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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프로야구 사상 가장 불운했던 올스타 롯데 내야수 김용철...
유광현 추천 0 조회 289 09.08.31 16:12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982년 7월 3일 광주구장. 이틀 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게임 1차전이 일찌감치 매진된 까닭일까. 2차전 표를 사려는 관중으로 광주구장은 오전부터 시끌벅적했다. 따지고 보면 더그아웃도 떠들썩하긴 마찬가지였다.

동·서군 선수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게 6개 구단 선수들이 한데 모이기는 프로야구 출범식 이후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어제의 상대와 같은 편으로 뛰는 건 선수들에겐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 와중에 그라운드 한편에서 묵묵히 스윙연습을 하는 이가 있었다. 롯데 내야수 김용철이었다. 김용철은 1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안타를 기록한 바 있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전반기가 끝날 때까지 타율이 4할에 가까운 그였다. 김봉연(해태), 백인천(MBC)과 홈런왕 경쟁을 벌이던 롯데의 중심타자였다. 그런 그가 팬 투표도 아니고 감독추천 선수로 올스타전에 참가한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명예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김용철을 동군 김영덕(OB) 감독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2차전 선발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타순도 5번에 배치했다. 이윽고 경기가 시작되고.

그러나 김용철의 첫 타석은 좋지 않았다. 1회 초 공격에서 서군 선발투수 김용남(해태)의 커브에 허우적대며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다. 그의 진가는 3회 초부터 발휘됐다. 서군의 구원투수 정순명(MBC)의 초구를 받아쳐 왼쪽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을 터트린 것이다.

5회 초에서도 역시 정순명으로부터 2점 홈런을 기록한 김용철은 7회 초엔 선두타자로 나와 서군의 3번째 투수 유종겸에게 중전안타를 뽑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김용철은 8회 초 서군의 마지막 투수인 이길환(MBC)의 2구를 노려쳐 장외홈런을 터트렸다. 올스타전 한 경기 3홈런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이 홈런은 4번 김용희(롯데)의 홈런에 이어 연속타자 홈런이라 더욱 가치가 높았다.

김용철의 맹활약에 힘입어 동군은 서군을 11대 6으로 이기며 전날의 패배를 설욕했다. 당시 13명으로 구성된 올스타전 기자단은 3차전에서 누가 이기든 김용철을 프로야구 출범 첫해 올스타전 MVP(최우수선수)로 선정할 것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결국, 3차전이 끝나고.

새한 자동차 맵시나 승용차 보닛 위에서 누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가 누군지 자명했다. ‘미스터 올스타’로 선정된 선수였다. 프로야구 초대 ‘미스터 올스타’를 취재하려고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린 통에 맵시나 승용차 주변은 북새통을 이뤘다. 그때였다. 누군가 ‘미스터 올스타’를 향해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 김용희 선수. 수상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 김용철은 부산팬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올스타 2차전을 치르는 동안 김용희는 8타수 3안타 타율 3할7푼5리 2홈런 3타점을 기록했다. 반면 당신은 6타수 5안타 타율 8할3푼3리 3홈런 4타점의 맹타를 휘둘렀다. 누가 보나 ‘미스터 올스타’는 당신의 차지였다.

3차전에서 (김)용희 형이 만루홈런을 칠 줄 누가 알았겠나(웃음).

당신의 말이 맞다. 3차전에서 김용희는 7회까지 3타수 무안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7회 초 서군 구원투수 유종겸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치며 극적인 뒤집기에 성공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용희 형이 ‘미스터 올스타’에 뽑히고 내한테 억수로 미안해했다. “내가 네 것을 빼앗은 것 같다”고 하면서 멋쩍어했다. 하지만, 용희 형이 잘해서 수상한 것이기에 전혀 미안해할 게 없는 일이었다.

‘미스터 올스타’ 김용희는 새한 자동차가 제공한 맵시나 승용차를 부상으로 받았다. 당신은 어땠나.

2, 3차전에서 우수선수로 뽑히며 팔자에도 없는 오토바이를 2대나 받았다(웃음).

‘미스터 올스타’는 대단한 영광이다. 한 세기가 지나도 야구연감에 명기될 역사적인 기록이다. 그런 ‘미스터 올스타’를 한 경기 3홈런을 친 1982년에 이어 10타수 4안타 타율 4할을 기록한 1984년에도 수상하지 못했다. 공교롭게 1984년 ‘미스터 올스타’도 김용희였다.

1984년 올스타전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내가 안타를 치고 나가면 용희 형이 기다렸다는 듯 안타를 쳤다. 다음 타석에 내가 또 안타를 치면 용희 형도 안타를 기록하고 그다음 타석에 내가 다시 안타를 치면 용희 형도 기어이 안타를 치는 상황이 반복됐다. 나도 열심히 했지만, 용희 형이 매번 나보다 잘했다. 어쩌겠나. 그게 운명인 걸(웃음).

오리지널 부산 사내, 무명의 야구선수가 되다

고향이 부산인가.

오리지널 부산 사나이다.

오리지널 부산 사나이가 어떻게 야구를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아버지를 보고 ‘행님’하며 따르는 야구부 감독님이 있었다. 그 감독님이 아버지한테 “아드님 야구 한번 시켜 보이소”하고 권유한 모양이었다. 그 길로 아버지 손에 이끌려 부산 부민 초등학교 야구부에 들어갔다.

현역시절 김용철은 리더십이 뛰어나고
호탕한 선수였다

아버님이 야구팬이셨나 보다.

젊으셨을 적 유도를 하셨다. 아들들에게도 모두 운동을 시키셨다. 그 통에 형은 복싱, 나는 야구 그리고 동생은 태권도를 했다.

초교 때도 체구가 좋았을 것 같다. 야구부에 입단하자마자 주전을 꿰찼을지 싶은데.

당시 부민 초교 야구부에서 나보다 키 큰 친구가 없었다. 1, 3루를 보며 주전으로 뛰었다. 하지만, 부산 대신중학교에 진학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다른 친구들은 다 키가 크는데 나만 그대로였다. 키가 작고 체구도 왜소하다 보니 중학교 때는 주로 2루수를 맡았다.

대신중 시절은 부산에서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만큼 무명이었다. 부산고, 경남고, 부산상고 같은 야구 명문고에서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고교 진학은 김응룡, 강병철 등 쟁쟁한 스타들의 모교인 부산상고로 했다.

원래는 경남상고(현 부경고)로 가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순전히 친구 덕분에 부산상고로 갈 수 있었다.

친구 덕분에?

문주언이라고 중학교 동창이 있었다. 이 친구가 야구를 참 잘했다. 부산고나 경남고에 갈 실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나를 받아주는 조건을 내걸고 제 발로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덕분에 나도 부산상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옛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참 옛날에는 그런 순수한 의리 같은 게 있었다.

그 정도면 평생의 은인이다. 요즘도 연락은 자주 하나.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몇 해 전 당뇨병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음, 괜한 소릴 했다. 죄송하다. 부산상고 시절은 어땠나.

2학년 때까지는 선배들에 가려 후보 신세였다. 팀도 강하지 않아 화랑대기대회에서 우승한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거포로 알려지기 시작한 건가.

(손을 내저으며) 아니다. 반대였다. 밀어치기에 능한 교타자로 이름을 알렸다. 사실 학생야구에서 밀어치기를 잘하는 타자는 그리 많지 않다.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고교 때 밀어치기 말고도 고교생답지 않은 부드러운 타격폼으로 정평이 나 있었던 것으로 안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프로야구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본프로야구?

당시 부산에선 웬만한 일본 방송은 죄다 잡혔다. TV를 틀었다 하면 요미우리 자이언츠 경기가 하게 마련이었다. 그걸 보면서 야구를 많이 배웠다. 특히나 요미우리의 4번 타자 나가시마 시게오를 좋아한 까닭에 그의 타격폼을 많이 따라 했다. 현역시절 내 타격폼이 영락없는 나가시마의 폼이었다. 참, 그 사람 타격폼 따라 하려고 밤새 얼마나 스윙연습을 했는지(웃음).

김용철은 고교시절까지 무명이었다. 노력으로
유명선수가 됐다

고 3때 갑자기 유명해졌다.

2학년 가을부터 키가 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0cm가 커 겨울옷이 죄다 맞지가 않았다. 체구가 커져 타격에 힘이 붙은 까닭도 있었지만 내가 3학년일 때 노상수 같은 뛰어난 후배들이 맹활약을 펼쳐 전국 무대에 자주 나갈 수 있었다. 날 아는 이들이 많아진 것도 그 영향이 컸다.

1975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했다.

부산상고가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전국대회 우승은 1964년 청룡기대회 우승 이후 11년 만이었다. (가늘게 눈을 뜨며) 얼마나 신이 났었는지 지금도 어제 일 같다.

실업야구의 ‘양키스’, 한일은행에 입단하다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등 유수의 야구 명문대에서 가만있을 리 없었는데.

내가 고 3때 최옥규 선배가 고려대에 다니고 있었다. 하루는 그 선배가 찾아와 “니 고대 꼭 온나”라고 했다. 그때는 대학 다니는 선배들이 감독한테 “얘 잘하니까 스카우트해주세요”하면 실제로 스카우트가 되던 시절이었다. 나도 고대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게 뭐였나.

고대에서 내밖에 받지 않겠다고 했다. 나 혼자 가면 날 위해 부산상고를 선택했던 (문)주언이는 어떻게 되나 싶었다. 마침 실업야구 한국전력에서 오라는 제의가 있었는데 주언이도 같이 받겠다고 했다. 아버지와 상의해 한전으로 진로를 잡았는데. 아, 글쎄.

?

황금사자기 끝나고 방학 때 서울에 있는데 야구부 부장 선생님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하시지 뭔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급히 학교에 갔더니 부장 선생님 옆에 누가 있었다.

그가 누구였나.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었던 김응룡 선배였다.

김응룡 감독이?

‘딱’ 날 보시고는 한마디만 했다.

뭐라고?

“이력서 써!”

이력서?

한일은행에 입사하겠다는 이력서를 쓰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날 스카우트 하려고 내려오신 거였다.

그래 뭐라고 했나.

젊은 시절 김 감독님의 덩치가 (양손을 옆으로 쭉 뻗으면서) 이랬다. 위압감에 제대로 눈을 못 마주쳤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저, 대학가야 하는데…그리고 친구도 함께 가야 하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김 감독의 반응은?

왜 김 감독님 특유의 말투 있지 않나. “알았어. 자식아. 도장이나 찍어.” (웃음). 언제 준비했는지 내 이름이 새겨진 목도장을 내미셨다. 완전히 얼떨떨한 상태에서 한일은행과 계약했다.

김용철의 트레이드마크는 장타와 구레나룻이었다

1976년 한일은행의 일원이 됐다. 당시 한일은행은 슈퍼스타들의 산실이자 그 자체가 국가대표팀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누가 아니라나. 당시 한일은행엔 백기성, 강병철, 임신근, 우용득, 강문길, 최남수, 주성로, 허구연, 노길상, 윤몽룡, 이성득, 김무관 등 쟁쟁한 스타들이 즐비했다. 지금 그런 선수들로 팀을 짜라고 해도 쉽지가 않을 거다.

당신이 입단하던 해 한일은행의 주전 3루수는 강병철이었다. 당시 강병철은 대표팀의 중심타자로도 맹활약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1976년 한일은행의 주전 3루수 겸 4번 타자는 19살의 신인이었던 당신이었다.

강 선배가 나 때문에 1루수로 포지션을 바꾸셨다. 타순도 5번을 치시게 됐고. 음, 그 모든 게 김응룡 감독님이 날 밀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 감독을 당신을 민 이유는 뭘까. 장타력 때문이었을까.

많은 이가 오해하는 게 있다. 내가 고교 때나 실업 때 홈런타자였던 걸로 아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다. 고교 때 홈런 ‘딱’ 하나 치고 졸업했다면 믿겠나? 실업 때부터 조금씩 홈런에 눈을 떴다. 실제로는 프로에 입단하고 나서 살이 많이 찌고 근력강화운동을 하면서 홈런타자가 됐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내가 부산상고 후배라는 점도 작용을 했겠지만, 그것보다 김 감독님께서 내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신 것 같다. 지금도 무명의 실업초년생을 한일은행 4번 타자로 과감히 기용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다.

입단 첫해부터 신인치고는 성적이 대단했다.

그해 실업야구에서 전반기 홈런을 4개나 쳤다. 한국화장품의 김재박 선배와 동률이었다. 하지만, 후반기 들어 김 선배가 홈런을 6개인가 치며 내를 앞섰다. 그때가 내가 기억하기로 아마추어 야구에서 알루미늄 배트를 쓰던 첫해였다. 전해까지만 해도 실업야구 선수들도 죄다 나무 배트를 썼다. 알루미늄 배트에 더 빨리 적응했다면 홈런이 증가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해 국가대표에 뽑히는 영광까지 누렸다.

1976년 6월 네덜란드 할렘에서 열린 국제야구대회에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당시 대표팀에 신언호, 김재박, 윤동균, 이해창 등 내놓으라는 선수들이 많았다. 아마 우리가 그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을 거다.

준우승 멤버였지만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표에 뽑히지 못했다. 만약 대표팀에 뽑혔다면 한국야구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었던 슈퍼월드컵의 멤버가 될 수 있었는데.

1976년 대표팀에 뽑혔을 때 경험이 짧았다. 그러다 보니 야구계에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다. 결국, 그 이후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고 1978년 군에 입대했다.

당시 입대를 다소 미뤘던 것으로 안다.

그때 현대가 기업은행, 한일은행, 제일은행 등 은행팀을 모아 롯데, 한국화장품에 이어 실업야구단을 창단하려고 했다.

현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현대에서 양복도 맞춰주고선 보너스로 30만 원을 줬다. 현대 관계자가 “앞으로도 월급을 30만 원씩 주겠다”고 했는데 그때 한일은행에서 받던 월급이 14만 원이었다. 당연히 나도 현대에 가고 싶었다. 그래 입대를 미뤘는데.

부산상고 선배인 김응룡 감독과는 상의했나.

처음에 “(현대로) 같이 가자”고 한 분이 김 감독님이었다. 당시 한일은행 선수는 다 실업 현대로 가기로 했다.

하지만, 실업야구단 현대는 창단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6년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했다.

한일은행 선수들은 다 간다고 했다. 그러나 제일은행 선수들은 빨리 결정하지 못했다. 당시 제일은행 노조의 반대가 극심했다. “우리가 충분히 지원하는데 왜 현대로 가느냐?”라며 적극 만류도 하고. 야구단이 은행의 자랑이었던 시절이니 제일은행 선수들이 흔들릴 수밖에. 결국, 제일은행 선수들이 오지 않는 바람에 현대 창단은 무산됐고 난 그 길로 군에 입단했다.

또 다른 최강팀 경리단에서 활약하다

육군 경리단에서 군 복무를 했다. 당시 경리단이면 최강의 실업팀이었는데.

박상열, 유승안, 김준환, 김일권, 유두열, 서정환, 김일환, 방기만, 김호인, 김대진, 장효조 같은 유명 선수들이 경리단에서 뛰었다. 그 정도 선수들이면 경리단이 얼마나 강팀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말끝을 흐리며) 음, 그때부터 나와 롯데의 악연이 시작됐다(웃음).

악연이라면 어떤?

1978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롯데와 만났다. 당시 코리안시리즈는 지금의 한국시리즈처럼 두 팀이 7전4승제로 겨루는 방식이 아니라 4개 팀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리는 식이었다. 그때 경리단과 포철, 롯데, 성무가 풀리그를 펼쳤는데 경리단의 마지막 상대가 롯데였다. 만약 경리단이 롯데를 이긴다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롯데 오리온스(지바 롯데 말린스의 전신)와 친선경기를 하기로 돼 있었다. 왜냐? 롯데 오리온스가 코리안시리즈 우승팀을 일본으로 초청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시절 김용철은 뛰어난 3루수였다

야구연감에 보면 함학수의 결승 홈런으로 경리단이 롯데에 1대 0 신승을 거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 일본에 갔나.

무슨 소리. 우리가 이겼는데 롯데 오리온스에서 “오지 마라”고 하지 뭔가. 알고 봤더니 당연히 롯데가 경리단을 이길 줄 알고 그 같은 약속을 했다는 것이었다. 난 그때부터 롯데가 그럴 줄 알았다(웃음).

당신이 복무하던 1978, 1979년 경리단은 실업야구 리그에서 두 차례나 우승했다. 롯데, 한국화장품, 포철, 한일은행, 농협, 한전 등 실업팀을 꺾고 군팀인 경리단이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리단은 육군 예하 부대의 예산 집행, 결산, 급여에 관한 업무를 취급하는 곳이다. 돈을 만지는 곳이니 그만큼 풍족할 수밖에. 게다가 당시 경리단 간부들도 야구단에 애정이 많아 매일 저녁마다 선수들에게 백숙을 먹일 정도였다. 여기다 경기마다 안타는 2천 원, 승리투수와 승리 포수는 2만 원, 홈런은 또 얼마 하는 식으로 인센티브 아닌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해 사기를 북돋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선진적인 야구단이 아니었나 싶다(웃음).

때론 애정이 집착될 수도 있다.

(크게 웃으며) 누가 아닌가. 성적이 좋지 않으면 높으신 분들이 우릴 뱅뱅이 돌렸다.

1981년 4월에 만기제대를 했는데.

1980년 10월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에서 경리단이 성무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때 우승하고 나서 휴가를 6개월이나 다녀왔다. 그도 그럴 게 10월 코리안시리즈가 끝나고 다음 해 4월 시즌 개막까지 별로 할 게 없었다. 마침 제대가 4월이라, 부대에서 6개월 치에 해당하는 휴가증을 줬다. 휴가가 다 끝나고 부대에 복귀하는데 머리가 말도 못하게 길었다. 혹시 군 생활 하면서 6개월 휴가 받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길 바란다(웃음).

롯데 창단 멤버가 된 김용철

당신이 제대하고 1년 뒤 프로야구가 출범했다. 1982년 롯데의 창단멤버로 당당히 이름을 올렸는데.

1981년 제대 후 한일은행에 복귀했다. 그즈음 신문을 통해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침 롯데에서 연락이 오면서 ‘아, 이제는 프로야구의 시대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프로야구의 출범은 실업야구의 종말을 의미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이 ‘쫙’ 퍼졌을 때 한일은행 관계자가 그랬다. “자네들이 다 프로로 가면 야구단을 없앨 것”이라고. 실제로 얼마 뒤 그렇게 됐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한국화장품의 김봉연을 기준으로 특급 선수는 계약금 2천만 원, 연봉 2천400만 원을 받았다. 당신의 계약금 1천500만 원을 고려한다면 A급 선수에 해당한다. 그만큼 롯데도 당신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뜻인데.

당시 그 돈이면 강남 아파트 두 채를 살 수 있었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년 롯데 구성원들을 살펴보면 당신은 선참급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1982년이면 25살 때다. 롯데 창단 구성원들이 다 나이가 많아 나보다 후배는 엄태섭 정도밖에는 없었다.

당시 롯데는 해태만큼 군기가 센 팀으로 알려졌다.

그랬지. 아주 군기가 셌다. 특히나 아마 롯데 출신 선수들이 많아 그분들의 목소리가 컸다. 사실 초반에는 출신고도 많이 따졌다. 부산고, 경남고, 부산상고 출신끼리 나뉘기도 했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원년 롯데 구성원의 리더는 가장 소수파인 경남상고 출신의 권두조 선배였다. 왜냐? 나이가 가장 많으셨거든(웃음). 참 재밌는 게.

재밌는 게?

초교, 중학교를 따져보면 다 동문이거든. 그런데 출신 고교를 그렇게 따지더라고(웃음). 나중에 삼성에 갔더니 삼성도 그래. 코치로 현대에 갔더니 유일하게 거기만 출신 고교를 따지지 않았다.

롯데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뒤에도 김용철은
성실하게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당신도 현역시절 엄한 선배로 불렸다.

1984년 괌으로 전지훈련을 갔다. 그때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입단한 신인이 있었다. 한번은 식당에서 배식을 기다리는데 이 친구가 선배들도 줄을 서 있는데 새치기를 하지 뭔가. 하도 기가 막혀 “니 인마, 미친나?”했더니 이 친구가 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그냥 ‘쓱’ 가는 거다. 알고 봤더니 이 친구가 대학시절 국가대표로 이름을 좀 날린 모양이었다.

기고만장했다는 뜻인가.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라. 식사 다 마치고 그 친구를 방으로 불렀다. 그때 방에 선배들이 쭉 앉아 있었다. 그래 내가 그랬다. “너 이놈 건방지게 어디 선배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그래. 니 괌에서 한번 혼나볼래!”

그랬더니 후배가 뭐라 하던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다음부터 조심하겠다”고 했다. 누구한테 이야기를 들었는지 다음날부터 태도가 ‘확’ 바뀌었다. 롯데는 그런 식으로 선·후배 간의 예절을 따지던 팀이었다. (창문을 바라보다가) 그때 그 후배가 누구였는지 아나?

감이 오지 않는다. 누구였나?

얼마 전 고인이 된 조성옥 동의대 감독이다. 그 사건 이후 성옥이와 무지하게 친한 선·후배가 됐다. 지난해 부산에서 내랑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도 끄떡도 않던 친구였는데…. 내가 경찰청 감독할 때 “행님. 우리 동의대 선수들 좀 받아도”하고 부탁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잠시 침묵)

당시 롯데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지금도 부산의 야구 열기가 대단하지만, 그때도 지금 못지않았다는 생각이다.

그땐 술집에 가면 술이 다 공짜였다. 목이 말라 ‘딱’ 맥주 한잔만 마시자 하고 호프집에 가면 여기저기서 맥주가 왔다. 손님들이 우리 마시라고 대신시켜준 술이었다. 그럼 고마워서 그걸 또 마셔야 하지 않나. 취하고 싶어서 취한 게 아니라 팬들의 사랑이 고맙고 뜨거워서 취하던 시절이었다. 거기다 구장에 나가면 어찌나 팬들이 많은지 사인공세에 엄청나게 시달렸다. (손바닥을 치며) 아, 맞다. 그때 생각나던 친구가 한 명 있다.

누구?

한번은 구장으로 들어가는데 야구복을 입은 어떤 녀석이 “아저씨, 공 하나 주이소”하지 뭔가. 뻐드렁니가 난 게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몇 년 뒤 신참 선수가 입단했는데 이름이 김민호였다. 뻐드렁니가 난 게 암만 봐도 어디서 본 얼굴이었다. ‘아차!’ 싶어 (김)민호 보고 “니 내 연습할 때 ‘공 하나 주이소’하고 졸졸 쫓아다니던 그놈 아이가”했더니 죽어도 아니라는 거야. 지가 맞는데(웃음).

결국 2인자였던 사내

1982시즌 전반기까지는 타율이 4할에 가까웠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발목부상으로 후반기 경기 출전이 줄고 타율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해만 그랬던 게 아니다. 다른 시즌도 항상 전반기에는 타율이 좋았다. 그러다 후반기 체력이 떨어지며 타율을 까먹기 마련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렇다고 마음 놓고 쉴 수가 있나. 발목을 다친 상태에서도 절뚝거리며 수비를 했으니 말 다한 거 아닌가. 요즘처럼 백업선수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체력을 보충하면서 더욱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거다.

프로야구 첫해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롯데는 우승은 고사하고 5위에 그쳤다. 당시 명장으로 꼽히던 박영길 초대 감독이 이듬해 옷을 벗었다.

박영길 감독님은 사람이 정말 좋으셨다. 후배들을 다 챙기면서도 일절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출중한 분이셨다. 하지만, 당시 롯데는 투수가 너무 없었다. 방망이로 버티는 것도 한계점이 있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김용철. 그러나
삼성에선 우승과 인연이 멀었다

프로야구 첫해 롯데는 ‘Y(김용철)-Y(김용희)포’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원래는 ‘Y-Y-Y포’였다. 나와 용희 형 뒤에 5번 타자로 박용성이 있었다. 1984년 홍문종이 입단하며 중견수 경쟁에서 용성이가 밀리며 ‘Y-Y포’만 남게 됐다.

김용철과 김용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두 이 모두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팀의 중심타자였다. 하지만, 성향은 다소 달라 보였다.

용희 형이 내보다 2살 위다. 개인적으론 초교 선배이기도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음, 스타일이 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성격도 그렇고. 난 좀 해보자는 스타일이지만 용희 형은 신중한 편이셨다. 사실 롯데는 ‘영차! 영차!’ 하는 분위기가 통하는 팀이다. 정말 롯데만큼 분위기 타는 팀도 없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야구 중계를 잘 보라. 조성환이 희생플라이라도 치면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잘했다. 니 진짜 잘했다”하면서 격려하지 않나. 롯데는 잘하면 잘했다고 감정을 드러내는 팀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신이야말로 김성한의 그늘에 가렸던 한대화처럼 김용희의 그늘 때문에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2인자가 아닐까 싶다.

프로야구 첫해 용희 형의 포지션이 3루였다. 나중에 1루로 가시면서 내가 3루를 맡았다. 그러다 용희 형이 허리부상으로 고생하시면서 1루에서 지명 타자로 빠졌다. 그때 내가 3루에서 1루로 포지션을 바꿨다. 어쩌면 내가 용희 형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이로 비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같은 팀 아닌가. 난 현역시절 그런 것들 때문에 서운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의 신화와 최동원

1984년 한국시리즈를 잊지 못하는 야구팬이 많다. 그해 삼성은 포스트 시즌에서 OB(두산의 전신)를 피하고자 롯데에 ‘져주기 경기’를 펼쳤다. 그 덕분에 롯데는 삼성과의 2연전에 승리하며 OB를 제치고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에 오를 수 있었다.

삼성이 정규시즌에서 ‘져주기 경기’를 했어도 한국시리즈는 진검승부였다. 사실 당시 롯데는 한국시리즈에서 져도 본전이었다. 삼성의 패인은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김일융을 계속 밀어붙인 것이었다.

당시 삼성의 에이스는 김일융이었다. 그의 대안이 있었을까.

김영덕 삼성 감독이 8회 초 4대 3으로 앞서고 있을 때 김일융을 마운드에서 내렸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때 김일융은 홈플레이트로 공이 오는 게 신기할 만큼 구위가 떨어져 있었다. 전 타석까지 17타수 1안타를 치던 유두열 선배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은 건 당연한 순서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그때의 드라마는 앞으로 100년이 흘러도 나오기가 어려울 거다.

롯데의 우승엔 최동원의 역할이 매우 컸다.

1958년 일본시리즈에서 니시테쓰 라이언스의 이나오 가즈히사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혼자 4승을 따냈다. 그때 일본에서 이나오 보고 ‘신’이라고 했다. 그게 맞는 말이라면 (최)동원이도 신이었다. 한국시리즈에서 4승을 지 혼자 따내지 않았나. (기억을 더듬다가) 아마 7차전이었을 거다. 동원이가 위기에 몰렸다. 그때 내가 1루수였는데 천천히 마운드 위로 걸어갔다. 동원이가 ‘이 선배가 무슨 말을 하려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래 무슨 말을 했나.

“할 말 없다. 그냥 왔다 간다. 잘 던져라.”

고작 그 말을 하려고 마운드까지 걸어갔나.

정규시즌 때는 “동원아. 니 경기 끝나고 뭐하노”하는 식으로 말하기 일쑤였다. 왜 그런 줄 아나. 그래야 긴장이 풀리니까. 그래야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 그래야 정신을 차릴 수 있으니까. 잔뜩 긴장하는 선수에게 “잘 던지라”고 주문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바보 같은 짓이다.

최동원은 최고의 투수였지만 적도 가장 많은 선수였다. 그를 둘러싼 뜬소문도 한둘이 아녔다. 하지만, 그때마다 당신은 최동원의 든든한 후원자역을 자처했다.

예전 서울 잠실구장에서 경기하면 항상 잠실 롯데호텔에서 묵었다. 동원이와 나는 그때부터 와인을 좋아해 롯데호텔 바에서 와인을 마시길 즐겼다. 하지만, 그때마다 동원이는 “피곤합니다. 먼저 올라가겠습니다”하면서 와인 몇 잔을 마시고 자리를 뜨기 마련이었다. 야구선수로 그만큼 절제력을 갖춘 선수를 본 적이 없다. 동원이 아버지(최윤식)께서도 아들 관리를 참 잘하셨다. 동원이가 하도 잘하니까 여기저기서 씹기도 하고 비난도 했지만 난 동원이를 인정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렇다면.

(말을 막으며)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하자. 동원이와 한팀에서 뛰며 그 친구가 온 힘을 다하지 않은 경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3일에 한 번씩 선발, 중간, 마무리 구분없이 출전을 지시받는데도 인상을 쓴 걸 보지 못했다. 고생이 정말 말도 못하게 심했다. 팀을 위해 그 정도로 던져줬으면 똥폼을 잡아도 되는 것 아닌가. 객관적으로 봐도 최동원은 당대 최고의 투수였다. 내가 봤을 땐 선동열을 능가하는 유일한 투수였다.

1992년 은퇴 후 삼성 코치로 활동한 김용철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최동원이 선동열을 능가했다고 생각하나.

동원이와는 프로에서 한솥밥을 먹었기에 실전에서 상대한 적은 없었다. 다만, 실업야구에서 몇 차례 맞붙었는데 그 당시가 동원이의 최고 전성기였다. 정말 동원이 직구는 쇳덩어리가 오는 것처럼 무거웠다. 게다가 제구가 끝내줬다. 지금껏 직구를 공 반개 차이로 제구하는 투수를 동원이 이후로 보지 못했다. 사실 (선)동열이는 직구도 좋았지만, 슬라이더가 더 좋았다. 슬라이더에 번번이 타자들이 속았다. 전성기 시절과 직구만 놓고 본다면 나는 동원이가 조금 더 뛰어났다고 본다.

하지만, 선동열에게 전무후무한 특정팀 상대 연승기록인 20승을 안긴 건 다름 아닌 당신의 소속팀 롯데였다.

어디 롯데가 그것뿐인가. 1988년에는 개막전에서 OB 장호연에게 노히트노런을 당하지 않았나. 보면 롯데가 참 진귀한 기록은 많이 갖고 있다(웃음).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 부산을 떠나다

롯데 시절 구레나룻으로 유명했다. 특별히 구레나룻을 기른 이유라도 있나.

원래 수염이 많이 나는 체질이다. 아침에 면도하고 저녁이 되면 수염이 수북이 자랄 정도다. 현역시절 하도 수염이 많이 나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 바쁘기도 해 콧수염은 깎고 구레나룻은 그냥 뒀다. 그러면 면도시간도 절약되고 장점이 많았다. 어찌하다 보니 그게 내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팬이 좋아하시는데 굳이 깎고 다니는 것도 이상해 그냥 뒀다.

하지만, 구레나룻의 롯데 프랜차이즈 스타는 1989년을 끝으로 더는 롯데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그해 이른바 ‘선수회 파동’ 주동자로 몰려 이문한과 함께 삼성 장효조와 장태수의 상대로 삼성으로 트레이드됐기 때문이다.

하루는 동원이가 날 찾아와 그런 말을 했다. “행님. 우리는 늘 야구에 받기만 하고 베풀 줄을 몰랐습니다. 선수들끼리 모여 사회봉사활동도 좀 하고 저 연봉 선수들 처우도 개선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하고.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당시 내가 롯데 주장이라 자연스럽게 선수회 롯데 위원장이 됐다.

구단의 반발은 예상외로 컸다.

각 구단 사장들이 동시에 “무조건 안 된다”를 외쳤다. 하지만, 어떤 사안이든 반대세력은 있기 마련 아닌가. 구단 측이 집요하게 반대했지만 우리는 버텼다. 롯데 선수들이 모여 선수회 결성에 관한 찬반토론을 했다. 아니 그런데 선배들은 죄다 빠지고 후배들만 남은 게 아닌가. 당시 후배들의 반발이 심했다. “나서려면 선배들이 나서야지 왜 우리가 나서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찬반토론에서 찬성이 많이 나왔다. 하지만.

하지만?

구단을 빼고 주변에서 모두 날 지지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귀에 “김용철, 저 자식은 지가 먹고살 만하니까 엉뚱한 짓 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혀를 차며) 허허 참. 내가 먹고살 만하면 왜 선수회에 참여했겠나. 동원이가 보복성 트레이드로 삼성 유니폼을 입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봉협상을 하려 구단 관계자와 만났다. 그분이 참 날 아끼셨는데 대뜸 그런 말을 하셨다.

무슨?

“어차피 선수회는 결성될 거다. 그게 역사의 흐름이다. 하지만, 용철이 네가 앞에 나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 네 앞에서는 다 네 보고 좋다고 하지만 뒤에선 다 네 욕한다.”

선수들끼리 이간질하려 한 말이었을까.

나도 처음엔 그리 생각했다. “그런 말 하지도 마소”하며 정색했다. 하지만, 그분이 “용철아, 내 말이 맞나 안 맞나. 조금 있다가 롯데 선수회 운영위원회 8명에게 전화를 해봐라. 네가 부르면 누가 나오는지 잘 보라”고 했다.

그래 전화를 했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분에게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알았습니다. 한번 두고 보이소”하고는 8명에게 전화를 걸어 “긴급 사안이 있으니 언제 어디로 나오시라”고 했다.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몇 명이나 나온 지 아나?

8명 모두?

꿈같은 소리다. ‘딱’ 2명 나왔다. 맥이 딱 풀리면서 ‘아, 이게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결심했다.

선수회를 더 활성화하자는 결심?

천만에. 내를 물가에 몰아놓고 내는 양말 벗고 물로 들어갈 준비를 했는데 저그들은 뒤에서 손가락질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구단에 날 트레이드 시켜달라고 요청했다. 깨끗하게 선수회 문제를 안고 떠나야 다른 선수들이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라.

요청하자마자 이틀 뒤에 집으로 전화가 왔다. 수화기를 들으니까 대뜸 “나 김종만 삼성 사장이오”하고 말하지 뭔가. (입맛을 다시며) 삼성으로 트레이드가 결정된 것이었다. 내가 트레이드 매물로 나왔으니 협상이 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바로 트레이드가 결정돼 사실 놀랐다.

현재 김용철은 실업야구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삼성에서 4년 더 선수생활을 했다. 트레이드된 첫해인 1989년엔 타율 3할4리 11홈런 64타점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삼성이 내게 정말 잘해줬다. 삼성에 처음 갔을 때 선배라고는 권영호 선배가 유일했다. 다 후배였다. 하지만, 후배들도 잘 따라주고 구단에서도 배려를 많이 해줬다.

은퇴와 지도자 생활

1992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해 발목이 부러져 제대로 뛰지를 못했다. 정동진 감독님이 “1년만 더 하라”고 배려해주셨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감독님께 말씀드렸다. “감독님, 절 데리고 있으면 고민하시게 됩니다. 제가 떠나는 게 감독님께 할 수 있는 마지막 도리입니다.” 그 길로 11년간의 선수생활을 접었다.

그 후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삼성에서 타격코치로 활동했다. 그리고 현대와 롯데에서 코치하고 2003년 8월부터 시즌 종료까지 롯데 감독대행으로 잠시 지휘봉을 잡았다. 많은 이가 감독대행 딱지를 떼고 감독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롯데 감독이 되지 못했다.

2003년에 이승엽한테 56호 홈런 맞지 않았다고 얼마나 욕을 먹었나. 믿기지 않겠지만 그게 감독선임이 안 된 주요 원인이었다.

기억난다. 그해 9월 27일 부산 사직구장이었다. 삼성이 롯데에 8회까지 4대 2로 앞서고 있었다. 1사 2루에서 이승엽이 나오자 롯데 벤치에서 고의사구 사인이 나왔다. 이승엽의 56호 홈런을 기다리던 관중이 흥분해 쓰레기통을 던지는 등 난동 끝에 경기가 1시간 30분이나 지연되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꼴찌팀 주제에 무슨 1승이라도 더 건지겠다고 고의사구를 하느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자기들 생각이다. 프로는 승리를 위해 존재한다. 끝까지 온 힘을 다해야 한다. 그때는 이승엽이 아니라 이승엽 할아버지라도 걸려야 할 때였다. 게다가 전 타석까지 우리는 이승엽과 정면승부를 펼쳤다.

공교롭게 대구에서 열린 시즌 마지막 경기의 상대가 롯데였다. 이 경기에서 결국 이승엽의 홈런이 나오긴 했다.

전날 내가 (이)승엽이한테 전화를 했다. 하도 스트레스가 받아서 “승엽아. 홈런만 치려고 하지 말고 타이밍 좀 맞춰라”하고 소릴 질렀다(웃음). 그날 선발투수였던 이정민에게도 “정면승부 하라”고 지시했다. 운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승엽이가 아시아 홈런 신기록인 56호 홈런을 쳤다.

밤하늘에 56호 홈런을 축하하는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마음이 어땠을까 궁금하다.

마운드 위로 올라가서 (이)정민이한테 그랬다. “잘 던졌다”고. 정민이는 “실투였습니다”하고 웃더라고. 둘이서 기분 좋게 웃었지. 그날 경기에서 정민이가 다행히 승리투수가 됐다.


이름 : 김용철(金容哲)
생년월일 : 1957년 9월 21일
체격 : 184cm / 90kg
이력 : 부산상고-한일은행-경리단-롯데-삼성-삼성 코치-롯데 코치-롯데 감독대행-경찰청 감독
프로입단 : 1982년
통산성적 : 개인통산 1024경기 출전 타율 2할8푼3리 968안타 131홈런 555타점/ 1984년 최다 승리타점상, 골든글러브상 1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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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9.08.31 16:13

    첫댓글 점점 잊혀져 가는 스타였죠... 참 방망이가 좋았는데...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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