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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지방의 3·1운동과 제암리·고주리 사건
--- 목 차 ---
1. 머리말
2. 수원지방의 3·1운동
1) 수원지방의 3·1운동 과정
2) 3·1운동의 여파에 따른 일본의 대응
3. 제암리·고주리 사건
1) 제암리·고주리 사건
2) 제암리·고주리 사건에 대한 서구인들의 반응
(1) 미국·영국·프랑스 영사관의 반응과 역할
(2) 재한선교사들의 반응과 역할
(3) 서구의 민간 여론과 해외에서의 반응
1. 머리말
3·1운동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의 변화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을 촉진시킨 중요한 사건이다. 세계사적으로도 중국의 5·4운동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3·1운동은 처음 서울의 태화관과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여파는 한반도를 벗어나 간도나 연해주 지역에 까지 퍼져나갔다.
수원지방의 3·1운동 또한 활발히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의 만세운동으로 인한 경기도 내에 피검자수가 3,349명인데, 안성군, 고양군, 개성군 다음으로 수원군의 피검자수 수가 높았다는 점에도 수원지방의 3·1운동가 얼마나 활발히 진행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1)
2. 수원지방의 3·1운동
1) 수원지방의 3·1운동 과정
수원지방의 3·1운동는 그동안 일본이 펼친 식민지 경영에서의 불만이 폭발하여 서울과의 연계 없이 자체적으로 발발한 것이 아닌 서울과의 연결을 통해 이루어졌다. 3·1운동를 진행한 것이 지식인층이라는 범주 외에도 종교인이라는 특징으로 구분될 수 있듯이 수원지방의 독립운동에는 종교인 중심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기독교와 천도교 두 종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추진되고 있었다. 기독교에서는 김세환(金世煥)2)3)
천도교 측에서는 백낙렬(白樂烈, 장안면 수촌리), 김성렬(金聖烈, 팔탄면 고주리) 등이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이후 만세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 교사인 백낙렬은 장안면 거묵골 전교실에서 이종근·우영규·우종열을, 기림골 전교실에 나와서 김현조·김익배를, 장안리 전교실에서 조교순·김인태를 만나고, 덕다리로 나와서 김창식을 만났다. 또 우정면 사기말 전교실에서 김영보를, 고온리 전교실에서 백낙온을, 덕목리 전교실에서 한세교를, 안곡동에서 박용석·박운석을 만나 만세운동을 논의했다. 계속해서 우정면 주곡리 차희식을 만나 동조의 뜻을 받고 팔탄면 고주리로 나아가 김흥렬을 만났다.4)
김흥렬은 제암리 안종환·안정옥·안종후를 만나 만세운동 추진을 확인한 후 팔달면 가재리에서 이정근과 만나 상의하였다. 점차 조직이 확대되고 있을 때 백낙렬은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수원 출신의 이병헌이 교구와의 연락을 위해 천도교 수원 북수리 교구에 내려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김흥렬은 안종환, 안종린을 통해 이병헌의 중앙 지시를 받았고, 이를 백낙렬에게 전달했다. 중앙 지시 내용은 ‘모든 경비는 지방교구 자체 부담으로 독립운동를 계속 전개하라’는 것이었다. 이렇게백낙렬은 삼괴지역을, 김흥렬은 향남 팔탄면을 책임지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수원·오산 지역에서 발생한 만세운동은 [표 1]과 같이 전개되었다.
[표 1] 제암리 사건 이전의 수원 지방 만세 운동5)
날짜 | 지역 | 내용 |
3.4 | 수원 | 농림학교 학생 30여 명 기숙사 탈출, 상경 시위 |
3.11 | 수원 | 천도교인들 장날 시위 모의 |
3.16 | 수원 | 장날을 기해 상인들 철시하고 서장대에서 만세시위. 저녁에 천도교 지도부 교구 사무실에서 만세시위 논의하던 중 일경의 습격을 받고 다수 부상. 같은 시각 기독교 지도부도 삼일여학교에 모였다가 습격당함 |
3.21 | 성호면 오산리 |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평화적 시위(박두병·김재천·김진성 주도) |
3.23 | 성호면 | 7백여 명이 시위, 20명이 체포됨 |
3.25 | 수원 | 청년·학생·노동자 20여 명이 시장에서 시위 주도. 1천여 명이 참가, 40여명이 체포됨 |
3.26 | 송산리 사강리 | 1~2백 명이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홍면 주도) |
3.27 | 서신면 | 4백여 명이 시위 |
3.28 | 송산면 사강리 | 장날을 기해 7백여 명이 주재로 앞에서 시위. 진압하던 일본인 순사가 권총 발사, 주모자 홍명이 총에 맞고 중상을 입자 흥분한 군중들이 일본인 순사 야마구치 살해 |
수원 | 2, 30명씩 몰려 다니며 만세시위 | |
3.29 | 수원 | 김춘화 등 수원 기생조합원 30여 명 시위 |
성호면 오산리 | 장날을 기해 8백여 명이 시위. 유진홍·안동순 등 주모자 7인이 체포당하자 군중들이 석방을 요청하며 주재소·우편국·면사무소를 공격하고 일본인 상점과 가옥 11호 방화 | |
태장면 | 마을마다 야간 횃불시위 | |
양감면 | 수백 명 횃불 만세시위 | |
병점 | 수백 명이 산에서 만세시위 | |
3.30 | 안룡면 | 야간 횃불 만세시위 |
수원 | 군중 만세 시의, 3명 체포됨 | |
3.31 | 향남면 발안리 | 장날을 기해 1천 여명 시위, 일본 헌병 수원 수비대 진압중 발포, 2~3명 부상, 40여 명 체포, 일본인 소학교·우편국·면사무소를 방화 |
수원 | 1천여 명 만세 시위, 41명 체포됨 | |
의왕면 고천리 | 누누대 고개에서 야간 횃불시위 | |
양성면 | 2천 여 명이 시위, 주재소 습격, 방화 | |
4.1 | 팔탄면 | 군중 시위, 일본인 가옥 방화 |
반월면 | 반월 장날을 기해 수천 명이 만세시위 | |
4.2 | 장안면 | 야간 횃불시위 |
우정면 | 야간 횃불시위 | |
향남면 제암리 | 야간 횃불시위 | |
4.3 | 장안면 수촌리 | 야간 시위를 마친 시위 군중들이 면사무소를 공격, 김현묵 면장을 앞세우고 만세 시위, 면사무소 서류 파기 |
우정면 화수리 | 수촌리 시위 군중과 합류하여 면사무소 공격. 화수리 경찰 주재소 포위, 진압하던 경찰이 발포, 흥분한 군중이 일본인 순사 타살 | |
4.6 | 비봉면 |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연합 시위, 2명 검거 |
4.7 | 마도면 | 기독교와 천도교 연합시위 |
4.8 | 남양 | 군중 만세시위 |
3월 중순부터 활달히 진행된 만세시위는 수원읍에서 인근으로 확산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방으로의 확산되면서 시위 형태가 점차 과격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도 보인다. 4월 3일 장안면·우정면에서의 시위를 정점으로 점차 시위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4월 2일부터 3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본군 헌병대의 강력한 검거 작전으로 많은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시위가 일어난 마들을 방화하는 등의 폭력적 진압 작전이 작용된 것으로 풀이된다.6)
수원지방의 3·1운동은 몇 가지 특징을 둘 수 있다. 첫째로 종교인들 주도로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추진된 만세운동은 연합 형태의 시위로까지 보였다. 이들은 수촌·화수리, 비봉, 마도, 발안, 제암 등 다양한 지역에서 시위를 펼쳐 나갔다. 특히 만세시위를 추진한 점은 서울에서의 3·1운동 계획 추진에서 종교인들의 적지 않은 활동을 감안하면, 서로 비슷한 점을 지니기도 하였다.
둘째로 3월 중순 이후 전개된 군중 시위는 주로 장날에 전개되었다. 이는 많은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이점과 장날이 지역에 따라 순차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시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시위 군중들이 면과 마을 경계를 넘어 타지역 주민들과 연합시위를 벌일 수도 있었다.7)
셋째로, 만세시위가 점차 다양한 계층으로 확대되었다는 점에 있다. 초기 지식인·종교인 중심으로 추진되었다면, 이후에는 상인·농민·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특히, 기생 조직까지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는 점 또한 돋보인다. 다양한 계층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는 대에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경영에 있어서 조선인들의 불만이 폭발한 대에 있을 것이다.
넷째로, 일본의 강경한 무력 진압 등으로 흥분한 군중들의 대응이 폭력적인 시위로 변화하였다. 3월 28일 사강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서 시위대를 향해 권총을 발사한 일본인 순사 야마구치(野口)가 군중에게 살해된 것을 필두로 3월 29일 오산 시위에선븐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국 등 관공서와 일본인 상점과 일본이 가옥기 습격받았다. 3월 31일 발안에서는 일본인 소학교와 우편국, 면사무소가 습격당했고 일본인 43명이 도주하기도 하였다. 같은 날, 양성면 주재소가 방화되었다. 4월 3일의 수촌리·화수리 시위에서 장안면과 우정면 면사무소가 습격받았았다. 시위 군중에게 총을 겨눈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흥분한 군중에게 살해당하기도 하였다.
2) 3·1운동의 여파에 따른 일본의 대응
수원지방의 만세운동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일본은 점차 위기감을 느꼈다. 더구나 강경한 시위 진압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가 군중들에게 살해당하는 등의 모습은 일본군 동원의 필요성을 증폭시켰다. 3월 31일 발안 시위 이후 경기도 장관과 수원 군수 등은 군대 지원 요청을 하였다. 이에 경성 헌병대장 겸 경기도 경무부장 시오사와(鹽澤義天)는 자기 부하인 경무부 경시 하세가와(長谷部巖) 대위를 중심으로 헌병과 경찰 혼성부대를 편성, 시위가 일어난 지역으로 파견하여 시위 지도자들을 검거하도록 하였다.8)
하세가와 대위를 중심으로 편성된 진압군은 2차례에 걸쳐 검거작전이 진행되었다. 1차 검거작전은 하세가와 대위를 비롯하여 헌병과 순사 11명으로 진행되었다. 4월 2일을 시작으로 나흘간 진행된 검거활동을 일본 헌병대 자료를 전제로 보면 [표 2]와 같다.
[표 2] 1차 검거작전 활동
날짜 | 지역 | 활동사항 |
4.2 | 원곡·양성 | 오후 5시 서울 출발 → 오후 10시에 평택에 도착, 군인 4명 증원, 우편 배달원 3명 동행 → 야간에 원곡면을 경유, 양성면에 이르러 시위 주동자 검거 |
4.3 | 안성 | 원곡·양성에서 검거한 주모자들을 서울로 압송, 군인 4명이 안성에 남아 일본인 보호 |
4.4 | 발안 | 서울로 귀대하였다가 4월 3일 화수리·수촌리 사건을 접하고 발안으로 출발 → 오후 6시 발안에 도착 → 화수리 수색 |
4,5 | 발안 | 발안 장날을 기해 시위가 있을 것이란 정보를 입수하고 엄중 경계, 삼계리로 피신했던 일본은 부녀자 43명, 발안으로 데려와 보호 |
4,6 | 수촌 | 새벽 1시에 수촌리를 포위하고 야간 작전으로 시위 주모자 6명 검거 → 수원을 경유하여 서울로 압송 |
1차 검거 작전은 무력시위에 대한 응징의 성격이 강했다. 3월 31일 양성면에서 주재소가 습격·방화 당했으며, 같은 날 발안에서도 일본인 소학교·우편국·면사무소가 방화되기도 하였다. 이 날 시위로 일본인들의 안전이 위협받자 서둘러 진압하려 하였다. 특히, 4월 3일 화수리에서 순사가 재차 살해당하자 이들의 활동은 점차 거칠어졌다.
발안에 주둔중이던 일본군 20사단 39여단 79연대9)
한편 화수리 시위를 주도했던 수촌리 기독교 지도자 기교철과 천도교 지도자 백낙렬을 체호하기 위해 야간에 수촌리를 급습, 김교철 이하 차인범·정순영·이순모 등이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방화가 일어나 수촌리 가옥 42호 중 38호가 불탔으며, 도망가는 주민들이 총상을 입기도 하였다. 한편 수원군 참사 우성현(禹成鉉)의 집에 숨어 지내던 백낙렬은 자수를 하려고 했지만 동료들의 만류로 포기했다. 그는 고온리로 나아가 배를 타고 충청도 한진으로 건너간 뒤 계룡산 속에 숨어 피신 생활을 했다.10)
1차 검거작전이 끝났지만 이후에도 발안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이고 일본인들에 대한 보복 움직임이 있다는 정보를 접수한 경무부는 2차 검거반을 편성, 파견하였다. 4월 9일 경성 헌병부대 부관인 헌병특무조장 츠무라(津村勇) 이하 헌병 6명과 보병 15명, 수원경찰서장 후루야(古屋) 이하 순사 11명 등 모두 3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3개 반으로 편성되어 오산 → 화수 → 사강 순서로 파견되었다.11)
[표 3] 2차 검거작전 활동
날짜 | 지역 | 검거 활동 |
4.9 | 오산 |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산에서 주모자 검거 → 오후 2시부터 7시 30분가지 오산 부근 8개 마을에서 주모자 검거 |
4.10 | 오산·발안 | 새벽 4시부터 다시 검거 작전을 개시하여 오산교회 김광식 목사 이하 63명 검거, 수원 경찰서로 송치 → 밤 중에 발안으로 이동 |
4.11 | 발안·우정·장안 | 10시 밤부터 11일 오후 5시까지 발안과 화수리를 거쳐 장안면, 우정면 내 25개 마을 포위, 204명 검거 |
4.12 | 남양·팔탄 | 남양으로 이동 → 12일 오전부터 13일 새벽 3시까지 팔탄면 하저리 부근 4개 마을 습격, 주모자 5명 검거 |
4.13 | 팔탄 | 진압 도중 일부 저항이 있었으나 일본군 피해는 없었음 |
4.15 | 사강 |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사강을 중심으로 인근 송산·마도·서신면 20개 마을 수색, 주모자 175명 검거 1,202명 서약서 받고 훈방 |
4.15 | 사강 | 수사활동 중 이장을 비롯한 주민들에게 회유 |
4,16 | 수원 | 수원으로 철수 |
2차 검거작전에서 체포·검거된 시위 지도자 수는 8백 명이 넘었다. 이들은 마을을 포위하는 형식으로 검거작전이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방화와 살인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본 헌병측 자료에는 4월 2일부터 14일까지 수원·안성 2개 군의 11개 면, 64개 마을에서 검거 작전이 진행되면서 민간인 사망자 10명, 부상자 19명에 소실된 가옥이 276호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만세운동 시위에서 과격 양상을 띄었던 사강리·봉가리·삼존리·기린리·수촌리·조암리·화수리 마을에서는 거의 모든 가옥이 방화되었다.12)
3. 제암리·고주리 사건
1) 제암리·고주리 사건
제암리(堤岩里)에서 학살이 일어난 대에는 제암리 주민들이 만세시위 참여와 이에 따른 일본의 인식을 들 수 있다. 3월 31일 발안 장날에 일어난 대규모 시위에 전동레는 제암리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증언하였다.13)14)
4월 13일 아리타 중위 지휘 아래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했다. 이들은 2차 검거반이 발안, 수촌·화수리 지역을 수색한 이후 남양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치안을 맡을 수 없는 발안 지역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부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치안 유지의 임무를 이탈, 4월 15일 아리타 중위와 부하 11명, 순사 1명과 제암리에 거주했던 순사보(巡査補) 조희창(趙熙彰)과 일본인 사업가 사사카(佐坂)15)
아리타는 순사 1명과 보병 2명을 붙여 주력 부대 반대편으로 보내어 마을 주민들의 탈출로를 사전에 차단하였다. 그리고 조희창과 사사카를 앞세워 15세 이상의 성인 남성들을 교회에 모이도록 하였다. 이후에 벌어진 핚살 과정은 일본군측 자료와 조사 과정에서 접한 외국인 선교사들, 그리고 살아남은 제암리 주민의 증언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표 4] 제암리 학살 과정에 따른 각각의 진술16)
증언자 | 사견 개요 |
일본군 | 1) 4월 15일 오후 3시 반에 발안을 출발하여 제암에 도착하여 순사보를 시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20여 명을 예수교회당에 집합시켰다. 2) 아리타 중위가 소요 사건과 장례 문제에 대해 2, 3개 질문을 하는데 모인 사람 중 하나가 도망치려고 해서 그를 막는데 또 한 사람이 의자를 들고 달려들어 치려하므로 칼로 찔렀다. 3) 이를 본 사람들이 집단으로 반항 기세를 보이자 곧바로 교회 밖으로 나와 병사들로 하여금 사격을 명해 모두 사살했다. 4) 혼란 중에 교회 서쪽에 있던 집에서 불이 나 센 바람을 타고 교회당에 옮겨 붙었고 연이어 20여 호가 불탔다. 5) 중위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주민들의 피난 및 가재 운반에 종사하게 하고 자신은 병사 2명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 주위를 경계하였다. |
언더우드 | 1) 4월 15일 오후 2시경, 군인들이 교인 남자들만 30여 명 교회에 몰아 넣고 대검과 총검으로 찌른 후 교회를 불살랐다. 2) 교회에 붙은 불이 번져 인근 가옥을 태웠고 건너편 가옥은 일본군이 불을 질렀다. 3) 교인 집이 아닌 경우는 불을 지르지 않았다. 4) 전체 40여 호 중 4, 5호를 제외하고 모두 불탔다. 5) 불탄 교회 건물 밖에서 시체 2구를 발견했다. |
테일러 | 1) 4월 15일 오후 군인들이 남자 교인 30여 명을 교회에 몰아 넣었다. 2) 교인들을 총으로 쏜 후 들어가 총검과 대검으로 찌른 후 방화했다. 3) 교회에서 떨어진 집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했다. 4) 살아남은 여자 교인이 희생된 남자 교인 12명의 이름을 확인하였다. 5) 이들 외에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러 왔던 부인 둘(한 사람은 40세가 넘었고 한 사람은 19세)도 살해되었다. 6) 나머지 교회 안에서 죽은 남자들은 천도교인들로 25명이었다. |
스코필드 | 1) 4월 15일 화요일 이른 오후, 군인들이 들어와서 할 말이 있다며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성인 남자들을 교회 안에 모이게 했다. 2) 모두 29명이 모여 앉아 있는데 군인들이 교회를 포위하더니 종이 창문으로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3)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한 후 일본군이 교회에 불을 질렀다. 4) 몇 명이 탈출해서 도망쳤으나 도중에 사살되었다. 6) 총소리를 듣고 남편 생사를 알려고 달려왔던 두 여인도 사살되었는데, 마흔이 넘은 여인은 총에 맞아 죽었고 열아홉 살 여인은 칼에 찔려 죽었다. 7) 군인들은 마을을 불지르고 떠났다. |
노블 | 1) 군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며 남자들을 불러 교회 안에 모이게 했다. 2) 교회 안에 모인 사람은 기독교인 11명, 천도교인 12명 모두 23명이었다. 3) 교회 뒷집에 살던 ‘강’씨는 점심을 먹다가 불려 나왔다. 4) 교회 안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데 총을 쏘고 불을 질렀다. 5) 탈출을 시도한 ‘노씨’와 ‘홍씨’를 제외하곤 모두 교회 안에서 죽었다. 6) ‘강씨’ 부인(19세)은 놀라 담벼락에 몸을 피하고 있다가 언덕에서 내려오던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칼에 찔려 죽었다. 7) ‘홍씨’(그는 교회 밖으로 도망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부인(42세)은 총소리를 듣고 교회에 갔다가 집으로 가던 중 총에 맞아 죽었다. 8) 그날, 마을 건너편에 있던 기독교인 남자 6명도 불러내 총살하였다. |
로이즈 | 1) 4월 15일 정오가 지나 일본군 중위가 군인들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와 훈계할 것이 있다며 주민들을 교회당 안에 불러 모았다. 2) 모인 주민은 23명이었는데 그 중 11명은 기독교인이고 나머지는 천도교인이었다. 3) 기독교인 중 한 사람이 교회가 불타는 중에 탈출하여 살육 현장을 증언하였다. 4)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교지(敎旨)에 대해 묻자 ‘안’이라는 지도급 교인이 일어나 “성서는 이웃간에 친교할 것과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길 것과 하늘이 최후에 행한 대로 갚아준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중위는 “기독교인들의 행위가 그 가르침에 벗어났다”고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5) 중위가 날카로운 구령을 세 번 외치자 군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6) 탈출자는 의자 밑으로 기어서 설교단 뒤에 숨었다가 ‘홍’이란 자와 함께 설교단 위에 나 있던 창문을 열고 탈출했다. 7) ‘홍’은 도망치다가 발각되어 총을 맞고 죽었으나 다른 탈출자는 산으로 도망쳐 목숨을 구했다. 8) 교회 안에서 죽은 ‘강’이란 청년의 부인은 불타는 집에서 이불을 꺼내다가 일본군에게 들켜 참수당했다. 9) ‘홍’의 부인도 마을로 오던 중 총 두 발을 맞고 그날 밤 죽었다. 10) 그 날 건너편 마을에서도 기독교인 6명을 집안에 모아놓고 사살했다. 11) 군인들은 제암리 서쪽 20리 떨어진 마을로 가서 부인 한 명을 사살했다. |
전동례 | 1) 낮 두시께 일본인 사사카와 순사보 조기채가 군인들을 데리고 마을로 들어오면서 “열다섯 살 위로 남자는 모두 교회롤 모이라”고 하였다. 2) 양쪽 방향에서 열댓 명씩 와서 교회 안에 들어가고 오지 않은 사람은 불러 왔다. 3) 안(종후) 권사와 안진순 속장은 교회 뒷문 쪽으로 서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데 둘에게 먼저 총을 쏘았다. 4) 북새통에 ‘조경태’는 탈출에 성공해서 산으로 도망쳤다. 5) 교회 안과 밖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6) 바람이 세게 불어서 교회 아래 있던 집들에 불이 붙었고 위 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불질렀다. 7) 두세 사람이 교회 밖에 나와서 죽었는데 창자가 터져 나왔다. 8) ‘면에 다니던 사람’은 탈출 중에 부상을 입고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되었다. 9) 강태성의 부인은 울고 있다가 군인이 칼로 목을 쳐 죽었다. 10) ‘홍 권사’ 부인이 집을 수색하던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11)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나무에 묶고 총살하였다. 12) 저녁에 사사카가 일본인을 데리고 와서 교회 밖의 시체를 창으로 찔렀다. |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일본군측의 기록을 제외한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제암리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조기채)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했다.
2)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3)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4)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5)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6) 바람이 세게 불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7)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 그리고 ‘조경태’(노블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는 사람’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조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았다.
8)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9)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10) ‘홍씨’(홍원식)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11) 군인들이 마을 건녀편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나무에 묶고 총살했다.
12) 이날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29명으로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이 살해되었다.17)
제암리·고주리 학살을 일으킨 아리타 부대는 발안지역의 치안 유지를 위해 파견된 부대임에도 발안지역을 벗어나 학살을 자행했다. 아리타 부대가 발안지역로 재거주시킨 일본인을 보호하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이끌고 나간 대에는 발안 거주 일본인들의 요구를 둘 수 있다. 3월 31일 발안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로 발안에 거주하던 일본인 43명은 삼계리로 피신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일본인 소학교와 주재소, 일본인 상점 등이 방화로 전소되었고, 이후 발안으로 돌아온 일본인들에게 분노를 안겨다 주었을 것이다. 이들의 분노가 보복으로 이어졌고, 그들의 보복이 제암리·고주리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발안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업가 사사카가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제암리로 안내하는 등의 적극적인 행보가 현지 일본인들의 보복이라는 측면이다.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군대가 외부로 이동하는데 현지 일본인들의 저지 또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지 일본인들의 보복을 목적으로 한, 독자적인 작전권을 위임받은 아리타의 행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의 희생자 명단이 처음 언급된 것은 1926년 11월에 발행된 〈천도교회월보〉이다. 〈천도교회월보〉 ‘천도교 수원교구 약사’에는 천도교측 희생자 17명의 명단이 등장한다.18)
[표 5] 제암리·고주리 사건 희생자 명단19)
이름 | 자(字) | 생년월일(당시 나이) | 성별 | 직업 | 거주지 | 종교 | 비고 |
姜泰威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
金씨 | (19) | 여 | 주부 | 제암리 | 기독교 | 강태성의 부인 | |
金씨 | 1876.12.16.(43) | 여 | 주부 | 제암리 | 기독교 | 홍원식의 부인 | |
金德用 | 1900.1.6.(19)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
金聖烈 | 1883.3.12.(36) | 남 | 농업 | 고주리 | 천도교 | 김흥렬의 동생 | |
金世烈 | 1876.10.3.(44) | 남 | 농업 | 고주리 | 천도교 | 김흥렬의 동생 | |
金正憲 | 1876.2.7.(43) | 남 | 대장장이 | 제암리 | 기독교 | ||
金周男 | 남 | 농업 | 고주리 | 천도교 | 김세열의 아들 | ||
金周業 | 남 | 농업 | 고주리 | 천도교 | 김세열의 아들 | ||
金興烈 | 남 | 농업 | 고주리 | 천도교 | 천도교 전교사 역할 | ||
金興福 | 남 | 농업 | 고주리 | 천도교 | 김성렬의 아들 | ||
安慶淳 | 1876.7.18.(43) | 남 | 포목상 | 제암리 | 천도교 | 안상용의 아버지 | |
安官淳 | 1903.8.12.(16) | 남 | 농업 | 제암리 | 천도교 | 안종엽의 아들, 일명 安好淳 | |
安武淳 | 남 | 농업 | 제암리 | ? | 안종엽의 아들 | ||
安鳳淳 | 1894.4.24.(25)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
安相容 | 1900.7.8.(19) | 남 | 면 서기 | 제암리 | 천도교 | 안경순의 아들 | |
安有淳 | 1899.7.18.(19) | 남 | 농업 | 제암리 | ? | 안봉순의 동생 | |
安政玉 | 國端 | 1862.9.4.(57) | 남 | 농업 | 제암리 | 천도교 | 안종엽·안종환의 아버지 |
安鍾樂 | 空雲 | 1871.7.18.(48) | 남 | 농업 | 제암리 | ? | 안정옥의 조카 |
安鍾麟 | 남 | 농업 | 제암리 | 천도교 | 안무순의 아버지 | ||
安鍾燁 | 華三 | 1880(39) | 남 | 농업 | 제암리 | ? | 안정옥의 아들 |
安鍾煥 | 樂賢 | 1889.4.12.(30) | 남 | 농업 | 제암리 | 천도교 | 안정옥의 아들, 천도교 전교사 |
安鍾厚 | 禹賢 | 1889.8.10.(30)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제암교회 권사 |
安珍淳 | 1896.1.4.(23)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제암교회 속장 | |
安弼淳 | 남 | ? | 제암리 | ? | |||
趙敬七 | 1873.11.1.(46)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
洪淳晉 | 1887.7.14.(32) | 남 | 농업 | 제암리 | 기독교 | ||
洪元植 | 1877.10.13.(42) | 남 | 교사 | 제암리 | 기독교 | 의병출신, 제암교회 권사 | |
安命淳 | 1900.10.10.(19) | 남 | 농업 | 제암리 | ? | 안종엽의 아들 |
제암리·고주리 희생자 명단에는 김씨와 안씨 성을 가진 희생자를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제암리와 고주리가 집성촌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제암리는 순흥 안씨 찬성공파(贊成公派), 고주리는 경주 김씨 계림군파(桂林君派) 후손들이 모여사는 집성촌 이었기 때문에 유독 고주리에는 김씨의, 제암리에는 안씨의 희생자가 많았다.
2) 제암리·고주리 사건에 대한 서구인들의 반응
(1) 미국·영국·프랑스 영사관의 반응과 역할
구한말에 이르러 조선은 서구 열강과 국교를 맺고 양국간 외교관을 교환하는 한편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에 따라 조선을 계승한 대한제국은 외교관을 강탈, 이에 따라 대사관은 철수하고 영사관만이 남겨졌다. 이후 영사관은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반도에 머물고 있는 자국민들의 업무를 처리해 왔다. 이들의 친일적 행보는 반일적인 언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고, 이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두 달 전인 1919년 1월에도 주한 미국 총영사 앨런 버그홀즈(L. A. Bergholz)는 주한 미국인들에게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재차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대한 일본의 강경한 대응이 비인도적인 탄압으로 인식되면서 자국민들의 항의 요청이 발발하기 시작하였다. 4월 10일 노블(Mattie Wilcox Noble) 외 6명의 선교사는 미국 총영사를 방문하여 이들의 안일한 모습과 프랑스 영사 등의 총독부 방문을 통한 조선인 석방 조치 등을 비교하며 항의하였다.20)
4월 6일 수촌리 사건을 듣고 16일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영사 커티스(Raymond S. Curtice)와 선교사 언더우드(H.H. Underwood), AP통신의 서울 특파원 태일러(A. W. Taylor)와 그의 운전수 임(Yim; 중국인)이 수촌리로 향했다. 수촌리로 가던 중 제암리에서 이는 연기를 보고 인근 민가를 통해 제암리 소식을 듣고, 목격하게 된 것이다. 커티스 영사는 제암리·고주리 사건에 대해 6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 제출하였으며 동행했던 언더우드 선교사가 작성한 7쪽의 기록지21)
보고를 받은 미국 총영사는 4월 23일 “일본군이 교회 안에서 한국인 37명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미국 국무장관에게 커티스 영사의 보고서를 첨부하여 보고하였다.22)
서울 주재 영국영사관도 제암리 소식을 듣고 4월 19일 로이즈(Royds) 영사와 노블 박사 등이 동승하여 제암리로 향했다. 같은 달 24일 제암리로 향했을 때 이들이 목격과 행동은 같이 동행한 『재팬 애드버타이저』(Japen Advertiser) 특파원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들이 제암리에 도착했을 때 제암리 사건때 불탄 시체들은 옮겨지고, 사건 현장은 청소를 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파괴된 다른 마을들과는 다르게 매우 빠르게 사건 현장이 정리 되고 있다는 언급도 하고 있다. 제암리 곳곳을 사진 찍어도, 제지는 없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경찰이 주위를 배회하여 한국인이 얼어버리기도 하였다 기술하고 있다.
제암리 사건 현장을 방문한 로이즈 영사와 선교사 등은 주일 영국대사관에 보고하고 대사 그린 경(Sir C. Greene)도 5월 5일자로 미국 영사와 선교사들의 보고서를 첨부하여 영국 외무성에 보고했다. 주일 영국 대리 공사 얼스턴(B. Alston)은 일본 외무차관 시데하라(幣原喜重郞)를 찾아가 일본의 잔악행위를 중지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은 일본군의 잔학성은 과장된 것이라 부인하고, 상황을 개선시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영국 외무성이 런던 주재 일본대사관에 대해 ‘문명 세계사 일본의 야만성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강렬한 공포감’을 알릴 수 있는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일본군의 잔학성에 대한 보도가 미치는 악영향에 대해서 파리 평화회담의 일본 대표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킬 것을 요구하였다.23)
프랑스 영사관에서도 주한 프랑스 부영사 갈루아(M.E. Gallois)가 1919년 5월 20일자로 주일 프랑스 대사 바스트(Bapst)에게 영미 영사관의 보고서들과 영자지 보도를 토대로 제암리 교회 사건에 대한 보고를 했다.
미국·영국·프랑스 영사관은 본국으로 혹은 일본 주재 대사관을 통해 제암리 사건을 알렸지만 본국에서는 일본의 잔학행위에 대한 항의 등 적극적인 외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들 역시 식민지를 경영하고 있는 제국주의 국가라는 점에서 일본의 식민지 경영에 비판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2) 재한선교사들의 반응과 역할
재한선교사들은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부터 일본의 강경한 3·1운동 진압에 적극적 비판적 자세를 취해왔다. 4월 10일 노블 등 선교사들이 미국 총영사를 찾아가 항의했다. 11일에는 서울 연지동 쿤스 선교사 집에 서울지여겨 북장로교 선교사 토마스·빌링스·클라크·루이스 등 남녀 선교사 23명이 월례선교사회에 모여, 밀러의 행보를 비판하는가 한편 일본의 기독교 탄압을 개탄했다. 그들은 또한 “총영사의 이런 태도는 장래의 교회의 소장(消長)에 영향이 미치는 바가 심대하므로 이번에 우리는 본국 정부에 진정하여 총영사를 경질시키지 않으면 안된다고 협의했다.”는 등 일본에 관대했던 버그홀즈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선교사들의 강력한 항의로 버그홀즈는 영사 커티스를 보내 선교사들과 조사하던 중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커티스의 보고서에도 첨부되어 있는 언더우드의 7쪽 분량의 기록지는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도 전달되었다. 그가 보고 들으면서 작성된 기록은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전문이 실리기도 하였고, 5월 3일자 일본 영자신문 『제펜 크로니클』(Japan Chronicle)에 “팔탄(발안; 제암리)의 학살에 대한 보고서: 충격적인 상보(詳報)”라는 제목의 기사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가 서울로 돌아온 후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접한 노블은 4월 19일 로이즈 영국 대리 영사의 요청으로 그들 일행과 함께 제암리를 방문했다. 노블 부인의 일기에는 노블이 제암리 구제에 참여하는 한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을 찾아가 면담하여 배상을 약속받았다 기록되고 있다. 이는 제암리에서 소살(燒殺)된 장소가 제암교회이고, 일본군의 학살이 종교탄압적 모습으로 비치는 대에 노블의 적극적인 항의로까지 나온다. 노블은 감리교 선교사로서 그는 수원지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감리교회인 제암교회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또한, 언더우드의 기록에 따르면, 교인 남자만을 교회로 불러 학살을 자행했고, 교인이 아닌 집에는 방화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종교탄압적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결국 노블은 하세가와 총독과의 면담에서 제암교회를 포함 3개의 감리교회 파괴에 대하여 각각 500원씩 보상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리고 그는 그해 10월에 열린 미감리회조선연회에서 “수원지방 감리사 보고”를 통해 제암리·고주리 사건과 그 영향을 보고했다.
남양과 제암(堤岩)과 오산 구역에 7개 교회당이 일병(日兵)에게 파괴를 당하였고 기(其) 근방에 319가옥이 불탔고 1600인이 거처할 곳이 없이 되었고 그 지경에 참사자의 수를 분명히 지(知)키 난(難)하나 신용할 만한 통지를 의한 즉 신자와 불신자를 합하여 82인이라 합니다. 피소(被燒)된 교회당 3처는 경축(更築)하였고 기타 3처 회당은 건축 중입니다. 5월분에 총독이 해(該) 지경을 시찰하고 1500원을 보조하였으며 선교회에서 2000원을 연조(捐助)하였나이다. 제암교회당에서 일병에게 피살된 자가 23인이나 되는 고로 금일까지 참배자는 여차(如此)한 불측지변(不測之變)을 또 당할가 무서워하는 중에 있으며 이 지경 신자 334인 중에 173인은 혹 피살(被殺) 혹 피수(被囚) 혹 도타(逃躱)하였나이다. 제암 지경에 있는 교인들은 여차한 불측지사를 당하며 악형과 총검에 위험을 보았으되 신심이 더욱 독실하여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길르 죽음은 하시(何時)든지 올 터인즉 위아대사(爲我代死)하신 주 예수께 진충(盡忠)하겠다 하는데, 불신자들은 항상 권하기를 예배당에 가지 말라 일병이 또 올까 두렵다 하므로 이것이 어렵습니다.24)
제암리·고주리 사건에 저극적인 행보를 보인 또다른 사람은 스코필드(Frank Schofield)다. 그는 1916년 그의 스승이었던 에비슨(O. R. Avisiom)의 권유로 한국에 건너와 세브란스에 근무하였다. 그는 4월 17일 제암리·고주리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고 바로 다음날인 18일 자전거를 가직 9시 열차를 탈 만큼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제암리에 방문하는 한편 같은 날 오후 수촌리도 방문하여 부상자를 돕고, “수촌리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후 일본의 비인도적 조치에 대해 조사하여 영꾸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 E. Armstrong) 목사에게 보냈으며 이것은 다시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 위원회에 보내져 거기서 1919년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에 증거자료로 실리기도 하였다.25)26)
그러나 재한 선교사들이 일제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만은 아니다.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은 일제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반면에 같은 영연방소속이면서도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은 일본 총독부에 보다 동정적인 경향이 있었다.27)28)
(3) 서구의 민간 여론과 해외에서의 반응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민간 언론을 통해 서구에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뉴욕 타임지』(The New York Times) 1919년 4월 24일 기사를 통해서이다.
일본군 한국인 학살 - 일본 총독부 기독교인 살해 및 교회 방화 보도 진상 조사중
서울. 4월 23일(AP) 조선총독은 일본군이 서울 동남방 45마일의 촌락에서 남자 기독교인을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총살하고 대검으로 찔러 무참히 죽였다는 비난을 받고 진상을 조사중이다.
또한 일본군은 만행 후 그 마을의 교회와 그 밖의 건물들을 불태워 없앴다고도 한다.
『뉴욕타임즈』 1919년 4월 24일자.
이후 일본 도쿄에서 발행되던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저』지 4월 27일자와 4월 29일자에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보도되었으며, 일본 고베(神戶)에서 발행되던 영자지 『재팬 크로니클』지에서도 기사로 실렸다. 5월 3일 언더우드의 7쪽 가량의 기록지는 익명으로 “팔탄(발안; 제암리)의 학살에 대한 보고서: 충격적인 상보(詳報)”라는 제목으로 실리기도 하였다. 해외 언론의 제암리·고주리 사건은 일본의 강경한 진압에 비판적 여론을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보다 비판적 여론 조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대에는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1919년 7월에 발간한 『한국의 상황』이라는 책자를 들 수 있다.
1919년 3월 초부터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강경한 진압에 대한 전보들이 미국 선교본부에 답지하기 시작했으며, 4월 초부터는 이를 입증하는 편지들이 선교본부에 쌓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한국을 방문하여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무 총무 암스트롱이 뉴욕에 도착하여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 브라운, 북감리교 해외선교부 총무 노스(F. M. North), 미성서공회 총무 해븐(W. I. Haven) 등과 만나 상황을 전하고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해외선교부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도출, 4월 16일 이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이 위원회는 12차례 모여 문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한국에서 들어와 급속히 쌓이는 자료들을 일간 신문에 넘겨주기 전에 일본인들과 우선 이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 가장 공정하고 옳다(only fair and just)”29)
『한국의 상황』은 비인도적인 처우와 불법으로부터 한국인을 보호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모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한 것과 미국에서 건전한 여론이 조성되어 일본에 영향을 주어 한국에서 정의와 공정한 처우를 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책자는 일본의 잔인성, 고문 사례, 비인도적인 처우, 종교 박해 및 학살 등 만행을 종교적 공신력이 있는 기관에서 폭로함으로써미국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여론의 조성은 물론 일본의 식민지 정책 전황에 큰 영향을 미쳤다.30)
그러나 『한국의 상황』이 일본의 공작으로 발간 시기가 지연되고 내용이 축소되는가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비정치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채가 서문에 일본 하라 다카시(原敬) 수상의 7월 10일자 전보문을 게재하고 “하라 수상과 그 동료들이 이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서 충분한 권력을 행사할 것이며 한국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것”이라 하여 후에 나오는 일본의 만행 증거의 파급 효과를 감소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다.31)32)
『한국의 상황』는 일본의 잔악 행위를 고발하는 역할을 하였음에도 비정치성을 유지하고 이후에 사태에 대해서는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뉴웰 마틴(Newell Martin) 동양관계위위원회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했다. 그는 1919년 9월 『일본의 한국기독교인 박멸 시도』(Japan's Attempt to Exterminate Korean Christians) 라는 편지형식의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그의 책자에는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제암리 학살’이라 표기하여 기술되었다. 일본을 비판하고 한국을 동정하는 여론이 점차 일어나자 미국 의회에서까지 한국문제를 취급하였다. 1919년 10월 상원의원에서는 “미 합중국 상원의원은 한국 국민들이 그들 스스로가 선택하는 정부를 위한 열망에 상원의 동정을 표하는 바이다”라는 결의안을 상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3) 일본의 제암리·고주리 사건 처리 과정
일본측에서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처음 보고 받은 사람은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다. 그는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발생한 다음날인 4월 16일 저녁 전보로 일본육군대신에게 보고하였다. 전보에는 제암리·고주리 사건 발생 당일, 발안장에서 약 400명이 군집하여 소동하여 해산시켰지만, 예수교도들이 폭행을 일삼자 군경협동으로 진압하던 중에 폭민 32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약간에 가옥 28호가 불탔다 보고되었다.
당시 총독부 경무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조선헌병대사령관 고지마도 17일 전보로 일본 육군대신에게 보고를 했다. 그는 15일 경기 수원군 발안 안성에서 2회에 걸쳐 30명 내지 400명이 운동 폭행하여 보병이 발포하고 순사와 협력하여 해산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20명이 죽고, 부상자가 한 둘이며 민가 소실이 18호이고 우리측 사상자는 없다며 우쓰노미야의 보고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조선총독부에 공식적으로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보고된 것은 사건 이틀 후인 4월 17일이다.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 50보)”에서 제암리·고주리 사건이 기재되어 있다.
(一) 경기도
… 수원군 향남면 15일 오후 2시 同南 발안장에서 군중 약 400명이 불온한 상황이 있으므로써 동지 주재순사가 아리타(有田) 보병 중위와 협력하여 해산시켰다. 동군 동명 15일 오후 3시 동면 제암리 (발안장 서남 약 15町에 있음) 야소교회당에 교도 30여명이 집합하여 불온한 상황이 있으므로써 척후병사가 해산시키려고 했으나 이에 불응하고 폭거로 나오므로써 부득이 발포했다는 취지의 급보에 접하고 수비병 및 주재순사 1명, 순사보 2명이 현장에 출장하여 해산시켰다. 그 때에 발포 및 방화에 의해 사상자와 소실된 가옥은 다음과 같다.
1. 사망자 약 20명
2. 부상자 1, 2명으로 예측됨
3. 소실가옥 18동 가운데 천도교회당 1동, 야소교회당 1동이 있음.
제 50보, 1919년 4월 17일.
제암교회에 교도 30명이 자발적으로 집합하고, 이들이 일본군의 해산 명령에 불복하는 등의 왜곡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또한 그 다음날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51보)”에서는 왜곡된 수위를 높여 보고했다.
(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기보(제50보) 15일 동면 제암리에서의 소요의 속보는 다음과 같다.
1. 출동인원은 보병 11명, 순사 1명, 순사보 1명으로서 지휘관은 아리타(有田) 보병 중위이다.
2. 척후병은 야소교회당에 폭민이 집합(前報에 30명으로 되어 있음은 약 300명의 잘못)한 것을 발견하자 곧 해산을 명령했는데 그들이 투석 폭행으로 나오므로써 발포한 바 그 총성에 의하여 미리 출동 준비 중이던 수비대가 곧 현장으로 급행하여 발포로 해산시켰다.
3. 죽은 자는 20명이 확실한 것으로 인정되나 부상자 1명은 도주하여 행방불명이다.
4. 소실 가옥은 28호(前報에 18동으로 되어 있으나, 강풍으로 인하여 밤에 연소하여 28호가 되었다.)
제 51보. 1919년 4월 18일.
제암교회에 모인 30명을 300명으로 확대하고 그들이 일본군을 향해 투석 행위를 했다는 과장된 왜곡은 우쓰노미야의 일기를 통해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는 “사실을 사실로서 초분하면 아주 간단하겠지만, 글면 아무렇지도 않게 독필(毒筆)을 휘두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학살방화(虐殺放火)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일본) 제국의 입장은 심히 불이익이 되며, 한편으로는 조선 안에 폭민(暴民)을 증가 조장시키고 또 진압에 종사하고 있는 장졸(將卒)에게 의혹의 생각을 갖게 하는 불리함”이 작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저항에 의한 정당방위의 측면을 부각시켰다.
19일 사건 처리에 대한 논의는 ‘저항하므로 죽였고 학살방화는 인정할 수 없다’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총독이 우쓰노미야를 불러 “이제 두루 알려진 일을 전부 부인하는 것은 도리어 불리한 점이 없지 않은가? 그 어느정도 과실을 인정하여 행정처분을 하여 두는 것이 득책이 아니겠는가”라 하여 학살방화는 부인하고 그 진압 방법에 있어서는 적당하지 않았다 인정하여 30일간 중근신을 명하는 것으로 결심되었다.
하세가와 총독은 하라 총리대신에게 “수원군 발안장에 파견한 보병 중위 이하 12명은 4월 15일 부근 주재 순사를 동행하고 제암리 기독교회당에 기독·천교 양교도 약 25명을 모아 심문 훈계를 하려고 할 때 교도들이 반항하므로 거의 전부 사살하고 방화하여 강풍 때문에 28호를 소실한 사살이 있다.”고 보고했다. 결국 제암리·고주리 사건의 가해자인 아리타 중위를 옹호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아리타 중위의 과도한 행동을 인정하면서도 그 원인을 ‘(조선인) 교도의 반항’이라 강조함으로써,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해외 언론의 연이은 보도와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의 『한국의 상황』을 출간하겠다는 등의 압박이 심해져 갔다. 일본 정부의 압박이 심화되자 일본 육군성에서 조사관을 파송, 사건 처리에 간여하게 되었다. 육군성에서 파견된 고다마(兒玉友雄)는 우쓰노미야를 만나 “당시는 진압상 최선 최상의 처치였다는 것을 믿는다”며 옹호의 입장을 내비치는 동시에 “어떠한 처분을 받더라도 감수할 것을 각오하고 있다”며 비공식적인 자신의 거취에 대한 의사를 밝혔다. 또한 사건 책임에 대해서는 최고지휘관인 자신과 아리타 둘만을 한정할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6월 29일 고지마 헌병사령관33)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회부하기로 결정한뒤 8월 21일 군법회의는 아리타의 행위에 대해 무죄선고를 내렸다. 판결문에서는 그가 “주모자를 찾아 박멸하고 그 소굴을 뒤엎음으로써 그 잘못된 희망을 근절시키지 않고서는 도저히 진정의 공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폭동진압에 관한 조선군 사령관의 훈시 및 보병 제 40여단장의 명령”에 따른 “자기 소신에 기초하여 이를 토비토벌과 같은 종류라고 하는 취지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제암리·고주리 사건을 일으키는데 아리타 중위가 잘못이 있다는 대에는 재판에서도 인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법 적용에서 “피고의 행위는 훈시 명령의 오해에서 나온 정당히 폭독진압의 임무에 복무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유죄라는 것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피고는 임무 수행상 필요한 수단으로서 당연히 해야한다고 확신함으로써 이에 이으렀기 때문에 피고의 행위는 요컨대 이를 범의가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오해로 인한 확신범으로 몰아가 “이러한 행위를 처벌할 특별 규정이 없으므로 피고에 대하여는 무죄의 언도”를 한다는 것이다.34)
한편 아리타 중위의 재판이 무죄 선고를 받자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는 중위의 직속 상관들에게 받았던 진퇴사를 모두 반려하고 그 자신도 다나카로부터 8월 30일 진퇴사를 받려받았다. 이 무렵 이미 총독도 경질되고, 외교적인 문제도 해결되어 이 사건에 대한 별도의 조치는 더 이상 불필요했기 때문이다.35)
※참고문헌※
김선진,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의 새로운 진실」, 『황해문화』 2권 1호, 1994.
김승태,·박명수, 「제암리교회 사건과 서구인들의 반응」, 『한국기독교와 역사』 7호, 1997.
김승태,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ㆍ방화 사건 처리에 관한 소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0집, 2008.
이덕주·김형석, 「3·1운동과 제암리 사건」, 『한국기독교와 역사』 7호, 1997.
「수원지방의 3.1 운동과 제암리·고주리 사건」 에 관한 논찬
Y. J. H. http://moonmogabi.blog.me/
3.1 운동은 발발이후 역사적인 가치가 깊은 사건이다. 일제의 폭력적인 행태에 최초로 저항한 만세 운동이며 이 운동 이후 국내가 아닌 국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쳐 역사적인 가치가 높다. 많은 카페 사학도 들은 이 운동을 연구하여 가치를 입증한 바가 있다. 하지만 이렇게 지역사적이고 한 특정 운동을 자세하고 면밀하게 연구한 글을 썼다는 것은 분명 앞의 글과 차별성이 있다.
이 글에서 집어 말하고자 하는 장점은 2가지가 있다. 서술상의 특징과 내용상의 특징이다. 본 글에서는 서두에서 그 의의를 밝혀 중요성을 언급하였으며 원인 - 과정 - 결과 - 반응 - 영향 순으로 작성하였다. 지역사 적으로 연구된 3.1운동을 처음 보는 대중들에게 인과적이고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관람자를 배려하는 글’ 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상의 특징은 많은 부분에서 언급할 수 있지만 본래 역사글에서 이렇게 풍부한 자료가 첨부된 글은 적은 편에 속한다. 본 글에서는 과정부터 여러 표를 도입하여 지역사적 운동의 과정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다.(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학살 사건을 보는 과정을 복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타지에서 비쳐진 과정도 게시한 점이였다.) 더불어 운동의 반응 편에서도 타국에서 비친 운동의 모습을 여러 부분에서 간결히 정리하여 우리나라가 보는 반응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에서의 정리를 한 점에서 내용상 의의가 크다.
하지만 지역사 글이기에 토로하고 싶은 마음은 몇 가지 들기 마련이다. 지역사적으로 쓰여진 글이기에 3.1운동에 대한 전반적인 배경 구조를 모르는 독자들은 이에 대해 구조적인 이해를 갖기가 어렵다. 서두에서 운동의 의의와 영향을 고르게 설명한것은 좋았지만 운동의 어느 시기 때에 이루어 졌는지를 “자세하게” 구상하였으면 좋은 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본 머리말에도 이와 같은 구상이 적혀져 있다. 좀 더 보완을 하는 의미로 쓴 뜻임을 밝힌다.)
이 글을 보면서 생생하게 묘사된 마을인들의 말을 보아, 제암리 인의 마음속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글을 작성하기 위하여 작가의 노고를 생각하니 힘든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3.1운동은 전반적인 구도로 보기에는 그 특징이 유사하지만 지역마다 그 운동의 과정과 결과를 고찰하고 연구하기에는 힘이 벅찬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어 작가의 노고를 칭찬하고 격려한다.
이 글을 읽기에 앞서서 분량의 부분에서는 부담될 수 있는 부분일 수 있다. 모바일 시대에 이렇게 장편의 글을 읽기에는 지루함의 일색이기 때문에 그러할 수 있으나 한번 읽고 난 뒤에는 3.1운동의 거시적인 부분이 아닌 미시적인 부분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안목’ 이 생기리라 감히 논찬자가 보장한다.
1) 안성군: 429명, 고양군: 267명, 개성군: 189명, 수원군: 182명.
4) 김선진, 「제암리·고주리 학살 사건의 새로운 진실」, 『황해문화』 2권 1호, 1994, 145~146쪽.
16) 이덕주·김형석, 위의 책, 56~58쪽. 이들의 기록 출처에 대해서는 54~56쪽 참조.
33) 순사와 순사보도 참가했기 때문에 상관인 고지마 헌병사령관도 자유로울 순 없었다.
34) 김승태,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ㆍ방화 사건 처리에 관한 소고」,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0집, 2008,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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