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회상 초기의 10타원들①>
★<1타원 박사시화(朴四時華)1867.12.18.~1947.1.30>장적조 • 최도화와 함께 3대 여걸로 칭한다. 남원 출생, 효심이 지극하여 모친 열반시 단지선혈로 소생시켰다 한다.
박공명선화와 쌍둥이다. 바느질에 능숙하다. 서울로 이사하여 도정궁 수양딸로 들어감. 불연이 깊어 불사에 정성을 다함.
57세시 구례화엄사 화주로 다니다 기차에서 최도화의 만남으로 대종사를 만남.
정산•서중안•전음광•대종사께서 상경하여 태평관에서 처음 배알하여 출가를 함. 이튿날 박공명선화와 딸 성성원이 배알하여 박공명선화를 입교시킴.
서중안의 주선으로 총부에 3월부터 한옥 한 채를 빌려 머물며, 6타원 이동진화. 9타원 이공주를 만남.
만덕산 초선때 시봉을 하는데 너무 궁색하여 “훌륭한 동지를 만나 시봉 잘하게 하소서”라고 울었다한다.
총부 동선시 신발 씻어주기, 떨어진 고리짝 붙이기, 옷빨기, 새동지 세숫물 떠주기, 헤어진 이불 누벼주기 등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회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지 감수하였다.
교화를 위해서 남의 애경사에 부엌일은 물론 채소밭 김매기 등 궂은 일들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또한 상산 박장식 교무가 비오는 날 주점에 쉬는 동안 두루마기를 가져다가 깨끗이 손질하여 드려 회상에 인도하도록 하였다.
대종사 설법시에는 최도화 노덕송옥등과 함께 일어나 춤을 추었다.
80세(원기 31년)에 열반함. 575명 입교시킴.
★<2타원 장적조(張寂照)1878.10.15.~1960.12.30.>부산교화의 시조이다. 남자성격에다 30세에 가족을 뒤로하고 전라도 증산교에 들어가 몇 해 간 신봉함. 이만갑의 연원으로 원기 6년 5월 15일에 변산을 찾아 대종사께 귀의 함.
대종사께서 “너희들의 거동을 보니 똥이라도 먹을 것 같으니 똥이라도 먹을 수 있느냐?”하니 이만갑과 구남수가 직접 나가 똥을 가져왔다고 한다. 변산을 내왕하며 땔감을 조력하고, 봉래정사를 지을 때 흙짐까지 지었다.
붙임성이 좋은 가운데 사방천지로 돌아다니며 순교를 하는데 신바람이 났다.
서동풍 형제, 증산교 일파 조철제 일가의 안식구 등 입교를 시킴. 부산에서는 양도신 등 36명을 교화하였다.
처음 법명은 장풍(張風)이다. 북방교화와 북만주. 선양. 지린. 목단강. 장춘, 연길 등을 다니며 교화를 하였다.
대종사께서 너무 바람을 불리고 다니지 말고 이제는 조용히 앉아서 공부를 하라고 적조(寂照)라 이름 하였다. 218명을 입교시킴.
★<3타원 최도화(崔道華)1883~1954.2.3>임실군 지사면 금평리에서 출생함. 근동에 알아주는 집안이었으나 일곱 살에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에 자라났다. 7자매중 6째딸로 태어남. 속명 인경.
인경은 성격이 강직하고 계획성과 주면성이 있어 꿈이 많았다. 인경은 아홉 살때 <소서성전>이라는 고대소설을 읽은 뒤로는 백운도사 같은 사람을 만나 가슴에 품은 뜻을 이루기가 소원이었다.
그러나 모친 진정만옥은 일곱 딸 중에 가장 기개가 차고 주변성이 있는 영악한 인경으로 하여금 가문의 대를 이을 생각으로 인경이 열세살 때 집안에서 부리고 있는 착실한 머슴 조성옥을 데릴사위로 맞아 들이였다. 모친의 강제로 결혼을 하여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가정살림에 재미를 두지 못하고 백운도사 같은 사람을 만나 꿈을 꾸고 살았던 인경은 우울하게 지내다가 28세 때인 결혼 15년 만에 파탄을 맞았다.
인경은 동네 뒷 방죽에 몸을 던졌으나 지나가던 정인승이라는 여승이 구해주어 여승을 따라 서울에 올라가 한강변 두뭇개<豆毛浦> 승방에서 2년, 계룡산 동학사에 있다가 전주로 내려와 증산교를 비롯하여 여러 곳의 기도터를 찾아 다녔다.
결국 경제적인 수완이 좋은 인경은 비단장수를 하며 절집의 화주 노릇을 하며 기도꾼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다녔다.
만덕산 기도가 영험하여 그녀는 산제당 근방에 따로 갈대 초즙으로 산신각을 지어 공을 드렸다. 이 때에 어머니 진정만옥은 남편 조성옥과 함께 1923년경에 산제당 아래 마을 중길리 상달로 이사를 와 여기서 30년을 살았다.
또한 김대거 집안(만석지기 부자)의 일을 도우며 살았다.
최도화 일가는 중길리를 떠나 이리로 이사를 간 것은 6.25동란 뒤였다.
만덕산 미륵사 화주 노릇하다면서 1921(원기 6년)년 가을 3개월간 정산종사를 미륵사에서 만나 극진히 신봉하다가 정산종사를 쫒아 변산에 찾아가 대종사를 뵈오니,
대종사는 크게 기뻐하시며 “방죽을 파니 고기가 모여 들구만”하며 반기었다. 1922(원기 7년)년 12월 대종사 송도성과 오창건과 함께 만덕암(초선터 산제당)에 3개월 머물자 극진히 시봉하였다.
진안 마령 평지리 전삼삼. 권동화. 전음광. 송혜환. 오송암. 조갑종을 비롯하여 좌포 김씨일가. 오타원 이청춘과 일타원 박사시화를 비롯하여 서울 교화에 조력함.
최도화로 인하여 회상의 중심 인물들이 폭넓게 들어오면서 교화가 활기를 얻게 되었다.
아들 조갑종은 출가후 서울에서 6개월간 경리학원을 다니며 신식부기를 배워 초창기 회계를 맡음.
진안. 전주. 마령을 교화 좌포주무를 역임함. 72세(원기 39년)에 열반. 319명 입교시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