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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개국공신이며, 경주배씨의 시조이다. 초명은 백옥삼(白玉衫:또는 白玉三). 원래 궁예의 휘하에서 병졸이었는데, 용맹과 지모가 뛰어나 장군에까지 이르렀다.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유금필(庾黔弼)과 함께 궁예를 타도하고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도읍을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길 때 개주도체찰사(開州都體察使)가 되어 새 도읍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벼슬은 대상행 이조상서 겸 순군부령 도통병마대장(大相行吏曹尙書兼徇軍部令都統兵馬大將)에 이르렀다. 994년(성종 13)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 평민에서 개국 1등 공신으로, 배현경
배현경(裵玄慶) (?~936년)
배현경. 고려출신 무장으로 원래 이름은 '백옥삼'이다. 그는 경주사람으로 이름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평민출신이었다. 그러나 배현경은 무예가 출중하고 재능이 많아 일개 군졸로 시작하였으나 나중에는 관위가 대광(大匡)에까지 이르렀다. 배현경은 홍유와 복지겸 등과 같이 마군장군(馬軍將軍)으로 궁예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나 후에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공신이 되었다.
배현경은 1등 공신이라는 지위에 오른 뒤에도 지치지 않고 태조를 보필하였는데 그의 직언은 태조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태조가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때 청주 출신 현율을 호족자치군을 관할하는 순군낭중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배현경과 신숭겸이 이를 적극 저지하였다. 배현경은 "지난 번 순군리 임춘길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병권을 맡아 청주인을 동원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청주 출신인 현율을 순군낭중으로 삼는다면 또 다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간하여 현율을 병부낭중으로 바꾸어 임명하게 하였다. 이러한 배현경의 간언은 당시 고려 왕조 초의 불안정한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들이었다.
배현경은 918년 왕건을 주군으로 모신 뒤에 변하지 않는 강직함과 충성심으로 태조를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후백제와의 일이천 전투가 고려군의 승리로 끝난 그 해에 사망하였는데 태조가 그의 임종시에 같이 하였다. 936년 12월 배현경이 병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를 방문하여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사람의 명을 어쩔 수 없으나 경의 자손은 잊지 않을 것이다." 배현경은 이 말을 마치고 나가는 태조가 막 문을 나설 때 숨을 거두었다. 태조는 궁으로 가는 길을 돌려 관청에 배현경의 장례를 치르도록 한 뒤 귀가하였다.
태조는 배현경의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여 그의 공을 대대로 치하하였다. 이후 994년 다른 1등 공신들과 함께 태사(太師)에 추증되어 태묘(太廟)에 배향되었다. 그 뒤 마전(麻田)의 숭의전, 평산의 태사사, 나주의 초동사(草洞詞) 등에 배향되었다.
중시조 (무열공) 배현경 (中始祖 武烈公 裵玄慶)
배현경(무열공) : 서기 874 ~ 932년. 배씨의 중시조.
공의 성은 배씨에 관향은 경주로 휘는 현경 초명은 백옥삼 이다.
신라 경문왕 14년(서기874년) 에 태어나셨으며 태백산 기슭에 있었다.
고려개국 통합원훈. 시호 무열. 증태사공은 총명 등력 용맹하고 인후한 덕이있으셨다.
신라가 세운 상.하 벼슬아치들이 부패 무력 하자 공은 단사 이자 료승인 도선에
병법을 익히였다. 진성여왕때 세상이 어지러워져 사방에 반란이 일어나자
공은 처음 궁예왕 편에 힘을 합하였으나 날로 방탕 폭거 하여지자 신숭경. 홍유. 복지겸
과 더불어 마장군으로 고려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하셨고
동지들과 왕건을 추재(서기918년) 하여 제일등개국공신 으로 대광(수상)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백성들을 안무하고 후삼국을 통일 하는데 수훈을 세웠으니
공은 고려의 사직6신 이셨다.
공은 하늘로 부터 맡으신바 통합의 대임을 완수한후 병이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하여
공의손을 잡으시고 "아. 천명이로구나.그대의자손이 뒤에 남아있으니 내 어찌 감히
잊을수 있으랴. 하시고 출문하자 곧 운명 하시니 태조(천수) 19년 병신(서기936년12월30일) 에 졸 하시니 향수 63세 였다.
국가에서 그에게 예장을 베풀었으며 사자 반유를 부마로 삼았다.
이로서 공은 고려 오백년 공신의표상으로 성종 30년 태조묘 배향시 수공신 이 되었다.
조선 문종때 마전 종의전에도 16공신중 수배향 되엇으며 사어서원인 평산 태사사에는
공을 비룻한 사태사의 철상이 봉안되었고 대원군의 서원 회철시 에도 면제된
47서원중 하나이다. 공을 주벽으로 모신 나주 무열사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영동리에
소재하고 지방문화재 57호 사적 기념물로 지정되였다.
공의 큰덕은 조선시대 까지도 미쳐서 영조는 서기1540년에 전국에 산재해 있는
공의 후손들에게 군역과 모든 잡역을 면제하라는 교서를 내림으로서
배씨의 격은 국가적으로 제고 되었던 것이다.
공에대한 사료는 고려사 태조세가 및 열전.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정조때 무열공전이 편찬되었으며 서기1920년대에는 무열공 본전이 엮어졌다.
출처 : 星州裵氏梅谷公派世譜 에서.
참조 : 아들.첫째 ~ 원용. 분성군......... 분성배씨.
둘째 ~ 천용. 성산군......... 성주배씨.
셋째 ~ 운용. 달성군......... 달성배씨.
넷째 ~ 오용. 평장사흥해... 흥해배시.
배현경과 배극렴
배현경(裵玄慶,?~936)과 배극렴(裵克廉.1325~1392)은 각각 고려와 조선의 창업 공신이다. 이들은 모두 배(裵)씨 가문을 빛낸 출중한 인물들이다.
경주배씨(慶州裵氏)의 시조 배현경은 홍유,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고려 4대 개국공신 중의 한 사람이다.
배현경은 담력이 보통 사람보다 특출했다. 그래서 비록 병졸 출신이었으나 계속 승진하여 대광(大匡)에 올랐다.
배현경은 본래 궁예의 부하로서 병사로 시작하여 마군장군(馬軍將軍.기병대장)이 되었다. 그는 궁예가 개국할 때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폭정이 심해지자 배현경은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축출하고 왕건을 추대한다.
배현경은 919년(고려 태조2년)에 도읍지를 송악으로 옮길 때 개주도찰사로서 새 도읍을 건설하는데 앞장섰으며, 궁예의 잔당을 소탕하는데도 공을 세웠다.
936년(태조19년) 배현경이 병으로 위독하자 태조가 친히 문병을 갔다. 왕은 '경의 자손이 있으니 그들을 잊지 않겠노라' 고 했다. 그리고 왕이 밖으로 나가자 배현경은 곧 죽었다. 태조 왕건은 가마를 멈추고 통곡했다.
배극렴은 고려 충숙왕 2년(1325년) 경북 성주읍 대황동에서 위위소윤(衛尉小尹)으로 있던 아버지 배현보와 어머니 성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산(京山) 혹은 성산(星山)이다.
배극렴은 우시중으로 있던 1392년 조준, 정도전 등과 모의, 공양왕을 폐하고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 개국 일등공신이 되어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이 됐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역임했다. 관향인 성주 관하리에 살고 있을 때 그는 근처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사를 짓게 했다. 백성들은 그의 공을 고맙게 생각해 그 곳의 땅이나 하천을 배천(裵川), 배야(裵野) 라고 불렀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진주목사로 부임했을 때는 산에서 잣나무를 북쪽 관아에 옮겨 심었다. 진주 사람들은 배극렴을 추앙해 이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했다.
배극렴은 고려 우왕 4년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합포성을 쌓았다. 경상남도 마산시 합성동에 위치한 이 성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성의 원형이 거의 소실되고 석벽 일부와, 성을 쌓았던 그 당시의 돌들만 흩어져 있다.
이 성은 천시, 지세, 인화가 일체된 성이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성의 철저한 경계를 위하여 성의 요소마다 회례문(남문), 회의문(서문), 지용문(북문), 원인문(동문) 등 4대문을 두었다. 조선조 때에도 여기에 영을 두었다가 선조 때에 진주로 옮겨갔다.
고려 말년에“비의군자(菲衣君子)의 지혜로 삼한을 바로 잡는다”라는 말이 떠돌아다녔다.‘非'와 ‘衣'를 합하면 ‘배(裵)' 자로 이는 바로 배극렴을 가리켰다. 고려 말 국운이 기우는 민심과 당시 그의 덕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392년 이성계가 세자를 책봉할 때 조준, 배극렴 등은 “평화시에는 적자가 책봉돼야 하고 난시에는 공이 많은 사람이 세자로 책봉돼야 한다.”며 이방원을 의중에 두고 주장하다가 묵살 당했다. 이로 인해 조준은 사직 당하고, 배극렴은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이방원은 임금이 된 뒤 배극렴이 머물던 이곳의 산을 어래산(御來山), 마을을 삼방리(三訪里)라 부르게 했다. 배극렴은 1392년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편 경주배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6부 촌장 중의 한 사람인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 지타(只他)가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고 총재태사에 올랐다.
그 후 32년(유리왕9년)에 금산가리촌을 한지부(漢祗部)로 고치고 성을 배(裵)씨로 하사했다. 후에 한지부가 경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을 경주로 했다. 그러나 그 후의 후손은 기록이 없으며,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배씨는 후대에 내려오면서 고려조에 공이 있어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진 배원룡(裵元龍)의 후손이 분성배씨, 고려 원종 때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진 배인경(裵仁慶)의 고조 배위준(裵位俊)의 후손이 성산배씨, 고려조에 나라에 공이 있어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배운룡(裵雲龍)의 후손이 달성배씨, 충숙왕 때 흥해군(興海君)에 봉해진 배전 의 5대조 배경분(裵景分)의 후손이 흥해배씨, 달성배씨에서 9세손 배맹달(裵孟達)이 세조 때 곤산군(昆山君)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이 곤양배씨 등으로 갈라진다.
그밖에 경주 처사공(處士公) 충과파(忠果派), 성산 복야공(僕射公) 영찬파(英贊派), 화순 진사공(進士公) 연파(練派), 함흥 교서공(校書公) 덕수파(德秀派), 협계 합문사인공 진파(縉派) 등으로 나누어졌다.
그러나 모두 경주배씨의 분파다. 시조와 중시조가 같은 뿌리이므로 근래에는 경주로 일원화했다.
배씨는 고려 개국공신이며 중시조인 배현경의 후광을 받아 고려조에서 번영을 누렸다. 조선조에서도 영의정 1명, 청백리 1명, 공신 2명, 문과 급제자 47명 등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배씨는 2000년에 총 59개의 본관에 인구는 372,064명이다. 성주배씨 90,239명, 분성배씨 71,268명, 달성배씨 61,104명, 성산배씨 36,164명, 흥해배씨 29,210명, 경주배씨 22,069명, 곤양배씨 7,328명, 나주배씨 3,789명, 협계배씨 63명 등이다.
< 정복규 논설위원, 한국의 성씨 강사 >
武烈公本傳 〈想白 古 923. 2-B145b〉
裵相哲 저. 1938년 간행.
1책(18장), 활자본(신식활자), 28 18. 8cm.
고려 태조 때의 공신인 武烈公 裵玄慶의 행적과 死後 그의 공적에 대한 포상 과정을 기록한 각종 문서를 편집한 책이다. '武烈公遺蹟序' 및 武烈公 影幀, 太師祠 연혁, 태사사 書院 基地圖, 무열공 山圖 등과 본서의 본문이라 할 수 있는 무열공본전, 포상 내용을 기록한 麻田郡祠廟誌, 禮曹受敎, 兵曹受敎, 태사사 賜額時 傳敎, 致祭太師祠文, 禮曹完文 등의 각종 문서,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798년(정조 22) 輔國崇祿大夫 判敦寧府事 兼 五衛都摠府都摠官 李敏輔가 찬한 '武烈公遺蹟序' 및 1937년 저자인 배상철이 쓴 본서의 발문을 통하여 본서의 편찬 경위를 알 수 있다. 이민보의 서문에 따르면 배현경의 유적을 담은 책은 정조 당시 이미 편집되어 있었던 듯하다. 삼한을 통일하는 데 큰 공적을 세운 裵玄慶, 申崇謙, 卜智謙, 庾黔弼 등 4太師의 후예 중 申氏만이 榮貴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쇠미하고 부진했는데, 裵氏는 貞節公 裵克廉이 고려말 왜구 토벌에 공을 세운 조선의 개국공신이었지만 역시 성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배씨의 후손이 先烈 備書를 편집하여 집안에 印藏해오다가 이민보에게 서문을 요청하여 무열공유적에 대한 서문을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본서는 세대가 오래 되어 史乘이 점차 逸失됨으로써 무열부군의 행적이 전하지 않게 될까 염려하여 전후 10년간 公私文字에서 취한 것으로 후손인 배상철이 편집, 간행한 것이다. 무열공영정에는 그의 생년과 몰년이 기록되어 있는데 唐 乾符 元年(874)에 출생하여 고려 태조 19년(936)에 卒함으로써 63세의 壽를 누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종래 배현경의 歿年만이 알려졌던 것에 추가하여 生年까지도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태사사 연혁을 보면 고려 태조 18년 平州(平山)에 申太師의 사당을 세웠는데 조선 정조 20년(1796)의 賜額으로 태사사가 되었다고 한다. '무열공본전'에는 初名이 白玉 또는 衫인 배현경이 太白山麓에서 태어나 신숭겸. 복지겸과 함께 道詵公에게 兵法을 전수받은 사실, 궁예 때부터 활약하다가 馬軍將軍으로 있을 때 신숭겸 등과 함께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태조 즉위후 1등 공신에 錄勳되었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많은 활약을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死後 994년(성종 13) 太師로 추증되어 太祖廟에 배향되었고 그 뒤 麻田의 崇義殿, 平山의 太師祠, 羅州의 草洞祠 등에 배향된 사실 등이 본전 및 이하의 각종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본서 편찬시의 방침이 실려 있는데 무열공 묘의 소재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밝힌 점, 공의 자를 '百紀'라고 한 보첩이 있으나 상세하지 않은 까닭에 생략했다는 내용, 辛酉大譜. 秉矩宗人이 쓴 공의 사적은 빙고할 것이 없는 까닭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 등을 밝혀 놓았다. 따라서 본서는 배씨 후손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객관성의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의 한계가 있지만, 고려의 개국공신인 배현경의 사적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가능케 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김영심)
裵氏勿侵事目(奎12660), 忠勳府(朝鮮)編.
1冊(7張) 筆寫本 32.4×21.2cm.
高麗 건국에 공이 큰 武烈公 裵玄慶의 후손들이 1799년(正祖 23)에 雜役과 軍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傳准을 요청하여 謄給을 받은 事目이다. 형식은 '忠勳府爲傳准事'로 시작되어 내용을 적고, 뒤에 13인의 連名과 官印이 찍혀 있다. 맨 뒷면에는 忠勳府의 수결이 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jh9961/L5zl/108?docid
[출처] 고려 개국공신 배현경(裵玄慶)|작성자 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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