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 크래쉬
헤비메탈이나 스래쉬 메탈에 문외한인 당신이라도 ‘교실이데아’ 의 굵직한 목소리나(안흥찬의 그로울링) TTL 광고의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정도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는데 있겠지만 --; 날 때부터 매니아인 사람이 있겠는가.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 했으니. 1991년 팀 결성 후 1994년 초에 발매된 1집을 시작으로 10년 동안 5장의 앨범을 낸 크래쉬는 스래쉬를 기반으로 꾸준히 강력한 음악을 선보였다. 일반적인 록밴드도 살아 남기 힘든 한국 음악시장임을 고려한다면 10년 넘게 스래쉬라는 장르를 실험해온 이들의 행보는 단연 독보적이다. 확고한 음악적 신념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고 있는 이들의 음악세계와 이들이 피부로 느끼는 음악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강한 음악에 대한 선입견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 하재용(g): 기타를 잡은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이 통기타를 사 오면서였고 일렉 기타를 잡은 건 중 3때이다. 친한 친구가 같이 음악을 해보자고 해서 시작하게 됐다. 크래쉬에는 흥찬형이 단기사병으로 군에 갈 때니 94년 5월쯤 세션을 해주면서 함께 하고 되었고 3집 때부터 정식 멤버로 활동하게 됐다. 그전에는 노이즈 가든의 드럼 치는 형과 Fotendon 이란 밴드를 했었다.
- 안흥찬(v): 주말에 아버지와 함께 LP 판을 닦는 게 일과였고 그렇다보니 많은 음악을 듣게 됐다. 물론 그때는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들리니까 들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강한 음악을 듣게 됐는데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나 혼자라는 생각이 커서 화나 분노를 풀 방법은 음악 듣는 것밖에 없었다. 친구들에게 강한 음악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이것저것 들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에 의해 록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 같은 경우는 반대로 내가 물어서 음악을 찾아 들은 셈이다.
- 정용욱(d):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밴드를 하기로 했다. 다들 드럼을 싫어해서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내가 지고 말았다. 우선 악기가 있어야 하니까 드럼을 사달라고 집에 졸랐고 친구집에서 15일간 버텼다.
- 임상묵(g): 중학교 때 축제기간에 밴드들이 공연하는 걸 보게 됐다. 음악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지만 굉장히 멋져 보였고 그 일을 계기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밴드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들어가서 맞기만 하고 악기는 배우지도 못했다. (기타는 나중에 학원에 가서 따로 배웠다.) 당시에는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뮤직비디오를 틀어주곤 했는데 뮤직비디오를 보는 순간 저 길이 내 길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그때부터 등록금으로 기타를 사는 인생이 시작됐다. (웃음) 크래쉬에는 2000년 말에 합류하게 됐다. - 김기자 : 이전 인터뷰를 보니 만장일치로 합류하게 됐다는데. - 정용욱(d): 당시에 상황이 좀 급하긴 했는데 몇 명의 기타리스트를 두고 고민 중인 상황이었다. 그때 상묵이형이 나타났고 만장일치로 결정하게 됐다. 내가 중3 ∼고1 때 송설에서 상묵이 형의 밴드는 일명 럭셔리 밴드로 유명했다.(웃음) 형 밴드가 공연을 하면 학원 사람들이 모두 와서 공연을 보곤 했다. 2. 5집 앨범을 낸지 9개월 정도 지났는데 의도한 바와 팬들의 반응이랄까 그런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 안흥찬 (v): 글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만 든다. 악순환의 연속이고. 물론 그런 상황에 대해 모르고 한 것도 아니다. 할 얘기가 많지만 해봤자 개선이 안되니까 얘기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 안흥찬(v): 4집을 내려고 했을 때 우리는 기존의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의 라인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작업에 한계를 느낄 때였다. 기존의 시스템으로 새롭게 표현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다고 생각됐다. 그 때 일렉트로닉에 대한 음악적 관심이 4집에 반영이 된 것이고 작업하면서 재미도 느끼고 의욕도 생겼다. 물론 처음에 생각했던 것 보다 프로그래밍 사운드의 비율이 높긴 했다. 그리고 매니아들의 부정적인 반응에 대해서도 이미 예상했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떤 문제가 되진 않았다. - 하재용(g): 멤버들 모두 느낀 거지만 4집은 우리가 의도했던 것보다는 프로그래밍 사운드가 너무 강했다. - 안흥찬(v): 우리들 스스로도 강한 것을 좋았기 때문에 5집은 강하게 다시 간 것이고 음악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5집이 3.5집 정도 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 정용욱(d): 밴드 입장에서 4집은 건반이라는 새로운 멤버의 영입과 함께 또 다른 조화를 경험하게 한 것이다. - 김기자: 4집은 기존의 앨범들보다 여러모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어떤 여지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었던 것인가? - 안흥찬(v): 당시는 음반시장의 규모가 밀리언셀러 시장이었다. 우리를 아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어떤 기대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새로운 방향으로 테스트를 한 앨범이라고 볼 수 있는데 어쨌든 결과는 똑같았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황은 변하질 않는다.
4. 밴드의 음악은 계속적으로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야 하는데 스래쉬 밴드들의 음악적 변화에 대해 매니아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정용욱(d): 자신들이 좋아하는 밴드가 갑자기 다른 성향의 음악을 들고 나왔을 때의 기분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실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임상묵(g): 하지만 진짜 매니아라면 자신이 좋아하는 팀을 좀 더 진득하게 보아주고 그들의 음악적 변화만 문제삼지 말고 그들이 그것을 통해 어떤 것들을 이야기를 하려는지에 관심을 갖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한다. - 정용욱(d): 우리의 팬들이 많다고 하지만 사실 홈페이지에 자주 들어오는 사람은 20명 안팎이다. 그들은 우리의 음반이 나오면 여러 장을 사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하고 그러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의 매니아들은 말은 많이 하지만 음악은 mp3로 듣는 경우가 많고 앨범을 사는 사람은 많진 않다고 본다. - 하재용(g): 일부에서는 음반을 사는 걸 바보 취급하기도 한다. mp3로 다운 받아 들으면 그만인데 왜 앨범을 사느냐는 그런 이야긴 것 같은데 컴퓨터 앞에 앉아 모든 걸 해결하는 그들이라면 웹상에서 말많고 mp3로 음악 듣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 정용욱(d): 공연장에 갈 필요가 뭐가 있겠나. 금세 웹에 동영상이 뜰텐데. 전에는 공연도 음악도 다 찾아다니면서 보고 들었는데 지금은 사람들이 너무 게을러 진 건지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질 않는 것 같다. - 안흥찬(v): 글쎄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전략적이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 - 임상묵(g): 우선 스래쉬 밴드로는 최초로 순위 프로그램에도 나가고 흥찬이는 VJ도 하고 있어서 매주 볼 수 있고 뭐 그런 점들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 그렇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꾸준히 활동을 하니까 얻어지는 부수적인 것들이다. - 안흥찬(v):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같은 경우는 매스컴의 장난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TTL에서 그 음악을 쓰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관심을 보이진 않았을 거다. 사실 음악이 나왔을 때는 별 반응도 없었는데 6개월 뒤에 광고에 나오고부터 그렇게 된 거다.“교실이데아”같은 경우는 서태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 정도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그 노래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음악적으로 전략적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진 모르겠는데 우리가 스래쉬를 한다고 그런 음악만 듣는 건 아니다. 우리는 굉장히 다양한 음악들을 듣고 멤버들이 좋아하는 어떤 부분들이 음악에 스며들게 되어있다. 우린 그런 부분에 대한 센스와 감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류에 편승해서 어떤 장르가 유행한다고 이리 따라가고 저리 따라가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제일 추한 모습이 아닌가? - 하재용(g): 우리가 만약에 전략적이었다면 5집을 더 강하게 낼 순 없었을 거다. - 정용욱(d): 음악을 만들 때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어떤 전략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 김기자 : 아까 매스컴의 장난이라고 했는데 그럼 매스컴을 거꾸로 이용해볼 생각은 없는가? - 안흥찬(v) : 매스컴을 이용하기 전에 우리가 치뤄야 할 대가가 더 크다. 더럽고 치사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난 남자로 태어나 음악 하는 것을 굉장히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나이가 어린것도 아니고 그만큼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이제 와서 그걸 감수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우리는 그럴 시간에 연습한다. - 정용욱(d): 어떻게 10년 동안 해도 바뀌는 게 없다. 가끔 우리에게 온 타협의 기회를 다른 팀이 가져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잘 되느냐 그것도 아니다. 타협을 해도 안되고 타협을 안 해도 안되고 안 되는 건 계속 마찬가지다. - 안흥찬(v): 그래도 우리는 오래 가잖아.(정용욱을 보며) 일본의 후지 록 페스티벌만 해도 그렇다. 우리 나라에서 거기 가는 팀들은 다 초청 받아서 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초청은 무슨. 다 참가비 내고 가는 거다. 그나마 그것도 그쪽 프로모션의 눈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공연장에 가보면 얼마나 초라한지 모른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후지록 페스티벌에 갔다왔네 어쩌네 하는걸 보면 기가 막힌다. - 김기자 : 상황이 그렇게 변함이 없다면 어떤 대안을 모색해야 되는 것 아닌지.(물론 쉬운일은 아니겠지만) 전략적이라는 말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좋은 음악은 매니아나 일반인 모두에게 감흥을 줄 수도 있지 않는가? 그런 측면에서의 전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안흥찬(v): 그렇게 하는 게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음악이라는 게 어떤 공식에 대입해서“짠”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단적인 예로 4집 때 건반으로 합류했던 형은 넥스트의 건반이었는데 감각이나 곡 어레인지나 여러모로 뛰어난 사람이다. 화성학 같은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그렇고. 4집 작업을 할 때 여러모로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도 내 스타일은 잘 안 바뀐다. 음악에 대한 입장 차이도 좀 있는 것 같다. 나는 곡 중간에 일부러 부딪히는 부분들을 만드는데 형은 그런 부분들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 안흥찬(v): 우선 1집「Endless Supply Of Pain」은 1994년 1월에 발매되었다. 국내 스래쉬 밴드로는 최초의 정규 앨범인데다 외국 엔지니어와의(콜린 리차드슨) 작업이라 여러모로 주목을 많이 받았다. 22살 때 였으니 많이 무모했고 이름 있는 레이블과의(SKC Matal Force) 작업이라 우리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뭐 질풍노도의 시기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집「To Be Or Not To Be」는 1995년에 발매됐고 저드 패커를 엔지니어로, 프로듀싱은 우리가 직접 했다. 아쉬움이 많이 남긴 하지만 어쨌든 굉장히 열심히 한 앨범이었다. 당시에 나는 일병을 달 때쯤이었는데 녹음실에 가서 밤을 새고 낮에는 근무하러 가서 졸고 그게 일상이었다. 2집은 좀 어렵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3집「Experimental State Of Fear」은 1997년에 나왔다. 새로운 기획사와 작업한 3집은 계약금 대신 해외 녹음을 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작업을 해보고 싶었고 영국에 가서 그것을 이루게 됐다. 녹음에서 마스터링까지 모두 영국에서 작업했는데 사실 스튜디오 자체는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의 예민한 귀와 감각 더불어 음악적인 것 뿐만 아니라 삶의 영역 전체에서 느껴지는 차이는 굉장히 크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옷가게를 가도 기본적으로 오아시스나 프로디지의 음악이 나온다. 불법체류를 해서라도 남아 있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게 들 법하다. 음악적으로 보면 3집은 스래쉬가 나아갈 수 있는 좀 더 진보적인 방향에 대해 많이 고심한 앨범이다. 사운드 메이킹이나 기타 리프 등 다른 악기 파트에 대해서도 만족한 편인데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 4집「Terminal Dream Flow」은 2000년에 발매됐다. 영국에서 느꼈던 어떤 감흥들과 함께 스래쉬에 대한 고정된 생각들에서 좀 벗어나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하나의 악기라고 보면 스래쉬라고 해도 그로울링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초대형 프로젝트 실험작이었지만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해외에서는 이런 음악은 스래쉬라고 하지 않는다. 어쨌든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며 5집 작업은 우리가 원래 하던 식으로 작업해 나갔다. 2003년에 발매된 5집「The Massive Crush」는 아까 말한 것처럼 3집에서 4집으로 넘어가는 음악적 갭에 대한 중간적 입장이라 볼 수 있다. - 안흥찬(v): 다음 앨범은 올해 말쯤 생각하고 있다. 아직 방향성에 대해 얘기하긴 이르지만 어쨌든 우리는 계속 강한 음악을 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9. 해외진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아직 못 이룬 일 중 하나인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지 안흥찬(v): 글쎄 뭐 가사는 한글로 하면 발음하기도 힘들고 받침이 많아서 숨쉬기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앨범에 어떤 곡이 한글가사로 나와도 번안해서 한글로 만든 것이라 영어 버전이 다 마련되어 있다. 가사가 한국어라서 해외진출이 문제가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이기도 하다. 사실 해외진출은 크래쉬 초기부터 우리의 목표였고 10년 안에 이루고자 했는데 아직 이 상태다. 1집 앨범이 발매되었을 때부터 여러모로 제안은 들어 왔었다. 문제는 기획사들의 안일한 태도인데 어떤 비젼보다는 당장의 이익에 급급하기 때문에 일이 진척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도 자국에서 활동할 수 있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는데 체류비나 활동에 드는 비용들 때문에 간단치 않았다. 물론 일본말로 노래를 하라는 옵션도 걸리기도 하고. 사실 우리가 일본의 클럽에서 라이브를 하고 활동을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런 정도는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지만 좀 더 체계적으로 활동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멤버들 모두 십년 넘게 쌓은 인맥을 가지고 계속 해외진출에 힘쓰고 있다. 오늘도 미국의 센츄리 미디어에 전작들을 보내줬다. 음반을 각국에 보냈을 때 반응도 참 여러 가지다. 유럽에서는 우리의 음악이 솔리드한 헤비메탈이라며 좋다고 했고 유럽 투어가 가능함을 물었지만 체류비용 때문에 결렬 될 수밖에 없었고 브라질에서는 우리의 음악이 너무 메이저라 감당이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일본에서는 음악은 독특하지만 메이저는 아니라는 반응이었고. 어쨌든 우리는 계속적으로 시도할 것이다.
- 안흥찬(v): 우선 IMF 도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여건상 좀 힘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밴드하는 친구들이 유행하는 장르에 휩쓸리는 경향이 너무 커서 한 장르를 꾸준히 하는 팀이 없는 것 같다. 우리 같은 경우는 계속 하다보니 꾸준히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임상묵(g): 지금 활발하게 활동하는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말하긴 좀 이른 것 같고 2∼3년 정도 지나야 할 것 같다. 11. 1998년 박준흠씨 와의 인터뷰를 보면 마지막 부분에 자고 일어나도 똑같은 현실이 반복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식의 삶은 무의미하다고 했다. 또한 몇 년 뒤 누군가가 우리나라 음악환경에 대해 묻는다면 그때와 마찬가지로“우리나라의 음악환경은 구멍이 뚫렸다고” 답변할 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내일이 없다는 식의 삶이 무의미하다면 그것을 타파할 구체적인 대안이 있는가? 우리나라 음악환경에 대한 질문에 오늘도 그렇게 답변할 것인지 궁금하다. - 안흥찬(v): 우선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구가 늘어나야 하고 경제적인 여건이 나아져 하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 져야 한다. 그리고 뮤지션들이 힘을 합쳐야 하는데 단합이 안 된다. 사실 음악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고집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잘 단합되길 바라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올라간 사람들이 끌어올려 주지 않으면 발전하긴 힘들다. 같이 잘 되자는 마인드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 않아 아쉽다. - 안흥찬(v): 나를 제외하곤 멤버들 모두 레슨을 하고 있다. 나는 VJ를 하고 있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뭔가 되려니 하는 생각은 위험하다. 해외에 가보면 왠만한 밴드들도 대부분 second job이 있다. - 임상묵(g): 예전에는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만 파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근래 친구들은 따로 job을 갖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밴드가 장수하고 생명력을 갖으려면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수입원이 필요하다. 물론 음악만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버텨나간다고 해도 끝까지 배고프게 살기도 힘들고 중간에 결혼이라도 하게 되면 대부분 그만두게 된다. 그런 모습은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다. - 정용욱(d): 음악은 기본적으로 좋아서 하는 것이지만 좋아서 하는 것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렇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한 문제는 개인의 몫이다.
- 안흥찬(v): 그 단어는 사실 굉장히 의미 있는 말인데 우리 나라에 유입되어 변질되어 버렸다. 자체적인 레이블을 통해 앨범을 제작하는‘인디’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일명‘어둠의 자식들’로 변질되었다. 분류하고 구분 짓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 용어 대해 제대로 관리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 정용욱(d): 음악 하는 사람들 중에‘인디’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외부의 시선이나 이야기에 좌지우지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변질된‘인디’의 의미) 그리고 어떤 단어에 연연해하는 것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모두 말 일 뿐인 것 아닌가? 14. 근래 음악판의 흐름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가? (클럽, 밴드, 오버, 매니아) - 안흥찬(v): 다양하게 활동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사람들이 뭉치질 못하고 너무 퍼져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아웅다웅하거나 트러블이 생기기 일수고 오픈 마인드나 같이 잘 해보자는 생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결국 서로 눈치만 보게 되고 비슷한 모토의 공연들이 다 찢어져서 진행되는 것 같다. 2004년 올해로 일본 문화가 전면 개방되어 일본의 유명한 클럽 분점들은 하나하나 들어오고 있는데 우리는 이렇게 뭉치질 못해서 어떻게 되려는지 정말 걱정스럽다. - 하재용(g): 자기자신의 소신이나 신념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너무 없다. 다들 어떤 장르가 주목을 받으면 그리로 우르르 몰려가고 계속 그런 일들이 반복된다. 펑크도 핌프록도 마치 트렌드처럼 지나간다. 물론 어떤 음악적 흐름을 반영할 수는 있겠지만 반영하는 정도가 아니라 매번 뿌리 없이 옮겨 다니니까 결국엔 유행했던 그 장르에서도 남는 팀이 거의 없고 황폐해져 버린다. - 임상묵(g): 앨범을 사거나 공연을 보는 것은 문화적인 행위이다. 사실 앨범 한 장의 가격이 경제적으로 크게 무리되는 것도 아니고 공연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문화적으로 자신이 풍요로워 지는 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은 손에 쥐고 있는 몇 푼을 아끼는 것에서 얻어지는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다. 사람들이 이런 부분에 대해 좀더 느꼈으면 좋겠고 매니아들도 불필요한 논쟁에 열올리기 전에 자신의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해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 정용욱(d):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음악판의 흐름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종전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뉴메탈이 대유행을 했는데 앞으로는 또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모르겠다. 그리고 주변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우리 것을 잘 하고 싶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하고 그것이 잘 진행되면 음악판이나 여타의 상황들도 같이 변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5. 연습일정과 2004 년의 활동계획에 대해 부탁한다. - 안흥찬(v): 근래에는 연습실도 이사했고 다들 바쁜 일이 있어서 자주 합주는 못했다. 보통 일주일에 2∼3번 정도 만나서 연습을 하는데 연습이라는 건 몸에 배게 하는 일이다. 2004년에는 3월 6일에 폴리 미디어 시어터에서 우리가 직접 기획한 ‘Re- rush’라는 공연을 한다. 국내 팀으로는 크래쉬, 시나위, 블랙 신드롬, 피아가 출연하고 일본팀인 Outrage도 섭외했다. 2004년부터는 많은 일본 밴드들이 우리 나라에서 공연을 할텐데 역사를 가지고 있는 Outrage 같은 팀이 먼저 와서 공연을 했으면 하는 바램도 있어서 기획하게 됐다. 이 행사는 본래 1997년 나우누리에 있는 우리 팬클럽에서 뮤직비디오 감상과 팬클럽 내에서 만든 밴드 공연으로 시작되어 해마다 진행되다가 규모가 좀 커지게 되었다. 새해도 됐고 해서 2004년에 먼저 총대를 매고 나아가기로 했고 올해도 역시 해외진출에 주력할 것이고 연말에는 새 앨범을 낼 생각이다. 더 나이 먹기 전에 뭔가 해보려고 한다. 연말에 할말이 많을 것 같다. 그때 다시 인터뷰를! 인터뷰, 글/김기자 사진/ 유감독 2004 * 더 리얼한 인터뷰 이야기와 비주얼은 http://cafe.daum.net/Indiestory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에 내용 중 의문 나는 부분이 있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클릭해 주십시오. 진정한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는 거친 목소리와 강렬한 사운드로 무장한 크래쉬의 진가와 10년이라는 (강산도 변한다는) 시간을 뛰어넘은 이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크래쉬 - 베이스, 보컬: 안흥찬(72) 기타: 임상묵(70) 기타: 하재용(73) 드럼: 정용욱(75)
1. 각자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크래쉬에 합류하기 전까지 활동사항이 궁금하다.
고 3때 아는 후배가 베이스를 쳤었는데 집에 들킬까봐 악기를 우리 집에 맡기곤 했었다. 베이스는 4줄이니까 기타보다는 쉬울 것 같았고 악기가 집에 있으니까 이리 저리 튕겨 보게 됐다. 당시에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사람은 많아도 베이스 치면서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베이스를 치면서 노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송설’이라는 음악학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형들이 레슨 하는 모습을 어깨 너머로 볼 수 있었고 혼자서 연습했다. 크래쉬는 내 첫 밴드다.
송설에는 친구들과 함께 악기를 배우기 위해서 다녔고 그 팀이 깨지고 나자마자 크래쉬에 합류 제의를 받았다. 그때가 크래쉬가 결성된 지 한 달쯤 되었을 때다.
3. 개인적으로 기존 앨범들과는 다른 성향인 4집을 신선하게 들어서 5집이 궁금했는데 다른 인터뷰에서처럼 5집은 3.5집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크래쉬에게 4집은 어떤 의미이며, 5집 앨범의 방향성은 어떻게 정하게 된 것인가?
- 혹시 4집에 대한 매니아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영향을 좀 미쳤는가?
- 안흥찬(v): 전세계적으로 음반시장이 불황인 건 사실이지만 외국은 공연장에는 사람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공연장에도 사람이 오질 않는다.
5. 음악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크래쉬는 상당히 전략적인 밴드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런 부분에 대해 많이 고민을 하는지? 10년 넘게 한 밴드를 유지하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6. 대중적으로 크래쉬가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교실이데아”작업과“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음악적으로는 전략적으로 진행할 생각이 없는지 궁금하다. 물론 4집에서 어느 정도는 시도했다고 보여지는데.
그리고 우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록밴드들이 히트곡에 대해서는 그리 긍정적인 입장은 아니다. 항상 그 노래를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기 때문에 밴드 입장에서는 좀 그렇다.
7. 94년 첫 앨범을 시작으로 2003년 5집까지 10여 년에 걸쳐 5장의 앨범을 냈다. 각 앨범에 대해 간단히 설명 내지 코멘트 부탁한다.
8. 다음 앨범을 논하기는 아직 이른 감이 있지만 6집에 대한 방향성은 어느 정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영어 가사가 많은데.
10. 크래쉬 하면 단연 국내 록밴드 중 최고로 꼽히는데 아직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밴드 중에서는 장르를 막론하고 그만큼의 영향력과 힘을 가진 밴드가 나오질 않고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음악적 환경에 대해서는 여전히 같은 생각이고 대안을 구상하고 있긴 한데 아직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이 얘기를 하려면 연말쯤 다시 인터뷰를 해야 할 것이다.
12. 음악을 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을 동시에 해결하긴 힘든데 어떤가?
-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만을 하면서 경제적인 부분이 모두 해결되길 바라는 것은 무리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13. ‘인디’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