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로부터 이승과 저승을 잇는 초혼의식에는 말과 엽전 그림을 정성스레 준비했다.
영가들이 말을 이용해 저승에서 이승으로 오가고 노잣돈으로 엽전을 필요로 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말 대신 비행기,엽전 대신 신용카드 그림을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허나 그런 드러난 외형보다도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 있다.
사람이 죽을 때 마중 나오는 자들의 면면이다.
죽음에 대한 문화적 정의만큼이나 죽음의 광경에 대한 묘사도 참으로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망자를 염라대왕 앞으로 인도하는 것은 저승사자라고 했다.
혹자는 저승사자가 아닌 수호령이 영가들을 맞이한다고 한다.
또한 18세기를 풍미한 서양의 영능력자인
스웨덴보르그는 인간이 죽을 때는 천사가 와서 영혼을 데려간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현대인의 죽음 이후에
마중 나오는 자들도 여전히 전해오는 이야기와 같은 면면일까.
일전에 고위 공무원이었던 분의 병문안을 간 적이 있다.
배울 만큼 배운 인텔리였기에 위중한 상황에서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초연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내게 죽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렸다.
삶에 대한 회한이 남아서 그런가했지만
그는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법사님" 하며 몸부림 쳤다.
알고 보니 검은 옷의 사자는 그가 생전에 사형을 지시해서 죽었던 자였다.
죽은 사형수는 원한이 맺혀 그의 죽음을 영계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 임박한 그가 사색이 되어 제 발로는 영계로 가지 않으려 버텼던 것.
이제는 사람이 죽을 때 날개옷의 천사만이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
살아생전 인생 빚을 진 사람의 죽음이 임박하면 그 앞에서 빚쟁이들의 영가가 기다린다.
육신을 갖고 있을 때는 감히 범접하지 못하던
영가들도 빚을 진 사람이 같은 처지의 영가가 되면 달려드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흔히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영계의 파수꾼들이 한 맺힌 영가들이 갓 망자가 된 이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오히려 경찰이나 보디가드처럼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세태가 각박해질수록
경제사범이 늘어나는 것처럼 최근 영계로 가는 길목에서도
그런 인생의 채무를 해결하려는 일들로 종종 시끄럽다.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했던 사람은 영계에서도 모시러 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벼르고 있다가
죽음의 길목에서 당해보라는 듯이 달려드는 영가들이 참으로 많다.
때문에 오히려 보호령이 안전을 위해 마중을 와서 동행하는 것을 많이 봤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은 후의 주변 영가들의 모습만 보아도
망자가 생전에 덕을 쌓으며 잘 살았는지 죄를 짓고 살았는지를
고스란히 알 수 있다.
죽음을 마중 나오는 자들의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다.
마치 애벌레가 변해 아름다운 나비가 되듯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거쳐 새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도 과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영계에서는 환생을 미루며 원수의 죽음을 기다리는 영가들마저 있다.
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누군가 지옥으로 끌고 갈 수도 없다.
그래서 기어이 자신의 손으로 복수하기 위해
원수가 다시 몸을 받을 때 같은 시기에 태어나려고 죽음을 마중 갈 때를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목숨을 너무나 쉽게 버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인간계에서의 고통은 당장은 벗어날지 몰라도
영계에서는 끝난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다음 생애에 더 엄중한 인연의 사슬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신비적인 영역으로 치부되고 있는 형편이다.
과학이 상당히 발달한 현대에도
죽음에 대해서만은 과거보다 미개한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죽음은 몸을 벗는 또 다른 탄생이다.
이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닌데 너무나 죽음을 간단하고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잘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