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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한담(茶中閑談)7-본편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일곱 번째
(2023년 12월 3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에너지에도 등급이 있고, 지식과 지혜에 쓰이는 에너지는 서로 다르며, 에너지를 써야 될 곳에 써야 된다는 것.
그렇게 에너지를 쓸 곳에 쓰기 위해서는 몸 바탕이 되어야 하고, 그 기본은 구르고 돌고 기지개 켜는 일에서 가능하게 된다는..."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서
제가 가끔은 사실은 늘이죠. 질문 같지 않아 보이는 질문을 하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리는데요. 우리가 질문 같은 질문이라고 하는 것에는, 나름대로 이 사회적으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 돼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질문 같을까?'라는 그 질문에 어떤 요건을 갖추려고 하죠. 그러면 실제로 중요한 질문거리가 빠져버리게 되죠.
예를 들어서 이런 얘기를 해드립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워 있다가 어느 순간 긴다 그리고 기어 다니다가 어느 순간 서고, 어느 순간 걷는다!” 그러는데, 쉽게 생각하면 그렇거든요. 그런데 ‘어! 왜 길 수 있지?’ 이렇게 하면 느닷없는 질문이거든요.
그러면 실제로 규칙을 갖춘 질문이 아닌, 그런 질문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이루어질 수 있죠. 기다가 걷는다 그러면 선다고 하면, ‘무슨 힘으로 서지?‘ 그리고 또 어떤 경우는 서다가 걷는다 하면 ‘뭔 힘으로 걷지?’ 이렇게 나올 수 있는데,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저는 더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실제 오늘은 그런 것에 관련해서 얘기를 좀 드리려고 합니다.
성인이 되는 곳에 쓰여야 할 에너지가
나이가 들어가고 또는 몸이 조금 불편해지면 수많은 이야기를 좌우로부터 듣게 됩니다. 뭐가 몸에 좋다더라! 뭐가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 누가 이렇게 했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는 이런 얘기를 수없이 듣게 되거든요. 그리고 그 중에 어떤 것은 자기의 경험이라든가 자기가 살아온 여러 관찰된 내력에 따라서 솔깃하게 다가옵니다. 솔깃하게 다가와서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채택해서 하고 있죠.
과연 거기에 답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제가 얘기를 할 때 굉장히 단호하게 말씀을 드리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저는 덜 단호하게 말씀드리는 편이에요. 예를 들어서 밥을 먹을 때 백미를 먹느냐 현미를 먹느냐 얘기하면서, 정제된 에너지의 소모량을 가지고 보면 현미를 같은 방식으로 먹을 경우, “현미를 먹는 것이 훨씬 더 비효율적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죠.
굉장히 제가 점잖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약간 문학적으로 말씀드리면 조금 더 큰 자극을 드릴 수 있지만 그렇게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이 되느냐? 자극이 가장 더 실체에 가까워요.
밥 먹고 땀 내며 열 올리면서 소화해서 얻는 에너지로 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운동하고 노동하는 겁니다. 내가 운동을 하고 노동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 에너지를 한 번 더 정제를 시켜서 쓸 수 있는 내 삶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될 수 있는 힘을, 밥 먹는 데 써버리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미켈란젤로가 될 수 있는 능력을 현미 소화하는 데 써버리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그 어떤 위대한 철학자나 과학자나 성인이 될 수 있는 그 에너지를 기껏 현미 소화하는 데 써버리는 거예요.
이게 진실에 가까워요. 저는 그렇게까지는 말씀을 안 드려요. 그런 면에서는 굉장히 단호하게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돌려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오히려 ‘으악’할 수 있는데, 이제는 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상시에 이렇게 몸에 좋은 거, 당기는 것에 너무 넘어가지 말자라고 말씀 드리다가도, 어디 우르르 놀러 가면 어느 순간에 상관없이 당기는 거예요. 그때 몇 번 그렇게 경험해보면서 내 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없애는 걸로 대신해서 얘기해버리자! 그것도 덜 자극적으로 말씀드리는 거예요.
여러분 안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될 수 있는 힘을 현미 소화하는 데 쓴다! 미켈란젤로가 되고 베이컨이 되고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는 힘을, 겨우 현미 소화하는 데 써버린다고 하는 것보다 더 억울하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몇 생에 걸쳐서 겨우 얻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부처 될 힘을 써버리는 거예요. 기독교로 치거나 카톨릭으로 치면 성자가 될 그 에너지를, 지혜로운 에너지가 될 그 에너지를 써버리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몸에 이롭다고 하는 영양 성분 더 얻으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소 잡는 데는 소 잡는 칼이 있고 닭 잡는 데는 닭 잡는 칼이 있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내가 정제시킨 에너지는 그런 거 얻는 데 쓰려고 얻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진화가 이루어져 온 거죠. 그런데 진화가 이루어져 오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들이 있죠.
사람들 기운이 어떤 때는 솟아나고 어떤 때는 기운이 가라앉고, 자력에 의해 솟아나기도 하고 타력에 의해 솟아나기도 하고, 타력에 의해서 눌리기도 하고 그냥 저절로 눌리기도 하고, 저절로 뭔가 좁혀지기도 하고 타력에 의해서 밀려나기도 하고 잘 퍼져 있기도 하고, 울큰불큰하기도 하고, 사람의 상태도 늘 다르잖아요. 이런 상태를 조정하고 이런 상태를 고찰하고 하는 데 쓰이는 에너지를 겨우 운동하고 노동하는 에너지로 치환하는 데 쓰시면 안 되는 거죠.
서기 전의 과정을 되돌아보면
태어나서 그런 과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해야만 우리가 기어요. 기고 또 기다가 서고, 서다가 걷죠. 그런데 서다가 걷는 전제 하에서 인간론과 인체론이 만들어지고 또 그 형식적인 분석이 이루어지니까, 의학에서 얻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사실 우리가 해야 되는 부분들 남겨놓은 거죠.
운동적으로 어떻게 해야 구르던 아이가 길까요? 굴렀기 때문에 구른 만큼 크는 거예요. 안 구르면 아이는 못 기어요. 그래서 아이를 너무 곱게 자란다고 구르지 못하게 해 놓잖아요, 기어 다니는 시간이 늦게 와요. 구르는 만큼 기어요.
구르는 만큼 강하게 기고 구르는 만큼 빨리 기어요. 빨리 기는 것은 좋지는 않아요. 나쁜 것도 아니지만. 그것은 '그냥 빨랐다', '그냥 늦었다'의 의미일 뿐이지 더 이상의 의미는 없어요.
아무튼 구르지 못하고 계속 묶어 놓는 애는 못 기어요. 기는 운동을 안 했기 때문에 못 기는 거예요. 사람이 어느 순간이 되면, 굴러서 기었던 그 에너지를 반복 안 하죠. 나중에는 구르면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지죠. 자신이 기었을 때 기기 위해 했던 에너지를 재생을 안 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 기다가 어떻게 하면 설까요? 저는 그렇게 말씀을 쉽게 드려요. “수백 만 년의 역사를 1년에 걸쳐서 반복한다!” 아니, “복원해낸다!” 그렇지만 더 짧게 보면 기다가 걷고요, 기는 아이는 옆으로 뱅뱅 돌기 때문에 서요.
옆으로 도는 운동을 하지 않는 아이는 서지 못해요.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시계 방향이에요. 그런데 간혹 다른데, (그건 큰 상관없지만) 유전적으로도 왼쪽으로 기는 아이가 있고 오른쪽으로 기는 아이가 있어요. 유전적으로 상관이 있고, 유전하고 상관없이 형편에 의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아무튼 돌아요. 돌면 서요.
그래서 사람이 서 있다가 돌지 않는 상태를 놓아버리잖아요. 핑 돌아버리죠. 거꾸로 스프링을 잘 감았다가 서는데 핑 돌아 풀리잖아요, 그러면 어지러워 못 서죠. 핑 돌면 못 서죠. 그래서 (아이들은)핑 돌지 않을 만큼 돌아가지고 선 거예요. 나선형의 운동을 함으로써 선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이제 걸어야죠. 걸으면서 직립이 되는 거죠. 사실은 섰지만, (선 것이)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못 걷는 동물들이 많죠. 원숭이가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몇 걸음 안 가서 걸음을 멈추죠. 개나 고양이나 곰이나 범이나 많은 네 발 도치들이 잠시는 서죠. 그리고 몇 걸음씩 걷기도 하죠. 그러나 그게 끝이죠. 금세 다시 네 발 도치로 돌아오죠. 그러면 그렇게 서 있는 동물은 뭘 했기 때문이냐?
아이들이 걸을 때 한번 봐 보세요. 아이들이 처음에 걸을 때 이렇게 (손을 내리고) 걷지 않아요. 아이들은 손을 들고 걸어요. 반 만세를 부르면서 걸어요. 지금 고개를 끄덕이는 분은 30대나 60대 이상이에요. 손자 손녀를 돌봤거나 한 거죠. 그래서 70대가 넘어버리면 또 잊어버리고, 40대가 넘으면 또 잊어버리고 하죠.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걸 (상체를) 펴주는 힘이 필요해요. 그래서 펴주는 힘이 없으면 못 걸어요. 그러니까 이 앞의 힘과 뒤의 힘이 균형을 못 잡아주면 걸을 수가 없어요.
노화가 되더라도 사람의 본성은 남아 있는 것
이런 얘기 들으신 적 있죠. “너무 오래된 차나무에서 차를 따면 그 차는 좋은 차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각각의 나이는 상대적이지만) 어떤 차나무는 이미 동백나무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사람도 노화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네 발 도치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대로 차나무가 동백나무로 돌아간다고 해서, 3천 년이 흘렀다고 해서 완전한 동백나무가 되지는 않아요. 진화의 결과를 그렇게 완벽하게 잃어버리지 않아요. 흔적은 남겨요. 3,200년이 돼도 차나무는 차나무예요. 단, 동백나무의 성질로 많이 돌아가 버린 거죠. 사람도 늙어서 네 발 도치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돌아가지 않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죠? 이렇게 되죠. 서지도 못하고 네 발 도치도 아니고 애매한 중간 상태에서, 버팀목 하나 잡은 세 발 도치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그 돌아가는 힘이, 이미 앞 힘과 뒤 힘을 균형 잡게 해주던 그 무언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제가 그걸 가지고 있으면 (달라지기 때문에) 상대적이라고 그랬잖아요.
어떤 차나무는 700년이 되면 동백나무의 성질로 돌아가고, 어떤 나무는 1,200년이 돼야 돌아가고, 어떤 나무는 450년 만에 돌아가요. 차나무의 경우에는 얼마나 땅에 뿌리를 깊이 받고 있느냐에 따라서 즉 뿌리의 깊이에 비례하지만, 사람은 동물로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돌아가는 속도와 시기가 상대적으로 달라요.
많이 달라요. 450년과 1,200년이 많이 다르듯이요. 세 배나 다르잖아요. 많이 다를 수 있어요. 어떤 분은 90세 돼도 꼿꼿하게 서 계세요. 꼿꼿하게 걸으시고요. 어떤 분은 60세만 돼도 '아이구 허리야! 아이구 허리야!'를 반복해요. 그 이유 하나가 있어요.
여러분들 삶에서 기지개만 켜보세요. 매일 기지개를 2분씩 만 켜 보세요. 허리가 휘지 않아요. 그런데 그걸 안 해요. 네 발 도치들은 기지개를 켜지 않아요. 켤 수도 없죠.
기지개 켜는 그 간단한 동작이 젊었을 때 자주 일어나요. 자기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요. 밥 먹고 나서 기지개 켜고, 일하다 힘들면 기지개 켜고, 밖에 나와가지고 뭐 물 한 모금 먹어도 기지개 켜고, 이렇게 해도 켜고 막 켜요. 크게도 켜고 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4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기지개를 안 켜요. 생각해 보시면 그러셨을 거예요.
그런데 젊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기지개를 자주 켜요. 왜냐하면 앞뒤의 근력과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힘드니까 그렇죠. 그런데 어느 순간이 되면, 무너지는 걸 점점 받아들이며 살고 있어요. 그래서 30대인 분이 일을 하고 나서 힘들면, ‘어우!’ 그러면서 기지개 켜고, 그것도 크게 켜요. 그런데 점점 각도가 낮아져요.
그러다가 40대 중반이 딱 되면, 힘들면 기지개를 켜니까, 힘들면 ‘어휴!’ 하면서 이렇게(등을 굽혀 책상을 집는 모습) 해요. 네 발 도치로 돌아가는 촉진 운동을 해요.
그래서 기지개만 잊지 않고 켜줘도, 허리는 절대 휘지 않아요. 그리고 그것만 생기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 완급이 쉽게 조절이 돼요. 어떤 분들은 힘들면, 자고 나면 좀 마음이 돌아온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기지개만 켜도 돌아와요. 그런데 그 간단한 거를 안 해요. 왜?
우리가 서서 걸을 때 그와 같은 것이 균형 맞추는 여러 가지를 했는데, 꼭 기지개만 켰겠어요? 수많은 것을 해서 이렇게 네 발 도치가 아니라, 두 발 도치로서 걸었던 거죠. 그런데 그 두 발 도치로 걸었던 힘 중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기지개 켜는 거예요.
모든 운동에서 인간이 개발한 좀 지혜롭다고 하는 모든 신축성을 특징으로 하는 운동에서는 그처럼 몸을 옆으로 펴주는 게 다 포함돼요. 그것이 물리치료가 됐든, 아니면 필라테스가 됐든, 그것이 요가가 됐든, 그것이 또 다른 운동이 됐든 기본적으로 기지개를 켜주면 돼요.
그래서 그런 것이 다 포함이 돼 있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기지개만 켜도 돼요. 기지개만 켜 줘도 특히 연세 드신 분들 중에서, 60 넘고 70 넘으신 분들 중에서 기지개 얘기하니까, 내가 기지개를 펴본 게 언제이던가 싶으실 거예요. 억지로 펴지 않았다면 그렇죠.
기지개는 그래서 간단해요. 그리고 사람이 도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어릴 때는 끊임없이 방향을 전환시키는 운동을 해요. 그래서 계속 회전을 해요. 시계 방향이든 시계 반대 방향이든 돌아요.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서 있을 수 있는 힘이 생겨요.
그런데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안 돌아요. 직진 후진만 해요. 직진 후진만 하는 순간이 언제냐? 아무리 운동을 많이 해도 옆으로 보는 운동을 안 하면은 무릎과 골반의 힘이 금세 떨어져요. 운동을 아무리 해도, 아무리 몸을 건강하게 관리해도, 도는 운동을 안 한 사람은 무릎 근력이 금방 빠져요. 무릎 근력이 빠지면 이제 앞으로 가는 힘도 떨어지겠죠.
일단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하루에 한 2만 보 걸었다! 그런데 내 무릎이 아프다! 이미 돌기를 안 하신 분이에요. 하루에 2만 보 걸었다! 힘들게 걸었다! 그런데 무릎이 안 아프다면, 자기도 모르지만 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앞으로 열심히 근력 운동한다고 100m 달리고 1,000m 달리고 아무리 해봐야 소용이 없어요.
사람은 자기가 섰을 때 그 힘을 유지해 주는 것, 이게 없어지면 어느 순간 나이가 들면서부터 ‘띵’하는 순간이 자주 와요. 이때 오는 현기증이라고 하는 것이 다르게 와요. 마치 감아 놨던 스프링이 풀리듯이 와요. 그럼 주저앉아요. 그런 일이 잦게 되죠. 인간이 완벽하게 걷거나 완벽하게 사는 동물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그 과정 속에서 몸의 움직임에 따라서 마음에도 많은 변화가 와요.
신명 날 때 오히려 약속을 하지 말자
오늘은 그냥 두서없이 말씀 좀 드립니다. 언제는 두서가 있었습니까 만은..
사람이 자력으로 어디선가 모르게 그냥 기운이 날 때가 있어요. 신명이 나요. 그런데 반대로 이것이 포지티브(positive)하지 않고 약간 네거티브(negative)하게 신명이 나면 화가 나는 거죠. 성질이 나는 거죠. 그런데 거기에 따라가지고 그 기운을 타지 못해요. 그 기운을 타지를 못하고 그 기운에 역행을 많이 해요. 그러면 어느 순간 힘들어 계속 빠지는 거예요.
신명이 막 나요. 그러면 신명 날 때는 뭘 해야죠? 뭔가를 해야죠. 그냥 신명 날 때는 무엇인가를 해야 돼요. 신명 날 때는 책을 보든, 일을 하든 뭔가를 해야 돼요. 사람이 신명 날 때 꼭 약속을 해요. 신명 나면 기분 좋다는 얘기죠. 기분이 막 업 되어 있어요. 그럴 때 ‘어, 이거 내가 할 게, 이거 내가 할 게!’ 해요.
차라리 그때 줘요. 신명 날 때는 절대 약속하면 안 돼요. 신명 날 때 한 약속은 절대 지킬 수가 없어요. 신명 날 때는 운동을 해버리든가, 책을 봐버리든가, 아니면 뭐 기분이 나가지고 막 주고 싶으면 차라리 그냥 줘버려요. 주겠다고 하지 마세요. 돌아서면 달라져요.
약간 네거티브 하게 이제 기운이 올라와요. 성질이 나죠. 성질이 나면 성질을 어디선가로 풀면 되죠. 어디선가 발출(拔出)을 하면 되죠. 그럴 때는 몸도 좋고 그럴 때도 해결책은 똑같아요. 책을 보든, 운동을 하든, 가서 어디 가서 뭐 뜀뛰기를 하든 하면 돼요.
그런데 그럴 때 꼭 일을 저질러요. 그러니까 신명 날 때 약속하지 말고 성질 났을 때, 화났을 때 뭔가를 저지르면 안돼요. 그때 결정을 하면 안돼요. 화났을 때 한 결정은 그것이 가라앉았을 때 몸에 엄청난 타격으로 와요.
그럼 반대로 이제 어느 순간 있다 보면 신명이 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은 몸의 작용 등에 의해서 움츠려들 때가 있어요. 그럼 심리적으로 외롭겠죠. 외로움은 받아들여야 돼요. 그런데 외로울 때 역행을 해요.
외로울 땐 절대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외로움을 풀기 위해서 연락을 하거나, 어떤 연계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여야 돼요. 외롭다는 사실, 내가 응축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데, 외로울 때 꼭 연락을 해요. 평상시에 생각도 안 하던 사람이 생각이 나면서 전화번호 뒤집어보고 전화 한번 걸어보고 문자 한번 넣어보고 하죠. 그것도 몸을 망가뜨려요.
그 다음, 이제 반대로 타력에 의해 자기가 움츠러들어서 외로운 게 아니라, 누군가가 자기를 떠나가도 외로워지죠. 그런 건 감정적으로 좀 서운해진다고 할 수 있죠. 왜 날 떠나가지? 왜 나한테서 멀어지지? 겹칠 수도 있지만요. 그럴 때는 잡으면 안 돼요. 떠나보내야 돼요.
그런데 그럴 때 꼭 잡고 싶어 해요. 그것이 물건이 됐든 사람이 됐든 애완동물이 됐든 가족이 됐든, 일단 서운할 때는 잡지 말고 ‘자신이 외로워져 있다’라는 걸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요. 그 순간 몸이 편해져요. 몸은 에너지를 얻어요. 그래서 그런 힘을 잘 조절을 하면은 미켈란젤로가 되는 거고, 그런 힘을 잘 안 받아들이면 성질 부리는 망나니가 되는 거죠.
또 어떨 때는 눌려요. 자기가 뭔가 이렇게 힘에 겨울 때가 있어요. 마음도 모르고, 이유 없이 그럴 때 있어요. 자기는 이유를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유 없이 힘들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일어나려고 애를 써요. 그때는 눌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눌리는 상황이 온 거예요. 그때 꼭 무리해서 힘을 씁니다. ‘그래,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나가서 뛰기라도 하자!’ 그러면서 운동을 하려고 해요.
그럴 때는 받아들이고 가만히 있는 거죠. 그럴 때 그 순간 가만히 있는 걸 못해서 병을 만들어요. 모든 병은 그렇게 생기는 거예요. 역행해서 생기는 거예요. 힘들 때는 절대 무리하지 말아야 하죠.
힘들 때 타력에 의한 힘듦, 즉 다른 존재에 의해서 힘든 건 뭐죠? 억울한 거죠. 억울한 거는 뭐 이유가 분명히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억울할 때 그냥 그럴 때도 있으려니 해야지, 억울할 때 화내면 자기만 다쳐요.
왜 이런 얘기를 드리냐 그러면, 아까 미켈란젤로가 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되고 할 수 있는 에너지를 겨우 현미 소화하는 데 써버리는 그 어리석음이 영양 성분에 대한 집착이라는 거예요.
그 얘기는 마찬가지로 힘이 솟았을 때, 눌렸을 때, 힘이 뭔가 응축될 때, 잘 풀렸을 때도 있고, 그리고 사람이 거꾸로 이제 우울할 때도 있죠. 우울하다는 건 이제 뭔가 기분이, 형상으로 보면 여기저기 뭉쳐가지고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그런 느낌이죠.
그런데 사람이 우울할 때는 반성을 하면 안돼요. 우울할 때 반성을 하면 인격이 이상해져요. 반성은 편안할 때 하는 거예요. 그런데 편안할 때는 반성을 안 하고 방심을 해요. 편안할 때 반성하는 거죠.
아까 얘기도 뒤집어 보면 받아들이라는 얘기를 더 현명하게 거꾸로 이용하면, 신명 날 때 그리고 조금 네거티브 하게 성질이 날 때, 그럴 때 뭔가 이렇게 약속하거나 결정하지 말라! 저지르지 말라고 하는 게 그걸 뒤집어 생각하면, 언제 결정하라는 얘기인가요?
결정은 눌렸을 때 하는 거예요. 힘이 부칠 때 하는 거예요. 힘이 부칠 때는 무리하지 말고 오히려 결정하면 돼요. 그리고 사람이 너무 그렇게 우울할 때, 그럴 때는 결정을 하잖아요. 죽기밖에 더 하겠어요. 우울할 때 결정하면 자살밖에 더 하겠어요. 점점 하다가 보면, 편안할 때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좀 더 이제 반성을 할 때가 가장 편안할 때다! 편안하지 못할 때 반성해봐야 반성이 안 돼요. 길이 없어요. 길을 찾아가지를 못해요.
어떤 에너지를
어쨌든 평균적으로 보면 길을 타주는 거고 더 지혜롭게 보면 반대로 할 수도 있어요. 아무튼 그 반대는 중요하지 않고요. 그렇게 어기는 것도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소크라테스, 공자, 맹자를 없애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공자나 맹자라는 사람이나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별거 아니에요. 그렇게 신명 났을 때 막 약속하고 화날 때 저지르고 이렇게 안 했던 거예요. 그렇게 안 해서 자기 안에서 정제된 에너지가 보존됐던 거예요.
옛날 사람들이 그러죠. '단전에 힘을 길러라!'라고 하죠. 단전이 어디 있는지, 힘이 어디 있는지 알 게 뭐예요. 알아야 아는 거지. 그런데 단전의 힘, 그런 것에 대한 분명한 생각 없이 단전에 힘을 기르면 그 힘이 뭐냐, 자기 딴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인간의 에너지인 것 같지만 그냥 운동하고 그냥 열심히 먹는, 먹을 수 있고 힘 좀 더 쓸 수 있는 에너지에 불과한 거예요.
단전이 있어서 거기에 에너지가 모인다 하더라도 어떤 에너지가 모이느냐가 중요해요. 소크라테스가 되고 미켈란젤로가 될 수 있는 에너지가 모이느냐 아니면, 그냥 육상 선수 장재근이 되는 에너지가 모이느냐 하는 거예요. 제가 아는 육상 선수 중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육상 선수가 그분 밖에 없어서요. 그 에너지! 선택할 필요가 있어요. 내가 살아오면서 에너지를 모으긴 모아야 돼요. 에너지를 모아서 어딘가 쓰긴 써야 돼요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중고등학생이 초등학생 문제를 풀 수는 있어요. 중고등학생들이 배운 배움의 질이면 초등학생의 문제를 풀어요. 초등학생도 초등학생 문제를 풀지만 그런데 초등학생이 중고등학생 문제를 풀 수는 없어요. 에너지가 그런 거예요.
고도의 에너지라 할지라도 밥 먹고 소화하고 운동하고 몸 키우는 데 쓸 수 있어요. 그러나 몸을 키우고 영양소를 더 축적하고 이런 에너지를 갖고 고도의 정신적 영혼적 작용을 할 수는 없어요. 내려 쓸 수는 있지만 올려 쓸 수는 없어요.
그래서 에너지를 1차, 2차로 보고, 어떤 에너지를 쓰게끔, 내 에너지를 어떤 에너지로 몸에 또는 마음에 담아둘 것인가 하는 이 결정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애매한 게 그런 거예요. 아주 애매한 게 지식작용 같은 거예요.
지식과 지혜 작용에 쓰이는 에너지
요즘 그런 얘기를 많이 하죠. “가방 끈도 긴데 하는 짓을 보면 초등학생만도 못하다”라는 얘기를 가끔 하죠.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이 그렇죠. 여러분 바둑을 잘 둔다고 그 사람이 인격체가 될까요? 안 돼요. 지식 작용이기 때문에 그래요. 바둑은 지혜로 두는 게 아니라 지식으로 두는 거예요. 지혜의 작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크게 보면 지식의 작용이 있고 바둑은 스포츠가 맞아요.
바둑은 문화처럼 보이지만, 모든 스포츠가 다 문화예요. 바둑도 100m 달리고 200m 달리고 마라톤 하는 거와 똑같은 종류의 에너지를 소모해서, 똑같은 영향을 몸에 미치는 거예요. 한때 중국이 바둑을 잘 둘 때죠. 중국이 아시안게임 하면서 메달 하나가 더 따려고 안 그래도 자기들이 절반 이상 따는데 더 따려고 바둑을 스포츠에 넣었을 때, 사람들이 바둑이 왜 스포츠냐고 그랬는데요. 바둑은 스포츠 맞아요. 스포츠 이상이 아니에요.
그러면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배우고 중학교에서 배우고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들 또는 대학교에서 배우는 그 지적인 것은 스포츠에 속할까? 안 속할까요? 제가 볼 적에 9할 이상은 스포츠에 속한다고 봐요. 행간을 읽는 눈! 그 눈도 스포츠에 속한다고 봐요. 왜냐하면은 자기가 하나하나 터득해서 1 다음에 2가 되고, 2 다음에 3이 되고 하는 단계 단계로 나아가지고 살펴갔다면 아마 그것은 다른 영역일 거예요.
아까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얘기를 했잖아요. 왜 그들이 천재라고 불릴까요? 그들이 천재인 이유는 많이 배워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분들보다 더 많이 배운, 지적인 교육이 된 분들이 당시에도 많았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천재라 불리는 이유는 그분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조각을 하면서 또는 연구를 하면서 어느 단계도 안 빼먹으려고 했던 거예요. 자기가 단계 단계를 밟아 갔던 거예요. 하나도 주입된 게 거의 없는 거예요. 주입된 것조차도 자기 확인을 다 했던 거예요.
1 더하기 1이 2인 것을 자기가 간단하게 1 더하기 1은 당연히 2지라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1 더하기 1이 2가 되는 긴 과정을 자기가 밟았다면, 그거는 스포츠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제가 비유를 정확하게 못 드립니다마는, 그 사람들이 그린 그림 하나하나 보면 나중에 후대 사람도 그렇게 평가하죠. “저 근육 봐 움직이는 것 같아, 저 표정 봐 살아있는 것 같아, 저 느낌 봐 저 사람 기분이 느껴져’!” 하고 하는 그런 것은, 그렇게 표현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그런 표현이 갖고 있는 본성을 알았던 거예요. 이해했던 거예요.
그러한 본성이 뭔지 정밀하게 이해한 거예요. 사람은 흉내 내서 비슷하게 그릴 수는 있어요. 그런데 한 1시간 정도 계속 보고 있으면 ‘이거 흉내 냈네, 이 사람은 진짜네, 진짜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고민이 뭐였네’까지 다가오게끔 할 수 있어요. 즉 창조적인 행위라는 거예요.
바둑까지 해서 모든 스포츠의 특징은 창조적이지 않아요. 바둑이 창의적으로 보이지만 창의적이지 않아요. 아니라고 하시고 싶은 분도 있겠습니다마는. ‘네가 바둑을 몰라서 그러는 거다’ 하시면, 저도 바둑 잘 둬요. 프로하고 목숨 걸고 두라고 하면 제가 세 집만 깔면 프로 이겨요. 지금은 늙어서 그래요. 젊었을 때라면 그냥 호선(互先)하라고 그래도 해요. 그런데 스포츠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안 되는 거예요. 딸깍수가 왜 나오겠어요? 그게 스포츠이기 때문에 나오는 거예요. 그게 지혜의 영역이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잘 둬야 돼요. 나이가 들면 딸깍수가 나오고 1급 자리가 10급으로 떨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게 스포츠이기 때문이에요. 그건 창의적이지 않아요. 나이가 들면서 떨어지는 건 창의적이지 않아요.
창의와 의지
원래 창의(創意)적이라는 표현의 창(創)자가 좋은 한자로 좋은 뜻은 아닙니다. 창의적이랄 때 한자의 창은 긴 나무를 칼로 자르는 거예요. '원형이 이런데 꼭 이래야 돼? 뭐, 이거 좀 자르면 안 돼. 그럼 다른 모양이 될 텐데' 하고 자르는 게 창의에요. 그런데 창의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이것이(意) 뜻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럼 이걸 잘라보는 거예요.
우리가 의지(意志)라 그러죠. 여러분들이 배운 건 다 지(志)예요. 지(志)에 해당되는 건 다 스포츠예요. 지라는 건 뭐냐? 내가 안다고 하는 이 앎이 일정한 선분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정한 선분을 가지고 지식 체계가 돼 있는 거예요. 그거는 분해할 수 있잖아요. 그걸 하나하나 분해해서 재구성했을 때 그게 창(創)이에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정신 작용, 물질에서 원소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서 원소를 찾아가는 거예요.
정신 작용에서 원소를 찾듯이 쪼개 봤을 때, 그때 쪼갤 수 없는 마지막 그 단위를 우리 말로는 홀이라 그래요. 홀짝 할 때 홀이요. 홀이 쌓이면 그게 뜻이 돼요. 그러니까 홀과 뜻을 한자로 옮기면 의와 지가 돼요. 구분이 잘 안 되죠.
뜻 意 하는 것은 뜻 意가 아니고 홀 意 해야 해요. 홀 意 그리고 뜻 志 해야 돼요. 그런데 구분이 안 되니까 합쳐서 의지라고 그러는데, 그 의를 도달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알아도 헛 아는 거예요.
스포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결국은 퇴화돼요 내 것이 아니에요. 나한테 머물다가 나가는 것이에요. 50이 돼 가지고 내가 뜀뛰기를 아무리 잘해봐야, 물론 예외적인 분이 있더라고요. 20대 때보다 30대 중반이 돼 가지고 단거리 선수가 기록을 더 잘 세우는 저 자메이카의 멀린 오티 (Merlene Ottey) 같은 선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올림픽이 7번인가 나와도 50이 넘어서는 안 됐잖아요.
결국은 어느 순간 자기한테 머물렀다 가는 능력이에요. 스포츠라는 건 그래요. 우리가 하고 있는 정신 작용, 지적 작용이라는 게 알고 보니까 다 스포츠였던 거예요. 주어진 거라는 거예요. 배웠다는 거예요. 배워 가지고 그냥 머물러 뒀다라는 거예요.
에너지를 써야 할 곳에 쓰자는 것
내가 터득을 해야 되는데 하나하나 터득해 나가는 데 쓰이는 에너지, 그 에너지를 밥 소비하는 데 쓰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에너지가 부족하면 터득이라는 걸 할 수가 없어요. 뭔가를 터득하는 데는 어쩌다가 ‘툭’하고 얻는 게 아니라, 정말 에너지가 필요해요. 한 번 더 새롭게 태어나는 에너지가 필요해요.
글도 쓰잖아요. 그냥 막 토해 놓듯이 쓰는 글이 있을 수 있어요. 그렇게 쓰는 글은 쫓겨서 나오든 자기가 쓰고 싶어서 썼든 간에 그런 글은 스포츠예요. 도울 김용옥 선생님의 글은 스포츠예요. 도올 김용옥 선생이 풀었던 노자의 글은 스포츠가 아니에요. 그거는 거미가 자기 생명을 다해서 똥꼬에서 실 뽑듯이 뽑아낸 거예요. 그것을 지적 윤리로 전달한 것은 스포츠예요.
아무튼 그 터득하는 데는 엄청나게 힘이 들어요. 환골탈태에 가까운 힘이 들어요. 그 에너지를 모아야 된다는 거예요. 그 에너지를 그렇게 써보는 훈련도 해야 되고, 그걸 즐겨야 돼요. 그게 내 삶이라고 생각하고 즐겨야 돼요. 그렇지 않고 그냥 뜀뛰기하는 데 쓰고, 뭐 하는 데 쓰고, 손잡아 보는 데 써버리고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은 세월은 점점 줄어가잖아요. 기회도 점점 줄어가죠. 여기 계신 분 누구도 기회는 줄어가는 거지 늘어 갈 수가 없잖아요. 아쉬운 기회거든요. 한 번이라도 그렇게 터득해 보는 게 필요해요. 그거를 뭐라 그러냐? 터득하는 걸 보고 나서, ‘넌 터득했구나!’라는 말을, 우리 말로 '홀을 뚫었구나!'라고 그래요.
그래서 ‘훌륭하다’고 해요. ‘훌륭하다’는 말은 인품이 좋다든가, 지적으로 많이 갖춰졌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 너는 하나하나 터득해 왔구나! 하나하나 정말 너 안의 것으로 만들었구나! 하는 거예요.
터득한 것은 영혼을 살찌게 해요. 영혼의 문을 열어요. 영혼을 만나게 해요. 영혼을 뚜렷하게 터득하지 않는 것은 그림자만 비출 뿐이에요. 그림자는 아무리 비춰도 그림자는 그림자예요. 그림자에는 색이 없어요.
그러니까 제가 늘 드리려는 모든 이야기가 그런 거예요. 연세 드신 분들 기지개 켜는 것 잊지 마세요. 그거 하나만으로 쓸데없는 에너지 소비하는 거 많이 막아요. 내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이 틀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돼요.
구르고 돌고 기지개만이라도
일단 틀이 유지가 돼야 뭘 해볼 거 아니에요. 틀이 무너지면 그 틀을 유지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앞으로 허리가 휘잖아요. 지팡이를 짚고 길에서 걷잖아요. 그것에 젊었을 때 뜀뛰기 10만 보를 하던 힘이 거기에 다 들어가는 거예요. 나이가 드니까 기회가 더 없어지는 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에너지를 소모하지 마시라고 기지개 켜시라는 겁니다. 기지개를 키면, 그냥 내 몸 유지하는데 정상적으로 에너지 소모돼야 되니까 그 정도 소모되고, 나머지는 소모가 안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어지럽더라도 굴러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돌아보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 보면 그래요. 사람들 어릴 때 손가락 막 휘잖아요. 나이 들면 안 되잖아요. 잘 안 되잖아요. 뭐라 그러냐면, 나이가 들어서 뼈가 굳어서 그렇다고! 물론 굳어서 그렇죠. 그러나 안 돌아서 그래요. 맴돌지도 않아서 그래요. 코끼리 코 잡고 돌려 그러잖아요. 어른들은 몇 바퀴 못 돌아요. 심지어 한 20바퀴 연속 돌리면 이석이 빠지기도 해요. 핑 쓰러져요. 서 있는 힘이 이미 약화된 거예요.
겨우 서 있는 게 아니라 가끔 돌아줘야 돼요. 그냥 돌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춤추는 걸 하라는 걸로 이해하시는데, 정말 잡고 돌아줄 필요가 있어요. 어딘가 잡고 몇 바퀴 돌아주는 게 중요해요. 그래도 사람들이 안 돌아요. 안 굴러요. 기지개도 안 켜요.
그 간단하게 몇 가지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해버리면 에너지가 소비가 안 될 텐데요. 못 기던 사람이 기면서 기기 위해서 했던 것 하고, 기던 사람이 일어서기 위해서 했던 것을 하고, 일어선 사람이 걷기 위해서 했던 것만 해줘도, 우리가 다른 것에 투입될 수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아낄 수가 있습니다.
겨울에 벌거벗고 나가서 '아 추워라!' 하면서, 덜 추우려고 막 불 피우고 덜 피우려고 어디 뜀뛰기 하고 그러는데, 니트 하나 입으면 돼요. 그러면 덜 추워요. 파카 하나 걸치면 돼요. 덜 추워요. (구르고 도는 것은) 그런 지혜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에너지를 쓸데없이 소모하지 말고, 그 정도로 겨울 되면 따뜻하게 방한복 입고 나가야죠. 방한복 입는다고 생각하고 구르고 돌고 기지개를 켜면, 맨몸으로 겨울에 나가서 추위 피해보겠다고 열심히 애썼다가 모든 에너지 다 쓰고 따뜻한 데 들어와서 기진맥진해서 뻗어버리는 그런 일은 안 생겨요. 따뜻한 조건에 오면 딴 데 쓸 에너지가 있었어야 하잖아요.
그렇게 해서 에너지를 좀 함부로 쓰지 말자는 거고요. 내가 밥 먹고 나서, 적어도 간장을 거치고 신장을 거치고 해서 생긴 이 에너지는 함부로 안 썼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 에너지를 여러 가지 탐닉에 써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그럼 어떤 분은 그렇게 물어요? 대놓고 물을 수 있어요 그럴 때 아무도 안 물어요. 그럼 성(性)은요? 성은 애초에 스포츠 에너지로 전환돼 있는 겁니다.
성 에너지는 애초부터 스포츠 에너지예요. 그건 더 쓴다고 해서 무리해서 더 쓰지 않는 정도라면, 일상적인 평균 정도라면, 뜀뛰기를 안 하는 것처럼 오히려 안 하는 게 사실은 더 안 좋습니다. 스포츠 에너지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거 정밀한 에너지가 괜히 또 소비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시는 착각하시는 거예요.
내가 하는 기본적인 생각과 몸짓에 따라 에너지는 흐른다
아무튼 정밀한 에너지의 정체가 뭐냐? 다음 시간에 한번 얘기를 해야겠죠. 정밀한 에너지! 설명 드리자면 굉장히 쉽게 드릴 수 있고, 설명을 어렵게 드리자면 굉장히 어려울 수 있어요. 그런데 다음 시간에 한번 들어보시면 ‘어’하고 대충 짐작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얘기를 이상하게 꺼내 가지고 너무 시간이 빨리 끝나서 큰일 났는데 큰일 나면 질문을 받아야죠.
어떤 때는 원래 챕터가 두 페이지에 끝나기도 하고 네 페이지에 끝나기도 해요. 그러나 오늘 짧지만 여러분들이 잊어버리지만 않는다면 나름대로는 중요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 안에, 여기 이 선생님까지, 연세가 높으신 분들까지 아직도 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안에 있어요. 없는 분이 없어요. 다 계세요. 내일 모레 70인 선생님도 다 있어요. 아직 아직도 내 안에 소크라테스가 충분히 있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충분히 있어요.
꼭 예술가 이런 모습으로 드리니까 상대적인 인간 유명도의 문제인가 싶지만 아니고요. 자기 인생을 충분히 하나하나 터득하고 갈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아직 다 있어요. 그 에너지를 엉뚱한 데 쓰고 있다는 거에 대한 말씀을 드린 거예요.
그렇게 쓰지 마세요. 에너지 아끼세요. 영양 성분 같은 거 겨우 얻으려고 그러지 마시고, 그냥 먹던 대로 최대한 단순하게 드세요.
전라도 남원 같은 데 가서 한식을 시키면 이만큼 나와요. 심지어 그 자리를 떠나고 나면 뭐가 있더라를 두 사람이 있어 복기를 해도 잘 복기가 안 돼요. 가짓수가 많아서 그런 것인데, 그건 먹다 에너지를 소비 다해요. 음식도 많아도 5첩 반상이나 7첩 반상 거기서 끝내야죠. 그런데 그게 다 소비예요.
뭐든지 받아들이겠다고, 내 안에 과도화된 영양소로 받아들이겠다고 욕심 내는 순간, 그렇게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 얻으려고 하는 순간, 내 안에 축적돼 있어야 하는 소중한 에너지들이 너무 많이 소비된다는 것! 그런 걸 소비해서라도 얻는 게 좋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 여기 뭐 식품영양과 교수님 계실지 몰라도 그게 우리의 현재 식품영양학이에요.
영양소 부족해도 돼요. 내 사는데 영양소 부족해도 아무 문제 안 돼요. 영양소 부족한 거 탓하지 마시고요. 구를 만큼 구르고요. 돌 만큼 돌고요. 기지개 켤 만큼 기지개 펴면 회복 다 돼요.
에너지 쓰임에서 여전한 관성을 깨기
세상에 복구 안 되는 게 없고 복구되는 게 없어요. 마찬가지로 병으로 쳐도, 못 고치는 병이 없고 고칠 수 있는 병도 없어요. 에너지를 갖고 그런데 쓰려고 막 애쓰잖아요. 그분은 쉬운 병도 고칠 수가 없어요. 병에 당장 뭐가 좋다 그러니까, 그거 얻으려고 진짜 병을 고치는 데 쓰여야 하는 자기 회복의 에너지를 거기다 쓰고 있는 거예요. 그거 얻는 데 쓰고 있는 거예요. 그분이 고칠 수 있겠어요?
‘뭐가 좋대! 그거 좋대! 그거 먹는대!’ 먹으려면 소화를 하는 힘이 필요하잖아요. 그걸 얻으려고 에너지를 소비하는 그 에너지는 내 몸을 자가 복구시켜야 하는 에너지였어요.
내 몸을 자가 복구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갖다가 영양소 얻는데, 뭔가 성분을 얻는데 써버린 거예요. 그러면 고칠 수 있겠어요? 못 고치죠. 절대 못 고치죠. 우리가 그렇게 살아온 거를 인정하면 돼요. 그냥 안 하면 그만이에요. 오늘부터라도!
그런데 문제는 가스라이팅이라는 게 정말 무섭다는 거예요. 왜 무서우냐? 의식적으로는 그렇게 안 하려고 하실 거예요.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또 해요.
예를 들어서 어디 여행을 가잖아요. 쫙 미리 여행 정보를 수집해요. 어느 지역 가면 뭐 먹어야 되고, 뭐 먹어야 되고 다 에너지 소모예요. 그냥 눈앞에 있는 거 보고, 그걸 하나 눈앞에 탁 하고 터득하면 돼요. 뭐 하나 터득하러 가는 거예요.
옛날 화랑들이 그 산골과 험한 곳을 돌아다녔던 것은 뭔가를 보고 터득하려는 힘을 얻으려고 했던 거였어요. 이번에는 우리 화랑이 울진으로 가지 석류굴을 꼭 박아야 되는 필수 코스야! 가서 에너지 팍 쓰고. 얻어 오는 게 아니라, 소비하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뭘 하더라도 얻으려고 하지 말고 덜 쓰려고 하세요.
밥 먹고 방금 생긴 에너지를 써도 돼요. 이미 전환된 에너지가 있다는 거는 충분히 써야죠. 그게 어떤 에너지인가는 다음 시간에 하고요. ‘아! 아껴야 되는 게 뭐고, 막 써도 되는 게 뭐구나!’ 그 얘기는 다음 시간에 할게요. 그 얘기에 관련해서 오늘 물어보지 마세요. 질문하면 답 드리다가 다음 시간이 연장되니까요. 다음 시간에 그 이외 더 준비된 이야기가 없습니다.(문답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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