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메타나는 보헤미아 북부의 ‘리토미슐’에서 1남 17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4세 때 바이올린을, 6세 때 피아노를 능숙하게 연주하여 신동이란 말을 들었던 그는 프라하로 나가 레슨을 하면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프라하를 방문한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감동하여 피아노 연주자가 될 것을 꿈꾸었으나, 1848년 오스트리아 2월 혁명의 여파로 프라하에도 그해 6월에 혁명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이후 국민의용군에 가담한 스메타나는 국민의용군 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이후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던 조국 체코에서 민중의 저항운동이 확산되던 1856년 스웨덴으로 건너간 스메타나는 예테보리에서 음악학교를 개설하였으며, 괴텐보르크 필하모닉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다가 1860년대 들어 합스부르크의 탄압이 느슨해진 틈을 타 프라하에서 민족운동이 되살아나자, 음악가로서 민족운동의 선두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1862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국민극장의 전신인 가극장이 프라하에 건립되자,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오페라 <팔려간 신부>를 작곡, 초연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계속 이 극장에서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874년 매독으로 인한 환청이 악화되어 더 이상 국민극장에서 지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극장 지휘자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귀가 전혀 들리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조국에 대한 충정을 담은 교향시 <나의 조국> 중 제2곡 <블타바>를 작곡하였고, 이후 현악사중주 제1번<나의 생애로부터>와 제2번을 작곡하여 자신의 삶과 음악여정을 돌아보는 의미 있는 작업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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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악사중주 제1번 <나의 생애로부터>는 스메타나가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지 2년이 지난 1876년 작곡되었다. 따라서 이 곡은 그의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영혼의 독백인 셈이다. 그리고 이 곡은 미뉴엣이나 스케르초 대신 체코의 무곡인 폴카 리듬을 2악장에 사용한 점 등이 특이하다. 스메타나는 이 곡에 관하여 “형식에서 보통의 현악사중주 구성과 다르기 때문에 이론이 있겠으나, 내가 의도한 것은 음에 의하여 내 생애의 경과를 그리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인가,이 곡에서 악장마다 설명을 달고 있다.
제1악장은 내가 젊었을 때, 예술에의 취향으로 “무엇인가 뚜렷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동경, 장래의 불행의 경고”라고 말했고, 제2악장은 폴카풍으로, 젊었을 때의 즐거운 생활과 추억을 끌어내 “젊을 때, 나는 무도곡의 작곡가로서 젊은이의 세계에 무도곡을 보내고 나도 열심히 춤을 추었던 것이다.”고 회상한다. 제3악장은 어느 소녀. “훗날 아내가 된 첫사랑의 행복”을 상기시킨다. 제4악장은 음악에 있어서, 국민악파로의 인식을 수용한 것이며,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 대한 기쁨과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면서 예견되는 비극적인 미래. 그리고 ‘다시 좋아질 수 있을까?’라는 회복에의 희망”등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