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불교 역사
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역사도 알 필요가 있다. 인도를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룬 왕조는
(BC 321~185) 마우리아왕조
(AD 380~606) 굽타왕조 때는 힌두교가 대두되고, 인도 고유문화가 발전한다.
(AD 1526~1858) 무굴왕조 등 세 왕조뿐이다. 무굴왕조는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한 이슬람 제국이다.
무굴왕조 멸망 이후에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47년 8월15일에 독립하여 인도는 주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대립으로 인해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불교의 스리랑카로 나뉘어졌다.
불교는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대왕에 의해 크게 발전하고, 마우리아왕조가 무너진 뒤 쿠샨왕조의 카니슈카왕 때 불교를 보호하고 포교에 힘쓰게 된다.
자료출처 금강신문 제549호 2016년 5월1일 발취 천태종 성지순례 편.
◎근대불교 역사 청담스님 (1902~1971)
청담스님(1902~1971)은 성산 이씨 이화식(이차근)과 어머니 제주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1919년 보통학교(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3.1운동에 참가했다. 20세에 진주농업학교 입학하고 1921년 청년시절 진주호국사 박포명 스님의 ‘마음’ 법문을 듣고 출가해서, 2926년 박한영스님(1870~1948)으로부터 경과 율과 논 등을 수학하는 중에는 전국학인대회를 주도했다.
1937년 사찰령 제정 공포한 데라우치가 후임 미나미지로가 본산 주지 회의에 참관한 청담스님이 “불법에 의하면 비구승 한 사람을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하였거늘 데라우치 총독은 비구승 수천 명을 파괴시켰으니 무간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고 하는 선지와 법력에 감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만공선사로부터 화두를 받고 정진하여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예부터 부처와 조사는 어리석고 미련해
어찌 이 쪽 일을 알 수 있으랴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한 소식 묻는다면
길 옆 고탑이 서쪽으로 기울었다 하리라.
청담 스님은 한국 근 · 현대 불교의 대표적인 선사로서 평생을 참선수행을 통한 불교교단의 정화운동과 중생교화의 보살도 실천을 행동으로 보이신 선지식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의 토대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신 대종사였다.
정화운동의 동기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한 이래 우리나라 불교계에는 여러모로 변동이 일어낫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승려들이 술 고기· 담배를 먹는, 특히 대처문제(帶妻問題)였다. 원칙적으로는 대처하지 않는 것, 이것은 부처님 이후 출가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이다. 글자 그대로 수천 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권위를 가진 전통이기도 했다. 어쨌든지 간에 청정해야 하는 불법문중에 훼법분자(毁法分子) 대처승이 생겨났으니 근대 한국 불교 승단에서 막행(莫行)· 막식(莫食)하여 처자를 거느린 비법승배(非法僧輩)들이 종권에 등단하고 교계를 혼탁케 한 마침내 호법정화의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 정책의 비호 아래, 파계환법자 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히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정화의 이념
청담스님의 정화는 1954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정화 ‘유시’에 촉발되어 1962년 4월 통합종단의 출범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비구스님 중심의 자체 정화를 말한다.
출가하여 견성한 후 그의 보임(保任) 만행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걸망에는 상비약과 삭발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머리가 긴 아기나 어른을 만나면 머리를 깍아 주고 부처님의 정법을 일러주기도 했으며, 부스럼이나 상처가 난 사람을 만나면 약을 발라 주고 치료도 해주었다.
또 남의 집 처마 밑에서 한밤을 지세 우며 인생무상을 되씹기도 하고 때로는 심해(深海)에 고요히 가라앉은 무딘 바위처럼 무뚝뚝한 시골 머슴들이 거처하는 사랑방에서 그들의 온갖 놀림을 받아가면서도 오히려 태연자약하게 대꾸해주며 한 구석진 곳에 새우잠을 자기도 했다.
혹독한 겨울 추위에도 맨발과 홑옷으로 지냈으나 가사장삼은 꼭 입고 다녔다.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사시사철 언제나···, 근세조선 5백 년 동안 천대받던 ‘중놈’ 이지만 언젠가는 신라·고려시대와 같은 찬란한 불교 중흥을 이루어 3천만 겨레 모두에게 숭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중놈이, 아니 삼계의 도사와 사생의 자부가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굳은 각오와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담대종사의 청정승가 회복 운동
청담스님의 정화불사는 부처님의 증명과 보살의 비호 아래 견고한 신념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청담스님의 정화정신으로 요약된다.
1. 구도와 순교적 신명이었다.
2. 정법수호의 발심과 불과성취에 대한 불심 즉 상구보리하화중생의 보살정신이다.
3. 출가본연의 전통과 율의를 정비하여 선가의 청규와 백장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4. 한국불교전통의 호국불교 정신으로 민족의 자주적 정신을 고양시켰다.
5. 격변의 사회를 정화시키기 위한 도제양성, 역경사업, 포교 사업을 하다.
6. 인간자유와 민권신장을 위한 선각자적 사회운동가 정신이다.
7. 현대 시대에 맞는 불교정립과 교단체계를 완성하였다.
“난잡한 요정으로 변해 버린 불교사찰이 청정도량으로 정화될 때까지 목숨을 다 바쳐 싸우자.”
“근대 한국불교의 정화운동이란 불교와 불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승단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에 배치되는 요소는 제거해야 한다.”
청담스님의 불교전통 수행의 정화운동의 배경
청담스님의 생존시대는 다음과 같은 격동의 시대였다.
1, 일본의 군국주의 정신에 협조한 일본의 각 종파가 한국에 진입하였다.
2, 1876년 서양의 전교사 활동이 급증하여 국민의 정신적 가치관이 혼돈되었다.
3,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의 억압적 사고에서 벗어나 한국승려들의 자각의 시기였다.
4, 조선시대의 억압과 전쟁을 겪으면서 불교는 민중을 이끌어가지 못했다.
5, 격동하는 시대에 국민들은 동학운동과 같은 신흥종교가 발생했다.
6, 현대 한국불교의 교단을 완성하는 초석을 마련하는 시기였다. 즉 선 수행 납자들 중심의 한국불교 전통성과 주체성확립을 주창하는 운동과 한용운의 유신론과 개혁론은 교단의 조직화, 근대포교방법과 교육개혁 등을 강조하게 되었다.
7, 일본강점기에 제정된 31본산제도와 친일사상을 교육하고 일본식의 대처육식제도를 허용함에 따라서 1924년 이후는 대처육식이 보편화되고 승가의 계율이 무시되었다. 총독부는 주지의 자격을 비구계의 수지 여부와 관계없이 부여하여서 사찰운영과 정신을 부패시키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하였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의 불교정화의 유시가 있을 때까지 본사는 거의가 대처승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처승을 둘러싼 분쟁은 수많은 종파들이 난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대인들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 내가 무어냐?
사람이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이고, 꼭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
이 두 가지만은 꼭 배워야 합니다. 부처가 되는 길이 마음 깨달아 우주에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갈 길입니다. 불교를 믿고 마음을 깨치면 생사를 초월한다. 마음을 깨치면 부처이니 석가여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칠 수 있는 법을 그대로 남기어 놓았으니 부처님 하시던 그대로 수도를 하면 된다.
마음 찾는 공부
우리가 할 일은 오직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다. 이 마음을 깨쳤을 때가 곧 부처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마음을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바로 이끌어 주고, 복 받게 해주고 잘 살릴 수 있는 부처가 되고자 하는 것이며, 우주를 다 내 마음대로 하자는 것이다.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 분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 깨치는 선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이 있습니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써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 철학적, 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다 따져가며 닦는 행법입니다.
참선하는 방법
원상?
마음인지 원상?
영원인지 이름도 아닌 먹고 자고 일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일구월심 생각하여 이 생각이 뭉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꿈에서도 이 무엇인고?
화두일념이 한 뭉치 되어 이 무엇인고? 할 뿐이다.
간화선 수행의 과정은 다음 단계를 통해서 삼매가 깊어지고 윤회로부터 벗어난다.
1. 소리를 내어 외우며 익히는 것이다.
2. 생각으로 의심이 생하거나 생하지 않는 단계이다.
3. 의심이 나거나 나지 않거나 하는 단계로서 애써 열심히 정진한다.
4. 간절한 마음으로 간화하게 되어 망상이 끊어지고 오래 좌선한다.
5. 참선할 때에 하루 종일 앉아도 모르고 화두가 순일하다.
6. 좌선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매를 맞을 지라도 화두가 진일보한다.
7. 꿈속에서도 화두의 의심이 있게 된다.
8. 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화두가 여일하다.
9. 마음자리를 깨달아서 생로병사에 자재하다.
10. 내생 부모인연을 만나서 문득 망상을 일으켜서 생의 이치를 따르게 된다.
11. 입태하여 열 달 동안 화두가 일여하지만 태어날 때 깜박 잊어버린다.
12. 태어날 때도 화두일여가 되어 영원히 화두 일념이 된다.
13. 이렇게 영겁에 일여해서 위가 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성불하게 된다.
즉 화두를 통해서 부처의 경지에 까지 도달하는 선정의 단계를 밝혔다.
생사자유와 해탈을 얻어 영원한 자유 (금강경 대 강좌)
불법은 마음 깨치는 공부이므로 지식이나 학문하는 태도로 임해서는 석존의 깨달음을 몸소 자기 것으로 체득할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서 성불하기 전에는 불가능하며, 이것은 오직 석가여래 한분만이 우리에게 전해준 소식입니다. 이제 마음 깨치는 선법에도 전문적으로 하는 달마선과 천천히 닦아 익히는 의리선(義理禪)이 있습니다. 달마선이란 마음을 곧 깨치는 선법으로서 고속으로 가는 방법이고, 의리선은 과학적, 철학적, 이론적으로 따져 볼 것 따져가며 닦는 행법입니다.
달마선은 돈오견성(頓悟見性)
마음이란 열반이나 반야 · 불성 · 생명 · 중도 · 영혼 등이 함축되어 있는 표현이다. 가장 간단하며 평범하게 그 생명의 실질을 표현하는 우리말은 ‘마음’이다.··· 우리말로 ‘마음’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 을 말한다. 즉 ‘생명이 있는 것’ 을 마음이라 한다. 한문 경전에도 ‘심즉시불(心則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 라 했다. 선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 골자가 심즉시불을 말한다.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다. 이 마음은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다. 하느님에게도 구속되어 있지 않고, 부처님이나 진리에도 걸려있지 않기 때문에 이놈이 자유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마음이다.
유심사상(唯心思想)
마음을 여의고는 만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오직 마음을 밝히고 마음을 의지하여 만사를 자재할 수 있는 영원무궁한 대자유인이 되어서 만중생의 구세주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높고 큰 원력을 굳게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일체가 모두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것인데, 마음이 만들었다고 하면 만든 마음과 만들어진 객관이 있게 되어 거기에는 주관, 객관이 또 벌어질 수 있으니, 일체유심이라, 지을 조자 하나를 빼버려야 알기 쉽다. 오직 마음뿐이다. 일체가 마음이다. 그러므로 일체가 불법이다.
참선을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하여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허망한 것은 간직해 보아야 없어지니까 허망하지 않을 걸 찾자. 그것은 내 마음밖에 없다. 다른 건 허망하다. 우리가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도 허망이고 진리도 허망이며, 허망한 것은 전부 허물어지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이다.
모든 허망에서 탈피하여 허망을 내 마음에서 버릴 때 나는 곧 내 본래 부처를 만날 수 있다. 딴 데 간 것도 아니고 다만 육체를 나라는 착각 때문에, 딴 착각을 해서 그것이 바빠진 것뿐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고 하고, 오온(五蘊)을 나라고 하기 때문에 천당 지옥을 생사윤회하고 있다.
지눌 스님의 문헌 (보조국사 지눌)
1182년 25세 때인 대정 22년 (1182) 임인에 승과에 합격하고, 얼마 후에 남쪽으로 유행하여 평창 청원사에 머물렀다. 어느 날 처소에서 육조단경을 보다가 “진여자성이 생각을 일으키니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만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진성은 항상 자재하다.” 라고 한 데 이르러 매우 기뻐하며 미증유를 얻고, 일어나 불전을 돌면서 그것을 외우고 생각하며 의미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이로부터 마음은 명리를 싫어하고, 항상 깊은 숲 속에 숨어 간절하고 고요히 그 도를 구하고자 하여 잠깐이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였다.
대정 25년 (1185) 을사에 하가산(下駕山) 보문사에 머물며 대장경을 읽다가 이장자의 화엄경합론을 얻어 더욱 심심을 내었다. (이치를) 찾아내 드러내고 숨은 것을 찾아 (그 의미를) 씹고 씹어 정수를 맛보아 이전의 앎이 점점 밝아졌다. 이에 마음을 원돈(圓頓)의 관문(觀門)에 두었으며, 또한 말학(末學)들의 미혹함을 인도하여 못을 제거하고 쐐기를 뽑아주고자 하였다.
스님께서 일찍이 말씀하셨다.
“내가 보문사에서 지낸 이후 10여년이 되었다. 비록 뜻을 얻어 부지런히 닦아 헛되이 시간을 보낸 적은 없으나 아직 정견(情見)을 버리지 못하여,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에 걸려 있어 원수가 있는 곳과 같았다. 지리산에 머물 때에 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얻었는데, ‘선은 고요한 곳에도 있지 않고 또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으며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에도 있지 않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에도 있지 않다.
그러나 먼저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이나 날마다 반연에 응하는 곳이나 생각하고 분별하는 곳을 버리지 않고 참구하여야 홀연히 눈이 열려서 비로소 그것이 집안일임을 알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뜻이 딱 들어맞아 자연히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같이 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편안하고 즐거웠다.”
이로 말미암아 지혜와 앎이 점점 높아져 대중들이 스님을 우러르게 되었다.
육조단경을 통해 처음으로 깨달음을 체험한 지눌은 화엄론을 통해 화엄경의 교설이 육조단경의 가르침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세존이 입으로 설한 것은 곧 교(敎)가 되고, 조사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곧 선(禪)이 된다. 부처님과 조사의 마음과 입이 반드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어찌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 각자 익힌 바에 안주해서 망령되게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게 세월만 죽이겠는가.” 하고 탄식한다.
통일신라
668~935년 유식과 화엄의 교법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867 임제의현
“부처님과 조사가 수용한 것은 이 3구를 벗어나지 않았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중생들에 이르기까지의 본분사(本分事)이다.
“만약 이 법을 벗어나서 법을 설하는 것은 허망된 것이다.”
그러므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여러 조사들, 나아가 천하의 선지식들이 남긴 언구는 이 3구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고 한 것과 같이 임제 3구를 조사선의 기준으로 보았다. 임제 3구란 다음과 같다.
임제의현에게 한 승이 물었다.
“진정한 부처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과 진정한 깨침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스님께 바라건대 가르쳐 주십시오.”
임제가 말했다.
“그대가 물은 진정한 부처란 마음의 청정을 말한다.
(이것은 뛰어난 바탕을 말한다.)
그대가 물은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이란 마음의 광명을 말한다.
(이것은 뛰어난 작용을 말한다.)
그대가 물은 진정한 깨침이란 곳곳에서 처해 있어도 걸림이 없는 청정광명을 말한다.
(이로써 임제는 묘유의 세 가지 뜻을 말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진정한 부처와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과 진정한 깨침의 셋은 곧 하나이다. 그래서 이 셋은 모두 공하여 실유가 없다.
(이것은 곧 진공의 일규(一窺)이다.)
내가 말하는 오늘의 이 견해는 제불과 제조사들의 견해와 조금도 차이가 없이 동일하다.
제1구에서 깨달으면 부처와 조사가 될 것이고,
제2구에서 깨달으면 인천의 스승이 될 것이며,
제3구에서 깨달으면 제 몸도 구제할 수 없다.
즉 체상용의 본체는 진공묘유인 것을 밝힌 것으로 이 뜻에 대한 논쟁을 통해서 조사선과 활구선의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고려초기 9산 선문
고려 초기에 걸쳐 형성된 9산 선문, 구산선문을 최초로 개창한 9명의 조사.
1. 가지산문, 보림사, 도의국사
2. 실상산문, 실상사, 홍보국사
3. 동양산문, 태안사, 혜철국사 785~861
4. 봉림산문, 봉림사, 현국국사 787~868
5. 사자산문, 흥녕사, 도윤국사 798~898
6. 도굴산문, 굴산사, 범일국사 810~880
7. 성주산문, 성주사, 무염국사 800~888
8. 희양산문, 봉암사, 도헌국사 824~882
9. 수미산문, 광조사, 이엄국사 870~936
신라하대
1158년 한국에 선이 전래된 것은 신라하대이지만 한국에 선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게 된 때는 보조국사지눌(普照國師知訥)(1158~1210) (명종8~고종21) 이후이다.
고려후기
1238년 조선시대에 고봉원묘(高峰原妙)의 ‘선요(禪要)’를 선가에서 애독하기 시작하면서 간화선의 교과서가 되었다. 1328년 주자학과 성리학은 실천 윤리를 강조하면서 불교를 비판 대표적 유학자 이색 1337~1392 정몽주 1337~1392 정도전 1342~1398 등.
조선시대
1350년 나옹화상이 몽산(蒙山)을 중국에 가서 친견하고 돌아와 1350년에 몽산법어 약해를 편찬 한 이후 몽산이 편집한 (육조단경)과 법어는 우리나라 선가에서 가장 많이 유통되었다.
1392~1910년 배불론과 숭유억불 정책은 임진왜란 때 까지 지속되었다.
1400~1418년 태종
1418~1450년 세종, 억불 성격의 정책을 실시 종파통합 페하여 사찰 승려 감소시킴.
1451년 조선 초기 수유억불(祟儒抑佛) 정책에 의해서 사회적 지위를 상실한 한국불교 교단 은 산중의 사찰 중심으로 종교적 역할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기 문정왕후와 허응당 보우스님의 불교중흥 노력에 의해서 승과제도와 도승법이 실시되고 전통 선풍을 진작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1460년 혜각스님이 몽산법어명록언해(蒙山法語胳錄諺解)를 한글로 번역한 책으로 동국대에 소장되어 있고 보물 제767호로 지정되었다.
몽산법어는 간화선에서 유명한 조주 스님의 ‘無’자 화두 참구 법을 자세한 가르침을 남겼다. ‘조주구자무불성(趙州拘子無佛性)’ 간화선을 수행하는 자가 경계할 것은 ‘무’에 집착해서 분별로 ‘있다 없다’ 로 알려고 하거나 오직 ‘무’ 라고 하거나 어떤 이치나 사량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위를 보고 해석하지 않아야 하고 굴속에서처럼 몽롱해서도 안 되며, 알려고 하거나 문자나 글로서 알려고 하거나 깨닫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현재는 5대 총림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다. 즉 수덕사, 해인사, 통도사, 백양사, 송광사 총림의 선사들의 법맥으로 알려져 있다.
1467년 세조 13년에 만들어진 수심결(修心訣)이 한글로 편찬되었으며, 그 후 조선 성종3년(1472)에 간행한 약해가 있다. 고려시대의 선법은 조선시대에도 선사들의 ‘산중불교’ 형식으로 계승되었다.
1506~1544년 중종, 승과제도와 도첩제를 없애서 극도의 배불정책을 강행 1544~1610년 사명유정(四溟惟政)은 가등청정(加藤淸正)과의 대담에서, “왜장의 머리를 베어 왜란을 종식시킬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보배는 당신이다.” 라고 하여 ‘설보화상(說寶和尙)’ 이란 별명을 갖게 되었다. 스님은 일본에서 국교재개를 완수하고 인질 남녀 3000명을 데리고 귀국했다.
1566년 까지 유생들의 반발로 문종원년 승니(僧尼)의 왕성출입을 금지 되었고, 승려의 사회 적 지위는 급격히 낮아지게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 선종 정통선맥을 계승한 서산휴정(西山休1520~1571)과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의 구국과 승병활동에 의해서 불교는 다시 국민의 호응을 받고 국가종교로서 확립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선종의 선맥을 선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566년 명종, 서산대사 휴정(1520~1604)선종 가풍확립에 의한 시기로서 산승불교 전성기를 말한다. 즉 문정왕후(1501~1565)가 선교양종을 다시 세우고 승과를 부활시켰다. 봉은사를 선종본사로 하고 봉선사를 교종본사로 하였다.
허응당 보우(1509~1565)를 판선종사로 하였다. 보우의 업적은 선교양종의 승과를 부활시켰고 승려에게 도첩을 주어 도성출입을 허용하게 하였으며 전국의 쇠락한 사찰을 중건한 것이었다. 보우는 조정백관의 유생들에게 요승으로 비판되었지만, 보우의 뛰어난 사회의식과 정법수호의 정신은 후대 서산과 사명의 제자를 양성해서 불교를 통해서 국난을 극복하고 한국불교 정신을 계승하게 하였다.
1623년 유생들의 불교배척과 비난에 의해서 고종2년 (1865년)까지 승려의 왕선 출입이 금해졌다.
1627년 인조5년 서산과 유정의 제자 응양(1572~1645) 명조(1593~1661)는 인조왜란에 의병대장이 되어 4천명의 의승군으로 안주에 진을 쳐서 전공을 세우고 가선대부국일도대선사 호를 받았으며 병자호란에서도 군량을 보급하였다.
1865년 약 3년 동안 승려의 입성을 허락한 것은 승려들을 경복궁 중건에 사역하기 위해서 였다. 삼국시대 불교가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 한국불교는 왕실의 보호 하에 무속, 도교, 토속신앙 등과 습합되어 고려시대의 사상과 종교 문화를 완성하였다. 왜냐하면 유교는 한문을 읽거나 이해할 수 없는 서민들에게는 종교가 될 수 없었으므로 불교는 민중의 저변에 깊이 토착되었던 것이다.
정치적 경향은 유교를 지향하면서도 왕실과 일반 민중은 관혼상제 등의 생활 속의 신앙적 형태는 불교에 의존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부터 성리 학자들을 중심으로 불교에 심취하였는데 성균관의 목은 이색, 율곡 이이, 다산 정약용, 원당 김정희 최치원 등이 있었다.
조선 말 개화파의 유대치와 김옥균, 박영효 등은 선사(禪師)들과 교류가 깊었다. 한편 승려 이동인은 일본 동본원사와 천초(淺草)별원에 체류하며 정보, 문헌, 자료를 수집하였고, 고종과 김홍집과 함께 조미조약(朝米條約) 작성이나 대일 대곡파와 개화를 추진했다. 이와 같은 개화파의 적극적 활동은 배불정책하의 한국 불교가 교단의 정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다.
1876~1910 근대교단의 태동시기
1880 이동인 스님을 비롯한 불교인 개화파가 근대화를 통한 불교발전을 시도 했으나 실패하였다.
1895.3.29 일련종 (사노)가 승려의 도성출입금지를 해제하는데 일조하였다.
1896.7월 조선조 이후 처음으로 도성 안(원동)에서 무차대회를 하게 되었다.
1897~1910, 구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의 조계종 구한말 대한제국까지는 남북총섭시대(南北總攝時代)의 선종과 교종으로 나뉘어졌는데, 선종은 조계종, 중신종, 시흥종이 있었다. 조계종사에서는 근대불교를 구분한다.
1902 고종이 ‘국내사찰현행세칙’을 제정하였다.
1903 1. 국가에서 일본불교활동과 확산을 견제하고 한국불교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 원흥사를 창건하였다. 이때 선교양종의 통불교로 하고 견성성불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식민정책은 시작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 한일 불교의 연합적 정책이 왕성해졌다.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일 본불교가 시행했던 사업의 목적은 한국을 병합하고 일본 불교를 선전하는 것이었으며, 나아가 일본의 문물을 조선에 이식하고 민족을 유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삼륜정일의 한국포교에서는 일본 정부가 일본 불교인들에게 조선 교화에 대한 지시를 밝히고 있다.
1. 일본의 혼(魂)을 발휘해서 국민의 대 발전을 위해 심심철묘(深深徹妙)한 대무진(大 無盡)의 종교적인 진력에 의해서 건전한 활력을 주는 일.
2. 일한인의 융화(融化)를 꾀하는 일.
3. 한인에게는 일본인에 대한 오해를 풀고 일본과 일본인을 향해서 오직 호감을 갖게 하는 일들을 강조하였다.
1907년 오촌원심은 한국정부를 통하여 30인을 선정하게 하였고,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불교도들도 개화와 근대화 서구문물의 유입의 변화를 격어면서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에 의한 자각과 반일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불교현대화를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불교의 근대화를 답습하거나 친일적 결과로 나타났다.
1908년 원종대표 이회광은 조동종과 연합하려고 했으므로 수좌 중심의 임제종단이 성립되었다.
1909년 전조선 승려대표 김동선, 김만우 등 60여명을 일본의 관청사무소와 일본의 근대화 된 불교 현황을 시찰하게 했다. 그 외에 정토진종, 임제종 일련종, 천태종, 진언종 등 모든 종파들이 학림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조계 종지 회복을 위한 정화운동의 대두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종교 정책은 민족종교를 부패시키고 정신적으로 일본에 예속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불교계에서는 일본강점기의 영향 하에서 각 본사는 대처 승려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사찰은 고유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한국불교가 이어온 전통 수행풍도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당시 교단의 형태는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일본의 한국침략과 더불어 민족의 주체성을 말살하려는 식민지화 정책의 비호 아래, 파계환법자(破戒換法者)들이 사찰을 장악하고 교단에서 당당히 호령하게 됨에 그들의 수효는 순식간에 늘어갔고, 이때부터 불교는 타락의 길로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1910년 백용성스님이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써서 기독교에 대해서 우리 선종에서는 임제선사의 종지를 거양하였음을 천명하고 교리적 반박과 변론을 하였다.
1912년 5월 백용성스님과 한용운스님은 현 인사동에 ‘조선임제종 중앙 포교당’을 설립하였지만 1911년 사찰령을 발표한 일제는 30본 말사 제도로 통치하고 한국승려의 종단성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1919년 ‘승려독립선언서’
1919년까지 일제 총독부는 종교통제 제도 법규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조선승려들은 선사들 중심으로 한국불교 전통수호에 노력했다.
1920~1945년까지는 민족불교의 시련과 극복의 시기였다.
1920년부터 1950년대에 민족의식의 고양과 불교의 근대화에 대한 운동을 하였다.
1921년 선학원 창립
1926년 백용성스님의 대처금지의 건백서 제출
1926년 대처식육을 허용하는 사법을 제정하여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주권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근대역사
조선 500년의 억불상황 (천대받던 불교) 속에서도 서릿발 같은 청정승가의 전통이 일제와 일본불교의 강요와 영향 아래 왜색화 되어 말법현상이 나타났다.
일제 강점기, 광복 좌우 대립, 6 ·25, 4 ·19, 5 ·16 등이 이어졌다.
1928 03. 14~17 전국학인대회 각황사(覺皇寺) 개최
1930년 청담스님은 만공스님 회상으로 가서 한국불교에 대한 광범위한 의견을 청취
1930년 선의 대중화와 선학원 운영
1934년 12월 재단법인으로 전환,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승인 받음
1934년 청정승풍을 회복하려는 불교정신으로 선리참구원을 설립하여 종헌을 선포하다.
1935년 3월 조선불교 선종(선학원)을 창종 함
1935년부터 불교정화 대안으로 총림을 설립할 것을 검토하였다.
1935 03. 07~08 조선불교 선종 수좌대회
1937년 사찰령 제정 공포한 데라우치가 후임 미나미지로가 본산 주지 회의에 참관한 청담스님이 “불법에 의하면 비구승 한 사람을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하였거늘 데라우치 총독은 비구승 수천 명을 파괴시켰으니 무간지옥밖에 갈 곳이 없다.”고 하는 선지와 법력에 감화를 받았다고 하였다.
1941 02. 26 10일간 유교법회
1941년 선학원(중앙선원)에서 청정 승풍의 회복과 전통 부처님의 선 맥을 계승하려는 목적 으로 유교법회를 개최 만공스님 동산스님 법문
1941년 선학원에서 송만공, 박한영, 이청담, 강석주, 윤고암, 정금오, 채용서, 하동산, 국묵담, 김적운, 이효봉, 김자운 등이 청정승풍 진작과 계율수호법회를 열었다.
1942년 선학원에서 경허집을 간행해서 전통 선맥을 계승하는 이념을 전하였다.
1942년 선학원 보도에 의하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사찰령을 제정해서 31본산, 일본불교의 본 말사 제도를 이식한 총독은 사찰재정을 장악하고 입법권과 인사권을 장악 한 후 일본처럼 한국승려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먹고 결혼하기를 종용하였다.
“한국불교의 발전에 공이 컸던 데라우치 각하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갔을까?”라고 하자 그곳에 모인 주지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데라우치가 독실한 불교도이므로 극락 에 갔을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중에 만공스님이 “불법에 의하면 비구승 한 사람을 파계시켜도 무간지옥에 떨어진다 하였거늘 데라우치 총독은 비구승 수천 명을 파괴시켰으니 무간지옥 밖에 갈 곳이 없소.” 라고 하였다.
1945~1962년은 불교의 자주화와 교단개혁의 시기
1945년 독립한 후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9월 서울 태고사에서 전국 승려대회를 개최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민족분단의 전쟁을 격은 한국은 여전히 정치와 사회 제반기능에 일본강점 기의 잔존이 남아있고 사상적으로는 민주와 공산, 종교적으로는 서구 종교와 한국의 전통 종교, 유럽문화와 유교문화 등 문화충돌에 의해서 혼돈을 격고 있었다.
1946년에서 1947년 봉암사 결사를 통해서 당대의 성철, 자운, 우봉, 향곡, 원산, 법전, 성 수, 혜암 등의 선사 20여명과 함께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결사의 의지를 갖고 3년 결사를 시작했다. 불공과 천도제를 하지 않고 선농일치로 정진하고 가사 장삼 발우를 개선하였다. 이러한 규칙을 ‘공주규약’ 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사칙이 엄해서 대중이 떠나고 1948년에는 2-30명에 달했다. 즉, 청담, 성철, 자운, 향곡,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우봉, 도우, 보경, 보안, 웅산, 청안, 혜명, 일도, 보문, 홍경, 종수스님 등이다. 이러한 불교의 수행풍토는 신도들의 의식에도 파급되어 신도들은 보살계를 받고 스님에 대한 3배 예의가 이때부터 시작하였다.
1946년 이후 가을 봉암사에서 총림에 대한 논의
1946 ~1951 가야총림 결성
1947~ 1950 백양사의 고불총림 결성
1947~ 1950 봉암사 결사
1947년 가야총림이 가시화, 가을 대장경을 인수하여 청담스님과 성철스님은 봉암사 결사를 수행 한다.
1950년 6· 25전쟁으로 인해서 정화운동이 중단되었다.
1952년 청담스님은 서울로 올라가서 불교 정화를 시작하였다.
1954년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서 총림창설을 건의하였고,
1954~ 1962 정화와 분규
1954년 5월 20일 이승만대통령의 ‘유시’에 의하여 행정적으로 착수할 수 있었다.
1954년 11월5일 선학원의 비구 80명은 태고사를 진입 점거하였다. 태고사에 조계사 간판과 조계종 중앙총무원 간판을 부착하고 종권 인수를 요청하였다. 11월 20일에서 임시 중앙종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비구승 집행부가 수립되었다. 12월부터는 전국 비구 · 비구니대회를 개최하여 정화를 재결의 하였다. 12월 25일 정화추진 대책 안을 작성하고 정부에 제출하였다. 내용은 교단정화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대처승은 인정하지 않고 정통 구족계를 수지한 비구 · 비구니이어야 하며, 대중은 율장에 의해서 처분한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1955년 3월 서울 조계사에서 총림이 수용되었다.
1955년 1월 태고사 점거가 진행됨에 따라서 종단은 진공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중재안을 내게 되었는데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이다. 이 위원회는 문교부와 내무부가 공동으로 작성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이효봉, 박인곡, 이청담, 윤월하, 손경산의 5인의 스님이 대표가 되어서 승려자격을 명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독신이어야 한다.
2. 삭발염의 해야 한다.
3. 수도를 해야 한다.
4. 20세 이상이어야 한다.
5. 고기와 술을 먹지 않는다.
6. 살생과 거짓말과 사음과 욕을 하지 않는 4바라이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7. 만 9년 이상 승단 생활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 원칙에 의해 문교부와 내무부장관에게 승니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1955년 5월 18일 사찰정화대책 실시요령을 발표했다.
1955 06.09~14 조계사에서 사부대중 347명과 정화불사 성취단식 묵언 기도.
1955년 6월 30일 까지 승려 8원칙의 자격을 가진 자로 사찰 주지 및 사찰 수호 책임자를 선출할 것. 1955년 6월30일 까지 새로 선출된 사찰 주지 및 주요 간부 명단을 문교 내무부에 각 2통씩 제출하여 주지 인가증을 얻을 것.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조계종 종헌을 완성하고 중앙 임원을 선출했다.
1955년 8월22일 19개 중심사찰 주지 인허신청서를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대처승들의 저항에 의해서 장애가 있었지만 봉은사와 개운사 내지 320여 개의 사찰을 비구승 측이 접수하게 되었다.
1956 01.05 조계종 종회의장 선출
1960 01.01 종단 기관지 대한불교 창간
1960년대 초반과 중반에는 선학원에서 교단운영 안을 제안하여,
1962년 통합종단의 출범, 교단의 정비
1962~1999년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성립과 발전의 시기
1962년은 불교통합종단의 정화운동 시기이다. 정화운동의 배경은
1. 일제 강점기 총독부의 대처와 육식 허용에 의한 계율의 전통을 상실한 점,
2. 식민지 권력에 편입된 전통사찰의 재정과 문화유산 손실,
3. 총독부의 임명에 의한 친일 본사주지와 식민정책에 의한 승려의 친일화,
4. 승려의 수행풍토가 상실되고 세속화의 급진적 진행,
5. 청정 수행수좌의 공간 부족과 선원의 축소의 폐단이 발생했다.
1962년 조계종의 성립 과정
청담스님이 문교부에 제출한 종헌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종단을 병합한 것은 한국불교의 특색이라고 하였으며, 종명을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하였다. 또한 종지는 석가세존의 상구보리하화중생하고 근본 교리를 존중하고 직지인심 견성 성불하여 전법도생 한다.
소의경전은 (금강경)과 (전등번어)이며 경전연구와 염불 송주의 수행을 한다고 하였다. 제6조에 조계 혜능선사의 법계와 서당 지장선사의 심인을 받은 도의국사를 종조로 하고 고려의 태고 보우국사를 중흥조로 하여 사자전승의 법맥을 계승하며 전법게(傳法偈)를 수수(授受)하여 법맥을 상승한다. 이 종헌을 기준으로 한국의 간화선이 조계종풍의 근간인 것을 알 수 있다.
1964 01.26 제6회 중앙종회에서 집행방향 결정, 총림을 위시한 교육문제는 행정부에 의임하고 재래 강원은 존속시키며 진보적인 교육은 승가대학의 체제가 확립 될 때 까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에 두어 교육하고, 제복, 기숙사, 학비 등 제반 문제는 총무원에서 방안을 마련토록 일임키로 한다.
1965 00.00 동국대역경원은 (장아함경)의 한글 번역을 시작으로 총 318권의 우리말 대장경 사업을 펼쳤다.
1967년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여 현재의 해인사 총림을 완성하였다.
1967 05.25 서울 시민회관 불교도 대표자 대회
1968 04 종교협의회 설립, 불교 청담스님,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 기독교 한경직 목사
1971 주간 도선 법보 창간
1977 포교 법을 제정공포, 포교원 개원
1979 월간 여성 불교 창간
2001 고려대장경을 한글대장경 전산화 사업
2002 고려대장경 동판
2002년 템플스테이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활성화되었으며, 10개 사찰에서 시작한 템플스테이 시설이 2013년 100여 개로 확대
달마 ???~528 인도, 안심이 도다.
원효스님 617~686 원효는 교학불교의 전통을 화쟁 시켰다.
의상스님 625~702
혜능스님 638~713 중국, 자성청정심이 도다.
마조스님 709~788 중국, 평상심이 도다.
백장스님 720~814
임제의현 ???~867
의천대각국사 1055~1101 (고려중기) 화엄과 천태교학의 입장에서 선불교를 통합했다.
지눌보조국사 1158~1210 지눌은 선불교의 입장에서 화엄교학을 통합하였다.
태고보우국사 1301~1383 (고려 말 조선초기)
무학대사 1327~1408 (고려후기)(주자학과 성리학은 실천 윤리를 강조하면서 불교를 비판)
서산휴정스님 1520~1571 선불교와 교화불교를 유불교삼교를 통합시켰다.
사명유정스님 1544~1610
백용성 스님 1864~1940
만공 스님 1871~1946
만암 종헌 1876~1956
동산 혜일 1890~1975
천담 스님 1902~1971 11월19일 열반 세수70세 법랍 45세 사리 8과를 남김
운허 용하 1892~1980 11. 18
만공 월면 1946~1972
기화 스님은 불교적 입장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를 통합시켰다.
※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불공드리는 방법을 가르쳐줄지언정 대신 불공드려서는 안 된다.
※ 마음을 깨치고 나면 부처님의 법문까지도 다 버려야 하는데, 미신 · 그릇된 법· 법 아닌 법을 버려야 한다.
인욕: 인욕은 욕된 것을 참고 용서하는 인욕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한 번 참으면 내가 행복해지고, 두 번 참으면 가족이 행복해지고, 세 번 참으면 세계가 평화롭다.”
일본불교의 역사
일제 강점기 일본불교의 폐단과 정화운동
일제강점기 일본불교의 한국유입과 영향
1865년(명치원년)~1912년(명치44년) 까지는 근대 일본불교시대로서 유신불교, 계몽불교, 근대불교라고 한다. 이 시대의 일본불교의 특징은 절대주의의 전제적 국가체제하에 정교관계의 체제가 혼란한 시기이다. 즉, 절대주의적인 중앙집권국가가 확립되고 일본이 민족통일적인 시민사회로 들어가는 단서를 열어 놓은 왕권복고의 시기이다.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1537~1598)가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1598년 사망 이후, 1603년 임란에 참여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에도(지금의 동경) 묘부(墓府)를 세웠다.
1600년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시다 미츠나리 (1560~1600), 가토 기요마사 (1562~1611), 우키타 히데이에 (1572~1655) 등의 서군과 도쿠가와 진영의 동군 간에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서군은 대패하고 지금의 시모노세키로 피신 하였다.
1609년 2월 오키나와를 점령한 이후 무역을 통해 부유한 상인 세력이 대두되고, 서양의 문 물과 선교사들이 잠입하면서 막부는 점차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1867년 대정봉건(大政奉建)으로 264년 동안의 봉건시대는 끝이 났다.
1868년 명치유신을 단행한 이후 막부세력이었던 무사계급은 경제력 약화를 타개하기 위해 3번에 걸쳐서 정한론(政韓論)을 주창했다. 즉,
1873년 다카모리 사이고 (1828~1877)
요시다 쇼인 (1830~1859)
이토 히로부미 (1841~1909)
야마가타 아리토모 (1838~1922)
가쓰라 다로 (1848~1913)
데라우치 마사다케 (1852~1919) (초대 조선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 (1850~1924) (2대 조선 총독) 등이다.
이토 히로부미 등 유신파는 메이지 헌법과 관료제의 기초를 세우고 징병제로 근대적 군대를 육성했다. 이들은 유럽에 유학하면서 일본 근대화를 이끌었으며,
1876년 대곡파를 위시로 10여종의 일본불교의 각 종파는 해방시기까지 조선에 포교소를 개설하여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일본 각 종파는 일제의 지휘 하에 한국에서 정신교화까지 하다가 해방과 함께 일제의 위정자들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1885년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총리에 오르며 내각책임제를 확립했다.
1876년 일본불교교단을 봉건시대의 국가적 보호로부터 벗어나서 절대주의 정권에 편성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에 대응하여 일본불교는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을 결성한다.
1876년 4월 진종(眞宗)이 종규강령(宗規綱領)을 제정하고 본산과 말사를 직결하는 본 말사 제도를 완성했다. 이 진종의 교단체계를 답습하여 일본 각 종파는 근대불교를 막부 세력의 정한론에 편승하여 완성하게 된다.
1877년 한반도에 동본원사(東本願寺)의 부산포교소를 설치(設置)하였다.
1884년까지 일본불교는 정체(停滯) 내지 공백(空白)시기였다.
1890년 명치정권은 신도 국교 화를 선포하고,
1884년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조선은 김옥균, 홍영식, 박영호 등이 개화를 위한 갑신정 변을 일으켰지만 실패했다.
1894~95년 청일전쟁
1894년~1895년에 걸쳐서 일본은 대륙침략을 시작했는데,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주장한 “이익선(국가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이라는 논리로 무력 합병을 주장하고, 그 이익선의 초점은 조선으로부터 만주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시베리아에서 중국 대륙으로, 그리고 다시 동남아시아로 확대한다.”는 개념을 완성했다.
1898년 광주개교 이후 각 종파가 원산, 인천, 평양과 경성에도 포교소를 설치하였는데, 그 들의 포교목적 및 방법은 다음 보고서를 보면 알 수 있다.
1. 식산흥업을 장려하여 가능한 물질적 개발에 힘쓰는 방법을 모색한다.
2. 승속을 불문하고 지방 저명인사에게 일본을 시찰케 해서 개발의 보급을 도모한다.
3. 학교를 설립하여 청년을 개발한다는 것이다.
학교를 세우고, 조선인이 의심하지 않도록 조선인 교사 한 명을 채용하고 수업료를 면제하며 학용품도 무료로 제공하면서, 재래의 학업과 함께 점차 계산 · 지리 · 역사 등을 수업시키면서 마지막에 종교윤리를 교육시켜서 친일하게 하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1899년 10월 사원의 호적법을 시행하고 전지와 산림까지 국유지로 전환하였다. 명치유신 정책에 따른 근대 일본 불교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근대적 자유와 민권운동을 주장하는 기독교 사상과 문화의 수용의 시기였다.
2. 서구열강에 대한 명치유신이 발표됨에 따라서 신도가 국교가 되어 특권이 상실 되었다.
3. 일본 내에서 유권 회복과 종문간의 분쟁으로 혼돈의 시기였다.
4. 서구문물에 병합해서 격변하는 근대적 시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5. 제국주의와 쇄국주의를 모방하는 명치제국에 편승하였다.
6. 서구 열강의 기독교 선교에 자각하는 사회화와 교학과 사상을 정리하다.
7. 청일전쟁(1894~95)후 근대사상형성 과정에서 각 교단의 재편성이 시도되어졌다.
8. 초기에는 종파 협동의 결사활동이나, 재속불교자의 통불교 형식이었지만 중기에서는 경전의 원전연구를 통해서 불교의 사상 구조를 재검토하고 환속불교와 재가불교의 세속화된 국가권력형의 불교로 전환되었다.
이와 같은 절대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한 명치정권은 신도(神道) 취중평전파(就中平田派)를 국교로 하여 서구 열강의 사상과 종교로부터 일본 자국민을 보호하고 왕정부활(王政復活)과 제정일치(祭政一致)를 목적으로 신불분난령(神佛分難令), 대교선포운동(大敎宣布運動) 등의 신정권(新政權)의 지배기구를 완성했다.
1904년 5월 종교가대회에서 “어떻든 종교인들도 일치단결해서 탄환(彈丸)을 하도록 ···.”이라고 하는 전쟁협력을 확인한 결의를 하였다.
1907년에서 1909년에 걸쳐서 거의 모든 일본 종파가 포교활동의 인가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방에 의한 강점기 이후에는 어용종교화(御用宗敎化)에 규정적(規定的) 역할(役割)을 주도적으로 완수(完遂)하였다. 이러한 불교계가 명치정권의 국가주의에 편승한 것은 명치초기 이래 계속해 온 기독교 배격과 불교국익론을 위한 것이다.
즉, 근대 유럽 국가들이 근대화를 성립한 이후에 세계대륙을 침략하고 정신문화 이식을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였던 사실을 답습하여 아시아 식민지 정책에 이용했던 것이다.
1910년 불교, 신도, 기독교가 모여서 삼교일치의 ‘황운(皇運)을 부익(扶翼 )하고, 더욱 국민 도덕의 진흥(振興)을 꾀할 것’을 결의한 일 등은 불교에 한하지 않고 일본의 종교계전체가 권력과 대결하기보다는 협력하였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1918년 각 일본불교의 49개 종파가 모여서 ‘불교호국단’을 설립하고 규정과 시행법을 만들었다.
대만불교
대만은 서구열강의 식민지였다.
1517년 포르투칼 식민지
1624년 네덜란드 “
1641년 스페인 “
청일 전쟁이후 50년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지금은 천정 계율로 국민들의 신뢰를 받았다.
교육안전 자원부 통계
2003년 기준
전국 유치원 수 8,292개
불교 유치원 123개
기독교 유치원 5,000개
우학스님의 빛깔 있는 법문 중에서 100P 발취