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교육 원리(마9장9절)
국어사전에는 제자(弟子)를 [명사] 스승의 가르침을 받거나 받은 사람. 문도(門徒)라고
설명하고 있다.
제자란 과연 누구이며 또한 어떤 인물인지를 복음서를 통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로, 제자란 배우는 사람이다.
헬라어에서 제자는 '마데테스라'고 불리우는데, 이 마데테스란 단어는 본 래 만다노 즉 '배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의 명사형이다. 만다노는 신 약성경에서 25회 나타나는데, 공관복음 가운데 누가복음에서는 한 번도 없고, 마가복음 에서는 한 번(13.28),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세 번 사용되고 있다(마9.13; 11.29; 24.32).
제자란 단어가 '배운다'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일단 제 자의 의미는 배우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배움 즉 교육은 지적인 요소(지식)를 가리 킨다.
제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계속하여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 서 제자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입학은 있되 졸업은 없는 것이다. 모든 제자는, 교회 내에 서의 그 기능이 목사건 장로건 집사건 간에, 일단 입학하면 마침내 하늘나라에 갈 때까 지 계속적으로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둘째로,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일에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령 하셨다(막1.17; 2.14). 예수님 당대의 유대 문헌을 보게 되면 아무의 뒤 를 따른다고 하는 것을 곧 그 사람의 제자됨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런 용례를 우리는 마가복음 10장 32절에서 보게 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 들 앞에 서서 가 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 를 데리시고 자 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며 제자들은 두려워하면서 그 뒤를 좇아가고 있다.
예수님의 뒤를 좇아간다고 하는 것은 실천적 요소를 가리킨다 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앞서의 배움의 요소와 합하여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제 자도의 참 특징을 드러내주고 있다.
그러면 실천적 요소로서 우리는 제자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우선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가정(가족; 막1.20)과 재산(막1.18, 20)을 포 함 하여 모든 것(눅5.11; 막10.28)을 포기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도의 요건으 로 누가복음 14장 25-35절에서 가족과 자기 목숨을 미워하고 또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셨다. 이러한 것들의 포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또 포기하고 좇은 후에 후회할 수도 있기에, 주님은 포기에 앞서 세심한 숙고의 필요성이 있음을 비유로 써(눅14.28-32) 강조하고 있다. 즉흥적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추종자들을 권면하 실 때도 주님은 이런 류의 말씀을 주신 바 있다(눅9.57-62).
게르트 타이센은 예수님을 포함하여 이들 유랑제자들의 삶의 특 징을 마가복음 10 장 28절을 근거로하여 사회적 무근성(無根性; rootlessness) 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땅에서 뿌 리없는 삶을 살았다. 사실 이 땅에 뿌리를 깊게 내리면 내릴수록 우리는 이 땅을 떠나 기 싫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돈과 권력과 명예과 쾌락 등의 뿌리를 세월과 함께 깊게 더 깊게 내릴려고 애쓰는 가련한 이들을 보게 된다. 나그네는 짐이 무거울 경우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없게 된다.
유세비어스 교회사에서 보면 열 두 제자의 순교일지는 다음과 같다.
1.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힘 당했다.
2.안드레는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죽임 당했다.
안드레의 달린 십자가는 X형이었다.3.야고보는 예루살렘에서 헤롯에게 칼로 목베여 죽임 당했다.
4.요한은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부탁하신대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뫼시고 있으며 유대국내에서 전도하다가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로마군에게 멸망된후 에베소에게 가서 전도했다.거기서 핍박을 만나 저를 끓는 기름 가마에 집어 넣었지만 기적적으로튀어 나오게 되매 저를 박해라는 무리가 놀래서 저를 밧모섬에 귀양보냈다.거기서 저는 묵시를 받아 쓴 후 자기 수명대로 살다죽었다.
5.빌립은 소아시아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죽임 당했다
6.바돌로매는 알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꺼꾸로 십자가에 매달려죽임당했다
7.도마는 인도에 가서 전도하다가 창에 맞아 죽었다.
8.마태는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목베임 당했다.
9.알패오의아들 야곱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려 죽임당했다.
10.예얼이라고 하는 시몬은 애굽에 가서 전도하고 유대국에 돌아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죽었다.
11.야곱의 동생 유다의 파사에 가서 전도하다가 활에 맞아 죽었다.
12.맛디아는 가롯 유다 대신 선거된 제자로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다.
하나님은 그의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어려운 길을 걷게 하셨다.
예수님의 성공적인 제자 선택과 교육방식은 무엇인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보시고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삶과 행동을 자세하게 살피셨다는 것이다.
*요한과 안드레
요1: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5~37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두 제자와 서 있다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리양이로다라는 말을 했고 두제자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쫒았다.
*베드로
형제인 안드레가 전도를 하여 데리고 왔다
요0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가라사대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나다나엘
요01: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오늘 읽는 본문의 9절에는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셨겠는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 결단하는 모습, 그 마음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보셨다.
예수님이 병든자를 치료하시면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 믿음을 보시고,
마태복음4장18절에는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다.
또21절에는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는데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셨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인물들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이 말은 게으른 자를 쓰시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때 부름을 받았다.
사울은 나귀를 찾아다닐때 부름을 받았다.
다윗은 양을 치고 있을때 부름을 받았다.
바울도 열심히 예수믿는 자를 잡아들이려고 쫒아다닐때 부름을 받았다.
세실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게으른 목사보다 더 해로운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잠언을 읽어 보면 의외로 게으른 자에 대한 말이 많이 나온다.
제가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책이 로마인 이야기이다.
사둔지는 꽤 되었는데 근래에 와서 7권을 거의 다 읽어가고 있다.
거기서도 똑같은 원리가 하나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생각에 맞는 역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사람들을 살펴보고 제자를 삼았겠는가.
그 제자가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교회가 누구를 통하여 세상에 알려지겠는가?
우리는 목사를 핑계거리로 삼지만 사실은 내가 바로 교회를 얼굴이다.
나를 통하여 그 교회의 모습이 세상에 각인되는 것이다.
내가 착한 사람이면 교회도 착한 교회로 소문이나고 내가 거짓말 장이면
그 교회는 거짓을 일삼는 교회로 소문이 퍼지게 될 수밖에 없다.
2.나를 쫒으라
마9장9절의 마태는 수입이 생기고 안전이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예수님을 쫒았다.
마4장18~22절의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았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쫒았다.
우리가 결과를 보고 12제자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쉬운 답이 나오는 것이다.
정말 그 시대로 돌아가서 다시 부름을 받는다면 쉽게 예수님을 따를 인물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권력구조는 로마였다.
로마를 중심에 두고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그룹이 지도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종교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종교와 국가 체제가 하나로 묶여 있다.
예수님이 권력의 중심에 있거나 돈이 많은 부자도 아니였고 머리 둘 곳이 없는 낮은 계층의 사람이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거의 쪽박을 찼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없이는 예수님을 따를수 없다는 말이 된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을 할 때 숨겨진 이야기이다.
맥아더 장군은 남한 전체를 이미 점령하고 있는 공산군을 물리치기 위하여는 인천 상륙작전을 통하여 허리를 끊으면 인천 남쪽에 있는 적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면서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하면서 이런 구상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참모들은 절대 반대였다.
“장군님! 안 됩니다.인천 상륙작전은 99% 실패하는 길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상륙작전은 500번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성공한 것은 노르만디 상륙작전 한번뿐입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기상에 전문가 어밍 크리스티 박사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노르만디에는 프랑스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때 마침 거센 폭풍이 노르만디에 불어 왔습니다.
프랑스군은 도저히 배가 뜰 수 없는 상황이라 모두 안심하고 방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1944년 6월 6일 하루만은 바다가 잔잔하여 질 것이라고 예보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연합군 장군 아이젠하워는 그 날을 대비하여 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 날 갑자기 바다가 조용하여졌습니다.
방심하고 있는 프랑군을 기급공격하여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밍 크리스티는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로로 훈장을 받은 것이 노르만디 적전입니다.
그런데 인천은 다릅니다. 밀물과 썰물의 간차가 9m나 됩니다. 상륙작전을 하다가 만일 지연되어 물이 빠지기 시작하면 상륙작전하던 배는 갯벌에서 꼼짝도 못 하고 지상에 있는 적들은 그 표적을 백발백중 명중시킬 것입니다. 독안에 든 쥐가 됩니다. 위험한 작전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런 참모들의 제안을 듣고 맥아더 장군은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하나님! 우리의 운명은 500의 1 성공률에 걸리이까?
500분의 499의 실패율에 걸리이까?” 이 때 그의 마음을 조용히 두드리는 음성이 있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생각이었다.
맥아더는 결단을 내렸다.
주님의 제자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을 때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았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베드로는 고기잡이를 포기하고 그물을 씻고 있는 중이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말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사람들이 흔히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험이다. 사실 경험은 중요하다.
성경에서 센 머리앞에 머리를 숙이라는 말은 경험을 두고 한 말이다.
갈릴리 호수는 아침이 되면 고기가 깊은 곳에 가지 않고 아침 먹이를 구하기 위하여 얕은 곳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침인 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베드로에게 명하셨다.
이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 예수님은 목수 출신이군요. 목수는 건물을 짓는 현장으로 가서 잔소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 뼈가 굵은 어부요. 내 경험에 의하면 지금은 아침이고 깊은 곳은 고기를 잡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매순간마다 주님인가? 세상인가를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꼭 주님으로 판정이 나야 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내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결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용감한 사람은 목숨을 내놓고 무식하게 가는 사람이다.
3.꿈꾸는 자가 되라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를 보고 늘 그 정도에서 멈추어 버린 생각을 땅끝으로 향하게 하셨고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게 하셨다.
마10장7-8절에도 먼저 천국을 심어주신다.
그 후에 각종병을 치료 하셨다.
천국이 내 마음속에 있는자는 이 땅에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35장1-10절을 읽겠습니다.
천국의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한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내가 된 아그리피나
이다.
그는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하여 로마 철학계를 대표하는 세네카를 스승으로 삼았고 제위를 계승한뒤에는 그 보좌역을 맡을 인물로 까지 염두에 두었다.(후세 연구가들은 로마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공화정시대에는 키케로, 제정 시대에는 세네카를 꼽았다)
또 무를 맡길인물로는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선택했다
이 사람은 일개 병졸에서 대대장까지 진급한 인물이다.
이 뿐만 아니다.
아그리피나는 아들 도미티우스를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양자로 삼게 했고 이름도 네로 클라우디우스로 바꾸었다.
결국 그의 어머니의 생각대로 그의 아들은 제위를 이어 받은 네로 황제가 된다.
꿈과 의지는 마차의 수레 바퀴와 같다.
꿈이 있는자에게는 의지가 함께 굴러가게 된다.
존오웬은 목회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축복을 힘입어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사역에 임한다면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고 실패하는 그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대한 꿈은 있어도 하나님에 대한 꿈은 희미하다는 것이다.
성도의 꿈은 한가지뿐이다.
죄인을 인도하는 것이요 땅끝까지 예수를 증거하는 일이다.
맺 는 말
서임중목사님의 설교속에 나오는 내용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회를 담임하시는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Juan Carlos Ortiz) 목사님의 저서 가운데 “Disciple”이 있다.
그 책 저자의 서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성령께서 나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분의 첫 말씀은 이것이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
스트사가 잡지와 책을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 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
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라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다음에 주님은 두 번째의 말씀을 하셨다. <너는 자라나고 있질 않다 네 생
각에, 네가 교인 수를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다고 해서, 자라고 있다고 생각
하는 모양인데 그것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살이 쪄 가는 것이다>”
여러분은 제자입니까?
주님께 배우십시오, 배우시되 열심히, 깊이 아시기 바랍니다.
또 열심히 주님을 따라 그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이 나를 통하여 나타날 때 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방식으로 주님을 드러낼 때 참다운 제자의 모습이
내 속에 있을 것입니다.
2006년 12월 17일 새능력 교회 주일 오전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