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 13년 만에 공식활동 종료
러시아 유인 우주정거장 미르호의 마지막 승무원 3명이 1999년 8월 28일 지구에 귀환함으로 공식활동을 사실상 마감했다. 러시아 우주비행센터는 빅토르 아파나시예프, 세르게이 아브데예프, 프랑스인 장 피에르 에녜르 등 승무원 3명을 태운 '소유즈 TM 29'가 카자흐스탄 초원지대에 예정대로 무사히 착륙했다고 밝혔다.
미르호는 2001년 3월 23일 대기권에 들어오면서 대부분 불타 없어졌으나 30-40톤으로 추정되는 1,500여개의 파편은 살아 남아 남태평양 해저에 떨어져 수장됐다.
1986년 2월 20일 미국과 우주사업 경쟁을 벌이던 구 소련은 3년 예정으로 미르를 쏘아올렸으나, 미르는 13년 넘게 우주에 머물렀다. 이 기간 중 미르는 지구궤도를 7만7000바퀴 돌면서 무중력 상태의 인체 연구 등 1만6500건의 실험을 수행했다. 또 외국 우주인 62명 등 103명의 우주인이 미르를 거쳐갔으며, 단일 최장 우주체류(737일)와 우주유영(82시간 21분) 등의 기록이 미르에서 작성됐다. 미르호는 '평화' '세계'라는 뜻에 어울리게 활용됐다. 미르호에는 각국 우주비행사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다녀갔다. 27개국에 설치한 수많은 장비를 통해 이뤄진 우주 공간에서의 과학적 실험은 2만3천여건이나 됐다. /조선
[1996년]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이혼
영국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6년 오늘 결혼 15년 만에 이혼한다.
성격 차이와 불륜 문제로 오랜 갈등을 겪어 온 두 사람은 런던 고등법원 가사부에서 이혼판결을 받은 뒤 6주 간의 이의 제기 기간 경과로 이혼에 필요한 법적 절차를 마무리했다. 다이애나 비는 이혼 후에도 왕위계승서열 2위인 윌리엄과 해리 왕자의 어머니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캔싱턴 궁에서 산다.
두 사람이 이혼하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녀 4남매 가운데 세 자녀의 결혼이 실패로 끝나게 됐다.
다이애나 비는 이혼 후 대인지뢰 사용금지 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이혼 이듬해인 1997년 8월 말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생애를 마감한다. /YTN
[1962년] 장면, 이주당 사건으로 구속
← 이주당 反혁명사건으로 법정에 나온 장면 전 총리
5ㆍ16후 1년 만인 1962년 6월1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구(舊)민주당반혁명음모사건’을 적발해 41명을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6월13일을 기해 무력 쿠데타를 일으켜 8월15일에 민정이양을 한다는 음모를 꾸며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7월15일, 갑자기 장면(張勉) 전 총리도 반혁명사건에 관련된 것으로 발표되면서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반혁명이 성공할 경우 다시 총리를 맡는다는 조건으로 장면이 구(舊) 이주당(二主黨) 간부 김재우에게 100만환의 자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주당은 4ㆍ19 이후에 등장해 곧 사라진 정당이다.
5ㆍ16후, 군사정권에 의해 가택연금됐다가 6개월 만에 풀려나 기독교 서적을 번역하고 화초를 가꾸며 소일하던 장면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00만환은 자신의 제자이고 대부간였던 김재우가 가정적으로 어려워 생활비로 준 돈이라고 항변했지만 군사정권은 이를 믿지 않았다.
8월28일, 군법회의 검찰부는 장면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하고는 바로 구속시켰다. 징역10년(1심) → 48일 만에 보석 출감 → 징역3년 집행유예5년(2심)을 거치는 동안 고통의 나날을 보내긴 했지만 장면에게는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1963년] 킹 목사, 워싱턴 대행진
1963년 오늘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20만여 명이 평화행진을 한다. 흑인 민권을 요구하는 시위다. 시위 행렬은 링컨 기념관까지 이어진다.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바로 이곳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라는 제목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연설을 한다. 루터 킹 목사가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면서 이 날 흑인 시위는 절정을 이룬다. 케네디 대통령은 킹 목사에게 고용차별정책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한다.
1964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의회에서 인종차별 철폐와 평등권을 보장하는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1966년 이후 민권운동 내부에 급진적 세력이 등장해 폭력시위가 일기 시작하자, 백인 지지자들이 운동에서 이탈하기 시작했으며 지도층 내부가 분열됨으로써 민권운동은 잠시 붕괴되기도 했다.
[1950년] 6.25발발로 제1차 화폐개혁 단행
← 전쟁은 화폐가치를 한순간에 폭락시켰다. 차 한잔을 마시려면 1백원 짜리 지폐를 50장이나 준비해야했다.
제1차 화폐개혁이 단행됐다. 화폐개혁은 1950년 8월 28일부터 1953년 1월 16일까지 6.25기간 동안 5번에 걸쳐 기존의 조선은행 1백원권을 한국은행 1백원권으로 바꿔주는 식으로 진행됐다. 제1차 화폐개혁은 6.25전쟁의 산물이었다. 한국은행이 일제시대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을 대체할 새로운 '한국은행권'을 발행하기도 전에 발발한 6.25전쟁은 화폐개혁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한국은행은 전쟁 발발 13일전인 6월12일 설립됐다. 6.25전쟁이 터진 날은 일요일. 월요일인 26일부터 군대와 경찰, 기업과 시민들이 돈(조선은행권)을 찾기 위해 은행으로 몰려들었다. 한국은행은 26일과 27일 이틀새 화폐발행액(6월24일 현재 5백58억원)의 7분의 1이나 되는 돈(76억8천만원)을 국고금과 은행예금 지급용으로 지급해야 했다.
정부가 남하하면서, 한국은행도 피란 행렬에 끼였다. 문제는 한국은행 금고에 보관된 지금은(地金銀·금은 덩어리)과 현금들. 하지만 철도를 통한 수송작전이 불가능해 구용서 초대 총재가 국방부를 방문, 군의 지원을 받게 됐다. 6월27일 오후 2시, 군에서 제공한 트럭 1대에 순금 1천70㎏, 은 2천5백13㎏ 등 89상자를 싣고 극비리의 수송작전이 시작됐다. 이 금은덩어리는 이틀 뒤인 29일 진해 해군통제부에 도착했다가 8월1일 부산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미처 옮기지 못한 순금 2백60㎏과 은 1만5천9백70㎏, 미 발행 조선은행권 등은 6월28일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북한군에 접수되면서 전부 북한군 손에 넘어갔다. 정부가 갖고 있는 미 발행 은행권은 40억원뿐이었고, 새로 돈을 찍을래야 조폐공장마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국은행은 동경 지점에 1백원권과 1천원권을 일본에서 인쇄하도록 긴급 지시했다.
1950년 7월13일, 군용기편에 실려 김해비행장에 도착한 1천원권 60억원이 최초의 한국은행권이다. 다음날 1천원권 92억원, 1백원권 2억3천만원이 더 도착했다. 이 당시 1천원짜리 앞면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1백원짜리에는 광화문이 들어 있었다. 북한군이 약탈한 조선은행권을 남발하고, 인민권도 강제 유통시키는 바람에 엉망이 된 경제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는 1차 화폐개혁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1945년] 호치민(湖志明), 베트남공화국 임시정부 수립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베트민을 중심으로 총봉기를 지도하여, 구엔[阮]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8월혁명),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에서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 1954년 디엔비엔푸의 승리로써 독립을 지켰다.
[1945년] 연합국, 대일점령정책 전개
← 맥아더(1945)
1945년 8월 28일 연합국측의 대일점령정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점령은 연합국의 점령관리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점령의 최고정책기관으로서 일본과 교전한 11개국 대표로 구성된 극동위원회(FEC)가 워싱턴에 설치되었고, 최고사령관의 자문기관으로 미국·영국·소련·중국 4개국 대표로 구성된 대일이사회(ACJ)가 도쿄[東京]에 설치되었다. 실제 관리는 연합국총사령부(GHQ)가 담당했으며, 총사령부의 지령을 일본 정부가 실시하도록 하는 간접통치 형식이 취해졌다. 그러나 미국이 FEC나 ACJ의 의장을 독점했으며, 총사령부도 맥아더를 비롯해 미국이 독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미군에 의한 단독통치였다. 총사령부는 일본 정부를 조종해 헌법의 민주적 개혁, 재벌해체, 농지개혁 등 정치·경제 제도에 있어서 근본적인 개혁을 실시했다. 또한 점령군은 직접 군사재판을 열어 전쟁범죄인에 대한 처벌을 단행했다. 점령정책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목표로 전개했으나, 일본내 좌익 세력 강화로 1947년 2·1 파업중지 명령이 내려져 사실상 민주화정책은 후퇴했다. 또한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예비대의 창설을 명령함으로써 사실상 재군비가 시작되었다. 1951년 대일강화조약이 체결되었고 1952년 4월 28일 조약 발효와 함께 일본은 독립을 회복했다.
[1912년] 서양화가 이인성(李仁星) 출생
1912. 8. 28 대구~1950. 11. 4 서울.
11세에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25년 도쿄[東京]에서 열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 서동진이 운영하던 대구미술사에서 일하며 계속 작품창작에 힘쓰는 한편, 영과회·향토회 등 대구의 미술가단체에도 참가했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한 이래 줄곧 출품했다. 제10회부터 연속 6회 특선했으며, 제14회전에서는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고, 1937년 제16회부터는 서양화부의 추천작가 겸 심사위원이 되었다. 또한 1932년부터 일본의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공부하며 일본의 최대 공모전인 제전(帝展) 및 신문전(新文展)에 입선했다. 추천작가가 된 이후에는 화단의 엘리트로서 그 지위를 굳혀갔으며, 1940년에는 김인승·심형구와 함께 추천작가 3인전을 개최하기도 했다. 해방 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출강했고,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을 지냈다. 6·25전쟁중인 39세 때 경찰관과 시비 끝에 총기사고로 죽었다.
[1899년] 정치가 장면(張勉) 출생
← 노모와 함께 선 장면(오른쪽)
1899년 8월 28일 태어남 / 1966년 6월 4일 죽음
장면은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를 거쳐 미국에 유학했다. 귀국 후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해 1945년 8·15해방이 될 때까지 교육자로 활동했다. 1946년 정치를 시작해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 참석해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기여했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했으며 1951년 제2대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해 자유당 독재정권과 맞섰다. 부통령으로 당선된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60년 부통령에 낙선한 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을 취했으나 첨예한 정쟁과 우유부단한 지도력으로 인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했다. 결국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정계에서 물러났다.
[1894년]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뵘(Karl Böhm, 1894~1981) 태어남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그너, 모차르트 등의 작품연주와 음반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법률을 공부하는 한편, 빈에서 오이제비우스 만디체프스키와 구어도 아들러 밑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1917년 그라츠 오페라 극장에 데뷔했으며, 3년 후 이곳 수석 지휘자가 되었다.
1921년에는 뮌헨 오페라로 갔으며 1927년에는 다름슈타트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931년에는 함부르크, 그리고 1934년에는 드레스덴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36년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데뷔했다. 당시 그는 드레스덴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은 것 때문에 대중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그 자리가 나치의 압력으로 사퇴한 프리츠 부슈의 후임이었기 때문이었다. 1938년 브루노 발터를 대신하여 잘츠부르크로 간 것도 이와 비슷한 경우였다.
1943년까지 드레스덴에서 지휘봉을 잡은 이후 1943~45년, 1954~56년 빈 국립 오페라를 지휘했다. 1957년에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 Don Giovanni〉를 지휘함으로써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데뷔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바이로이트 음악제에서 지휘를 통해 바그너 작품에 가장 뛰어난 해석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뵘은 모차르트 교향곡 전곡을 음반으로 발표했다. 그의 연주와 음반은 감탄할 만한 온화함과 섬세함, 그리고 서정성을 이끌어낸다.
[1893년] 국어학자 이극로(李克魯) 출생
1893. 8. 28 경남 의령~1978. 9. 13 평양.
북한에서는 언어학자, 반일애국열사, 사회활동가로 불린다.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서당 공부를 한 후 1910~12년에 마산 창신학교에 다녔다. 1912년 중국 동북지방 내도산의 독립군 부대에서 훈련도감으로 있다가 무송의 백산학교와 환인현의 동창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1~27년에 베를린종합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그 대학에 동방어학부 조선어과를 창설하고 강사로 재직하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년 2월 제1차 세계약소민족대회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가하고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가 1929년 1월 귀국하여 서울 중동학교에서 조선어학자협의회를 조직하고 나중에 조선어학회를 결성, 회장으로 일했다.
1930년 신간회 대표로 동포구제의 목적을 띠고 만주지방을 돌아보다가 귀국했다. 1942년 7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감옥에 갇혔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했다. 조선어학회 복구, 조선말 교과서 편찬, 국어강습회조직 등의 사업을 적극 추진하는 한편, 조선인류학회, 에스페란토학회, 국술협회 등을 조직지도하기도 했다. 1948년 4월에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초청장을 받고 평양에 갔다가 홍명희 등과 함께 잔류했다. 1948년 9월~1953년 12월에는 내각 무임소장관으로, 1974년까지는 조국통일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으로 활동했다. 그 동안 언어학 연구기관들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사회단체의 소장,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국어학의 주요 논문으로 〈조선어 어음의 된소리 음리에 대한 과학적 천명〉(1928), 〈훈민정음의 독특한 음성 관찰〉(1932), 〈'·'의 음가에 대하여〉(1937), 〈조선말 역점연구〉(1957) 등이 있으며, 주요 저서로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1949), 〈조선말 조(調) 연구〉(1966) 등이 있다. 오랜 기간의 교수 및 연구활동을 통하여 북한의 한국어 발전과 과학적 해명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로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의 원사(1973)이며 박사학위(1970)를 받았으며, 조국통일상과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861년] 화가 안중식(安中植, 1861~1919) 태어남
← 백악춘효도
본관 순흥(順興). 호는 심전(心田).
조선말과 근대 초기에 걸쳐 활동했다. 조석진과 함께 전통시대의 화법을 근대에 전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 뛰어난 기량과 분방한 필치를 바탕으로 중국화를 주로 모방했던 장승업에게 그림을 배워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881년 조석진과 함께 영선사(領選使)의 제도사(製圖士)로 뽑혀 1년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견문을 넓혔고, 1902년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제작에 참여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교수로 있으면서 이상범·노수현·김은호 등을 가르쳤고 서화협회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작품은 스승인 장승업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여 중국화를 모방한 관념적 청록산수(靑綠山水)나 고사인물도가 주류를 이루었고 〈도원문진도 桃源問津圖〉와 같은 관념산수에서는 과장된 산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강렬한 청록의 색채를 사용하는 등의 특징을 드러냈다. 후기에는 드물게 〈백악춘효도 白岳春曉圖〉(1915)나 〈영광풍경〉과 같은 실경산수를 남겼고 특히 〈백악춘효도〉에서는 부분적으로 투시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적용하여 조형관의 변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1833년] 영국의 화가, 디자이너 번 존스(Edward Coley Burne-Jones, 1833~1898) 태어남
← 황금계단
본명은 에드워드 콜리 번 존스(Edward Coley Burne Jones)이다. 1833년 버밍엄에서 출생하였다. 옥스퍼드의 엑시터대학에서 공부하였으며 그곳에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만났다. 1856년 라파엘 전파의 화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를 만남으로써 삶의 전기를 맞이한 뒤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채 옥스퍼드를 떠났다. 그후 런던에 정착하여 로세티의 지도 아래 작업을 진행하였다.
로세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는 형태와 표현 양식의 순수성, 그리고 중세 미술의 고양된 도덕성을 미술에서 회복하고자 하였다. 주제를 성서나 고금의 문학작품에서 취하고, 유려한 선묘(線描), 단정한 구도, 풍요한 색채로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작품을 만들었는데, 장식적인 경향이 강했다.
작품으로 《창조의 날들 Days of Creation》 《비너스의 거울 The Mirror of Venus》 《멀린과 니무에 Merlin and Nimue》(1858~1959) 《코페투아 왕과 거지 소녀 King Cophetua and the Beggar Maid》(1884) 등이 있는데 이러한 작품은 중세와 고전주의 시대의 작품들, 그리고 성서에 바탕을 둔 주제 의식에서 주요한 영감을 얻은 것들로서 풍부한 감정과 낭만적인 스타일이 두드러진 것들이며 일반적으로 라파엘전파의 화가들 작품 가운데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 시절의 친구인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모리스와 함께 중세 응용 미술을 부활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모리스가 경영하는 상점에서 스테인드글라스와 모자이크, 태피스트리 등을 직접 디자인했던 것이다. 그가 디자인한 창문은 옥스퍼드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나 버밍엄 성당을 포함해서 영국의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다. 또한 윌리엄 모리스의 켈름스코트 출판사에서 일러스트 작업도 하였다. 1894년 준남작 작위를 받았다.
[1749년] 독일의 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태어남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公國)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帝室顧問官)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市長)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다. 7년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民政長官)의 숙사(宿舍)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에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鍊金術)에 관심을 갖게 되고, 어머니의 친구인 크레텐베르크의 감화로 경건파(敬虔派)의 신앙에 접근하였다. 그녀는 후일 《아름다운 영혼의 고백》의 모델이 되었다.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당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佳作)을 낳게 하였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牧歌的)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후 회한(悔恨)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고, 1772년에는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悲戀)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고, 독일적 개성해방(個性解放)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775년에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大公)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國政)에 참여하였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治積)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間顎骨)을 발견하여(죽기 1년 전에 학회에서 인정되었음)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관계는 끝을 맺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수업하는 화가로서의 생활을 보내면서 l,000매에 이르는 스케치를 그렸으며, 희곡 《타우리스섬의 이피게니 Iphigenie auf Tauris》(1787) 《에그몬트 Egmont》(1787) 등을 써서 슈타인 부인에게 바쳤다. 이 여행은 예술가로서의 괴테의 생애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전주의에의 지향(志向)을 결정한 시기로서 중요하다.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조화업(造花業)을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정식 결혼은 l806년),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 Torquato Tasso》(1789)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哀歌)》(1790)를 발표하였다. 과학논문 《식물변태론(植物變態論)》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1791년에는 궁정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였다. 1794년부터 그는 J.C.F.von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 Horen》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다.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實在: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l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 Faust》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徒弟) 시절 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의 완성,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1797)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되었다.
1797년에는 실러의 《시신연감(詩神年鑑)》에 공동작의 단시(短詩) 《쿠세니엔(손님에게 드리는 선물)》 414편을 발표하여 문단을 풍자하였다. 또한 문단의 물의(物議)를 외면한 채 이야기체로 쓴 시(詩)를 경작(競作)하여, 1797년은 ‘발라드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1805년 실러의 죽음과 더불어 괴테는 만년기(晩年期)를 맞이하였다. 만년의 괴테의 문학활동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세계문학’의 제창(提唱)과 그 실천이었다. 괴테는 그 무렵에 이미 유럽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나아가서 신대륙인 미국의 문학을 조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각 국민문학의 교류를 꾀하고, 젊은 세대를 위한 세계문학적 시야를 넓혔던 것이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전자(前者)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하였다.
그 하나는 미나 헤르츨리프와의 사랑으로서, 이 소녀를 모델로 하여 소설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1809)을 썼다. 또 하나는 아내 불피우스가 죽은 뒤에 알게 된 빌레머 부인과의 사랑으로,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西東詩集) West stlicher Divan》(19)이 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괴테는 마리엔바더로 피서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처녀 우를리케 폰 레베초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랑은 거절되었으나, 그 연모의 정이 시집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만년의 작품으로 《이탈리아 기행 Italienische Reise》(1829)과 자서전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1833) 등이 있다.
또한 그의 광학(光學)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 Zur Farbenlehre》이 1810년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뉴턴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들어 있어 순학문적인 견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탁월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이고 있다. 괴테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서, 신(神)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세계관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지만, 복음서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大公家)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1654년]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 옥센셰르나 사망
← 옥센셰르나, David Beck가 그린 유화(부분)
17세기 북유럽의 난세를 헤쳐나간 인물이자 스웨덴 역사상 가장 유능한 총리로 불리는 악셀 옥센셰르나(Oxenstierna af Sodermore, Axel, Greve)가 1654년 8월 28일 사망했다.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 로스토크와 독일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칼 9세 밑에서 대신으로 근무했다.
1612년 즉위한 구스타프 2세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자 ‘북방의 사자’라는 별명답게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하며 국왕 구스타프 2세를 도와 내치에 힘씀으로써 근대 국가의 기초를 닦았다. 의회제도와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중상주의를 도입했으며, 학교법을 제정해 교육에도 관심을 쏟았다. 구스타프 2세가 전사(1632년)한 뒤에 독일을 비롯한 덴마크, 폴란드 등과의 전쟁 결정권을 갖게 되자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을 체결, 30년 전쟁을 자국에 유리하게 매듭지었다.
크리스티나가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자 5명의 섭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 8년 정도 실질적인 통치를 하다가 여왕이 친정을 하게 되자 외교와 종교정책, 후계자 문제 등을 놓고 여왕과 갈등을 빚게 된다. 그러나 이후 1650년부터 관계가 호전되어 죽기 전까지 총리로서 확고한 지위를 누렸다.
[1215년]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忽必烈汗, Kublai Khan, 세조)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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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5~1294.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중국을 정복하여 원조(元朝)를 창립하고 초대 황제가 되었다. 당시 몽골족은 러시아 남부 지역의 킵차크 한국, 페르시아의 일한국, 몽골의 족장들이 전통적인 유목민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던 스텝 지역을 모두 다스리고 있었다. 몽골족 출신의 쿠빌라이가 정치·문화에 있어서 독창적이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통치술이 요구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의 신하가 되었고 그가 쓴 책 〈동방견문록〉은 르네상스 시대에 동양에 대한 1차적 정보원이 되었다.
쿠빌라이의 업적은 당대(唐代) 이래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 업적은 그가 야만족·유목민 출신의 정복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 사서(史書)에서조차도 쿠빌라이는 존대를 받고 있다. 그는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남송이 붕괴하기 7년 전인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제정·선포했다.
쿠빌라이는 주로 마르코 폴로의 덕분이긴 하지만 지전(紙錢)을 사용한 황제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전은 송대에도 사용되었으나 쿠빌라이 때 와서 유일한 교환수단으로 정착되었다
그의 치세 시에 중국과 특권계급인 몽골족은 번영의 한때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정치체제는 후대 황제들이 잘 관리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몽골족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이 붕괴되자 몽골족은 스텝 지역으로 다시 퇴각했고 그때 이래로 변방민족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했다.
[ 430년] 기독교 사상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사망
(영)Saint Augustine.Saint Augustine of Hippo라고도 함.
축일은 8월 28일.
354. 11. 13 누미디아 타가스테~430. 8. 28 히포레기우스.
로마령 아프리카에 있던 도시 히포의 주교(396~430).
당시 서방교회의 지도자이자 고대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일컬어진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종교성과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전통이 그에게서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그러한 그의 사상은 중세 로마 가톨릭 세계로 이어졌고 르네상스 시대의 프로테스탄트를 낳았다. 유명한 〈고백록 Confessions〉이 없었더라도 그의 중요성은 인정되었을 것이다. 45세 때 쓴 〈고백록〉은 잘 알려진 대로 12년 전 로마 가톨릭에 귀의함으로써 끝난 그의 방황과 유년시절을 기록한 책이다. 그런데 잊기 쉬운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짜 작품이 〈고백록〉 이후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고백록〉은 전기라기보다는 감사와 회개에서 나온 봉헌물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고백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주교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억해낸 사실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이해하는 데 〈고백록〉이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림은 적당한 비례로 그려져야 하며, 배후에 있어야 할 것을 앞으로 끌어내 지나친 찬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밖에
2002 장대환 총리 국회인준안 부결
1997 한국전기통신공사법 폐지
1996 우정사업경영개선기획단 발족
1996 광주지하철 1호선 기공
1995 한국-칠레, 외교관사증면제협정 체결
1991 동아건설, 리비아 대수로 1차 공사 통수식
1988 독일 람슈타인 에어쇼 참사
1987 필리핀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기도 실패, 55명 사망
1982 독립기념관 건립준비위원회 발족
1980 대학휴교령 107일 만에 해제
1973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대화중단성명 발표
1970 김민기 ‘아침이슬’ 발표
1962 순천시에 수해(1000여명 사상)
1961 민족일보 사건 3명에 사형선고
1960 EMD방식 자동전화교환기 재개통
1960 중앙전화국 용산분국 EMD 자동식 교환시설 개통
1960 미주(美洲)기구(OAS)외상회의서 중남미공산화 확대를 경고하는 산호세 선언 채택
1957 미국, 중거리탄도탄(IRBM) 실험에 성공
1952 한국-일본 간 독도분쟁 발생
1946 북조선노동당 결성
1935 이탈리아 전시(戰時)경제관리 단행, 회사배당 제한, 잉여금의 국채투자 명령
1933 전국에 풍수해 7백41명 사망
1924 총포화약류취체령(銃砲火藥類取締令) 시행규칙 공포
1922 미국 뉴욕서 최초로 라디오 방송 광고(WEAF방송국)
1916 독일, 루마니아에 선전포고
1911 대구전기 설립
1645 네델란드 법학자 그로티우스 사망
1231 몽고 제1차 고려침입
1221 십자군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