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회상 초기의 10타원들②>
★<4타원 : 이원화(李願華)1884.10.3.~1964.2.17>전남 영산포에서 무남독녀로 출생. 4살 때 유괴를 당해 영광 부호 김진사의 양녀로 자랐다. 결혼 후 남편은 사별하고 영광으로 옮겨옴.
사타원은 “일찍이 심중에 도사를 만나 도를 배우고 도사를 후우너하고 싶은 남다른 서원이 있었는데 우연히도 주세불이신 대종사를 만나 가까이서 구도를 돕고 회상 창립하는 행복을 누렸다”고 회고했다.
대종사 구도시 가난과 폐인이 되다시피 한 가운데 극진한 시봉을 다 하였다.
대종사 구도시 옆에서 기도하길 “처사양반 병 낫고 고을 원님되사이다.”하고 올리자, 대종사 옆에서 듣고 “그까짓 고을 원님이 무엇인가. 신묘생 박처화 만국만민 다 구제하하고 일체중생 제도하는 성자되게 하소서라고 하시오”하였다.
방언공사. 구간도실 신축시에 조력을 함.
귀영바위에서 음식점을 하였는데 인심이 후하여 장사를 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져서 남지가 않는다.
길룡리 인근 사람들이 ‘부자한테 덕본 것은 없어도 이원화씨 집에 술 한그릇 밥 한그릇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원기 5년후 진안. 전주. 원평. 이리 등지로 다니며 순교활동을 하였고, 40년 봉직하는 동안 뛰어난 음식솜씨로 영산성지 살림을 알뜰히 꾸려 나갓다.
대종사 말하기를 “이원화는 숙세(宿世)의 선연(善緣)만 심중(深重)할 뿐 아니라 그 발원과 행실이 진급기에 있는 사람이다. 앞으로 이 회상의 발전에 따라 무량한 복록의 주인이 될 것이다.”하였다.
★<5타원 이청춘(李靑春)1886.3.26.~1955.7.14 >전주퇴기. 증산교 조철제를 믿고 2타원. 3타원을 알고 지냄. 김남천의 외숙질간. 이름이 화자(化者)에서 청춘(靑春)으로 바뀜. 원기 10년 입교기념으로 70마지기 논을 희사함.
원기 11년 2월에 호화로운 전주 가족을 다 정리하고 모친 김설상화와 함께 총부로 이사를 옴. 논 70마지와 사가를 정리 희사함.
원기 13년 3월 16일 교단의 1등 유공인으로 됨.
원기 20년 사재 1천여원을 투자 전주 노송동 가옥을 매입하여 전주교당 효시가 됨. 전주 교무로 재직. 33년간 남선교당 등의 교무로 근무.
★<6타원 이동진화(李東震華)1893.5.5.~1968.1.18.>함양 마천출생. 18세 서울 구왕궁 종친인 완순군 차남 이규용씨의 소실이됨. 신경쇠약에 위장병이 있었다.
서울에 대종사 일행이 상경할 때 뵈알함. 대종사께 인사를 안하자, 대종사는 “세상이 나서 사람의 큰일은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둘은 고해에 헤매는 중생을 제도하는 일이다.”는 법문을 듣고 절을 올렸다.
‘나는 꽃병에 든 꽃 시들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궁가를 버리고 출가를 발원함. 만덕산 초선시 대종사를 찾아뵐 때 뇌성벽력이 쳤다. 그래서 이동진화라 함. 총부에서 20여일간 하선을 난후 속병이 없어짐. 이완철과 경성지부 교무 4년. 병으로 4년 휴무. 5년간 순교. 총부 순교감. 교감 등으로 재직.
미모에다가 현숙한 인상은 관음상을 연상케 한다. 화분을 잘 길러 원광대학 등 교정원 사무실에 드렸다. 여자 교역자들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정재를 희사하기도 함.
★<7타원 정세월(鄭世月)1896.1.28.~1977.10.25.>총부 부지를 희사하신 서중안 부인. 남편 서중안 형제가 변산에 계신 대종사에게 하산을 간청하자 “내가 세상에 나가면 그대가 그 일을 감당하려는가?”하여 대답을 받았다.
총부부지 3,300평. 건축비 600백원을 희사함. 성격이 활달하고 치밀하며 과단성이 있음.
원기 17년에 출가하여 대종사의 수족역활을 함. 총부식당 주임 7년, 1년간 전재동포 구호사업을 함. 총부 순교 및 감원 등으로 헌신적 봉공하는 일꾼이었다.
도학(道學)에 정진하여 원기 20년 동선에 대종사께 초견성 인가를 받았다. 82세 나이로 열반.
★<8타원 황정신행(黃淨信行)1903~2004>속명은 황온순. 원불교의 수달장자이다. 황해도 연안출생. 서울 이화학당 중등부 졸(17세). 1년간 일본어 배우고 길림성에서 여자 사범학교 3년을 다녔고 이화여전 보육과를 졸업 유치원교사를 함.
남편 강익하(姜益夏)는 포목점과 병원과 보험을 운영하는 등 하는 사업마다 성공을 하였다. 서울의 2~3째 가는 부호였다.
잘 가꾼 이화장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병원은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가 되었다.
27세 결혼 후 1남 2녀를 낳았다. 원기 20년 여름 금강산을 여행중 이천륜 연원으로 서울서 대종사를 배알함. 중앙총부와 서울교당의 유지발전을 챙김. 탁아소 자선사업을 하여 6.25때 전쟁고아 900명을 헤스대령의 주선으로 제주도로 피난을 시킴.
원기 67년 사회복지법인 창필(아들 강필국과 9타원 아들 박창기 이름을 딴 것. 두사람은 6.25때 희생)재단을 설립하여, 보육원과 휘경학원을 운영하였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재정을 원불교 여러 곳에 크게 희사하였다.
★<9타원 이공주(李共珠)1896~1991>남원 운봉 큰 부자집 박장성과 결혼 후 남편이 일본 유학중 27세로 일찍 사망하여 근신중, 원기 9년 서울서 대종사를 배알 원불교에 입문하였다.
명문가의 집안에서 출생. 6세 한글수학. 10세때 최초 한국여성 미국유학생인 하란사에게 한문, 일어, 초급영문을 배움. 이화학당과 동덕여학교 수학. 황후 윤비의 시독을 함. 경성여자고등학교(현 경기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대종사 이공주에게 장래희망을 묻자 “일본 유학하여 문학박사가 되어 여자들을 계몽하고 싶습니다” 대종사는 “그러면 몇 사람이나 깨우치겠는가, 대통구멍 같이 작다(관견<管見>) 도덕박사로 인류를 구원하는 사람이 되어 천하가 다 함께 보는 구슬이 되시오”라 하고 이공주(李共珠) 법명을 내리셨다.
대종사를 뵈알할 때 대종사의 말을 잘 받아 적으니 대종사께서 “낙언성실(落言成實) 투필성자(投筆成字)”라 하여 칭찬함.
대종사 법설 수필과 많은 성가 작사를 하였다. 원불교 회보(會報)발간 및 원불교의 교단의 인물의 약력과 역사를 들을 정리한 제 1대 창립유공인 역사 7권을 발행하였다.
영광 정관평 빛 청산, 만덕산 15만평 구입, 박광전(원광대 총장) 일본유학비 보조, 교동교당 건축수리비 지원, 서울 수도원과 보화당 건립, 서울회관건립, 해외교화 후원 등 많은 재산을 원불교의 여러 분야에 크게 희사하였다.
★<10타원 양하운(梁夏雲)1890.11.3.~1973.1.7>대종사 사모님. 홍곡리 장지촌 출생. 15시에 대종사와 결혼. 4남 2녀를 두었다. 대종사 고행시 3번이나 집이 무너진 가운데 가정의 의식주를 책임지고 이끌어 갔다.
방언공사시 사재 400원 출연. 공사가 분명하신 대종사의 지침에 따라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심.
밭으로 논으로 다니며 노력하시고 발등이 찍혀 손상을 입는 등 애쓰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10타원을 돕자는 말에 대종사는 “그 사람도 창립의 한사람으로서 스스로 감당할 일이면 회상에 조금이라도 빛지지 않도록 하라”하셨다.
하루는 일을 하고 난 뒤에 제자들이 식당으로 향하면서 “10타원님도 같이 가시죠.”하자 대종사는 “하운이 빛지지 말고 집에 가서 먹어!”하였다 한다.
일하는 양하운이를 보고 “저렇게 일하는 것이 하운이의 보람이다”하셨다.
건강 튼실한 몸과 근면성실로 권장부의 역할을 다하셨다.
3남 1녀를 두시어 장녀 박길선는 주산 송도성과 결혼하였고, 장남 박광전은 일본 유학후 원광대 총장이 되었고, 차남 박광령은 일찍이 열반, 3남 박광진은 원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