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
1891년 2월에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인 마펫(Samuel A.Moffett)목사 는 동료인 게일 (James Gale)선교사와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평양과 의주를 거쳐 중국 만주의 중심지인 심양까지 여행하여 그곳에서 영국인 선교사 로 쓰(John Ross)목사를 만났다.
마펫 선교사는 여행 목적에 관하여 [전도,한국어 연습, 지리 답사,주민에 관한 연구 및 의주와 만주지역에서의 선교사업 진행상황의 답사]에 있다고 말하였다. (S.A.Moffett, Evangelistic Tour in the Northof Korea,1891,PP. 329-331)마펫과 로쓰목사는 상면하여 4일간 숙식을함께 하면서 로쓰목사로부터 만주에 산재한 한국인들을 위한 선교사업의 실정을 청취하였다. 마펫 게일 선교사는 심양을 떠나 동행하여 서간도 한인촌 기독교인 부락을 방문하였고, 이곳 동북국경에서 국내로들어와 함흥을 거쳐 5월 중순에 서울로 귀환하였다.
전도여행을 끝낸 마펫목사의 회고담은 다음과 같다. [3개월 여행중에우리들은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적지않은 진보를 보았고 수천명 한국인을 만나 그들에게 복음의 씨를 뿌렸다. 외국인이라해서 푸대접을 받은일이 없었고 복음전도에 반대를 받지도 아니하였다.](S.A Maffett,The Church at Home and Alroad for October,1891,P.331)동부지역은 그후에 스왈렌
(W.L.Swallen)과 게일 그리고 맥길 (Willi-am McGill)선교사 등이 답사하였고 1892년에는 감리교의 홀(William James Hall) 선교사가 평양을 찾아가 보았다.
그해 가을에 올링거 (F.Ohlinger)목사는 원산을 순방하였고, 미국 남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호남지역을 답사하였다. 1892년 크리스마스를 전후하여 레이놀드 (W.D Reynolds) 목사가 공주를 방문하였고 1893년에는 젼킨 (W.B.Junkin)목사와 테이트(Mattie S.Tate)목사가 전주지방을찾아가 전도하였으며 1894년에는 레이놀드와 드루(A.D.Drew) 의 두 목사가 전라도 전역에 걸친 전도여행을 수행하였다. 이리하여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까지는 한국 주재 선교사들은 전국 각지에 걸쳐 답사하는 큰 작업을 일단 완료하였다.
이 시기에 선교사들이 지방을 여행할 때에는 외무아문에서 발급하는 호조를 소지하였다. 이는 중앙정부에서 지방 관리에게 알리는 일종의 지시서와 같은 것으로 외국인 선교사에게 숙소와 환전 그리고 신변을 보호하는 편의를 제공하라는 내용의 문구가 기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조치가선교사들의 전도여행을 위하여 적지않은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대처하기 위하여 호신용으로 권총을 휴대하거나(The Church at Home and Alroad for August, 1893,P 106) 한국 군인을대동하기도 하였다. (J.S.Grale,Korean Sketches,P.19).이와같이 한국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정부로부터 국가적인 비호를 받았다는 사실은 카토릭교회가 조선왕주 시대에 당한 국가적인 박해와 대조적인 모습이라 하겠다.
선교사들은 지방 주민들과의 통역을 위하여 한국어 교사와 길 안내인을 동행하였다. 여행장비는 복음서와 전도지외에도 통조림과 침구, 의약픔그리고 여비로 사용될 돈등을 휴대하였다. 당시의 통화는 무겁고 부피가있는 엽전이어서 이러한 것들을 운반하기 위하여 일꾼을 별도로 고용해야하는 불편이 뒤따랐다.
그런고로 선교사의 지방 행차는 인마부대의 출동과 같은 진풍경이었다. 점심때 또는 저녁때에 행차가 멈춰지는 주막앞에는 양인들괴 기이한 행려장비를 구경하기 위하여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선교사들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촌락민들에게 복음서와 의약품을 나눠주면서 전도의 성과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