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님 서임식 사진
“저 산 너머” 250-259
얘야, 너 어디에 있느냐
나는 마산 교구장으로 2년 동안 일하고서 1968년 4월에 서울 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4월 30일 로마 교황이신 바오로 6세로부터 추기경으로 피임되었다. 내 나이 그때 47세로 당시 전 세계 136분 추기경 가운데 최연소자라고 해서, 그리고 한국 천주교 사상 최초의 추기경이 나왔다고 해서 분에 넘치는 축복을 받았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힘이 들게 마련인데 나는 오직 하느님이 나를 자유롭게 쓰실 수 있도록 내가 신부 서품을 받던 첫 마음 때처럼 나를 비우는 일을 끝없이 계속함으로써 나 자신을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려고 해 왔다.
1993년 3월에 나는 작가와 함께 나의 저 아득한 유년과 소션 시절의 발자취를 더듬는 추억 여행을 떠났다. 내가 태어난 대구의 남산동 집터에는 보성 주택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떠나온 뒤 실로 59년 만에 찾아간 군위의 용대동 초가삼간 집만은 용하게도 례가로나마 남이 있었다. 퇴색한 문살로만 남아 있는 방문, 아예 떨어져 나가고 없는 부엌문, 형과 함께 걸터 앉아서 앞산을 바라복 노래를 부르곤 했던 마루만이 옛적 것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던 맑은 개울물도 사라지고 없고 잡초만 한창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나가서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신작로에 두 줄로 늘어서 있던 버드나무 가로수도 몇 그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의 우리 가족들은 지금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아버지, 어머니, 형님들, 누님들, 팔 남매 중 오직 막내인 내 혼자만 살아 있다. 내가 다녔던 군위 국민학고에 가 보았다. 강당에 모여 있던 아이들한테 얘기를 하다 말고 나는 내가 어린 날의 모습으로 아이들 속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동안에 흐른 아이들 속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그동안에 흐른 무심한 시간만 들어내 버릴 수 있다면 나는 그 아이들 중의 하나로 운동장을 달리고 있으리라.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런저런 지난 일을 묻는 작가가 좀 진지한 인간 본연에 관한 것을 물었다. 인긴은 아디서 왔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과학적인 것은 자연법칙에 따라 증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과연 2천조분의 1이라도 확률의 우연으로 생긴 것일까? 인체학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작은 뇌가 있는 뒷머리에 있다는데 사람들은 왜 손을 들어 가슴을 향하고 있는가? 현대 의학의 해부에서도 마음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인간에게 마음이 없다는 말인가? 나는 내 결론을 말하였다. “인간은 모든 육적인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독 정신적이고 영적인 존재입니다.” 작가가 또 물었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자는 누구입니까?” “네델란드 신부님이 쓴 책 가운데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 맨 마지막 장에 유대에 전해 내려오는 일화가 하나 나옵니다 어느 랍비가 엘리야에게 가서 ‘메시아가 언제 옵니까?’ 하고 묻습니다. 엘리야가 대답합니다. ‘저기 성문에 가면 거지들이 있다. 거기에 있는 모든 거지들이 자기의 상처를 감은 붕대를 풀었다. 감았다 하고 있는데 구중의 하나가 다른 거지들과는 달리 자기 상처의 한 부분만을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그도 다른 거지들과 똑같은 상처인데 그렇게 부분만을 하고 있는 것은 남이 필요로 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이다. 바로 그가 메시아이시다.’고 했어요. 사실 오늘을 사는 사람들도 모두 다 상처를 입었지요.“ “프랑스의 랭보라는 시인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성이여! 계절이여!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좋군요. 그런데 이렇게 상처를 입은 모두는 다 치유 받기를 원하죠, 이때 만일 우리 중의 누군가가 자기도 상처를 입었고 고통을 당하고, 소외되어 있고 억눌려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늘 남을 생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해방을 가져오는 사람이 아니냐 하는 것이죠.“ ”인간이 끝까지 지켜 가야 할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인간다움’이라고 대답했다. 현대인들은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돈’이라는 목적을 성취하러 한다. 돈을 벌기 위하여 인간관계를 저버려도 좋고 인체에 해로운 불량식품을 만들어도 되는가. 또한 성을 부추기고 폭령을 행해도 되는가. 돈을 버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정치만 해도 그렇다. 인도의 네루는 ‘정치는 국민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는 때때로 국민의 눈물을 거두어 주기는커녕 눈물보다 진한 피까지도 흘리게 했다. 인간이 자기 아닌 남을 도울 줄 알고 배신 아닌 신의를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인간 본연의 삶이다. 인간에게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영적인 삶이 없이는 인간적으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본다. “잊히지 않는 감동적인 장면은?”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촛불 행진이다. 나는 1987년 6월의 일이 떠올랐다. 그날 명동 성당에서 민주화를 위한 전국 사제단 미사가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는 저녁때가 되자 명동 성당은 안도 바깥도 발 디딜 틈이 없이 군중들로 꽉 찼다. 내가 강론하는 도중에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나 광장을 매운 사람들은 억수같이 퍼붓는 비를 맞으며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이내 비가 그쳤다. 촛불이 한 사람으로부터 또 한 사람으로 이어져 갔다. 빛을 나누어 받고 꺼지면 또 나누어 받고. 그리하여 미사를 마치고 그 촛불로 어둠을 밀어내며 행진하던 사람들. “빛은 희망이기도 하지요.” “사랑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할 때 나타나거든요. 그리고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는 빛을 낼 수 없는 것이 촛불 아닙니까. 곧 희생이지요. 하느님이 ‘너, 어디에 있느냐.’고 했을 때 ‘네, 여기 촛불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한 사람이 꿈은 그냥 꿈으로 남을 수밖에 없지만 모인 사람들의 꿈. 곧 빛의 아우러짐은 실현이 될 수 있는 것이예요.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가 먼저 꿈을 가지고 그 꿈이 전파되고 점차 확대되어 그날의 촛불 행진처럼 강물 되어 흐르면 현실화되지 않던가요?” 우리를 태운 차는 고개를 넘고 있었다. 산 아래 저녁 한 개를 내려다보며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사람한테 고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작가가 한참 침묵하고 있더니 대답했다. “몸만 자라고 마음은 자라지 않은 식물인간이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설리춘색(雪裏春色)이라는 말이 있어요. 준 밑에 이미 봄이 와 있다는 말인데요. 고통 속에도 이미 기쁨이 와 있다고 믿고 이겨 내는 것, 그것이 참인간의 길이지요.” 나는 어둠 속에 떠오르는 별을 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기도문을 가만히 외워 보았다.
나를 당신이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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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