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는 분명 즐거운 일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나 탈색의 향연을 펼치는 가을날에야 더욱 말할 것도 없지만 이번의 성주지방 답사는 지난 번 존경하는 선생님과 다녀온 곳에 대한 보충학습을 겸한 답사였기에 사전지식을 쌓고자 책방에도 들리고, 논문도 찾아 읽고,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19세기 중엽부터 농민운동에 대한 짧은 지식이라도 머리에 넣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자료는 많았으나 19세기 중엽에 일어난 농민항쟁에 대한 자료는 많이 없었다. 때문에 몇 권의 자료만 찾아 읽었으며, 19세기 말 갑오농민전쟁에 대한 자료는 당시 사회상과 시대 정치적 상황만 참고하였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불교에 대한 문화재나 고건축물이나 도자기 풍속화 민화 그리고 역사적 인물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즐기며 확인 차 다녔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답사는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답사였기에 약간의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구한말 양반가도 아니고, 불교에 대한 문화재는 더욱 아니며, 우리의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는 발길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며 자생적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되는 질곡의 모습들을 가슴으로 느껴야 하는, 결코 흥얼거리며 다닐 수 없는 무거운 답사길이었다.
그래도 나는 카메라를 챙겨 집을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도시에 대한 찌든 일상은 완전히 잊어버리는 특수한 프로그램이 내 가슴에 깔려있다. 때문에 작은 흥분으로 두근거리며 길을 떠난다. 늦은 인연에 의기투합하여 날밤 지새는 줄 모르고 술잔을 기울이게 된 벗의 맞장구에 의지하며 그렇게 시작했다.
잠시 척 하자면, 농민항쟁은 당시 사회적 모순에서부터 시작된다. 농업이 발달하고, 상품화폐와 상업이 발달하고, 수취제도가 변하고, 신분제도가 변동하고, 민란이 시작된다. 그리고 늘 혼란은 각성과 성숙을 위한 선전이 주도하는 게 아니라 개혁과 파괴와 선동이 주도한다. 그 선동은 정치권력의 형태든, 사상과 이념의 형태든, 신앙의 형태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패러다임이 된다. 이 말은 그동안 답사기를 엮어보기 위해 자료를 읽은 과정에서 결과론적 아쉬움이 크게 작용되었기 때문에 어디선가 인용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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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재에서 바라본 성주읍내
나는 마음에 드는 책을 읽을 때면 노트 필기를 하며 공부하는 방식을 택한다. 비록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굳어있는 머리에 안간힘을 써 풀어보기 위함이다. 그 필기가 훗날에도 내 것으로 소화시키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며 100권의 책에서 옮겨오면 창작이라는 택도 아닌 오류에서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잠시 메모하면서 읽은 자료들을 정리해 본다. 18세기부터 조선의 농촌사회는 이양법 실시로 소출이 많아지고 상품생산 경제가 발전되면서 관작 농민이 출연하며 봉건사회의 해체징후가 사회전반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부세문제가 농민들에게 집중되면서 중간수탈이 늘어나고 이것이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바로 삼정문란 중 환곡문제가 농민들의 요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며 수령이나 서리, 토호배들의 사적 수탈 등 봉건적 수탈에 대한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인 저항으로 나타난다.
1862년 전국적 농민항쟁이 2월 단성, 진주를 시작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산되며 70여개 고을에서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성주는 지금에서도 보듯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낙동강을 인접하고 있어 수로와 연결된 유통망과 위로는 상주 김천과 아래로는 고령 합천을 연결하는 비교적 평탄한 육로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대상업도시로 발전하고 있는 대구와도 인접하여 읍시를 중심으로 통일된 하나의 장시망이 형성되어있었다. 그러나 농민항쟁의 결정적 요인은 1850년대 두 차례 큰 흉년이 있었으니 연이은 흉년으로 큰 타격을 입으며 사회경제에 영항을 끼치게 된다. 때문에 부세납부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 되었으며 결손부세까지 부담을 해야 하는 사태로 까지 번지게 된다. 이렇게 되자 서리배들의 사적 수탈이 요호부농에게 집중되면서 빈농과 부농사이에 공분대가 형성되며, 부세수탈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폭발직전까지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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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목정
출발 전날 속 풀이 겸 점심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 성주 답사길에 달성군에 있는 하목정(霞鶩亭)에 들리게 되면 성산이씨 후 손 중 이발(李浡)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부탁을 들었다. 이발이라는 사람은 당시 성주 양반이면서 구래사족과 달리 고리대금업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성주 임술항쟁(1차 농민운동) 당시 한개마을 이삼봉(李參奉)과 함께 농민대표로 뽑힌 인물이다. 이 사람이 하목정에 기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셨다. 순간 짧은 지식으로 이삼봉과 함께 한개마을과 인접한 터라 당연히 성산이씨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목정에 몇 번을 들려 그곳에 계시는 분께 차도 얻어 마시곤 했지만 전의이씨(全義李氏)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다른 곳에 보관중인 족보를 전화로 부탁하여 뒤지는 수고를 끼쳐드렸지만 이발이란 인물이 나올 턱이 없었다. 부끄럽게도 성산이씨 자손을 전의이씨 족보에 뒤지는 우를 범한 것이었다. 나의 급한 성정이 또 한 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약간 쌀쌀했던 날씨에 따끈한 차 한 잔을 또 얻어 마실 수 있었지만 그분께도 선생님께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다만 몇 장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 나오는 길에 내 머리통은 가물가물 거렸다. 하필이면 이발(李浡)이라는 분은 이곳에서 기거를 하였던 것일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연유로 인연을 맺은 것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돌아서왔다.
*하목정에서 바라본 모습/
저 멀리 낙동강을 가로지르는성주대교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참에 잠시 하목정을 소개하자면 하목정(霞鶩亭)은 대구에서 30번 국도를 따라 성주대교를 지나기 바로 전 낙동강을 끼고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1604년(선조37년)에 낙포 이종문이 지은 건물이다. 낙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며, 이곳 하목정은 인조가 왕자시절 이곳에서 얼마동안 머문 곳이다. 이후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때문에 궁궐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 구조 중 이중 서까래인 부연(附椽)이 있다. 당시에는 화려한 건축물이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초라해 지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낙동강을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서 있으며, 그 뒤편 사당 앞에 400년 된 배롱나무 몇 그루가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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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목정 사당에 올라서 낙동강을 바라보면 당시 화산 나루터였을 법한 곳이 바라보이나 옛날의 자취는 사라졌지만 말없이 흐르는 물길은 지난 세월의 삶들을 품고서 흐른다. 언제고 하목정 뒤 탁대라 불리는 산성이 있다고 하니 한 번 올라볼 요량이다.
하목정을 나와 성주대교를 달린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성주대교를 막 벗어나면 당시 역참이나 포구가 형성되었을 진두라는 마을이 나온다. 물류의 중심지로 당시의 모습을 달리는 차안에서 상상만 하며 서로의 대화에 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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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계미항쟁 당시 집회 장소였던 유목정을 찾아가는 길이다. 지난 번 답사 때 스승님과 갔던 곳을 다시 찾았다. 성주대교를 지나 선남면 선원리 유목정터라고 생각되는 곳이었다. 마을 한 가운데 그곳에는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있는 작은 세 갈래 길이었다. 위로 난 축대에 올라서자 이름 모를 묘 한기가 잘 단장되어 있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저 멀리 별티, 즉 성산재가 선명하게 보인다. 계미항쟁당시 이곳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저곳 별티재를 넘어 성주관아를 공격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을 떠 올렸다. 나는 논문자료를 뒤적였다. 유목정은 성주읍에서 10리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성주 군지에도 그렇게 나와있다. 지도의 위치로 보아 지금의 선남면 선원리 이곳은 성주읍내와 10여리가 훨씬 넘는 거의 배에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별티재를 넘어 공격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에 당시에도 그랬지만 성난 농민들이 숨을 죽여 가며 험난한 재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함성을 울리며 기세 좋게 나아갔을 것이며, 백천이 흐르는 평지로 난 길을 따라 공격해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은 다분히 나만의 생각일 뿐이다.
동네의 견공들이 이방인의 침입에 경계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을 때 마침 경운기에 농기구를 싣고 있던 60대 후반의 아저씨를 만났다. 어김없이 마구잡이로 물어보는 나의 버릇이 벗에게 까지 전이가 된 것일까? 유목정, 즉 버드나무 정자가 이 마을에 있었냐고 물었다. 다소 키가 큰 아저씨는 하목정은 알아도 유목정은 처음 듣는다는 말씀뿐이었다. 처음 답사 때와 동일한 답이었다. 그러다 무엇인가 생각난 듯 당신의 어린 시절 정자까지는 모르겠지만 주막이 있었던 우묵진이라고 불렸던 곳이 있다고 했다. 우묵진? 어린 시절부터 불려오던 그곳에 대한 막연한 이름에 대한 의미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그렇게 불러버리는 버릇이 있다. 특히 어린 아이가 꺾어진 경상도 발음으로 유목정을 우묵진으로 부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백천(白川)위로 난 신부교 건너 LPG충전소 지나서가 옛날 우묵진이라고 했다. 길치인 나보다 성주지리에 밝은 벗은 금방 그곳을 알아들었다.
약간의 희망을 안고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찾아보기로 하고 어쩌면 이곳에서 성주읍내로 진격했던 별티재를 넘어보기로 하였다. 물론 차로 달리는 것이지만 꼬불꼬불 산길 넘어 재에 올라서니 과연 성주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래도 선원리에서 20여리 길은 훨씬 넘는 길이었다. 또한 농민항쟁당시 힘들게 재를 넘어 성주관아를 공격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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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터 앞 성주여고 정문에 남아있는 성벽
*내동헌 터
지금의 성주군청 자리가 바로 성주관아터다. 성주 관아 뒤편에 남아있는 성산관이 있다. 이 건물은 관아의 후원에 해당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성산관 뒤 지금의 성주여고 정문이 바로 서문이 있던 자리이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식 성문이 있었으며, 우진각지붕의 누각과 망루, 망애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성벽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으나 학교 담장이나 어느 집안 축대로 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작은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어 다행이다. 성주여고는 성주읍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주군청 입구가 내동헌터였으며 그 앞으로 팔십여 미터 떨어진 곳 지금의 성주우체국 자리가 바로 작청터(作廳址), 즉 육방 가운데 가장 높은 끗발을 휘두르던 이방이 대민업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방의 선임권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향리층과 농민층에서 보듯, 대민업무란 그만큼 힘이 있었으며, 착취의 중심에 서 있었으니 결국 계미항쟁(1883)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작정터
이어 한참을 북문터를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성주군청 민원실에 들어가 몇 명을 건너서 어렵게 알아냈다. 어디에나 우리의 문화재나 지역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게 마련이다.
친절하게 알려준 길을 따라 북문터를 찾아갔다. 성주 군청을 끼고 성주성당을 지나 도서관 건물 뒤편에 높은 언덕바지에 홀연히 놓여있었다. 지금은 그때의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없지만 지형으로 보아 돌과 흙으로 쌓여있는 높은 축대가 당시를 상상하기 편리하게 해준다. 망루에 서면 저 멀리 남문과 서문 망루가 보였을 것이며, 성주읍내가 한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지금에야 성주군청 뒤편 전신탑이 우뚝 솟아 있으니 당시의 모습을 상상만할 뿐이다.
*북문터
이곳에서 옛날의 성문터를 지나 초전면 방향으로 가다보면 얼마 못가 성주향교가 높은 곳에 보인다. 바로 당시 교장평(敎場坪), 즉 지역마다 교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많이 있다. 교동은 향교가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교장평이라는 이름도 그와 비슷한 의미의 이름이라면 바로 북문과 향교가 있는 사이 넓고 평평한 뜰을 말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계미항쟁(1883) 당시 이곳 어디엔가 주모자들을 효수시킨 곳이라는 말이다. 순전히 나의 방식인 억척으로 상상하자면 그렇게 된다. 다른 곳에 비해 다소 평탄한 터를 가지고 있으며, 당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곳, 바로 이곳을 택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교장평이란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으로 현재 성주시장 부근에 삼국지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는 사찰 관왕사 앞이 바로 그곳이었다.
*북문터 옆으로 난 축대
우리는 성주읍에서 1차 임술항쟁의 봉기를 계획했던 회합장소인 초전면 대마장터와 2차 임술항쟁의 봉기장소였던 벽진면 명암장터, 그리고 대구로 향하는 길에 선원리에서 만났던 분의 말처럼 계미항쟁의 봉기장소였던 우묵진, 즉 유목정터를 찾아보는 순으로 동선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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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임술항쟁은 바로 이런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면서 폭발하게 된다. 3월 24일 성주군 초전면 대마장터에서 장이 열리는 날 봉기계획을 수립하고 계획을 확정하였으며, 이틀 후인 26일 읍내에서 수만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26일 계획대로 군중대회가 열리자 흥분한 농민들은 착취의 중심에 서있던 이교가(吏校家)와 각 면 서원배들의 가옥을 공격하여 총 32호의 가옥을 파괴하였다. 또한 읍내 인가 30여 호의 재물을 탈취하였다. 농민들의 위세에 놀란 감영이 즉각 폐정을 개혁하겠다는 관문을 내려 보냄으로써 농민들의 항쟁은 하루 만에 종식된다. 결국 한바탕 회오리 속에 끝나고 말았지만 그동안 향리배들이나 이서들에게 사무치던 원한을 시원하게 분풀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소빈농 집단의 사회적 의식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농민들은 개별적 분산적에서 조직적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렇게 1차 농민항쟁은 끝이 났지만 어느 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 불씨는 여전히 안고 있었다. 1차 항쟁 당시 소빈농층들이 군역과 환곡 등 구조적 편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던 반면, 요호부농층에서는 군역이나 환곡보다 주로 지세에서 사적 불법수탈로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이니 지도부가 서둘러 항쟁을 종결지었던 것도 소빈농집단의 반발을 사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보름 뒤 2차 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초전면 대마장터
임술항쟁 당시 봉기를 계획했던 초전면 대마장터를 찾아갔다. 대마장터는 905번 지방도를 따라 성주 읍내와 4Km 남짓 십리길이 못된다. 그러나 당시의 도로사정을 감안하자면 15여리쯤으로 여겨지지만 자금에야 찻길로 달려 오 분이면 도착하게 되니 이미 대마장터는 세월에 편리함과 발달한 교통의 편리함에 그 옛날 역사를 품에 안고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그나마 오일마다 서던 장시도 사라지고 없으니, 순박한 인심에 시끌벅적했을 이곳은 이미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이후지만, 너른 터에 옛날 몸도 마음도 추웠던 그때를 따끈하게 덥혀주었을 선지국 식당 ‘고향’이라는 간판이 당시인양 정겹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바퀴를 빙 돌아보는 중 당시 장꾼으로 가장하여 항쟁을 계획하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의 비장한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절망적인 심정으로 봉기를 했었지만 32년 뒤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향리층의 공격으로 후퇴를 하였다가 그해 9월 초 선산과 金山(지금의 김천)에 동학농민군의 지원을 받아 1만 여명이 넘는 농민군이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되는 장소가 바로 이곳 대마장터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희망은 절망으로 변할 것이며, 우리의 미래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그러나 그것의 교훈으로 삼아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이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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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길을 따라 난다. 지금의 포장길이 바로 당시의 그 길이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1차 항쟁의 봉기계획 장소였던 초전면 대마장터에서 2차 항쟁의 처음 봉기장소였던 벽진면 수촌리(해평동) 명암장터로 향한다.
가는 도중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유명한 월회당(月會堂)을 들려보았다. 조광조 등의 진언을 받은 중종이후 전국에 널리 퍼졌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씨향약 강당인 동시에,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를 써서 송준필, 김창숙, 여상윤 등이 서명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역사적으로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벽진면 명암장터
2차 임술항쟁의 봉기장소였던 명암장터의 하늘은 더욱 어두웠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게 내려앉아 찬 바람이간간이 불어왔다. 이곳 명암장터는 성주 읍내에서 2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30번 국도를 따라 6.5Km 남짓 가다 금수면과 벽진면으로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913번 지방도를 따라 약 1.5Km 가면 벽진면 소재지가 나온다. 항쟁당시 명암장터에서 이 길을 역순으로 하여 성주 읍내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1차 농민항쟁 당시 성주 읍내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을 하였다면 1차 경험을 토대로 20여리 떨어진 벽진 외촌(外村)에서 시작했다는 차이가 있다. 바로 1차 항쟁 보름 뒤인 1862년 4월 12일 명암장터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읍내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항쟁이 시작되었다.
농민들은 1차 항쟁에 대한 배신감과 불만이 높아져 있었다. 그래서 2차 공격대상은 주로 지주 혹은 요호부농층 인가들이었다.
일단은 2차 임술항쟁의 결과 농민들의 승리였다. 각 고을마다 대표자를 내세워 향회(鄕會)를 결성한다. 이 향회는 당시 각 마을마다 결성되어있던 두레의 조직이 일정한 규율과 지휘체계로 결속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결속의 힘으로 약 1개월 동안 군현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요구한 군포와 결가(結價)인하의 폭이 조정에서 파견된 선무사의 재량으로 처리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조정에 보고하고 선처를 약속한 뒤에야 종결이 되었다.
결국 수탈과 민생고의 어려움에 앞서 수탈의 구조적 모순탈피와 당시 사회적 상황에서 이룬 항쟁은 그 의미가 깊다. 비록 항쟁의 목소리는 높여 그들의 뜻을 전달하는데 그치치고 말았지만 그 원인 중 하나는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겠다. 역량의 부족을 꼽을 수도 있으나 그만큼 오랫동안 대물림 해 왔던 순종적인 역사를 한꺼번에 탈피할 수 있는 의식의 반로가 없었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약하고 순한 민족의 심성이나 그만큼 수탈에 있던 자들의 집요함도 한 몫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벽진면 명암장터는 을씨년스럽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은 장터에는 당시 사회적 모순에 대항하기 위해 성난 하층민들의 함성을 상상한다. 그들이 우리의 선조들이요, 우리 백성들의 정의를 추구하기 위한 선구자였다. 핍박받던 하층민들의 최소한의 권리이자 마지막 탈출구가 바로 항쟁이라는 방식으로 표출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과 부와 그것에 기생하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두꺼운 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한 평등을 부르짖던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권리, 즉 봉건적 사회 속에서도 생존권을 위한 당당한 투쟁이었다. 지금도 실상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란 참으로 연하고 순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분배의 정의가 고르지 못하면 방식은 약간씩 다를 수 있지만 언제든지 혁명이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는 것이 하층민이다.
고요한 장터의 모습과 흐린 날씨가 겹쳐지면서 내 가슴은 쓸쓸한 감정이 되어 춥다. 장터 옆에 닥지닥지 붙어있는 옛날의 모습을 한 방앗간에 인기척이 들린다. 무심코 불쑥 들어가 인사를 하니 40대 남자 한 분이 이방인 둘을 반긴다. 혹시 전설처럼 당시의 기억들이 구전되고나 있지 않은지 하는 궁금증에서였지만 돌아오는 답은 물론 모른다거니와 되려 그런 일이 있었냐고 되묻는다. 역사의 참교훈적인 장소에 그 흔한 기념비 하나 없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역사적 교훈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 후손들에게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리고, 그 역사의 현장에서 그들을 기념하는 비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텅 비어있는 장터를 바라던 중 갑자기 오토바이 소리가 들려왔다. 시장근처 다방에서 배달 갔던 아가씨가 막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갑자기 갈증이 몰려왔다. 물론 배달하는 아가씨가 예뻐서는 절대로 아니다. 어두운 날씨 속에 불쑥 찾아드는 남정네들이 반가운 모양이다. 커피인심이 푸짐했다. 옆에 착 앉아있는 아가씨들은 그동안의 자신들의 무료함을 깨는 기회라는 듯 했지만 그리 사교성이 없는 우리는 장사나 장날에 대해 물었다. 예전과는 활기찬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3일과 8일에 장이 선다고 했다. 우연히 장날에 찾아오는 행운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지금에야 성주는 전국의 참외를 성주참외로 둔갑시키는 역할을 해 올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그만큼 질 좋은 토양에 생산방식에 있어 노력한 결과이다. 그러나 어디에나 풍성함 뒤에 오는 향락의 씁쓸함도 있다. 지난 항쟁당시 성난 농민들의 함성과 함께 숨어 치는 노름판과 고함치는 노랫소리가 겹쳐진다. 일 년의 소출을 위해 힘겨웠던 시간들을 털어버리는 의식이라 위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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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항쟁, 그리고 20년 뒤 또 다른 농민항쟁(1883년, 계미항쟁)이 성주에서 일어나게 된다. 여러 군현에서 농민들이 항쟁을 일으키자 나라에서 구체적인 방안인 삼정이정책을 공표하기에 이르게 되지만 기존 부세체제는 그대로 둔 채 부분적 개선과 개혁을 단행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마져도 내부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삼정의 모순은 제대로 이행 될 수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자 농민들의 불만은 여전했으며,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폭동이 일어날 소지를 지니고 있었다.
1873년 11월 고종의 국왕친정(國王親政)은 민비(명성황후)라는 새로운 권력의 형태가 나타난다. 1876년 개항이후 곡물수출확대의 원료수출 완제품 수입이라는 제국주의의 침략적 식민지식 경제형태가 나타나며, 당시 절대다수의 농민들은 오래자본주의의 침략세력에 의해 끌려가고 있었다.
*당시 아름드리 버드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는 유목정 터
이러한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성주의 계미항쟁(1883년) 전개과정은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방 선임권에 있었다. 1864년 폭동의 예방적 차원에서 1명의 서리를 효수시켰으며, 7명이 정배되었다. 이후 농민들의 여망에 부흥 할 수 있는 청렴한 인물로 교체되었다. 그 인물 중 이득석(李得石)이란 인물이 다년간 이방을 엮임 하였다. 이렇게 되자 1870년 중반까지 서리의 중간수탈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지만 1870년 이후 사족들은 자신들의 권위회복을 위해 국가권력의 실질적 집행자였던 서리들을 장악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당연히 농민의 여망보다 향청 추천에 의해 서리를 선임하자 이들의 반동공세에 저항해 일으킨 항쟁이 바로 1883. 6. 12. 일어난 계미항쟁이다.
향청에 의해 주모자가 체포되자 농민들은 관아를 공격하여 구출한다. 이후 성주읍에서 10여리 떨어진 지금의 선남면 유목정(柳牧亭)에서 대규모 군중집회를 개최하였다.
유목정에서 성주 읍내까지 약 4Km, 십리길이다. 백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성주관아를 공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농민군은 관아를 점령하고 목사를 쫒아버렸으며 구래사족들을 공격했다. 이 사실을 안 감녕에서 수백의 군사를 보내 농민군을 제압하였고, 결국 농민군 주동자 등 수십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무자비한 처벌을 내렸다. 무려 63명이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도망을 치다가 낙동강에 투신 하였는가 하면, 교장평에서 주동자였던 최병굉과 정중집이 효수당하고 만다.
자료를 통해 간단히 정리를 해 보았지만 항쟁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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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목정 위치를 가르키고 있는 이영규씨
30번 국도를 따라 대구 방향으로 성주에서 4Km쯤 가니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 옆으로 꼬불꼬불한 옛길이 나왔다. 아름드리 메타쉐콰이어 가로수가 제 역할에 아쉬운 마음이고, 마을 어귀 간판도 없는 가게에 들어가 목을 축이며 물었다. 역시나 들은바 없단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다. 조금 더 올라가 보기로 했다. 마침 노인정 앞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아저씨 한분께 물어보았다. 그곳을 왜 찾느냐는 듯 의아해 했다. 그곳이 바로 자기 명의의 땅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소목장 이름을 유목정(柳牧亭)으로 지었다는 그분은 흔쾌히 그곳을 안내해 주셨다.
바로 20년 전까지 주막이 있었다는 작은 계곡 앞으로 초전면 용봉리에서 부터 이어온 백천(白川)이 한개마을 앞을 지나 이어있고, 큰 도로 옆 옛날에 수많은 차들이 지났을 작은 도로가 방치되어 있는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성산이씨라고 밝힌 이영규님(66)은 당신의 어린 시절 이곳에 큰 버드나무 세 그루가 있었으며, 버드나무아래 소를 묶어놓고 뛰어 놀았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직역을 하자면 버드나무아래 소를 키우는 정자란 뜻이 되니, 계미항쟁 당시 이곳이 항쟁의 깃발을 높이 올리며 봉기했던 장소유목정(柳牧亭)으로 생각된다.
*유목정 터에서 내려다 본 백천
가을이라 그 터에는 억새만 무성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120년을 훨씬 뛰어 넘어 지세와 물길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버드나무가 궁금했다. 그러나 국토관리청에서 도로와 물길 정비사업을 하면서 베어버렸다고 했다. 둑을 넘어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았다. 당시 오래된 버드나무와 함께 참으로 운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과 당시의 함성이 산허리에 메아리 쳤을 것이며, 분노한 농민들의 단결된 힘이 물길도 따라 출렁였을 것이다. 그리고 막연했던 봉기장소를 찾아보았다는 것에 작은 흥분으로 달래며 길을 접지만, 답사의 여정 마지막엔 더 큰 아쉬움이 남는다. 하루의 반성과 함께 돌아오는 길은 저자거리의 갈증으로 속을 달래기 위한 핑계를 스스로 만들어 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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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계명대학교 이윤갑 선생님의 논문자료『19세기 후반 경상도 성주지방의 농민운동』을 토대로 답사기를 엮었으며, 『갑오농민전쟁과 영남 보수 세력의 대응』신영우 저. (연세대학교)와 갑오농민전쟁에 관련된 자료『갑오농민전쟁 100돌기념 논문집』과 송찬섭 선생님의『농민이 亂을 생각하다』(서해문집)을 읽고 참조하였습니다.
* 농민항쟁의 역사현장을 찾아보기는 부끄럽지만 처음입니다. 처음 시작한 농민항쟁에 대한 공부라 제 것으로 소화시키기 위한 욕심이 앞서 노력하였습니다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낍니다. 그래도 미천한 답사기 한편을 쓰고자 한 덕분에 농민운동사에 관하여 많이 배우고 느끼게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 성주지방 역시 갑오농민전쟁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방대하여 다음으로 미루고자 합니다.
첫댓글 내고향 성주.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농민봉기는 인지했어도 전국에서 일어난 농민운동의 발생 경위는 교과서에서 배운 것이 전부 이고 진행과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글을 읽으면서 익숙한 지명 때문인지 무지에 대한 반성 때문인지 두어번을 정독 했다 ㅎㅎ. 댕큐!!!
사족을 달자면 1.성산관은 관아의 후원이 아니라 성주 객사 건물임. 2.관왕을 모신 절은 관왕사가 아니라 관운사로 위치도 장터보다는 성주여고 아래임.3.백천 유목정 버드나무가 현재는 없지만 현재 성밖숲-이천-백천 둑에는 성밖숲처럼 중학교 시절에도 왕버들이 무성했으며 우리 중학교 때 신부교 근처까지도 소풍을 왔던 기억.4. 유목정에서 성주관아 진입에 대한 나의 생각은 성산재 루터가 맞다고 봄, 왜냐하면 신부리 유목정에서 별티재 성주 관아 길은 농민 봉기이전에 임진왜란 왜군의 진입로, 조선 시대에는 가장 큰 도로였음 또한 현재 메인도로인 신부리 신부교 지불티재 성주관아는 험한 산길이었음.
마지막으로 자네가 추측하는 루트인 백천 둑을 통하여 성주읍내를 흐르는 이천을 거쳐 관아로 드는 것은 성난 민중들에게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 물론 근거없는 나의 생각임. 다음에는 갈 때 이야기 하게. 군청, 면사무소에 환영 현수막 걸라고 할테니까...
읍성은 귀중한 유적인데.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복원했으면 좋겠네요.
성주.....
성주는 한 번도 못 갔네.....
아이고 머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