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씨가 풀려도 해 떨어지면 느낌이 이전 같지 않습니다. 앞에 보이는 산에도 색깔이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단풍 계절에 들어섭니다. 아파트 단지 내 나무들은 이미 변해 있고 잎들조차 반은 떨어졌습니다. 아침 산행에 나서면 얼굴로 부딪치는 바람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차갑습니다. 그렇게 시월도 하순, 계절은 깊어갑니다. 단풍놀이라, 구태여 멀리 나갈 필요 있나요? 우리 주변에 깔려있지 않습니까? 외국 관광객들이 서울을 부러워한답니다. 이런 도시가 많지 않은 모양입니다. 5백년의 역사가 같이 있고 빌딩과 숲이 함께 있다는 것에 감탄한다지요? 나라는 좋은데 인생들이 문제입니다.
세상 저 쪽에서는 총으로 전쟁이 이어지고 여기서는 입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둘 다 우리네 삶을 힘들게 합니다. 저기는 생명이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여기는 살맛이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뭐 이런 세상을 살아야하나 싶지만 어쩌겠습니까? 우리나라가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가 봅니다. 이런 세상에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내 고생하는 것으로 끝내자 하는 마음인 듯합니다. 한 세기 지나면 단일민족이 혼합민족으로 바뀔지 모르겠습니다. 그 때까지 살 염려는 없으니 생각 접을까요?
그래도 가을하늘을 바라보면 살맛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보세요. ㅎㅎ 좋은 주말입니다. 하늘 우러러보며 멋진 시간을 만들기 바랍니다. *)*
2022년 10월 22일 김종우 목사 드림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전도서 10 : 14)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상상은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어느 정도 가능성을 가지고 해야 즐거움과 기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래도 좀 황당한 이야기라서 그런지 크게 감동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이야기의 깊이를 깨닫고 매우 호감을 표현한 관람 후기를 써준 분들도 있습니다. 그야 개인적인 차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깊은 이야기에 동감은 하면서도 관람하는 동안은 빠르게 돌아가는 장면들에 혼란스러워 따라가기 바빴습니다. 아무튼 상상은 그것입니다. 이 드넓은 우주 어딘가에 ‘나’라는 존재가 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은하계만도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잘 모릅니다. 그 어디엔가 ‘내’가 다른 모습으로, 아니 다른 인생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런데 어느 날 그 통로가 열려 서로 교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니면 그 쪽의 상황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또 다른 능력을 알게 되어 그것을 습득하여 여기서 사용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혀 다른 인생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웠던 자신을 깨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살아보는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그렇게 새로 사는 삶에는 만족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또 다른 ‘나’ 아니면 새로운 자신을 살아본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지만 사실 지금의 나도 다 살아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찌 잘 되었다 못 되었다 속단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면서 바꾸어갈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아직 얼마의 시간이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합니다. 어렵고 힘드니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가끔은 잠자리에서도 상상을 해봅니다. 혹 꿈도 꿀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잠깐 휴식하는 시간에라도 상상의 날개를 펴봅니다. 발리 섬 여행을 떠나본다든지, 가까이 남해 일주를 해본다든지, 보다 크게 우주여행사가 되어 달에 안착을 해본다든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도가 너무 지나칩니다. 아니면 대단한 상상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새로운 미래를, 아니면 전혀 다른 자신의 현실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눈을 통하여 보입니다. 영화에서는 ‘베이글’로 나옵니다. 마치 도넛 모양으로 등장합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주 저 편의 다른 세계에 있는 자기를 봅니다.
왜 이런 기막힌 사태가 벌어지는가 하는 것은 주인공 ‘에블린’의 놓인 현실을 보면 금방 이해합니다. 밀린 세금 딱지들 속에서 코인 세탁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매일 독촉이 들어오고 고객도 여러 가지이니 그에 따라 적응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식구지만 에블린에게는 콩가루 집안입니다. 매 끼니를 챙겨드려야 하는 아버지, 돕는다고 하지만 말썽이나 부리는 남편, 하나 있는 딸은 레즈비언인지 여자 친구와 붙어 다닙니다. 엄마의 뜻과는 전혀 다른 삶을 꿈꾸는 듯하여 말끝마다 가슴을 도려냅니다. 그러니 그 반응 또한 달갑지 않습니다. 서로 으르렁거립니다. 작업장 챙기랴, 아버지 섬기랴, 가족들 뒷바라지하랴, 정말 정신 사나워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이상한 눈을 통하여 다른 세계, 다른 자기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다르게 살 수도 있겠다, 하는 희망(?)을 봅니다. 그래서 젊어서 꿈꾸었던 성공한 연예인이 되어보기도 합니다. 아니면 기막힌 무예의 도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자기로 현실에 대입해보면 살맛날까요? 그렇게 되면 상상은 이렇게 곁길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당신과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나아졌을까요? 사실 그런 상상은 한쪽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자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상은 억누르며 현실을 인정하고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사실 결혼의 단꿈은 짧습니다. 우리는 모두 곧 현실로 돌아옵니다. 왕자도 공주도 모두 남자와 여자일 뿐입니다.
당신 아닌 다른 남자 또는 여자와 결혼했더라면, 하는 상상은 해봤자 무익합니다. 그 남자 그 여자라고 했더라도 큰 차이가 생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른들 흔히 말하듯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위 마음먹기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결국 돌맹이 같은 마음으로 나란히 낭떠러지에 놓인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두 눈은 살아있어서 자기 보고자 하는 것만 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닫습니다. 그래 인생 다 거기서 거기지. 그리고 다시 곁으로 다가갑니다. 살아도 함께, 떨어져도 같이 떨어지자, 뭐 그런 겁니다. 눈을 돌리면 다르게 보입니다. 더구나 여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에블린의 정신 사나운 삶을 그리고 있지만 장면들이 정말 정신 사납게 지나갑니다. 그리고 갑자기 끝났나? 싶은데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온 우주를 돌아, 돌아 돌아온 곳은 내 집이지요. 인생 사는 것이 뭐 별 겁니까? 그냥 지지고 볶아도 내 집이고 내 가족인 걸요. 여태 보던 눈을 잠깐만 돌리면 다른 것을 볼 수 있고 없었던 살맛이 새롭게 생깁니다. 우주를 빙빙 돌아서 찾아온 곳도 결국은 자신의 자리입니다. 뭐 봐이킹 타고 내렸다 생각하면 될 듯합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이제는 지구 밖으로 나가는 일이 그다지 큰일도 아닙니다. 최근에는 우주비행사도 아닌 일반사람이 관광하듯 지구 밖에서 지구를 구경하고 돌아온 일도 있습니다. 말 그대로 관광입니다. 물론 일반사람은 꿈도 꾸지 못할 경비를 지불했습니다. 아무튼 우주관광이라는 것이 꿈속의 이야기가 아닌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만 얼마 후에는 외국여행 하듯이 다녀올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기대합니다. 십여 년 전 우리나라 사람도 지구 밖으로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달 궤도 우주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도 이제 우주여행이 먼 나라 이야기만은 아니구나 하는 것이 실감되었습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 그 기회가 오려면 아직도 수십 년이 지나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점점 가까워진다는데 희망이 생깁니다.
우주 이야기를 하니 오래 전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인류 최초 소련의 우주 비행사가 지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세계적인 사건이고 인류 역사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었던 사건이었지요. 그가 우주에 나가서 말했다는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유머이기도 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생각해봄직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곳 국민이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그리고 드디어 하늘에 올라가서 증명한 것입니다. 그가 뭐라 말했습니까? ‘내가 하늘에 올라와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더라.’ 소련이 되기 전에는 그곳도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국가적으로 억압은 하였지만 의식 속에는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궁금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 그런데 마침 하나님을 만나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어쩌면 우주에 나가는 설렘과 더불어 그 동안 품어왔던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더욱 설렜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늘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 기도를 예배 때마다 암송합니다. 누구에게 기도하는 겁니까?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께 합니다. 그 아버지 하나님이 어디 계신대요? 하늘에. 그 하늘을 측량할 수 있습니까? 우주시대를 연지도 한 세기가 가까워옵니다. 그러나 우주의 끝이 어딘지는 가늠하지 못합니다. 하늘이라고 말하지만 그 하늘은 바로 우리 앞의 빈 공간으로부터 시작해서 저 무한한 우주의 끝 어디까지인지 모릅니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은 어느 하늘에 계신답니까?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하늘이 도대체 무슨 하늘입니까? 어디부터 어디까지입니까? 그런 하늘이겠습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일까요? 아니면 천체망원경으로 보이는 하늘인가요? 그보다 더 먼 하늘인가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6 :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을 곧이곧대로 듣는다면 보물을 우주선에 싣고 지구 밖으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 하늘이 아니지요.
성경을 읽으며 참으로 궁금하고 신기하게 생각하며 막연히 상상해본 것이 있습니다. 오래도록 해답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다녀온 하늘에 대해서입니다. 고후 12 : 1 - 2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사도 바울이 삼인칭으로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가 셋째 하늘에 갔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셋째 하늘이 어디입니까? 셋째 하늘이 있다면 분명 첫째 하늘도 있어야 할 것이고 둘째 하늘도 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첫째 하늘은 어디고 둘째 하늘은 어디일까요? 다시 한 번 상기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육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육을 빙자한 영을 위한 이야기지요.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생명이라“ 아멘! 그러므로 이 하늘을 육으로 이해하려면 오해를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 하늘은 우리 육안으로 보는 그런 하늘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지구 안의 대기권과 지구 밖의 우주와 그리고 막연히 다른 하늘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하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소위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자도 소경이요 그 가르침을 받는 자도 소경입니다. 함께 망합니다.
1. 하늘은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그런데 잘 아는 대로 요 4 :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은 하나님 계신 ‘영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영계의 하늘, 그곳은 천국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당연히 위계질서도 있겠지요. 맞습니다. 그 천국의 모습을 환상 가운데 본 사도 요한이 말해줍니다. 계 4 : 1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자 여기 이 하늘이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 아님은 잘 알 것입니다. 곧 하나님 계신 영계를 말하는 것이고 사도 요한이 그곳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그 영계의 광경을 보게 됩니다. 2 - 3절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우선 ‘성령에 감동하여’ 본 것이니 육으로 본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하늘은 물리적 하늘이 아니라 영적인 하늘 곧 ‘영계’라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보좌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 분이 앉아 계십니다. 누구실까요? 4절 이하를 보면 그 보좌를 둘러 24 장로가 있습니다. 다음 일곱 영이 있고 또 6절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합니다. 좀 복잡하지만 아무튼 영계의 하나님 계신 곳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을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그곳이 어디였을까 하는 것은 그 다음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고후 12 : 3 - 4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도 바울이 갔던 셋째 하늘은 바로 낙원 즉 천국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날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마 17 : 1 -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제자들 앞에 영계가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누가 나타납니까? 3절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당시 제자들보다 1,500년이나 앞서 살았던 모세가 있었고 약 1,000년 전의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분명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육계의 장면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 과거의 사람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영계에 살아 있다는 것이지요.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은 애굽에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내시고 모세를 통하여 장막 곧 성막을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장막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입니다. 출 25 : 8 - 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처소입니다. 영계의 하나님이 육계의 백성에게 함께 해주시는 증표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하나님의 지시대로 육계의 땅 위에 장막을 짓습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이신 대로 짓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 때의 사실을 그대로 가르쳐줍니다. 히 8 :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모세가 하나님이 계신 영계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대로 그 식양을 따라 이 육계의 땅위에 지은 것이 바로 장막 곧 성막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지었습니다. 장막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장막 또는 성막 그리고 성전은 바로 하나님 나라 즉 육계의 땅에 있는 ‘하늘’입니다.
2. 장막과 하늘
모세가 영계의 하늘에서 보고 육계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지은 하나님의 장막 즉 성막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 장막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은 성소입니다. 그곳에는 일곱 등대와 떡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휘장을 지나 지성소에 들어가면 그곳에는 언약궤라고도 하고 증거궤라고도 하는 법궤가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 앞에는 금향로가 있습니다. 이 장막을 짓는 방법은 출애굽기 하반부에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성도들이 성경을 읽으며 매우 힘들게 지나가는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요한 부분만 간단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 26 : 31 - 33 “너는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짜서 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공교히 수놓아서 금 갈고리로 네 기둥 위에 드리우되 그 네 기둥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싸서 네 은받침 위에 둘지며 그 장을 갈고리 아래 드리운 후에 증거궤를 그 장 안에 들여 놓으라 그 장이 너희를 위하여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리라” 아멘!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가 요약하여 설명해줍니다. 히 9 : 1 - 5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필요할 때마다 출입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마다 떡상의 떡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등대를 간검해야 합니다(레 24 : 1 - 4). 다시 히 9 : 6 - 7절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아멘! 잘 보십시오. 장막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성소와 지성소입니다. 성소를 첫 장막이라 하고 지성소를 둘째 장막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성소는 예비한 첫 장막이라 하였으니 곧 ‘예비 장막’이요 지성소는 증거궤가 있는 곳이니 ‘증거 장막’이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며 모세를 대적합니다. 레위 지파의 고라를 비롯하여 몇몇이 당을 지어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을 합니다. 당신만 지도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야 마음에 안 들면 바꾸면 그만이겠지요. 그러나 모세와 대제사장 아론은 하나님이 택한 그릇입니다.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형편이 아닙니다. 모세를 대적하는 것은 곧 그를 택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도 같은 일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대적한 그들을 벌하십니다.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확실하게 증거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택한 지도자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각 지파의 대표들을 불러 지팡이를 가져오게 합니다. 12 지파가 하나씩 지팡이를 가지고 와서 그 지팡이에 자기 지파 이름을 새기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즉 장막 안 지성소에 둡니다. 민 17 : 8 - 9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 모세가 그 지팡이 전부를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취하여 내매 그들이 보고 각각 자기 지팡이를 취하였더라” 자 여기 지성소를 뭐라 합니까? ‘증거의 장막’이라고 합니다. 이 둘째 장막 곧 지성소에 증거궤가 있으므로 ‘증거의 장막’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확인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 땅의 백성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 육계의 이 땅에 장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영계 하늘에서 보여준 대로 만들게 하셨지요. 그리고 그곳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은 곧 이 땅에 있는 ‘하늘’입니다. 시 11 : 4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아멘! 그 장막은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다른 말로 하면 첫 장막과 둘째 장막 또는 예비 장막과 증거 장막 나아가 처음 하늘과 둘째 하늘 또는 ‘새 하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왜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이라고 표현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장막을 장막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히 8 :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요, 히 10 : 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히 9 : 9절에서 말하듯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이 장막은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심을 상징하여 거룩한 성이라 칭하게 되었습니다. ‘거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떠나시면 더 이상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이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된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냥 집일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상징하여 ‘거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한자로는 거룩할 성(聖)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비롯하여 성막, 성구, 성화 등등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이 있기에 이 거룩할 ‘성’이 사용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제사장이 입는 옷은 ‘성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은 ‘성물’ 무엇보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성민(聖民) 오늘날 ’성도‘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신도이기에 그렇게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있는 영 곧 천사를 가리켜 ’성령‘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하나님 백성은 ’성민‘이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 백성은 ’성령‘이지요.
3. 새 하늘
하나님 백성의 역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배반과 반역, 배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택하신 아담부터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바로 그 짓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망하셨고 기다리다 다시 또 다른 목자를 택하십니다. 될 성 싶으면 다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은 또 기다리십니다. 다시 불러 세우고 기다리십니다. 한 백성을 이루게 하셨지만 그들의 배역과 배도는 여전합니다. 나라를 반 토막 만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은 멸망합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셨지만 오히려 더 극성스럽게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혈통의 육적 이스라엘을 끝내고 영적인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잘 아는 대로 이제는 저 이스라엘 땅에 있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요 1 :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과연 이 일은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혈통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육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는 저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서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그 말씀의 씨를 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육적 이스라엘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영적 이스라엘 속에서 똑같이 발생한다는데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경고한 것이 그 때문입니다. 벧전 5 :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처음 아담을 미혹해서 넘어뜨리고 아담에게 맡겼던 세상을 차지하고 역사를 지배해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백성을 바꾸셨습니다.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귀가 가만있겠습니까? 세상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가 그 권세를 순순히 내놓겠습니까? 아담을 미혹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때를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벧후 3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아멘! 12절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13절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할렐루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 하늘이 육의 하늘이겠습니까? 하늘이 떠나간다면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일까요? 그리고 원자탄 수소탄으로 터뜨려봐야 하늘이 얼마나 타겠습니까? 하늘이 물건입니까? 불에 타게? 하나님은 영을 말씀하시는데 어떤 목자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려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너희는 나와 상관없는 자들이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중요한 것 ‘하늘’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육안으로 보이는 저 하늘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가리켜 ‘하늘’이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즉 영계를 가리켜 ‘하늘’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초림 때 예수님에게 오셔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예수님 안에 계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하늘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하십니다. 성도도 하늘이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그 성도가 마귀의 미혹을 받아 하나님을 등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하늘을 심판하십니다. 소위 하늘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앞의 하늘은 처음 하늘이 되고 다음 새로 창조한 하늘이 ‘새 하늘’이 됩니다. 이 하늘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곧 영계가 불에 타다니 말이 안 되지요. 그러니 그 다른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리하려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우선은 ‘영계’를 뜻하지만 또 다른 의미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합니다. 무엇인가만 소개합니다. 여기 이야기한 첫째 둘째 셋째 하늘이라고 할 때의 ‘하늘’과 ‘처음 하늘’ 또는 ‘새 하늘’ 할 때의 하늘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태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의미하는 하늘입니다. 즉 영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고 말하는 그 하늘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필요까지는 없다는 말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알고 신앙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