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을 패며
삼일절 연휴기간에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화망마을*에 내려갔다.
늙은 어머니한테 며느리, 두 손녀, 두 손자를 보여드렸으니 큰 선물이 되었을 게다.
봄이 오는 이른 길목의 바람은 다소 매서워도 이미 한풀 꺾인 바람새이고 보면 이런 추위는 참을 만했다.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데리고 들녘에 나가 '여기는 아버지의 논이다'라고 알려주었다.
야산 산록(山麓)에 서 있는 큰 비석,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만든 세천비(世阡碑)*를 보여주며, 10여대 자손으로 이어지는 입향 선조의 묘소도 설명해 주었다.
두 개의 산(구룡리 상장산*, 서낭댕이 앞쪽 산 죽청리 소재)에 오르내리며 두 아들에게 성묘를 시키니 막내아들이 물었다.
'아빠. 보았어?'
'아니... 벌써 300년 전의 사람이야.'
대답하면서 어린 두 아들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없으면 형인 네가 대신하고, 형이 없으면 막내인 네가 대리해야 한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고향에서는 아빠가 우선 산소를 돌봐야 한다.'
두 아들에게 말을 하였으나 철없는 아이들은 아비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을 게다.
지난해 여름철 고옥(古屋)의 뒷담장을 고치려고 베어냈던 참죽나무(쯍나무), 벽오동(碧梧桐), 개오동, 감나무의 통나무를 꺼내서 톱으로 켜고, 도끼로 장작을 팼다.
두 자 또는 석 자 길이의 통나무를 수직으로 세워놓고 무거운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가 나무테의 한가운데를 겨냥하여서 내리찍으면 단 한 번에 시원스럽게 갈라진다. 짝! 그 소리 또한 시원하다.
장작을 패는 것도 하나의 기술이며 기능이다. 숙달된 훈련과 일상의 반복되는 과정에서 몸에 배는 것이다. 힘과 절도 있는 정확한 자세와 자신감이 일치가 되어야 하며, 직통으로 일격을 가해야 한다. 어설프고 미숙한 자세로 나무결을 정통으로 찍지 못하고 헛군데를 찍으면 빗나간 도끼날로 오히려 자신의 발등을 찍을 수도 있다. 또한 힘이 약하면 도끼날이 나무에 박혀 도끼날을 빼내기도 여간 힘이 드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또 장작을 패는 방법도 여러 가지이다. 우선은 옹갱이가 없는 통나무를 고르는 일이며, 둘째로 통나무 밑둥아리 하단의 나무곁을 찾아내어 끝 부분부터 찍어서 틈새를 조금씩 벌려놓고 다시 그 틈새를 겨냥하여 가격하거나 연타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완전히 빠개지 못하는 경우에는 틈새를 살짝 벌렸어도 도끼날을 뽑는 즉시 오므라들어 그 틈새가 없어진다(메워진다). 따라서 도끼날을 뽑아내기 이전에 그 틈새에 나무쐐기를 꽂아두면 틈새는 더 이상 오므라들지 못한다. 이런 연후에 다시 가격을 하면 용이하게 나무를 빠갤 수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장작을 수직으로 세운 뒤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검도를 하듯이 정통을 내리찍는 방법이다. 수직으로 세웠으니 나무옹이도 없고 또 도끼의 무게가 그대로 한 군데에 집중되므로 나무 패기가 수월하다. 그러나 도끼가 나무를 제대로 찍지 못하고 허공을 찍으면 -헛손질을 하면- 자신의 정강이를 찍을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양쪽 다리를 넓게 벌려야 한다. 실수를 하더라도 도끼날이 양쪽 가랑이 사이에 빠져나가게 해야 한다. 요는 신중함이다.
어느 방법이든 간에 절도 있는 힘과 정확한 안목 그리고 자신감이다. 많은 훈련만이 솜씨 좋은 일꾼으로 한몫하게 된다. 연장 도구가 자기 체중에 알맞아야 하고, 또 산에서 나무를 베어내는 산판일 경험과 일상의 반복으로 체질화되어야 한다. 요는 절도 있은 일상의 훈련을 요한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통나무를 빠개여 불쏘시개로 만들어서 야외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아비야. 그 쯍나무 장작은 나무가 단단하니 창고에 넣어두면 천년이라도 갈 게다. 내일을 기약 못하는 나는 생전에 쓸 일이 없으니 내 死後에 화톳불로 쓰고, 네가 퇴직한 뒤 시골에 내려와서 살면 불 때거라. 십여 년 전에 막내사위가 며칠간 패서 쌓아둔 장작도 아직도 넉넉히 남아있으니 당분간 걱정 없을 게다."
말씀하시는 어머니. 팔십을 넘긴 노모의 눈빛은 힘이 없어 보였다.
나무는 나무대로의 특성이 있다. 여인의 속살처럼 수피(樹皮)가 흰 벽오동(碧梧桐)와 개오동의 결은 아주 가볍고 부드럽다. 냄새 또한 특이하고 毒性이 강해서 해충(害蟲)이 기피하는 수종들이다.
옛적에는 딸 아희가 태어나면 집 곁에 오동나무 묘묙을 심었다가 시집갈 무렵에는 이를 베어서 장롱(欌籠)을 만들 만큼 성장이 아주 빠르다. 이에 반하여 참죽나무(쯍나무)는 성장이 더디나 나무의 무게가 무겁고 단단하며 또 수피(樹皮)가 선지 핏빛이다. 고급 장목(高級欌木)으로 애용된다. 이들에 비하여 감나무는 나무가 견고하지도 못하고 수형(樹形)도 시원찮고, 수피 또한 거칠어서 大木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단지 불쏘시개용으로나 족하다.
오래간만에 장작을 패는 사내가 되었다. 거친 짐승처럼 野性의 거친 손아귀로 도끼자루를 단단히 쥐고, 손바닥에 침을 뱉고는 옹골차게 내리찍는 솜씨는 오랜 세월 저 너머의 젊은 날에 竹刀로 검도 연습을 하며 후려치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러나 세월은 어쩔 수 없었는지 팔뚝이 이내 저려오기에 당황했다.
큰딸 지아가 장난 삼아 도끼를 들고 아비 흉내를 내어서 겨우 한번 찍어보고는 제 딴에는 대견해서 학교에 가면 친구에게 자랑하겠단다. 키가 멀대같이 커서 조금은 허약해 보이는 큰아들은 아예 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언제인가 나중에 제 팔뚝에 심이 들고 처자식을 거느리면 장작패기와 같은 거친 시골생활을 조금은 이해하리라 믿고 싶다.
도회지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도 시골에 본적(本籍)을 두었으니 장작을 패는 아비를 조금이라도 닮았으면 싶다. 자식들이 첨단과학(pc)과 도끼날처럼 무딘 전근대적인 생활(삶)도 함께 익숙했으면 하는 게 소박한 바람이다. 장작을 패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는 날이 되었다.
1999. 3. 3.
* 화망마을 : 충남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에 소재. 곶뿌래((花望)의 한자식 이름
1751년(조선 영조 27년)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머물러 살기 좋은 可居地'로 기록된 남포 화계(藍浦花溪)
* 남포 오석(藍浦烏石) : 보령시 웅천읍 동부지역과 성주면 성주산에서 캐는 검은색 돌(규산이 풍부한 유리질의 화산암).
재질이 단단하고 조직이 치밀해서 비석을 비롯해 벼루·상석 등의 재료로 널리 쓰임
* 세천비(世阡碑) : 선산 입구, 선산 근처에 세워 문중의 선산임을 나타내며, 선조들의 치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는 비석
* 상장산(상장산(上長山, 상정산이라고도 함) : 웅천읍 구룡리 화망에 소재하며, 1970년대 산의 남쪽 하단에서 백제 고분 석실을 발견, 2016년 이 일대의 야산을 모조리 깎아내려서 웅천일반산업단지로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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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2. 11. 17. 목요일.
퇴직한 지도 벌써 만14년이 흘렀다.
시골로 내려갔고, 함께 살았던 어머니가 아흔일곱 살 나던 해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
그 추운 날 서낭댕이 앞산 아버지의 묘에 합장하고는 그참 서울로 되올라온 나.
서울에서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없기에 늘 빈둥거리며...
고작 컴퓨터나 켜서 인터넷 뉴스나 보고, 개인카페에서 회원들의 글이나 읽었다.
오늘도 그랬다.
'삶의 이야기방'에는 하루에 1건만 글 올릴 수 있기에... 오늘은 이미 한 건을 올렸기에...
별수없이 '수필 수상'방에 올린다.
산문글이기에 더욱 그러하고.
요즘 늦가을 날씨인데도 제법 맑아서, 온화하지요
오늘 오후에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로 산책 다녀왔지요.
만추 늦가을이 자꾸만 짙어지대요.
낙엽은 떨어져서 뒹굴고, 텅 빈 왕벚나무 가지는 더욱 을씨년스럽고요.
첫댓글 보기에 쉬워 보이고 재미있어 보여도 막상 해보면 경험이 바탕된 노하우가 필요한 일들이 많더군요. 장작패기에도 나무에 대한 이해와 힘 조절, 자세, 요령등 여러가지들의 박자가 맞아야 하네요.
글 따라가며 박진감 있게 읽었고, 최윤환님의 바람처럼 자제분들이 세대를 아우르는 조화 속에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고등학생일 때 외가에서 나뭇짐을 진 외숙모의 지게를 우습게 보고 대신 졌다가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중심잡기 힘들어하던 날이 생각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지게질... 그거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저는 시골 태생인데도 지게질은 정말로 서툴렀지요.
한쪽으로만 무게가 쏠려서 삐빡하게 짊어졌기에 힘은 남보다 곱절이 더 들어도...
모든 일은 다 그러하겠지요.
오랜 경험과 숙련으로 길들여져야 전문성을 지니겠지요.
장작 패기가 쉬운 일이 아니네요.
장작패는 요령에 대하여 잘 적어 놓으셨는데
요즘은 장작 팰 일이 각 가정에서는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글이지만
성의를 다하여 글을 올리셨는데,
할 수 없이 올렸다는 글의 뉘앙스가 좀 거시기 합니다.ㅎ
님은 고향에 대한 애향심이 많은 것 같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장작패기....
시골이라도 기름보일러를 설치해서.. 장작불은 특별한 경우에나 피우겠지요.
예전에는 장작을 때서 구들장을 뜨겁게 달궈서 그 추운 겨울밤을 넘겼지요.
한지로 바른 문풍지가 파르르 떨어도 방바닥이 뜨근뜬하면 두꺼운 이불을 덮고는 긴긴 동짓달도 보냈지요.
서해안 산골마을의 제 시골집.
바깥창고 안에는 수십 년에 장만한 장작들이 아직도 첩첩히 쌓여 있지요.
재래식 부엌을 없애고 유류 보일러를 설치했기에 장작을 불 땔 수도 없는데도 장작은 그득히 있지요.
이 댓글을 달면서 무거운 도끼로 장작을 패고 싶군요.
저는 글 올릴 때에는 대체로 삶의 이야기방에 올리지요.
수필방에는 올리기가 좀 그래서요.
위 글도 그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