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감자* 외 1편
최 병 호
바람으로 허기를 채우기 좋은 곳은 언덕이다
언덕은 바람처럼 늘 열려 있고
그곳에서 말의 왕래는 자유롭다
나무좀이 세월을 갉아먹어도*
우물에서는 하루만큼의 침묵만 길어 올려지고
우물의 깊이만큼 하루는 길다
바람이 소리의 힘으로 불 때
언덕은 점점 낮아졌다 높아진다
감자가 고민이듯 생활이 접시 위에 놓이면
한 손은 늘 단단해진다
독한 술 한잔이 고단할 틈조차 없는 일상을 안아줄 때도
바람은 호흡처럼 몸 안에서 자라고 있다
어느 날 친구가 날 선 바람의 파편들을 불쑥 내밀어도
전할 안부가 없는 면에서
말은 날마다 야위어 간다
집시들에게 낮은 언덕도
오늘 말에게는 안개처럼 시야가 흐리다
우물이 말라버려도 언덕은 바람처럼 늘 열려있어
떠났던 마음을 돌려세운다
여섯째 날의 어둠은
말의 허기와 함께 깊어진다
*타르 벨라 감독의 영화 토리노의 말에서
물숨
동박 할망은 상군 35년간 참아온 물숨을 한꺼번에 받아냈네
똥군 하군 중군 거쳐 상군이 된 동박 할망은
검은 바다에 참아온 숨 다 쏟아내고도 모자라
물숨을 받아냈네
삼 년만에 할머니를 찾아온 손자는
할머니 품에 안기는 대신
영정을 안았네
상군 할머니 눈물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손자는 아직도 모르고 있으리
깊은 바당에서 동박 할망 숨 몰아갈 때
문어 한 마리 나타났다는 사실, 순간
그 문어 손자 먹이려다
물숨을 마셨다는 것을
동박 할망은
이른 봄 동백꽃 피어날 때
동박새로 날아와 날 숨 마음껏 뱉어낸다는 것을
*제주도 해녀들이 깊은 바다에서 다시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두고, 물숨 쉬었다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