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들뢰즈의 DR에서 헤겔과 라이프니츠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을 읽었다 (DR, 41; DR, 44-6). 무한대와 무한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무한과 유한에 대해. 어떤 지점에서 레비나스를 읽게도 될 것이다. 지금은 들뢰즈와 화이트헤드를 함께 생각하면서. 특징적인 두 형용사에 대해서 – ‘organic’과 ‘orgiastic.’ 니체의 용어를 일반화해서 –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구별. ‘유기적’이라는 번역에 대별되는 orgiastic의 번역은 어떤 것이 좋을까? 우리말로 ‘망아(忘我)적’이라는 단어가 제시되었다. 지금 읽고 있는 대목에서 ‘유기적 재현’과 ‘망아적 재현’이. ‘망아적’과 비슷한 단어로는 ‘몰아적’이라고. 그렇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황홀적’이라는. 어떤 경우에는 ‘주신제적’ ‘주연적’ 같은 단어도. 디오니소스와 관련하여.
그런데 ‘org‘를 기본으로 하는. ‘일’이라고. 그래서 organism과 orgasm이 함께. 그래서 ‘orgy’는 성적인 함축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만사(萬事)를 가리키고. 그래서 술판만이 아니라 축제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경계가 잠시 소실되는 경지. 그래서 ‘주연적’이나 ‘망아적’이 나쁜 번역은 아니지만, 어쨌든 ‘제정신(organism)을 잃을 정도로 황홀한 상태에 빠진’을 가리키는 단어일 것이다. 그런데 두 단어에 공통으로 사용된 ‘org’는 사건(event)과 해프닝(happening)을. 그리고 DR에서 ‘극장(theater)’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연극 부분에서 나오는. 그리고 광기(madness)에 대한 언급도. 파괴와 창조가 뒤섞여. 그래서 orgiastic은 organic의 입장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혼잡이.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 유교를 창건한 삼인방인 공자와 맹자와 순자의 사유에 두드러진 사상인 정명(正名)은 들뢰즈가 organic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래서 orgiastic representation은 유기적 재현에서는 억눌리고 비틀어진 채 가까스로 살아남은 차이 – 미치광이나 광대처럼 – 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축제 자체가 그런 면을 보인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을 참조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말로 ‘망아적’이라는 번역은 ‘자아의 순간적인 소멸’이라는 정신분석학적인. 그러나 folk knowledge에서는 ‘제정신을 잃은.’ 들뢰즈의 극장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이해하는데. 전통적인 사회에서 광대극의 역할에 대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릿광대의 역할에 대해서. 유기체(organism)의 폐쇄화와 그에 따른 숨박힘 – 또 다른 니체적인 테제, 병원과 감옥 – 을 ad hoc적으로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와 관련하여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유기체 철학’이라고 하는 경우에 읽는 방식에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유기적 재현의 철학자로, 망아적 재현의 철학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만약 화이트헤드를 망아적 재현의 철학자로 본다면, 들뢰즈가 organic과 orgiastic을 구별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해서는 안된다. 또는 그렇게 강조되는 경우에 나는 들뢰즈가 아니라 화이트헤드를 선택한다. 온갖 보수적인 해석을 잘 알고 있지만, 『논어』에 나오는 ‘온고이지신’은 형이상학의 근본 원칙이다. 그래서 organ과 orgy를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정명제와 반명제라고 할 수 있다. 내게 중요한 점은, organ이 극도로 강조되면서 orgy의 창조성을 완전히 말살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런데 창조성과 유리된 orgy는 찰나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organ의 창조 또는 창발에 중요한 기여를 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organ을 반동적으로 경화시키는 작용을 할 때가 많다.
그래서 헤겔의 변증법을 수용하는 – 마르크스도 포함하여 – 사유의 입장에서는 정명제의 출현이 예고되는가가 몹시 중요하다. 모순과 비판과 부정 따위의 특징을 가지는 반명제의 궁극적인 가치는 정명제의 실현 가능성에 달려 있다. 이 경우에 정명제의 특징은 organic이고, 반명제의 특징은 orgiastic이라고 할 수 있다. 유기적 재현에서는 the same이, 망아적 재현에서는 the different가 부각된다. 이를 앞서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할 때, ‘비아’가 강조되면서 자아를 초극하는 가능성이 나타난다. 불교의 교의를 사용하면, 돈오와 점수는 모두 질적인 변화의 순간을 지적한다. 양변질화의 법칙은 다윈 이후 진화론과 잘 어울린다.
아직 질적으로 다른 형태로 실현되기 전이라고 해도 동일한 형태로 보이지만, 거기에는 창조적인 차이가 씨앗처럼 자리를 잡아서는 the same이 포착할 수 없는 또는 무시할 수 있는 차이라고 여겨서는 내버려둔다. 그래서 the same의 입장에서는 충실한 반복이라고 파악되지만, the different의 입장에서는 반복은 창조성을 보존하는 그릇으로서, 그래서 ‘온고이지신’을 아주 비틀어 해석하면, ‘온고’는 옛것을 충실하게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성장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거기서 서서히 자란 것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이와 관련하여 『장자』 의 처음에 나오는 곤과 붕에 대해서. 이런 경우에 반복은 차이의 묵살이 아니다. 성경의 메타포를 사용하면 ‘아직 때가 아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은 단번에 출현하지 않고, 오랜 세월을 기다려서 조건이 무르익어서. 내 생각에 19세기 사유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 시기에 ‘과정(process)’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는데, 과정은 태어나서 자라는 기간을 필요로 한다.
지금까지 내가 쓴 것을 좀 정리하면,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키워드가 필요한 것은 차이 x가 창조성의 계기인 한에 있어서, x가 성장하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x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인 것은, x를 온전히 존중하는 시스템이 실현되는 조건이 아직 아니어서. 아마도 맹자의 조장(助長)에 대한 비판을 참조할 수 있을 듯. 그래서 아직 x가 새로운 시스템에서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지만, x가 말살되지 않고 보존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말살되지 않은 보존은 들뢰즈의 반복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어떤 때에, 다행한 때에, 우연히(?) x가 기존하는 시스템 A에 출현했다고 하자. 이 시스템 A는 x를 암적인 존재로 여겨서는 말살할 수도 있고 일종의 장식처럼 사용할 수도 있고. 전자의 경우에 x는 새로운 시스템 B를 낳을 힘을 상실한 채. 그래서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x가 출현하지 않은 A와 다를 바가 없는. 이것을 도식적으로 말하면, A – A(x) - A이다. 물론 한번 출현한 것이 전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지는 않지만 무시할 정도로 미미한 영향을 미쳐서. 내 생각에 이 경우는 반복이 아니다. 들뢰즈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프로이트에게서 차용한 죽음충동의 작동이다. 더 단순한 조직으로의 후퇴, 즉 복원이다. 들뢰즈가 염두에 둔 반복은 이런 도식일 것이다 – A – A(x) – A(x) … B. 시스템 A가 시스템 B로 바뀌는데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릴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식에서 요점은 창조적인 차이인 x가 보존된다는 점이다. 들뢰즈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비판하면서 생산적인(productive) 무의식을 강조하는 경우에, 오랜 세월에 걸쳐 반복하는 동일한 시스템에 억압된 차이 x의 궁극적인 특징이 창조성이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의 계기. 장기간에 걸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시스템 A에서 차이 x는 어떻게 보존되는 것일까? 상당히 많은 형태로. 축제로, 광대극으로, 예술과 문학으로, 종교로…. 그래서 A를 세밀하게 연구하는 사람은 매우 일관되고 체계적인 유기적 재현의 변두리에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는 예외적인 사건들이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전에 읽었던 들뢰즈와 가타리의 AO에는 몰라르적인 조직과 몰레큘라적인 조직에 대한 비교가 나오는데,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들의 활용일 수 있다. 서로 다른 용어가 서로 다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