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형제묘→ 박대식빅토리노묘 → 대산성당→ 명례방(2차) → 정찬문안토니오묘→ 통영 ES
26.4Km 44.7Km 42.1Km 71.2Km 77.3Km
47. 복자 박대식 빅토리노 묘
박대식 빅토리노는 1811년 김해 예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입교시기는 알려지지않았고 가족들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1868년 무진 박해때 대구에서 내려온 포졸 들로 인해
형 박대흥, 조카 박수연과 함께 체포되어관아로 압송되었고
대구 경상감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증언하였습니다.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동료2명과 함께 참수형을 받았고
그의 가족들을 대구에서 포졸들에게 돈은 주고 순교자의 시신을 찾아와
선영에 모시려했으나 마을 사람들과 집안 외인들의 반대로
다동 (현 김해 청천리 책골) '유씨' 문중 산에 평장으로 매장하였습니다.
그 후 90여년이 지난 1956년에 후손들이 무덤의 봉분을 크게 하고
순교자 부인의 묘도 이장하면서 완전한 묘역으로 가꾸었습니다.
1966년에는 당시 진영 본당 주임 유창호 신부의 주선으로
순교자의 무덤앞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때까지 순교자의 세례명이 알려지지않아서
임시로 '노렌조'(라우렌시오)라고 비석에 새겼습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다곡삼거리②에서 좌회전하여 들어와서 진행하면
왼쪽으로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묘지 표지판⑤이 보이고,
상·하선 차량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진입하면 된다
위 사진에 보이는 빨간 조립 콘테이너 건물 앞에 주차를 하면
아래 사진과 같이 박대식 빅토리노 순교자 묘지 입구표지판⑥이 보인다
殉敎密陽朴公大植노렌조之墓
비석에 '노렌조'(라우렌시오) 라 쓰여 있음은
1966.04.15. 진영 본당의 유창호 토마스신부가
그때까지 전해오지 않던 박대식의 세례명을 임시로
'노렌조' 라 명명하고 비석을 세웠다
박 위도서, 박수연, 송 마태오, 박 요셉 네 사람이 본래 김해사람으로
무진(1868년) 칠월 초 칠일에 대구 김해 양(兩) 포교에게 잡혀
김해 관아에 가서 한 삼일 갇혔다가 대구로 잡혀 올라가
동년 팔월 십칠일에 한가지로 참수 치명 하니라
-병인치명사적 23권의 기록에서-
※ 여기서 '위도서'는 '빅토리노'의 한자식 표현
48. 대산성당(구한선 타대오 묘)
구한선(타대오,1844~1866)은 리델 신부의 복사로
거제도 전교 활동을 다녀온 시간을 생각하면 마음이 뛰었다.
리델 신부가 집전하는 전례나 예식을 보조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한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하지만 구한선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전교 활동을 다녀온 직후 1866년 봄, 경남 진주 집에서 지내던 그는
진주 관아 포졸들에게 잡혀 끌려갔다.
그는 자주 호된 문초와 매질을 당했다.
특히 바지를 내린 채 곤장으로 볼기를 맞는 장형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착! 착!’ 두터운 나무 장이 구한선의 볼기에 내리꽂혔다.
볼기가 차츰 검붉게 멍들기 시작하더니 10여 대가 넘어가자
결국 살이 터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한선은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관장이 물었다.
“어찌하여 아프다 소리를 한번도 하지 않는 게냐?”
구한선이 답했다.
“늙으신 어머니가 문밖에 계십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의 앓는 소리를 듣고 기절할 것을 걱정하였다.
관장은 “어찌 그런 자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하며 호통쳤다.
구한선은 더욱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주교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맞는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것이었을까.
온갖 형벌로 만신창이가 된 구한선은 석방돼 집으로 보내졌다.
관아 안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관장의 뜻이었으리라.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구한선은
7일 동안 장독으로 앓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겨우 그의 나이 22세였다.
그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됐다.
구한선의 고향은 경남 함안 근처였다.
당시 가족들은 그의 시신을 함안 대산면 하기리에 있는
신씨들 묘소 구석에 안장했다.
박해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뒤늦게 발견된 구한선 묘는
1977년 함안 대산면 가등산 근처 교우 묘역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2002년 5월, 마산교구는 그곳을 순교자 묘역으로 조성했다.
2014년 8월 구한선이 시복된 뒤,
성지 주변의 환경 변화와 순례자들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2016년 10월 복자의 유해를 대산 성당에 모시고
새롭게 성지를 조성하였다.
새 성지에서는 1) 무덤 경당(순교자 묘소)과
야외 기념 제단(유해 일부 안치)에서 기도하고
2) 안내 쉼터에서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대산성당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바로 앞에 면사무소가 있지만 점심시간이라 승선에 필요한 신분확인 서류를
뗄 수가 없어서 대산성당 순례를 하고 우리도 주위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제주 신창성당 사무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명례성지에 계신 순교복자수도회 수녀님이 아내의 지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전화를 걸어 확인한 결과 아침에 일어나보니 지갑이 수녀원 안에 있었다고 한다.
어느 순례객이 주워서 수녀원으로 밀어넣은 것 같다고 했다.
한 참을 되돌아 가야하지만 그래도 지갑을 찾은 기쁨에 다시 명례성지에 가서
지갑을 찾고 수녀님과 차 한잔 하고 이제민 신부님 책도 2권 구입했다.
왕복 2시간을 허비했지만 잃은 물건을 찾은 기쁨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즐겁게 다음 순례지로 향했다.
49.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의 중촌 마을에는
머리가 없는 유해가 묻혀 있다 해서‘무두묘’(無頭墓)라 불리던
순교자 정찬문(鄭燦文, 1822-1867년) 안토니오의 묘가 있다.
정찬문의 묘에서 내려다보면 중촌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그가 지금도 마을 사람들을 향해
굳은 믿음을 당부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묘가 서 있는 허유 고개는 신자들이 수시로 넘나들었던 고개로
사봉 주유소를 끼고 약 600미터 남짓 올라가면 묘가 나온다.
정찬문은 1822년 10월 13일(음) 진양 정(鄭)씨 양반 가문의 부친 정서곤(鄭瑞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의 외아들로 진주 동면 허유 고개 중촌에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일찍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한다는 지조로 낙향한
고려 말 대사헌 정온(鄭溫)의 후예로 정찬문 역시 선대의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강한 절개와 지조 있는 인품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대산 가등 공소의 천주교 신자 집안의 여자인 칠원 윤씨와
1841년 이전에 혼인하여 아들 중순을 두었다.
그는 부인의 권면으로 1863년, 그의 나이 41세에 입교하여
단란한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 활동에 충실한 생활을 했다.
특히 이들 부부가 전교 활동을 했던 시기는
철종(哲宗, 1849-1963년) 재위 기간 14년과 고종(高宗, 1863-1907년 재위) 즉위 직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던 과도기적 시기였기에
비교적 박해의 위협을 받지 않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66년 가장 혹독한 박해 중 하나로 꼽히는 병인박해가 일어나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했고,
정찬문도 그 해 가을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놀란 문중(門中)에서는,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조사해 달라는
재심을 청원(고복·考覆)하고 평소에 알던 그 지방의 하급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하면 풀어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25일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종종 관장 앞에 끌려나가 온갖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배교를 입에 담지 않고 굳건히 신앙을 고백했다.
그 동안 그의 가산은 적몰되고 가족들은 생활이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밥을 빌어 옥으로 나르던 부인 윤씨의
격려에 힘입어 그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순교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과 무수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그는 모진 매를 맞고
감옥으로 끌려들어간 그날 밤 숨을 거두었다.
이때가 1867년 1월 25일(음력 1866년 12월 20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정찬문이 장사(杖死)로 순교한 진주 감옥은
진주 공설시장 인근 중앙시장과 옥봉동 성당 사이에 있었으며,
윤봉문 요셉 역시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그가 순교한 뒤 그 시신은 3일 동안 옥에 버려져 있었다.
이후 그의 사촌들이 시신을 찾으러 갔지만
고복(考覆)에 연관된 시신이었기 때문에 머리는 가져올 수 없었다.
결국 머리 없이 몸체만 수습해 와 고향 인근에 매장하면서
무촌리의 무두묘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순교자의 조카들이 그의 시신을 염했는데,
몸이 굳지 않고 마치 산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 후 순교자의 묘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된 끝에 잊혀갔다.
1946년 문산 성당의 서정도 베르나르도(1899-1964년) 신부는
굼실(隅谷, 사봉면 사곡리) 공소 회장에게서 무두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48년 3월 30일 무촌리에 살고 있던 ‘텃골 마누라’라는
광산 김씨 할머니(당시 94세)의 제보를 받아
허유 고개 길섶에 초라한 모습으로 있던 순교자의 묘를 찾았다.
그 해 5월 31일 교우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를 발굴해 새로 입관한 후 약간 위쪽으로 이장하고
그 앞에 본당에서 준비한 기념비를 세웠다.
그 후 1975년 10월 중순 그 인근에 새로 조성된 사봉 공소의 순교자 묘역
(사봉면 무촌리 중촌 마을)으로 이장했고, 1978년 1월 28일
묘소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건립하였다.
아쉬운 것은 남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형리들에게
온갖 고초를 겪어 가면서도 아기를 등에 업고 옥바라지를 하던
부인 윤씨가 허유 고개를 떠나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는 것이다.
남편의 순교를 자랑스럽게까지 생각했던 부인은 이웃과 친지들의 미움을 사게 됐고,
결국 이런 구박과 핍박을 받으며 눈물로 나날을 보내던 부인은 견디다 못해
남편의 고향인 이곳 허유 고개를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정찬문 순교자의 묘소를 보존해 온 문산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2005년 4월 3일 순교자 묘소가 조성되어 있는 사봉 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해 축복식을 가졌다.
건평 60여 평에 철골 1층 구조로 건립된 사봉 공소는
순례자들을 위한 다용도실과 전례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오늘 순례일정을 끝내고 통영에 있는 ES 콘도를 향했다.
마침 일몰시간인데다가 일몰이 아름다운 달아공원을 지나게 되었다.
차를 급히 주차하고 일몰사진을 몇 장 찍었다.
제주에서 늘 보아왔던 차귀도 일몰과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방에 들어와 방금 찍은 일몰사진을 지인들에게 보내고
남은 2곳 순례지를 포함해 거제와 통영관광 할 만한 곳을 체크하고
제주에서부터 가지고 온 라면을 끓여서 맥주와 함께 먹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러가지 시행착오도 하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계획한 일정보다 하루 반의 시간을 벌어
내일과 모레 이틀은 남해안을 관광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