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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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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음악인물전의 선정기준은 다음과 같다. 우선적으로 작고한 예인, 두 번째는 삼현육각을 연주한 예인, 세번째로 무형문화재로 지정 받지 못했지만 빼어난 재주를 지닌 예인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 삼현육각을 연주한 이들은 다른 부문의 연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는데. 이를 통해서 멸실해져 가는 삼현육각의 길을 되살리고, 민속음악의 꽃인 삼현육각 재주꾼들을 알리고자 하였다. 경기도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삼현육각을 연주한 이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에 대한 대략적인 조사는 나와 있지만 김은산같은 경우나 김광채는 전혀 기록이 없으며, 지금까지 조사된 적이 없다. 따라서 민속음악인물전이라는 테마를 통해 이들의 지닌 예술 세계를 조망을 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지역도 삼현육각을 연주한 이들이 있기는 있지만 이들에 대한 조사는 후일을 기다리고자 한다.
목차 민속음악인물전I - 개요,이일선.김광채,김광식 민속음악인물전II - 지갑성, 김은산 민속음악인물전III- 이덕만, 오필순 민속음악인물전IV - 이동안 민속음악인물전V - 이용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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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선(1898~197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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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선(1898~1970) 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장지리에서 이덕재의 장자로 태어났다. 우선 일선의 가계(家系)를 알아 보는 것이 순서이고 두 번째로는 이들이 어째서 이런 환경에서 자라 오면서 음악적 기틀을 마련했느냐 하는 것을 접근해 보려고 한다. 이덕재는(?~1932) 전형적인 세습무 집안의 후예답게 민속 음악에 종사한 이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이나 지금의 몽촌, 송파, 가락동, 문정동, 장지동, 잠실리(지금의 잠실), 언주면 일대 등을 단골판을 기반으로 삼아서 활동을 하였다. 부인 최씨는 여주 출신으로 친정이 천주교 집안으로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내려서 그것도 새벽에 이덕재의 집에 뛰어 들어 와서 이덕재의 모친한테 신 내림 굿을 하고서 무업에 종사하게 된다. 최정자의 가계는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으며 이의 손녀 딸 이경자(일명 연순; 1928년생, 서울 강북구 쌍문동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집안에서 신이 내리려고 하는 징조가 보이자 집안 어른들이 마뜩찮게 생각을 하는 차에 결국 손뼉을 쳐서 신이 내려 갈려고 간 것이 아니고 간 집이 일이 그렇게 되느라고 이덕재의 집이다. 전통 사회에서는‘신 끼’가 있어도 함부로 내림 굿을 해주지도 않고‘말문’이 트이고 그야말로 할 수없이‘팔자가 세어서’그 길로 들어 가야만이 될 사람만 해주었지 지금처럼 신이 내릴 징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내림 굿을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 최정자가 세상에 태어 나서 무업에 길로 들어 섰을 적에는 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지금처럼 많지않았음은 이의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 넉넉하게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덕재가 활동을한 시기에는 그야말로 정국이 혼란스럽고 일본과 중국 유럽의 열강들 틈바구니에 끼여서 굽도접도 못하는 신세가 된 즈음 대원군 이하응은 집안 세력과 콧대 높고 말 안 듣는 대신들 그리고 처가의 먼 친척인 첨정 벼슬을 한 민치록의 딸 자영을 삼간택을 하여 며느리로 맞아 정치를 할 때이니 잦은 의견 다툼과 견해 차이로 무엇 하나 되는 일이 없는 설상가상의 신세가 된 그런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몇 번의 정치적인 재기를 노리다가 시정잡배나 그야말로 한 나라의 생사여탈권을 쥔 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대원군의 정치적 행보를 하는 가운데 그 특유의 예술적 재능을 이런 민속 쪽에 관심을 돌려 철저한 신분 사회였던 전통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광대들과 어울려 지내기가 일쑤여서 이쯤에 이덕재도 대원군과 교류를 한 흔적이 보이는데 맏아들인 이일선이 자랑 삼아서 종종 얘기를 해 주었노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선의 형제는 삼형제인데 이 형제들이 모두 민속 음악에 종사한 이들로서 일선의 동생 충선, 달선 역시 어렸을 적부터 민속 음악에 눈을 뜬 이들이다. 일선의 누나들도 무업에 종사를 한 이들인데 이 누나들과 나이 차이는 무려 십년이나 차이가 나서 일선이 태어났을 적에는 과거 급제한 집안보다 더 기뻐서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축하해주었다고 한다. 일선의 학습 내력은 지금까지 세상에 별로 드러난 일이 없었는데 스무살 무렵 청주 출신 박팔괘한테 가야금을 배우고 스물 다섯 무렵에는 경기도 광주군 경안 출신 양경원한테 피리 삼현을 익히고 김창조한테 피리를 이수했으며 삼십세 무렵에는 조용호, 김원경에게 시나위를 익혔다한다. 스승인 박팔괘에 대해서는 최근의 연구 결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되어 있으며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다른 지면을 통해서 하기로 한다. 이일선이 어떤 경로로 박팔괘를 만나서 학습을 하게된 것인지는 구체적인 자료라든가 기록이 없어서 자세하게 모르나 아마도 가야금 병창이라는 장르가 보편적으로 연주하게 된 1920년대 후반에는 박팔괘가 이미 사망했거나 나이가 많아서 활동을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터인데 박팔괘가 당시에 신문 공연란이나 광고란에 안 나오는 것을 보아서 저간의 사정을 짐작 할 수가 있다. 일선이 가야금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가야금으로 시종일관 종사하지는 않고 집안이 무업에 종사한 집안이라서 가야금은 청년 시기에 배운 것을 연주하였을 뿐이며 김광채가 가설 무대나 단체 또는 극장 무대에서 이일선의 가야금 실력은 오히려 그 빼어난 재주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는 극장이라는 곳이 지금처럼 단순하게 영화만 감상하는 데가 아니 듯 가무악에 종사하는 이들한테는 그들의 재주를 보여 줄 수 있는 곳이 주무대이니만큼 일선의 가야금은 주로 이런 곳에서 그 재주가 발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되며 조카 딸인 이경자의 증언이나 작고한 고 이동안(1906 - 1995)의 증언을 살펴 볼 적에 무대에서는 늘 빠지지 않고 부르는 ‘새타령’은 감히 그 누구도 흉내를 못낸 절창이었다고 한다. 사실 가야금은 1905년 쯤 지나서 관기 출신인 해선이라는 여자가 가야금을 연주한다고 신문 기록에 나오는데 이는 지금의 가야금 병창이 아니고 단순한 반주 음악 수준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피리는 양경원한테 이수하였는데 양경원은 생몰연대가 불분명하여 정확하게 고증을 할 수가 없지만 경기도 수원(?)출신 해금, 양금을 한 지용구 (1858- 1933), 해금 명인 김봉업의 스승 임흥준 등과 비슷한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으며 가전악(假典樂) 신분으로 궁궐에 드나들었다고하며 이충선이나 지갑성, 김광식 등도 양경원 문하에서 나왔고 사실 양경원이 경기도 동부 지역 즉 한강 동쪽 삼현과 시나위는 ‘판’을 막은 사람이라고 볼 수가 있다. 증손자가 현재 민속 음악에 종사하고 있다. 양경원은 세습무 집안이지만 시나위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일선이 삼현만 배운 것 같고 시나위는 뒤에 나오겠지만 조용호, 김원경한테 배웠다고 한다. 삼현육각을 반주로 해서 세습무 굿을 하는 지역은 예외없이 그 지방의 독특한 ‘토리’가 있어서 이를 ‘시나위청’이라고 하는데 양경원도 세습무 집안이니만큼 분명 시나위 연주를 했을 터이지만 기록에는 이런 것이 없다. 김창조나 조용호, 김경원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으며 다만 김창조는 영암 사람 가야금 병창의 틀을 완성시킨 이와는 동명이인이다. 일선의 재주 중 특이한 것은 민속 음악에 종사하는 이들은 익히 아는 이야기이지만 일선의 피리 연주법 중 ‘겹튀김새’는 조금 연배가 후배인 강학수와 견줄 정도로 빼어난 재주였다고한다. 일선은 일제 시기에 경성방송국 라디오 프로에 1934년에 처음 출연 했으며 종종 라디오 프로에 출연을 하여 연주를 하기도 했으며 유성기 녹음도 한 바가 있다. 아들 은석(1920- 1980) 은 작고했으며 부친한테 피리, 대금, 해금을 연주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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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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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진(여, 81세, 03년 현재,이천 거주, 생존) 일선의 며느리 조카 딸 이경자 고 이동안 은석의 부인 한영서 (남, 56세, 서울 성동구 사근동 거주) 은석과 음악을 활동을 같이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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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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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위> 편, 『경기도 편』, (문화재청,1976) <한국 극장사>, (유민영, 태학사, 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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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채(1898~19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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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채(1898~1952) 는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장지리에서 김준성의 장자로 태어났다. 김광채의 가계는 동생인 광식과 이충선의 부인이 된 광녀, 이정업의 부인이 된 광순이 있으며 김준성은 옛 사람 치고는 단출한 가족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의 집 역시 광주군 일대에서는 내노라 하는 세습무 집안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대단한 집안이었다. 김준성은 미남자로서 뭇 여염집 여인이든 노류장화이든 가슴을 태우게 만든 이었다고 하며 언변이 좋고 신수가 좋아서 많은 이들이 그를 따랐다고 하며 민속 음악을 가르쳤다. 김준성의 학습은 ‘판패개’를 했다고 하며 사망한 것도 광주군에서 한 것 같고 준성이 세상을 뜨자 장자인 광채가 식솔을 이끌고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고 한다. 판패개라고 하는 것은 경기도 도당 굿을 할 적에 남자가 남쾌자만 입고 부채를 들고서 지금의 판소리꾼 마냥 서서 소리를 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학습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세습무 집안들은 예술적 재능을 그대로 전수하기 때문에 특히 다른 이들과는 조금 유별난 데가 있음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데 김준성은 원체 나이가 많아서 이에 대한 자료나 구전된 이야기 등이 별반 없고 직계나 방계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기술을 해 보지만 한계가 있음을 밝히며 한편으로 소리 뿐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악기도 다루었을 터이지만 집안에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 밖에는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아들 광채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그 정도의 나이라면 김준성의 연대는 아마도 1880년대 초가 될 것이다. 김광채가 부친 삼년 상을 치루고 서울로 진출한 것은 이십대 초반 무렵이라고 하며 고래 등 같이 들어 차 있는 기와 집이 많이 있는 동대문구 숭인동에 터를 일구고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한 것 같다. 동대문구 숭인동은 당시에 민속 음악을 하는 경기도 출신들이 한 집 건너 두 집에 살 정도로 많이 살았는데 김봉업, 안산 성머리에서 나서 인천에서 살다가 막 이사 온 이정업, 김의관(본명:미상), 안감네에 살았던 강학수(일명:학돌), 문천용, 허상복, 이일선, 충선, 달선 삼형제, 수원에서 살다가 온 해금의 명인 임학준, 평택 서정리에서 온 대금의 명인 방화준(일명:용현) 등이 김광채의 6칸짜리 기와 집에서 그야말로 신선이 왔다가 버선 발로 도망 갈 정도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날과 밤을 하얗게 밝혀가며 갖은 풍류와 건달파들을 초청을 해서 세월을 살았으니 기가막힌 일이 아니더냐? 이런 가운데 한성준과도 교류가 있어서 한성준이 1939년 도 무렵에 종로구 경운동에 ‘조선고전무용연구소’ 라는 간판을 내걸고 아래 위층에서 제자를 가르칠 적에 이들과도 어울렸다. 그리하여 이들과 상종한 한성준이 경기도 도당굿 음악을 바탕으로 태평무 음악을 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항간에 왕십리 도당굿 운운 하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분명하게 밝혀둔다. 왕십리 대동 굿은 이런 음악을 하지도 않고 서울 강신무들이 하는 굿거리, 당악, 타령(늦은 타령, 잦은 타령, 허튼 타령), 삼현도들이, 잦은한잎, 취타, 길군악 등 거상 음악만이 쓰이고 이 지역은 김광채의 단골판도 아닐뿐더러 더구나 서울은 시나위를 연주 하는 지역도 아니라서 더더욱 아님을 재차 강조해둔다. 주지하다시피 세습무들은 어느 지역이나 땅 단골이 있고 가구별로 하는 집 단골이 대대로 있는 법인데 이 왕십리 지역은 본디 분집, 깁갑용 일가, 박기동, 씨앗집, 순정이네, 김옥염 등이 오랜 동안 맡아서 하던 지역이고 다른 이들은 나중에 들어 서서 한 이들이다. 광주에서 이사 온 지 얼마되지 않은 이가 비록 강신무라도 왕십리에 뿌리 박고 산 이들이 호락호락하게 생명과도 같은 단골판을 내주겠느냐? 광채의 학습은 판패개 소리와 신엽 춤 해금을 다루었다고 하는데 본디 부친 성준이 판패개 소리를 한 탓도 있지만 다른 이들이 주로 반주자로만 활동을 하다가 세상을 마감했지만 광채는 이녁이 맏아들이라서 그랬는지는 모르되 소리를 배웠으며 ‘산이’ 들은 재주가 있어서 무슨 악기이든 손에 대면 소리가 마련이지만 해금은 사람이 모자랄 적에만 연주를 하였다고 한다. 김광채의 판패개 학습에 대한 가장 근년의 기록은 만당 이혜구가 줄타기꾼 이정업의 소개로 직접 현장에서 본 광주군 언주면 청숫골 (지금의 청담동) 도당굿인데 1956년 3월호에 게재를 하였다. 물론 발표한 해는 1956년이지만 광채가 사망한 것은 1952년도이다. 여기에서 불과 일제 시대와 25년 정도 차이나지 않지만 김광채가 당시에 굿판에서 판패개 소리와 신엽 춤을 어떻게 추었는지를 상세하게 기록을 해놓아서 다행이다. 지금까지 경기도 도당굿에 대해서 1980년도 이전에는 만당 이혜구 같이 기록해 놓은 것이 별반 없으며 있다해도 소략한 경우이며 일제시대 아키바 아카마쓰의 < 조선 무속의 연구> 도 감히 손을 못 댄 부문이다. 이렇듯 광채의 주로 활동 영역은 가설 무대나 무슨 대회이니 하는 것인데 1940년대 중반부터는 일제의 마지막 발악을 시도하느라 창씨 개명도 하고 중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내부 반란과 함께 급격하게 그 힘이 기울어서 더욱더 조선을 탄압을 하게된다. 이때에 김주전이라는 희대의 흥행사를 만나게된다. 이는 일제 시대 중반에 연극도 가끔 손대고 후에 대본도 쓴 이이지만 본디 김주전은 흥행을 위한 것이라면 가히 그 바닥에서는 귀재 소리를 들을 만큼 별난 재주가 있었던 듯 하다. 김주전은 <조선악극단> 이라는 것을 차려서 김광채와 더불어서 전국을 순회 하기도 하고 서울 인사동 정동 방송국(최초의 경성방송 자리) 앞에서 <조선명인명창대회> 라는 것을 열어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하며 심지어 구경 온 인산부가 거적떼기 위에서 애를 낳을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 아니겠느냐? 김주전은 1950년 도 중반 여성 국극단이 창궐할 즈음 세상을 떠났다고한다. 이처럼 김광채는 주로 가설 무대나 단체를 이끌고 지방 순회 공연을 많이 다녔다고 하는데 요즈음으로 치자면 기획이나 연출가의 면모를 지녔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에 서울에 머물고 있는 각 지방의 재주 있는 이들은 한번쯤 김광채와 단체를 꾸며서 다녀 봤을 정도라고한다. 김광채에 대한 기록물은 매일신보나 조선, 동아일보의 일제 시대의 신문 기록에서 볼 수가 있는데 공연 제목이 <조선 향토 연예대회> 나 <명창대회> 라는 이름을 걸고서 한 경우가 태반이다. 주로 1940년 대쯤에 이런 공연이 많이 있고 1930년대 쯤에도 이런 공연 기사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는 가설 무대나 굿판에 있었을 때라고 보면 되겠는데 신문에 등장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이렇듯 한 세상 부러울 게 없는 김광채도 아들 한국(남, 1930생, 생존, 답교놀이 보유자후보)한테 소리를 물려주고 나서 작고를 하였고 동생인 광식이 음악을 이어 받게된다. 광채의 두 딸 옥분(1925 - 1990), 옥녀(1927 - 1990) 는 작고했지만 이들은 한성준이 조선고전무용연구소를 냈을 적에 여기에서 승무, 살풀이 검무 같은 춤과 한성준이 만든 태평무를 배워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이천에서 무용 학원을 운영하다가 작고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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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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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국 김광채의 맏아들 이경자 김광채의 생질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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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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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연극사> (유민영, 단대출판부) <근대한국공연예술사 제1집>, (이자균, 단대출판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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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식(1911~197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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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식(1911~1972)은 경기도 광주군 광주면 장지리에서 김준성의 이남으로 태어났다. 실제(實弟)인 광채는 바로 형이 되는데 앞서 언급한 김광채는 소리와 해금 그리고 무대 공연에서 기획도 한 이이지만 광식은 형의 후광에 가려 이런 일은 안하고 대신 연주인으로서만이 갈 길을 충실히 간 사람이고 세월이 좋아서 좋은 녹음 시설에 음반과 연주 음악을 남긴 행운아이기도 한데 학습 내력은 13살 무렵에 광주군 경안사람 양경원한테 피리를 무려 집안에 모셔 놓고 십년간을 이수한 이다. 양경원은 광주군에서 단골판이 많아서 열두골을 가지고 있었던 이인데 집안에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양경원의 선대에서도 음악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분명한 것 같고 이는 아마도 남한산성 세악수(細樂手; 삼현육각을 다루는 악사) 출신이 집안에 있었던 듯 한데 자세한 고구가 필요하다. 양경원은 해금을 잘 해서 별호가 ‘양깽깽이’ 라고 하는 이인데 이의 손자인 광선(? - 198?) 이 피리, 해금을 연주하다가 작고를 했고 사월 달에 있는 석존대제에 참석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서 궁궐에 드나들면서 국악원 음악을 익힌 것은 분명하다. 이는 전통 사회에서는 민간인 악사들도 각 지역에 관아에 행사가 있으면 불려 가서 음악을 아뢰야 되기 때문에 이런 음악을 따로 배워야만 되며 양경원이나 이의 선대에서도 이런 경우이다. 더구나 광주는 남한산성이 있는 동네이니만큼 이런 거대한 산성에 악사가 없을 리가 없으며 규장각에 문서가 보관되어 있고 일제가 남한산성을 파괴하기 전에는 행궁이 남아 있어서 그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지만 일제제국주의에 의해서 산산이 파괴되어 지금은 기단과 자리만 남아 있으며 지금은 복원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이렇듯 김광식이 양경원한테 피리를 오랫 동안 배운 것은 스승 복도 있지만 제자 복도 있다. 양경원한테 피리 시나위를 배웠는지 영산회상 (악사들은 이를 ‘대짜’ 라고한다)를 배웠겠지만 기록에 나온 것은 피리를 배웠다고 나왔다. 이런 것으로 보아서 경기도 출신 악사 가운데 먼저 서울에 정착한 양경원한테 피리를 배운 것 같고 또한 양경원도 세습무 집안 출신이라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것 같다. 이 당시만 하여도 민간 음악과 궁중 음악은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었고 심지어 속악, 아악으로 구분을 해놓을 정도이니 그 차별이 얼마나 자심했는지 알 수가 있겠다. 전통 사회에서는 한가지만 배우는 게 아니고 여러 가지 악기를 배우는데 이수를 하고 나서는 이녁한테 마땅한 악기가 있다싶으면 그것을 선택을 하여 평생 그 악기에 종사하게 되는데 지금은 이런 것도 없어져 가고 있다. 물론 민속음악을 배웠지만 국악원 음악도 반드시 배우며 뒤에 굿판에 쓰이는 음악들은 나중에 다른 선생한테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평택 서정리에서 살다가 동네에서 무업에 종사한다는 것에 사람 대접을 안하는 바람에 어디 가면 삼시 세끼 밥 한 그릇 못 먹으랴 생각을 한 나머지 뼈저린 한을 품고 서울 왕십리에 터를 잡고 산 대금 명인 방용현한테 십수년 간을 대금 시나위를 배운 바가 있다. 방용현은 1933년 경 총독부 지원하에 만든 친일 단체라고 볼 수 있는 < 조선음률협회>에 정 회원이 되어서 라디오 방송과 무대 공연도 가끔씩 하고 음반 취입도 하기도 하였고 다른 이들에 비하면 많지는 않으나 무대 공연에 참가 하기도 했으며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굿청에 가서 대금을 연주하기도 하였고 특히 일본 공연에는 이동안 일행과 같이 공연을 하기도 하는 한편 세습무 집안들끼리라서 서로 의기가 투합이 되어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방용현은 경오생으로 1868년 도쯤 난 사람인데 고향인 평택 등지의 굿청에서 대금을 불고 생계를 도모하느라 서울 진출은 남들 보다 늦은 감이 있다. 일명 방화준이라고도 하고 이의 손자가 바로 경기도 도당 굿 마지막 시나위를 연주할 줄 아는 방인근(1940 -2000)이며 지금은 방씨 일문에서 대가 끊어졌으며 용현의 증손녀 딸이 한영숙류 춤을 배운 바가 있다. 그리고 당시에 순천 출신이자 만석꾼 집안의 아들 순천 갑부 우석 김종익이 만든 조선성악연구원(나중에는 조선성악연구회로 개칭됨)에 나가서 대금을 가르친 진도 출신 박종기(1879~1941)한테 대금 시나위를 십여년간을 배웠다한다. 박종기는 산조라는 것을 음악의 한 장르를 연주도 하고 반주 녹음한 사람이지 산조를 처음 만든 이는 아니며 박종기 보다 조금 앞선 이가 완도에 산 이가 있어서 이가 분 것을 보고 박종기가 서울로 올라 와서 활동을 하면서 판소리 한 대목인 ‘군로사령 나가는 대목’을 맛있게 분 것이 바로 산조의 기틀이 된 것이라 볼 수가 있으며 서울에 와서 세간에 퍼뜨린 이가 바로 박종기라는 말이며 대중화 시킨 것도 역시 바로 박종기라는 말이다. 한편 김덕진한테는 해금 시나위를 배웠는데 이는 남양주군 읍내 사람으로서 라디오 방송도 하고 한성준이 학원을 냈을 적에 이곳에 턱을 대고 있으면서 해금도 가르치고 또한 시간이 나면 유성기 음반에 녹음도 남긴 바가 있으며 조한춘(1919 -1995)이 잠시 동대문구 숭인동에 살 적에 수학한 바가 있다. 이후로 <수도예술관광요원양성소>라는 것을 김여란이 1956년 경 만들자 여기에서 잠시 제자를 가르치기도 하다가 이 양성소가 후에 현 국악예고로 되는 바람에 거기에 가서 대금을 가르치면서 후학을 양성을 하기도 하였고 지금은 중앙대에 흡수 통합이 되었지만 서라벌예술대학에서 가서도 대금 선생을 지내기도 하였으며 1965년 서울의 국악고등학교 뒤 사무실에서 시립 국악관현악단이라는 것을 정부의 후원으로 만들자 이곳에 가서 동료나 선후배 등과 어울리면서 음악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 단체에서 나온 이들은 거의 민속 음악을 한 이들인데 너무 적은 월급에다가 (당시에는 삼천원) 또한 전통 방식으로는 구전심수로 배운 음악을 배운 이들이 새로 뭘 한다고 서양 악보로 연주를 하라고 하니 이들이 언제 서양 악보로 배운 적이 있다더냐? 지영희 같은 이는 다행하게도 서양 악보를 그릴 줄 아는 극히 드믄 예에 속해서 이이가 주로 이끌고 나갔지만 결국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악기 연주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연주를 할 빼어난 재주꾼들을 이렇게 모두 제 손으로 등 밀어 보내 버리고 이 단체는 변변하게 활동도 못하다가 해산까지는 안하고 지금도 그 명맥을 잇고 있는 줄 안다. 김광식은 일제 시대에는 유성기 녹음을 못 남겼지만 - 아마도 녹음을 하기는 했어도 발견을 못했는지도 모른다 - 해방 이후로는 도너스판이나 그 뒤에 나온 판에는 피리에 이충선(광식의 매부), 장고(이정업), 해금(지영희),가야금(성금연) 등이 연주 녹음한 것이 있는데 현대 음향에서 제작한 엘피판 <고전무용음악곡선집>에서 김광식이 대금 연주한 <굿거리>, <당악>, <살풀이>, <잦은굿거리>, <긴염불> 등은 김광식이 가장 재주가 빼어날 때에 연주한 것이며 특히 굿거리 연주는 지금도 김광식의 가락이나 연주 기법을 따라 가지 못하고 있으며 아주 좋은 음악이며 현재는 엘피판을 카세트에 담았다가 다시 씨디로 제작을 해서 시중에서 구할 수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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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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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현육각>, 경기도 편, (이보형, 국립문화재연구소, 1982) <조선일보 국악기사 1920~1940(1)>, (김성혜) <한국음악사학보94,12집>, (김성혜, 경산;한국음악사학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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