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ES→ 윤봉문 요셉성지 → 유섬이묘 → 거제.통영관광→ 통영 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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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유섬이 묘
유섬이는 호남의 사도라 불리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복자의 딸입니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할때 9살이던 유섬이는 거제도 관비로 유배를 당합니다.
거제부사는 유섬이를 거제읍의 한 노파의 수양딸로 보내었는데
품위가 넘쳐서 관노무리가 함부로 관비로 대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14세 정도의 나이때 평생 동정으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살기 시작해서
고을 사람들은 그 정절을 알고 '유처녀' 라 불렀습니다.
그녀가 동정을 지킨것은 오빠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의 삶을 본받은걸로 보입니다.
유섬이는 9살때 관노로 유배되어 1863년 71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는데
거제부사 하겸락은 그녀의 장례비용을 부담하고
내간리 송곡마을 뒤 현 위치에 안장합니다.
부사가 유배온 노비의 생애를 자기 문집에 기록하고, 제문까지 지은걸로 봐서
유섬이의 삶이 고결하고 존경을 받았음을 보여줍니다.
유섬이 묘 거의 다 왔을 때,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은
차도 들어가기 힘든 좁은 농로였다.
지나쳤나 하고 다시 돌아가서 천천히 와서 살펴도 역시 그곳을 가리켰다.
주위를 보니 길 건너편에 집이 한 채 있어 그리로 갔다.
가족인듯 몇 사람이 집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고구마를 담고 있었다.
유섬이 묘를 찾는 중이라고 하자 형제님이 '아! 유처자 묘' 하시더니
길가로 나와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100미터 더 가서 오른쪽 길로 가라는 것이다.
네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길은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좁은길이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그 집에 들러 고구마 한 상자를 구입했다.
작은 고구마를 구워놓은 것을 먹어보니 정말 꿀 고구마였다.
51. 복자 윤봉문 요셉 성지
지금은 거대한 공업 단지로 변해 버린 거제도의 장승포와 옥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몸을 누이고 있는 순교자 윤봉문
(尹鳳文, 1852-1888년) 요셉은 초기 한국 교회의 박해가
얼마나 극심하고 광범위하게 일어났었는지를 후손들에게 전해 준다.
옥포의 역사 안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겨레의 성웅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와 연결된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경상 우수사 원균이 그 해 4월 왜군과의 교전에서 패전해
73척의 배와 군사를 거의 다 잃고 노량으로 도망을 간 후에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그 해 5월 7일, 50여 척의 왜선을 포위 공격하여
그 가운데 21척을 불태워 임진왜란 후 처음으로 큰 승리를 거둔
유명한 옥포 해전의 현장이 바로 여기이다.
이곳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가 언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01년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두 명의 신자가
거제도로 귀양 왔다는 사실만이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의 모친 이윤혜이다.
기록에 의하면 황사영의 처 정난주(본명 정명련)는 제주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그리고 모친은 거제도로 귀양을 떠났다.
하지만 이윤혜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또 한 사람은 1801년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유항검의 막내아들 유일석이다.
유항검의 부인 신희와 큰아들 유중철, 며느리 이순이, 차남 유문석은 순교했고
딸은 흑산도로, 셋째아들 일문은 신지도로,
당시 세 살이던 막내 일석은 거제도로 귀양 갔다고 한다.
신유박해로 맺어진 거제도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졌다.
복음의 씨가 처음으로 거제도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복사였던 순교자 구한선(具漢善) 타대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 지촌리가 고향인
윤사우(尹仕佑, 스타니슬라오)가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사우의 가족은 양산 대청(현 부산시 기장면)에 숨어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제도에서 버드내[柳洞內, 현재 柳湖里], 박개[外浦], 덕개[德浦] 등을 거쳐
진목정(榛木亭, 현 거제시 옥포 2동 국산)에 정착한 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윤사우는 날품팔이와 필묵 행상을 하며 몰래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옥포에서 동수(洞首)로 있던 진진부(陣進富)를 알게 되어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신자가 된 진진부 요한은 윤사우의 둘째 아들인 윤봉문 요셉을 사위로 맞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
윤봉문과 부인 진순악(陳順岳) 아녜스 사이에서
아들 학송(學松) 루카와 딸 송악(松岳) 가타리나가 태어났다.
1852년 경주 인근에서 윤사우와 막달레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윤봉문 요셉은 나중에 부친이 함안 지역으로 가서 정착했지만
형 윤경문 베드로와 함께 거제도에 계속 남았다.
그는 ‘거제의 사도’로서 형과 함께 신자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전교에 힘쓰는 한편 자신의 수계(守戒)에도 열심이었다.
1887년 겨울 병인박해 후 처음으로 당시 대구 본당 초대주임이었던
로베르(Robert, 金保綠) 신부가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 거제도를 방문했을 때
윤봉문은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고 교리교육과 공소예절을 도왔다.
로베르 신부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했다.
그 해 거제도에서는 윤씨 형제가 가르친 15명의 어른이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그런데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떠난 지 몇 달 되지 않은
이듬해 봄 거제도에서 박해가 일어났다.
당시는 한불수호조약으로 인해 공적인 박해가 끝났지만
지방 일부에서는 사사로운 탄압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박해는 통영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체포하여
개인적인 탐욕을 채우려고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윤봉문은 다른 교우 2명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 혼자만 통영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대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비열하게 자유를 얻느니
감옥이 더 낫다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몸값으로 100냥을 내라는 요구를 거절했음에도
다행히 풀려날 수 있었다.
그 후 이웃에 살던 잔반(殘班) 하나가 돈을 갈취하려고
그를 잡아 돈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포졸들에 의해 읍의 진영으로 이송되었다.
80냥을 주면 풀어주고 새 신자들이 평온히 살도록 해주겠다는 말로
유혹해 할 수 없이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얼마 후 부사의 체포령을 갖고 포졸들이 다시 왔고,
이에 형 경문이 관아로 끌려가 곤장을 맞고 이틀 후 읍 밖으로 쫓겨났다.
그러자 처음에 윤봉문을 체포하고도 돈을 빼앗지 못한 통영 관리가
영장을 찾아가 윤씨 형제에 대한 체포령을 받아냈다.
결국 윤봉문은 다른 두 명의 신자와 외교인 몇 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가옥은 약탈당하고 소 22마리도 빼앗겼다.
영장 앞에 끌려간 그는 천주교인임을 고백하며
외교인은 풀어주도록 요청했다.
수차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자 영장은 대구 관찰사로부터
“천주교인은 모두 도둑들이니 진주로 보내어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진주로 끌려가는 동안 굵은 칡으로 발뒤꿈치를 꿰어
살이 뭉개지는 고통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큰 소리로
천주십계와 성교사규(聖敎四規)를 외웠다.
결국 1888년 4월 1일(음력 2월 20일) 진주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7세였다.
순교자의 시신은 진주 비라실[長在里] 공소회장이 거두어
공소 뒷산에 안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베르 신부는 교구장에게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운 좋게도 이 거룩한 순교자를 친밀하게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열심한 교우였으며, 비신자들의 회개를 위한 열성이
가득하였다는 것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벌써 그에게 눈길을 주어 여러 섬에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서
저를 돕게 하려고 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가셨지만,
그것은 당신의 충실한 벗들에게만 주시는 영광을
그에게 주시려 하신 것입니다.”
1898년 옥포 교우이며 부산 본당 우도(Oudot, 吳保綠) 신부의
복사로 있던 성낙진 바오로는 유족들과 함께
순교자의 유해를 거제도로 모셔와 진목정 족박골(足泊谷)의 선산에 안장했다.
그 후 진목정의 외교인들은 천주학쟁이가 죽은 동네 이름이라 해서
‘진목정’을 ‘국산’(菊山)으로 고쳤고,
후에는 지금의 옥포(玉浦)로 다시 변경되었다.
거제도의 신자들은 1978년 9월 24일 거제의 사도
윤봉문 요셉 순교 90주년을 맞이하여 순교자의 무덤에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피와 땀으로 거제도에 믿음의 씨앗을 뿌렸고
오늘의 신앙인들이 그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거제·통영 지역의 본당들은 윤봉문 순교자에 대한 현양 사업과 함께
묘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윤봉문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곳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협소한 산중인 관계로 순례자들이 찾기 어렵고,
후손들의 선산이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 묘소를 이장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마산교구 거제도의 성당들은 2000년 9월
순교자의 묘소를 이장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장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여러 후보지를 검토하고 또 여러 이유로 유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일운면 지세포리가 선정되었다.
이 부지는 본래 서울대교구가 신협 연수원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마산교구에 기증한 곳이었다.
마산교구는 순교자 유해 이장에 관한 거제지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교구장 교령과 훈령을 발표하고
2013년 4월 20일 순교자 유해를 옥포에서 지세포리로 이장하였다.
이장을 위한 발굴 작업을 통해 온전히 보존된 순교자의 유골을 확인하고,
의학전문가로부터 오른쪽 골반에
장독(杖毒)에 의한 골절로 추정되는 상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앞으로 마산교구는 지세포리의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에
순교자 기념성당과 교육관, 사제관과 수녀원, 피정의 집과 식당 등을 건립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와 순교자의 영성을 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개발해 나갈 계획이다.
이 곳을 끝으로 1차 순례여행을 끝났고 이제부터는 여행이다.
전주에서 하루, 대구에서 하루를 줄였기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여행할 시간을 벌었다.
당장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않아
아쉬움도 남지만 지나고나면 모든 일이 잘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깨달았다.
성실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되 결과는 주님의 뜻에 맡기고
겸허히 받아들이면 된다는 사실을~~
거제 바람의 언덕
바람의 언덕을 갔다 오니 기다리던 아내가 커피 한 잔하라고 했다.
금새 상점 사장님과 친해져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하면서 미역을 구입했다.
사장은 가끔 제주에 골프치러 온다는 이야기를 하며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아내가 바닷바람에 옷깃을 여미자 사장님은 자기가 매고있던 스카프를 풀어
아내에게 건넸다. 자기는 집에 많이 있어서 선물로 주는 것이라며~~
이세대에 흔치않은 광경을 오늘도 보았다.
"네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라는 성경말씀이 생각난다.
이 세상에는 이웃이 필요한 것을 바로 실천에 옮기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통영 한려수도조망 케이블카
한려수도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는 문구를 보고
통여 케이블카를 타러 갔다. 학창시절 남산 케이블카를 탄 후 처음이다.
맑은 날씨였지만 미세먼지인지 약간 뿌연 날씨때문에 선명하지는 못했지만
전체적인 조망을 할 수는 있었다.
통영 동피랑 벽화 마을
'비탈'을 통영 사투리로 '비랑'이라고 하는데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명칭이다.
즉, 동피랑은 동쪽 벼랑이라는 뜻으로 통영시 동쪽에 동호동,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중앙어시장 뒤편 언덕 바위 피랑 지대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중식(통영중앙 활어시장)
동피랑 벽화마을을 둘러보고 바로 아래에 있는 통영중앙 활어시장에서 횟감을 사서
옆에 있는 식당으로 가지고 가서 약간 늦은 점심을 먹었다.(오후 2시)
위에 차려진 회도 다 먹지를 못하고 남은 것과 함께
조금 전 시장에서 팔지 못하고 계신 할머니에게서 조개류를 2만원어치 구입해서
바로 숙소(통영 ES콘도) 로 가지고 갔다.
저녁에 조개를 삶아서 맥주 한 잔하고
남은 것은 냉장고에 보관하여 다음날까지 먹었다.
해물을 좋아하는 식성이지만
너무나 많은 양에 질려 한동안 회생각이 나지 않을 것 같다.
낮잠 한숨자고 일어나 4시 반경 콘도주위로 산책에 나섰다가
하마터면 길을 잃을뻔 했다. 물어 물어 해 지기전 숙소에 도착했다.
늦게 체크인하고 아침 일찍 나가 콘도주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는데
고생은 했지만 산책하면서 주위 풍광을 즐길 수 있었다.
ES리조트는 제천, 제주, 통영 모두 가보았는데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시설물을 조성한다는 경영주의 철학이 훌륭하다.
위 사진들은 산책하면서 촬영한 것임.
저녁에 일정을 정리하면서 아내가 자기 책자에 있지만 내 책자에는 없는
신석복 마르코 묘소를 빠트린 것에 대해 다시 가자고 말은 못하고
다음 부산 올 기회에 방문한다고 하며 고민중인 것을 알았다.
내일 남해 일정을 포기하고 1시간 40분 되돌아가서 방문하려고 생각하는 순간,
언듯 내 책자에서 본 기억이 나서 다시 찾아보았다.
바로 명례성지로 신석복 마르코 묘가 옮겨졌다는 내용이었다.
2번 방문(아내 지갑 찾으러 간 것 포함)을 했으면서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명례성지 순례도장을 받았기에 당연히 따로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이 되었고 내일은 관광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