당시 형조 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런데 1679년(숙종 5) 장령(掌令) 재직 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탁남의 견제를 받아 정의 현감의 외직으로 쫓겨남을 당했다. 이때 이봉징·이옥 등 3명은 유배당했고, 그와 이석관 등 5명은 외직으로 쫓겨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삼찬오보’라고 하였다.
가 족
조
:
김율(金瑮)
생부
:
김추길(金秋吉)
모
:
전주유씨(全州柳氏) 유화(柳華)의 딸
형제
:
김성후(金聲厚)
안동 내성으로 이거 후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다
김성구는 김우굉의 후손으로 원래 성주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그의 조부인 김율이 처음 안동부 내성현으로 이거하였고, 그와 그 아들인 김추길이 계속 진사에 올라 집안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김성구까지 진사를 거쳐 문과에 올라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김성구의 집안은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특히 김성구는 부승지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온 뒤 집을 봉화읍 석평리의 호평[→석평리(石坪里) 용담(龍潭)]에서 해저로 옮기고 학록서당(鶴麓書堂)을 창건하여 후진 양성에 생애를 바쳤다.
형제간의 우애가 남다르다
그는 늘 자손들에게 잘못된 습속을 따르지 말고 형제간의 우애를 잃지 말도록 가르쳤다. 그 자신 역시 남다른 우애를 보였는데, 아이였을 때도 늘 동생을 데리고 놀다가 혹 동생이 넘어져 다치면 그를 얼싸안고 엉엉 울기까지 하였고, 동생이 일찍 죽자 그 자식들을 마치 친자식처럼 돌보아 주었다. 형님하고는 50년을 함께 살면서 한 번도 그 뜻을 어기지 않았고, 해저로 이사한 이후에는 늘 지팡이를 짚고 형님을 찾아뵈었다.
남의 흉을 보지 말아라
그는 후손들에게 다른 사람의 흉을 보지 말도록 엄하게 단속하였다. 집안의 어린 아이들 중에 남들보다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말하는 아이가 있으면, 늘 “아이들은 공손함과 근신함이 중요하다. 그렇게 남을 흉보는 것을 보니 경박하고 상서롭지 못하다. 한갓 글재주가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하면서 나무라곤 하였다. 그 자신도 아무리 취해도 남의 말을 하지 않았고, 옆에서 누군가 남의 흉을 보면 묵묵부답 대꾸하지 않거나 혹은 못들은 척 하였다.
안동권씨와 혼인하여 3남 5녀를 낳다
김성구의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이다.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5대손이고, 영릉 참봉(英陵參奉) 권목(權霂)의 딸이다. 그녀는 19세에 시집와서 시부모 봉양과 남편 내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게 부귀영화를 구하지 말고 자신을 수양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자식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의 이름은 김여건(金汝鍵)·김여용(金汝鎔)·김여당(金汝鏜)·김여병(金汝鈵)이다. 딸들은 사인(士人) 조해(趙瀣), 생원(生員) 홍서귀(洪瑞龜)와 혼인하였다.
학 문
향사
:
봉화 송록서원(松麓書院)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손만웅(孫萬雄)
많은 후학을 양성하다
김성구는 원래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암기한 것은 평생토록 잊지 않았는데, 한 번도 학문을 닦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연 학문의 성취가 남달랐는데, 간혹 동리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그의 교육 방법은 재주와 능력에 따라 진도를 달리하였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과거에 오른 이들이 매우 많았다.
학록서당을 뒤로하고 다시 마을 입구로 나와 왼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해저 김건영가옥이 있다.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해관 건영(海觀 金建永) 선생(1848∼1924)이 지은 집으로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할 때 이곳 사랑채가 지역 유림들의 연명장소로 이용되었던 아주 뜻 깊은 곳이다. 김규영선생의 문과홍패와 김건영선생의 소수의망첩 등의 전적이 보관되어 있다.
앞면 6칸·옆면 6칸 규모로 비교적 큰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 출입은 오른쪽에 있는 중문으로 하게 하였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을 취하고 있는데, 안방 2칸은 마당 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사랑채는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평면은 가운데 공간을 나누어 좌우의 작은사랑과 큰사랑으로 분리시켰다.
본 건물(建物)은 해관 김진영(海觀 金建永)(1848∼1924)이 건립(建立)한 가옥(家屋)으로, 선생(先生)은 구한말(舊韓末)의 독립운동(獨立運動)가로서 삼봉(參奉), 산릉감조관(山陵監造官),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등을 역임하였고, 일제 하의 1919년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전개할 때 사랑채가 지역 유림(儒林)들의 연명장소(聯名場所)로 이용되었다. 규모(規模)는 정면(正面) 6칸, 측면(側面) 6칸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자형 주택인데 안채로의 출입(出入)은 우측면(右側面)에 있는 중문(中門)으로 하게 하였다. 사랑채는 5량가(樑架)의 팔작(八作)지붕으로 되어 있는 평면(平面)은 중앙(中央)의 책방(冊房)이 퇴간(退間)을 막아 좌(左)·우(右)의 작은 사랑과 큰 사랑을 분리(分離)시켰다. 안채부분은 일자형(一字形)의 평면(平面)을 취하고 있는데, 2통간(通間)의 안방은 마당쪽으로 향(向)하도록 하여 일조(日照)에 유리(有利)하도록 하였다. 건물에는 김규영(金圭永)의 문과홍패(文科紅牌)(1885), 김건영(金建永)의 소수의망첩(疏首擬望帖) 등의 전적(典籍)이 있다.
바래미 '다현재'와 참판댁
茶賢在
중요민속자료 169호 해저만회고택(海底晩悔古宅)
해저리마을의 오른쪽 깊숙한 곳에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있는 집으로 이 문화재는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 만회(晩悔) 김건수(金建銖)(1790∼1854)가 살던 집으로 1984.01.10 지정되었으며, 소재지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485번지이다.
김건수는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냈다.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수리한 바 있다.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삿다고 전한다.
ㄷ자형의 안채와 T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중문채가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안채는 남향한 중앙에 대청이 있고, 대청 양쪽에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一자형 중문간채가 있었으나 없어져 현재는 남쪽이 트인 상태이다.
사랑채는 안채의 동쪽 날개 끝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있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뒷쪽에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옛 경북지방의 ㅁ자 집 평면배치법과 통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주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만회(晩悔) 김건수(金建銖)는 순조(純祖)30년(年)(1830)에 정시(庭試)로 등제(登第)한 후에 봉화현감(奉化 縣監), 김해부사(金海 府使) 등을 거쳐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까지 지냈다. 이 건물의 안채는 만회(晩悔)의 6대조가 이곳에 정착하여 선주(先住)하던 여씨(余氏)에게서 매입하였다 하는데 초창연대(初創年代)는 알 수 없다.
사랑채인 명월(明月) 누(樓)는 만회가 건립하였는데 철종(哲宗) 원년(1850)에 중수(重修)한 적이 있고, 안채 앞의 중문간채는 기울어져서 1981년 임시로 철거하였다.
이 집은 마을의 우측 깊숙한 곳에 숲이 우거진 뒷동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건물을 앉혔다. 골목어귀 수목 사이로 보이는 사랑채의 정면은 높은 축대 위에 서 있으며 우측에 돌출한 누각(樓閣)의 합각지붕 추녀 곡선은 날아갈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안채는 ㅁ형으로 남향하여 배치되고 그 앞에 一자 중문간채가 놓여져 튼ㅁ자를 이루고 있었으나 중문간채가 철거되어서 현재는 내정(內庭)의 남쪽이 터진 상태이다. 안채의 중앙은 3칸 대청(大廳)이 차지하였는데 어간(御間)의 기둥 간격이 양협간(兩夾間)보다 넓게 배치되어 있다. 대청 좌우의 익사(翼舍)에는 안방과 상방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었는데, 좌측의 안방 위쪽 웃방은 바닥이 널마루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온돌방이었고 이 방에서 도장방을 출입하게 되어있다. 대청 우측에는 상방 위쪽에 장고방이 설치되어 있고, 마당쪽으로는 상방부엌을 건너 건넌방이 1칸 놓여져 있다. 안채의 구조는 잡석(雜石) 축대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방주(方柱)를 세웠고 전면이 개방된 대청의 상부 가구(架構)는 삼량가(三樑家)로 제형(梯形) 판대공(板臺工)을 올린 간략한 구조다. 대청 뒷벽 각칸의 중방 하부(下部)에는 판벽(板璧)을 꾸미고 중앙에 양개(兩開) 널문을 내었는데, 여는 것과 다르게 쌍미닫이 널문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전면주(前面柱)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정면 4칸중 좌측 3칸은 후면에 2칸통 사랑방과 사랑마루 1칸을 배설하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배치하며 기둥 밖으로 헌함을 설치하였다. 우측 1칸은 후면에 뒤쪽으로 길게 칸반 크기의 온돌방을 배설하고 그 뒤에 반칸 크기의 감실방을 두었다. 전면쪽은 누(樓)마루를 돌출시키고 외부쪽 3면벽을 판벽(板璧)으로 꾸며 두짝열개 울거미널문을 각각 설치하여 마루방처럼 꾸몄으며, 3면 판벽의 바깥쪽으로는 쪽마루를 뽑아서 헌함을 돌렸다.
안채는 조선 중기 건축으로 추측되며 안방과 사랑방 뒤쪽에 각각 수납공간을 두고 있는 경북지방 ㅁ자집의 고식(古式) 평면배치법이 통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대청 뒷벽의 양개(兩開) 널문이 미닫이로 되어있는 점도 흔치않는 예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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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의 고덕을 경모기념 하기 위해 세운‘映奎軒’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소재
2013년 04월 01일(월) 19:34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김뢰식이 그의 조부 김철수의 고덕을 후세에 길이 경모기념하기 위해 세운 영규헌 전경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봉화읍 해저리 바래미 마을에 있으며 김뢰식(金賚埴) 이 그의 조부(祖父)김철수(金喆銖)의 고덕(高德)을 후세(後世)에 길이 경모기념(敬慕記念)하기 위하여 세운 서재(書齋)로 사용하였던 정자로서 비지정 문화재이다. 영규헌(映奎軒)에는 국내(國內)에서 간행(刊行)한 명저(名著)와 중국고대(中國古代), 당송대(唐宋代)의 중국본서적(中國本書籍)이 보존(保存)되고 있다. 건축 양식은 홑집 중당협실형으로 5량가의 정면4칸,측면1.5칸의 팔작지붕 형태이다. 김뢰식(金賚埴 : 1877~1935年) 선생은 의성김씨 세계(世系)상 제32대이다. 그의 자는 은필(殷弼), 호는 남호(南湖)이다. 김뢰식은 전 재산을 저당 잡혀 대부를 받아서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그 공이 인정되어 1977년 국가로부터 건국공로 표창을 받았다. 배위는 안동 권씨, 충재 권벌의 후손이다. 김철수(金喆銖 :1822 ~ 1887)선생은 본관은 의성. 초명은 박수(璞銖), 자는 내극(乃克), 호는 노원(魯園)·미추자(味鄒子). 아버지는 통덕랑 김재신(金在信)이고,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후손과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담(金淡)의 후손인 김장배(金章培)의 딸이다. 김철수(金喆銖)선생은 1822년 봉화 해저촌(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서 태어나 3세에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횡송(橫頌)하고 도송(倒頌)해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5세 때 천연두에 걸렸으나 등불 심지를 볶아 먹고 나았으며, 9세에 의성김씨 시문집인 문소세고(聞韶世稿)를 간행할 때 벽자(僻字)도 잘 알았다. 10세 이후에는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환하게 알았고, 할아버지 문천공(文泉公)이 가르쳐 준 것도 모두 암송했다. 1835년 음죽이씨(陰竹李氏)와 혼인하였다. 1849년에는 모친상을, 1851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대로 상을 치렀다. 1858년(철종 9) 노원서실(魯園書室)을 지었고, 1864년(고종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존경각(尊經閣)의 장서를 탐독하여 성현(聖賢)을 존경(尊敬)하고 도(道)에 몸바칠 것을 깊이 다짐하였다. 1867년 이헌기(李憲基)의 죄상을 지적했다. 1871년 사액서원 중 47곳을 남기고 나머지는 훼철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분개하기를 “서원훼철이 교화(敎化)에 관계됨이 막중(莫重)하니 신자(臣子)로서는 마땅히 간쟁(諫爭)하여야 할 일인데 오히려 태학(太學)에서 먼저 철향론(撤享論)을 주장하겠느냐” 하고 유건(儒巾)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집정(執政)에게 미움을 받아 하옥되어 문의현(文義縣)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명천(明川)으로 이배되었다. 나중에 풀려 나와 괴산의 제월대를 거쳐 7월에 노원 자택으로 돌아왔다.향리에 숨어살며 독서와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유배 생활 동안 도내 서원과 친구들이 보내준 위로 서신과 물품 중에서 서신은 받고 물품은 돌려주었으며, 훼철된 이산서원과 삼계서원으로 가서 사우들과 통곡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올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0년 뒤 왜구가 들어오고 사설(邪說)이 만연함을 개탄하며 이단을 배척하는 여러 글을 모으고 호를 미추자(味鄒子)라 하였다. 병풍에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과 서경(書經)의 무성편(武成篇)을 손수 써서 농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1876년에 삼계서원에서 천사(川社)의 부계장(副契長)으로 향음주례를 시행하였고, 1877년에 영남 유생들이 서원의 복설 상소를 올리고자 소수서원에 소청을 차렸을 때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 1878년 봄에 학사공(學士公)의 고식(故寔)을 간행하였고, 추령의 선비들이 충재 권벌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자 김철수를 소수(疏首)로 추천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저서로는 노원집(魯園集) 10권 5책이 전한다. 1879년(고종 16) 이후에 기자로부터 대산 이상정(李象靖)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전현들의 장갈문을 찬집하여 동헌록(東憲錄)을 지었고, 1884년(고종 21) 역대성현전수편(歷代聖賢傳授編) 1권을 편집하였다. 수득록(隨得錄)·모년기사음청약기(某年記事陰晴略記)·노원만록 및 경사와 제자서 1,000여 권이 노원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노원집(魯園集)은 목판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되어 있으며 1913년 그의 아들 난영(蘭永) ·화영(華永)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2에는 사(辭)와 시(詩), 권3∼4에 서(書), 권5∼6에 청장(請狀)과 잡저(雜著), 권7에 서(序)·기(記)·설(說)·발(跋)·전(傳) 상량문·명(銘), 권8에 제문(祭文)·뇌문·유사(遺事)·행장(行狀), 권10은 부록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서(書)의 여기산정장민병(輿箕山鄭丈民秉)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뜻이 담긴 것으로, 당시 유림(儒林)들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내성사약절목(奈城社約節目)은 그가 내성사의 부계장(副係長) 때 지은 것으로, 국조향례합편(國朝鄕禮合編)과 창로사약(蒼老社約)의 도표(圖表)를 참고하여 사약(社約) .벌목(罰目) .벌칙(罰則) .독약례(讀約禮)와 각종 행례(行禮)에 대한 도표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으므로, 당시의 계(契)에 관한 연구에 귀중한 참고자료가 된다. <정리=봉화군문화재지킴이 방유수>
학록서당(鶴麓書堂)
2013년 10월 07일(월) 13:02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 봉화일보 인터넷뉴스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奉化邑 海底里) 바래미 마을에 있는 정자로서 비지정 문화재 이다. 학록서당은 김성구(金聲久) 선생이 후학들의 학문과 덕을 닦기 위하여 건립한 정자로서 겹집 측면마루의 정면 3칸, 측면 2칸인 5량가의 팔작지붕의 형태를 한 건물이다.
김성구(金聲久 : 1641 ~ 1707)의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이다. 조부는 김율(金瑮).아버지는 김추길(金秋吉).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 유화(柳華)의 딸이다.
부인은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후손인 영릉 참봉(英陵參奉) 권목(權霂)의 딸이다. 그녀는 19세에 시집와서 시부모 봉양과 남편 내조에 최선을 다하고 자식들에게 부귀영화를 구하지 말고 자신을 수양하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한다.
자식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네 아들의 이름은 김여건(金汝鍵)·김여용(金汝鎔)·김여당(金汝鏜)·김여병(金汝鈵)이다. 딸들은 사인(士人) 조해(趙瀣), 생원(生員) 홍서귀(洪瑞龜)와 혼인하였다.
김성구는 개암 김우굉의 후손으로 원래 성주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그의 조부인 김율이 처음 안동부 내성현으로 이거하였고, 그와 그 아들인 김추길이 계속 진사에 올라 집안의 기초를 다졌다. 그리고 김성구까지 진사를 거쳐 문과에 올라 3대가 계속 진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김성구의 집안은 내성현 지역의 대표적인 명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김성구는 1662년(현종 3) 사마시(司馬試)에 壯元으로 합격 生員을 거쳐 166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였고, 내관직으로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병조 참지(兵曹參知),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냈으며, 외관직 으로는 무안 현감(務安縣監), 여주 목사(驪州牧使), 정의 현감(旌義縣監)을 지낸후 1692년(숙종 19)에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자기 집 방문위에 팔오헌(八吾軒)이라고 써 붙이고 후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실천한 팔오(八吾)의 내용은 경오전(耕吾田 : 내 밭을 갈고) 음오천(飮吾泉 : 내 샘의 물을 마시고) 채오전(採吾巓 : 내 채마밭의 나물을 먹고) 조오천(釣吾川 : 내 강에서 낚시질하고) 무오현(撫吾絃 : 내 거문고를 뜯고) 피오편(披吾編 : 내 책을 읽으면서) 수오현(守吾玄 : 내 분수에 맞게 현묘함을 지키고) 종오년(終吾年 : 내 생애를 마치겠노라) 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김성구는 인생관(人生觀)의 요체(要諦)인 팔오수강(八吾守剛)을 성실(誠實)하게 지키며 후학 들에게 근면(勤勉), 자조(自助), 협동(協同)의 자립정신(自立精神)을 고취(鼓吹)시키고 실학사상(實學思想)을 강학(講學)하는등 후학배양(後學培養)을 하다가 세상을 떴다.
문집으로 팔오헌집이 있는데 총 7권 4책으로 시(詩)와 제문(祭文)·행장(行狀) 등이 실려 있다. 부록으로는 행장(行狀)·제문(祭文)·묘지명(墓誌銘)·묘갈명(墓碣銘) 등이 있다.
해저마을 입구에 들어갈 순간부터 가슴이 설레다가 돌아올 때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 건 저만이 아니겠지요. 여러 족친들 덕분에 넉넉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특히 금년에는 봉화군에서 영조때 안동의 노론세력을 넓히기 위한 학동서원을 송암공이 주도하여 훼철한 과정을 기록한 『무오일기』와 정조때 와은공과 해와공이 주도하여 사도세자를 신원 회복하라고 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리는 과정을 기록한 『임자일록』을 번역하기로 하였습니다.
< 토향고택 안주인 님이 쓴 시가 기와장에 고스란히..>
<토향(흙의 향기)> 토향고택 별채>
<고선계곡(구마당계곡)에서 나>
<황지연못(낙동강 원류)에서 부터 흘러온 내성천의 범들이 갱변>
< 낚시 고수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중탁 님)>
<엉킨 낚시줄을 푸느라 열중인 종하, 호명님>
<잡은 물고기가 망안에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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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巖公 不祧位忌祭日 (2011年 陰 1月11日 촬영)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속칭: 바래미) 수오당(守吾堂) 참판댁 전경 불교일주문 회원 根普댁 고가체험지정된집 임니다.
대문에서본 큰사랑채와 안사랑채
별채와 안사랑채
큰사랑채, 작은사랑채, 대문
별채, 큰사랑채,작은사랑채, 대문
안사랑채뒤 산밑에 고가는 의성김씨 개암종택
수오당 입구 담장길
수오당(守吾堂)(참판댁)
* 큰사랑채 → 2.8평 방1개와 3.4평 마루
* 작은사랑채 → 2평 방2개(중간 칸지름). 툇마루
* 안사랑채 → 4평방1개, 2평방1개. 마루 주방, 사워실및 화장실,
* 별채 → 한옥형 황토집 4평방1개. 2.7평방2개(중간 칸지름)
주방, 사워실및 화장실
* 가족단위 고택체험에 적합한 구조로 되어있읍니다.
* 예약 전화번호 : 070-4123-2822, HP 010-7587-1155 根普김상완
바래미[海底] 독립운동 약사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바래미가 생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 선생이 1919년 바래미 만회고택 명월루와 해관구택에서 제1차유림단사건(일명 파리장서사건)이 된 ‘파리장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시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1925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모금 운동이 발각된 제2차유림단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도 바래미에서 황소 쉰 마리 값을 모금, 심산 선생에게 건넨 사실이 발각되어 온 마을이 쑥밭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더욱 심해진 왜경의 감시 속에서도 선조의 애국충정과 선비 정신을 이어받은 젊은 세대들이 1933년 비밀결사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하다 발각된 독서회 사건으로 또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러야 했고, 이러한 바래미 항일 독립운동은 학생층에까지 3대로 이어져 대구, 일본,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당시 온 마을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창희(昌禧), 중욱(重旭) 등 많은 독립유공자들이 더 있는데도, 자료 미흡과 증거 유실로 인해 독립유공자 14분에 그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단일 부락으로는 많은 독립유공자를 내어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빠져서는 안 될 바래미기에 이 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워 선대의 그 뜻을 기리고자 한다.
後孫 哲鎭 謹識 鍾九 謹書
개암공(開巖公, 1524-1590)은 휘는 우굉(宇宏), 자는 경부(敬夫), 본관은 의성 (義城)으로, 남명·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절차탁마하여,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을 거쳐 전적·정언·헌납·부수찬·사복시정·동부승지·대사간·대사성 ·승지·충청도관찰사·홍문관 부제학·광주목사 등을 두루 거친 청백리셨다.
‘개암십이곡’ 창작 시기는 상주 개호(開湖)에 머문 1585-1587년 사이로 추정되며, 개암공의 증손인 외서암공(秋任, 1592-1654)께서 12곡 중 8곡을 수집하여 수록하고 「개호잡록(開湖雜錄)」이라 하였다. 서울대학교 권두환·조해숙 교수가 개암공 7대손 소암공(鎭東, 1727-1800)의 필사본「추모록」에서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이후 최근에 「개호잡록(開湖雜錄)」이 발견되어, 그 중 4곡을 원본 표기대로 시비에 올린다.
‘개암십이곡’은 교훈 목적의 ‘도산십이곡’(1565)과 달리, 개암공 자신의 인생관을 바탕으로 사물을 통한 은유적 현실 비판과 선비의 강호지락을 노래함으로써 문학적 완성도를 높임은 물론, 향촌 문화로서의 시조 전승 과정 및 정착 시기와 발전 과정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문학사상 중요한 의의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팔오헌(八吾軒)공의 휘는 성구(聲久, 1641-1707), 자는 덕휴(德休), 본관은 의성(義城)으로, 부제학 개암공 우굉(宇宏, 1524-1590)의 현손이시다. 1662년 사마시에 장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신 후, 전적·현감·지평·수찬 ·부승지·정언·수원부사·여주목사·대사성·강원도관찰사 등을 지내셨으며, 공의 위민복리 사상과 철학은 목민관의 귀감으로 유림의 추앙을 받으셨다. 봉화의 송록서원에 배향되셨으며, 문집으로 「팔오헌집」7권 4책이 있다. 특히 문집 속의‘남천록(南遷錄)’은 외직인 제주 정의현감으로 나가셨다가 돌아오시기까지의 일기로, 붕당 정치는 물론, 제주의 바닷길·풍물·전설·신화 ·언어·민속·특산물·지리·도서·공물·방위 등을 문헌과 답사를 통해 기록하여 당시 사회상과 제주 연구의 귀중한 사료(史料)로 이용되고 있다. 공께서는 1694년(숙종 20) 청백리 목민관으로 벼슬길에서 물러나 낙향하시어 후학을 양성하시며 청빈한 참 선비의 삶을 사셨는데, ‘팔오헌명’은 그러한 팔오헌공 인생관의 요체를 담은 여덟 가지 명(銘)이다. 바래미에서 대과 열여섯 장이나 나온 것도 후손들이, “우리 집안은 대대로 맑고 깨끗함을 전해 내려왔으니, 자손 된 자들은 삼가 지키고 바꾸지 않는 것이 옳다.(家世以淸素相傳 爲子孫者 謹守勿替可也)”고 하신 공의 유지를 받들어 청빈한 삶을 살면서도 학문에 정진한 때문이다.
팔오헌공(八吾軒公) 11대손 哲 鎭 謹識 鍾 九 謹書
門會長 인사 말씀
暴炎之節에 오늘 본 門中의 除幕式 행사를 위하여 참석해 주신 봉화 군수님을 비롯한 봉화읍 관계자 여러분, 광복회, 보훈처 여러분, 그리고 京鄕 각지에서 먼길을 달려와 주신 來賓 여러분과 族親들께 먼저 感謝를 드립니다. 특히 소암공의 「추모록」에서 ‘개암십이곡’의 8수를 최초로 발견하여 논문을 발표해 주신 서울대학교 조해숙 교수님께 거듭 感謝의 말씀을 전합니다.
독립운동기념비와 개암 김우굉 선생 시비, 그리고 입향조 팔오헌 김성구 선생 명비 建立은 바래미 義城金門 三百여년 世居地 後孫들의 宿願事業이었으나 門中의 財力이 微微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바, 今般 봉화군 ‘참 살기 좋은 마을’ 사업에 선정되어 그 지원비와 후손들의 성금을 모아 비로소 建立을 마치고 오늘 除幕式을 가지게 됨으로써 이제 무거운 마음의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의성 김문이 1700년 바래미 입향 후 200년 동안 대과 16장과 진사 19분 생원 44분의 소과 63장이 나와 그때마다 세운 솟대가 여기 솔거리에 빼곡하여 ‘바래미에는 솟대 그늘에 우케를 못 말린다.’는 말이 나왔으니, 가히 그 學問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으며, 그 忠義 정신은 일제 시대까지 이어져 독립운동 유공 수훈자 14분이 나왔으니, 이는 바래미 마을의 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 除幕式을 마치면 이제는 또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後孫들이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계속 忠義孝親의 삶을 살며 선비 정신을 지켜나가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계속 이 마을 바래미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쏟아 주시길 바라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의 家庭에 幸福이 깃들기를 祈願하며 이로써 인사 말씀에 갈음할까 합니다.
海底 義城金門 門會長 金 重 景
때:2010년 7월 17일(토) 오전 11:30 곳: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바래미]
우리집 예쁜여우 수단좀보소
손자가 귀여워서 뭣을사줄까
자동차 좋아하는 손주녀석은
쬐끄만 우주선을 사달라는데
옆에서 듣고있던 우리집여우
아버님 그거말고 다른걸로요
봐둔게 있는데요 하고말하니
우째요 할수없이 알았다하네
마트에 나간다고 우루루가며
나는야 별일없다 빼놓고가네
마트로 간다더니 백화점가서
몇만원 손자점퍼 사들고왔네
점퍼만 사주며는 끝이아니지
손자넘 장난감도 들고왔고나
어제도 별수없이 시아버지는
며느리 여우짖에 넘어갔다네
뭐하나 사줄까라 말을못꺼내
평소에 요것조것 봐두었다가
아버님 뭐사줄까 하시는말씀
단단히 기다렸다 챤스를잡네
그래도 어여쁜걸 어찌하나요
알뜰히 살림하고 손자돌보며
수단껏 기분좋게 받아챙기니
딸없는 우리집에 웃음꽃이네
다산 정약용과바래미 김의 선조
1) 1789년(정조 12년) 정약용은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 해 가을에울산부사(정재원)로 계신 부친을 찾아뵙게 되었다.
그런데 열흘을 못 넘기고 돌아오게 되었다.
임금 교지에 의한 내각의 독촉문 작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귀경 길에 사건이 있었다. <사암선생연보:다산 정약용의 현손 정규영이 1921년에 쓴 다산연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른바 이진동(李鎭東) 피신 사건이라 칭할 수 있다.
정조 12년 남인영수인 번암 채제공이 우의정일때 예안의 진성이씨 과재 이진동 (춘양 녹동의 퇴계 이황의 숙부인 송재 이우 후손인 반초당 이명익의 후손,예천 호명면 종산리 고미태생)을 소두로 하는 영남 유생들은 <무신창의록>과 상소문을 갖고 상경했다.
<무신창의록>은 영조4년 이인좌의 난 때 이인좌 군에 저항한 영남사대부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으로 안동등 13개 고을의 사대부들은 서로 편지와 격문을 주고받으며 이인좌 군에 맞서 싸웠다고 서술한 내용이었다.
이 상소로 인하여 이진동은 노론의 미움을 받고 귀경길에 쫓기게 되다..
-"내각의 공문으로 인하여 돌아올 때 안동을 경유하게 되었다.
山長 '이진동(李鎭東)'이라는 사람이 상소한 일 때문에 고을원(원님)의 미움을 받아 고을 원이 다른 일로 그를 무고하여 죽이려고 하니 李鎭東은 '계곡(鷄谷) 권씨' 집에 숨어 있었다.
그(이진동)을 잡으려는 자들이 조령과 죽령에 잠복(노론)하고 있었다.
몰래 그 고개 밖으로 빠져갈 수 없다고 친구 몇 사람이 공(정약용)에게 알려 주었다.
공(정약용)이 말하기를 '사태가 위급하니, 비록 내각에 죄를 짓더라도 구해 주지 않을 수 없다'.
저녁녘에 말을 타고 120리를 달려 새벽녘에 영주에 이르렀다.
또 방향을 바꾸어 50리를 더 달려 虎坪(봉화 내성 범들이?)의 '김좌랑(김한동:봉화 해저,의성김씨,성천댁)' 댁에 이르렀다.
이진동이 청암정(봉화 닭실)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를 데리고 밤새 달리었다. 죽령을 넘어 단양에 이르렀다.
'오염'이 雲巖의 별장에 있다는 말을 듣고 李노인을 그곳에 머무르게하였다.
그렇게 화를 면하게 해주니 그 고을 원이 앙갚음을 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김한동 좌랑' 댁에서 그 지역, 의성 김씨 선비들을 만났다. 남인들이었다.
와은 김한동(봉화 해저,정약용과 같은 해에 급제), 표림 김희직(봉화 해저,송암 김경헌손자), 갈천 김희주(봉화 해저,참판댁),.. 그리고 고식헌 김희락(봉화 해저,단사 김경온손자).
정약용은 그 때의 일을 시로 남겨 두었다.
그의 기개와 소신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2) 3년 후 1792년경(정조 16년, 최초 영남만인소).
김희락도 문과에 급제한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정조가 특별하게 베풀어준 별시(7200명 중)에서 장원이 되었다.
그 장원 성적으로 직부 전시되어 그해 '정시 병과'에 급제한다.
1800년경.
정약용은 은퇴 후 고향에 있었고, 김희락은 흥양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경상도 출신이 전라도 고흥에 부임하는 것이다.
그때 정약용은 김희락에게 전송 편지를 보내고 있다.
그 전송의 글에서 수령관으로 명심해야할 네가지 일을 말한다.
"거관사설,居官四說"이다.
“이 지방은 인심이 나쁘다.”하는데, 이 말 한마디가 千人의 마음을 잃는 것이다.
동해(東海)이건 서해(西海)이건 마음과 이치는 동일하다.
(心同里同)
그러므로 조그만 마을에도 반드시 충(忠)과 신(信)이 있는 사람이 있고,
공자의 마을에도 역시 광동(狂童)은 있기 마련이다."
숙명 김희락(叔明 金熙洛,1761~1803,봉화 해저)
의성 김씨,당색은 남인.대산 이상정 문인
1789년 가을. '아버지인 울산부사 정재원을 뵙고 귀경하던 정약용' 을 김한동 집에서 조우함.
『남천록(南遷錄)』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퍼옴) 조선 후기의 문신 김성구(金聲九/1641~1707)가 정의 현감 재임 시의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글.
김성구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된 1679년(숙종 5) 3월 12일부터 정의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1682년(숙종 8) 1월 16일 아버지가 임시로 사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남긴 기록이다.
정의 현감 재임 때의 일뿐만 아니라 최부의 『표해록』, 임제의 『남명소승』,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 『지지(地誌)』 등을 인용하여 제주의 풍토를 기록하고 있다.
[편찬/간행 경위]
『남천록』은 김성구의 문집인 『팔오헌문집』에 권5·권6에 상·하로 실려 있다. 『팔오헌문집』은 1873년(고종 10) 6대손 우수(禹銖) 등이 목판본으로 편집, 간행한 것으로, 『팔오헌문집』은 외예(外裔) 권연하(權璉夏)의 발문에는 8권 4책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권 4책[元·亨·利·貞]이다.
권연하와 김우수의 발문에 의하면 『팔오헌문집』은 이미 김진동(金鎭東)이 간행한 『문소세고(聞韶世稿)』[1797]에 실려 있었다. 그런데 『문소세고』 권12~17에 실려 있는 『팔오헌문집』이 간략한데다가, 배향한 사우(祠宇)마저 서원 철폐령[1868]으로 훼철되어 그 흔적이 없어질까 두려워 시문(詩文)·장주(章奏)·경연일기(經筵記事)·영해일록(瀛海日錄) 등을 덧붙여 간행한 것이다. 『남천록』은 이때 수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지적 상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형태 사항에 따르면,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0.1×14.8cm이고, 크기는 30.5×19.7cm이다. 김성구의 시문집인 『팔오헌선생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남천록』의 내용은 부임하던 1679년(숙종 5), 한라산신제를 지내고 둔마를 점검하던 1680년, 제주도를 떠나던 1681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서귀포시 지역과 관련된 내용은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떠나던 1679년 7월 21일부터 1681년 10월 15일 신임 현감에게 사무 인계를 할 때까지의 기록에서 보인다.
1679년 정의현으로 가며 제주의 풍토와 정의현의 모습을 적고 있는데, 주로 산천·정의현성의 규모·토지 상태·인물에 대한 것이다.
김성구가 기록한 토지 상태는 매우 척박하여 2~3년을 연이어 경작할 수 없는 정도였고, 양전안(量田案)과 어린책(魚鱗冊)이 없어 육지의 화전제(火田制)와 같다고 하였다. 아울러 밭에 동·서 경계 표시가 없고 자호(字號)와 결수(結數), 그리고 밭이름[員名]도 명백하지 않아 소송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8월 6일에는 제주 목사 최관에게 읍폐를 보고하였는데, 관아 건물들의 퇴락과 과중한 포작인의 역, 그리고 가뭄으로 인한 진상과 산마구점(山馬驅點)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9월 10일과 11일에는 서귀창에서 환곡을 나누어 주고, 의귀원(衣貴院)에서 점심을 먹고 관아에 돌아왔다. 김성구는 관아에서 의귀까지 30리이고, 의귀에서 서귀까지 40리라 하여 ‘서귀포 칠십리’의 연원을 추측할 수 있다.
1680년 3월에 한라산신제 제관(祭官)으로 뽑혀 한라산신제를 지내고 존자암·영실동(瀛室洞)·오백장군동(五百將軍洞)을 구경하였다.
1618년에는 삼매양[삼매봉] 봉수 아래 표류한 대마도 사람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천록』은 17세기 말 정의현 지역의 풍토와 생활 모습을 살필 수
송록서원 팔오헌 봉양(현연의 조상 봉양 송록사에서 기념탑
『남천록(南遷錄)』 (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퍼옴) 조선 후기의 문신 김성구(金聲九/1641~1707)가 정의 현감 재임 시의 일들을 일기체 형식으로 기록한 글.
김성구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된 1679년(숙종 5) 3월 12일부터 정의 현감으로 좌천되었다가 1682년(숙종 8) 1월 16일 아버지가 임시로 사는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남긴 기록이다.
정의 현감 재임 때의 일뿐만 아니라 최부의 『표해록』, 임제의 『남명소승』, 김정의 『제주풍토록』, 김상헌의 『남사록』, 『지지(地誌)』 등을 인용하여 제주의 풍토를 기록하고 있다.
[편찬/간행 경위]
『남천록』은 김성구의 문집인 『팔오헌문집』에 권5·권6에 상·하로 실려 있다. 『팔오헌문집』은 1873년(고종 10) 6대손 우수(禹銖) 등이 목판본으로 편집, 간행한 것으로, 『팔오헌문집』은 외예(外裔) 권연하(權璉夏)의 발문에는 8권 4책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7권 4책[元·亨·利·貞]이다.
권연하와 김우수의 발문에 의하면 『팔오헌문집』은 이미 김진동(金鎭東)이 간행한 『문소세고(聞韶世稿)』[1797]에 실려 있었다. 그런데 『문소세고』 권12~17에 실려 있는 『팔오헌문집』이 간략한데다가, 배향한 사우(祠宇)마저 서원 철폐령[1868]으로 훼철되어 그 흔적이 없어질까 두려워 시문(詩文)·장주(章奏)·경연일기(經筵記事)·영해일록(瀛海日錄) 등을 덧붙여 간행한 것이다. 『남천록』은 이때 수록된 것으로 추측된다.
[서지적 상황]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의 형태 사항에 따르면, 사주쌍변(四周雙邊) 반곽(半郭)은 20.1×14.8cm이고, 크기는 30.5×19.7cm이다. 김성구의 시문집인 『팔오헌선생문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구성/내용]
『남천록』의 내용은 부임하던 1679년(숙종 5), 한라산신제를 지내고 둔마를 점검하던 1680년, 제주도를 떠나던 1681년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서귀포시 지역과 관련된 내용은 제주목에서 정의현으로 떠나던 1679년 7월 21일부터 1681년 10월 15일 신임 현감에게 사무 인계를 할 때까지의 기록에서 보인다.
1679년 정의현으로 가며 제주의 풍토와 정의현의 모습을 적고 있는데, 주로 산천·정의현성의 규모·토지 상태·인물에 대한 것이다.
김성구가 기록한 토지 상태는 매우 척박하여 2~3년을 연이어 경작할 수 없는 정도였고, 양전안(量田案)과 어린책(魚鱗冊)이 없어 육지의 화전제(火田制)와 같다고 하였다. 아울러 밭에 동·서 경계 표시가 없고 자호(字號)와 결수(結數), 그리고 밭이름[員名]도 명백하지 않아 소송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8월 6일에는 제주 목사 최관에게 읍폐를 보고하였는데, 관아 건물들의 퇴락과 과중한 포작인의 역, 그리고 가뭄으로 인한 진상과 산마구점(山馬驅點)의 어려움에 대한 것이었다.
9월 10일과 11일에는 서귀창에서 환곡을 나누어 주고, 의귀원(衣貴院)에서 점심을 먹고 관아에 돌아왔다. 김성구는 관아에서 의귀까지 30리이고, 의귀에서 서귀까지 40리라 하여 ‘서귀포 칠십리’의 연원을 추측할 수 있다.
1680년 3월에 한라산신제 제관(祭官)으로 뽑혀 한라산신제를 지내고 존자암·영실동(瀛室洞)·오백장군동(五百將軍洞)을 구경하였다.
1618년에는 삼매양[삼매봉] 봉수 아래 표류한 대마도 사람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천록』은 17세기 말 정의현 지역의 풍토와 생활 모습을 살필 수
해저문중 족보해설
가계]
본관은 의성. 초명은 박수(璞銖), 자는 내극(乃克), 호는 노원(魯園)·미추자(味鄒子). 아버지는 통덕랑 김재신(金在信)이고,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창석(蒼石)이준(李埈)의 후손과 선성김씨(宣城金氏)김담(金淡)의 후손인 김장배(金章培)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철수(金喆銖)는 1822년 봉화 해저촌(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서 태어나 3세에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횡송(橫頌)하고 도송(倒頌)해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5세 때 천연두에 걸렸으나 등불 심지를 볶아 먹고 나았으며, 9세에 의성김씨시문집인 『문소세고(聞韶世稿)』를 간행할 때 벽자(僻字)도 잘 알았다. 10세 이후에는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환하게 알았고, 할아버지 문천공(文泉公)이 가르쳐 준 것도 모두 암송했다.
1835년 음죽이씨(陰竹李氏)와 혼인하였다. 1849년에는 모친상을, 1851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대로 상을 치렀다. 1858년(철종 9) 노원서실(魯園書室)을 지었고, 1864년(고종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867년 이헌기(李憲基)의 죄상을 지적했다.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충청도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된 뒤 명천(明川)으로 이배되었다. 그 뒤 사면령이 내려져 괴산의 제월대를 거쳐 7월에 노원자택으로 돌아왔다.
유배 생활 동안 도내 서원과 친구들이 보내준 위로 서신과 물품 중에서 서신은 받고 물품은 돌려주었으며, 훼철된 이산서원과 삼계서원으로 가서 사우들과 통곡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올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0년 뒤 왜구가 들어오고 사설(邪說)이 만연함을 개탄하며 이단을 배척하는 여러 글을 모으고 호를 미추자(味鄒子)라 하였다.
병풍에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篇)과 『서경(書經)』의 무성편(武成篇)을 손수 써서 농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1876년에 삼계서원에서 천사(川社)의 부계장(副契長)으로 향음주례를 시행하였고, 1877년에 영남유생들이 서원의 복설 상소를 올리고자 소수서원에 소청을 차렸을 때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 1878년 봄에 학사공(學士公)의 『고식(故寔)』을 간행하였고, 추령의 선비들이 충재권벌(權橃)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자 김철수를 소수(疏首)로 추천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노원집(魯園集)』10권 5책이 전한다. 1879년(고종 16) 이후에 기자로부터 대산이상정(李象靖)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전현들의 장갈문을 찬집하여 『동헌록(東憲錄)』을 지었고, 1884년(고종 21) 『역대성현전수편(歷代聖賢傳授編)』1권을 편집하였다. 「수득록(隨得錄)」·「모년기사음청약기(某年記事陰晴略記)」·「노원만록(魯園謾錄)」및 경사와 제자서 1,000여 권이 노원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학동서원
1738년(영조 14) 안동부 법상동에 세워진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鶴東書院이 안동의 남인계 사림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훼철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노론계가 남인들의 본거지인 안동에 자신들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서원을 세우려고 시도하다 일어난 충돌이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을 건립하고자 최초로 시도된 것은 1721년이었다. 당시 안동부사로 내려온 김진옥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932년 부사 李德孚와 법전에 거주하는 노론계 士人인 姜元一에 의해 재차 시도되었으나 남인계 士人들의 반발로 인하여 좌절되었다.
김상헌을 주향으로 하는 서원의 창건이 실제로 시행된 것은 1738년 경상도 관찰사로 유척기가, 안동부사로 魚有龍이 부임하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안동 내부에서는 법전을 세거지로 하는 강원일의 진주 강씨 문중, 안동가구를 세거지로 하는 安宅駿의 순흥 안씨 문중 그리고 申思國이 중심이 된 평산 신씨 문중이 주축이 되었으나 경제적 지원 등은 감영과 안동부에서 거의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이러한 학동서원의 건립시도는 `무신란과 같은 逆亂이 안동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일부 노론계 사족들이 참여하였지만 建院을 주도한 것은 안동부사 어유룡과 경상도 관찰사 유척기였다. 건원론자들은 서원훼철에 가담한 인사들이 권덕수?류몽화 등 무신란 관련 혐의가 있던 인사들의 사주를 받은 자들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서원 훼철에 가담한 인사들 중 상당수는 무신란 당시 擧義하여 의병을 조직한 인사들이었다.
그러므로 서원 훼철에 가담한 인사들은 송암공 김경헌(해저),류정화 등 2인만 遠配되는 처벌을 받게 되고, 오히려 서원 건립을 강행한 관찰사 유척기와 안동부사 어유룡은 파직되는 등 건원론자들에게 불리하게 정리되었다. 이는 국왕인 영조의 의중이 반영된 결과였다.
영조는 무신란(1728년)이후 영남의 동향에 주목하고 있었는 바 그렇지 않아도 불만에 차있는 영남인의 조정에 대한 불신과 감정을 촉발시켜 또하나의 무신란과 같은 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지방관과 훼철 주동자만 처벌하는 조치로 미봉하였던 것이다.
풍산류씨 충효당 [간찰553]
서지내용
문서명 1738년(영조 14) 4월에 송암(松庵) 김경헌(金景瀗) 등이 서호(西湖) 류성화(柳聖和)에게 김상헌(金尙憲) 서원(書院)의 건립을 저지하기 위한 모임에 참석을 요청하는 편지
발급자 김경헌·김태겸·김몽하 金景瀗·金泰謙·金夢河
수급자 류성화 柳聖和
간행세기 1738
문서크기(cm) 34.3×39.8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원소장처 豊山柳氏 忠孝堂
고문서주제분류 서간·통고류(書簡·通告類) > 간찰(簡札) > 간찰(簡札)
※발급자는 김경헌, 김태렴(金泰濂), 김몽하(金夢河)이다. 이들은 당시 안동에 노론계 서원인 이른바 김상헌 서원이 건립될 때 이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데에 앞장 선 인물들이다.
이 서원의 건립 시도 및 안동 사인(士人)들의 저지 운동과 주동자 처벌 등의 전말은 국학진흥원 소장 《법성일기(法城日記)》에 상세히 정리되어 있다.
먼저, 김경헌 등은 청음사(淸陰事), 곧 김상헌을 모시는 서원을 건립하는 일이 지금 다시 발론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반대편의 사람들이 그 당류(黨類)를 모아서 어제(18일) 20여 인이 제남루(濟南樓)에 일제히 모였는데 세력을 빙자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이 행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사변(事變)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느냐고 했으며, 자신들은 결단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김경헌 등은 이에 대처하는 일을 자신들이 홀로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드시 여러 사람들이 상확(商確)한 연후에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25일에 향교(鄕校)에서 모임을 가지는 일에 대하여, 각 서원에 통문을 내어 통고하였고, 한편으로 여러분들에게 편지로 통고하였다고 했다. 만사를 제쳐놓고 일제히 참석하여, 혈전(血戰)을 전개함으로써 안동(安東)을 구하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