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22. 11. 21. 월요일.
아름다운 5060카페 '자유게시판'에 백두2 님의 '치국평천하'의 제목으로 남한산성에 관한 글과 사진이 올랐다.
치국평천하가 절실한
역사의 현장
남한산성
인조시대
청과 끝까지 싸우자는 주장과
우호적으로 지내자는
주장이 맞서
내가 사는 서울 송파구 잠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성남시 남한산성.
나한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게 하는군요..
남한산성에 관한 내 글이 있기에 퍼서 여기에 올립니다.
그냥 읽어주시면 고맙지요.
남한산성 가는 길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은요?'
하고 등산객한테 물었다.
서울 송파구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 동쪽에 있는 산인데도 산성을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물었다니...
내가 송파구민이던 때도 있었는데 시골로 낙향한 뒤로는 수도권 지리가 생판 낯설기만 했다.
오늘 아침나절. 아내가 뜬금없이 남한산성에 가서 점심밥 먹자고 제안했다.
밥 한 끼 먹으려 남한산성까지? 갈 필요는 없으나 아내한테 바람이나 쐬 주려고 대답은 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반.
인도사위가 온다며 기다린단다.
왜?
열두 시가 지나서야 아내, 큰딸과 인도사위, 막내아들, 나 다섯 명이 장도에 나섰다.
막내아들이 송파대로를 타고 성남 쪽으로 내려가다가 전철 복정역 근처에서 좌회전.
남한산성으로 가는 왼쪽으로는 새로 주택단지가 들어서는지 많은 아파트가 들어찼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한산성 이정표가 보였는데도 그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지 않은 채 직진하여 성남시 은행동 쪽으로 나갔다.
왜 직진하지? 의아스러워서 도로변 주변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내가 차를 몰고 남한산성에 가는 주변상황이 몇 년 만에 아주 많이 달라졌다.
막내아들이 성남시 수정구 은행동 근처의 지리를 잘 아는 듯해서 나는 믿었다. 처음서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는 느낌이 왔는데도 아뭇소리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전혀 엉뚱한 곳에 차는 멈췄다. 더 나아갈 수가 없는 막다른 곳. 산성공원 주차장. 생판 모르는 곳.
'아니 남한산성 주차장을 모두 걷어내고 새로 건물을 지었나?' 하는 의아심도 들었다. 관리사무소가 보이기에 지도를 얻었다. 남한산성 등산안내도. 안내지도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내가 익히 알던 지리가 전혀 아니었다.
전혀 엉뚱한 곳에 주차했다는 뜻.
'남한산성 가는 길은요?'
등산객한테 물었더니만 산성공원 위쪽에 난 작은 도로를 가리켰다.
'얼마쯤이면 산성에 도착할까요?"
'걸어서 30~40분 걸리겠지요.'
라는 대답을 들었으나 나로서는 감이 안 잡혔다.
다시 다른 분한테도 물었다.
'남한산성 가는 길은요?, 혹시 왼쪽으로 올라가는 길 차도가 있습니까?'
'예, 왼쪽으로 난 차도를 따라가다가 우측으로 방향을 트세요. 터널이 나올 겁니다.'
터널이라는 단어에 나는 또 고개를 갸우뚱 했다.
남한산성에 무슨 터널이 있어? 성문을 통과해서 내려가면 주차장에 곧 도착하는데...
내 기억으로는 터널은 전혀 없었다.
성남시 수정구 은행동 민속공예관 건물이 있는 주차장에 파킹한 차를 빼낸 아들에게 지시했다. 차의 방향을 돌려서 길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우측에 난 산길로 차를 몰라고 말했다.
차는 서울 쪽으로 향했다. 산길을 새로 내고 있었다. 좌우로 시멘트 옹벽도 치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랬다.
내가 예전에 차로 몰고 오르던 삼각교차로 되돌아 나와서야 차는 좁은 산로를 따라 꼬불거리면서 오르기 시작했다. 굽이 돌 때마다 아찔한 낭떨어지가 수시로 나타났다.
오래 전의 일이다. 아내는 운전연습 주행코스로 남한산성 길을 택했던 것이 기억나는지 당시를 회상했다.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 가파르고 굽은 길은 양의 창자(내장)처럼 구불꼬불거렸다. 초보운전자가 주행코스로 이 길을 택했으니 간이 조마조마 했을 게다. 그만큼 위협하다는 뜻.
이 길 맞아? 하는 의심이 자꾸만 들었어도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쩌다 보니 터널이 보였다. 터널 속을 빠져나가면서도 난감했다.
'이거 남한산성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광주 쪽 팔당댐 쪽으로 내빼는 거 아녀? '
이런 의심과 걱정이 들 때서야 남한산성 주차장 모습이 내려다 보였다.
제대로 찾아왔군 하면서 안심했다.
주차장 안에 파킹했다. 하루 종일 주차해도 1,000원이란다. 예전에도 그랬는데... 곧바로 곁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섰다.
산채 비빕밥 등 여러 종류의 밥을 시켰다. 다섯 명이 각각 식성대로. 인도사위가 지갑을 꺼냈고, 이에 질세라 아내는 자기가 쏘겠다고 자청했다. 좌상인 내가 식사대를 지불해야 하는데도 서로 돈을 내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나는 가만히 있었다. 아내와 큰딸이 문 열고 나갔으나 곧 큰딸이 들어와 불불거렸다. 아내가 큰딸을 뒤로 밀어부쳐서 쓰러뜨린 뒤 그 틈을 타서 식비를 먼저 지불했다고 말했다.
남한산성 터에는 행궁 등 예전에 없던 궁궐 건물이 많이도 들어섰다.
또 만해(卍海) 한용운의 초가(草家)도 처음으로 보았다. '님의 침묵'이란 시를 쓴 만해의 생가가 왜 남한산성 안에 있어야 하는 지가 의문이다. 생가는 충남 홍성군 결성면에 있다. 홍성에서 보았던 생가와 성안 넓은 터에 위치한 생가는 초가형태로서 얼추 비슷했다. 만해는 일제강점기의 시인, 승려,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선언문 33인의 한 분이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인데 왜 여기에?
막내아들과 함께 수어장대로 올랐다.
수어장대에 거의 다 올랐을 때 길게 늘어선 성벽이 보였다.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건너다 보였고, 가까이에는 송파구 잠실 롯데월드 신축 중인 고층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서울 동편, 하남시 등의 조망권이 확 터졌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에 백제부터 한성을 지키는 요새였다.
남한산성의 상징인 수어장대.
청량산(471m) 정상에 있는 군사 지휘소이며, 관측소인 누각이다.
수어장대 축조에는 슬픈 야사가 전해진다. 축성담당자였던 이희장군은 건설자재 착복 비리 누명을 쓰고 처형당했고, 그의 아내는 강물에 투신하였고, 수어장대 마당 끝에 있는 매바위에 대한 내력도 설명했다. 청량당 사당에 이에 대한 설명문이 짧게 있다.
1636년 병자호란.
12월 28일 청나라 태종의 군사 12만 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5일 만에 넘어 조선으로 침입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했으나 그다지 영민한 왕이 아니었던 인조. 남한산성 안으로 피신했으나 산성의 높이가 아주 낮고, 성을 에워싼 부지면적이 적어서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남한산성 병력은 1만 2천 명. 식량은 2개월분 밖에 비축 못했다.
추운 겨울철. 청군은 구태여 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포위만 했다. 그런데도 성 안에서는 군량미가 떨어지고 마실 물도 고갈되고, 나중에는 성안의 민간인은 죽은 사체를 몰래 뜯어 먹었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그 자체가 오판이었기에 불과 47일만에 항복했다.
서문으로 빠져나와 현재 송파구 잠실벌 삼전도(三田渡, 현 잠실아파트 바로 앞 동네) 돌에 머리를 짓찧어 조아리며 항복했다는 슬픈 역사를 들려주었다. 삼학사와 함께 청으로 끌려간 효종의 비사(悲史)도 들려주었다.
삼학사는 결사항쟁을 주장했던 홍익한, 윤집, 오달제 3인이다. 항복 후 청나라에 끌려가서 참형을 당했다. 우국충절한 충신들 혼을 모신 사당이 현절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갔고, 나중에 환국했으나 세자는 2개월 후에 죽고 봉림대군이 왕상에 오르니 효종왕. 주화파 최명길의 외교가 성공한 것일까? 3학사의 주전은 명분만 남은 것일까?
지금 21세기 한국은 4대강국의 틈에 끼었고, 또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다. 이런데도 국내에는 국사 국정화(國史 國定化)는 안 된다며 국사교과서 문제로 나라안팍이 크게 시끄럽다. 1637년 겨울철 병자호란처럼 찬반론이 엇갈리고 있다.
역사의 진정한 교훈은 무엇일까? 누가 옳은지, 누가 더 오른지는 더 생각해 봐야겠다.
수어장대 마당가에 선 큰 아름드리 나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리대통령이 1953년에 식재했다는 기록을 새긴 기둥돌은 정말로 질이 나쁜 싸구려 돌맹이었다. 친일과 독재정치를 펼치다가 1960년 4월 학생의거로 대통령 직위에서 쫒겨났던 리대통령이었기 때문일까. 장석의 빗돌이 아주 초라했다. 리승만이라는 이름도 없고 리대통령이라고만 새겨져 있었다.
내가 아는 체하면서 대충대충 설명하는 남한산성 이모저모를 아들이 얼마쯤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
수어장대에서 남쪽 남문(지하문) 쪽으로 산길 타고 하산했다.
남한산성에서 머문 시간은 매우 짧았다.
아내, 큰딸 내외는 구두를 신고 왔다면서 산행 중도에 작파하였다. 아내는 신자답게 천주교 성지를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이곳이 천주교도의 처형지였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천주학을 믿는다는 이유로 천주쟁이 교인을 처형했다. 불과 200년 전의 일이다. 이씨왕조와 양반계급은 체제유지를 위해서 만민평등 사상을 지녔던 종교를 이단시하여 이를 믿는 백성 교인을 무참히 살해한 역사의 현장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아름드리 소나무 틈새로 붉게 물든 단풍나무도 이따금 보였다.
소나무는 일제시대 때 심었기에 수령은 90~100년이 채 안 된다고 막내 아들에게 설명했다.
당시에 왜 소나무를 식재했는지도 조금만 설명했다.
당시 남한산성 주변에 사는 토착민들, 백성들이야 정말로 미천한 계급들. 숨어 살았고, 가난했기에 금수목인데도 은글슬쩍 도벌도 했을 터. 어쨋거나 수령이 제법 되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있었다. 아쉽게도 나무 하단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흔적도 있었다. 소나무 벌레(재선충)가 침투한 구멍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도 들었다.
소나무 재선충이 침투했는지의 사실 여부는 나중에 참고적으로 확인해야겠다.
남한산성 행궁.
나로서는 행궁을 처음 보았다.
예전, 내가 서울에서 살 때, 여러 번 들렀던 당시에는 행궁 건물은 전혀 없었다.
행궁 터를 조금 고르는 체를 하던 당시를 기억하는 나로서는 오늘 본 행궁은 이채로웠다.
행궁은 왕이 도성 밖으로 행차를 할 때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며, 전국에 20개 소나 된다. 행궁은 최근 복원되어 2007년 6월에 국가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그 옛날의 위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겠으나 대체로 현재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옛 행궁에 관한 도면화가 남아 있는지는 몰라도...
아무려면 어떠랴 싶다. 역사는 후대가 늘 고쳐 쓰게 마련이니까. 당시의 흔적이라도 조금은 복원하고 재해석해서 역사문화를 기리 보존했으면 싶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를 날조하라는 뜻은 아닐 터.
행궁에서 머무는 왕과 권신이 있으면 거기에는 수많은 병졸과 관리들, 백성들도 있었을 터. 노역에 동원했던 승군(당시에는 숭불억제책으로 스님이 아닌 중으로 대접받았을 터) 등 다양한 역사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행궁 입장료.
청소년 7~18세 1,000원, 어른 19~64세 2,000원.
65세 이상은 없다. 왜?
거울 좀 보라고, 주름살이 어떠한 가를.
남한산은 능선에 따라 복원한 성벽이 길게 이어져 있다.
국가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은 2014년 6월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성곽은 7~19세기에 걸쳐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알 수 있다. 성곽 길이가 11.76km에 이르지만 성벽 안쪽으로 따라 걸는 산길은 등산로이기보다는 산책로으로 여겨진다.
산세가 완만해서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성안과 성밖 외곽을 돌 수 있다.
성안 주차장 전후좌우에는 많은 음식점 등이 있어서 산채요리등을 즐기 수 있다.
이 날도 노인들, 중년 아주머니들이 무척이나 많이 눈에 띄였다. 주차장 안에 자가용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날씨가 우중충.
가는 빗발이 차창에 금을 그었다.
'오늘은 밥 먹은 것으로 끝내자고요. 다음에 등산화 신고 와요. '
아내의 말대로 우리 일행은 귀로에 들어섰다.
오늘 남한산성에는 그냥 점심밥 먹으려고 들렀다는 정도로 만족해야겠다.
산성에 처음으로 들른 큰딸 내외(인도사위)이기에 다음에는 이들과 함께 다시 들러야겠다. 등산화도 신고, 등산복도 갖춰서 남한산 성곽 한 바퀴를 일주해야겠다. 서문 북문 동문 남문을 돌고, 망월사, 장경사도 방문하고, 남녘에 있는 검단산에도 올라야겠다. 여러 차례 방문해야만 남한산성 곳곳 이모저모를 두루 살펴볼 수 있겠다.
남한산성 수어장대가 있는 산은 청량산(471m)이고, 동편에는 해발 500m가 넘는 벌봉이 있다. 성곽 길이가 11.76km라 하니 5~6시간을 걸어야 할 듯 싶다.
나중에 재방문하면 만해기념관을 둘러야겠다.
만해는 충남 홍성 출신 스님. 만해기념관은 원래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 있었는데 1990년 개인이 이곳으로 옮긴 개인박물관이란다. 만해의 많은 유품과 기념품을 볼 수 있다.
방문할 곳이 또 하나 있다.
일전 어느 여성 회원이 올린 사진이 이채로웠던 돌예술공원이다.
남녀 성애(性愛)를 적나라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성석(性石) 조각예술품이 진열된 곳이다.
이곳에 가려면 동문(좌익문) 쪽에서 산로를 타고 차량 이동해야겠다. 장경사 뒷편 계곡에 위치한 듯 싶다.
다음 영상지도에는 영원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것 같고...
2015. 10. 30.
대중교통
지하철 5호선 마천역 1번 출구, 남한산성 서문까지 도보 약 1시간
지하철 8호선 산성역 2번 출구, 9번 버스 환승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역 1번출구, 도보 약 1시간
글의 길이도 바닷가의 개불(생선)처럼 자꾸만 늘어나고.
늘어날수록 글맛은 흐물거리는데..
..................
추가 :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관한 슬픈 전설....
이희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남한산성을 축조하던 이희장군을 모함해서 처형했고, 그의 부인은 자결하고...
이희장군에 관한 와비가 최근에 삼전동 주민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 공원 안에 설치했다.
'.. 수어장대 건물 옆에는 청량당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남한산성의 주민들을 지키는 수호신인 이희장군을 모시는 사당이다. 주민들이 신으로 받들어 모실 만큼 이희장군은 남한산성의 역사에서 특별한 인물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이희장군은 성남쪽 성벽을 쌓는 도중 공사비를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남한산성 서장대 앞에서 참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구명성금을 모으기 위해 각지를 돌아 다니던 아내 송씨부인은 사형소식을 든고 통곡하다가 쌀을 한강에 모두던지고 자신도 투신하고 맙니다. 나중에 조정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조사한결과 이희장군이 쌓은 남쪽벽은 미완성이나마 견고하게 축성된 것이 밝혀졌답니다.'
이희장군을 모신 청량당(남한산성 수어장대 입구)
이희장군에 관한 기록 :
* 내가 사는 송파구 삼전동 공원에 도착해서 이희장군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
와비(옆으로 길게 세운 비석)에 새겼다.
남한산성 축조했던 이희장군에 대한 야사를 조금만 인용한다.
첫댓글 남한산성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조.
저는 인조의 삼전도 굴욕보다 더 마음 불편한 것은
아들 소현세자가 청의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친밀한 관계가 되자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해서 소현세자를 독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해서 정말 못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더구나 며느리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끝나게 했다니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인물입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인조반정...
1636년 12월의 병자호란...
명청교체기에 명나라만을 떠받들던 조선조는 신흥 청나라군대한테 항복해서...
50만 명쯤의 조선인이 청나라로 끌려갔고, 일부 여자는 화냥년이라고 일컫었고,
지금으로부터 따지면 불과 380여년 전의 일이군요. 바로 코앞에서 전개된 굴욕적인 역사....
지금은 2022년.. 이따금 중국인들이 지하전철 잠실역에서 나와 바로 인근에 있는 '삼전도비' 앞에서 위 빗돌을 올려다보대요.
조선조역사...
답답하기만 하죠.
국사 공부를 하면 조선조 중기, 후기에 들어와서는 정말로... '쪼다'라는 인식이 들대요.
조선조의 못난 3대왕은 임진왜란의 선조, 병자호란의 인조, 구한말의 고종...
<병자호란 47일의 굴욕>이라는 책을 쓰면서 많이 답사한 곳입니다.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그 엄동설한,
추위에 죽어가던 병사들의 고통과 비탄의 소리가 돌담 사이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픈 곳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해 4대문 안 골목골목이 시체로 쌓이고, 집은 모두 불탔는데
왕과 대신은 산성으로 피신해 싸울 능력도 없으면서 큰소리만 쳐댔지요.
결국은 수십만명의 백성이 엄동설한 눈길을 거적대기와 집신 맨발로 심양까지 끌려가 노예 시장에서 팔려나갔으니...
인조와 선조는 조선조 최악의 왕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백성을 죽음의 질곡으로 내모는,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 지도자는 용서해서는 아니될 최악의 지도자일 뿐입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병자호란에 관한 책을 쓰셨군요.
제가 사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오르면 동남편에 남한산이 보이지요.
병자호란... 그 추운 겨울철 12월이 침략당했고,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피했고, 남한산성 안에 뭐 그리 군량을 사전에 비치했을까요?
왕과 대신들은 그런대로 굶주리지는 않았겠지만 일반백성들은 오죽이나 배고팠을까요?
사람이 죽으면 작은 비밀문을 통해서 사체를 성밖으로 내보내면...그걸 몰래 살점을 져며서 먹는 백성들도 있을 터.
청나라는 구태여 성을 공격하지 않고는 에워쌌고..
고작 한달 남짓 버티다가는 항복해서.... 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 인근에 나와서 항복했지요.
저는 이따금 송파구 석촌호수에 있는 삼전도비를 봅니다.
답답한 국사이지요. 치욕의 역사이기에...
최근사를 되돌아보면..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요?
1950년 6월 25일. ...
리승만대통령은 '달려가 런승만'이가 되어서 한강 이남으로 도망쳤고, 그 즉후에
제1한강교를 폭파시켜서 숱한 피난민들이 폭파되어 죽었고, 강물에 떨어지고...
화냥년...무슨 뜻일까요?
@최윤환 원래 병자호란 때 청에 붙잡혀 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還鄕女)라 했는데
비록 돌아왔지만 몸을 더럽히지 않았나 해서 많은 차별을 받았고,
그래서 결혼했던 여자는 시댁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뿐더러 심지어 양반가에서는 자결을 강요하기도 했다 합니다.
일설에 그 환향녀들을 비속어로 화냥년이리 불렀다는데, 역사학자들은 그 근거가 희박하다고 말합니다.
단 중국에서는 기녀를 화랑녀(化娘女)라고 칭하기도 한답니다.
@단풍나무숲
설명글 고맙습니다.
화냥년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있었지요.
차마 차마 설명하기가 뭐해서....
서울송파구 석촌호수는 동호 서호로 갈리지요. 호수 가운데 위로는 자동차도로가 있고
서호도로 바로 근처에는 '삼전도비'가 있지요. 예전 삼전동에 이 빗돌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삼전도비 운운하지요.
하지만 비석에는 '대청황제공덕비'라는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지요.
이 비석을 보호하는 지붕이 있는데 시설규모는 정말로 초라하지요.
창피한 역사였으니까요.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그래도 그게 우리나라 역사이기에 가르치고, 배워야겠고, 이를 소재로한 문학 등이 더욱 활발했으면 합니다.
국난극복으로 민족의 자력을 높혀야 하니까요.
21세기인 지금도 남북한으로 양단된 찌질이 국가이지요.
통일이 되어서 보다 강력한 국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요즘.... 동해의 독도문제... 일본은 '다케시마(죽도)'라고 하면서 또 넘보고 있대요.
위 글 덕분에 국사공부를 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